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문무고

종문무고(宗門武庫) 002

태화당 2022. 7. 26. 08:27

2*慈明*瑯瑯*大愚等數人辭*汾陽 相讓不肯爲*參頭 汾陽云 此行不可以*戒臘推 聽吾一頌 天無頭 *吉州城畔展戈矛 將軍疋馬林下過 圓州城裏鬧啾啾 慈明*出班云 楚圓何人敢當此*記莂 遂領衆拜辭

 

慈明; 楚圓(986-1039) 宋代臨濟宗僧 全州淸湘(廣西桂林)人 俗姓李 少爲儒生 潛心擧業 二十二歲迴心向道 於湘山隱靜寺得度 未久遊襄沔之間 與守芝谷泉結伴入洛陽 聞善昭之道望爲天下第一 遂赴汾州 依止二年 未許入室 每見必詬罵 或毁詆諸方 所訓亦皆流俗鄙事 師一夕訴之 語未竟 昭熟視而罵曰 是惡知識 敢裨販我 擧杖逐之 師欲伸解 昭掩其口 師忽大悟曰 是知臨濟道出常情 遂服役約十二年(一說七年) 盡領其旨 後至幷州 訪唐明智嵩 更與當世名士楊大年李遵勗 時聚論道 後欲歸鄕省母 過筠州(四川) 於洞山見曉聰 依止三年 又遊仰山 時楊大年寄書宜春太守黃宗且 請師住於袁州(江西)南源廣利寺 居三年 辭而省母 又謁神鼎洪諲 洪諲大加讚賞 由是聲名大揚 旣主潭州(湖南)道吾之席 次住石霜山崇勝寺 又轉南嶽福嚴寺 後遷潭州興化寺 寶元二年正月 於潭州興化寺示寂 壽五十四 諡號慈明禪師 法嗣五十人中 以黃龍慧南 楊岐方會最爲知名 各成一派 遺有石霜楚圓禪師語錄一卷(慧南重編) [續傳燈錄三 禪林僧寶傳二十一]

瑯瑯; 慧覺 北宋臨濟宗僧 西洛人 弱冠時 父爲衡陽太守 因疾而歿於任地 師扶靈柩自衡陽歸洛 過澧州藥山古寺 宛若宿居於此 遂緣此出家 復遊方參學 得法於汾陽善昭 後住滁州瑯琊山 大振臨濟宗風 世稱瑯琊慧覺 同時 明州雪竇重顯 唱雲門之法道 時人稱二甘露門 及今淮南地區猶蒙其遺化 其餘事蹟與生卒年皆未詳 [釋氏稽古略四 聯燈會要十二 續傳燈錄三 禪宗正脈十二]

大愚; 守芝 宋代臨濟宗僧 族王氏 太原人也 幼棄家 依潞州承天寺 試法華得度 從賢首諸師 嘗講金剛般若 名滿三河 學者宗之 時汾陽善昭禪師出世汾水 因往觀 聞其語異 遂投誠入室 未及閫 疑情頓釋 乃蒙印可 出住高安大愚 後遷南昌翠巖 嘉祐(1056-1063)初示寂 [普燈錄二 續傳燈錄三]

汾陽; 善昭(947-1024) 宋代臨濟宗僧 太原(山西)人 俗姓兪 少有大智 於一切文字 常能自然通曉 十四歲時父母相繼去世 遂剃髮受具足戒 遊歷諸方 參訪七十一員碩德尊宿 至汝州首山參省念禪師而大悟 嗣其法 後遊衡湘襄沔之間 郡首力邀 請住諸名刹 師皆不允 及首山省念入寂 方應西河道俗之請 住汾州(今山西汾陽)太子院 師平生閱大藏經六遍 廣說宗要 以三句四句三訣十八唱等機用接化學人 名震一時 師足不越閫者三十年 道俗益重 不敢直呼其名 而以汾陽稱之 宋仁宗天聖二年示寂 壽七十八 諡號無德禪師 有汾陽無德禪師語錄 汾陽昭禪師語錄 汾陽昭禪師語要等傳世 [傳燈錄十三 廣燈錄十六 續燈錄一 聯燈會要十一 佛祖歷代通載十八]

參頭; 參 參僧之意 卽自四方前來參禪習道之僧 頭 頭首之意 卽居於首位 竝行指導統理大衆之職稱 參頭卽居新到僧之首位 代行掛搭等各種軌式之人 又分四來參頭及行者參頭二種 前者單稱參頭 卽於告香普說等儀式之時 於新近歸堂之大衆中 推選曾經於此參習而熟諳禮樂儀規之人 以率領大衆行儀進退 百丈淸規二告香條 每夏前 告香新歸堂者推參頭一人 又云 若大衆均預告香 則首座爲參頭 又參頭之下有小參頭 卽於三位新到僧之中 推選一人爲小參頭 同書五謝掛搭條 參頭當具小圖習儀 三人一引 每引一人爲小參頭 此外 行者之參頭 稱爲參頭行者 乃於諸行者中 推選最年長之舊參者任之 其職責如百丈淸規二訓童行條 參頭行者令喝食行者報各局務 行堂前掛牌報衆 又輔佐參頭來帶領新到僧之人 稱爲副參 副參之候補者 稱爲望參 [禪苑淸規一 象器箋職位類]

戒臘; 又作法臘 指僧侶受具足戒以後之年數

吉州; 今江西省吉安府古安縣 吉州東南有行思之道場靑原山淨居寺 另外有無殷所住之禾山 行修所住之南源山 道殷所住之龍須山資國院等

出班; 同出衆

記莂; 同記別 佛記弟子成佛之事 分別劫數國土佛名壽命等事 謂爲記別 授此記別於弟子 謂爲授記

 

2자명(*慈明)ㆍ낭야(*瑯瑯)ㆍ대우(*大愚) 등 몇 사람이 분양(*汾陽)에게 고별()했다. 서로 사양하면서 참두(*參頭)가 됨을 긍낙(肯諾)하지 않았다. 분양이 이르되 이번 유행(遊行)은 계랍(*戒臘)으로써 추존(推尊)함은 옳지 못하다. 나의 1()을 들어라. 하늘에 우두머리가 없어/ 길주성(*吉州) 가에서 과모(戈矛; )를 펼치네/ 장군이 필마로 임하를 지나가거늘(疋馬林下過; 疋林破字)/ 원주성(圓州城) 속에서 시끄럽게 추추(啾啾)하는구나. 자명이 출반(*出班)하여 이르되 초원(楚圓)이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이 기별(*記莂)을 감당하겠습니까. 드디어 영중(領衆)하고 배사(拜辭)했다.

慈明; 초원(楚圓; 986-1039) 송대 임제종승. 전주(全州) 청상(淸湘; 廣西 桂林) 사람이며 속성(俗姓)은 이(). 어릴 적에 유생(儒生)이 되어 거업(擧業; 科擧應試하는 일)에 마음을 담갔는데 22세에 마음을 돌려 도()로 향했으며 상산(湘山) 은정사(隱靜寺)에서 득도(得度)했음. 오래지 않아 양면(襄沔)의 사이를 유람하다가 수지(守芝; 善昭法嗣)ㆍ곡천(谷泉; 善昭法嗣)과 결반(結伴)하여 낙양(洛陽)에 들어갔음. 선소(善昭; 임제하 5)의 도가 천하제일(天下第一)을 바라본다 함을 듣고 드디어 분주(汾州)에 다다라 2년을 의지(依止)했으나 입실(入室)을 허락하지 않았음. 매번 보기만 하면 반드시 꾸짖고 욕하였으며 혹은 제방(諸方)을 헐뜯고 흉보았으며 가르치는 바는 또한 다 유속(流俗; 世俗)의 비사(鄙事)였음. 스님이 어느 날 저녁 이를 하소연했는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선소가 찬찬히 보다가 욕하며 가로되 이 악지식(惡知識)이 감히 나를 비판(裨販; )하느냐, 주장자를 들어 쫓아내자 스님이 해설(解說)을 펴려고 하는데 선소가 그 입을 막았음. 스님이 홀연히 대오하고 가로되 이로 알지니 임제의 도가 상정(常情; 범상한 정)을 초출했다. 드디어 약 12(일설엔 7)을 복역(服役)하면서 그 지취를 다 영오(領悟)했음. 후에 병주(幷州)에 이르러 당명지숭(唐明智嵩; 首山省念法嗣)을 방문했고 다시 당세(當世)의 명사(名士) 양대년(楊大年)ㆍ이준욱(李遵勗)과 때때로 모여 도를 논했음. 후에 귀향하여 성모(省母; 모친을 살핌)하려고 균주(筠州; 四川)를 지나다가 동산(洞山)에서 효총(曉聰)을 뵙고 3년을 의지(依止)했음. 또 앙산(仰山)을 유람했는데 때에 양대년(楊大年)이 의춘태수(宜春太守) 황종차(黃宗且)에게 서신을 기탁해 스님을 원주(袁州; 江西) 남원(南源)의 광리사(廣利寺)에 주지(住持)하도록 청했음. 3년을 거주하다가 사퇴하고 성모(省母)했음. 또 신정홍인(神鼎洪諲; 임제하 5)을 알현(謁見)했는데 홍인이 찬상(讚賞)을 크게 더했으며 이로 말미암아 성명(聲名)을 크게 날렸음. 이미 담주(潭州; 湖南) 도오(道吾)의 법석을 주재(主宰)하고는 다음으로 석상산(石霜山) 숭승사(崇勝寺)에 주지(住持)했으며 또 남악 복엄사(福嚴寺)로 이전(移轉)하였고 후에 담주(潭州) 흥화사(興化寺)로 옮겼으며 보원(寶元) 2년 정월 담주 흥화사에서 시적(示寂)했으니 나이는 54며 시호(諡號)는 자명선사(慈明禪師). 법사(法嗣) 50인 중에 황룡혜남(黃龍慧南)과 양기방회(楊岐方會)가 가장 이름이 알려졌으며 각기 일파(一派)를 이루었음. 유작(遺作)에 석상초원선사어록(石霜楚圓禪師語錄; 慧南 重編) 1권이 있음 [속전등록3. 선림승보전21].

 

瑯瑯; 혜각(慧覺)이니 북송(北宋)의 임제종승. 서락(西洛) 사람. 약관(弱冠; 20세 안팎의 남자 나이) 때 아버지가 형양태수(衡陽太守)가 되었는데 질병으로 인해 임지(任地)에서 죽었음. 스님이 영구(靈柩)를 떠받치고 형양으로부터 서락(西洛)으로 돌아오다가 예주(澧州) 약산고사(藥山古寺)를 지나는데 완연(宛然)히 전부터 여기에 거주한 것 같았음. 드디어 이 때문에 출가하였고 다시 유방(遊方)하며 참학(參學)했으며 분양선소(汾陽善昭; 首山省念을 이었으니 임제하 5)에게서 법을 얻었음. 후에 저주(滁州) 낭야산(瑯琊山)에 머물며 임제의 종풍을 크게 진작(振作)했으니 세칭(世稱)이 낭야혜각(瑯琊慧覺). 동시대(同時代)에 명주(明州)의 설두중현(雪竇重顯; 운문하 3)이 운문의 법도(法道)를 제창(提唱)했는데 당시의 사람들이 2감로문(甘露門)이라 일컬었음. 지금에 이르도록 회남지구(淮南地區)에선 아직도 그 유화(遺化)를 입었음. 그 나머지 사적(事蹟)과 생졸(生卒)한 해는 다 미상(未詳)[석씨계고략4. 연등회요12. 속전등록3. 선종정맥12].

大愚; 수지(守芝)송대 임제종승. 씨족(氏族)은 왕씨며 태원 사람. 어릴 적에 집을 버리고 노주(潞州) 승천사에 의지했으며 법화경을 시험하여 득도(得度)했음. 현수종(賢首宗)의 여러 스님을 좇아 일찍이 금강반야를 강설해 명성이 삼하(三河)에 가득했으며 학자가 그를 종앙(宗仰)했음. 때에 분양선소선사(汾陽善昭禪師)가 분수(汾水)에서 출세하였고 인하여 가서 보았는데 그의 말이 이상(異常)함을 듣고 드디어 투성(投誠)하여 입실(入室)했는데 문지방에 미치기도 전에 의정(疑情)이 문득 풀렸으며 곧 인가(印可)를 입었음. 출세하여 고안(高安)의 대우(大愚)에 거주하다가 뒤에 남창(南昌)의 취암(翠巖)으로 옮겼으며 가우(1056-1063) 초에 시적(示寂)했음 [보등록2. 속전등록3].

汾陽; 선소(善昭; 947-1024)니 송대 임제종승. 태원(산서) 사람이며 속성은 유(). 어려서 대지(大智)가 있었으며 일체의 문자를 늘 능히 자연히 통효(通曉)했음. 14세 때 부모가 서로 이어 세상을 떠나자 드디어 머리 깎고 구족계를 받았음. 제방을 유력(遊歷)하며 71()의 석덕존숙(碩德尊宿)을 참방하였는데 여주(汝州) 수산(首山)에 이르러 성념선사(省念禪師)를 참알(參謁)하여 대오하고 그의 법을 이었음. 후에 형상(衡湘)과 양면(襄沔)의 사이를 노닐었는데 군수(郡首)가 힘껏 맞이하며 여러 명찰(名刹)에 주지할 것을 요청했으나 스님이 다 윤허(允許)하지 않았음. 수산성념(首山省念)이 입적함에 이르러 비로소 서하(西河) 도속(道俗; 僧俗)의 요청에 응해 분주(汾州; 지금의 산서 분양) 태자원(太子院)에 주()했음. 스님은 평생에 대장경을 6() 열람했고 종요(宗要)를 광설(廣說)했는데 3()4구ㆍ3()18() 등의 기용(機用)으로써 학인을 접화(接化)했으며 명성이 일시(一時)를 진동했음. 스님은 발이 문지방을 넘지 않은 것이 30년이었으며 도속(道俗)이 더욱 존중해 감히 그 이름을 바로 부르지 못하고 분양(汾陽)으로써 그를 호칭했음. 송 인종 천성 2년에 시적했으니 나이는 78이며 시호는 무덕선사(無德禪師). 분양무덕선사어록ㆍ분양소선사어록ㆍ분양소선사어요 등이 있어 세상에 전함 [전등록13. 광등록16. 속등록1. 연등회요11. 불조역대통재18].

參頭; ()은 참승(參僧)의 뜻이니 곧 사방(四方)으로부터 앞으로 와서 참선하며 습도(習道)하는 승인이며 두()는 두수(頭首)의 뜻이니 곧 수위(首位)에 거처하면서 아울러 대중을 지도통리(指導統理)를 행하는 직칭(職稱). 참두는 곧 신도승(新到僧)의 수위(首位)에 거처하면서 괘탑(掛搭) 등의 각종 궤식(軌式)을 대행(代行)하는 사람임. 또 사래참두(四來參頭) 및 행자참두(行者參頭) 2종으로 구분함. 전자(前者)는 단칭(單稱)하여 참두라 하나니 곧 고향(告香)ㆍ보설(普說) 등 의식(儀式)의 때에 새로 접근하여 귀당(歸堂)하는 대중 중에서 일찍이 이 참습(參習)을 경험하여 예악의규(禮樂儀規)를 익히 아는 사람을 추선(推選)하여 대중을 솔령(率領)해 의식(儀式)의 진퇴를 행함. 백장청규2 고향조(告香條) 매번 하전(夏前)에 고향(告香)하며 새로 귀당(歸堂)하는 자는 참두 1인을 추선(推選)한다. 또 이르되 만약 대중이 균일하게 미리 고향하면 곧 수좌가 참두가 된다. 또 참두의 아래 소참두(小參頭)가 있으니 곧 3()의 신도승(新到僧) 가운데서 1인을 추선하여 소참두로 삼음. 동서5(同書五) 사괘탑조(謝掛搭條) 참두는 마땅히 소도(小圖)를 갖추어 습의(習儀)한다. 3()1()이며 매인(每引)1인이 소참두가 된다. 이 밖에 행자의 참두는 일컬어 참두행자라 함. 곧 여러 행자 중에서 가장 연장(年長)의 구참자(舊參者)를 추선(推選)하여 이에 임명함. 그 직책은 백장청규2 훈동행조(訓童行條)와 같나니 참두행자는 할식행자(喝食行者)를 시켜 각자의 국무(局務)를 보고하게 하고 행당(行堂) 앞에 괘패(掛牌)하여 보중(報衆)한다. 또 참두를 보좌하여 와서 신도승을 대령(帶領)하는 사람을 일컬어 부참(副參)이라 하고 부참의 후보자를 일컬어 망참(望參)이라 함 [선원청규1. 상기전직위류].

戒臘; 또 법랍으로 지음. 승려가 구족계를 받은 이후의 햇수를 가리킴.

吉州; 지금의 강서성 길안부 고안현. 길주의 동남에 행사의 도량인 청원산 정거사가 있음. 따로 이외에 무은이 거주했던 바의 화산ㆍ행수가 거주했던 바의 남원산ㆍ도은이 거주했던 바의 용수산 자국원 등이 있음.

出班; 출중(出衆; 대중에서 나오다)과 같음.

記莂; 기별(記別)과 같음. 불타가 제자에게 성불의 일을 기록함이니 겁수ㆍ국토ㆍ불명ㆍ수명 등의 일을 분별함을 일컬어 기별이라 하고 이 기별을 제자에게 줌을 일컬어 수기(授記)라 함.

 

선문염송집주 5책 1질로 발간되었습니다 (tistory.com)

 

선문염송집주 5책 1질로 발간되었습니다

2022년 3월 발행. 150부. 5책 1질. 총 4,842쪽, 12.5pt. 4․6배판. 하드. 양장. 정가 60만 원. 한문주석 1만 여 개로 염송본문의 各則을 해석하고 전체를 한글로 번역. 주석의 쪽 수가 본문을 조금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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