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태화선학대사전 10책(ㅎ)

국역태화선학대사전(國譯泰華禪學大辭典) 10책(ㅎ) 536쪽

태화당 2019. 12. 30. 08:19

洪忍禪師五代僧從琛 署號洪忍禪師 詳見從琛

홍인선사(洪忍禪師) 오대승 종침의 서호가 홍인선사니 상세한 것은 종침(從琛)을 보라.

) --> 

紅日三竿紅日高昇三竿 形容日出已久 續古尊宿語要三南堂興 紅日三竿猶作夢 淸風一枕許誰同

홍일삼간(紅日三竿) 홍일이 높이 떠올라 3(竿)이니 해가 나온 지 이미 오래임을 형용. 속고존숙어요3 남당흥. 홍일이 3(紅日三竿)인데 오히려 꿈을 꾸니 1()의 청풍을 누구와 함께함을 허락하나.

) --> 

洪入淸代臨濟宗僧 字大雲 廣濟(湖北武穴)余氏 投廬山東林山鐸眞在披緇 一日請益 得開導有省 在遷新安能仁 龍興 洪執勞不怠 及在遷化 石源雲繼席 雲遷二祖 請洪繼席不就 虛方丈以待賢 値歲饑荒 洪自枵腹 以給衆食 遐邇敬仰 [五燈全書一二補遺]

홍입(洪入) 청대 임제종승. 자는 대운이며 광제(호북 무혈) 여씨. 여산 동림 산탁진재(山鐸眞在)에게 투신하여 피치(披緇)했음. 어느 날 청익하자 개도(開導)를 얻어 성찰이 있었음. 진재가 신안 능인ㆍ용흥으로 옮기자 홍입이 집로(執勞)하며 게으르지 않았음. 진재가 천화함에 이르자 석원운(石源雲)이 계석(繼席)했고 운()이 이조(二祖)로 옮기면서 홍입에게 계석(繼席)을 청했으나 취임하지 않고 방장을 비운 채 대현(待賢)했음. 기황(饑荒)의 해를 만나자 홍입이 스스로 배를 비워() 중식(衆食)을 공급했고 하이(遐邇; 원근)가 경앙했음 [오등전서102보유].

) --> 

弘慈廣濟寺新志三卷 淸代湛祐撰 然叢輯 收在中國佛寺史志彙刊第一輯 弘慈廣濟寺位於北平內城之西 在元代稱報恩洪濟寺 萬松行秀 林泉從倫 相繼住持 至明憲宗時 賜額弘慈廣濟寺 現通稱廣濟寺 淸康熙(1662-1722)年間 湛祐建大悲壇 幷創修新志 發凡起例 廣輯文獻 後經然叢編輯整理爲三卷 前錄御制弘慈廣濟寺碑文 御書匾額 下分四門 建置圖 碑銘頌 傳記序 賦贊 跋 有淸康熙四十三年(1704)刻本

홍자광제사신지(弘慈廣濟寺新志) 3. 청대 담우(湛祐)가 찬()했고 연총(然叢)이 집()했고 중국불사사지휘간 제1집에 수록되어 있음. 홍자광제사는 북평 내성(內城)의 서쪽에 위치하며 원대(元代)엔 보은홍제사라 일컬었고 만송행수(萬松行秀)ㆍ임천종륜(林泉從倫)이 상계(相繼)하여 주지했음. () 헌종 때에 이르러 사액(賜額)하여 홍자광제사라 했음. 현재는 통칭(通稱)이 광제사임. 청 강희(16621722)년 간 담우가 대비단(大悲壇)을 건립하고 아울러 신지(新志)를 창수(創修)했는데 발범기례(發凡起例; 全書의 요지를 설명하고 編寫體例擬定)하고 문헌을 광집(廣輯)했음. 후에 연총(然叢)의 편집과 정리를 경과하면서 3권으로 만들었음. 앞에 어제홍자광제사비문(御制弘慈廣濟寺碑文)과 어서편액(御書匾額)을 기록하고 아래에 4()으로 분류했으니 건치도(建置圖)ㆍ비명송(碑銘頌)ㆍ전기서(傳記序)ㆍ부찬(賦贊)과 발(). 청 강희 43(1704)의 각본(刻本)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