국역태화선학대사전 10책(ㅎ)

국역태화선학대사전(國譯泰華禪學大辭典) 10책(ㅎ) 290쪽

태화당 2019. 12. 28. 08:08

革蚤跳蚤 虼蚤 林間錄上 睡裏虱子咬人 信手摸得革蚤

혁조(革蚤) 도조(跳蚤; 벼룩). 흘조(虼蚤; 벼룩). 임간록상. 수면 속에 슬자(虱子; )가 사람을 물어 손 닿는 대로 혁조(革蚤)를 모득(摸得; 더듬어 얻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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赫煌禪林疏語考證二 赫煌 詩註 赫赫 高明顯盛貌 煌煌 大明貌 禪林疏語考證二 收赫赫煌煌之焰散作恩光

혁황(赫煌) 선림소어고증2. 혁황(赫煌) 시주(詩註) 혁혁(赫赫) 고명현성(高明顯盛)한 모양이다. 황황(煌煌) 매우 밝은 모양이다. 선림소어고증2. 혁혁황황(赫赫煌煌)한 화염을 거두어 은광(恩光)을 산작(散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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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林寶訓音義 超凡亞聖曰賢 禪林寶訓一 聖賢之學 固非一日之具

() 선림보훈음의. 범부를 초월한 아성(亞聖)을 가로되 현(). 선림보훈1. 성현(聖賢)의 학문은 참으로 하루 만에 갖추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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絃歌用琴瑟等伴奏歌唱 宗門拈古彚集二十一 絃歌相和 節拍相隨

현가(絃歌) 금슬 등을 사용하여 반주(伴奏)하면서 가창(歌唱). 종문염고휘집21. 현가(絃歌)로 상화(相和)하고 절박(節拍)이 상수(相隨)한다.


玄覺】 ①(665-713) 唐代僧 溫州永嘉(位於浙江)人 俗姓戴 字明道 號永嘉玄覺 八歲出家 博探三藏 尤通天台止觀 後於溫州龍興寺側巖下自構禪庵 獨居硏學 常修禪觀 偶因左溪玄朗之激勵 遂起遊方之志 與東陽玄策共遊方尋道 至韻陽時 謁曹溪慧能 與慧能相問答而得其印可 慧能留之一宿 翌日卽歸龍興寺 時人稱之一宿覺 其後 學者輻湊 號眞覺大師 玄朗贈書招之山棲 師覆書辭退 先天二年(七一三 一說開元二年 或先天元年)十月十七日 趺坐入寂 壽四十九 賜諡無相大師 塔曰淨光 著證道歌一篇 梵僧傳歸天竺 彼皆欽仰目爲東土大乘經 又著禪宗悟修圓旨十篇 及觀心十門 永嘉集十卷 並盛傳于世 [宋高僧傳八 佛祖歷代通載十三 佛祖統紀十 傳燈錄五 五燈會元二] 五代法眼宗僧行言 署號玄覺導師 參行言

현각(玄覺) (665-713) 당대승. 온주(溫州) 영가(永嘉; 浙江에 위치) 사람이며 속성(俗姓)은 대(), ()는 명도(明道), 호는 영가현각(永嘉玄覺). 8세에 출가하여 3()을 널리 탐구했으며 특히 천태지관(天台止觀)에 정통했음. 뒤에 온주(溫州)의 용흥사(龍興寺) 곁 바위 아래 스스로 선암(禪庵)을 구축(構築)하고 독거하며 학문을 연마했는데 늘 선관(禪觀)을 닦았음. 우연히 좌계현랑(左溪玄朗)의 격려로 인해 드디어 유방(遊方)할 뜻을 일으켜 동양현책(東陽玄策)과 함께 유방하며 도를 찾았음. 운양(韻陽)에 이르렀을 때 조계혜능(曹溪慧能)을 알현(謁見)했으며 혜능과 서로 문답하고 그 인가(印可)를 얻었음. 혜능이 그를 머물러 일숙(一宿)케 했는데 다음날 곧 용흥사(龍興寺)로 돌아간지라 당시의 사람들이 그를 일컬어 일숙각(一宿覺)이라 했음. 그 후 학자가 복주(輻湊)하였으며 호가 진각대사(眞覺大師). 현랑(左溪)이 글을 주어 산서(山棲)로 그를 초대하자 스님이 복서(覆書; 편지의 회답. 返信)하고 사퇴(辭退)했음. 선천(先天) 2(713. 一說開元二年 혹은 先天元年) 1017일에 부좌(趺坐; 책상다리)하고 입적했으니 나이는 49. 무상대사(無相大師)란 시호(諡號)를 주었으며 탑은 가로되 정광(淨光). 증도가(證道歌) 1()을 지었는데 범승(梵僧)이 천축으로 돌아가 전하자 그곳에서 다 흠앙(欽仰)하며 제목하기를 동토(東土)의 대승경(大乘經)이라 했음. 또 선종오수원지(禪宗悟修圓旨) 10() 및 관심십문(觀心十門)ㆍ영가집(永嘉集) 10권을 지었는데 모두 세상에 왕성히 전함 [송고승전8. 불조역대통재13. 불조통기10. 전등록5. 오등회원2]. 오대 법안종승 행언의 서호(署號)가 현각도사(玄覺導師)니 행언(行言)을 참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