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顒華嚴 *圓照本禪師之子 因喫攧有省 作偈曰 這*一交這一交 萬兩黃金也合消 頭上笠腰下包 淸風明月杖頭挑 *富鄭公常參問之 一日見上堂左右顧視忽契悟 以頌寄圓照曰 一見顒師悟入深 因緣傳得老師心 江山千里離云隔 目對靈光與妙音 鄭公罷相居*洛中 思顒示誨 請住*招提 聞顒入境躬出迓之 臨登車 *司馬溫公適至 問相公何往 鄭公曰 接招提顒禪師 溫公曰 某亦同去 *聯鑣出郭 候於*郵亭久之 忽見數十擔過 溫公問誰*行李 荷擔者應曰 新招提和尙行李 溫公遂索馬歸 鄭公曰 要見華嚴 何故先歸 溫公曰 某已見他了 竟先還 妙喜嘗見李儀中*少卿言之
●顒華嚴; 修顒 宋代雲門宗僧 字證悟 趙城(山西洪洞)梁氏 參蘇州瑞光圓照宗本得法 初住壽州資聖 富鄭公甚加敬重 請住西京少林招提 末住舒州投子 道譽稱盛 [續燈錄十六 五燈會元十六 無錫南禪寺志二]
●圓照本; 宗本(1020-1099) 北宋雲門宗僧 常州無錫(江蘇無錫)人 俗姓管 字無喆 十九歲 入蘇州承天永安寺道昇禪師門下 苦修十年方剃髮受具足戒 又服勤三年 後拜辭道昇至池州景德寺 參天衣義懷 有所契悟 義懷推擧於蘇州瑞光寺開法 法席日盛 徒衆達五百人 後住淨慈寺 旣而蘇州道俗請師往萬壽龍華二寺弘法 迎者千餘人 元豐五年(1082) 受神宗之詔 爲相國寺慧林禪刹第一祖 開法翌日 帝召至延和殿問道 哲宗詔賜圓照禪師 元祐元年(1086)以老乞歸 出都城 送行者車騎相屬 師臨別敎誨 聞者流涕 晩年住平江靈光寺 閉門修禪 專力淨業 元符二年示寂 壽八十 著有歸元直指集二卷 慧辨錄(別錄)一卷 [五燈會元十六 佛祖統紀二十七 禪林僧寶傳十四 釋氏稽古略四]
●一交; 交 量詞 次 遍
●富鄭公; 富弼(1004-1083) 宋代雲門宗居士 字彦國 洛陽(今屬河南)人 慶曆三年(1043) 拜樞密副使 與范仲淹一起推行慶歷新政 至和二年(1055) 召拜同中書門下平章事 無所興革 唯務守成 時稱賢相 英宗卽位 召拜樞密使 封鄭國公 後因與王安石政見不合求退 出判亳州 聞修顒禪師主投子山 遂前往參謁 言下省悟 又請修顒至府中 日夜參問 晩年居家日誦楞嚴經 素食禮佛 著作今存富鄭公詩集 [宋史三一三 五燈會元十六]●洛中; 洛下 指洛陽城
●招提; 此指西京少林招提 ○招提; <梵> catur-diśa 具名柘鬪提奢 譯曰四方 謂四方之僧爲招提僧 四方僧之施物爲招提僧物 四方僧之住處爲招提僧坊 北魏太武帝 於始光元年(424) 造立伽藍 以招提名之 招提二字 遂爲寺院之異名 ▲增一阿含經十四 毘沙鬼白世尊曰 我今以此山谷施招提僧 唯願世尊爲之受之 [玄應音義十六 慧琳音義二十六 釋氏要覽上 名義集七 大宋僧史略上]
●司馬溫公; 司馬光(1019-1086) 字君實 號迂叟 陝州夏縣(今山西夏縣)涑水鄕人 世稱涑水先生 北宋政治家 史學家 文學家 歷仕仁宗 英宗 神宗 哲宗四朝 卒贈太師 溫國公 諡文正 ○司馬; 官名 隋唐主要行政區是州 州官稱刺史 屬官有長史司馬等 又中華姓氏之一 複姓 源於西周 以官職爲姓 西周始置 司馬與司徒司空並稱三有司 [百度百科] ▲祖庭事苑六 漢有複姓五氏 司馬 司功 司徒 司宼 司空 並以官爲氏
●聯鑣; 謂幷騎而行 鑣 馬嚼子兩端露出嘴外的部分 代指乘騎
●郵亭; 一古代傳遞信件的人沿途休息的地方 二郵局所設以辦理郵政業務的亭 [百度漢語]
●行李; 一行走 二行脚時所帶的複包 三參習 參禪 四悟道者的機用實踐 五行人 此指二
●少卿; 官名 北魏太和時所設官名 北齊時爲正卿的副職 隋唐至淸亦沿置 [百度百科]
【22】 옹화엄(*顒華嚴)은 원조본(*圓照本) 선사의 자(子)다. 끽전(喫攧; 넘어지다)으로 인해 성찰이 있었는데 게를 지어 가로되 이 1교(*一交) 이 1교(交)여/ 만량(萬兩) 황금도 또한 합당히 소비한다/ 두상(頭上)엔 삿갓이며 요하(腰下)엔 봇짐이니/ 청풍과 명월을 장두(杖頭; 주장자. 頭는 後綴)에 메었다. 부정공(*富鄭公)이 늘 그에게 참문(參問)했다. 어느 날 상당하여 좌우를 돌아보는 것을 보다가 홀연히 계오(契悟)하였다. 송(頌)을 원조(圓照)에게 기탁했으니 가로되 옹사(顒師)를 일견(一見)하자 깊이 오입(悟入)했나니/ 인연을 노사(老師)의 마음에 전득(傳得)합니다/ 강산(江山)이 천 리 떨어졌음을 격(隔)이라고 이르지만/ 눈으로 영광(靈光)과 묘음(妙音)을 대했다. 정공(鄭公)이 파상(罷相; 재상의 관직에서 파면됨)하고 낙중(*洛中)에 거주했는데 옹(顒)의 시회(示誨)를 사유하고는 초제(*招提)에 주지(住持; 住)하기를 청했다. 옹(顒)이 입경(入境)했다 함을 듣고 몸소 그를 나가서 맞이하는데(迓) 등거(登車)에 임해 사마온공(*司馬溫公)이 마침 이르러 묻되 상공(相公)은 어디로 갑니까. 정공이 가로되 초제(招提) 옹선사(顒禪師)를 영접합니다. 온공(溫公)이 가로되 모(某)도 또한 함께 가겠습니다. 연표(*聯鑣)하여 성곽을 나섰다. 우정(*郵亭)에서 기다린 지 오래 되었는데 홀연히 수십 담(擔; 짐)이 지나감을 보았다. 온공이 묻되 누구의 행리(*行李)인가. 짐을 진 자가 응답해 가로되 신초제(新招提) 화상의 행리입니다. 온공이 드디어 말을 찾아 귀환하려고 했다. 정공이 가로되 화엄(華嚴; 顒華嚴)을 보려고 하더니 무슨 연고로 먼저 귀환합니까. 온공이 가로되 모(某)가 이미 그를 보아 마쳤습니다. 마침내 먼저 귀환했다. 묘희(妙喜)가 일찍이 이의중(李儀中) 소경(*少卿)이 이를 말하는 것을 보았다.
●顒華嚴; 수옹(修顒)이니 송대 운문종승. 자는 증오며 조성(산서 홍동) 양씨. 소주 서광 원조종본(圓照宗本)을 참해 득법했고 처음엔 수주 자성에 거주했음. 부정공(富鄭公)이 심히 경중(敬重)을 더했고 청하여 서경 소림초제(少林招提)에 주(住)했음. 마지막에 서주 투자(投子)에 주(住)했으며 도예(道譽)를 칭성(稱盛)했음 [속등록16. 오등회원16. 무석남선사지2].
●圓照本; 종본(宗本; 1020-1099)이니 북송 운문종승. 상주 무석(無錫; 江蘇 무석) 사람이며 속성(俗姓)은 관(管)이며 자(字)는 무철(無喆). 19세에 소주 승천 영안사(永安寺)의 도승선사(道昇禪師) 문하에 들어가 고되게 수행하기 10년 만에 비로소 머리 깎고 구족계를 받았음. 또 복근(服勤)하기 3년이었음. 후에 도승을 배사(拜辭; 예배하고 고별)하고 지주(池州) 경덕사(景德寺)에 이르러 천의의회(天衣義懷; 운문하 4세. 설두중현의 법사)를 참알(參謁)하고 계오(契悟)한 바가 있었음. 의회가 추거(推擧; 推薦)하여 소주 서광사(瑞光寺)에서 개법(開法)했음. 법석이 날로 흥성하여 도중(徒衆)이 5백 인에 도달했음. 후에 정자사(淨慈寺)에 주지(住持)했음. 이미 그러고선 소주(蘇州)의 도속(道俗)이 스님을 청하는지라 만수(萬壽)ㆍ용화(龍華) 두 절로 가서 홍법(弘法)했는데 영접하는 자가 천여 인이었음. 원풍5년(元豐五年; 1082) 신종(神宗)의 조서(詔書)를 받아 상국사혜림선찰(相國寺慧林禪刹)의 제1조(第一祖)가 되었음. 개법한 다음날 황제가 불러 연화전(延和殿)에 이르게 하여 도를 물었음. 철종(哲宗)은 조칙으로 원조선사(圓照禪師)란 호를 주었음. 원우원년(元祐元年; 1086) 늙었기 때문에 돌아감을 걸구(乞求)하였는데 도성(都城)을 나오자 송행(送行; 餞送)하는 자의 거기(車騎; 수레와 말)가 서로 이어졌으며 스님이 임별(臨別)에 교회(敎誨)하자 듣는 자가 눈물을 흘렸음. 만년에 평강(平江)의 영광사(靈光寺)에 주지(住持)하며 문을 닫고 수선(修禪)하며 정업(淨業)에 전력하였음. 원부2년(元符二年)에 시적(示寂)했으니 나이는 80이며 저서에 귀원직지집(歸元直指集) 2권과 혜변록(慧辨錄; 別錄) 1권이 있음 [오등회원16. 불조통기27. 선림승보전14. 석씨계고략4].
●一交; 교(交)는 양사니 차(次), 편(遍).
●富鄭公; 부필(富弼; 1004-1083)이니 송대 운문종거사. 자는 언국(彦國)이며 낙양(지금 하남에 속함) 사람. 경력(慶曆) 3년(1043) 추밀부사에 제배(除拜)되었고 범중엄(范仲淹)과 경력신정(慶歷新政)을 한 번 일으켜 추행(推行)했음. 지화 2년(1055) 불러 동중서문하평장사에 제배(除拜)했는데 개혁을 일으키는 바가 없었고 오직 수성(守成)에 힘썼으며 당시에 현상(賢相)으로 일컬었음. 영종이 즉위하자 불러 추밀사에 제배(除拜)하고 정국공(鄭國公)에 봉했음. 후에 왕안석과 정견(政見)이 맞지 않음으로 인해 물러남을 구해 나가서 박주(亳州)를 맡았음. 수옹선사(修顒禪師)가 투자산을 주지(主持)한다 함을 듣고 드디어 앞으로 나아가 참알했고 언하에 성오(省悟)했음. 또 수옹을 초청해 부중(府中)에 이르게 하고 일야로 참문했음. 만년에 거가(居家)하면서 날마다 릉엄경을 외웠고 소식(素食)하며 예불했음. 저작은 여금에 부정공시집이 남았음 [송사313. 오등회원16].
●洛中; 낙하(洛下)니 낙양성을 가리킴.
●招提; 여기에선 서경 소림초제(少林招提)를 가리킴. ○招提; <범> catur-diśa. 갖춘 이름은 자투제사(柘鬪提奢)니 번역해 가로되 사방(四方)임. 이르자면 사방의 승(僧)을 초제승(招提僧)이라 하고 사방승(四方僧)의 시물(施物)을 초제승물이라 하고 사방승의 머무는 곳을 초제승방(招提僧坊)이라 함. 북위 태무제(太武帝)가 시광 원년(424) 가람(伽藍)을 조립하고 초제(招提)로 이름했는데 초제 2자(字)는 드디어 사원의 다른 이름이 되었음. ▲증일아함경14. 비사귀(毘沙鬼)가 세존에게 사뢰어 가로되 내가 여금에 이 산곡(山谷)을 초제승(招提僧)에게 보시하겠습니다. 오직 원하오니 세존은 이것을 받으십시오 [현응음의16. 혜림음의26. 석씨요람상. 명의집7. 대송승사략상].
●司馬溫公;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이니 자는 군실(君實)이며 호는 우수니 섬주 하현(지금의 산서 하현) 속수향 사람. 세칭이 속수선생(涑水先生)이니 북송의 정치가ㆍ사학가ㆍ문학가임. 인종ㆍ영종ㆍ신종ㆍ철종 4조(朝)에 역사(歷仕)했음. 죽어서는 태사(太師)ㆍ온국공(溫國公)을 추증했으며 시호는 문정(文正). ○司馬; 벼슬 이름. 수ㆍ당의 주요 행정구(行政區)는 이 주(州)며 주관(州官)을 일컬어 자사라 했고 속관(屬官)에 장사(長史)ㆍ사마(司馬)등이 있었음. 또 중화 성씨의 하나니 복성(複姓)임. 서주(西周)에서 기원(起源)했으며 관직으로 성을 삼았음. 서주에서 처음 설치했고 사마와 사도(司徒)ㆍ사공(司空)을 병칭하여 3유사(有司)라 했음 [백도백과]. ▲조정사원6. 한(漢)에 복성 5씨가 있었다. 사마ㆍ사공ㆍ사도(司徒)ㆍ사구ㆍ사공이니 모두 관직으로 씨를 삼았다.
●聯鑣; 이르자면 병기(幷騎)하여 행함. 표(鑣; 재갈 표)는 마작자(馬嚼子; 말의 재갈) 양단에 주둥이 밖으로 노출된 부분. 승기(乘騎; 騎馬)를 대지(代指)함.
●郵亭; 1. 고대 신건(信件; 서신)을 전체(傳遞; 서로 전달)하는 사람이 연도(沿途; 沿路)에서 휴식하는 지방(地方). 2. 우국(郵局; 우체국)에서 설치한 바, 우정업무(郵政業務)를 판리(辦理)하는 정(亭) [백도한어]
●行李; 1.행주(行走; 다니다). 2. 행각할 때 휴대하는 바의 복포(複包; 보따리). 3. 참습(參習)ㆍ참선. 4. 오도자(悟道者)의 기용(機用)의 실천. 5. 행인. 여기에선 2를 가리킴.
●少卿; 벼슬 이름. 북위 태화(太和) 때 설치한 벼슬 이름이며 북제 때 정경(正卿)의 부직(副職)이 되었고 수ㆍ당에서 청에 이르기까지 따라서 설치했음 [백도백과].
선문염송집주 5책 1질로 발간되었습니다 (tistory.com)
선문염송집주 5책 1질로 발간되었습니다
2022년 3월 발행. 150부. 5책 1질. 총 4,842쪽, 12.5pt. 4․6배판. 하드. 양장. 정가 60만 원. 한문주석 1만 여 개로 염송본문의 各則을 해석하고 전체를 한글로 번역. 주석의 쪽 수가 본문을 조금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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