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賢蓬頭 *江州人 *潙山眞如和尙會中*角立者 *見地明白*機鋒*頴脫 有超師之作 但行業不謹 *一衆易之 眞如結菴於方丈後 令賢獨處 唯通小徑從方丈前過 不許*兄弟往還 後二年 擧*首衆*立僧 *秉拂說法有大過人處 一衆由是*改觀 後往*郢州興陽 數載道大行 *示寂 肉身不壞 *圜悟和尙在潙山目擊其事 妙喜遊興陽 尙及見其肉身
●賢蓬頭; 興陽賢 宋代臨濟宗僧 江州(江西九江)人 居郢州興陽 叢林稱謂賢蓬頭 嗣法大潙慕喆 [續傳燈錄十七]
●江州; 今江西省九江
●潙山眞如; 慕喆 見上【13】眞如
●角立; 一超群 二爭持 角 競爭 比試 此指一
●見地; 對禪法的認識 見解 亦作見處
●機鋒; 指禪機之敏銳 禪機鋒芒 又作鋒機
●頴脫; 同穎脫 指如錐在囊中而脫出 才能出衆者
●一衆; 所有人 大衆 指寺院所有僧人
●兄弟; 自少壯卽居於叢林而諳熟淸規者 稱山中之兄弟 又禪刹同門之人 亦稱兄弟 卽雲兄水弟之意 廣指大衆 [象器箋五稱呼類]
●首衆; 首座稱首衆 [象器箋六]
●立僧; 卽立僧首座 指禪林僧堂中坐於後堂首座之分手位者 卽位於後堂首座之左右 竝排向內或向外 立僧 指分派職位之僧 卽會下僧衆中之第一座 充任立僧首座者 竝無一定之人 乃於正規首座之外 別於西堂或前堂及諸耆宿中 擇選竝敦請有道博達之人 爲衆開法 或請大方之尊宿充任之 職責極重 禪苑淸規七請立僧條 退院尊宿 首座 藏主 如合衆望 可擧立僧 卽住持人陞座擧白訖 知事大衆詣寮禮請(請辭云 大衆傾心 久思示誨 伏望慈悲 俯賜開允) 可見其事之愼重 此外 立僧首座坐禪之場所 稱爲立僧床 立僧首座床 立僧板頭 立僧首座普說終了 欲退回首座寮時 則將普說入室二牌納入方丈 稱爲立僧納牌 [百丈淸規上祝釐章 下兩序章 象器箋殿堂類 坐位類 職位類]
●秉拂; 一寺之首座代住持秉拂子 上法座開示大衆者也 凡前堂首座 後堂首座 東藏主 西藏主 書記 稱秉拂之五頭首 爲各有秉拂之資格者 又秉拂者之侍者 稱爲秉拂侍者 [百丈淸規七 象器箋職位類]
●改觀; 改變原來看法
●郢州; 今湖北鍾祥 隋以前的郢州一般指後來的鄂州 治所在今武漢市武昌 南朝宋從荊 湘 江 豫四州析置 隋滅陳 改爲鄂州 另一郢州以今鍾祥爲治所 [百度百科] ▲湖廣名勝志八荊州府曰 春秋楚文王自丹陽徙都於此 謂之郢都
●示寂; 寂者圓寂 又寂滅也 是涅槃之譯語 示寂者爲示現涅槃之義 言佛菩薩及高德之死也
●圜悟; 克勤(1063-1135) 又作克懃 宋代楊岐派僧 四川崇寧人 俗姓駱 字無著 幼於妙寂院依自省出家 受具足戒後 於成都依圓明學習經論 後至五祖山參法演 蒙其印證 與佛鑑慧懃 佛眼淸遠齊名 世有演門二勤一遠之稱 被譽爲叢林三傑 崇寧(1102-1106)中 於成都昭覺寺開法 政和初年(1111)至荊州 當世名士張無盡禮謁之 與之談論華嚴要旨及禪門宗趣 復受澧州刺史之請 住夾山靈泉禪院 復徙道林 時因樞密鄧子常之奏請 敕賜紫服及佛果禪師之號 政和中 奉詔移住金陵蔣山 次住天寧萬壽 大振宗風 後居於金山 高宗幸揚州時 詔其入對 賜號圜悟 世稱圜悟克勤 後歸成都昭覺寺 紹興五年示寂 壽七十三 諡號眞覺禪師 弟子有大慧宗杲 虎丘紹隆等禪門龍象 曾於夾山之碧巖 集雪竇重顯之頌古百則 編成碧巖錄十卷 世稱禪門第一書 此外有圜悟佛果禪師語錄二十卷 [大慧普覺禪師年譜 僧寶正續傳四 嘉泰普燈錄十一 佛祖歷代通載三十 釋氏稽古略四]
【16】 현봉두(*賢蓬頭)는 강주(*江州) 사람이다. 위산진여(*潙山眞如) 화상 회중(會中)에 각립(*角立)한 자니 견지(*見地)가 명백하고 기봉(*機鋒)이 영탈(*頴脫)하여 스승을 초과하는 작략(作略)이 있었지만 단지 행업(行業)이 불근(不謹; 삼가지 않음)하여 일중(*一衆)이 그를 쉽게 여겼다. 진여(眞如)가 방장 뒤에 결암(結菴)하고 현(賢)으로 하여금 독처(獨處)하게 했다. 오직 작은 길을 통하여 방장 앞으로 좇아 지나가게 하고 형제(*兄弟)의 왕환(往還)을 허락하지 않았다. 2년 후 수중입승(*首衆*立僧)으로 천거했는데 병불(*秉拂)하여 설법하매 타인을 크게 초과하는 곳이 있었다. 일중(一衆)이 이로 말미암아 개관(*改觀)했다. 후에 영주(*郢州) 흥양(興陽)으로 가서 몇 해 동안 도를 크게 행하다가 시적(*示寂)했는데 육신이 불괴(不壞)했다. 원오화상(*圜悟和尙)이 위산(潙山)에 있으면서 그 일을 목격했고 묘희(妙喜)도 흥양(興陽)을 유람하다가 또한(尙) 그의 육신을 봄에 이르렀다.
●賢蓬頭; 흥양현(興陽賢)이니 송대 임제종승. 강주(강서 구강) 사람. 영주 흥양에 거주했고 총림에서 호칭해 이르기를 현봉두(賢蓬頭)라 했음. 대위모철(大潙慕喆)의 법을 이었음 [속전등록17].
●江州; 지금의 강서성 구강(九江).
●潙山眞如; 모철(慕喆)이니 위 【13】 진여(眞如)를 보라.
●角立; 1. 무리를 초월함. 2. 다투어 가짐. 각(角)은 경쟁이며 비시(比試)임. 여기에선 1을 가리킴.
●見地; 선법에 대한 인식ㆍ견해. 또한 견처로 지음.
●機鋒; 선기(禪機)의 민예(敏銳; 민첩하고 예리함)와 선기의 봉망(鋒芒; 칼날)을 가리킴. 또 봉기(鋒機)로 지음.
●頴脫; 영탈(穎脫)과 같음. 송곳이 주머니 속에 있다가 탈출함과 같이 재능이 출중한 자를 가리킴.
●一衆; 있는 바의 사람. 대중. 사원에 있는 바 승인을 가리킴.
●兄弟; 소장(少壯)으로부터 곧 총림에 거주하면서 청규를 암숙(諳熟; 외우고 익힘)한 자를 일컬어 산중의 형제라 함. 또 선찰의 동문의 사람을 또한 일컬어 형제라 하나니 곧 운형수제(雲兄水弟)의 뜻. 널리 대중을 가리킴 [상기전5칭호류].
●首衆; 수좌(首座)를 일컬어 수중(首衆)이라 함 [상기전6] .
●立僧; 즉 입승수좌(立僧首座)니 선림 승당 가운데 후당수좌(後堂首座)의 분수위(分手位)에 앉는 자를 가리킴. 곧 후당수좌의 좌우에 위치하며 나란히 향내(向內)나 혹은 향외(向外)에 안배(安排)함. 입승은 분파직위(分派職位)의 승려를 가리키며 곧 회하(會下) 승중(僧衆) 중의 제일좌(第一座)임. 입승수좌에 충임(充任)하는 자는 모두 일정한 사람이 없음. 곧 정규수좌(正規首座) 외에 따로 서당(西堂) 혹 전당(前堂) 및 여러 기숙(耆宿) 중에서 도가 있는 박달(博達)의 사람을 택선(擇選)하거나 아울러 돈청(敦請)하여 대중을 위해 개법(開法)함. 혹은 대방(大方)의 존숙을 초청하여 그에 충임하는데 직책이 극히 중요함. 선원청규7 청입승조(請立僧條). 퇴원한 존숙ㆍ수좌ㆍ장주(藏主)나 중망(衆望)에 합당할 것 같으면 가히 입승으로 천거한다. 곧 주지인이 승좌하여 천거하여 알림을 마치면 지사와 대중이 요(寮)에 나아가 예청(禮請)한다 (請辭에 이르되 대중이 마음을 기울여 示誨를 오래 생각했습니다. 자비를 伏望하오니 開允을 俯賜하십시오). 가히 그 일의 신중함이 보임. 이 밖에 입승수좌가 좌선하는 장소를 일컬어 입승상(立僧床)ㆍ입승수좌상(立僧首座床)ㆍ입승판두(立僧板頭)라 함. 입승수좌가 보설을 종료하고 수좌료로 퇴회(退回)하려고 할 때 곧 보설ㆍ입실 2패(牌)를 방장에게 납입함을 일컬어 입승납패(立僧納牌)라 함 [백장청규상축희장, 하양서장. 상기전전당류, 좌위류, 직위류].
●秉拂; 한 사원의 수좌가 주지를 대신해 불자를 잡고 법좌에 올라 대중에게 개시(開示)하는 것임. 무릇 전당수좌ㆍ후당수좌ㆍ동장주(東藏主)ㆍ서장주ㆍ서기를 일컬어 병불의 5두수(頭首)라 함. 각기 병불의 자격이 있는 자가 됨. 병불하는 자의 시자를 일컬어 병불시자라 함 [백장청규7. 상기전직위류].
●改觀; 원래의 간법(看法)을 개변(改變)함.
●郢州; 지금의 호북 종상(鍾祥). 수(隋) 이전의 영주(郢州)는 일반으로 후래의 악주(鄂州)를 가리키며 치소(治所)는 지금의 무한시(武漢市) 무창에 있었음. 남조(南朝) 송(宋)은 형(荊)ㆍ상(湘)ㆍ강(江)ㆍ예(豫) 4주(州)로부터 쪼개어 설치했음. 수(隋)가 진(陳)을 멸하자 고쳐 악주라 했고 다른 1영주(郢州)는 지금의 종상(鍾祥)을 치소로 삼았음 [백도백과]. ▲호광명승지8 형주부(荊州府)에 가로되 춘추 초문왕(楚文王)이 단양으로부터 여기로 도읍을 옮기고 이를 일러 영도(郢都)라 했다.
●示寂; 적(寂)이란 것은 원적이며 또 적멸이니 이는 열반의 역어(譯語)임. 시적이란 것은 열반을 시현함의 뜻. 말하자면 불보살 및 고덕의 죽음임.
●圜悟; 극근(克勤; 1063-1135)이니 또 극근(克懃)으로 지음. 송대 양기파승. 사천 숭녕(崇寧) 사람이며 속성은 낙이며 자는 무착. 어릴 적에 묘적원에서 자성에게 의지해 출가했고 구족계를 받은 후에 성도(成都)에서 원명에게 의지해 경론을 학습했음. 후에 오조산에 이르러 법연(法演)을 참알해 그의 인증을 받았음. 불감혜근(佛鑑慧懃)ㆍ불안청원(佛眼淸遠)과 더불어 이름이 가지런해 세상에 연문(演門; 法演門下)의 이근일원(二勤一遠)의 칭호가 있으며 총림의 삼걸(三傑)이란 명예를 입었음. 숭녕(1102-1106) 중 성도 소각사(昭覺寺)에서 개법했음. 정화 초년(1111) 형주에 이르러 당세(當世)의 명사(名士)인 장무진을 예알해 그와 더불어 화엄의 요지(要旨) 및 선문의 종취(宗趣)를 담론했음. 다시 예주자사의 청을 받아 협산의 영천선원에 주지하다가 다시 도림으로 이사했음. 때에 추밀(樞密) 등자상의 주청(奏請)으로 인해 자복(紫服)과 및 불과선사(佛果禪師)란 호를 칙령으로 주었음. 정화(1111-1117) 중에 조칙(詔勅)을 받들어 금릉의 장산(蔣山)으로 이주했고 다음에 천녕의 만수(萬壽)에 거주하면서 종풍을 크게 진작(振作)했음. 후에 금산에 거주했는데 고종이 양주에 거둥했을 때 그를 불러 입대(入對. 궁에 들어가 마주함)했으며 원오(圜悟)란 호를 주었으니 세칭이 원오극근(圜悟克勤)임. 후에 성도 소각사로 돌아갔으며 소흥 5년에 시적했으니 나이는 73이며 시호는 진각선사(眞覺禪師). 제자에 대혜종고ㆍ호구소륭 등의 선문의 용상(龍象)이 있음. 일찍이 협산의 벽암(碧巖)에서 설두중현의 송고(頌古) 100칙을 모아 벽암록 10권을 편성했는데 세칭이 선문제일서(禪門第一書)임. 이 밖에 원오불과선사어록 20권이 있음 [대혜보각선사년보. 승보정속전4. 가태보등록11. 불조역대통재30. 석씨계고략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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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발행. 150부. 5책 1질. 총 4,842쪽, 12.5pt. 4․6배판. 하드. 양장. 정가 60만 원. 한문주석 1만 여 개로 염송본문의 各則을 해석하고 전체를 한글로 번역. 주석의 쪽 수가 본문을 조금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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