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태화선학대사전 10책(ㅎ)

국역태화선학대사전(國譯泰華禪學大辭典) 10책(ㅎ) 784-785쪽

태화당 2020. 1. 2. 09:32

虧踰潙山警策守遂註 虧者缺也 踰者越也 潙山警策 懇修齋戒 莫謾虧踰

휴유(虧踰) 위산경책 수수주(守遂註). ()란 것은 결()이며 유()란 것은 월()이다. 위산경책. 재계(齋戒)를 간절히 닦고 헛되이() 휴유(虧踰)하지 말아라.

) --> 

休靜】 ①唐代曹洞宗僧 生卒年不詳 居於京兆華嚴寺 洞山良价法嗣 因後唐莊宗之召請 而大振曹洞宗 敕諡寶智大師 [祖堂集八 傳燈錄十七] (1520-1604) 朝鮮國僧 平安南道安州人 俗姓崔 字玄應 號淸虛堂 別號白華道人 楓岳山人 頭流山人 妙香山人 曹谿退隱 因久住妙香山 世稱西山大師 師九歲喪母 翌年父歿 乃隨郡守李思曾上京就學 後依崇仁硏讀經論 次參學於靈觀 隨侍三年 一夜 超脫文字之障礙 出家受具足戒 後歷遊諸山名刹 三十歲 參加明宗僧科復舊第一試及第 累進至禪敎兩宗判事 明宗十二年(1557)解印綬 入金剛山 後經頭流山智異山 移居妙香山 弟子滿堂 宣祖二十六年(1592) 日本軍攻打朝鮮時 宣祖蒙塵於義州龍灣 師分遣弟子起義僧兵 屢樹軍功 祖還都後請隱 王賜號國一都大禪師禪敎都總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 常往來於妙香 智異 楓岳諸山 道譽漸高 宣祖三十八年(1604)示寂 世壽八十五 示寂後 弟子鞭羊彦機撰行狀(淸虛集卷末所載) 李延龜 張繼 李秉模 徐有鄰等皆爲撰香山碑銘 其門派之盛 近古所未聞 嫡嗣松雲惟政 與鞭羊彦機 逍遙太能 靜觀一禪 被稱爲四大弟子 其後皆自成一派 著有禪家龜鑑 禪敎釋 禪敎訣 雲水壇 三家龜鑑(以上各一卷) 淸虛堂集四卷等 其中 三家龜鑑主張儒佛道三敎一致之說 淸虛堂集爲其詩文集 四卷本之外另有二卷本 由此文集可窺知師主張禪敎不二 禪淨一致之要略 [海東佛祖源流 東師列傳二 鞭羊堂集二西山行蹟草 霽月堂大師集上淸虛大師行蹟 朝鮮禪敎史]

휴정(休靜) 당대 조동종승. 생졸년은 불상이며 경조 화엄사에 거주했고 동산양개(洞山良价)의 법사. 후당 장종(莊宗)의 소청(召請)으로 인해 조동종을 대진(大振)했음. 칙시(敕諡)가 보지대사 [조당집8. 전등록17]. (1520-1604) 조선국승. 평안남도(平安南道) 안주(安州) 사람이며 속성(俗姓)은 최()며 자()는 현응(玄應)이며 호는 청허당(淸虛堂)이며 별호(別號)는 백화도인(白華道人)ㆍ풍악산인(楓岳山人)ㆍ두류산인(頭流山人)ㆍ묘향산인(妙香山人)ㆍ조계퇴은(曹谿退隱). 오래 묘향산에 거주함으로 인해 세칭(世稱)이 서산대사(西山大師). 스님은 9세에 어머니를 잃었고 다음해에 아버지가 죽었음. 이에 군수(郡守) 이사증(李思曾)을 따라 상경(上京)해 취학(就學)했음. 뒤에 숭인(崇仁)에게 의지하며 경론을 연독(硏讀)했고 다음으론 영관(靈觀)에게 참학(參學)했는데 따라 모시기가 3년이었음. 어느 날 밤 문자의 장애를 초탈했고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음. 후에 여러 산의 명찰(名刹)을 역유(歷遊)하였음. 30세에 명종(明宗)이 승과(僧科)를 복구(復舊)한 제일시(第一試)에 참가하여 급제(及第)하였고 누차(屢次) 진급(進級)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에 이르렀음. 명종 12(1557) 인수(印綬. 인끈)를 풀고 금강산에 들어갔음. 후에 두류산(頭流山)ㆍ지리산(智異山)을 지나 묘향산(妙香山)으로 이거(移居)했으며 제자가 만당(滿堂)했음. 선조(宣祖) 26(1592) 일본군이 조선을 공타(攻打)했을 때 선조가 의주(義州)의 용만(龍灣)으로 몽진(蒙塵. 임금이 피란감)하자 스님이 제자를 분견(分遣)하여 의승병(義僧兵)을 일으켜 누차 군공(軍功)을 세웠음. 선조가 환도(還都)한 후 은거(隱居)를 청하자 왕이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總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란 호를 주었음. 늘 묘향(妙香)ㆍ지리(智異)ㆍ풍악(楓岳) 여러 산을 왕래하며 도예(道譽)가 점차 높아졌음. 선조 38(1604) 시적(示寂)했으니 세수(世壽)85. 시적 후 제자 편양언기(鞭羊彦機)가 행장(行狀; 淸虛集卷末所載)을 지었음. 이연구(李延龜)ㆍ장계(張繼)ㆍ이병모(李秉模)ㆍ서유린(徐有鄰) 등이 다 향산비명(香山碑銘)을 지었으며 그 문파(門派)의 왕성함은 근고(近古)에 듣지 못한 바임. 적사(嫡嗣)인 송운유정(松雲惟政)과 편양언기(鞭羊彦機)ㆍ소요태능(逍遙太能)ㆍ정관일선(靜觀一禪)은 사대제자(四大弟子)로 일컬어짐을 입으며 그 후에 다 스스로 일파를 이루었음. 저서에 선가귀감(禪家龜鑑)ㆍ선교석(禪敎釋)ㆍ선교결(禪敎訣)ㆍ운수단(雲水壇)ㆍ삼가귀감(三家龜鑑) (이상 각 1)ㆍ청허당집(淸虛堂集) 4권 등이 있음. 그 중에 삼가귀감은 유불도(儒佛道) 3()의 일치(一致)를 주장하며 청허당집은 그의 시문집(詩文集)이 되며 4권본 외에 따로 2권본이 있음. 이 문집으로 말미암아 가히 스님이 주장하는 선교불이(禪敎不二)ㆍ선정일치(禪淨一致)의 요략(要略)을 엿봄 [해동불조원류. 동사열전2. 편양당집2서산행적초. 제월당대사집상청허대사행적. 조선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