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문무고

종문무고(宗門武庫) 003

태화당 2022. 7. 27. 08:34

3*湛堂準和尙初參眞淨 淨問近離甚處 準云*大仰 夏在甚處 準云*大潙 淨云 甚處*人事 準云 *興元府 淨展兩手云 *我手何似佛手 準罔措 淨云 適來*祇對一一靈明天眞 及乎道箇佛手便成窒礙 且道病在甚處 準云 *某甲不會 淨云 一切*現成更敎

 

湛堂準; 文準(1061-1115) 宋代黃龍派僧 自號湛堂 俗姓梁 興元(今陝西漢中)人 少年出家 受具足戒後 參眞淨克文(嗣黃龍) 服勤十載 遂嗣其法 後住持泐潭 以臨衆有方 學侶海會 大慧宗杲曾追隨前後凡六年 頗受影響 宋徽宗政和乙未 十月二十日而化 壽五十五 臘三十五 有湛堂文准禪師語要一卷 [普燈錄七 五燈會元十七]

大仰; 大仰山 位於江西宜春縣之南 山勢絶高 須仰視方得見 故稱仰山 又稱大仰山 唐僖宗時 潙山靈祐之弟子慧寂 曾於此地 開創禪院 發揚潙山靈祐之宗風 此卽禪宗之潙仰宗 仰山亦因此而聞名 慧寂滅後 經智齊擇和等 至慧南之弟子行偉時 大振法道 興盛一時 山中共有三塔 卽西塔南塔東塔 此外山下有棲隱寺 宋代更名爲太平興國禪寺

大潙; 潭州大潙山 略稱潙山 位於湖南長沙寧鄕縣西 爲衡山山脈之分支 潙水之發源地 山多平地 水道便利 故古來出家人 每多耕作於此 而有羅漢田之稱 唐僧靈祐居於此 世稱潙山禪師

人事; 此指籍貫 同人氏

興元府; 三國時期設置的梁州 治所在陝西漢中 隋大業三年(607)廢 乾元元年(758) 復爲梁州 唐德宗改其爲興元府 此後不再稱梁州 [百度百科]

祇對; 又作秖對秪對 回答 應對 祇 與秖秪用同

我手何似佛手; 禪苑蒙求中 黃龍三關 (會元十七)黃龍室中常問僧曰 人人盡有生緣 上座生緣在何處 正當問答交鋒 却復伸手曰 我手何似佛手 又問諸方參請宗師所得 却復垂脚曰 我脚何似驢脚 三十餘年示此三問 學者莫有契其旨 脫有酧者 師未甞可否 斂目危坐 人莫測其意 延之又問其故 師云 已過關者掉臂徑往 安知有關吏 問可否此未透關者也 叢林目之爲黃龍三關

某甲; 此指自稱之詞 自稱之詞 相當于我 聯燈會要四百丈懷海 師謂衆曰 我要一人去 傳語西堂 阿誰去得 五峰出云 某甲去得 代替人名 洞山語錄 師問僧 名什麽 僧云 某甲

現成; 現前成就的略語 自然出來 不假造作安排者

 

3담당준(*湛堂準) 화상이 진정(眞淨; 克文)을 초참(初參)하자 진정이 묻되 최근에 어느 곳을 떠났는가. ()이 이르되 대앙(*大仰)입니다. 여름은 어느 곳에 있었는가. 준이 이르되 대위(*大潙)입니다. 진정이 이르되 어느 곳의 인사(*人事)인가. 준이 이르되 흥원부(*興元府)입니다. 진정이 양손을 펴고 이르되 내 손이 어찌하여 불수와 같은가(*我手何似佛手). 준이 망조(罔措)했다. 진정이 이르되 적래(適來; 조금 전)의 지대(*祇對)는 하나하나 영명(靈明)하고 천진(天眞)이었거늘 저() 불수(佛手)를 말함에 이르러선 곧 질애(窒礙; 障礙)를 이루었다. 그래 말하라 병()이 어느 곳에 있느냐. 준이 이르되 모갑(*某甲)이 알지 못합니다. 진정이 이르되 일체(一切)에 현성(*現成)했거늘 다시 누구(; 저본에 로 지었음)로 하여금 알게 하겠는가.

 

湛堂準; 문준(文準; 1061-1115)이니 송대 황룡파승. 자호(自號)가 담당(湛堂)이며 속성은 양()이니 흥원(지금의 섬서 한중) 사람. 어린 나이에 출가해 구족계를 받은 후 진정극문(眞淨克文; 黃龍을 이었음)을 참알(參謁)해 복근(服勤)하기 10()에 드디어 그의 법을 이었음. 후에 늑담(泐潭)에 주지(住持)하며 임중(臨衆)하매 방도(方道)가 있어 학려(學侶)가 바다처럼 모였음. 대혜종고(大慧宗杲)가 일찍이 추수(追隨)하기가 전후로 무릇 6년이었으며 자못 영향을 받았음. 송 휘종 정화 을미 1020일에 화거(化去)했으니 나이는 55며 승랍은 35. 담당문준선사어요 1권이 있음 [보등록7. 오등회원17].

大仰; 대앙산(大仰山)이니 강서 의춘현(宜春縣)의 남쪽에 위치함. 산세가 몹시 높아 반드시 우러러 보아야 비로소 얻어 보는지라 고로 명칭이 앙산(仰山)이며 또 명칭이 대앙산(大仰山). () 희종(僖宗) 때 위산영우(潙山靈祐)의 제자 혜적(慧寂)이 일찍이 이 땅에 선원(禪院)을 개창(開創)하여 위산영우의 종풍을 발양(發揚)하였으니 이것이 곧 선종의 위앙종(潙仰宗). 앙산도 또한 이로 인해 이름이 알려졌음. 혜적이 입멸한 후 지제(智齊)ㆍ택화(擇和) 등을 경유해 혜남(慧南)의 제자 행위(行偉)에 이르렀을 때 법도(法道)를 크게 떨쳤으며 일시(一時)에 흥성했음. 산중에 모두 세 탑이 있는데 곧 서탑(西塔)ㆍ남탑(南塔)ㆍ동탑(東塔). 이 밖에 산 아래 서은사(棲隱寺)가 있는데 송대(宋代)에 이름을 바꿔 태평흥국선사(太平興國禪寺)라 했음.

大潙; 담주(潭州) 대위산(大潙山)이니 약칭이 위산(潙山). 호남 장사(長沙) 영향현(寧鄕縣) 서쪽에 위치하며 형산산맥(衡山山脈)의 분지(分支)가 됨. 위수(潙水)의 발원지임. 또 호칭이 대위산(大潙山). 산에 평지가 많고 수도(水道)가 편리한지라 고로 고래(古來)로 출가인이 매양 많이 여기에 경작해 라한전(羅漢田; 라한은 범어 아라한의 약칭)이란 칭호가 있음. 당승(唐僧) 영우(靈祐)가 여기에 거처했으며 세칭이 위산선사(潙山禪師).

人事; 적관(籍貫; 대대로 거주해 온 땅. 貫鄕. 本官)을 표함. 인씨(人氏)와 같음.

興元府; 삼국시기 설치한 양주(梁州)니 치소(治所)는 섬서 한중에 있었음. 수 대업 3(607) 폐했고 건원 원년(758) 다시 양주라 했음. 당 덕종이 그것을 고쳐 흥원부라 했고 이 후에 다시 양주라고 일컫지 않았음 [백도백과].

祇對; 또 지대(秖對)ㆍ지대(秪對)로 지음. 회답임. 응대임. ()는 지()ㆍ지()와 용이 같음.

我手何似佛手; 선원몽구중. 황룡삼관(黃龍三關) (회원17) 황룡이 실중(室中)에서 늘 중에게 물어 가로되 사람마다 모두 생연(生緣)이 있나니 상좌의 생연은 어느 곳에 있느냐. 바로 문답하며 교봉(交鋒)함을 당해 도리어 다시 손을 내밀고(伸手) 가로되 내 손이 어찌하여 불수(佛手)와 같으냐(我手何似佛手). 또 제방에 종사를 참청(參請)하여 얻은 바를 묻고는 도리어 다시 다리를 내리고(垂脚) 가로되 내 다리가 어찌하여 나귀 다리와 같으냐(我脚何似驢脚). 30여 년을 이 세 질문을 보였는데 학자가 그 지취에 계합하는 이가 있지 않았다. 혹시() 응수(應酧)하는 자가 있어도 스님이 일찍이 가()타 부()타 하지 않았고 눈을 감고(斂目) 위좌(危坐; 正坐)했다. 사람들이 그 뜻을 헤아리지 못했고 이어서 또 그 연고를 묻자 스님이 이르되 이미 관문(關門)을 통과한 자는 팔을 흔들며 바로 가리니 어찌 관리(關吏)가 있음을 알리오. 가부(可否)를 묻는다면 이는 관문을 통과하지 못한 자다. 총림에서 이를 명목해 황룡삼관이라 했다.

某甲; 여기에선 자칭지사(自稱之詞)를 가리킴. 자칭의 말이니 아()에 상당(相當). 연등회요4 백장회해(百丈懷海) 스님이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한 사람이 가서 서당(西堂. 西堂智藏)에게 전어(傳語)함을 내가 요구한다. 누가 가겠는가. 오봉(五峰)이 나와 이르되 모갑(某甲)이 가겠습니다. 인명(人名)을 대체함. 동산어록. 스님이 중에게 묻되 이름이 무엇인가. 중이 이르되 모갑(某甲)입니다.

現成; 현전성취의 약어(略語)니 자연으로 출래(出來)했고 조작과 안배를 빌리지 않는 것임.

 

선문염송집주 5책 1질로 발간되었습니다 (tistory.com)

 

선문염송집주 5책 1질로 발간되었습니다

2022년 3월 발행. 150부. 5책 1질. 총 4,842쪽, 12.5pt. 4․6배판. 하드. 양장. 정가 60만 원. 한문주석 1만 여 개로 염송본문의 各則을 해석하고 전체를 한글로 번역. 주석의 쪽 수가 본문을 조금 초

pyungsimsa.tistory.com

 

'종문무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종문무고(宗門武庫) 006  (0) 2022.07.28
종문무고(宗門武庫) 005  (0) 2022.07.27
종문무고(宗門武庫) 004  (0) 2022.07.27
종문무고(宗門武庫) 002  (0) 2022.07.26
종문무고(宗門武庫) 001  (0) 2022.0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