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圜悟和尙初在*潙山 一日眞如和尙問曰 如何 悟云 起滅不停 如曰 可知是*博地凡夫 老僧三十年在*裏許 秖得箇相似 次見晦堂 堂曰 我住院十二年不會 如今方會 脚尖頭也踢出箇佛 悟後住昭覺 有長老問 *劉鐵磨到*潙山問答 并*雪竇御街行頌 未審此意如何 悟曰 老僧更參四十年也不到雪竇處 長老歎曰 *昭覺和尙猶如此說 況餘人耶
●潙山; 位於湖南長沙寧鄕縣西 爲衡山山脈之分支 潙水之發源地 又稱大潙山 山多平地 水道便利 故古來出家人 每多耕作於此 而有羅漢田之稱 唐僧靈祐居於此 世稱潙山禪師
●博地凡夫; 普通的人 一般的人 博地 廣闊的土地大地 ▲天台三大部補注十一 博地 博 廣多也 下凡之地廣多故耳
●裏許; 內裏 裏邊 許 表示處所
●劉鐵磨到潙山問答; 從容錄第六十則鐵磨牸牛 劉鐵磨到潙山 山云 老牸牛汝來也 磨云 來日臺山大會齋 和尙還去麽 山放身臥 磨便出去 ○劉鐵磨; 唐代尼師 俗姓劉 以機鋒峻峭故 世稱劉鐵磨 於距潭州潙山十里處 結一小庵 參問潙山靈祐 [傳燈錄十 聯燈會要七]
●潙山; 靈祐(771-853) 唐代僧 爲潙仰宗始祖 福州長溪(今福建省霞浦縣南)人 俗姓趙 法名靈祐 十五歲隨建善寺法常(又稱法恆)律師出家 於杭州龍興寺受具足戒 曾先後遇寒山拾得 二十三歲至江西參謁百丈懷海 爲上首弟子 於此頓悟諸佛本懷 遂承百丈之法 憲宗元和末年 棲止潭州大潙山 山民感德 群集共營梵宇 由李景讓之奏請 敕號同慶寺 其後(一說大中初年)相國裴休亦來諮問玄旨 聲譽更隆 禪侶輻輳 海衆雲集 會昌(841-846)法難之際 師隱於市井之間 至大中元年(847)復敎之命下 衆迎返故寺 巾服說法 不復剃染 裴休聞之 親臨勸請 始歸緇流 師住山凡四十年 大揚宗風 世稱潙山靈祐 大中七年正月示寂 壽八十三 臘六十四 諡號大圓禪師 有語錄警策各一卷傳世 嗣法弟子有仰山慧寂 承其後而集大成 世稱潙仰宗 [福建高僧傳一 宋高僧傳十一 傳燈錄九 聯燈會要七]
●雪竇御街行頌; 聯燈會要七大潙靈祐 雪竇頌云 曾騎鐵馬入重城 勑下傳聞六國淸 猶握金鞭問歸客 夜深誰共御街行
●昭覺; 克勤 崇寧(1102-1106)中 於成都昭覺寺開法 詳見【16】圜悟
【44】 원오(圜悟; 克勤) 화상이 처음 위산(*潙山)에 있었는데 어느 날 진여(眞如; 慕喆) 화상이 물어 가로되 어떠한가(如何). 원오가 이르되 기멸(起滅)하며 정지하지 않습니다. 진여가 가로되 이 박지범부(*博地凡夫)인 줄 가히 알겠다. 노승이 30년 동안 이허(*裏許)에 있으면서 다만 저(箇) 상사(相似)함을 얻었다. 다음에 회당(晦堂; 祖心)을 뵙자 회당이 가로되 내가 주원(住院)한 지 12년 동안 알지 못하다가 여금에야 비로소 알았다. 각첨두(脚尖頭; 頭는 조사)로 또한 저 부처를 척출(踢出; 차 내다)한다. 원오가 후에 소각(昭覺)에 주(住)했다. 어떤 장로가 묻되 유철마가 위산에 이르러 문답했고(*劉鐵磨到*潙山問答) 아울러 설두가 어가행을 송했는데(*雪竇御街行頌) 미심(未審)하나니 이 뜻이 무엇입니까. 원오가 가로되 노승이 다시 40년을 참(參)하더라도 또한 설두처(雪竇處; 설두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 장로가 감탄하며 가로되 소각화상(*昭覺和尙)도 오히려 이와 같이 설하거늘 하물에 여인(餘人)이겠는가.
●潙山; 호남 장사(長沙) 영향현(寧鄕縣) 서쪽에 위치하며 형산산맥(衡山山脈)의 분지(分支)가 됨. 위수(潙水)의 발원지임. 또 호칭이 대위산(大潙山)임. 산에 평지가 많고 수도(水道)가 편리한지라 고로 고래(古來)로 출가인이 매양 많이 여기에 경작해 라한전(羅漢田; 라한은 범어 아라한의 약칭)이란 칭호가 있음. 당승(唐僧) 영우(靈祐)가 여기에 거처했으며 세칭이 위산선사(潙山禪師)임.
●博地凡夫; 보통의 사람. 일반적 사람. 박지(博地)는 광활한 토지와 대지. ▲천태삼대부보주11. 박지(博地) 박(博)은 넓고 많음이다. 하범지지(下凡之地)가 넓고 많은 연고일 뿐이다.
●裏許; 내리. 이변(裏邊). 허는 처소를 표시함.
●劉鐵磨到潙山問答; 종용록 제60칙 철마자우(鐵磨牸牛) 유철마가 위산에 이르렀다. 위산이 이르되 노자우(老牸牛)야, 네가 왔구나. 철마가 이르되 내일 대산(臺山)에서 대회재(大會齋)하는데 화상도 도리어 가시겠습니까. 위산이 몸을 놓아 누웠다. 철마가 바로 나갔다. ○劉鐵磨; 당대 니사(尼師)니 속성은 유(劉)며 기봉이 준초(峻峭; 높고 깎아지른 듯함)한 고로 세칭이 유철마(劉鐵磨)임. 담주(潭州) 위산에서 10리 떨어진 곳에 한 작은 암자를 엮고 위산영우에게 참문했음 [전등록10. 연등회요7].
●潙山; 영우(靈祐; 771-853)니 당대승. 위앙종(潙仰宗)의 시조(始祖)가 됨. 복주 장계(長溪. 지금의 복건성 하포현의 남쪽) 사람이니 속성(俗姓)은 조(趙)며 법명은 영우(靈祐). 15세에 건선사 법상(法常; 또 칭호가 法恆)율사를 따라 출가했으며 항주 용흥사(龍興寺)에서 구족계를 받았음. 일찍이 선후(先後)로 한산(寒山)과 습득(拾得)을 만났으며 23세에 강서에 이르러 백장회해(百丈懷海)를 참알(參謁)해 상수제자(上首弟子)가 되었음. 여기에서 제불의 본회(本懷)를 돈오(頓悟)했으며 드디어 백장의 법을 승계했음. 헌종 원화 말년에 담주(潭州)의 대위산(大潙山)에 서지(棲止)했는데 산민(山民)이 감덕(感德)하여 무리가 모여 범우(梵宇; 절. 사원)를 함께 지었음. 이경양(李景讓)의 주청(奏請)으로 말미암아 동경사(同慶寺)라 칙호(敕號)했음. 그 후(一說엔 大中初年) 상국(相國) 배휴(裴休)가 또한 와서 현지(玄旨)를 자문(諮問)하자 성예(聲譽)가 더욱 융성했으며 선려(禪侶)가 복주(輻輳)하여 해중(海衆)이 운집했음. 회창(會昌; 841-846)의 법난(法難)의 즈음에 스님이 시정(市井)의 사이에 은거하다가 대중 원년(847)에 복교(復敎)의 명이 떨어짐에 이르러 대중이 영접하여 옛 절로 돌아갔으나 건복(巾服; 옷갓)으로 설법하고 다시 체염(剃染)하지 않았음. 배휴가 이를 듣고 친림(親臨)하여 권청(勸請)하자 비로소 치류(緇流; 僧徒)로 돌아왔음. 스님이 산에 머문 무릇 40년에 종풍을 크게 날려 세칭이 위산영우(潙山靈祐)임. 대중 7년 정월에 시적(示寂)했음. 나이는 83이며 납(臘. 僧臘)은 64. 시호는 대원선사(大圓禪師)며 어록과 경책(警策) 각 1권이 있어 세상에 전해짐. 법을 이은 제자에 앙산혜적(仰山慧寂)이 있어 그 뒤를 이어 집대성(集大成)했으니 세칭이 위앙종(潙仰宗)임 [복건고승전1. 송고승전11. 전등록9. 연등회요7].
●雪竇御街行頌; 연등회요7 대위영우. 설두가 송해 이르되 일찍이 철마를 타고 중성(重城)에 드니/ 칙하(勑下; 勑은 敕과 같음)에 육국(六國)이 청평(淸平)함을 전문(傳聞)하였다/ 오히려 금편(金鞭)을 쥐고 귀객에게 묻노니/ 야심에 누가 함께 어가(御街)를 행하겠는가.
●昭覺; 극근(克勤)이니 숭녕(崇寧; 1102-1106) 중 성도(成都) 소각사(昭覺寺)에서 개법(開法)했음. 상세한 것은 【16】 원오(圜悟)를 보라.
선문염송집주 5책 1질로 발간되었습니다 (tistory.com)
선문염송집주 5책 1질로 발간되었습니다
2022년 3월 발행. 150부. 5책 1질. 총 4,842쪽, 12.5pt. 4․6배판. 하드. 양장. 정가 60만 원. 한문주석 1만 여 개로 염송본문의 各則을 해석하고 전체를 한글로 번역. 주석의 쪽 수가 본문을 조금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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