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慧*普覺禪師宗門武庫
*參學*比丘*道謙編
【1】 *洞山廣*道者*梓州人 *叢林號廣無心 初遊方問*雲蓋智*和尙 *興化打*維那意旨如何 智下*繩床展兩手吐舌示之 廣打一*坐具 智云 此是風力所轉 又持此語問*石霜琳和尙 琳云 爾意作麽生 廣亦打一坐具 琳云 好一坐具 祇是爾不知落處 又問*眞淨 淨云 爾意作麽生 廣亦打一坐具 淨云 他打爾也打 廣於此大悟 眞淨因作頌云 丈夫當斷不自斷 興化爲人徹底漢 已後從他眼自開 *棒了罰錢趁出院
●大慧普覺禪師宗門武庫; 一卷 南宋道謙編 略稱大慧宗門武庫 大慧武庫 宗門武庫 收於大正藏第四十七冊 附於大慧普覺禪師語錄之後 乃大慧宗杲輯錄禪宗古德隨緣應機 接物利生因緣中 機峰峭峻者之語錄 竝加上自己之評唱而成 總計一一四條 [大慧普覺禪師年譜 禪籍志下]
●大慧; 南宋楊岐派僧宗杲賜號大慧 宗杲(1089-1163) 字曇晦 寧國(安徽宣州)奚氏 年十七出家 登寶峰謁湛堂文準 準指以入道要徑 準卒 趨謁無盡居士求塔銘 無盡一見奇之 名其庵曰妙喜 後往參圓悟克勤得法 右丞相呂舜奏賜紫衣 及佛日大師之號 後於雲居山創庵以居 久之 入閩結茅於長樂洋嶼 又徙小溪雲門庵 應丞相張浚之命 住徑山 道法之盛 冠於一時 侍郞張九成亦從之遊 因議朝政 被秦檜所忌 流於嶺南 檜死召還 翌年春復僧伽梨 奉命住育王 逾年有旨改徑山 道俗歆慕如初 孝宗卽位 召對稱旨 賜號大慧禪師 御書妙喜庵三字賜之 隆興元年八月微恙 十日親書遺奏 又書遺偈 擲筆委然而入寂 壽七十五 臘五十八 謚曰普覺禪師 有大慧語錄等 [統要續集二十二 聯燈會要十七 嘉泰普燈錄十五 五燈會元十九 佛祖通載二十]
●普覺禪師; 南宋楊岐派僧宗杲的諡號 ○禪師; 修禪定之師也 禪師之稱 不限用於禪宗名德 於天台宗 淨土宗 三階敎等 專習坐禪者 亦稱禪師 玉篇 師 敎人以道者之稱也 法言 師者 人之模範也
●參學; 一參禪學道之略語 二門徒 參禪學道者 此指二
●比丘; <梵> bhiksu <巴> bhikku 又作比邱 指出家得度 受具足戒之男子 新云苾芻 金剛般若經偈會本 比邱名含三義 一破惡 謂修戒定慧 能破見思煩惱惡故 二怖魔 謂魔王驚怖 恐出三界 損其黨故 三乞士 謂離四邪命 乞食資身 利檀那故 翻一遺二故存梵名 ▲翻譯名義集一 比丘 大論云 比丘名乞士 淸淨活命故 復次比名破 丘名煩惱 能破煩惱故 復次比名怖 丘名能 能怖魔王及魔人民(云云)
●道謙; 宋代楊岐派僧 號密庵 建州(福建建甌)游氏 初謁佛果 後隨妙喜至徑山 一 日妙喜遣往長沙通書紫巖居士 途中大悟 回里住開善寺 聲光大振 [普燈錄十八 五燈會元二十]
●洞山; 位於江西高安(古屬筠州) 一說洞山卽新豐山 九世紀中葉 唐末良价禪師住於是山之普利院 致力禪學之敎化 參學者每達數百人 後良价傳法于本寂 本寂後遷至撫州曹山 其法系稱作曹山 良价之法系稱洞山 合稱之 卽爲曹洞宗 [宋高僧傳十二 筠州洞山普利禪院傳法記]
●道者; 禪人之稱呼
●梓州; 今四川省三臺
●叢林; 指僧衆聚居之寺院 尤指禪宗寺院
●雲蓋智; 雲蓋守智(1025-1115) 宋代黃龍派僧 劒州(福建南平)陳氏 出家劍浦林重院 受具後遊方至豫章大寧 參法昌倚遇不契 復謁翠巖可眞 亦無省發 及見黃龍慧南於積翠 始盡餘疑 遂開法道吾 徙雲蓋 閉戶三十年 政和四年(1114) 出主開福 政和乙未三月七日 安坐而化 壽九十一 臘六十六 [續傳燈錄十五 五燈全書三十七 普燈錄四]
●和尙; <梵> upādhyāya 指德高望重之出家人 又作和上 和闍 和社等 梵云鄔波馱耶 優婆陀訶 郁波第耶夜 此云親敎師 力生 近誦 ▲翻譯名義集一 和尙 或和闍 羯磨疏云 自古翻譯多雜蕃胡 胡傳天語不得聲實 故有訛僻 傳云 和尙梵本正名鄔波遮迦 傳至于闐 翻爲和尙 傳到此土 什師翻名力生
●興化打維那; 興化卽存獎 擊節錄第二十一則興化罰錢 興化問克賓維那 你不久爲唱道之師 賓云 不入這保社 化云 會來不入 不會不入 賓云 沒交涉 化便打云 克賓維那 法戰不勝 罰錢五貫 充設饡飰 至來日齋時 興化自白椎云 克賓維那 法戰不勝 不得喫飰 卽便赶出院 ○興化; 存獎(830-888) 五代後唐臨濟宗僧 孔子後裔 流寓甘泉縣 初硏敎旨 聞臨濟義玄盛化滹沱 乃往親依 有省得法 未幾轉謁三聖慧然 魏府大覺 後住大明府興化院 學子甚衆 大闡祖道 寂謚廣濟禪師 [傳燈錄十二 廣燈錄十二]
●維那; 禪院中的職事僧 主持法事儀式 管理僧衆紀律等 ▲祖庭事苑八 維那 寄歸傳(南海寄歸內法傳四)云 華梵兼擧也 維是綱維 華言也 那是略梵語 刪去羯磨陀三字 此云悅衆也 又十誦云 以僧坊中無人知時 限唱時至 及打楗椎 又無人塗治掃灑講堂食處 無人相續鋪牀 衆亂時無人彈指等 佛令立維那 又聲論飜爲次第 謂知事之次第者也 今禪門令掌僧藉及表白等事 必選當材
●繩床; 又作坐床 坐禪床 爲繩製之座具 比丘坐臥用之
●坐具; 比丘六物之一 坐臥時敷於地上或臥具上之長方形布 禮拜時先敷坐具 就其上作之 是甚爲不法 南山義淨皆痛斥之 釋門歸敬儀下曰 坐具之目 本是坐時之具 所以禮拜之中 無文敷者也 ▲釋氏要覽一 梵云尼師壇 此云隨坐衣 根本毘奈耶云 尼師但那 唐言坐具 淨法師註云 文言坐具 此乃敷具 坐臥皆得 佛制者 本爲儭替臥具 恐有所損 不擬餘用也 五分律云 爲護身護衣護僧床褥故著坐具
●石霜琳; 宋代僧 黃龍慧南法嗣 機鋒穎脫 名振叢林 與文關西 英邵武齊名 後開法長沙石霜崇勝禪院 [續傳燈錄十六 續燈錄十二]
●眞淨; 克文(1025-1102) 宋代黃龍派僧 俗姓鄭 號雲庵 關西子 陝府(今河南陝縣)人 二十五歲 隨北塔廣公出家 通內外學 初參黃龍慧南不契 又往香城(今陝西朝邑) 見順和尙 順和尙反問黃龍慧南之語 克文聞而大省 方知黃龍慧南用意 仍歸黃龍慧南處 幷嗣其法 初於洞山開堂 後遷隆興(今江西南昌)寶峰 繼住壽聖 歸宗 泐潭 晩居雲菴 崇寧元年十月十六日示寂 享年七十八 法嗣有三十八人 以從悅 文準 慧洪爲上首 賜號眞淨 有雲庵眞淨禪師語錄 [續傳燈錄十五 五燈會元十七]
●棒; 禪錄多指拄杖 棒 步項切 棍也 棓也 又用棍棒打 廣韻 棒 打也
【1】 동산(*洞山) 광도자(廣*道者)는 재주(*梓州) 사람인데 총림(*叢林)에서 호하기를 광무심(廣無心)이라 했다. 처음 유방(遊方)하다가 운개지(*雲蓋智) 화상(*和尙)에게 묻되 흥화가 유나를 때린(*興化打*維那) 의지(意旨)가 무엇입니까. 지(智)가 승상(*繩床)에서 내려와 양손을 펴고 토설(吐舌)하여 그에게 보였다. 광(廣)이 1좌구(*坐具)로 때렸다. 지(智)가 이르되 이것은 이 풍력(轉)에 전동(轉動)하는 것이다. 또 차어(此語)를 가지고 석상림(*石霜琳) 화상에게 묻자 림(琳)이 이르되 너의 뜻은 어떠한가. 광(廣)이 또한 1좌구로 때렸다. 림이 이르되 좋은 1좌구지만 다만 이 네가 낙처(落處)를 알지 못하는구나. 또 진정(*眞淨)에게 묻자 진정이 이르되 너의 뜻은 어떠한가. 광이 또한 1좌구로 때렸다. 진정이 이르되 그가(他) 때리니 너도 때린다. 광이 이에서 대오했다. 진정이 인하여 작송(作頌)해 이르되 장부(丈夫)가 당단(當斷)하여 스스로 단절하지 못하니/ 흥화는 사람을 위함이 철저한 자다/ 이후(已後)에 그로 좇아 눈이 저절로 열렸으나/ 때리고 나서(*棒了) 벌전(罰錢; 벌금을 냄)하고 사원에서 쫓아내었다.
●大慧普覺禪師宗門武庫; 1권. 남송 도겸(道謙)이 편(編)했음. 약칭이 대혜종문무고ㆍ대혜무고ㆍ종문무고임. 대정장 제47책에 수록되었고 대혜보각선사어록의 뒤에 첨부되었음. 곧 대혜종고가 선종 고덕의 수연응기(隨緣應機)와 접물이생(接物利生)의 인연 중에서 기봉이 초준(峭峻)한 자의 어록을 집록하고 아울러 자기의 평창(評唱)을 가상(加上)하여 이루었음. 총계가 114조(條) [대혜보각선사연보. 선적지하].
●大慧; 남송 양기파승 종고의 사호(賜號)가 대혜(大慧). 종고(宗杲; 1089-1163) 자(字)가 담회(曇晦)며 영국(寧國; 安徽 宣州) 해씨(奚氏). 나이 17에 출가했음. 보봉(寶峰)에 올라 담당문준(湛堂文準)을 알현(謁見)했는데 문준이 입도(入道)의 요경(要徑)을 지도하였음. 문준이 죽자 무진거사(無盡居士; 張商英이니 황룡하 3세)에게 달려가 참알(參謁)하고 탑명(塔銘)을 구했는데 무진이 한 번 보고 그를 기이하게 여겼으며 그 암자를 이름해 묘희(妙喜)라 했음. 후에 원오극근(圓悟克勤; 양기하 3세)을 참알해 법을 얻었음. 우승상(右丞相) 여순(呂舜)이 주청(奏請)하여 자의(紫衣)와 및 불일대사(佛日大師)란 호를 주었음. 후에 운거산(雲居山)에 암자를 창건해 거처했으며 오래되자 민(閩)에 들어가 장락(長樂)의 양서(洋嶼)에 결모(結茅; 띠로 암자를 엮음)했고 또 소계(小溪)의 운문암(雲門庵)으로 이사했음. 승상(丞相) 장준(張浚)의 명에 응해 경산(徑山)에 머물렀는데 도법(道法)의 성함이 한 때에 으뜸(冠)이었음. 시랑(侍郞) 장구성(張九成; 宗杲의 法嗣)도 또한 좇아 교유(交遊)했음. 조정(朝政)을 논의함으로 인해 진회(秦檜)의 시기(猜忌)를 입어 영남(嶺南)에 유배(流配)되었다가 진회가 죽자 소환(召還)되었고 다음해 봄 승가리(僧伽梨)를 회복(回復)했으며 칙명을 받들어 육왕(育王)에 주지(住持)했는데 해를 넘겨 성지(聖旨)가 있어 경산(徑山)으로 개명했음. 도속(道俗; 僧俗)이 흠모(歆慕; 歆은 心服할 흠)하기가 처음과 같았음. 효종(孝宗)이 즉위하자 불러 대화하고는 뜻에 맞는지라 대혜선사(大慧禪師)란 호를 주었으며 묘희암(妙喜庵) 3자를 어서(御書)하여 주었음. 융흥원년(隆興元年) 8월에 조금 병들었는데 10일에 유주(遺奏)를 친히 쓰고 또 유게(遺偈)를 쓰고는 붓을 던지고 의젓하게(委然) 입적했으니 나이는 75, 승랍은 58. 시호(諡號)를 가로되 보각선사(普覺禪師)며 대혜어록(大慧語錄) 등이 있음 [통요속집22. 연등회요17. 가태보등록15. 오등회원19. 불조통재20].
●普覺禪師; 남송 양기파승 종고의 시호. ○禪師; 선정을 닦는 스님임. 선사란 명칭은 선종의 명덕(名德)에 한정하여 씀이 아니니 천태종ㆍ정토종ㆍ삼계교(三階敎) 등에서 좌선을 오로지 익히는 자를 또한 선사로 일컬음. 옥편 사(師) 도로써 사람을 가르치는 자의 칭호다. 법언(法言) 사(師)란 것은 사람의 모범이다.
●參學; 1. 참선학도(參禪學道)의 약어(略語). 2. 문도(門徒)임. 참선학도하는 자임. 여기에선 2를 가리킴.
●比丘; <梵> bhiksu. <巴> bhikku. 또 비구(比邱)로 지음. 출가하여 득도(得度)하고 구족계를 받은 남자를 가리킴. 신역(新譯)은 이르되 필추(苾芻; 梵 bhiksu)임. 금강반야경게회본 비구(比邱)의 이름은 3의(義)를 포함한다. 1. 파악(破惡) 이르자면 계정혜를 닦아 능히 견사(見思)의 번뇌악(煩惱惡)을 깨뜨리는 연고이다. 2. 포마(怖魔) 이르자면 마왕이 경포(驚怖)함이니 3계(界)를 벗어나 그의 당(黨)을 손상할까 두려워하는 연고이다. 3. 걸사(乞士) 이르자면 4사명(邪命)을 여의고 걸식하여 자신(資身)하며 단나(檀那)를 이롭게 하는 연고이다. 하나만 번역하면 둘을 잃는지라 고로 범명(梵名)을 존치(存置)했다. ▲번역명의집1. 비구(比丘) 대론(大論; 대지도론3)에 이르되 비구는 이름이 걸사(乞士)니 청정하게 활명(活命)하는 연고이다. 다시 다음에 비(比)는 이름이 파(破)며 구(丘)는 이름이 번뇌니 능히 번뇌를 깨뜨리는 연고이다. 다시 다음에 비(比)는 이름이 포(怖)며 구(丘)는 이름이 능(能)이니 능히 마왕 및 마왕의 인민을 두렵게 한다 (운운).
●道謙; 송대 양기파승. 호는 밀암이며 건주(복건 건구) 유씨. 처음엔 불과를 예알하고 후에 묘희를 따라 경산에 이르렀음. 어느 날 묘희가 보내어 장사로 가서 자암거사에게 통서(通書; 서신으로 통지함)하게 했는데 도중에서 대오했음. 향리로 돌아가 개선사(開善寺)에 주(住)했으며 성광(聲光)을 크게 떨쳤음 [보등록18. 오등회원20].
●洞山; 강서성 고안(高安; 옛날에 균주에 속했음)에 위치함. 일설엔 동산이 곧 신풍산이라 함. 9세기 중엽 당말의 양개선사가 이 산의 보리원에 거주하면서 선학의 교화에 힘썼으며 참학자가 매양 수백 인에 이르렀음. 후에 양개가 본적에게 법을 전했고 본적이 후에 무주의 조산으로 옮겨 이르렀으며 그 법계(法系)를 조산으로 일컬었고 양개의 법계를 동산으로 일컬었는데 이를 합칭하여 곧 조동종이라 함 [송고승전12. 균주동산보리선원전법기].
●道者; 선인(禪人)의 칭호.
●梓州; 지금의 사천성 삼대(三臺).
●叢林; 승중(僧衆)이 모여 거처하는 사원을 가리킴. 특히 선종사원(禪宗寺院)을 가리킴.
●雲蓋智; 운개수지(雲蓋守智; 1025-1115)니 송대 황룡파승. 검주(복건 남평) 진씨. 검포 임중원에서 출가했고 수구(受具)한 후에 유방하다가 예장 대녕에 이르러 법창의우를 참했으나 계합하지 못했음. 다시 취암가진을 참알했으나 또한 성발(省發; 領會)하지 못했고 황룡혜남(黃龍慧南)을 적취(積翠)에서 참견(參見; 찾아 뵙)함에 이르러 비로소 남은 의혹을 다했음. 드디어 도오에서 개법했고 운개(雲蓋)로 옮겨 30년 동안 폐호(閉戶)했음. 정화 4년(1114) 나가서 개복을 주지(主持)했고 정화 을미 3월 7일에 안좌(安坐)하여 화(化; 죽음)했음. 나이는 91이며 납은 66 [속전등록15. 오등전서37. 보등록4].
●和尙; <범> upādhyāya. 덕이 높고 신망(信望)이 두터운 출가인을 가리킴. 또 화상(和上)ㆍ화사(和闍)ㆍ화사(和社) 등으로 지음. 범어로는 이르되 오파타야(鄔波馱耶)ㆍ우파타하(優婆陀訶)ㆍ욱파제야야(郁波第耶夜)니 여기에선 이르되 친교사(親敎師)ㆍ역생(力生)ㆍ근송(近誦)임. ▲번역명의집1. 화상(和尙) 혹은 화사(和闍)임. 갈마소(羯磨疏)에 이르되 자고로 번역이 번호(蕃胡; 蕃은 중국에서 옛적에 서방 변경의 각 소수민족과 외국에 대한 통칭. 뒤에 番으로 지었음)가 많이 섞여 호인(胡人)이 천축국 말을 전하면서 소리의 진실을 얻지 못해 고로 그릇되고 치우침이 있었다. 전(傳)에 이르되 화상의 범본(梵本)의 바른 이름은 오파자가(鄔波遮迦)이다. 전해 우전(于闐)에 이르러 화상으로 번역되었고 전하여 이 국토에 이르러선 집사(什師; 구마라집)가 번역해 역생(力生)으로 이름했다.
●興化打維那; 흥화는 곧 존장(存獎). 격절록 제21칙 흥화벌전(興化罰錢). 흥화가 극빈유나(克賓維那)에게 묻되 너는 오래지 않아 창도지사(唱道之師)가 되리라. 극빈이 이르되 이 보사(保社)에 들지 않겠습니다. 흥화가 이르되 알고서 들지 않느냐, 알지 못하고서 들지 않느냐. 극빈이 이르되 교섭이 없습니다. 흥화가 바로 때리고 이르되 극빈유나는 법전(法戰)에서 이기지 못했으니 벌전(罸錢) 5관(貫)으로 찬반(饡飯; 국밥)을 충당해 베풀어라. 다음날 재시(齋時)에 이르러 흥화가 스스로 백추(白椎)하고 이르되 극빈유나는 법전에서 이기지 못했으니 끽반(喫飰)함을 얻지 못한다. 곧 사원에서 쫓아내었다. ○興化; 존장(存獎; 830-888)이니 오대 후당(後唐)의 임제종승. 공자(孔子)의 후예(後裔)니 감천현(甘泉縣)에 유입(流入)하여 살았음. 처음엔 교지(敎旨)를 연구하다가 임제의현(臨濟義玄)이 호타(滹沱)에서 성화(盛化)한다 함을 듣고 이에 가서 친히 의지하다가 깨침이 있어 득법(得法)했음. 얼마 안되어 삼성혜연(三聖慧然)ㆍ위부대각(魏府大覺)을 옮겨가며 참알(參謁)했고 뒤에 대명부(大明府) 흥화원(興化院)에 거주했음. 배우는 제자가 매우 많았으며 조도(祖道)를 크게 열었음. 입적하자 광제선사(廣濟禪師)로 시호했음 [전등록12. 광등록12].
●維那; 선원 중의 직사승(職事僧)이니 법사(法事)의 의식을 주지(主持)하고 승중의 기율(紀律) 등을 관리함. ▲조정사원8. 유나(維那) 기귀전(남해기귀내법전4)에 이르되 화범(華梵)을 겸거(兼擧)했다. 유(維)는 이 강유(綱維)니 화언이며 나(那)는 이 범어를 줄였으니 갈마타(羯磨陀) 3자를 산거(刪去; 刪은 깎을 산. 삭제할 산)했다. 여기에선 이르되 열중(悅衆)임. 또 십송률에 이르되 승방(僧坊) 중에 시(時)를 아는 사람이 없는지라 시지(時至; 때가 이르렀습니다)를 창(唱)하거나 및 건추(楗椎)를 두드림에 한정(限定)됐으며 또 강당과 식처(食處)를 도치(塗治)하고 소쇄(掃灑)할 사람이 없었으며 상속하여 포상(鋪牀; 상을 폄)할 사람이 없었으며 대중이 혼란할 때 탄지(彈指)할 사람 등이 없었기 때문에 불타가 유나를 세우게 했다. 또 성론(聲論)에선 번역하여 차제(次第)로 삼나니 이르자면 사(事)의 차제를 지(知)하는 자이다. 지금 선문에서 승자(僧藉; 藉는 깔개 자리 자) 및 표백(表白; 表는 法事의 지취를 表顯함이며 白은 三寶와 대중에게 고함임) 등의 일을 관장함엔 반드시 당재(當材)를 선택해야 함.
●繩床; 또 좌상(坐床)ㆍ좌선상(坐禪床)으로 지으며 노끈으로 제작한 좌구임. 비구가 좌와(坐臥)에 이를 사용함.
●坐具; 비구 6물의 하나. 좌와(坐臥) 시 지상이나 혹 와구(臥具) 위에 펴는 장방형의 포(布). 예배할 때 먼저 좌구를 펴고 그 위에 나아가 이를 지음은 이는 심히 불법(不法)이 됨. 남산과 의정이 모두 통렬히 그것을 배척했음. 석문귀경의하(釋門歸敬儀下)에 가로되 좌구의 명목은 본시 앉을 때의 도구다. 소이로 예배하는 중에 편다(敷)는 글이 없다. ▲석씨요람1. 범어로 이르되 니사단(尼師壇)은 여기에선 이르되 수좌의(隨坐衣)다. 근본비나야(根本毘奈耶)에 이르되 니사단나(尼師但那)는 당나라 말로 좌구다. 의정법사의 주(註)에 이르되 문(文)에 좌구라고 말한 것은 이는 곧 부구(敷具; 敷는 펼 부)니 앉거나 눕는데 다 합당하다. 불타가 제정한 것은 본래 깔개(儭; 襯과 같음. 藉임)가 되었는데 와구(臥具)로 대체했음은 손상하는 바가 있을까 염려했음이니 여타의 용도로 향하지(擬는 向임) 못하게 했음이다. 오분율에 이르되 몸을 보호하고 옷을 보호하고 승상(僧床)의 요를 보호하기 위한 연고로 좌구를 두었다.
●石霜琳; 송대승. 황룡혜남의 법사. 기봉이 영탈(穎脫)하여 명성이 총림을 진동했음. 문관서(文關西)ㆍ영소무(英邵武)와 명성이 가지런했음. 후에 장사 석상 숭승선원에서 개법했음 [속전등록16. 속등록12].
●眞淨; 극문(克文; 1025-1102)이니 송대 황룡파승. 속성은 정이며 호는 운암(雲庵)ㆍ관서자니 섬부(지금의 하남 섬현) 사람. 25세에 북탑광공을 따라 출가했으며 내외학(內外學)을 통달했음. 처음에 황룡혜남(黃龍慧南)을 참알해 계합치 못해 또 향성(지금의 섬서 조읍)으로 가서 순화상(順和尙)을 뵙자 순화상이 황룡혜남의 말로 반문함에서 극문이 듣다가 크게 성찰했으며 비로소 황룡혜남의 용의(用意)를 알고 그대로 황룡혜남의 처소로 돌아갔으며 아울러 그의 법을 이었음. 처음에 동산(洞山)에서 개당하고 뒤에 융흥(지금의 강서 남창) 보봉(寶峰)으로 옮겼으며 이어서 수성ㆍ귀종ㆍ늑담에 거주했고 만년에 운암에 거주했음. 숭녕 원년 10월 16일에 시적했으니 향년은 78. 법사는 38인이 있고 종열ㆍ문준ㆍ혜홍으로써 상수(上首)를 삼음. 사호(賜號)가 진정(眞淨)이며 운암진정선사어록이 있음 [속전등록15. 오등회원17].
●棒; 선록에서 다분히 주장자를 가리킴. 방(棒)은 보항절(步項切; 방)이니 곤(棍; 몽둥이. 곤장)임. 부(棓; 몽둥이)임. 또 곤봉을 사용해 때림임. 광운(廣韻) 방(棒) 때림이다.
선문염송집주 5책 1질로 발간되었습니다 (tistory.com)
선문염송집주 5책 1질로 발간되었습니다
2022년 3월 발행. 150부. 5책 1질. 총 4,842쪽, 12.5pt. 4․6배판. 하드. 양장. 정가 60만 원. 한문주석 1만 여 개로 염송본문의 各則을 해석하고 전체를 한글로 번역. 주석의 쪽 수가 본문을 조금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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