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二二九】襄州洞山*守初禪師 因雲門問 近離什麽處 師云 *查渡 門云 夏在什麽處 師云 湖南報慈 門云 幾時離彼中 師云 八月二十五 門云 放汝三頓棒 次日師却問云 昨蒙和尙放某三頓棒 未審過在什麽處 門云 飯帒子 江西湖南 便伊麽去 師於言下有省
法眞一頌 平生心膽都傾盡 三頓未明何過愆 末後蒙師親示誨 方知公案本來圓
佛陁遜頌 問答雖然覿面酬 脚跟猶跨木欄舟 當時三頓那輕恕 大小雲門未到頭
東林惣頌 問答由來未薦幽 韶陽三頓且輕酬 晩來拶出金剛眼 萬里無人獨步游
保寧勇頌 三頓棒時打不迴 䥫門重擊鏁方開 堪嗟不蓄一粒米 十字路頭接往來
智海淸頌 天高難側手 海闊少知音 要識雲門老 精光百煉金
慈受頌 去年八月離湖南 行盡千山與萬山 不喫雲門三頓棒 安知虎體有玄斑
崇寧勤頌 見兎放鷹 因行掉臂 *赤骨歷窮 方圖富貴 放三頓棒尙遅疑 再挨方識利頭錐 單提獨脚機關外 明眼衲僧猶不會
佛眼遠頌 奉君三頓曲周遮 屈辱雲門老作家 渡水穿雲五湖客 欲將何物當生涯
雪竇顯拈 雲門氣宇如王 拶着便冰消瓦解 當時若據令而行 子孫也未到斷絶
上方岳擧 雲門大師勘襄州洞山初和尙 近離什麽處 至飯帒子江西湖南 惣恁麽商量 洞山於言下省悟 禮拜起來 向雲門道 某甲向後 去無人煙處 開个飯店子 不種一莖菜 不蓄一粒米 接待南北往來 與他揭却膱脂帽子 脫却鶻臭布衫 敎他洒洒地作箇師僧去 雲門大師云 身如葫蘆子 太開得許太口 師云 雲門大師 也是久日*樺來脣 洞山未免勞心
法眞一擧此話 連擧雪竇拈 師云 當初洞山云 某甲過在什麽處 雲門便好打了趂出 然而盡法無民 雲門若不入水入泥 洞山何得悟去 諸仁者 放開把定 各是一家 理當卽行 固應無咎
慈明問黃龍南禪師曰 *書記學雲門禪 必善其旨 如曰放洞山三頓棒 洞山于時 應打不應打 公曰 應打 慈明色莊而言 聞三頓棒聲 便是喫棒 則汝自旦及暮 聞鵶鳴鵲噪 鍾魚皷板之聲 亦應喫棒 喫棒何時當己哉 南公瞠而却 慈明曰 吾始疑不堪汝師 今可矣 卽使拜 南公拜起 慈明理前語曰 脫如汝會雲門意旨 此則趙州甞言 臺山婆子被我勘破 試指其可勘處 南公面熱汗下 不知答 趨出
枯木成上堂擧此話云 雲門解向滔天白浪中 張羅布綱 無限錦鱗赤尾跛鼈盲龜 盡落網中 其間或有透得網者 便乃拏雲*㸕浪 *戴角擎頭 香山今日 効古人之作 遂畫一圓相 召云 大衆 如今還有透得者麽 良久云 釣舩載到瀟湘岸 氣咽無聊問白鷗
海會端拈 大小雲門 被洞山一問 直得額頭汗出 口裏膠生
霅溪益拈 倒地方知初盞釅 當時若見雲門云 放你三頓棒 解道得箇不合起動和尙 也免得江西湖南一例受屈 然洞山若不問破雲門 也是瘂子喫苦瓜
承天懷上堂擧此話云 大衆 此則因緣 諸人作麽生會 向日衆中商量異解 莫知其數 有云 雲門見伊漏洩天機 便蓋覆將去 其奈洞山 皮下有血 眼裏有睛 雲門直得不奈其何 却言及江西湖南 大似指東劃西 與麽說話 可殺傍若無人 有云 江西湖南見處 未必不及雲門 有云 雲門也是平地起波瀾 有云 雲門見伊不會 着甚死急 更說江西湖南 累及他人 似此般批判最多 不能盡擧 殊不知 古人一期方便 只是老婆心切 山僧 而今不惜眉毛 爲諸人一一注出 我道 雲門見伊恁麽來 公驗分明 遂乃放過洞山 不顧來機 暗得便冝 便合禮謝 何得叉手近前 *口喃喃地 致得拖抹江西湖南 大似龍鬪魚傷 山僧與麽說話 諸人還會麽 若會去 截斷兩頭 歸家穩坐 若不會 未收安南 莫憂塞北 以拂子擊禪床
竹庵珪小叅擧此話云 大衆 須是恁麽一迴始得 若不如此 無量劫來業識 如何淨盡去 雲門老漢 只管駈耕夫之牛 奪飢人之食 殊不知*持髻落別人手裏 猶賴洞山未是咬人師子 大似得个驢兒便喜歡 終不免遭人笑恠 山僧道 痛施三頓 如何尙未眼開 飯帒子邊 自把一生折倒 如今還有不受人謾底麽 試出來 山僧爲你證據 卓拄杖云 醉眼有花書字大 老人無睡*漏聲長 珎重
松源上堂擧此話云 諸方盡謂 父子投機 啐啄同時 殊不知雲門正令不行 却向草窠裏輥 致令洞山打失鼻孔 直至如今無摸索處
密庵傑擧此話云 雲門大師 放去大奢 收來大儉 末後殷勤 何不與他本分草料 致令和泥合水 洞山伊麽悟去 也是杓卜聽虛聲
●第一二二九則; 此話出聯燈會要二十六 傳燈錄二十三 ▲碧巖錄第十二則 洞山初參雲門 門問 近離甚處 山云 渣渡 門云 夏在甚麽處 山云 湖南報慈 門云 幾時離彼中 山云 八月二十五 門云 放爾三頓棒 參堂去 師晚間入室親近 問云 某甲過在什麽處 門云 飯袋子 江西湖南便恁麽去 洞山於言下豁然大悟 遂云 某甲他日向無人煙處 卓箇庵子 不蓄一粒米 不種一莖菜 常接待往來十方大善知識 盡與伊抽却釘 拔却楔 拈却膱脂帽子 脫却鶻臭布衫 各令灑灑落落地 作箇無事人去 門云 身如椰子大 開得許大口
●守初; (910-990) 宋代雲門宗僧 鳳翔(今屬陝西)傅氏 年十六依渭州崆峒志諗薙髮 詣涇州淨圓受具 後至長沙 依雲門文偃悟旨 出住洞山 法道大宏 太平興國六年(981) 朝廷賜徽號紫衣 住山四十年 有語錄行世 [禪林僧寶傳八 續傳燈錄十二 五燈會元十五]
●查渡; 底本作杳渡 傳燈錄二十三作楂渡 五燈會元十五聯燈會要二十六作查渡
●赤骨歷; 卽赤骨力 一無所有 赤裸裸 多喩蕩盡俗情妄念 明悟本來面目
●樺來脣; 下一三九二則 拈頌說話曰 樺來唇者 樺來唇狗來腮等 盖古人俚語耳 義則也大無端也
●書記學雲門禪; 聯燈會要十三黃龍慧南 師久依泐潭澄禪師(嗣五祖師戒 戒嗣雙泉師寬 寬嗣雲門) 分座接物 名振諸方 偶同雲峰悅禪師 游西山 夜話雲門法道 悅云 澄公雖是雲門之後 法道異矣 …… 卽謁福嚴賢 賢命掌書司 俄賢卒 郡守以慈明補之 旣至 目其貶剝諸方 件件數爲邪解 師爲之氣索 遂造其室 明云 書記領徒游方 借使有疑 可坐而商略 師哀懇愈切 明云 公學雲門禪 必善其旨 (云云)
●㸕; 同攫
●戴角擎頭; 又作擎頭戴角 喩指衆人中傑出的人物
●口喃喃地; 形容多言貌 地 助詞
●持; 底本作特 當作持
●漏聲; 漏 漏壺 古代計時器
【一二二九】 양주(襄州) 동산(洞山) 수초선사(*守初禪師)가, 운문이 묻되 최근에 어느 곳을 떠났느냐 함으로 인해 스님이 이르되 사도(*查渡)입니다. 운문이 이르되 여름엔 어느 곳에 있었느냐. 스님이 이르되 호남의 보자(報慈)입니다. 운문이 이르되 어느 때 그 가운데를 떠났는가. 스님이 이르되 8월 25입니다. 운문이 이르되 너에게 3돈방(頓棒)을 놓는다. 다음날 스님이 도리어 물어 이르되 어제 화상이 모(某)에게 3돈방을 놓으심을 입었거니와 미심(未審)하오니 허물이 어느 곳에 있습니까. 운문이 이르되 반대자(飯袋子; 밥 자루)야, 강서니 호남이니 하면서 곧 이러히 가느냐. 스님이 언하에 성찰이 있었다.
법진일(法眞一)이 송하되 평생의 심담(心膽)을 모두 경진(傾盡)했는데/ 3돈에도 무슨 과건(過愆; 허물)인지 밝히지 못했다/ 말후에 스승이 친히 시회(示誨)함을 입자/ 비로소 공안이 원래 원성(圓成)한 줄 알았다.
불타손(佛陁遜)이 송하되 문답을 비록 그렇게 적면(覿面)하여 수대(酬對)했으나/ 발꿈치(脚跟)는 아직 목란주(木欄舟)에 걸터앉았다/ 당시의 3돈이 어찌 가볍게 관서(寬恕)했겠는가/ 대소 운문이 도두(到頭; 終極)가 아니다.
동림총(東林惣)이 송하되 문답의 유래(由來)가 유심(幽深)함을 깨닫지(薦) 못했거늘/ 소양(韶陽; 운문)의 3돈은 다만 가볍게 수대(酬對)했다/ 저녁에(晩來) 금강안(金剛眼)을 압박해 내니(拶出)/ 만 리에 사람이 없고 홀로 보유(步游)한다.
보녕용(保寧勇)이 송하되 3돈을 방(棒)할 때 때려도 선회(旋迴)하지 않더니/ 철문을 거듭 치자 자물쇠가 비로소 열렸다/ 가히 슬프구나 한 알의 쌀도 저축(貯蓄)하지 않고/ 십자로두(十字路頭)에서 왕래인을 접대하네.
지해청(智海淸)이 송하되 하늘이 높아 측수(側手; 旁邊)하기 어렵고/ 바다가 넓어 지음(知音)이 적다/ 운문로(雲門老)를 알고자 하느냐/ 정광(精光)이 백련(百煉)한 금이다.
자수(慈受)가 송하되 지난해 8월에 호남을 떠나/ 천산(千山)과 만산(萬山)을 행해 다했다/ 운문의 3돈방을 먹지 않았다면/ 어찌 호체(虎體)에 현반(玄斑)이 있는 줄 알겠는가.
숭녕근(崇寧勤)이 송하되 토끼를 보고 매를 놓고/ 다님으로 인해 팔을 흔든다/ 적골력(*赤骨歷)으로 빈궁(貧窮)해야/ 비로소 부귀를 도모한다/ 3돈방을 놓아도 오히려 지의(遅疑)하다가/ 거듭 애찰(挨拶)하자 비로소 예리한 침(利頭錐)을 알았다/ 기관(機關) 밖에서 독각(獨脚)을 단제(單提)해야 하나니/ 명안납승(明眼衲僧)도 오히려 이회하지 못한다.
불안원(佛眼遠)이 송하되 그대에게 3돈을 바쳤거늘 굽게 주차(周遮; 迂回)하니/ 운문 노작가를 굴욕케 했다/ 물을 건너고 구름을 꿰는 오호객(五湖客)이여/ 어떤 물건을 가져 생애에 당하려 하느냐.
설두현(雪竇顯)이 염하되 운문은 기우(氣宇)가 왕과 같아 찰착(拶着; 다그치다)하자 곧 빙소와해(冰消瓦解)로다. 당시에 만약 거령(據令)하여 행했다면 자손이 단절됨에 이르지 않았으리라.
상방악(上方岳)이 들되 운문대사가 양주(襄州) 동산초(洞山初) 화상을 감험하되 최근에 어느 곳을 떠났느냐 至반대자(飯帒子)야 강서니 호남이니 하면서 모두 이렇게 상량(商量)하느냐. 동산이 언하에 성오(省悟)했다. 예배하고 일어나 운문을 향해 말하되 모갑이 향후(向後)에 인가의 연기도 없는 곳으로 가서 저(个) 반점자(飯店子; 子는 조사)를 열어 한 줄기의 나물도 심지 않고 한 알의 쌀도 비축하지 않고 남북으로 왕래하는 이를 접대하되 그들에게 이지모자(膱脂帽子)를 걷어버리고 골취포삼(鶻臭布衫)을 벗겨버려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쇄쇄지(洒洒地)에 저(箇) 사승(師僧)이 되어가게 하겠습니다. 운문대사가 이르되 몸은 호로자(葫蘆子; 子는 조사)와 같으면서 이다지도(許) 큰 입을 매우(太) 개득(開得; 득은 조사)하느냐. 스님이 이르되 운문대사는 또한 이 장구(長久)한 날에 화래순(*樺來脣)이라 동산이 노심(勞心)를 면하지 못했다.
법진일(法眞一)이 차화를 들고 이어서 설두의 염을 들고는 스님이 이르되 당초(當初) 동산이 이르되 모갑의 허물이 어느 곳에 있습니까. 운문이 곧 좋게 때리고 나서 쫓아내었어야 하거늘 그러나 진법무민(盡法無民)이므로 운문이 만약 입수입니(入水入泥)하지 않았다면 동산이 어찌 득오(得悟)했겠는가. 제인자(諸仁者)여 방개(放開)와 파정(把定)은 각기 이 일가(一家)이므로 이치로 마땅히 곧 행하면 참으로(固) 응당 허물이 없다.
자명(慈明)이 황룡남(黃龍南) 선사에게 물어 가로되 서기가 운문선을 배웠으니(*書記學雲門禪) 반드시 그 의지(意旨)를 잘 알 것이다. 여왈(如曰) 동산에게 3돈방을 놓는다 했는데 동산을 우시(于時; 당시)에 응당 때려야 하는가 응당 때리지 않아야 하는가. 공(公)이 가로되 응당 때려야 합니다. 자명이 색장(色莊; 안색을 고침)하며 말하되 3돈방(頓棒)의 소리를 듣고 곧 이것이 끽방(喫棒)이라 한다면 곧 네가 아침으로부터 저녁에 이르기까지 아명작조(鵶鳴鵲噪)와 종어고판(鍾魚皷板)의 소리를 들음에도 또한 응당 끽방해야 하리라. 끽방이 어느 때 자기에게 당하겠는가. 남공(南公)이 눈을 휘둥그레 떠버렸다. 자명이 가로되 내가 처음엔 너의 스승이 됨을 감내하지 못할까 의심했는데 이제는 가(可)하다. 곧 예배하게 했다. 남공이 예배하고 일어나자 자명이 전어(前語)를 정리(整理)하여 가로되 탈여(脫如; 或如) 네가 운문의 의지를 이회했더라도 이는 곧 조주가 일찍이 말한 대산파자(臺山婆子)가 나의 감파를 입었다 했으니 시험삼아 그 가히 감파한 곳을 가리키거라. 남공이 얼굴이 뜨거워지면서 땀을 흘리며 답을 알지 못하고 달려 나갔다.
고목성(枯木成)이 상당하여 차화를 들고 이르되 운문은 하늘에 출렁이는 백랑(白浪) 속을 향해 장라포망(張羅布綱; 그물을 펼치다)할 줄 알아 무한한 금린(錦鱗)ㆍ적미(赤尾)ㆍ파별(跛鼈)ㆍ맹귀(盲龜)가 모두 그물 속에 떨어졌다. 그 사이에 혹 그물을 투득(透得)한 자가 있어 바로 곧 구름을 잡고 파랑을 움키고(*㸕浪) 대각경두(*戴角擎頭)했다. 향산(香山; 法成)이 금일 고인의 작용을 본받겠다. 드디어 1원상을 그리고 불러 이르되 대중이여, 여금에 도리어 투득(透得)할 자가 있느냐. 양구하고 이르되 낚싯배로 실어 소상(瀟湘)의 언덕에 이르니 기(氣)가 막히고 무료(無聊)하여 흰 갈매기에게 묻는다.
해회단(海會端)이 염하되 대소 운문이 동산의 1문(問)을 입자 바로 이마(額頭)에 땀이 나고 입속에 아교가 생겨남을 입었다.
삽계익(霅溪益)이 염하되 땅에 넘어져야 비로소 초잔(初盞)이 진한 줄 안다. 당시에 운문이 이르되 너에게 3돈방을 놓는다 함을 만약 보았다면 화상을 기동(起動)케 함이 합당하지 않다고 말할 줄 알았어야 또한 강서과 호남처럼 일례(一例)로 수굴(受屈)함을 면득(免得)했으리라. 그러나 동산이 이에 운문을 문파(問破)하지 않은지라 또한 이는 벙어리가 쓴 오이를 먹은 것이다.
승천회(承天懷)가 상당하여 차화를 들고 이르되 대중이여 차칙(此則)의 인연을 제인이 어떻게 이회하는가. 향일(向日; 저번 때)에 중중(衆中)에서 상량하면서의 이해(異解)는 그 수를 알지 못한다. 어떤 이는 이르되 운문이 그가 천기(天機)를 누설함을 보고 곧 개부(蓋覆)하여 가져가려고 했는데 동산이 피하(皮下)에 피가 있고 눈 속에 근육이 있음을 그 어찌하겠는가. 운문이 바로 그를 어찌하지 못함을 얻고는 도리어 강서와 호남을 언급했으니 지동획서(指東劃西)함과 매우 흡사하다. 이와 같은 설화는 가히 너무 방약무인(傍若無人)하다. 어떤 이는 이르되 강서와 호남의 견처가 꼭 운문에 미치지 못함은 아니다. 어떤 이는 이르되 운문은 이 평지에 파란을 일으켰다. 어떤 이는 이르되 운문이 그의 불회(不會)를 보고 무슨 사급(死急)에 붙겠는가, 다시 강서와 호남을 설해 타인에게 누를 끼쳤다. 이런 종류와 같은 비판이 가장 많나니 능히 다 들지 못한다. 고인의 일기(一期) 방편은 다만 이 노파심이 간절함임을 너무 알지 못한다. 산승이 이금(而今)에 눈썹을 아끼지 않고 제인을 위해 하나하나 주출(注出)하겠다. 내가 말한다. 운문이 그가 이렇게 옴을 보고 공험(公驗)이 분명한지라 드디어 이에 동산을 방과(放過)했으며 내기(來機)를 돌아보지 않고 몰래 편의를 얻었으니 곧 예사(禮謝)함이 합당하다. 어찌 차수(叉手)하고 근전(近前)하여 구남남지(*口喃喃地)로 강서와 호남을 타말(拖抹; 끌어 당기고 문지르다)함을 얻음에 이르겠는가. 용의 투쟁에 물고기가 상함과 매우 흡사하다. 산승의 이러한 설화를 제인이 도리어 아느냐. 만약 안다면 양두(兩頭)를 절단하고 귀가하여 온좌(穩坐)하려니와 만약 알지 못한다면 안남(安南)을 거두지 못하고서 다시 새북(塞北)을 근심하지 말아라. 불자로써 선상을 쳤다.
죽암규(竹庵珪)가 소참에 차화를 들고 이르되 대중이여, 모름지기 이는 이렇게 일회(一迴)해야 비로소 옳다. 만약 이와 같지 않으면 무량겁래의 업식을 어떻게 정진(淨盡)하겠는가. 운문 노한이 다만 경부(耕夫)의 소를 몰아내고 기인(飢人)의 밥을 뺏음에만 상관하고 상투를 가지고(*持) 다른 사람의 손안에 떨어진 줄 너무 알지 못했다. 아직 다행히 동산이 이 사람을 무는 사자가 아니었으니 저(个) 나귀(驢兒)를 얻고서 곧 희환(喜歡)했지만 마침내 타인의 괴소(笑恠)를 만남을 면하지 못함과 매우 흡사하다. 산승이 말하노니 통렬하게 3돈(頓)을 베풀었거늘 어찌하여 오히려 눈이 열리지 않고 반대자(飯帒子) 가에서 스스로 일생을 잡아 절도(折倒)했는가. 여금에 도리어 타인의 속임을 받지 않을 이가 있느냐. 시험삼아 나오너라, 산승이 너를 위해 증거하겠다. 주장자를 치고 이르되 취안(醉眼)에 꽃이 있으면 글자를 크게 쓰고 노인이 잠이 없으면 누성(*漏聲)이 길다. 진중(珎重)하라.
송원(松源)이 상당하여 차화를 들고 이르되 제방에서 다 이르기를 부자(父子)가 투기(投機)했고 줄탁(啐啄)이 동시(同時)라 하거니와 너무 알지 못하나니 운문이 정령(正令)을 행하지 않아 도리어 초과(草窠) 속을 향해 구르면서 동산으로 하여금 비공(鼻孔)을 잃어버리게 하여 바로 여금에 이르도록 모색할 곳이 없음에 이르렀다.
밀암걸(密庵傑)이 차화를 들고 이르되 운문대사가 방거(放去)는 매우 사치하고 수래(收來)는 매우 검소하더니 말후에 은근했다. 왜 그에게 본분초료(本分草料)를 주어서 화니합수(和泥合水)하게 함에 이르지 않았는가. 동산이 이렇게 깨쳐 간 것은 또한 이 작복(杓卜)하며 헛소리를 듣는 것이다.
●第一二二九則; 차화느 연등회요26, 전등록23에 나옴. ▲벽암록 제12칙. 동산(洞山)이 운문을 초참(初參)하자 운문이 묻되 죄근에 어느 곳을 떠났느냐. 동산이 이르되 사도(渣渡)입니다. 운문이 이르되 여름에 어느 곳에 있었느냐. 동산이 이르되 호남(湖南) 보자(報慈)입니다. 운문이 이르되 어느 때 그 가운데를 떠났느냐. 동산이 이르되 8월 25입니다. 운문이 이르되 너에게 삼돈방(三頓棒)을 놓는다. 참당(參堂)하러 가거라. 스님이 만간(晚間; 저녁 무렵) 입실하여 친근하면서 물어 이르되 모갑의 허물이 어느 곳에 있습니까. 운문이 이르되 반대자(飯袋子)야, 강서니 호남이니 하면서 곧 이러히 가는구나. 동산이 언하에 활연(豁然)하여 대오하고 드디어 이르되 모갑이 다른 날에 인가의 연기도 없는 곳을 향하여 저(箇) 암자를 세우되 한 톨의 쌀도 비축하지 않으며 한 포기의 나물도 심지 않고 늘 시방(十方)에 왕래하는 대선지식을 접대(接待)하되 다 그들(伊)에게 못을 빼버리고(抽却釘) 말뚝을 뽑아버리고(拔却楔) 이지모자(膱脂帽子)를 집어서 물리치고(拈却) 골취포삼(鶻臭布衫)을 벗겨버리고 각기 쇄쇄낙락지(灑灑落落地)에 저(箇) 무사인(無事人)이 되어 가게 하겠습니다. 운문이 이르되 몸뚱이는 야자(椰子)의 크기와 같으면서 이다지도(許) 큰 입을 개득(開得; 득은 조사)하느냐.
●守初; (910-990) 송대 운문종승. 봉상(지금 섬서에 속함) 부씨(傅氏). 나이 16에 위주 공동지심에게 의지해 머리를 깎았고 경주 정원에게 나아가 수구(受具)했음. 후에 장사(長沙)에 이르러 운문문언(雲門文偃)에게 의지해 오지(悟旨)했음. 출세해 동산(洞山)에 거주하며 법도(法道)를 크게 넓혔으며 태평흥국 6년(981) 조정에서 휘호(徽號)와 자의(紫衣)를 주었음. 주산(住山)하기 40년이었고 어록이 있어 세상에 유행함 [선림승보전8. 속전등록12. 오등회원15].
●查渡; 저본에 묘도(杳渡)로 지었음. 전등록23에 사도(楂渡)로 지었고 오등회원15와 연등회요26에 사도(查渡)로 지었음.
●赤骨歷; 곧 적골력(赤骨力)이니 하나도 소유한 게 없음. 적나라(赤裸裸)함. 다분히 속정(俗情)과 망념(妄念)을 탕진하고 본래면목을 환히 깨침에 비유함.
●樺來脣; 아래 1392칙 염송설화에 가로되 화래순(樺來唇)이란 것은 화래순ㆍ구래시(狗來腮) 등이니 대개 고인의 이어(俚語)일 뿐이다. 뜻은 곧 대무단(大無端)임.
●書記學雲門禪; 연등회요13 황룡혜남. 스님이 늑담징선사(泐潭澄禪師; 五祖師戒를 이었고 戒는 雙泉師寬을 이었고 寬은 운문을 이었음)에게 오래 의지했다. 분좌(分座)하여 접물(接物)하면서 명성이 제방을 진동했다. 우연히 운봉열(雲峰悅) 선사와 함께 서산을 유람했는데 밤에 운문의 법도(法道)를 얘기했다. 열(悅; 文悅)이 이르되 징공(澄公)이 비록 이 운문의 후손이지만 법도가 다르다(異矣) …… 곧 복엄현(福嚴賢)을 참알했다. 현(賢)이 명(命)하여 서사(書司)를 관장(管掌)했는데 갑자기 현이 죽었다. 군수가 자명(慈明)을 이에 보직(補職)했다. 이미 이르자 그가 제방을 폄박(貶剝)하고 건건(件件)마다 사해(邪解)라고 책망(數)함을 보고(目) 스님이 기색(氣索; 氣息消失)했다. 드디어 그 실(室)로 나아가자 자명이 이르되 서기는 영도(領徒)하며 유방(游方)한다. 차사(借使; 假使) 의심이 있다면 가히 앉아서 상략(商略; 논의)하자. 스님이 애간(哀懇)이 더욱 간절했다. 자명이 이르되 공(公)은 운문선(雲門禪)을 배웠으니 반드시 그 의지(意旨)를 잘 알 것이다 (운운).
●㸕; 확(攫)과 같음.
●戴角擎頭; 또 경두대각(擎頭戴角)으로 지음. 중인(衆人) 가운데 걸출한 인물을 비유로 가리킴.
●口喃喃地; 말이 많은 모양을 형용. 지는 조사
●持; 저본에 특(特)으로 지었음. 마땅히 지(持)로 지어야 함.
●漏聲; 루(漏)는 누호(漏壺)니 고대의 계시기(計時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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