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문무고

종문무고(宗門武庫) 092

태화당 2022. 8. 27. 09:23

92王荊公 一日問*張文定公曰 *孔子去世百年生*孟子 亞聖後絕無人何也 文定公曰 豈無人 亦有過孔孟者 公曰誰 文定曰 江西馬大師*坦然禪師 汾陽*無業禪師 *雪峯巖頭*丹霞雲門 荊公聞擧意不甚解 乃問曰 何謂也 文定曰 儒門淡薄 收拾不住 皆歸*釋氏焉 公欣然嘆服 後擧似張無盡 無盡撫几嘆賞曰 達人之論也

 

張文定; 張方平(1007-1091) 字安道 宋代宋城(河南商丘)人 官太子太師 慶曆(1041-1048)中 爲滁州守 遊琅邪山地藏院 偶遇楞伽經 視之 如睹舊物 宿障冰釋 遂明心要 暮年 將此經授蘇子瞻 並以錢三十萬 託印施送江淮 嘗語 王介甫 張商英 謂馬祖 汾陽 雪峰 巖頭 丹霞 雲門等師 過之孔孟之敎 後預知時至 作詩坐化 諡文定 [居士傳二十一 佛法金湯編十二 普燈錄二十二]

孔子; (551-479) 宗統編年四 周靈王庚戌二十一年(551) 儒敎聖人孔子生於魯 夾注云 十一月初四日 生于魯國兗州鄒邑縣平鄕晉昌里 按殷本紀 孔子父姓叔梁 名紇 爲鄒邑縣宰 先娶鄒氏女 生子孟皮 不才 後娶顔氏女曰徵在 禱于尼邱山神 而生孔子 生而有髮 身長九尺六寸 腰帶十圍 垂手過膝 河眸海口 龍顔方顙 鳳顒燕頷 虬髭虎視 有中和之德 衣莊而嚴 色溫而厲 有四十二表 自易姓曰孔 名丘 字仲尼 先祖殷之後裔 穎考叔弗何 至紇移居魯 易姓叔梁 孔子追昔殷宋之後 以子配一 更姓孔氏 佛祖統紀五十四 周靈王二十一年(551) 十一月庚子 孔子生魯陬邑 景王十年(535) 孔子朝周 問禮於老子 敬王十九年(501) 爲魯中都宰 二十一年爲司空 二十二年爲大司寇 誅少正卯墮三都 魯定公受齊女樂 三日不聽政 孔子遂適衛 三十六年(484)自衛反魯 刪詩定書繫周易作春秋 以曾參孝爲作孝經 三十九年 哀公西狩獲麟 孔子傷麟出非時 遂絶筆於春秋 四十一年(479)四月乙丑 孔子卒 葬泗水上 弟子三千人 身通六藝者七十二人

孟子; (372?-289?) 戰國時代儒學者 鄒(山東省 鄒城市)人 名軻 字子輿 子車 師孔子之孫子思 治儒術之道 通五經 尤長於詩書(是詩未有禮記) 孟子見梁惠王 王曰 叟不遠千里而來 亦將有以利吾國乎 孟子曰 王何必曰利 亦有仁義而已矣 孟子與高第弟子公孫丑萬章之徒難疑答問 著書七篇 述堯舜之道 孟子曰 楊子取爲我拔一毛而利天下不爲也 墨子兼愛摩頂放踵 利天下爲之(放 至也) [佛祖統紀三十五] 禪林寶訓音義 孟子 名軻 字子輿 鄒國人 作孟子之書七篇 上下兩卷也

坦然; 嵩嶽慧安國師法嗣

無業 (762-823) 唐代僧 商州上洛(今陝西商縣)人 姓杜氏 九歲依開元寺志本禪師受大乘經 五行俱下 十二落髮 二十受具戒於襄州幽律師 後往江西 瞻禮馬祖 竝嗣其法 往淸涼金閣寺 重閱大藏 周八稔而畢 復南下至汾州(今山西汾陽) 住開元寺二十載 唐憲宗屢召 皆辭疾不赴 長慶三年十二月而逝 壽六十二 臘四十二 勅諡大達國師 [傳燈錄八 聯燈會要五]

雪峯; 義存(822-908) 唐代僧 泉州(福建)南安人 俗姓曾 號雪峰 十二歲從父遊蒲田玉潤寺 拜慶玄律師爲師 留爲童侍 十七歲落髮 謁芙蓉山恆照大師 唐宣宗中興佛敎後 歷遊吳楚梁宋燕秦 於幽州寶刹寺受具足戒 後至武陵德山(湖南常德) 參宣鑒 承其法系 唐懿宗咸通六年(865)歸芙蓉山 十一年登福州象骨山 立庵興法 其山爲閩越之勝景 未冬先雪 盛夏尙寒 故有雪峰之稱 師亦以之爲號 寺初成 緇素雲集 衆每逾千五百人 僖宗賜號眞覺大師 竝紫袈裟一襲 大順(890-891)年中 遊丹丘 四明之地 竝宣法於軍旅之中 後還閩 備受閩王禮遇 開平二年五月入寂 壽八十七 其法嗣有雲門文偃玄沙師備等 文偃乃雲門宗之祖 師備下有桂琛 琛下有法眼文益 乃法眼宗之祖 [宋高僧傳十二 傳燈錄十六 五燈會元七]

丹霞; 天然(739-824) 詳見18丹霞輩流

釋氏; 指佛 佛法 佛門 釋 釋迦牟尼之略

 

92왕형공(王荊公)이 어느 날 장문정공(*張文定)에게 물어 가로되 공자(*孔子)가 세상을 떠난 지 백 년에 맹자(*孟子)가 출생했다, 아성(亞聖) 후에 단절되어 사람이 없음은 어찌해서인가. 문정공이 가로되 어찌 사람이 없겠는가. 또한 공맹(孔孟)을 초과하는 자가 있다. ()이 가로되 누구인가. 문정이 가로되 강서(江西) 마대사(馬大師), 탄연선사(*坦然禪師), 분양(汾陽) 무업선사(*無業禪師), 설봉(*雪峯)ㆍ암두(巖頭; 全豁)ㆍ단하(*丹霞)ㆍ운문(雲門; 文偃)이다. 형공(荊公)이 문거(聞擧)했으나 뜻에 심히 이해하지 못해 이에 물어 가로되 무엇을 말함인가(). 문정이 가로되 유문(儒門)은 담박(淡薄)하여 수습(收拾)해도 머물지 않고 모두 석씨(*釋氏)로 돌아간다. 공이 흔연(欣然)히 탄복(嘆服)했다. 후에 장무진(張無盡)에게 들어 보이자 무진이 안궤(案几)를 어루만지면 탄상(嘆賞)해 가로되 달인(達人)의 논()이다.

 

張文定; 장방평(張方平; 1007-1091)아니 자는 안도(安道)며 송대 송성(하남 상구) 사람. 벼슬이 태자태사였고 경력(1041-1048) 중 저주수(滁州守)가 되었음. 낭야산 지장원을 유람하다가 우연히 릉가경을 만났는데 이를 보매 옛 물건을 봄과 같았음. 숙장(宿障)이 얼음이 풀리 듯했고 드디어 심요를 밝혔음. 모년(暮年)에 이 경을 가지고 소자첨(蘇子瞻)에게 주면서 아울러 돈 30만을 인시(印施)에 기탁하여 강회(江淮)로 보냈음. 일찍이 왕개보(王介甫)와 장상영(張商英)에게 말하기를 마조ㆍ분양ㆍ설봉ㆍ암두ㆍ단하ㆍ운문 등 선사를 일러 공맹의 교를 초과한다 했음. 후에 시지(時至)를 미리 알고 시를 짓고는 좌화(坐化)했음. 시호는 문정(文定) [거사전21. 불법금탕편12. 보등록22].

孔子; (551-479) 종통편년4. () 영왕(靈王) 경술 21(551유교 성인 공자가 노나라에 탄생했다. 협주(夾注)에 이르되 11월 초 4일에 노나라 연주 추읍현 평향 진창리에 탄생했다. 은본기(殷本紀)를 살펴보니 공자 아버지의 성은 숙량(叔梁)이며 이름은 흘()이며 추읍의 현재(縣宰). 먼저 추씨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맹피(孟皮)를 낳았으나 부재(不才)였다. 후에 안씨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가로되 징재(徵在)였다. 이구산(尼邱山)의 신에게 기도하여 공자를 낳았다. 태어나자 머리카락이 있었으며 신장이 96촌이며 허리 둘레가 열 아름이었다. 손을 내리면 무릎을 지났고 강의 눈에 바다의 입이며 용의 얼굴에 네모진 이마였으며 봉의 머리통에 제비의 턱이며 규룡의 수염에 범의 눈초리였다. 중화(中和)의 덕이 있으며 옷은 장식하여 위엄스러웠고 안색은 온화하면서 맑았다. 마흔둘의 표시가 있었다. 스스로 성을 바꾸어 가로되 공()이며 이름은 구()며 자는 중니(仲尼). 선조는 은나라의 후예인 영고숙불하(穎考叔弗何)이다. ()에 이르러 노나라로 이거(移居)했으며 성을 바꾸어 숙량(叔梁)이라 했다. 공자가 옛적에 은나라와 송나라의 후예임을 추억해 자()에 일()을 배합해 성을 바꾸어 공씨(孔氏)라 했다. 불조통기54. 주 영왕 21(551) 11월 경자(庚子)에 공자가 노나라 추읍(陬邑)에서 탄생했으며 경왕 10(535) 공자가 주나라를 방문해 노자에게 예()를 물었다. 경왕 19(501) 노나라의 중도재(中都宰)가 되었고 21년에 사공(司空)이 되었고 22년에 대사구(大司寇)가 되었다. 소정묘(少正卯)를 죽이고 삼도(三都)를 무너뜨렸다. 노 정공이 제나라의 여악(女樂)을 받아들여 3일 동안 정무를 듣지 않자 공자가 드디어 위나라로 갔다. 36(484) 위나라로부터 노()로 돌아와 시를 산취(刪取)하고 서()를 정하고 주역을 계사(繫辭)하고 춘추를 지었다. 증삼이 효자라 위하여 효경을 지었다. 39년에 애공(哀公)이 서쪽으로 사냥하다 기린을 잡았는데 공자가 기린이 비시(非時)에 출현함에 상심하여 드디어 춘추에서 절필했다. 41(479) 4월 을축(乙丑)에 공자가 졸했으며 사수상(泗水上)에 장사 지냈다. 제자가 3천 인이며 몸이 6()를 통달한 자 72인이다.

孟子; (372 ?-289 ?) 전국시대 유학자. (; 산동성 추성시) 사람이며 이름은 가()며 자는 자여(子輿)ㆍ자거(子車).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를 사사하여 유술(儒術)의 도를 다스렸으며 5()을 통달했음. 더욱이 시서(詩書; 이 시는 예기에 있지 아니함)에 뛰어났음. 맹자가 양혜왕(梁惠王)을 알현하자 왕이 가로되 노인이 천 리를 멀다 하지 않고 오셨으니 또한 장차 우리나라를 이롭게 함이 있습니까. 맹자가 가로되 왕이 하필 이()를 말하십니까. 또한 인의(仁義)가 있을 따름입니다. 맹자가 고제(高第; 높은 재능) 제자인 공손축(公孫丑)ㆍ만장(萬章)의 도제와 의심을 힐난하며 답하고 물은 저서가 7편인데 요순의 도를 서술했음. 맹자가 가로되 양자(楊子)는 나(자신)를 위함을 취했으니 한 털을 뽑아 천하를 이롭게 하더라도 하지 않는다 했고 묵자(墨子)는 겸애(兼愛)로 마정방종(摩頂放踵; 정수리부터 갈아 닳아져서 발꿈치까지 이른다는 뜻)토록 천하에 이롭다면 그것을 한다() [불조통기35]. 선림보훈음의. 맹자(孟子) 이름은 가()며 자는 자여(子輿)며 추국 사람이다. 맹자의 서 7편을 지었는데 상하 두 권이다.

坦然; 숭악 혜안국사(慧安國師)의 법사(法嗣).

無業 (762-823) 당대승. 상주 상락(지금의 섬서 상현) 사람이며 성은 두씨. 9세에 개원사 지본선사에게 의지해 대승경을 수학(受學)했는데 5행을 함께 내리읽었음. 12에 낙발(落髮)했고 20에 양주 유율사에게서 구계(具戒)를 받았음. 후에 강서로 가서 마조를 첨례하고 아울러 그의 법을 이었음. 청량 금각사로 가서 대장경을 두 번 열람했는데 여덟 해를 돌아 마쳤음. 다시 남하하여 분주(지금의 산서 분양) 개원사에 주()하기 스무 해였음. 당 헌종이 여러 번 불렀으나 모두 사질(辭疾;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다다르지 않았음. 장경 312월에 떠났음. 나이 62, 42. 칙시가 대달국사(大達國師) [전등록8. 연등회요5].

雪峯; 의존(義存; 822-908) 당대승. 천주(泉州; 복건) 남안(南安) 사람이니 속성은 증()이며 호가 설봉. 12세에 아버지를 따라 포전(蒲田) 옥윤사(玉潤寺)에 놀러갔다가 경현율사를 배알(拜謁)하고 스승으로 삼았으며 머물며 동시(童侍)가 되었는데 17세에 낙발(落髮)하였고 부용산(芙蓉山)의 항조대사를 알현(謁見)했음. 당 선종(宣宗)이 불교를 중흥한 후 오()ㆍ초()ㆍ양()ㆍ송()ㆍ연()ㆍ진()을 지나며 노닐다가 유주(幽州) 보찰사에서 구족계를 받았음. 후에 무릉(武陵) 덕산(德山; 湖南 常德)에 이르러 선감(宣鑒)을 참알하고 그 법계(法系)를 이었음. 당 의종(懿宗) 함통 6(865) 부용산에 돌아왔고 11년 복주(福州) 상골산(象骨山)에 올라 암자를 세우고 흥법(興法)했음. 그 산이 민월(閩越)의 승경(勝景)이 되며 겨울 전에 먼저 눈 오고 성하(盛夏)에도 오히려 서늘한지라 고로 설봉(雪峰)의 명칭이 있으며 스님도 또한 이로써 호를 삼았음. 절이 처음 이루어지자 치소(緇素; 僧俗)가 운집하여 대중이 매양(每樣) 천오백 인을 넘었음. 희종(僖宗)이 진각대사(眞覺大師)란 호와 아울러 자가사(紫袈裟) 한 벌을 주었음. 대순(大順; 8 90-891)년 중에 단구(丹丘)ㆍ사명(四明)의 땅에 노닐었으며 아울러 군려(軍旅; 軍隊)의 가운데서 선법(宣法)했고 후에 민()으로 돌아와 민왕(閩王)의 예우(禮遇)를 갖춰 받았음. 개평 25월에 입적했으니 나이는 87. 그의 법사(法嗣)에 운문문언(雲門文偃)ㆍ현사사비(玄沙師備) 등이 있음. 문언(文偃)은 곧 운문종(雲門宗)의 개조(開祖)며 사비하(師備下)에 계침(桂琛)이 있으며 침하(琛下)에 법안문익(法眼文益)이 있으니 곧 법안종의 개조임 [송고승전12. 전등록16. 오등회원7].

丹霞; 천연(天然; 739-824)이니 상세한 것은 18단하배류(丹霞輩流)를 보라.

釋氏; 불ㆍ불법ㆍ불문을 가리킴. ()은 석가모니의 약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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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발행. 150부. 5책 1질. 총 4,842쪽, 12.5pt. 4․6배판. 하드. 양장. 정가 60만 원. 한문주석 1만 여 개로 염송본문의 各則을 해석하고 전체를 한글로 번역. 주석의 쪽 수가 본문을 조금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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