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政和間有熊*秀才 鄱陽人 游洪州西山過翠巖 長老思文嗣*佛印元禪師 亦是鄱陽人 遣*二力擡*籃輿至淨相 所經林壑陰翳 偶見一僧 貌古神淸 厖眉雪頂 編葉爲衣 坐於盤石 如壁間畫*佛圖澄之狀 熊自謂曰 今時無這般僧 甞聞*亮座主隱于西山 疑其猶在 出輿*踧踖而前問曰 莫是亮座主麽 僧以手向東指 熊方與二力隨手看 回顧失僧所在 時小雨初歇 熊自登石視 坐處猶乾 躊躇四顧太息曰 夙緣不厚 雖遇猶不遇也
●秀才; 秀才是中國古代選拔官吏的科目 亦曾作爲學校生員的專稱 漢武帝改革選官制度 令地方官府考察和推擧人才 卽爲察擧 元封四年(前107) 命公卿 諸州每年各擧薦秀才一名 意爲優秀人才 東漢因避光武帝名諱 遂改稱茂才 三國曹魏時沿襲察擧 復改稱秀才 至南北朝時 擧薦秀才尤爲重視 隋代始行科擧制 設秀才科 唐初沿置此科 及第者稱秀才 後廢秀才科 秀才遂作爲一般讀書人的泛稱 宋代爲士子和應擧者的統稱 明代曾一度采用薦擧之法 亦有擧秀才 明淸時期 秀才亦專用以稱府州縣學生員 [百度百科]
●佛印元; 了元(1032-1098) 宋代雲門宗僧 嗣開先善暹 雲門下四世 江西浮梁(今江西景德鎭)人 俗姓林 號佛印 故又稱佛印了元 字覺老 二歲學論語 長從寶積寺日用出家 受具足戒 遍參諸師 十九歲 入廬山開先寺 列善暹之法席 又參圓通之居訥 長於書法 能詩文 尤善言辯 二十八歲住江州(今江西九江)承天寺 移住廬山之開先歸宗 元豐(10 78-1085)年間 住持鎭江(今屬江蘇)金山寺 後居南康軍(今江西永修)雲居山 凡歷坐道場九所 道化不止 當時名士蘇東坡黃山谷等 與之交善 以章句相酬酢 神宗欽其道風 特賜高麗磨衲金鉢 贈號佛印禪師 元符元年正月示寂 壽六十七 臘五十二 [續傳燈錄五 佛祖歷代通載十九 釋氏稽古略四]
●二力; 力 僕人 傭工 上已出
●籃輿; 古代供人乘坐的交通工具 形制不一 一般以人力抬著行走 類似後世的轎子 也說古時一種竹制的坐椅 [百度百科]
●佛圖澄; (232-348) 佛圖澄者梵語 無翻名 晉代西域僧 帛氏 少出家 淸貞務學 志弘大法 永嘉四年(310)來洛陽 時石勒屯兵葛陂 專以殺戮爲務 澄多方開導 勒信服 稍歛其焰 且每事必諮澄而後行 尊之爲大和尙 勒死 弟石虎襲位 雖暴戾有加 但亦傾心事澄 澄得專事化度 興立佛寺 廣致徒衆 宣講奥理 一時僧朗道安輩 皆出其門 [梁高僧傳十 釋氏六帖十一 六學僧傳二十九]
●亮座主; 唐代僧 西蜀人 頗講經論 因參馬祖 發明大事 隱於洪州西山 更無消息 [五燈會元三]
●踧踖; 恭敬而不安的樣子
【41】 정화(政和; 1111-1118) 간(間) 웅수재(熊*秀才)가 있었는데 파양(鄱陽) 사람이다. 홍주(洪州) 서산(西山)을 유람(游覽)하다가 취암(翠巖)에 이르렀다(過). 장로(長老) 사문(思文)은 불인원(*佛印元) 선사를 이었고 역시 파양 사람이다. 2력(*二力)을 보내 남여(*籃輿)를 마주들고 정상(淨相)에 이르게 했다. 경유(經由)하는 곳의 임학(林壑; 수림과 산골짜기)이 음예(陰翳; 그늘이 가림)했는데 우연히 1승(僧)을 보았다. 모고신청(貌古神淸; 形貌가 高古하고 心神이 淸朗함)하고 방미설정(厖眉雪頂; 눈썹이 흑백의 잡색이며 백발의 頭頂)이었고 나뭇잎을 엮어 옷으로 삼았으며 반석(盤石)에 앉았는데 벽간(壁間)에 불도징(*佛圖澄)의 형상(形狀)을 그린 것과 같았다. 웅(熊)이 스스로 일러 가로되 금시에 이런(這般) 승인(僧)이 없다. 일찍이 듣건대 양좌주(*亮座主)가 서산에 은거(隱居)했다 하니 그가 아직 있는가 의심된다. 남여(籃輿)에서 나와 축적(*踧踖)하며 접근해 물어 가로되 이 양좌주가 아니십니까. 승인이 손으로써 동쪽을 향해 가리켰다. 웅이 바야흐로 2력(力)과 더불어 손 따라 보고는 돌아보매 승인의 소재(所在)를 잃었다. 때에 소우(小雨)가 처음 그쳤는데 웅이 스스로 반석(盤石)에 올라 보니 좌처(坐處)는 아직 건조(乾燥)했다. 주저(躊躇)하며 사방을 돌아보며 크게 탄식하고 가로되 숙연(夙緣)이 불후(不厚)하여 비록 만났으나 오히려 만나지 못했다.
●秀才; 수재는 이 중국 고대 관리를 선발하는 과목이며 또한 일찍이 학교 생원(生員)의 전칭(專稱)으로 지었음. 한무제(漢武帝)가 선관제도(選官制度)를 개혁해 지방 관부(官府)에 인재를 고찰(考察)하고 그리고 추거(推擧; 추천)하게 했으니 곧 찰거(察擧)가 됨. 원봉 4년(前 107) 공경(公卿)과 제주(諸州)에 명해 매년 각기 수재 1명을 거천(擧薦; 천거)하게 했으니 뜻이 우수한 인재가 됨. 동한(東漢)은 광무제의 명휘(名諱)를 피함으로 인해 드디어 무재(茂才)로 개칭했음. 삼국 조위(曹魏) 때 연습(沿襲; 전례를 따라서 함)하여 찰거(察擧; 선발)하면서 다시 수재로 개칭했음. 남북조 때에 이르러 수재를 거천(擧薦)함을 더욱 중시했음. 수대(隋代)에 과거제(科擧制)를 시행(始行)했고 수재과(秀才科)를 설치했음. 당초(唐初) 이 과(科)를 따라서 설치했고 급제한 자를 일컬어 수재라 했음. 후에 수재과를 폐지했으며 수재는 드디어 일반 독서인의 범칭(泛稱)이 되었음. 송대엔 사자(士子; 지식인)와 응거자(應擧者; 과거에 응시하는 자)의 통칭(統稱)이 되었음. 명대에 일찍이 천거(薦擧)의 법을 한 차례 채용했고 또한 수재를 천거함이 있었음. 명ㆍ청 시기 수재는 또한 부주현(府州縣)의 학생원(學生員)의 명칭으로 전용했음 [백도백과].
●佛印元; 요원(了元; 1032-1098)이니 송대 운문종승. 개선선섬(開先善暹)을 이었으니 운문하 4세. 강서 부량(지금의 강서 경덕진) 사람이며 속성(俗姓)은 임(林)이며 호가 불인(佛印)이니 고로 또 명칭이 불인요원(佛印了元)이며 자는 각로(覺老). 2세에 논어(論語)를 배웠으며 자라자 보적사(寶積寺) 일용(日用)을 좇아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고 두루 여러 스님을 참방(參訪)했음. 19세에 여산(廬山) 개선사(開先寺)에 들어가 선섬(善暹)의 법석에 줄섰으며 또 원통의 거눌(居訥)을 참알(參謁)했음. 서법(書法)에 뛰어나고 시문(詩文)에 능했으며 특히 언변이 좋았음. 28세에 강주(江州. 지금의 江西 九江) 승천사(承天寺)에 주(住)했고 여산의 개선ㆍ귀종으로 이주했음. 원풍(1078-1085)년간 진강(鎭江; 지금 강소에 속함) 금산사에 주지했고 후에 남강군(지금의 강서 영수) 운거산(雲居山)에 거주했음. 무릇 경력(經歷)하며 9곳의 도량(道場)에 앉았으며 도화(道化)를 그치지 않았음. 당시의 명사(名士) 소동파(蘇東坡)ㆍ황산곡(黃山谷) 등도 그와 교선(交善; 좋게 交遊)하면서 장구(章句)로써 서로 수작(酬酢)했음. 신종(神宗)이 그의 도풍(道風)을 흠모하여 특별히 고려마납(高麗磨衲)과 금발(金鉢)을 주었으며 불인선사(佛印禪師)란 호를 주었음. 원부 원년 정월에 시적(示寂)했으니 나이는 67이며 승랍은 52 [속전등록5. 불조역대통재19. 석씨계고략4].
●二力; 력(力)은 복인(僕人), 용공(傭工; 고용되어 남을 위해 做工하는 사람). 위에 이미 나왔음.
●籃輿; 고대 사람의 승좌(乘坐)에 이바지한 교통공구(交通工具). 형제(形制)는 동일하지 않았고 일반(一般)으로 인력(人力)을 써서 들고는 행주(行走; 다니다)했음. 후세의 교자(轎子; 가마)와 유사했음. 또한 설하되 고시(古時)의 일종 죽제(竹制)의 좌의(坐椅)라 함 [백도백과].
●佛圖澄; (232-348) 불도징이란 것은 범어며 번명(翻名)이 없음. 진대(晉代) 서역승이며 백씨(帛氏). 어릴 적에 출가했고 청정(淸貞)하게 학문에 힘썼으며 대법을 홍포함에 뜻을 세우고 영가 4년(310) 낙양으로 왔음. 때에 석륵(石勒)이 갈파에 둔병(屯兵)하고 오로지 살육으로 업무로 삼았음. 징이 다방(多方)으로 개도하매 석륵이 신복(信服)했음. 조금 그 화염을 거두자 또 매사를 반드시 징에게 물은 후에 행했음. 그를 존칭해 대화상이라 했음. 석륵이 죽자 동생 석호(石虎)가 자리를 이었고 비록 포악하고 사나움을 더함이 있었으나 다만 또 마음을 기울여 징을 모셨음. 징이 오로지 화도(化度)에 종사함을 얻자 불사(佛寺)를 흥립(興立)하고 널리 도중을 이르게 했으며 오묘한 이치를 선강(宣講)했음. 일시의 승랑(僧朗)ㆍ도안(道安)의 무리도 모두 그의 문에서 배출되었음 [양고승전10. 석씨육첩11. 육학승전29].
●亮座主; 당대승. 서촉 사람. 자못 경론을 강설했음. 마조를 참함으로 인해 대사를 발명하고 홍주 서산에 은거했는데 다시 소식이 없었음 [오등회원3].
●踧踖; 공경하면서 불안한 양자(樣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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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염송집주 5책 1질로 발간되었습니다
2022년 3월 발행. 150부. 5책 1질. 총 4,842쪽, 12.5pt. 4․6배판. 하드. 양장. 정가 60만 원. 한문주석 1만 여 개로 염송본문의 各則을 해석하고 전체를 한글로 번역. 주석의 쪽 수가 본문을 조금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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