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문무고

종문무고(宗門武庫) 040

태화당 2022. 8. 9. 08:41

40*保寧勇禪師二*上足處淸處凝 *同參*白雲端禪師 凝在侍者寮最久 端有膈氣疾 凝常煨蘆菔 以備無時之需 端作*傅大士*講經因緣頌曰 大士何曾解講經 *誌公方便且*相成 一揮案上俱無取 直得*梁王怒眼睛 擧爲凝曰 努底是什麽 此一句乃爲凝說*老婆禪也 凝以爲親聞 故綴於頌下 後住*舒州天柱山 淸住龍舒太平 有大機辯 *五祖演和尙畏敬之 淸謂凝曰 吾弟禪 乃是爲老和尙煨蘆菔換得底

 

保寧勇; 仁勇 宋代楊岐派僧 俗姓竺 四明人 幼年出家 初習天台敎典 能通前人旨意 往謁雪竇重顯 重顯譏之爲央庠座主 仁勇憤悱而去 往潭州(今湖南長沙)雲蓋山 參楊岐方會 一語未了 頓悟禪旨 而嗣其法 楊岐寂後 與同參白雲守端雲遊四方 硏討玄奥 後住持金陵(今江蘇南京)保寧寺 有保寧仁勇禪師語錄一卷行世 [五燈會元九 普燈錄四]

上足; 指上首弟子 卽門下會中之優秀弟子

白雲端; 守端(1025-1072) 宋代楊岐派僧 湖南衡陽人 俗姓周(一作葛) 二十歲依茶陵郁得度 後至諸方參學 於楊岐方會處得悟 承其法嗣 其後由圓通居訥推擧 住於江西承天禪院 歷住圓通崇勝禪院 安徽法華山證道禪院 龍門山乾明禪院 興化禪院 白雲山海會禪院等處 弘揚佛法 宋神宗熙寧五年示寂 壽四十八 門人法演編有白雲守端禪師語錄二卷 白雲端和尙廣錄四卷 [續傳燈錄十三 五燈會元十九 釋氏稽古略四]

同參; 指同事一師而共同參禪者 亦指共同行脚參訪者

傅大士; 傅翕(497-569) 南朝梁代禪宗著名之尊宿 東陽烏傷(浙江義烏)人 字玄風 號善慧 又稱善慧大士 魚行大士 傅大士 雙林大士 東陽大士 烏傷居士 與寶誌共稱爲梁代二大士 嘗與里人共捕魚 每得魚則盛於竹籠 沈入深水 竝謂 欲去者去 欲止者留 時人以之爲愚 年十六 娶劉氏女妙光 生普建普成二子 年二十四 於沂水取魚 適逢胡僧嵩頭陀(名達摩) 遂棄魚具 入烏傷縣松山雙檮樹下結庵 自號雙林樹下當來解脫善慧大士 自稱由兜率天宮來說法 日常營作 夜歸行道 苦行七年 自謂得首楞嚴定 竝能通儒道典籍 學徒漸集 衆皆虔誠精進 不惜身命 梁大通六年(53 4) 遣弟子傅暀上書致武帝 獻上中下三善之策 閏十二月 帝召入禁闕 講經於重雲殿 大同元年(535)四月 還松山 五年 重赴鍾山 於壽光殿與帝論眞諦 作偈頌呈之 六年(一說五年) 營造松山雙檮樹間之佛殿 九重塼塔 竝於斯地寫經律千餘卷 此卽雙林寺 七年 自宣爲賢劫千佛之一佛 十年 捨屋宇田地 設大施會 太淸二年(549) 欲焚身供養三寶 弟子堅留之 代士燒身者十九人 士乃止之 未久亂起 梁亡 傅翕家居徒衆甚多 講說不輟 每率徒衆焚指燃臂以供佛 嘗營齋轉法華經二十一遍 屢設無遮會 竝於會稽鑄寶王像十尊 爲便於讀大藏經 建有輪藏 令衆轉之 可得大利益 故後世所作輪藏皆安置其父子三人之像 此外 士於天台之一心三觀有其獨到之領略 而以三觀四運爲其心要 倡導三觀一心四運推檢之說 陳太建元年四月 集弟子告誡畢 趺坐入寂 壽七十三 弟子葬之於雙林山頂 號彌勒下生 撰有心王銘 語錄四卷 還源詩等 [善慧大士錄 續高僧傳二十五 傳燈錄二十七 同三十 神僧傳四] 大士; 菩薩之通稱也 或以名聲聞及佛 士者凡夫之通稱 簡別於凡夫而稱爲大 又士者事也 爲自利利他之大事者 謂之大士 韓詩外傳 孔子與子路子貢顔淵言志 謂子路曰 勇士哉 謂子貢曰 辨士哉 謂顔淵曰 大士哉 法華文句記二 大士者 大論稱菩薩爲大士 亦曰開士 士謂士夫 凡人之通稱 以大開簡別故曰大等

傅大士講經因緣; 碧巖錄第六十七則 梁武帝請傅大士講金剛經 大士便於座上 揮案一下 便下座 武帝愕然 誌公問 陛下還會麽 帝云 不會 誌公云 大士講經竟

誌公; 寶誌(418-514) 南朝僧 又作寶志保誌 世稱寶公 志公 誌公和尙 金城(陝西南鄭 或江蘇句容)人 俗姓朱 年少出家 師事道林寺僧儉 修習禪業 劉宋泰始年間(466-471) 往來於都邑 居無定所 時或賦詩 其言每似讖記 四民遂爭就問福禍 齊武帝以其惑衆 投之於獄 然日日見師遊行於市里 乃往獄中檢視 卻見師猶在獄中 帝聞之 乃迎入華林園供養 禁其出入 而師不爲所拘 仍常遊訪龍光 罽賓 興皇 淨名等諸寺 至梁武帝建國 始解其禁 師每與帝長談 所言皆經論義 師於天監十三年十二月示寂 壽九十六 敕葬鍾山獨龍阜 於墓側立開善寺 諡號廣濟大師 後代續有追贈 如妙覺大師 道林眞覺菩薩 道林眞覺大師 慈應惠感大師 普濟聖師菩薩 一際眞密禪師等號 師嘗爲學者述文字釋訓三十卷 十四科頌十四首 十二時頌十二首 大乘讚十首等 [梁高僧傳十 佛祖統紀三十六 同三十七 佛祖歷代通載十 寶華山志七誌公法師墓誌銘 神僧傳四]

相成; 互相補充 互相成全

梁王; 梁武帝(464-549) 南朝蘭陵(江蘇武進)人 姓蕭名衍 字叔達 原爲南齊雍州刺史 以齊主殘忍無道殺其兄懿 蕭衍乃兵陷建康 別立和帝 遂於中興二年(502)簒位 國號梁 在位期間 整修文敎 國勢因之大盛 武帝篤信佛敎 自稱皇帝菩薩 被稱佛心天子 天監三年(504) 宣布捨道歸佛 十六年廢天下道觀 令道士還俗 十八年從鐘山草堂寺慧約受菩薩戒 首都建康有大寺七百餘所 僧尼講衆常聚萬人 大通元年(527) 同泰寺落成 設無遮大會 平等大會 盂蘭盆會 復設水陸法會 帝一生精硏佛敎敎理 固持戒律 四次捨身同泰寺 自講涅槃 般若 三慧等經 著有涅槃經 大品經 淨名經 三慧經等之義記數百卷 後因侯景起兵反叛 攻陷建康 於太淸三年餓死於臺城 在位四十八年 壽八十六 [梁書一至三 佛祖統紀三十七 佛祖歷代通載九]

老婆禪; 親切叮嚀之禪也 老婆禪一語 或有輕蔑之意

舒州; 安徽省安慶府懷寧縣的古稱 唐武德四年(621)稱舒州 天寶(742-755)初 稱同安郡 至德(756-757)初 稱盛唐郡 後再稱舒州 舒州有金陵寶誌隱棲處 三祖僧璨所住晥公山山谷寺 白雲守端的白雲山海會寺 投子大同與投子義靑所住投子山等 [大明一統志十四 大淸一通志七十六]

五祖演; 五祖法演 見上26五祖

 

40보녕용(*保寧勇) 선사의 두 상족(*上足)인 처청(處淸)과 처응(處凝)은 백운단(*白雲端; 守端) 선사를 동참(*同參)했는데 처응이 시자료(侍者寮)에 있은 지 가장 오래되었다. 수단(守端)이 격기질(膈氣疾; 熱膈으로 가슴이 막히는 질병)이 있었는데 처응이 늘 노복(蘆菔; )을 구워 무시(無時)의 수요(需要)에 대비했다. 수단이 부대사의 강경인연송(*傅大士*講經因緣頌)을 지어 가로되 대사(大士)가 어찌 일찍이 강경할 줄 알았으랴/ 지공(*誌公)이 방편(方便)으로 다만 상성(*相成)했다/ 경안(經案)을 한 번 휘두르는 위에서 모두 취하지 않으니/ 바로 양왕(*梁王)의 노()한 눈동자를 얻었다. 들어서() 처응을 위해 가로되 노(; 凸出)한 것은 이 무엇인가. 1구가 곧 처응을 위해 노파선(*老婆禪)을 설한 것이다. 처응이 친문(親聞)했기 때문에 고로 송하(頌下)에 철(; 잇다. 엮다)했다. 후에 서주(*舒州) 천주산(天柱山)에 거주했고 처청(處淸)은 용서(龍舒) 태평(太平)에 거주했는데 대기변(大機辯)이 있어 오조연(*五祖演) 화상도 그를 외경(畏敬)했다. 처청이 처응에게 일러 가로되 오제(吾弟)의 선()은 곧 이 노화상을 위해 노복(蘆菔)을 구워서 환득(換得)한 것이다.

 

保寧勇; 인용(仁勇) 송대 양기파승. 속성은 축이며 사명 사람. 유년에 출가했고 처음은 천태교전을 학습했는데 능히 전인(前人)의 지의(旨意)를 통달했음. 설두중현을 왕알(往謁)했는데 중현이 그를 나무라며 앙상좌주(央庠座主)라 하자 인용이 분비(憤悱)하며 떠났음. 담주(지금의 호남 장사) 운개산에 가서 양기방회(楊岐方會)를 참하여 1()를 마치지 아니한 전에 선지를 돈오하고 그의 법을 이었음. 양기가 적()한 후에 동참 백운수단과 사방을 운유(雲遊)하며 현오(玄奥)를 연토(硏討)했음. 후에 금릉(지금의 강소 남경) 보녕사(保寧寺)에 주지했음. 보녕인용선사어록 1권이 있어 행세(行世)[오등회원9. 보등록4].

上足; 상수제자(上首弟子)를 가리킴. 곧 문하의 회중에 우수한 제자.

白雲端; 수단(守端; 1025-1072)이니 송대 양기파승. 호남 형양 사람이며 속성(俗姓)은 주(; 한편으론 로 지음). 20세에 다릉욱(茶陵郁)에 의지해 득도(得度)했으며 후에 제방에 이르러 참학(參學)하다가 양기방회(楊岐方會)의 처소에서 깨침을 얻었고 그 법사(法嗣)를 승계했음. 그 후 원통거눌(圓通居訥; 운문하 4)의 추거(推擧; 추천)로 말미암아 강서 승천선원(承天禪院)에 주지했음. 원통 숭승선원(崇勝禪院)ㆍ안휘 법화산 증도선원(證道禪院)ㆍ용문산 건명선원(乾明禪院)ㆍ흥화선원(興化禪院)ㆍ백운산 해회선원(海會禪院) 등의 곳을 역주(歷住)하며 불법을 홍양(弘揚)하다가 송 신종 희녕 5년에 시적(示寂)했으니 나이는 48. 문인 법연(法演)이 편()한 백운수단선사어록 2권과 백운단화상광록 4권이 있음 [속전등록13. 오등회원19. 석씨계고략4].

同參; 한 스승을 함께 모시면서 공동으로 참선하는 자를 가리킴. 또한 공동으로 행각하면서 참방하는 자를 가리킴.

傅大士; 부흡(傅翕; 497-569)이니 남조 양대(梁代) 선종의 저명한 존숙이며 동양 오상(절강 의오) 사람이니 자는 현풍(玄風)이며 호는 선혜(善慧). 또 호칭이 선혜대사(善慧大士)ㆍ어행대사(魚行大士)ㆍ부대사(傅大士)ㆍ쌍림대사(雙林大士)ㆍ동양대사(東陽大士)ㆍ오상거사(烏傷居士). 보지(寶誌)와 공칭(共稱)하여 양대(梁代)2대사(大士)라 함. 일찍이 마을 사람과 함께 물고기를 잡았는데 매번 물고기를 얻으면 곧 죽롱(竹籠)에 담아 깊은 물에 담가 넣고는 아울러 이르되 떠나려는 자는 떠나고 머무려고 하는 자는 머물러라. 당시의 사람들이 이를 어리석음으로 삼았음. 나이 16에 유씨(劉氏)의 딸 묘광(妙光)에게 장가들어 보건(普建)과 보성(普成) 두 아들을 낳았음. 나이 24에 기수(沂水)에서 물고기를 취하는데 마침 호승(胡僧) 숭두타(嵩頭陀; 이름이 달마)를 만났고 드디어 어구(魚具)를 버리고 오상현 송산(松山) 쌍도수(雙檮樹) 아래 들어가 암자를 엮고 스스로 호하기를 쌍림수하당래해탈선혜대사(雙林樹下當來解脫善慧大士)라 했음. 자칭하기를 도솔천궁으로부터 와서 설법한다 했음. 낮에는 늘 영작(營作)하고 밤에는 돌아와 행도(行道)하면서 고행하기 7년이었음. 스스로 이르기를 수릉엄정을 얻었다 했고 아울러 능히 유도(儒道)의 전적을 통달했음. 학도가 점차 모였고 대중이 모두 건성(虔誠)으로 정진하며 신명을 아끼지 않았음. 양 대통 6(534) 제자 부왕을 보내어 무제에게 서신을 올려 이르게 했으며 상중하 3()의 책략을 바쳤음. 12월 무제가 금궐(禁闕)로 불러들여 중운전(重雲殿)에서 강경(講經)하게 했음. 대동 원년(535) 4월 송산으로 돌아갔음. 5년 다시 종산(鍾山)에 다다라 수광전(壽光殿)에서 무제와 진제(眞諦)를 논했고 게송을 지어 그에게 보였음. 6(일설에 5) 송산 쌍도수 사이의 불전(佛殿)9()의 전탑(塼塔)을 영조(營造)하고 아울러 이 땅에서 경률 천여 권을 서사했으니 이것이 곧 쌍림사(雙林寺). 7년 스스로 선포하기를 현겁천불의 1()이라 했음. 10년 옥우(屋宇)와 전지(田地)를 희사해 대시회(大施會)를 베풀었음. 태청 2(549) 분신하여 삼보에 공양하려 하자 제자들이 굳게 그것을 만류했으며 대사를 대신해 소신(燒身)한 자가 19인이었음. 대사가 이에 그것을 그치게 했음. 오래지 않아 난이 일어나 양()이 망했음. 부흡가(傅翕家)에 거처하는 도중이 매우 많았으며 강설을 거치지 않았음. 매번 도중을 거느리며 손가락을 태우고 팔을 태워 공불(供佛)했음. 일찍이 영재(營齋)하며 법화경 21()을 전독했고 여러 차례 무차회(無遮會)를 개설했음. 아울러 회계(會稽)에 보왕상(寶王像) 10()을 주성(鑄成)했고 대장경을 전독(轉讀)하기에 편하도록 윤장(輪藏)을 건립했으며 대중으로 하여금 그것을 돌리게 하면서 가히 대이익을 얻게 했음. 고로 후세에 만든 바 윤장에는 모두 그 부자 3인의 형상을 안치했음. 이 밖에 대사는 천태의 일심삼관(一心三觀)에 그만이 독도(獨到)한 영략(領略)이 있었고 삼관사운(三觀四運)을 그 심요(心要)로 삼아 삼관일심사운추검(三觀一心四運推檢)의 설을 창도(倡導)했음. () 태건 원년 4월 제자를 소집해 고계(告誡)를 마치자 부좌(趺坐)하고 입적했으니 나이는 73. 제자들이 쌍림의 산정에 장사 지내고 미륵하생이라고 호했음. 찬술(撰述)에 심왕명ㆍ어록 4권ㆍ환원시 등이 있음 [선혜대사록. 속고승전25. 전등록27, 30. 신승전4]. 大士; 보살의 통칭임. 혹 성문이나 및 불타를 이름함. ()란 것은 범부의 통칭이니 범부와 간별(簡別)하여 대()로 호칭함. 또 사()란 것은 사()니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대사(大事)를 하는 자를 일러 대사(大士)라 함. 한시외전. 공자가 자로ㆍ자공ㆍ안연과 더불어 지()를 말했다. 자로에게 일러 가로되 용사(勇士). 자공에게 일러 가로되 변사(辨士). 안연에게 일러 가로되 대사(大士). 법화문구기2. 대사(大士)란 것은 대론에 보살을 일컬어 대사라 했으며 또 가로되 개사(開士)라 했다. ()는 사부(士夫)를 일컬음이니 범인(凡人)의 통칭이다. ()로써 간별을 여는 고로 가로되 대() 등이다.

傅大士講經因緣; 벽암록 제67. 양무제가 부대사를 초청해 금강경을 강설하게 했다. 대사가 곧 좌상에서 경안(經案)을 한 번 휘두르고 바로 하좌했다. 무제가 놀랐다. 지공(誌公)이 묻되 폐하는 도리어 아십니까. 무제가 이르되 알지 못합니다. 지공이 이르되 대사가 강경을 마쳤습니다.

誌公; 보지(寶誌; 418-514)니 남조승(南朝僧). 또 보지(寶志)ㆍ보지(保誌)로 지음. 세칭이 보공(寶公)ㆍ지공(志公)ㆍ지공화상(誌公和尙). 금성(섬서 남정 혹 강소 구용) 사람이며 속성은 주(). 연소할 적에 출가하여 도림사 승검(僧儉)을 사사(師事)했고 선업(禪業)을 수습(修習)했음. 유송(劉宋) 태시년 간(466-471) 도읍에 왕래하며 거처에 정한 곳이 없었음. 때로 혹 시를 읊었는데 그 말이 매번 참기(讖記)와 같았으며 사민(四民; )이 드디어 다투며 문으로 나아가 복화(福禍)를 물었음. 제무제(齊武帝)가 그것을 혹중(惑衆; 무리를 惑亂)이라 하여 뇌옥(牢獄) 에 투옥(投獄)시켰음. 그러나 날마다 시리(市里)에 유행하는 스님을 본지라 이에 뇌옥 속에 가서 검시(檢視)하였는데 도리어 스님이 아직 옥 속에 있음을 보았음. ()가 이를 듣고 드디어 화림원으로 영입해 공양하고 그의 출입을 금지시켰으나 스님은 구애되는 바가 되지 않고 그대로 늘 용광ㆍ계빈ㆍ흥황ㆍ정명 등 여러 사원을 유방(遊訪)했음. 양무제가 건국함에 이르러 비로소 그 금지가 풀렸음. 스님이 매번 무제와 길게 얘기했는데 말하는 바가 모두 경론의 뜻이었음. 스님이 천감 1312월에 시적했는데 나이는 96이며 칙령으로 종산(鍾山) 독룡부(獨龍阜)에 장사 지내고 묘 곁에 개선사를 세웠음. 시호는 광제대사. 후대에 이어서 추증(追贈)이 있었으니 묘각대사ㆍ도림진각보살ㆍ도림진각대사ㆍ자응혜감대사ㆍ보제성사보살ㆍ일제진밀선사 등과 같은 호임. 스님이 일찍이 학자를 위해 문자석훈(文字釋訓) 30권ㆍ14과송 14수ㆍ십이시송 12수ㆍ대승찬 10수 등을 서술했음 [양고승전10. 불조통기36, 37. 불조역대통재10. 보화산지7지공법사묘지명. 신승전4].

相成; 호상(互相) 보충함. 호상 성전(成全; 완전함을 이룸).

梁王; 양무제(梁武帝; 464-549) 남조(南朝) 난릉(강소 무진) 사람. 성은 소() 이름은 연()이며 자는 숙달(叔達). 원래 남제(南齊)의 옹주자사가 되었음. 제주(齊主)가 잔인무도하여 그 형인 의()를 죽이자 소연(蕭衍)이 곧 군사로 건강(建康)울 함락시키고 따로 화제(和帝)를 세웠다가 드디어 중흥 2(502) 찬위(簒位)하고 국호를 양()이라 했음. 재위 기간에 문교(文敎)를 정수(整修)하여 국세(國勢)가 이로 인해 크게 흥성했음. 무제는 불교를 독신(篤信)했으며 자칭 황제보살이라 했고 불심천자로 일컬어짐을 입었음. 천감 3(504) 도교를 버리고 불교에 귀의함을 선포했음. 16년 천하의 도관(道觀)을 폐했으며 도사를 환속시켰음. 18년 종산 초당사 혜약(慧約)으로부터 보살계를 받았음. 수도 건강(建康)에 큰 사원이 700여 곳이었으며 승니의 강중(講衆)은 늘 만 사람이 모였음. 대통 2(527) 동태사(同泰寺)가 낙성되었음. 무차대회ㆍ평등대회ㆍ우란분회를 베풀었고 다시 수륙법회를 베풀었음. 무제는 일생에 불교교리를 정연(精硏)했으며 계율을 굳게 지켰음. 네 차례 동태사에 사신(捨身)했음. 스스로 열반ㆍ반야ㆍ삼혜(三慧) 등의 경을 강설했고 저서에 열반경ㆍ대품경ㆍ정명경ㆍ삼혜경 등의 의기(義記) 수백 권이 있음. 후에 후경(侯景)이 기병(起兵)하여 반반(反叛)했고 건강을 공격해 함락시킴으로 인해 태청 3년에 대성(臺城)에서 아사(餓死)했음. 재위 48, 나이 86 [양서13. 불조통기37. 불조역대통재9].

老婆禪; 친절하고 정녕(叮嚀)한 선. 노파선 1()는 혹 경멸의 뜻이 있음.

舒州; 안휘성 안경부 회녕현의 고칭. 당 무덕 4(621) 서주(舒州)로 호칭했고 천보(742-755) 초 동안군(同安郡)으로 호칭했고 지덕(756-7 57) 초 성당군으로 호칭했다가 후에 다시 서주(舒州)로 호칭했음. 서주에 금릉 보지의 은서처(隱棲處)3조 승찬이 거주한 바의 환공산 산곡사ㆍ백운수단의 백운산 해회사ㆍ투자대동과 투자의청이 거주한 바의 투자산 등이 있음 [대명일통지14. 대청일통지76].

五祖演; 오조법연(五祖法演)이니 위 26오조(五祖)를 보라.

 

선문염송집주 5책 1질로 발간되었습니다 (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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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발행. 150부. 5책 1질. 총 4,842쪽, 12.5pt. 4․6배판. 하드. 양장. 정가 60만 원. 한문주석 1만 여 개로 염송본문의 各則을 해석하고 전체를 한글로 번역. 주석의 쪽 수가 본문을 조금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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