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등록

전등록 18 현사사비(玄沙師備)- 취암영참(翠巖令參)

태화당 2025. 10. 5. 12:31

景德傳燈錄卷第十八

 

吉州靑原山行思禪師第六世之二一十四人

福州雪峯義存禪師法嗣上一十四人

福州玄沙師備禪師 1651

福州長慶慧稜禪師 1689

福州大普山玄通禪師 1701

杭州龍冊寺道怤禪師 1702

福州長生山皎然禪師 1715

信州鵝湖山智孚禪師 1718

漳州報恩懷岳禪師 1721

杭州西興化度師郁禪師 1723

福州鼓山神晏國師 1725

漳州隆壽紹卿禪師 1735

福州僊宗行𤦆禪師 1737

福州蓮華山永福從弇禪師 1738

杭州龍華寺靈照禪師 1740

明州翠巖令參禪師已上一十四人見錄 1747

 

福州雪峯義存禪師法嗣

福州玄沙宗一大師法名師備 福州閩縣人也 姓謝氏 幼好垂釣 泛小艇於南臺江狎諸漁者 唐咸通初年甫三十 忽慕出塵乃棄釣舟 投芙蓉山靈訓禪師落髮 往豫章開元寺道玄律師受具 布衲芒屨食才接氣 常終日宴坐衆皆異之 與雪峯義存本法門昆仲而親近若師資 雪峯以其苦行呼爲頭陀 一日雪峯問曰 阿那箇是備頭陀 對曰 終不敢誑於人 異日雪峯召曰 備頭陀何不遍參去 師曰 達磨不來東土 二祖不往西天 雪峯然之 暨登象骨山乃與師同力締構 玄徒臻萃 師入室咨決罔替晨昏 又閱楞嚴經發明心地 由是應機敏捷與修多羅冥契 諸方玄學有所未決 必從之請益 至若與雪峯和尙徵詰亦當仁不讓 雪峯曰 備頭陀其再來人也

罔替; 不更替 不廢除

 

복주(福州) 현사(玄沙) 종일대사(宗一大師) 법명(法名) 사비(師備). 복주 민현(閩縣) 사람이며 성이 사씨(謝氏). 어릴 적에 수조(垂釣)를 좋아해 작은 배(小艇)를 남대강(南臺江)에 띄우고 여러 어자(漁者; 어부)를 친압(親狎)하던 자였다. 당 함통(咸通; 860-873) 초 나이가 비로소() 삼십에 홀연히 출진(出塵)을 흠모하여 이에 낙싯배(釣舟)를 버리고 부용산(芙蓉山) 영훈선사(靈訓禪師)에게 투신하여 낙발(落髮)했고 예장(豫章) 개원사(開元寺) 도현율사(道玄律師)에게 가서 수구(受具)했다. 포납(布衲)과 망구(芒屨; 널리 草鞋를 가리킴)로 음식은 겨우 접기(接氣)했고 늘 종일 연좌(宴坐)했고 대중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설봉의존(雪峯義存)과는 본디 법문(法門)의 곤중(昆仲; 형제)이었으나 친근(親近)하기가 사자(師資)와 같았다. 설봉이 그의 고행(苦行)으로써 두타(頭陀)라고 호칭(呼稱)했다. 어느 날 설봉이 문왈(問曰) 어느 것(阿那箇)이 이 비두타(備頭陀). 대왈(對曰) 마침내 감히 사람을 속이지 못합니다. 다른 날(異日) 설봉이 불러 가로되 비두타(備頭陀)는 왜 편참(遍參)하러 가지 않느냐. 사왈(師曰) 달마가 동토(東土)에 오지 않았고 2조가 서천(西天)에 가지 않았습니다. 설봉이 그렇다 하였다(然之). 상골산(象骨山)에 오름에 이르러() 이에 스님과 더불어 동력(同力)으로 체구(締構; 建造)하였고 현도(玄徒)가 진췌(臻萃; 모이다)했다. 스님이 입실(入室)하여 자결(咨決; 斷決)하면서 신혼(晨昏)을 망체(罔替)했다. 또 릉엄경을 열독(閱讀)하다가 심지(心地)를 발명(發明)했다. 이로 말미암아 응기(應機)가 민첩(敏捷)했고 수다라(修多羅)와 명계(冥契; 몰래 계합하다)했다. 제방의 현학(玄學)이 미결(未決)하는 바가 있으면 반드시 그를 좇아 청익했다. 이에() 설봉화상과 징힐(徵詰)함에 이르러서도 당인(當仁)하여 사양(辭讓)하지 않았다. 설봉이 가로되 비두타(備頭陀)는 그 재래인(再來人)이다.

罔替; 경체(更替)하지 않음. 폐제(廢除)하지 않음.

 

一日雪峯上堂曰 要會此事猶如古鏡當臺 胡來胡現漢來漢現 師曰 忽遇明鏡來時如何 雪峯曰 胡漢俱隱 師曰 老和尙脚跟猶未點地 師上堂時久 大衆盡謂不說法 一時各歸 師乃呵云 看總是一樣底 無一箇有智慧 但見我開遮兩片皮 盡來簇著覓言語意度 是我眞實爲他却總不知 看恁麽大難大難 師有時云 諸禪德汝諸人盡巡方行脚來 稱我參禪學道 爲有奇特去處 爲當只恁麽東問西問 若有試通來 我爲汝證明是非 我盡識得還有麽 若無當知只是趁謴古困切是汝旣到遮裏來 我今問汝 汝諸人還有眼麽 若有卽今便合識得 還識得麽 若不識便被我喚作生盲生聾底人 還是麽 肯恁麽道麽 禪德亦莫自屈 是汝眞實何曾是恁麽人 十方諸佛把汝向頂上著 不敢錯誤著一分子 只道此事唯我能知 會麽 如今相紹繼盡道承他釋迦 我道釋迦與我同參 汝道參阿誰 會麽 大不容易知 莫非大悟始解得知 若是限劑所悟亦莫能 汝還識大悟麽 不可是汝向髑髏前認他鑒照 不可是汝說空說無 說遮邊那邊 有世間法 有一箇不是世間法 和尙子虛空猶從迷妄幻生 如今若是大肯去 何處有遮箇稱說 尙無虛空消息 何處有三界業次 父母緣生與汝樁立前後 如今道無尙是誑語 豈況是有 知麽 是汝多時行脚和尙子 稱道有覺悟底事 我今問汝 只如巔山巖崖逈絕人處 還有佛法麽 還裁辨得麽 若辨不得卒未在 我尋常道 亡僧面前正是觸目菩提 萬里神光頂後相 若人覯得 不妨出得陰界 脫汝髑髏前意想 都來只是汝眞實人體 何處更別有一法解蓋覆 汝知麽 還信得麽 解承當得麽 大須努力

趁謴; 跟隨衆人喧哄

一分子; 極小的一點

; 明了 領悟 契合 亦作構搆

鑒照; 鑒識照察

裁辨; 别 辨别

觸目菩提; 眼目所見 都是菩提智慧 是省悟者達到的境界

 

어느 날 설봉이 상당하여 가로되 차사(此事)를 알고자 한다면 마치 고경(古鏡)이 당대(當臺)하여 호래호현(胡來胡現)하고 한래한현(漢來漢現)함과 같다. 사왈(師曰) 홀연히 명경(明鏡)이 옴을 만났을 때 어떻습니까. 설봉이 가로되 호한(胡漢)이 모두 숨는다(俱隱). 사왈 노화상이 발꿈치가 아직 땅에 닿지 않았습니다(脚跟猶未點地). 스님이 상당한 때가 오래되자 대중이 다 이르되 설법하지 않으신다 하고 일시에 각자 돌아갔다. 스님이 이에 꾸짖으며() 이르되 보건대 모두 이 일양의 것(一樣底)이라 일개(一箇)라도 지혜가 있는 이가 없구나. 단지 내가 이 양편피(兩片皮)를 엶을 보면 모두 와서 주착(簇著; 모이다)하여 언어와 의탁(意度)을 찾나니 이 나는 진실로 그를 위하지만 도리어 모두 알지 못한다. 이러함을 보건대 매우 어렵고(大難) 매우 어렵다. 스님이 어느 때 이르되 제선덕(諸禪德)이여, 너희 제인(諸人)은 모두 순방(巡方)하며 행각(行脚)하다가 왔다. 일컫되 나는 참선학도(參禪學道)하며 기특(奇特)한 거처(去處)가 있음이 되며 마땅히 다만 이렇게 동문서문(東問西問; 이리저리 묻다)한다 하거니와 만약 있다면 시험 삼아 통보(通報)해 오너라. 내가 너희를 위해 시비를 증명하겠다. 내가 모두 식득(識得)하나니 도리어 있느냐. 만약 없다면 당지(當知)하라, 다만 이 진곤(趁謴)古困切이다. 이 너희가 이미 이 속에 이르러 왔으니 내가 이제 너희에게 묻는다. 너희 제인이 도리어 눈이 있느냐. 만약 있다면 즉금 바로 합당히 식득(識得)하리니 도리어 식득하느냐. 만약 알지 못한다면 바로 내가 생맹생롱(生盲生聾)의 사람이라고 불러 지음을 입으리니 도리어 그런가(是麽). 이렇게 말함을 긍정하느냐. 선덕(禪德)이여 또한 자굴(自屈)하지 말지니 이는 너희의 진실이거늘 어찌 일찍이 이 임마인(恁麽人; 이러한 사람)이겠는가. 시방제불이 너희를 잡아 정상(頂上)을 향했나니 감히 일분자(一分子)라도 착오(錯誤)하지 말아라. 다만 말하되 차사(此事)는 오직 나만이 능히 아나니 아느냐. 여금에 서로 소계(紹繼)하여 모두 말하되 저 석가(釋迦)를 승계(承繼)했다 하거니와 나는 말하노니 석가와 내가 동참(釋迦)이다. 너희가 말하라, 누구(阿誰)를 참()했느냐, 아느냐. 매우() 용이(容易)하게 알지 못한다. 대오(大悟)가 아님이 없어야 비로소 득지(得知)할 줄 안다. 만약 이 한제(限劑; 限量)의 소오(所悟)면 또한 능히 구()하지 못한다. 너희가 도리어 대오(大悟)를 아느냐. 이 너희가 촉루(髑髏) 앞을 향해 저 감조(鑒照)를 인정함은 옳지 못하고 이 너희가 설공설무(說空說無)커나 저변나변(遮邊那邊)을 설함은 옳지 못하다. 세간법(世間法)이 있으며 일개(一箇)의 이 세간법이 아닌 게 있다. 화상자(和尙子; 는 조사), 허공도 오히려 미망(迷妄)으로 좇아 환생(幻生)하거늘 여금에 만약 이 매우 긍정한다면(大肯去) 어느 곳에 저개(遮箇)의 칭설(稱說)이 있겠는가. 오히려 허공의 소식(消息)도 없거늘 어느 곳에 3()의 업차(業次)가 있겠는가. 부모의 연생(緣生)이 너희에게 전후로 말뚝을 세워 주나니 여금에 무()라고 말함도 오히려 이 광어(誑語)거늘 어찌 하물며 이 유()이겠는가. 아느냐(知麽). 이 너희는 많은 시절(多時) 행각한 화상자(和尙子)니 각오(覺悟)한 일이 있다고 일컬어 말한다. 내가 이제 너희에게 묻노니 지여(只如) 전산(巔山) 암애(巖崖)의 사람이 멀리 단절된 곳에 도리어 불법이 있느냐. 도리어 재변(裁辨)함을 얻느냐. 만약 재변함을 얻지 못한다면 마침내 미재(未在; 不然). 내가 심상(尋常)에 말하되 망승(亡僧)의 면전(面前)이 바로 이 촉목보리(觸目菩提)만 리의 신광(神光)은 정후(頂後)의 상()이라 했다. 어떤 사람이 구득(覯得)한다면 음계(陰界)에서 나옴에 방애(妨礙)되지 않는다. 너희 촉루(髑髏) 앞의 의상(意想)을 벗으면 도래(都來; 모두) 다만 이 너희의 진실인(眞實人)의 체()이거늘 어느 곳에 다시 달리 일법(一法)이 있어 개부(蓋覆)할 줄 알겠는가. 너희가 아느냐, 도리어 신득(信得)하느냐. 승당(承當)함을 얻을 줄 아느냐. 매우 노력함을 써야 한다(大須努力).

趁謴; 중인(衆人)을 근수(跟隨; 뒤를 따라감)하며 훤홍(喧哄; 떠듦).

一分子; 극소(極小)의 일점(一點).

; 명료. 영오(領悟; 깨달아 앎). 계합. 또 구()구ㆍ()로 지음.

鑒照; 감식(鑒識)하고 조찰(照察).

裁辨; 감별(). 변별(辨别).

觸目菩提; 안목으로 보는 바가 모두 이 보리의 지혜니 이는 성오자(省悟者)가 달도(達到)한 경계임.

 

師又云 我今問汝諸人 且承得箇什麽事 在何世界安身立命 還辨得麽 若辨不得恰似揑目生華 見事便差 知麽 如今現前見有山河大地色空明暗種種諸物 皆是狂勞華相 喚作顚倒知見 夫出家人識心達本 故號沙門 汝今旣已剃髮披衣爲沙門相 卽合有自利利他分 如今看著盡黑漫漫地 如黑汁相似 自救尙不得 爭解爲得他人 仁者佛法因緣事大 莫作等閑相聚頭 亂說雜話 趁謴過時 光陰難得 可惜許大丈夫兒 何不自省察看是什麽事 只如從上宗風 是諸佛頂族 汝旣承當不得 所以我方便勸汝 但從迦葉門接續頓超去 此一門超汝凡聖因果 超他毘盧妙莊嚴世界海 超他釋迦方便門 直下永劫不敎有一物與汝作眼見 何不急急究取 未必道我且待三生兩生久積淨業 仁者 汝宗乘是什麽事 不可由汝身心用工莊嚴便得去 不可他心宿命便得去 會麽 只如釋迦出頭來 作如許多變弄說十二分敎 如甁灌水 大作一場佛事向汝 此門中用一點不得 用一毛頭伎倆不得 知麽 如同夢事 亦如寱語 沙門不應得出頭來 蓋爲識得 知麽 識得卽是大出脫大出頭 所以道超凡越聖出生離死離因離果 超毘盧越釋迦 不被凡聖因果所謾 一切處無人識得 汝知麽 莫只長戀生死愛網 被善惡業拘將去無自由分 饒汝鍊得身心同空去 饒汝得到精明湛不搖處 不出他識陰 古人喚作如急流水 流急不覺妄爲澹淨 恁麽修行盡不出他輪迴際 依前被輪轉去 所以道 諸行無常 直是三乘功果 如是可畏 若無道眼 亦不爲究竟 何如從今日博地凡夫 不用一毫工夫 便頓超去 解省心力麽 還願樂麽 勸汝 我如今立地待汝覯去 不用汝加功練行 如今不恁麽 更待何時 還肯麽 還肯麽

揑目生華; 捏目生花 按捏眼睛而産生幻視 似乎有花出現 比喩制造幻象 自欺欺人

自利利他; 又作自益益他 自利利人 自行化他 自利他利 自他二利 自利 乃利己之意 卽爲自身之功德而努力修行 以此所産生之善果而自得其利 利他 乃利益他人之意 卽非爲己利 而爲救濟諸有情而致力行善

黑漫漫地; 如黑暗漫漫 不知不辨禪法之樣子 地 助詞

識陰; 五陰之一 又作識蘊 卽眼識等諸識之各類聚

博地凡夫; 普通的人 一般的人 博地 廣闊的土地大地 天台三大部補注十一 博地 博 廣多也 下凡之地廣多故耳

 

스님이 또 이르되 내가 이제 너희 제인(諸人)에게 묻노니 다만() () 무슨 일을 승득(承得)했으며 어떤 세계에 있으면서 안신입명(安身立命)하는가. 도리어 변득(辨得)하느냐. 만약 분변(分辨; )함을 얻지 못한다면 날목생화(揑目生華)와 흡사하여 견사(見事)가 바로 어긋난다. 아느냐(知麽). 여금에 현전(現前)하여 산하대지(山河大地)ㆍ색공명암(色空明暗)의 갖가지 제물(諸物)이 있음을 보거니와 모두 이 광로(狂勞)의 화상(華相)이니 전도(顚倒)된 지견(知見)이라고 불러 짓는다. 무릇 출가인(出家人)은 마음을 알아 근본을 통달하는지라(識心達本) 고로 호가 사문(沙門)이다. 너희가 이제 기이(旣已; 已經. 이미) 체발(剃髮)하고 피의(披衣)하여 사문상(沙門相)이 되었으니 곧 합당히 자리이타(自利利他)할 분(; 분한)이 있다. 여금에 보건대(看著) 모두 흑만만지(黑漫漫地)라 마치 흑즙(黑汁)과 상사하나니 스스로를 구함도 오히려 얻지 못하거늘 어찌 타인을 위함을 얻을 줄 알겠는가. 인자(仁者), 불법 인연사(因緣事)가 크나니 등한(等閑)히 서로 취두(聚頭)하여 잡화(雜話)를 난설(亂說)하며 진곤(趁謴)하여 시일을 지냄을 짓지 말아라(莫作; 저본에 莫當으로 지었음). 광음(光陰)은 얻기 어렵다. 가석하나니(可惜許; 는 조사) 대장부아(大丈夫兒; 는 조사)가 왜 스스로 성찰(省察)하여 이 무슨 일인가(什麽事) 하고 보지 않느냐. 지여(只如) 종상(從上)의 종풍은 이 제불의 정족(頂族)인데 너희가 이미 승당(承當)함을 얻지 못하는지라 소이로 내가 방편으로 너희에게 권한다. 단지 가섭문(迦葉門)으로 좇아 접속(接續)하여 돈초(頓超)하여 가라. 1()은 너희의 범성(凡聖)의 인과를 초월(超越; )하며 저() 비로(毘盧)의 묘장엄세계해(妙莊嚴世界海)를 초월하며 저 석가의 방편문(方便門)을 초월하나니 직하(直下; 즉시)나 영겁(永劫)에 일물(一物)이 있어 너희에게 안견(眼見)을 지어 주게 하지 않거늘 왜 급급(急急)히 구취(究取)하지 않느냐. 내가 다만() 삼생(三生)이나 양생(兩生)에 정업(淨業)을 구적(久積)함을 기다리겠다고 말함이 필요하지 않다. 인자(仁者), 너희의 종승(宗乘)이 이 무슨 일인가. 너희의 신심(身心)이 용공(用工)하여 장엄함으로 말미암아 바로 얻어 간다 함은 옳지 못하며(不可). 타심(他心; 他心通)과 숙명(宿命; 宿命通)으로 바로 얻어 간다(得去; 저본에 得法으로 지어졌음) 함은 옳지 못하다. 아느냐, 지여(只如) 석가가 출두하여 와서 허다한 변롱(變弄; 변화와 희롱) 같은 것을 지어 12분교를 설하되 병으로 물을 대는 것과 같이(如甁灌水) 한바탕의 불사를 크게 지어 너희에게 향했지만 이 문중(門中)에선 일점도 씀을 얻지 못하고 일모두(一毛頭; 後綴)의 기량(伎倆)을 씀도 얻지 못한다. 아느냐(知麽), 마치 몽사(夢事)와 같고 또한 예어(寱語; 잠꼬대)와 같다. 사문(沙門)은 응당 출두하여 옴을 얻지 말고 대개(大蓋) 식득(識得)해야 한다. 아느냐(知麽), 식득(識得)이 즉시(卽是) 대출탈(大出脫)이며 대출두(大出頭)니 소이로 말하되 초범월성(超凡越聖; 凡聖을 초월)하고 출생이사(出生離死; 生死出離)하고 이인이과(離因離果)하고 비로(毘盧)를 초월(超越; )하고 석가를 초월(超越; )하여 범성(凡聖)의 인과(因果)에 속는 바를 입지 않고 일체처에 식득(識得)할 사람이 없다. 너희가 아느냐, 다만 생사의 애망(愛網)을 장련(長戀; 길이 연모)하지 말지니 선악업(善惡業)이 구속하여 가져 감을 입어 자유의 분한이 없다. 가령() 너희가 신심(身心)을 연득(鍊得)하여 허공과 같거나 가령 너희가 정명(精明)이 맑아() 흔들리지 않는 곳에 이름을 얻더라도 저 식음(識陰)을 벗어나지 못한다. 고인이 급류수(急流水)와 같다고 불러 지었나니 흐름이 급해(流急) 불각(不覺)에 허망하게 담정(澹淨)으로 삼는다. 이렇게(恁麽) 수행하면 모두 저 윤회제(輪迴際)를 벗어나지 못하고 의전(依前; 依舊)히 윤전(輪轉)을 입어 간다. 소이로 말하되 제행(諸行)이 무상(無常)하며 바로 이 3()의 공과(功果)라 했나니 이외 같이 가히 두렵다(). 만약 도안(道眼)이 없다면 또한 구경(究竟)이 되지 않나니 금일로 좇아 박지범부(博地凡夫)가 일호(一毫)의 공부(工夫)를 쓰지 않고 바로 문득 초월하여 감과 어찌 같겠는가. 심력(心力)을 줄일() 줄 아느냐. 도리어 원요(願樂; 원하고 좋아하다)하느냐. 너희에게 권한다. 내가 여금에 입지(立地; 즉시)에 너희가 구(; 領悟)하여 감을 기다리나니 너희의, 가공(加功)하고 연행(練行)함을 쓰지 않는다. 여금에 이러하지 못하면 다시 어느 시절을 기다리겠는가. 도리어 수긍하느냐, 도리어 수긍하느냐.

揑目生華; 날목생화(捏目生花)와 같음. 눈동자를 누르고 비비어 환시(幻視)를 산생(産生)하면 흡사 꽃이 출현함이 있는 듯함. 환상(幻象)을 제조하여 스스로 속고 남을 속임에 비유.

自利利他; 또 자익익타(自益益他)ㆍ자리이인(自利利人)ㆍ자행화타(自行化他)ㆍ자리타리ㆍ자타이리(自他二利)로 지음. 자리(自利)는 곧 이기(利己)의 뜻이니 곧 자신의 공덕을 위해 노력하고 수행함이며 이로써 산생(産生)한 바의 선과(善果)로 스스로 그 이익을 얻음. 이타(利他)는 곧 타인을 이익되게 함의 뜻이니 곧 자기의 이익을 위함이 아니라 모든 유정을 구제하기 위해 힘을 모아 행선(行善).

黑漫漫地; 흑암이 만만(漫漫)함과 같아서 선법을 부지불변(不知不辨)하는 양자(樣子). ()는 조사.

識陰; 5음의 하나. 또 식온(識蘊)으로 지음. 곧 안식 등 제식(諸識)의 각류의 무더기.

博地凡夫; 보통의 사람. 일반적 사람. 박지(博地)는 광활한 토지와 대지. 천태삼대부보주11. 박지(博地) ()은 넓고 많음이다. 하범지지(下凡之地)가 넓고 많은 연고일 뿐이다.

 

師有時上堂謂衆曰 是汝眞實如是 又有時云 達磨如今現在 汝諸人還見麽 師云 是諸人見有險惡 見有大蟲刀劍諸事逼汝身命 便生無限怕怖 如似什麽 恰如世間畫師一般 自畫作地獄變相 作大蟲刀劍了 好好地看了 却自生怕怖 汝今諸人亦復如是 百般見有 是汝自幻出自生怕怖 亦不是別人與汝爲過 汝今欲覺此幻惑麽 但識取汝金剛眼睛 若識得不曾敎汝有纖塵可得露現 何處更有虎狼刀劍解愶嚇得汝 直至釋迦如是伎倆 亦覓出頭處不得 所以我向汝道 沙門眼把定世界函蓋乾坤不漏絲髮 何處更有一物爲汝知見 知麽 如是出脫 如是奇特 何不究取

變相; 表現經文中變異事之佛敎繪畫

金剛眼睛; 金剛眼 堅固眼 卽明定正邪 辨別得失之眼

函蓋乾坤; 一意謂眞如佛性處處存在 包容一切 萬事萬物無不是眞如妙體 二雲門三句之一 謂凾盖乾坤 目機銖兩 不涉春緣 諸方爲雲門三句

 

스님이 어떤 때 상당하여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이 너희의 진실이 이와 같다. 또 어떤 때 이르되 달마가 여금에 현재(現在)하나니 너희 제인이 도리어 보느냐. 사운(師云) 이는 제인이 험악(險惡)이 있음을 보나니 대충(大蟲)이나 도검(刀劍)의 제사(諸事)가 너희의 신명(身命)을 핍박함이 있음을 보고 바로 무한한 파포(怕怖)를 내거니와 무엇과 여사(如似)한가 하면 흡사 세간의 화사(畫師)와 일반(一般)이니 지옥변상(地獄變相)을 스스로 그려서 짓고 대충(大蟲; )과 도검을 짓고서 호호지(好好地; 매우 좋게) 보고 나서 도리어 스스로 파포(怕怖; 두려움)를 냄과 같다. 너희 여금의 제인도 또한 다시 이와 같나니 백반(百般)으로 있음을 봄은 이 너희가 스스로 환()을 내고 스스로 파포(怕怖)를 냄이며 또한 이 다른 사람이 너희에게 허물이 되어 줌이 아니다. 너희가 여금에 이 환혹(幻惑)을 깨닫고자 하느냐. 단지 너희의 금강안정(金剛眼睛)을 식취(識取)하라. 만약 식득(識得)한다면 일찍이 너희에게, 섬진(纖塵)이 있어 가히 노현(露現)함을 얻게 하지 않거늘 어느 곳에 다시 호랑(虎狼)이나 도검(刀劍)이 있어 너희를 협하(愶嚇; 脅迫하며 으르다)함을 얻을 줄 알겠는가. 바로 석가가 이와 같은 기량(伎倆)에 이르더라도 또한 출두처(出頭處)를 찾음을 얻지 못한다. 소이로 내가 너희를 향해 말하노니 사문안(沙門眼)은 세계를 파정(把定)하고 함개건곤(函蓋乾坤)하여 사발(絲髮)도 새지 않거늘 어느 곳에 다시 너희에게 지견(知見)이 될 일물(一物)이 있겠는가. 아느냐, 이와 같이 출탈(出脫)하고 이와 같이 기특하거늘 왜 구취(究取)하지 않느냐.

變相; 경문 중의 변이(變異; 異變)의 일을 표현한 불교 회화(繪畫).

金剛眼睛; 곧 금강안(金剛眼)ㆍ견고안(堅固眼)이니 곧 정사(正邪)를 밝혀 정하고 득실을 변별하는 눈.

函蓋乾坤; 1. 뜻으로 이르면 진여의 불성이 곳곳에 존재하며 일체를 포용하여 만사만물이 이 진여의 묘체(妙體)가 아님이 없음. 2. 운문 3구의 하나. 이르자면 함개건곤(凾盖乾坤)ㆍ목기수량(目機銖兩)ㆍ불섭춘연(不涉春緣)이니 제방에서 운문 3구라 함.

 

師云 汝諸人如似在大海裏坐 沒頭水浸却了 更展手問人乞水喫 還會麽 夫學般若菩薩是大根器有大智慧始得 若有智慧卽今便得出脫 若是根機遲鈍 直須勤苦忍耐 日夜忘疲失食 如喪考妣相似 恁麽急切盡一生去 更得人荷挾 剋骨究實 不妨亦得覯去 且況如今誰是堪任受學底人 仁者莫只是記言記語 恰似念陀羅尼相似 蹋步向前來 口裏哆哆啝啝地 被人把住詰問著 沒去處便瞋道 和尙不爲我答話 恁麽學事大苦 知麽 有一般坐繩床和尙 稱爲善知識 問著便動身動手點眼吐舌瞪視 更有一般便說 昭昭靈靈靈臺智性能見能聞 向五蘊身田裏作主宰 恁麽爲善知識大賺人 知麽 我今問汝 汝若認昭昭靈靈是汝眞實 爲什麽瞌睡時又不成昭昭靈靈 若瞌睡時不是 爲什麽有昭昭時 汝還會麽 遮箇喚作認賊爲子 是生死根本妄想緣氣 汝欲識此根由麽 我向汝道 汝昭昭靈靈 只因前塵色聲香等法而有分別 便道此是昭昭靈靈 若無前塵 汝此昭昭靈靈 同於龜毛兔角 仁者眞實在什麽處 汝今欲得出他五蘊身田主宰 但識取汝祕密金剛體 古人向汝道 圓成正遍遍周沙界 我今少分爲汝智者 可以譬喻得解 汝見此南閻浮提日麽 世間人所作興營養身活命種種心行作業 莫非承他日光成立 只如日體還有多般及心行麽 還有不周遍處麽 欲識此金剛體亦如是 只如今山河大地十方國土色空明暗及汝身心 莫非盡承汝圓成威光所現 直是天人群生類所作業次 受生果報有性無情 莫非承汝威光 乃至諸佛成道成果接物利生 莫非盡承汝威光 只如金剛體還有凡夫諸佛麽 有汝心行麽 不可道無便得當去也 知麽 汝旣有如是奇特 當陽出身處 何不發明取 便隨他向五蘊身田中鬼趣裏作活計 直下自謾却去 忽然無常殺鬼到來 眼目譸張 身見命見恁麽時大難支荷 如生脫龜箇相似大苦 仁者莫把瞌睡見解便當却去 未解蓋覆得毛頭許 汝還知麽 三界無安猶如火宅 且汝未是得安樂底人 只大作群隊干他人世 遮邊那邊飛走野鹿相似 但知求衣爲食 若恁麽爭行他王道 知麽 國王大臣不拘汝 父母放汝出家 十方施主供汝衣食 土地龍神護汝 也須具慚愧知恩始得 莫孤負人好 長連床上排行著地銷將去 道是安樂未在 皆是粥飯將養得 汝爛冬瓜相似變將去 土裏埋將去 業識茫茫無本可據 沙門因什麽到恁麽地 只如大地上蠢蠢者 我喚作地獄劫住 如今若不了 明朝後日看變入驢胎馬肚裏 牽犁拽杷銜鐵負鞍 碓擣磨磨水火裏燒煮去 大不容易受 大須恐懼好 是汝自累 知麽 若是了去 直下永劫不曾敎汝有遮箇消息 若不了 此煩惱惡業因緣 未是一劫兩劫得休 直與汝金剛齊壽 知麽

如喪考妣; 謂如當父母死亡 喪 人死 白虎通 人死謂之喪 又哀葬死者的禮儀 如居喪服喪 考妣 廣雅 父爲考 母爲妣 郭璞注引蒼頡篇曰 考妣延年 邢昺疏 此亦生稱考妣也

荷挾; 傍助 扶持

剋骨; 刻骨 剋 通刻

哆哆啝啝; 同哆哆和和 意爲口中話多而心內幷不理解

昭昭靈靈; 明白淸醒貌

靈臺; 指一心 眞如 佛性 緇門警訓註上 靈臺 心也 莊周(莊子庚桑楚)曰 萬惡不可內於靈臺 司馬彪曰 心爲神靈之臺 選註云 寄神通於心府之下 註心賦一 此一心法 是神解之性 能通靈通聖 故曰靈臺

身田; 身能生善惡之業 故云身田

龜毛兔角; 龜本無毛 兔本無角 龜毛兔角 指虛有名稱而幷無實物 常用來說明萬事萬物虛幻不實

南閻浮提; 卽南贍部洲 四大洲之一 舊云南閻浮提 新云南贍部洲 閻浮者 卽贍部之樹名 提者 洲之義 此洲中地有贍部樹 故以爲洲名 在須彌山南方之鹹海中 故云南 慧琳音義一 立世阿毘曇論云 有贍部樹生此洲北邊泥民陀羅河 南岸正當洲之中心 北臨水上 於樹下水底南岸下有贍部黃金 古名閻浮檀金 樹因金而得名 洲因樹而立號 故名贍部

接物利生; 卽接引化導世間衆生 相應其種種機根 而給與利益

鬼趣; 又曰鬼道 鬼神所趣之境土也 五趣之一 俱舍論八曰 趣謂所往

無常殺鬼; 無常猶如殺人之幽鬼 由於無常之理 令生者 不分貴賤 不擇豪賢 必有一死 故以殺鬼比喩之

; 誑也 謂相欺惑者也 [慧琳音義十九]

支荷; 領受(機緣) 承受

三界無安; 法華經二譬喩品 三界無安 猶如火宅 衆苦充滿 甚可怖畏 常有生老 病死憂患 如是等火 熾然不息

將養; 休息和調養

牽犁拽杷; 牽犂拽耙 又作牽犁拽把 一代指做畜生 二比喩修道求法 應像牛馬耕田 一心勤苦耕作 此指一

自累; 自己束縛自己 牽累自己

 

사운(師云) 너희 제인은 마치 대해 속에 앉아 머리가 잠기도록 물에 침몰해버리고는 다시 손을 펴 사람에게 물어 물을 구걸해 먹음과 흡사하나니 도리어 아느냐. 무릇 반야를 배우는 보살은 이 대근기(大根器)이면서 대지혜가 있어야 비로소 옳다. 만약 지혜가 있다면 즉금 바로 출탈(出脫)함을 얻으려니와 만약 이 근기(根機)가 지둔(遲鈍)하다면 바로 모름지기 근고(勤苦)하고 인내하면서 일야(日夜)로 망피실식(忘疲失食; 피로를 잊고 끼니를 잃음)하되 마치 고비(考妣; 부모)를 잃음((如喪考妣))과 상사해야 한다. 이렇게 급절(急切)하며 일생을 다하고 다시 타인의 하협(荷挾)을 얻고 극골(剋骨)하며 구실(究實)한다면 또한 구거(覯去; 領悟. 계합)를 얻음에 방애(妨礙)되지 않는다. 또 견주건대(且況) 여금에 누가 이 수학(受學)을 감임(堪任)할 사람인가. 인자(仁者), 다만 이 기언기어(記言記語)하되 흡사 다라니(陀羅尼)를 외움()과 상사하지 말아라. 답보(蹋步)하여 앞을 향해 오면서 입속이 치치화화지(;哆哆啝啝地 地는 조사)에 타인이 파주(把住)하고 힐문함을(詰問著) 입으면 거처(去處)가 없으면서 바로 성내어 말하되 화상이 나를 위해 답화(答話)하지 않는다 하거니와 이러한(恁麽) 학사(學事)는 대고(大苦)니 아느냐. 일반(一般)의 승상(繩床)에 앉은 화상이 있으며 일컬어 선지식이라 하는데 물으면(問著) 바로 동신(動身)ㆍ동수(動手)ㆍ점안(點眼; 눈을 깜작이다)ㆍ토설(吐舌)ㆍ징시(瞪視; 노려보다)한다. 다시 일반(一般)이 있어 바로 설하되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영대(靈臺)의 지성(智性)이 능견능문(能見能聞)하나니 5()의 신전(身田) 속을 향해 주재(主宰)를 짓는다 하거니와 이렇게 선지식이 된다면 매우 사람을 속임이다(大賺人). 아느냐. 내가 이제 너희에게 묻노니 너희가 만약 소소영령(昭昭靈靈)이 이 너희의 진실이라고 인정한다면 무엇 때문에 잠들었을(瞌睡) 때는 또 소소영령을 이루지 못하는가. 만약 잠들었을 때 이러하지 못한다면(잠들었을 때 소소영령을 이루지 못한다면) 무엇 때문에 소소(昭昭)한 때가 있느냐. 너희가 도리어 아느냐. 이것(遮箇)을 도적을 인정해 아들로 삼음이라고 불러 짓는다. 이는 생사의 근본이며 망상(妄想)의 연기(緣氣). 너희가 이 근유(根由)를 알고자 하느냐. 내가 너희를 향해 말한다. 너희의 소소영령은 단지 전진(前塵)인 색성향(色聲香) 등의 법을 인해 분별이 있음이거늘 바로 말하되 이것이 이 소소영령이라 하거니와 만약 전진(前塵)이 없다면 너희의 이 소소영령이 귀모토각(龜毛兔角)과 같다. 인자(仁者; 상대방의 존칭)의 진실이 어느 곳에 있느냐. 너희가 이제 저 5온 신전(身田)의 주재(主宰)를 벗어남을 얻고자 한다면 단지 너희의 비밀(祕密)의 금강체(金剛體)를 식취(識取)하라. 고인이 너희를 향해 말하되 원성(圓成; 원만성취)하고 정편(正遍; 바로 두루하다)하여 사계(沙界)에 편주(遍周)한다. 내가 이제 소분(少分) 너희 지자(智者)를 위하리니 가히 비유로써 득해(得解)하라. 너희가 이 남염부제(南閻浮提)의 해()를 보느냐. 세간인(世間人)이 짓는 바 흥영(興營)ㆍ양신(養身)ㆍ활명(活命)과 갖가지 심행(心行)의 작업이 저 일광(日光)을 승수(承受)하여 성립하지 않음이 없거니와 지여(只如) 일체(日體)가 도리어 여러 가지(多般) 및 심행(心行)이 있느냐. 도리어 주편(周遍)하지 못하는 곳이 있느냐. 이 금강체(金剛體)를 알고자 한다면 또한 이와 같다. 다만 여금의 산하대지(山河大地)ㆍ시방국토(十方國土)ㆍ색공명암(色空明暗) 및 너의 신심(身心)이 모두 너의 원성(圓成)의 위광(威光)을 승수(承受)하여 나타나는 바가 아님이 없다. 바로 이 천인(天人) 군생류(群生類)가 짓는 바 업차(業次)와 수생(受生)하는 과보ㆍ유성(有性)ㆍ무정(無情)이 너희의 위광(威光)을 승수(承受)하지 않음이 없다. 내지 제불의 성도(成道)ㆍ성과(成果)와 접물이생(接物利生)이 모두 너희의 위광(威光)을 승수(承受)하지 않음이 없다. 지여(只如) 금강체(金剛體)에 도리어 범부와 제불이 있느냐, 너희의 심행(心行)이 있느냐. 없다고 말함이 바로 득당(得當)하여 간다 함은 옳지 못하다. 아느냐, 너희가 이미 이와 같은 기특하고 당양(當陽)하여 출신(出身)할 곳이 있거늘 왜 발명(發明)해 취하지 않고 바로 그를 따라 5() 신전(身田) 가운데의 귀취(鬼趣) 속을 향해 활계(活計)를 짓고 직하(直下; 즉시) 스스로 속아버리느냐. 홀연히 무상살귀(無常殺鬼; 저본에 無常殺境으로 지었음)가 도래(到來)하면 안목이 주장(譸張)하고 신견(身見)과 명견(命見)이 이러한 때 매우 지하(支荷; 저본에 枝荷로 지었음)하기 어렵나니 마치 산 채로 거북을 벗김과 상사(相似)하여 매우 고통스럽다(大苦). 인자(仁者), 갑수(瞌睡)의 견해를 가지고 바로 당각(當却)하지 말지니 개부(蓋覆)하여 모두(毛頭; 는 조사)만큼()도 얻을 줄 알지 못한다. 너희가 도리어 아느냐, 삼계가 안녕이 없음(三界無安)이 마치 화택과 같다. () 너희는 이 안락을 얻은 사람이 아니며 다만 군대(群隊)를 크게 지어 저 인세(人世)에 상간(相干)하나니 저변(遮邊)과 나변(那邊)에 비주(飛走)하는 야록(野鹿)과 상사하다. 단지 옷을 구하고 음식을 위할 줄만 아나니 만약 이러하다면 어찌 저 왕도(王道)를 행하겠는가. 아느냐. 국왕과 대신이 너희를 구속하지 않고 부모가 너희를 방출해 출가케 했고 시방의 시주가 너희에게 의식(衣食)을 공급하고 토지(土地; 토지신)와 용신(龍神)이 너희를 옹호(擁護)하니 또한 모름지기 참괴(慚愧)를 갖추어 지은(知恩)해야 비로소 옳고 사람을 저버리지(孤負) 말아야 좋으니라(). 장련상상(長連床上)에서 배행(排行)하고 착지(著地)하여 소비(消費; )해 나아가면서(將去) 말하되 이는 안락(安樂)이다 하면 미재(未在; 不然)니 모두 이 죽반(粥飯)으로 장양(將養)해 얻었으며 너희는 문드러진 동과(冬瓜)와 상사(相似)하여 변해 나아갈 것이며 흙 속에 매장(埋葬)되어 나아갈 것이다. 업식이 망망(茫茫)하여 가히 의거할 근본이 없나니 사문(沙門)이 무엇으로 인해 이러한 경지(境地)에 이르는가. 지여(只如) 대지(大地) 위에 준준(蠢蠢; 꿈틀거리다)하는 것을 내가 지옥에 영겁(永劫)토록 머문다고 불러 짓는다. 여금에 만약 깨닫지 못하면(不了) 명조(明朝; 내일 아침. 내일)나 후일에 여태마두(驢胎馬肚; 나귀 태와 말의 배) 속에 들어가 쟁기를 당기고 써래를 끌며(牽犁拽杷) 쇠를 물고 안장을 지며(銜鐵負鞍) 방아로 찧고 맷돌로 갈며(碓擣磨磨) 물과 불 속에 불탈(燒煮) 것이다. 매우 용이하게 받지 못할 것이며 매우 두려움(恐懼)을 써야 좋으리리 이는 너희의 자루(自累). 아느냐. 만약 이 깨친다면(了去) 직하(直下; 즉시)에 영겁(永劫)토록 일찍이 너희에게 저개(遮箇)의 소식이 있게 하지 않겠지만 만약 깨치지 못한다면 이 번뇌와 악업의 인연은 이 일겁(一劫)이나 양겁(兩劫)에 쉼을 얻지 못하고 바로 너희의 금강(金剛)과 제수(齊壽)하리니 아느냐.

如喪考妣; 이르자면 부모의 사망을 당함과 같음. ()은 사람의 죽음. 백호통(白虎通) 사람의 죽음을 일컬어 상()이라 한다. 또 죽은 자를 애장(哀葬)하는 예법이니 예컨대() 거상(居喪)ㆍ복상(服喪). 고비(考妣)는 광아 부()는 고()가 되고 모()는 비()가 된다. 곽박의 주()에 창힐편을 인용해 가로되 고비연년(考妣延年). 형병(邢昺) () 이것은 또한 생전에 고비(考妣)를 일컬음이다.

荷挾; 방조(傍助). 부지(扶持).

剋骨; 각골(刻骨; 뼈에 새김). ()은 각()과 통함.

哆哆啝啝; 치치화화(哆哆和和)와 같음. 뜻은 입속에 말이 많으나 심내(心內)에 모두 이해하지 못함이 됨.

昭昭靈靈; 명백하고 청성(淸醒)한 모양.

靈臺; 일심ㆍ진여ㆍ불성을 가리킴. 치문경훈주상. 영대(靈臺) ()이다. 장주(莊周; 莊子 庚桑楚)가 가로되 만악(萬惡)이 가히 영대(靈臺)에 들어가지 못한다. 사마표가 가로되 심()은 신령의 대()가 된다. 선주(選註)에 이르되 신통을 심부(心府)의 아래 기탁한다. 주심부1. 이 일심법은 이 신해(神解)하는 자성이며 능히 통령통성(通靈通聖; 영에 통하고 성에 통하다)하는지라 고로 가로되 영대(靈臺).

身田; 몸은 능히 선악의 업을 내는지라 고로 이르되 신전(身田).

龜毛兔角; 거북은 본래 털이 없으며 토끼는 본래 뿔이 없음. 귀모토각은 헛되이 명칭만 있고 모두 실물이 없음을 가리킴. 상용하여 오면서 만사만물의 허환되고 실답지 못함을 설명함.

南閻浮提; 곧 남섬부주(南贍部洲)4대주(大洲)의 하나. 구역에 이르기를 남염부제(南閻浮提)며 신역에 이르기를 남섬부주(南贍部洲). 염부(閻浮; jambu)란 것은 섬부(贍部)의 수(; 나무) 이름이며 제()란 것은 주()의 뜻임. 이 주 가운데 땅에 섬부수가 있으며 고로 주명(洲名)으로 삼았음. 수미산 남방의 함해(鹹海) 중에 있는지라 고로 이르되 남(). 혜림음의1. 입세아비담론에 이르되 섬부수(贍部樹)가 있어 이 주() 북변의 니민다라하(泥民陀羅河)에서 난다. 남안은 바로 주의 중심에 해당하며 북쪽으로 수상(水上)에 임했다. 수하(樹下)의 수저(水底) 남안 아래 섬부황금(贍部黃金)이 있다. 옛이름은 염부단금(閻浮檀金)이며 수()는 금으로 인해 이름을 얻었고 주()는 수()로 인해 호를 세웠으므로 고로 이름이 섬부(贍部).

接物利生; 곧 세간의 중생을 접인(接引)하여 화도(化導)함이니 그 갖가지의 기근(機根)에 상응해 이익을 급여함임.

鬼趣; 또 가로되 귀도(鬼道)니 귀신이 취향하는 바의 경토(境土). 5()의 하나. 구사론8에 가로되 취()는 이르자면 가는 곳이다.

無常殺鬼; 무상은 마치 살인하는 유귀(幽鬼; 유령)와 같음. 무상의 이치로 말미암아 살게 된 자는 귀천을 분별하지 않고 호현(豪賢)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한 번 죽음이 있으므로 고로 살귀로 이에 비유함.

; (; 속임). 이르자면 서로 기혹(欺惑)하는 것임 [혜림음의19].

支荷; (機緣)을 영수함, 승수(承受).

三界無安; 법화경2 비유품. 삼계가 안녕이 없음(三界無安)/ 마치 화택과 같나니(猶如火宅)/ 뭇 괴로움이 충만하여/ 매우 가히 두렵다(怖畏)/ 늘 생로와/ 병사의 우환이 있어/ 이와 같은 화가/ 활활 타서(熾然) 쉬지 않는다.

將養; 휴식과 조양(調養).

牽犁拽杷; 견리예파(牽犂拽耙)와 같음. 또 견리예파(牽犁拽把; 와 같음. 는 자루 파)로 지음. 1. 축생을 지음을 대지(代指; 대체해 가리킴). 2. 수도하여 구법함을 비유함이니 소나 말의 형상에 응해 일심으로 근고하며 경전(耕田; 경작)함임. 여기에선 1을 가리킴.

自累; 자기가 자기를 속박함. 자기에게 견루(牽累).

 

南際長老到雪峯 雪峯令訪于師 師問曰 古人道 此事唯我能知 長老作麽生 南際曰 須知有不求知者歸宗柔別拊掌三下師曰 山頭和尙喫許多辛苦作麽 雪峯因普請畬田 見一蛇以杖挑起召衆曰 看看 以刀芟爲兩段 師以杖拋於背後更不顧視 衆愕然 雪峯曰俊哉 師一日隨侍雪峯遊山 雪峯指一片地曰 此處造得一所無縫塔 師曰 高多少 雪峯乃顧視上下 師曰 人天福報卽不如和尙 若是靈山受記大遠在 雪峯曰 世界闊一尺古鏡闊一尺 世界闊一丈古鏡闊一丈 師指火鑪曰 火鑪闊多少 雪峯曰 如古鏡闊 師曰 老和尙脚跟未點地 師初受請住梅谿場普應院 中間遷止玄沙山 自是天下叢林海衆 皆望風而賓之 閩帥王公請演無上乘 待以師禮 學徒餘八百室戶不閉

 

남제(南際) 장로가 설봉에 이르자 설봉이 스님을 방문하게 했다. 스님이 문왈(問曰) 고인이 말하되 차사(此事)는 오직 나만이 능히 안다 했거니와 장로는 어떠한가. 남제가 가로되 지()를 구하지 않는 자가 있는 줄 꼭 아셔야 합니다歸宗柔하여 세 번 拊掌했다. 사왈(師曰) 산두화상(山頭和尙)이 허다한 신고(辛苦)를 받아() 무엇하리오. 설봉이 여전(畬田; 火田)을 보청(普請)함으로 인해 한 뱀을 보자 지팡이로써 돋우어() 일으키고 대중을 부르고 가로되 보아라(), 보아라. 칼로써 베어(; 벨 삼) 두 조각을 만들었다. 스님이 지팡이로써 등 뒤로 던지고 다시 돌아보지 않았다. 대중이 악연(愕然; 몹시 놀라는 모양)했다. 설봉이 가로되 준재(俊哉)로다. 스님이 어느 날 설봉을 수시(隨侍)하며 유산(遊山)했다. 설봉이 일편(一片)의 땅을 가리키며 가로되 이곳에 한 곳의 무봉탑(無縫塔)을 조득(造得; 建造)할 만하다. 사왈 높이는 얼마입니까(多少). 설봉이 이에 상하(上下)를 돌아보았다. 사왈 인천(人天)의 복보(福報; 저본에 依報로 지었음)는 곧 화상과 같지 못하지만 만약 이 영산(靈山)의 수기(受記)라면 너무 멉니다(大遠在; 는 조사). 설봉이 가로되 세계의 넓이가 1()이면 고경(古鏡)의 넓이도 1척이고 세계의 넓이가 1()이면 고경의 넓이도 1장이다. 스님이 화로(火鑪)를 가리키며 가로되 화로는 넓이가 얼마입니까. 설봉이 가로되 고경의 넓이와 같다. 사왈 노화상(老和尙)의 발뒤꿈치가 땅에 닿지 않았구나(脚跟未點地). 스님이 처음엔 수청(受請)하여 매계장(梅谿場) 보응원(普應院)에 주()했고 중간에 옮겨 현사산(玄沙山)에 머물렀다. 이로부터 천하 총림의 해중(海衆)이 모두 망풍(望風)하며 그를 따랐다(). 민수(閩帥) 왕공(王公)이 무상승(無上乘; 대승)을 연설하기를 청했고 스승의 예의로 접대(接待)했다. 학도(學徒)8백 남짓이었고(餘八百) 실호(室戶)를 닫지 않았다.

 

師上堂良久謂衆曰 我爲汝得徹困也 還會麽 僧問 寂寂無言時如何 師曰 寱語作麽 曰本分事請師道 師曰 𥋙睡作麽 曰學人卽𥋙睡 和尙如何 師曰 爭得恁麽不識痛痒 又曰 可惜如許大師僧 千道萬里行脚到遮裏 不消箇𥋙睡寱語便屈却去 問如何是學人自己 師曰 用自己作麽 僧問 從上宗門中事 師此間如何言論 師曰 少人聽 僧曰請和尙直道 師曰 患聾作麽 又曰 仁者如今事不獲已 敎我抑下如是威光 苦口相勸 百千方便道如此如彼 共汝相知聞 盡成顚倒知見 將此咽喉脣吻 只成得箇野狐精業謾汝我 還肯麽 只如有過無過唯我自知 汝爭得會 若是恁麽人出頭來甘伏呵責 夫爲人師匠大不易 須是善知識始得知 我如今恁麽方便助汝 猶尙不能覯得 可中純擧宗乘 是汝向什麽處措 還會麽 四十九年是方便 只如靈山會有百萬衆 唯有迦葉一人親聞 餘盡不聞 汝道迦葉親聞事作麽生 不可道如來無說說迦葉不聞聞便得當 不可是汝修因成果 福智莊嚴底事 知麽 且如道 吾有正法眼付囑大迦葉 我道猶如話月 曹谿豎拂子還如指月 所以道 大唐國內宗乘中事 未曾見有一人擧唱 設有人擧唱 盡大地人失却性命 如無孔鐵槌相似 一時亡鋒結舌去 汝諸人賴遇我不惜身命 共汝顚倒知見 隨汝狂意 方有申問處 我若不共汝恁麽知聞去 汝向什麽處得見我 會麽大難 努力珍重 乃有偈曰 萬里神光頂後相 沒頂之時何處望 事已成意亦休 此箇來蹤觸處周 智者著便提取 莫待須臾失却頭 又偈曰 玄沙遊徑別 時人切須知 三冬陽氣盛 六月降霜時 有語非關舌 無言切要詞 會我最後句 出世少人知

無孔鐵槌; 原指無柄之鐵槌 禪林中用以比喩欲引導衆生 卻缺乏引導之方法 猶如無孔不得加柄之鐵槌 全無著手處 或比喩拘泥於言敎而失去開悟之機緣

亡鋒結舌; 謂啞口無言 無有領會禪機

; 一挑 二挑弄 挑發 三指禪師對學人的啓發 此指三

切要; 一要領 綱要 二緊要

 

스님이 상당하여 양구(良久)하고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내가 너희를 위하느라 철저히 피곤함을 얻었다. 도리어 아느냐. 승문(僧問) 적적(寂寂)히 말이 없을 때 어떻습니까. 사왈(師曰) 예어(寱語; 잠꼬대)하여 무엇하랴. 가로되 본분사(本分事)를 스님에게 청하오니 말씀하십시오. 사왈 압수(𥋙睡; 𥋙)하여 무엇하랴. 가로되 학인은 곧 압수(𥋙睡)합니다만 화상은 어떻습니까. 사왈 어찌하여 이렇게 통양(痛痒)을 알지 못함을 얻느냐. 또 가로되 가석하게도 여허(如許; 許多. 如此)한 대사승(大師僧)이 천도만리(千道萬里)를 행각하다가 이 속(遮裏)에 이르러 저() 압수(𥋙睡)하면서의 예어(寱語)를 삭이지() 못하고 바로 굴복해버리는구나(屈却去). 묻되 무엇이 이 학인의 자기입니까. 사왈 자기를 써서 무엇하랴. 승문(僧問) 종상(從上)의 종문(宗門) 중의 일을 스님의 차간(此間)에선 어떻게 언론(言論)합니까. 사왈 듣는 사람이 적다(少人聽). 승왈(僧曰) 화상의 직도(直道; 바로 말하다)를 청합니다. 사왈 환롱(患聾; 귀머거리의 질환)하여 무엇하리오. 또 가로되 인자(仁者), 여금에 일이 불획이(不獲已; 不得已)하여 나로 하여금 이와 같은 위광(威光)을 억하(抑下; 억눌러 내리다)하게 하여 고구(苦口)로 상권(相勸)하여 백천(百千) 방편으로 이와 같고 그와 같다고 말하면서 너희와 함께 서로 지문(知聞)하지만 모두 전도(顚倒)된 지견을 이룬다. 이 목구멍(咽喉)과 입술(脣吻)을 가지고 다만 저() 야호정(野狐精)의 업을 이루어(成得) 너희와 나를 속인다 하노니 도리어 수긍하느냐. 지여(只如) 유과무과(有過無過)를 오직 나만이 스스로 알거늘 너희가 어찌 이회(理會)함을 얻겠는가. 만약 이 이러한 사람이 출두해 온다면 가책(呵責)에 달게 굴복(屈伏)하리라. 무릇 사람의 사장(師匠)이 됨은 매우 쉽지 않나니 모름지기 이 선지식이라야 비로소 득지(得知)한다. 내가 여금에 이러한(恁麽) 방편으로 너희를 돕지만 오히려(猶尙; 仍然) 능히 구득(覯得)하지 못한다. 가중(可中; 假若. 假如) 순전히 종승(宗乘)을 든다면 이 너희가 어느 곳을 향해 조치(措置; )하겠는가. 도리어 아느냐. 사십구년(四十九年)이 이 방편이니 지여(只如) 영산회(靈山會)에 백만중(百萬衆)이 있었지만 오직 가섭 1인이 있어 친문(親聞)하고 나머지는 모두 듣지 못했다. 너희가 말하라, 가섭이 친문(親聞)한 일이 무엇인가(作麽生). 여래가 설함 없이 설하고 가섭이 듣지 않으면서 들었음이 바로 득당(得當)하다고 말함은 옳지 못하다. 이 너희가 수인성과(修因成果)하여 복지(福智)로 장엄(莊嚴)하는 일이라 함은 옳지 못하다. 아느냐. 또 말함과 같이 나에게 정법안(正法眼)이 있어 마하 대가섭에게 부촉(付囑)한다 한 것은 나는 말하노니 달을 말함(話月)과 같고 조계(曹谿; 6)가 불자를 세운 것은 도리어 달을 가리킨 것과 같다(還如指月; 저본에 如還指月로 지었음). 소이로 말하되 대당국(大唐國) 안에서 종승(宗乘) 중의 일을 일찍이 한 사람이라도 거창(擧唱)함이 있음을 보지 못했다. 설사 거창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온 대지 사람이 성명(性命)을 잃어버리나니 마치 무공철추(無孔鐵槌)와 상사(相似)하여 일시에 망봉결설(亡鋒結舌)한다. 너희 제인(諸人)이 다행히() 나의, 신명(身命)을 아끼지 않음을 만나 너희의 전도(顚倒)된 지견과 함께 하고 너희의 광의(狂意)를 따르는지라 바야흐로 물음을 펼 곳(申問處)이 있다. 내가 만약 너희와 함께 이렇게 지문(知聞; 저본에 有聞으로 지었음)하여 가지 않는다면 너희가 어느 곳을 향해 나를 득견(得見)하겠는가. 아느냐, 매우 어렵나니 노력(努力)하라. 진중(珍重). 이에 게가 있어 가로되 만리(萬里) 신광(神光)의 정후상(頂後相)/ 정수리()가 잠길 때 어느 곳에서 바라보겠는가/ ()를 이미 이루면 뜻도 또한 쉬나니/ 이것(此箇)의 내종(來蹤)이 접촉하는 곳에 두루하다/ 지자(智者)는 요착()하면 바로 제취(提取)하나니/ 수유(須臾)에 머리를 실각(失却)함을 기다리지 말아라. 또 게왈(偈曰) 현사(玄沙)의 유경(遊徑)은 다르나니/ 시인(時人)이 절실(切實)하게 수지(須知)하라/ 삼동(三冬)에 양기(陽氣)가 성()하고/ 6월에 서리가 내릴 때다/ 말이 있으나 혀와 상관되지 않고/ 말이 없으나 절요(切要)의 사()/ 나의 최후구(最後句)를 이회(理會)하려면/ 출세(出世; 출세간)라 아는 사람이 적다.

無孔鐵槌; 원래는 자루 없는 철추(鐵槌)를 가리키나 선림 중에선 중생을 인도(引導)하려고 하나 도리어 인도하는 방법이 결핍(缺乏)함에 비유로 씀. 마치 구멍이 없어 자루를 더함을 얻지 못하는 철추(鐵槌)와 같아서 온전히 착수(著手)할 곳이 없음임. 혹은 언교(言敎)에 구니(拘泥. 拘束)되어 개오(開悟)의 기연(機緣)을 놓침에 비유함.

亡鋒結舌; 이르자면 입이 벙어리가 되어 말이 없음이니 선기(禪機)를 영회(領會; 깨달아 앎)함이 있지 않음.

; 1. (; 돋우다). 2. 도롱(挑弄; 돋우어 희롱함). 도발(挑發; 남을 집적거려 일이 일어나게 함). 3. 선사가 학인을 상대해 계발함을 가리킴. 여기에선 3을 가리킴.

切要; 1. 요령(要領). 강요(綱要). 2. 긴요(緊要).

 

問四威儀外如何奉王 師曰 汝是王法罪人爭會問事 問古人拈槌豎拂 還當宗乘中事也無 師曰 不當 曰古人意作麽生 師擧拂子 僧曰 宗乘中事如何 師曰 待汝悟始得 問如何是金剛力士 師乃吹之 文桶頭下山 師問 桶頭下山幾時歸 曰三五日 師曰 歸時有無底桶子將一擔歸 文無對歸宗柔代云 和尙用作什麽 師有時垂語曰 諸方老宿盡道接物利生 且問汝 只如盲聾瘂三種病人 汝作麽生接 若拈槌豎拂他眼且不見 共他說話耳又不聞 口復瘂 若接不得佛法盡無靈驗 時有僧出曰 三種病人和尙還許人商量否 師曰 許汝作麽生商量 其僧珍重出 師曰 不是不是法眼云 我當時見羅漢和尙擧此僧語 我便會三種病人 雲居錫云 只如此僧會不會 若道會玄沙又道不是 若道不會 法眼爲什麽道 我因此僧語便會三種病人 上座無事上來商量大家要知 羅漢云 桂琛見有眼耳和尙作麽生接 中塔云 三種病人卽今在什麽處 又一僧云 非唯謾他兼亦自謾

金剛力士; 與金剛神 執金剛 金剛夜叉 密跡金剛等皆同 執金剛杵護持佛法之天神 立於寺門兩脅之二王是也 大寶積經密跡金剛力士品記其宿世之事歷發願

桶頭; 禪林掌管桶類之寺僧

 

묻되 사위의(四威儀) 안에서 어떻게 봉왕(奉王)합니까. 사왈(師曰) 너는 이 왕법(王法)의 죄인이거늘 어떻게 문사(問事)할 줄 알겠는가(). 묻되 고인이 염추수불(拈槌豎拂)함은 도리어 종승(宗乘) 중의 일에 당합니까 또는 아닙니까. 사왈 당하지 않는다. 가로되 고인의 뜻이 무엇입니까. 스님이 불자를 들었다. 승왈(僧曰) 종승 중의 일이 어떻습니까. 사왈 너의 깨달음을 기다려야 비로소 옳다. 묻되 무엇이 이 금강역사(金剛力士)입니까. 스님이 이에 불었다(吹之). 문통두(桶頭)가 하산하자 사문(師問) 통두(桶頭)가 하산하면 어느 때 돌아오는가. 가로되 3, 5일입니다. 사왈 돌아올 때 바닥이 없는 통자(桶子; 는 조사)가 있거든 한 짐() 가지고 돌아오너라. ()이 대답이 없었다歸宗柔代云 화상이 써서 무엇하시려고요. 스님이 어떤 때 수어(垂語)하여 가로되 제방의 노숙(老宿)이 모두 접물이생(接物利生)을 말하거니와 다만() 너희에게 묻노니 지여(只如) 맹롱아(盲聾瘂) 3() 병인(病人)을 너희가 어떻게 접인(接引)하겠는가. 만약 염추수불(拈槌豎拂)한다면 그는 눈으로 또 보지 못하고 그와 함께 설화(說話)하면 귀가 또 듣지 못하고 입은 다시 벙어리(). 만약 접인함을 얻지 못한다면 불법이 모두 영험(靈驗)이 없다. 때에 어떤 중이 나와 가로되 3종 병인()을 화상이 도리어 사람에게 상량(商量)함을 허락하시겠습니까. 사왈 허락한다, 네가 어떻게 상량하겠는가. 그 중이 진중(珍重)이라 하고 나갔다. 사왈 옳지 않다(不是), 옳지 않다法眼이 이르되 내가 당시에 羅漢(桂琛) 화상이 此僧의 말을 드는 것을 보고 내가 바로 3종 병인을 알았다. 雲居錫이 이르되 只如 此僧은 알았는가, 알지 못했는가. 만약 알았다고 말한다면 현사가 또 말하되 옳지 않다 했고 만약 알지 못했다고 말한다면 法眼이 무엇 때문에 말하되 내가 此僧의 말로 인해 바로 3종 병인을 알았다 했는가. 上座, 無事하거든 올라와서 商量하라, 大家(대중)가 알고자 한다. 라한(羅漢)이 이르되 계침(桂琛)은 현재(見在) 안이(眼耳)가 있습니다, 화상이 어떻게 접인하겠습니까. 중탑(中塔)이 이르되 3종 병인이 즉금 어느 곳에 있느냐. 1()이 이르되 오직 타인만 속임이 아니라 또한 스스로 속음이다.

金剛力士; 금강신ㆍ집금강(執金剛)ㆍ금강야차(金剛夜叉)ㆍ밀적금강(密跡金剛) 등과 모두 같음. 금강저(金剛杵)를 가지고 불법을 호지하는 천신임. 절 문에 세워진 양협(兩脅)2왕이 이것임. 대보적경 밀적금강역사품에 그 숙세의 사력(事歷)과 발원이 기재되었음.

桶頭; 선림에서 통류(桶類)를 장관(掌管)하는 사승(寺僧).

 

長慶稜來 師問 除却藥忌作麽生道 稜曰 憨作麽 師曰 雪峯山橡子恰食來遮裏雀兒放糞 師見僧來禮拜乃曰 禮拜著因我得禮拜汝 一日普請往海坑斫柴 見一虎 僧曰 和尙虎 師曰 是汝虎 歸院後僧問 適來見虎云是汝 未審尊意如何 師曰 娑婆世界有四重障 若人透得 許汝出陰界東禪齊云 上座古人見了道 我身心如大地虛空 如今人還透得麽師問長生然和尙 維摩觀佛前際不來後際不去今則無住 汝作麽生觀 對曰 放皎然過有商量 師曰 放汝過作麽生 長生良久 師曰 敎阿誰委 曰徒勞側耳 師曰 情知汝向山鬼窟裏作活計崇壽稠別長生云 喚什麽作如來僧問師 學人爲什麽道不得 師曰 畐塞汝口爭解道得法眼云 古人恁麽道甚奇特 且問上座口是什麽問凡有言句盡落裷䙡 不落裷䙡請和尙商量 師曰 抝折秤衡來與汝商量 問古人瞬視接人 和尙如何接人 師曰 我不瞬視接人 僧問 是什麽得恁麽難見 師曰 只爲太近法眼云 也無可得近 直下是上座

藥忌; 祖庭事苑二 藥忌 猶語言也

娑婆; <> sahā 正云索訶 翻譯名義集三 索訶 西域記云 索訶世界三千大千國土 爲一佛之化攝也 舊曰娑婆 又曰娑訶 皆訛 楞伽翻能忍 悲華云 何名娑婆 是諸衆生 忍受三毒及諸煩惱 能忍斯惡 故名忍土 如來獨證自誓三昧經云 沙訶漢言忍界 眞諦三藏云 劫初梵王名忍 梵王是世界主 故名忍土 一云雜會世界

前際; 過去 前生 佛敎所稱三際之一

後際; 後世 未來 三際之一

鬼窟裏作活計; 比喩陷於情識俗情妄念等 又作鬼趣裏作活計 鬼家活計等

裷䙡; 套索也 又作圈䙡 圈圚 圈定的範圍 圈套 多指禪家接引施設 或機語作略

 

장경릉(長慶稜; 慧稜)이 오자 사문(師問) 약기(藥忌; 약을 쓸 때의 禁忌)를 제각(除却)하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혜릉(慧稜)이 가로되 어리석어서() 무엇하겠는가. 사왈 설봉산의 상자(橡子; 도토리)를 흡족히 먹고 이 속에 온 참새(雀兒)가 방분(放糞)하는구나. 스님이 중이 와서 예배함을 보고 이에 가로되 예배하라(禮拜著), 나로 인해 너에게 예배함을 얻는다. 어느 날 보청(普請)하여 해갱(海坑)에 가서 섶을 쪼개다가(斫柴) 일호(一虎)를 보았다. 승왈(僧曰; 저본에 師曰로 지었음) 화상, 범입니다. 사왈 이 네가 범이다(是汝虎). 귀원(歸院)한 후 승문(僧問) 적래(適來; 아까) 범을 보고 이르되 이 너라 하셨는데 미심하오니 존의(尊意)가 무엇입니까. 사왈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사중장(四重障)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투득(透得)한다면 너에게 음계(陰界)를 벗어났다고 허락하겠다東禪齊가 이르되 上座, 古人見了하고 말하되 나의 身心大地虛空과 같다. 如今의 사람이 도리어 透得하느냐. 스님이 장생연(長生然; 皎然) 화상에게 묻되 유마(維摩)가 관불(觀佛)하되 전제(前際)가 오지 않고 후제(後際)가 가지 않고 지금도 곧 무주(無住). 너는 어떻게 관()하느냐. 대왈(對曰) 교연(皎然)의 허물을 방면(放免)한다면 상량(商量)이 있습니다. 사왈 너의 허물을 방면한다, 어떠한가. 장생이 양구(良久)했다. 사왈 누구(阿誰)로 하여금 알게() 하겠는가. 가로되 도로(徒勞) 귀를 기울입니다. 사왈 네가 산귀굴(山鬼窟) 속을 향해 활계(活計)를 짓는(向山鬼窟裏作活計) 줄 정지(情知; 豫想. 思料)하겠다崇壽稠長生과 다르게 이르되 무엇을 일러 여래라 합니까중이 스님에게 묻되 학인이 무엇 때문에 말함을 얻지 못합니까. 사왈 너의 입에 복색(畐塞; 가득하다)하거늘 어찌 말함을 얻을 줄 알겠는가法眼이 이르되 古人의 이러한 말은 奇特하다. 且問하나니 上座의 입은 이 무엇인가. 묻되 무릇 언구(言句)가 있으면 모두 권괴(裷䙡; 저본에 捲樻로 지었음)에 떨어집니다. 권괴(裷䙡; 저본에 捲樻로 지었음)에 떨어지지 않고 화상의 상량(商量)을 청합니다. 사왈 칭형(秤衡; 秤竿)을 요절(抝折; 부러뜨리다)하고 온다면 너와 더불어 상량하겠다. 묻되 고인은 시순(瞬視)하며 접인(接人)했습니다. 화상은 어떻게 접인합니까. 사왈 나는 시순(瞬視)하지 않고도 접인한다. 승문 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보기 어려움을 얻습니까. 사왈 다만 너무 가깝기 때문이다法眼이 이르되 또한 가히 得近함이 없나니 直下가 이 上座.

藥忌; 조정사원2. 약기(藥忌) 어언과 같다.

娑婆; <<> sahā. 정음(正音)으로 이르자면 삭하(索訶). 번역명의집3. 삭하(索訶) 서역기에 이르되 삭하세계(索訶世界)의 삼천대천국토(三千大千國土)1()의 화섭(化攝)이 된다. 구역(舊譯)에 가로되 사바(娑婆), 또는 가로되 사하(娑訶)는 다 그르다. 릉가경에선 능인(能忍)으로 번역했음. 비화경(悲華經)에 이르되 무엇을 이름해 사바(娑婆)인가, 이 모든 중생이 3() 및 여러 번뇌를 인수(忍受)하면서 이 악()을 능인(能忍)하는지라 고로 이름이 인토(忍土). 여래독증자서삼매경(如來獨證自誓三昧經)에 이르되 사하(沙訶)는 한언(漢言)으로 인계(忍界). 진제삼장(眞諦三藏)이 이르되 겁초(劫初)의 범왕(梵王)의 이름이 인()이며 범왕이 이 세계의 주()인지라 고로 이름이 인토(忍土). 한편으론 이르되(一云) 잡회세계(雜會世界).

前際; 과거. 전생. 불교에서 일컫는 바 3()의 하나.

後際; 후세. 미래. 3제의 하나.

鬼窟裏作活計; 정식ㆍ속정ㆍ망념 등에 빠짐에 비유. 또 귀취리작활계(鬼趣裏作活計)ㆍ귀가활계(鬼家活計) 등으로 지음.

裷䙡; 투삭(套索; 올가미). 또 권괴(圈䙡)ㆍ권궤(圈圚)로 지음. 권정(圈定; 동그라미를 쳐서 확정하다)의 범위. 권투(圈套; 올가미). 다분히 선가에서 접인하는 시설이나 혹 기어의 작략을 가리킴.

 

師在雪峯時 光侍者謂師曰 師叔若學得禪 某甲打鐵船下海去 師住後問曰 光侍者打得鐵船也未 光無對法眼代云 和尙終不恁麽 法燈代云 請和尙下船 玄覺代云 貧兒思舊債師一日遣僧送書上雪峯和尙 雪峯開緘唯白紙三幅 問僧會麽 曰不會 雪峯曰 不見道 君子千里同風 其僧迴擧似於師 師曰 遮老和尙蹉過也不知東禪齊云 什麽處蹉過 若的蹉過 師豈不會弟子意 若不恁麽會 只如玄沙意作麽生 若會便參取玄沙 師問鏡淸 敎中道 菩薩摩訶薩不見一法爲大過失 且道不見什麽法 鏡淸指露柱云 莫是不見遮箇法麽同安顯別云 也知和尙不造次師曰 浙中淸水白米從汝喫 佛法未會在玄覺云 且道玄沙恁麽道 意在什麽處 不見僧問洞山云 不見一法爲大過失 此意如何 洞山云 不見一法好言語上座 一宿覺云 不見一法卽如來 方得名爲觀自在普賢菩薩 又云 不見一法爲大過失 是一箇是兩箇試斷看

下船; 一從船上到岸上 上岸 二從岸上到船上 登船 此指二

千里同風; 意謂雖隔千里 然禪人之悟心及機鋒運用 仍然一致

 

스님이 설봉(雪峯)에 있을 때 광시자(光侍者)가 스님에게 일러 가로되 사숙(師叔)이 만약 선()을 배워 얻는다면 모갑이 철선을 만들어(打鐵船; 制造) 바다로 내려가겠습니다. 스님이 주후(住後)에 문왈(問曰) 광시자(光侍者)는 철선을 만들었는가(打得) 또는 아닌가. 광이 대답이 없었다法眼代云 화상은 마침내 이러하지 않습니다. 法燈代云 화상의 下船을 청합니다. 玄覺代云 貧兒(貧者)가 묵은 빛을 생각한다. 스님이 어느 날 중을 보내 송서(送書)하여 설봉화상에게 올렸다. 설봉이 개함(開緘)하매 오직 백지(白紙) 3()이었다. 중에게 묻되 아느냐. 가로되 알지 못합니다. 설봉이 가로되 말함을 보지 못했는가, 군자는 천리동풍(千里同風)이다. 그 중이 돌아가 스님에게 들어 보이자 사왈 이 노화상이 차과(蹉過; 錯過니 놓침)한 줄도 알지 못하시는구나東禪齊가 이르되 어느 곳에서 蹉過했는가. 만약 확실히() 蹉過했다면 스승이 어찌 제자의 뜻을 알지 못하겠는가. 만약 이렇게 알지 않는다면 只如 玄沙의 뜻이 무엇인가. 만약 안다면 바로 현사를 參取하라. 스님이 경청(鏡淸)에게 묻되 교중(敎中)에 말하되 보살마하살이 일법(一法)을 보지 못함이 큰 과실(過失)이 된다. 그래 말하라, 무슨 법을 보지 못하느냐. 경청이 노주(露柱)를 가리키며 이르되 이는 저개(遮箇)의 법을 보지 못함이 아닐까同安顯別云 또한 화상이 造次(輕率)하지 않는 줄 안다사왈 절중(浙中; 浙江)의 청수(淸水)와 백미(白米)은 너의 먹는 대로 좇겠지만 불법은 알지 못하여 있다玄覺가 이르되 且道하라, 현사의 이러한 말은 뜻이 어느 곳에 있느냐. 보지 못하느냐, 중이 洞山에게 물어 이르되 一法을 보지 못함이 큰 과실이 된다 한 이 뜻이 무엇입니까. 동산이 이르되 一法을 보지 못함이 好言語, 上座. 一宿覺이 이르되 一法을 보지 않아야 곧 여래며 바야흐로 이름하여 관자재, 보현보살이라 함을 얻는다. 又云 一法을 보지 못함이 큰 과실이 된다. 이는 一箇인가 이는 兩箇인가 시험 삼아 판단해 보아라.

下船; 1. 선상(船上)으로 좇아 안상(岸上)에 이름. 상안(上岸). 2. 안상(岸上)으로 좇아 선상에 이름. 등선(登船). 여기에선 2를 가리킴.

千里同風; 뜻으로 이르면 비록 천 리에 격했더라도 그러나 선인(禪人)의 오심(悟心) 및 기봉의 운용은 잉연(仍然; 여전)히 일치(一致).

 

僧問 承和尙有言 盡十方世界是一顆明珠 學人如何得會 師曰 盡十方世界是一顆明珠 用會作麽 師來日却問其僧 盡十方世界是一顆明珠汝作麽生會 對曰 盡十方世界是一顆明珠 用會作麽 師曰 知汝向山鬼窟裏作活計玄覺云 一般恁麽道 爲什麽却成山鬼窟去問如何是無縫塔 師曰 遮一縫大小玄覺云 叢林中道 恁麽來何處得無縫 還會得著不著韋監軍來謁擧 曹山和尙甚奇怪 師乃問 撫州曹山多少 韋指傍僧云 上座曾到曹山否 曰曾到 韋曰 撫州取曹山多少 曰一百二十里 韋曰 恁麽卽上座不到曹山 韋却起禮拜師 師曰 監軍却須禮此僧 此僧却具慚愧雲居錫云 什麽處是此僧具慚愧 若檢得出 許上座有行脚眼

; 此指距 離

 

승문(僧問) 듣건대() 화상이 말씀이 있기를 온 시방세계가 이 한 알()의 명주(明珠)라 하셨습니다. 학인이 어떻게 득회(得會; 理會를 얻다)해야 합니까. 사왈(師曰) 온 시방세계가 이 한 알의 명주거늘 이회(理會)를 써서 무엇하리오. 스님이 내일 도리어 그 중에게 묻되 온 시방세계가 이 한 알의 명주를, 네가 어떻게 이회하느냐. 대왈(對曰) 온 시방세계가 이 한 알의 명주이거늘 이회를 써서 무엇하겠습니까. 사왈 네가 산귀굴(山鬼窟) 속을 향해 활계(活計)를 짓는 줄 알겠다玄覺이 이르되 一般으로 이렇게 말했거늘 무엇 때문에 도리어 山鬼窟을 이루어 가느냐. 묻되 무엇이 이 무봉탑(無縫塔)입니까. 사왈 이 일봉(一縫)은 대소(大小; )玄覺이 이르되 총림 중에서 말하되 이렇게 왔거늘 어느 곳에서 무봉(無縫)을 얻는가. 도리어 회득하느냐(會得著) 하지 못하느냐(不著). 위감군(韋監軍)이 내알(來謁)하여 들되() 조산화상(曹山和尙)이 심히 기괴(奇怪)합니다. 스님이 이에 묻되 무주(撫州)에서 조산((曹山)까지의 거리(距離; )가 얼마인가(多少). ()가 곁의 중을 가리키며 이르되 상좌는 일찍이 조산에 이르렀습니까. 가로되 일찍이 이르렀습니다. 위왈(韋曰) 무주에서 조산까지의 거리(距離; )가 얼마입니까(多少). 가로되 12십 리입니다. 위왈(韋曰) 이러하다면 곧 상좌는 조산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가 도리어 일어나 스님에게 예배했다. 사왈 감군(監軍)은 도리어 차승(此僧)에게 예배함을 써야() 하나니 차승이 도리어 참괴(慚愧)를 갖추었다雲居錫이 이르되 어느 곳에서 이 此僧慚愧를 갖췄는가. 만약 點檢하여 냄을 얻는다면 상좌가 行脚眼이 있음을 허락하겠다.

; 여기에선 거(), ()를 가리킴.

 

西天有聲明三藏到 閩帥令與師相見 師以火筯敲銅鑪問 是什麽聲 三藏對曰 銅鐵聲法眼別云 請大師爲大王 法燈別云 聽和尙問師曰 大王莫受外國人謾 三藏無對法眼代云 大師久受大王供養 法燈代云 却是和尙謾大王師南遊莆田縣 排百戲迎接 來日師問小塘長老 昨日許多喧鬧向什麽處去也 小塘提起衲衣角 師曰 料掉勿交涉法眼別云 昨日有多少喧鬧 法燈別云 今日更好笑師問僧 乾闥婆城汝作麽生會 僧曰 如夢如幻法眼別敲物示之師與地藏琛在方丈內說話夜深 侍者閉却門 師曰 門總閉了 汝作麽生得出去 琛曰 喚什麽作門法燈別云 和尙莫欲歇去師一日以杖拄地問長生曰 僧見俗見男見女見 汝作麽生見 長生曰 和尙還見皎然見處麽 師曰 相識滿天下

聲明; 梵語攝拖苾馱 印度五明之一 謂文字音韻及語法之學 [翻譯名義集五]

莆田縣; 又作蒲田縣 現爲莆田市荔城區 秀嶼區 城廂區和涵江區 原莆田縣位於福建省東部沿海 [百度百科]

料掉; 又作料調 料度計校之義 或遼迢的轉訛 疏遠之義

乾闥婆城; 又作揵闥婆城 健達縛城 略作乾達城 乾城 此翻爲尋香城 蜃氣樓 樂人名爲乾闥婆 彼樂人能幻作樓閣以使人觀 故名之爲乾闥婆城 而現於空中之蜃氣樓類是 故亦稱爲乾闥婆城 以譬物之幻有實無也 [祖庭事苑三 智度論六 二十唯識述記上 止觀輔行一之三 慧苑音義下]

 

서천(西天)에 성명삼장(聲明三藏)이 있어 이르자 민수(閩帥)가 스님과 상견하게 했다. 스님이 화저(火筯)로써 동로(銅鑪)를 두드리고 묻되 이 무슨 소리인가. 삼장이 대왈(對曰) 동철성(銅鐵聲)입니다法眼別云 청컨대 大師大王을 위하십시오. 法燈別云 화상의 물음을 듣겠습니다. 사왈(師曰) 대왕은 외국인의 속임을 받지 마십시오. 삼장이 대답이 없었다法眼代云 大師는 대왕의 공양을 오래 받으셨습니다. 法燈代云 도리어 이 화상이 대왕을 속입니다. 스님이 보전현(莆田縣)으로 남유(南遊)했는데 백희(百戲)를 배열(排列)하여 영접했다. 다음날(來日) 스님이 소당장로(小塘長老)에게 묻되 어제의 허다한 훤뇨(喧鬧)가 어느 곳으로 향해 갔습니까. 소당이 납의의 모서리를 제기했다. 스님이 가로되 요도(料掉)라 교섭이 없습니다法眼別云 어제 多少喧鬧가 있었습니다. 法燈別云 금일 다시 좋은 웃음거리입니다(好笑). 스님이 중에게 묻되 건달바성(乾闥婆城)을 네가 어떻게 이회(理會)하느냐. 승왈(僧曰) 꿈과 같고 환()과 같습니다法眼이 달리() 敲物하여 보였다. 스님이 지장침(地藏琛; 桂琛)과 방장 안에 있으면서 설화(說話)하다 밤이 깊었다. 시자가 문을 닫아버렸다. 사왈 문이 모두 닫혀버렸다. 네가 어떻게 나감을 얻겠는가. 침왈(琛曰) 무엇을 일러 문이라 합니까法燈別云 화상은 쉬러 가려고 하지 않습니까. 스님이 어느 날 지팡이로써 땅에 버티면서 장생(長生; 皎然)에게 묻되 승견(僧見; 으로 보다)ㆍ속견(俗見)ㆍ남견(男見)ㆍ여견(女見)이다, 너는 어떻게 견()하는가. 장생이 가로되 화상은 도리어 교연(皎然)의 견처(見處)를 봅니까. 사왈 서로 아는 이는 천하에 가득하다(相識滿天下).

聲明; 범어로 섭타필타(攝拖苾馱; śabda-vidyā)니 인도 5()의 하나. 이르자면 문자 음운 및 어법의 학() [번역명의집5].

莆田縣; 또 포전현(蒲田縣)으로 지음. 현재 포전시 여성구ㆍ수서구ㆍ성상구와 함강구가 됨. 원래의 포전현은 복건성 동부 연해(沿海)에 위치했음 [백도백과].

料掉; 또 요조(料調)로 지음. 요탁계교(料度計校; 헤아림)의 뜻. 혹 요초(遼迢)의 전와(轉訛)니 소원(疏遠)의 뜻.

乾闥婆城; 또 건달바성(揵闥婆城)ㆍ건달바성(健達縛城)으로 지으며 줄여서 건달성ㆍ건성으로 지음. 여기에선 번역해 심향성(尋香城)ㆍ신기루(蜃氣樓)라 함. 악인(樂人)을 이름해 건달바니 그 악인은 능히 환()으로 누각을 만들어 사람으로 하여금 보게 하는지라 고로 이름해 건달바성이라 함. 공중에 나타나는 신기루의 종류가 이것이니 고로 또한 일컬어 건달바성이라 함. 물건의 환유(幻有)는 실로 없음에 비유함 [조정사원3. 지도론6. 이십유식술기상. 지관보행13. 혜원음의하].

問承和尙有言 聞性遍周法界 雪峯打鼓遮裏爲什麽不聞 師曰 誰知不聞 問險惡道中以何爲津梁 師曰 以汝眼爲津梁 曰未得者如何 師曰 快救取 師與韋監軍喫果子 韋問 如何是日用而不知 師拈起果子曰喫 韋喫果子了 再問之 師曰 只者是日用而不知 普請般柴 師曰 汝諸人盡承吾力 一僧曰 旣承師力何用普請 師叱之曰 不普請爭得柴歸 師問明眞大師 善財參彌勒 彌勒指歸文殊 文殊指歸佛處 汝道佛指歸什麽處 對曰 不知 師曰 情知汝不知法眼別云 喚什麽作佛大普玄通到禮覲 師謂曰 汝在彼住莫誑惑人家男女 對曰 玄通只是開箇供養門 晩來朝去爭敢作恁麽事 師曰 事難 曰其情是難 師曰 什麽處是難處 曰爲伊不肯承當 師便入方丈拄却門

津梁; 津卽渡口 梁卽橋梁 皆爲渡河所不可缺者

日用而不知; 易繫辭上傳 仁者見之謂之仁 知者見之謂之知 百姓日用而不知 故君子之道鮮矣

晩來朝去; 形容時光流逝

 

묻되 듣건대() 화상이 말씀이 있어 문성(聞性)이 법계(法界)에 편주(遍周)한다 하셨습니다. 설봉(雪峯)에서 타고(打鼓)하매 이 속에서 무엇 때문에 듣지 못합니까. 사왈(師曰) 누가 듣지 못하는 줄 아느냐. 묻되 험악도(險惡道) 가운데에서 무엇으로써 진량(津梁)을 삼습니까. 사왈 너의 눈으로써 진량을 삼는다. 가로되 얻지 못한 자는 어떻습니까. 사왈 쾌()히 구취(救取; 는 조사)하라. 스님이 위감군(韋監軍)과 더불어 과자(果子)를 먹었다. 위문(韋問) 무엇이 이 일용하면서 알지 못함입니까(日用而不知). 스님이 과자를 집어 일으키며 가로되 먹게나(). ()가 과자를 먹고 나서 다시 묻자 사왈 다만 이것()이 이 일용하면서 알지 못함이다. 보청(普請)하여 섶을 운반했다(般柴). 사왈 너희 제인(諸人)이 모두 나의 힘을 승수(承受)했다. 1()이 가로되 이미 스님의 힘을 승수했다면 왜 보청을 씁니까. 스님이 꾸짖으며 가로되 보청하지 않으면 어찌 섶을 얻어 돌아감을 얻겠는가. 스님이 명진대사(明眞大師)에게 묻되 선재(善財)가 미륵을 참()하자 미륵이 문수(文殊)에게 돌아가라고 지시했고 문수는 부처의 처소(佛處)로 돌아가라고 지시했다. 네가 말하라, 부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했는가. 대왈(對曰) 알지 못합니다. 사왈 네가 알지 못하는 줄 정지(情知; 深知. 明知)하겠다法眼別云 무엇을 일러 이라 하는가. 대보현통(大普玄通)이 이르러 예근(禮覲; 예배하며 뵙다)하자 스님이 일러 가로되 네가 거기에 주()하며 인가(人家)의 남녀를 광혹(誑惑)하지 말아라. 대왈(對曰) 현통(玄通)은 다만 이, () 공양문(供養門)을 열고서 저녁이 오고 아침이 가거늘(晩來朝去) 어찌 감히 이러한 일을 짓겠습니까. 사왈 사()가 어렵다. 가로되 그 정()이 이 어렵습니다. 사왈 어느 곳이 이 어려운 곳인가. 가로되 그들()이 승당(承當)을 수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스님이 바로 방장에 들어가 문을 떠받쳤다(拄却).

津梁; ()은 곧 도구(渡口; 나루)며 량()은 곧 교량이니 모두 도하(渡河)에 불가결(不可缺)한 바의 것이 됨.

日用而不知; 역 계사상전(繫辭上傳). 인자(仁者)가 이를 보면 인()이라 이르고 지자(知者)가 이를 보면 지()라고 이르나니 백성이 일용하면서 알지 못하는지라(日用而不知) 고로 군자의 도가 드물다().

晩來朝去; 시광(時光)이 흘러감을 형용.

 

問學人乍入叢林乞師指箇入路 師曰 還聞偃溪水聲否 曰聞 師曰 是汝入處 泉守王公請師登樓 先語客司曰 待我引大師到樓前 便舁却梯 客司稟旨 公曰 請大師登樓 師視樓復視其人 乃曰 佛法不是此道理法眼云 未舁梯時一日幾度登樓師與泉守在室中說話 有一沙彌揭簾入見 却退步而出 師曰 那沙彌好與二十拄杖 曰恁麽卽某甲罪過同安顯別云 祖師來也師曰 佛法不恁麽鏡淸云 不爲打水 有僧問 不爲打水意作麽生 鏡淸云 靑山碾爲塵 敢保勿閑人 東禪齊云 只如玄沙意作麽生 或云 直饒恁麽去也好與拄杖 或云 事在當機 或云 拈破會處 此三說還會玄沙意也無應機接物僅三十祀 致靑原石頭之𤀹流 迨今不絕 轉導來際 所演法要有大小錄行於海內 自餘語句各隨門弟子章及諸方徵擧出焉 梁開平二年戊辰十一月二十七日示疾而終 壽七十有四 臘四十有四 閩帥爲之樹塔

客司; 禪林中司掌迎送與應接賓客之職稱 又作典客 典賓 知客

應機接物; 按學人根機之不同 採取相應的接引施設 物 人也

 

묻되 학인이 처음() 총림에 들어왔으니 스님이 저() 입로(入路)를 지시하시기를 구걸합니다. 사왈(師曰) 도리어 언계(偃溪)의 물소리를 듣느냐. 가로되 듣습니다. 사왈 이 너의 입처(入處). 천수(泉守) 왕공(王公)이 스님의 등루(登樓)를 청했다. 먼저 객사(客司)에게 말해 가로되 내가 대사를 인도(引導)하여 누전(樓前)에 이름을 기다렸다가 바로 사다리를 메어버리시오(舁却). 객사(客司)가 의지(意旨; )를 받았다(). 공왈(公曰) 대사의 등루(登樓)를 청합니다. 스님이 누각을 보라보고 다시 그 사람을 보고는 이에 가로되 불법이 이는 이런 도리가 아닙니다法眼이 이르되 사다리를 메지 않았을 때 하루에 몇 차례 登樓하는가. 스님이 천수(泉守)와 더불어 실중(室中)에 있으면서 설화(說話)하는데 한 사미가 있어 발을 걷고(揭簾) 들어와 보고는 도리어 퇴보(退步; 뒤로 물러남)하여 나갔다. 사왈 저() 사미는 좋이 20주장(拄杖) 주어야 한다. 가로되 이러하시다면 곧 모갑의 죄과(罪過)입니다同安顯別云하되 祖師가 오셨습니다. 사왈 불법이 이러하지 않습니다鏡淸이 이르되 打水(取水)하지 않는다. 어떤 중이 묻되 打水하지 않는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鏡淸이 이르되 청산을 갈아() 티끌이 되더라도 감히 보증하노니 閑人이 아니다. 東禪齊가 이르되 只如 玄沙의 뜻이 무엇인가. 或云 直饒(假令) 이렇게 가더라도 좋이 拄杖을 주어야 한다. 或云 事當機에 있다. 或云 會處拈破하라. 三說이 도리어 현사의 뜻을 理會했느냐 또는 아니냐. 스님이 응기접물(應機接物)하기 거의() 30(; )였다. 청원(靑原), 석두(石頭)의 준류(𤀹流; 깊은 흐름)가 여금에 이르도록 끊어지지 않고 전()하여 내제(來際; 未來際)를 인도(引導)함에 이르게 했다(). 연설한 바 법요(法要)는 대소록(大小錄)이 있어 해내(海內; 國內)에 유행(流行)한다. 자여(自餘; 以外. 此外)의 어구(語句)는 각기 문제자장(門弟子章) 및 제방징거(諸方徵擧)를 따라 나온다. () 개평(開平) 2년 무진(戊辰; 908) 1127일 시질(示疾)하고 마쳤다. 나이는 74며 납은 44. 민수(閩帥)가 그를 위해 탑을 세웠다(樹塔).

客司; 선림 중에서 빈객을 영송함과 더불어 응접함을 사장(司掌; 맡아 관장)하는 직칭임. 또 전객(典客)ㆍ전빈ㆍ지객(知客)으로 지음.

應機接物; 학인의 근기의 같지 않음을 살펴서 상응하는 접인 시설을 채취(採取). ()은 사람임.

 

福州長慶慧稜禪師 杭州鹽官人也 姓孫氏 幼歲稟性淳澹 年十三於蘇州通玄寺出家登戒 歷參禪肆 唐乾符五年入閩中 謁西院訪靈雲 尙有凝滯 後之雪峯疑情氷釋 因問 從上諸聖傳受一路請垂指示 雪峯默然 師設禮而退 雪峯莞爾而笑 異日雪峯謂師曰 我尋常向師僧道 南山有一條鼈鼻蛇 汝諸人好看取 對曰 今日堂中大有人喪身失命 雪峯然之 師入方丈參 雪峯曰 是什麽 師曰 今日天晴好普請 自此醻問未嘗爽於玄旨 乃述悟解 頌曰 萬象之中獨露身 唯人自肯乃方親 昔時謬向途中覓 今日看如火裏氷

淳澹; 亦作淳淡 質朴而淡泊

鼈鼻蛇; 蛇名 其鼻如鼈 此蛇最毒 傷人無藥可醫矣 比喩爲本來眞面目 或指雪峰自身 又喩指險惡疾速之機鋒

醻問; 酬問 諮詢討論

 

복주(福州) 장경혜릉(長慶慧稜) 선사. 항주(杭州) 염관(鹽官) 사람이며 성이 손씨(孫氏)니 유세(幼歲)에 품성(稟性)이 순담(淳澹)했다. 나이 13에 소주(蘇州) 통현사(通玄寺)에서 출가하여 등계(登戒)했고 선사(禪肆; 禪院)를 역참(歷參)했다. () 건부(乾符) 5(878) 민중(閩中)에 들어가 서원(西院)을 참알(參謁; )하고 영운(靈雲)을 참방(參訪; )했으나 오히려 응체(凝滯)가 있었다. 후에 설봉(雪峯)으로 가서() 의정(疑情)이 얼음이 풀리듯했다(氷釋). 인하여 묻되 종상(從上)의 제성(諸聖)이 일로(一路)를 전수(傳受)했으니 지시를 내리시길() 청합니다. 설봉이 묵연했다. 스님이 예배를 베풀고 물러나자 설봉이 완이(莞爾; 미소하는 모양)히 웃었다. 다른 날(異日) 설봉이 스님에게 일러 가로되 내가 심상(尋常)에 사승(師僧)을 향해 말하되 남산(南山)에 한 가닥(一條) 별비사(鼈鼻蛇)가 있으니 너희 제인(諸人)이 잘 간취(看取)하라. 대왈(對曰) 금일 당중(堂中)에 대유인(大有人)이 상신실명(喪身失命)할 것입니다. 설봉이 그렇다 하였다. 스님이 방장에 들어가 참()하자 설봉이 가로되 이 뭣고. 사왈 금일 하늘이 맑으니(天晴) 보청하기에 좋습니다(好普請). 이로부터 수문(醻問)하면서 일찍이 현지(玄旨)에 어긋나지() 않았다. 이에 오해(悟解)를 서술했으니 송왈(頌曰) 만상(萬象) 가운데 독로(獨露)한 몸이여/ 오직 사람이 스스로 수긍해야 이에 비로소 친()하다/ 석시(昔時)에 잘못() 도중(途中)을 향해 찾다가/ 금일 보매 불 속의 얼음과 같더라.

淳澹; 또한 순담(淳淡)으로 지음. 질박(質朴)하면서 담박(淡泊).

鼈鼻蛇; 뱀 이름. 그 코가 자라와 같으며 이 뱀은 가장 독하므로 사람을 상해하면 가히 치료할 약이 없음. 비유로 본래의 진면목으로 삼음. 혹은 설봉(雪峰) 자신을 가리킴. 또 비유로 험악하고 질속(疾速)한 기봉을 가리킴.

醻問; 수문(酬問)과 같음. 자순(諮詢; 묻다)하고 토론(討論).

 

師在西院問詵上座曰 遮裏有象骨山汝曾到麽 曰不曾到 師曰 爲什不到 曰自有本分事 師曰 作麽生是上座本分事 詵乃提起衲衣角 師曰 爲當只遮箇別更有 曰上座見什麽 師曰 何得龍頭蛇尾 師在宣州保福 後辭歸雪峯 保福問師曰 山頭和尙或問上座信 作麽生秖對 師曰 不避腥羶亦有少許 曰信道什麽 師曰 敎我分付阿誰 曰從展雖有此語 未必有恁麽事 師曰 若然者前程全自闍梨 師與保福遊山 保福問 古人道妙峯山頂 莫卽遮箇便是也無 師曰 是卽是可惜許僧問鼓山 只如稜和尙恁麽道 意作麽生 鼓山云 孫公若無此語 可謂髑髏遍野 白骨連山 師來往雪峯二十九載 至天祐三年 受泉州刺史王延彬請住招慶 初開堂日公朝服趨隅曰 請師說法 師曰 還聞麽 公設拜 師曰 雖然如此慮恐有人不肯 於是敷揚祖意隨機與奪 故容憧憧日資道化 後閩帥請去長樂府之西院 奏額曰長慶 號超覺大師

妙峰山頂; 卽須彌山 按華嚴經入法界品 善財童子於妙峰山頂上 向德雲比丘 請示菩薩行 在禪林中 用妙峰一詞 形容超絶一切言語思惟 情識分別之絶對境界 卽指本分安住之處 稱爲妙峰孤頂 妙峰頂 孤峰頂上

趨隅; 向隅 佛敎指端坐静修

; 僧人衣服 毳 鳥獸的細毛

 

스님이 서원(西院)에 있으면서 선상좌(詵上座)에게 물어 가로되 이 속에 상골산(象骨山)이 있으니 네가 일찍이 이르렀는가. 가로되 일찍이 이르지 않았다. 사왈(師曰) 무엇 때문에(爲什) 이르지 않았는가. 가로되 스스로 본분사(本分事)가 있다. 사왈 무엇이 이 상좌의 본분사인가. ()이 이에 납의(衲衣)의 모서리를 제기(提起; 들어 일으키다)했다. 사왈 마땅히 다만 이것(遮箇)이 되는가, 달리 다시 있는가. 가로되 상좌는 무엇을 보는가. 사왈 왜 용두사미(龍頭蛇尾)를 얻는가. 스님이 선주(宣州) 보복(保福)에 있다가 후에 고별하고 설봉으로 돌아가자 보복(保福; 從展)이 스님에게 물어 가로되 산두화상(山頭和尙)이 혹 상좌의 신(; 信驗. 證據)을 묻는다면 어떻게 지대(秖對)하겠는가. 사왈 성전(腥羶; 비린내와 노린내)을 피하지 않는다면 또한 조금(少許) 있다. 가로되 신()을 무엇이라 말하겠는가. 사왈 나로 하여금 누구(阿誰)에게 분부하게 하겠는가. 가로되 종전(從展)이 비록 이 말이 있지만 반드시 이러한 일(恁麽事)이 있음은 아니다. 사왈 만약 그렇다면 전정(前程)이 전부 사리(闍梨)로 말미암았다(). 스님이 보복(保福)과 더불어 유산(遊山)했다. 보복이 묻되 고인이 묘봉산정(妙峯山頂)을 말했는데 곧 저개(遮箇)가 바로 이것이 아니겠는가 또는 아닌가. 사왈 옳기는 곧 옳지만 가석하다(可惜許)중이 鼓山에게 묻되 只如 稜和尙의 이러한 말은 뜻이 무엇입니까. 고산이 이르되 孫公이 만약 此語가 없었다면 可謂 髑髏가 들에 두루하고 白骨이 산에 잇닿았을 것이다. 스님이 설봉을 내왕(來往)한 지 29()였는데 천우(天祐) 3(906)에 이르러 천주자사(泉州刺史) 왕연빈(王延彬)의 청을 받아 초경(招慶)에 주()했다. 처음 개당일(開堂日)에 공()이 조복(朝服)으로 추우(趨隅)하며 가로되 스님의 설법을 청합니다. 사왈 도리어 듣느냐. ()이 예배를 베풀었다. 사왈 비록 그러하여 이와 같으나 어떤 사람은 불긍(不肯)할까 염려스럽다(慮恐). 이에 조의(祖意)를 부양(敷揚)하고 수기(隨機)하여 여탈(與奪)한지라 고로 취용(; 毳衆으로 의심됨)이 동동(憧憧)하며 날로 도화(道化)를 도왔다(). 후에 민수(閩帥)의 청으로 장락부(長樂府)의 서원(西院)으로 갔고 주청(奏請)해 사액(寺額; )을 가로되 장경(長慶), 호를 초각대사(超覺大師)라 했다.

妙峰山頂; 즉 수미산. 화엄경 입법계품을 안험컨대 선재동자가 묘봉산 정상에서 덕운비구를 향해 보살행을 교시(敎示)함을 청했음. 선림 중에 있어서 묘봉 1()를 사용함은 일체의 언어와 사유, 정식(情識)과 분별을 초절(超絶)한 절대(絶對)의 경계를 형용함. 곧 본분으로 안주할 곳을 가리킴이니 묘봉고정(妙峰孤頂)ㆍ묘봉정ㆍ묘봉정상으로 호칭함.

趨隅; 향우(向隅). 불교에선 단좌(端坐)하여 정수(静修)함을 가리킴.

; 승인의 의복. ()는 새나 짐승의 세모(細毛).

 

上堂良久謂衆曰 還有人相悉麽 若不相悉欺謾兄弟去 只今有什麽事 莫有窒塞也無 復是誰家屋裏事 不肯當荷更待何時 若是利根參學不到遮裏來 還會麽 如今有一般行脚人 耳裏總滿也 假饒收拾得底 還當諸人行脚事麽 時有僧問 行脚事如何學 師曰 但知就人索取 又問 如何是獨脫一路 師曰 何煩更問 又問 名言妙義敎有所詮 不涉三科請師直道 師曰 珍重 師乃謂衆曰 明明歌詠汝尙不會 忽被暗來底事汝作麽生 又僧問 如何是暗來底事 師曰 喫茶去 中塔云 便請和尙相伴 問如何是不隔毫端底事 師曰 當不當 問如何得不疑不惑去 師乃展兩手 僧不進語 師曰 汝更問我與汝道 僧再問之 師露膊而坐 僧禮拜 師曰 汝作麽生會 僧曰 今日風起 師曰 恁麽道未定人見解 汝於古今中有什麽節要齊得長慶 若擧得許汝作話主 其僧但立而已 師却問 汝是什麽處人 曰向北人 師曰 南北三千里外 學妄語作麽 僧無對

三科; 一切諸法分爲五蘊十二處(十二入)十八界三類 稱爲三科

節要; 摘錄的要點

 

상당(上堂)하여 양구(良久)하고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도리어 서로 위실(委悉; )할 사람이 있느냐. 만약 서로 위실하지 못한다면 형제를 기만(欺謾)하여 가겠다. 지금(只今) 무슨 일이 있느냐, 질색(窒塞; 閉塞)이 있지 않느냐 또는 아니냐. 다시 이 뉘집의 옥리사(屋裏事). 당하(當荷; 擔當하여 荷擔)를 불긍(不肯)한다면 다시 어떤 때를 기다리겠는가. 만약 이 이근(利根)의 참학(參學)이라면 이 속(遮裏)에 이르지 않으리라, 도리어 아느냐. 여금에 일반(一般)의 행각인(行脚人)이 있어 귓속에 모두() 가득하거니와 가요(假饒; 가령) 수습(收拾)하여 얻은 이는 도리어 제인의 행각사(行脚事)에 당하느냐. 때에 어떤 중이 묻되 행각사를 어떻게 배웁니까. 사왈(師曰) 단지 타인에게 나아가 색취(索取)할 줄 알아라. 우문(又問) 무엇이 이 독탈(獨脫)의 일로(一路)입니까. 사왈 왜 번거롭게() 다시 묻느냐. 우문(又問) 명언(名言; 名字와 언구)의 묘의(妙義)는 교()에 설명(說明; )한 바가 있습니다. 삼과(三科)에 건너지 않고 스님의 직도(直道; 바로 말하다)를 청합니다. 사왈 진중(珍重)하라. 스님이 이에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명명(明明)한 가영(歌詠)도 너희가 오히려 알지 못하거늘 홀연히 몰래 오는 일(暗來底事)을 입으면 너희가 어떠한가. 또 승문(僧問) 무엇이 이 암래지사(暗來底事)입니까. 사왈 차 먹고 가게(喫茶去). 중탑(中塔)이 이르되 바로 화상의 상반(相伴)을 청합니다. 묻되 무엇이 이 호단(毫端)도 막히지() 않은 일입니까. 사왈 당했지만 당하지 않았다(當不當). 묻되 어찌해야 불의불혹(不疑不惑)함을 얻습니까. 스님이 이에 두 손을 폈다. 중이 진어(進語)하지 못하자 사왈 네가 다시 나에게 묻는다면 너에게 말해 주겠다. 중이 다시 묻자 스님이 팔뚝()을 드러내고 앉았다. 중이 예배했다. 사왈 네가 어떻게 이회(理會)하느냐. 승왈(僧曰) 금일 바람이 일어납니다. 사왈 이러한 말은 사람의 견해를 정하지 못한다. 네가 고금(古今) 중에 무슨 절요(節要)가 있어 장경(長慶)과 가지런함을 얻겠는가. 만약 거득(擧得)한다면 너에게 화주(話主)가 됨을 허락하겠다. 그 중이 단지 섰을 따름이었다. 스님이 도리어 묻되 너는 이 어느 곳 사람이냐. 가로되 향북(向北; 북방) 사람입니다. 사왈 남북 3천 리 밖에서 망어(妄語)를 배워 무엇하겠는가. 중이 대답이 없었다.

三科; 일체제법을 분류하면 5온ㆍ12(12)183()며 일컬어 3과라 함.

節要; 적록(摘錄)한 요점(要點).

 

師上堂良久曰 莫道今夜較些子 便下坐 問如何是合聖之言 師曰 大小長慶被汝一問口似匾擔 僧曰 何故如此 師曰 適來問什麽 師謂衆曰 我若純擧唱宗乘 須閉却法堂門 所以盡法無民 時有僧曰 不怕無民請師盡法 師曰 還委落處麽 問如何是西來意 師曰 香嚴道底一時坐却 師有時示衆曰 總似今夜老胡有望 保福聞之乃曰 總似今夜老胡絕望玄覺云 恁麽道 是相見語 不是相見語 東禪齊云 此二尊宿語一般 各有道理 衆中道總似如此嫌什麽 又道總似今夜堪作什麽 若如此會欠悟在安國瑫和尙新得師號 師去賀 瑫出接 師問曰 師號來耶 曰來也 師曰 是什麽號 曰明眞 師乃展手 瑫曰 什麽處去來 師曰 幾不問過 師問僧 什麽處來 曰鼓山來 師曰 鼓山有不跨石門底句 有人借問 汝作麽生道 曰昨夜報慈宿 師曰 拍脊棒汝又作麽生 曰和尙若行此棒 不虛受人天供養 師曰 幾放過

拍脊; 對著脊背 亦作劈脊

 

스님이 상당하여 양구(良久)하고 가로되 금야(今夜)는 조금 상당하다(較些子) 라고 말하지 말아라, 바로 하좌(下坐)했다. 묻되 무엇이 성인에 합하는 말입니까(合聖之言). 사왈(師曰) 대소(大小) 장경(長慶)이 너의 일문(一問)을 입자 입이 편담과 같다(口似匾擔). 승왈(僧曰) 무슨 연고로 이와 같습니까. 사왈 적래(適來)에 무엇을 물었느냐. 스님이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내가 만약 순전히 종승(宗乘)을 거창(擧唱)한다면 모름지기 법당문(法堂門)을 폐각(閉却)해야 하나니 소이로 진법무민(盡法無民)이라 했다. 때에 어떤 중이 가로되 무민(無民)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스님의 진법(盡法)를 청합니다. 사왈 도리어 낙처(落處)를 아느냐(). 묻되 무엇이 이 서래의(西來意)입니까. 사왈 향엄이 말한 것이니(香嚴道底) 일시에 앉혀버려라(坐却). 스님이 어느 때 시중(示衆)하여 가로되 모두 금야(今夜)와 같다면 노호(老胡)가 유망(有望)하다. 보복(保福)이 이를 듣고 이에 가로되 모두 금야와 같다면 노호가 절망(絕望)이다玄覺이 이르되 이러한 말은 이 상견(相見)하는 말인가, 이 상견하지 않는 말인가. 東禪齊가 이르되 이 二尊宿의 말은 一般인가, 각자 道理가 있는가. 衆中에서 말하되 모두 이와 같다면 무엇을 嫌疑하느냐. 또 말하되 모두 今夜와 같다면 차마 무엇하겠는가. 만약 이와 같이 안다면 깨침이 모자란다. 안국도(安國瑫; 弘瑫) 화상이 새로 사호(師號)를 얻었다. 스님이 가서 경하(慶賀)하는데 홍도(弘瑫; )가 나가서 접대(接對)했다. 스님이 문왈(問曰) 사호(師號)가 왔는가. 가로되 왔다. 사왈 이 무슨 호인가. 가로되 명진(明眞)이다. 스님이 이에 손을 폈다. 홍도가 가로되 어느 곳에 갔다 왔느냐(什麽處去來). 사왈 거의 문과(問過; 는 조사)하지 않을 뻔했다. 스님이 중에게 묻되 어느 곳에서 오느냐. 가로되 고산(鼓山)에서 옵니다. 스님이 가로되 고산이, 석문(石門)을 타고 넘지 않는다는 문구가 있다. 어떤 사람이 물어본다면(借問) 네가 어떻게 말하겠는가. 가로되 어젯밤에 보자(報慈)에서 잤습니다. 사왈 등에다가(拍脊) (; 몽둥이. 주장자)으로 친다면 네가 또 어떻게 하겠는가. 가로되 화상이 만약 이 방()을 행한다면 인천의 공양을 헛되이 받지 않을 것입니다. 사왈 거의 방과(放過)했다.

拍脊; 척배(脊背; )에 대착(對著). 또 벽척(劈脊)으로 지음.

 

問古人有言 相逢不擎出擧意便知有時如何 師曰 知有也未僧將前語問保福 福云 此是誰語 僧云丹霞語 福云 去莫妨我打睡師入僧堂擧起疏頭曰 見卽不見還見麽 衆無對法眼代云 縱受得到別處 亦不敢呈人 師到羅山見新製龕子 師以杖敲之曰 大殺豫備 羅山曰 拙布置 師曰 還肯入也無 羅山曰吽 師上堂大衆集定 師乃拽出一僧曰 大衆禮拜此僧 又曰 此僧有什麽長處 便敎大衆禮拜 衆無對 問如何是文彩未生時事 師曰 汝先擧我後擧 其僧但立而已法眼別云 請和尙擧師曰 汝作麽生擧 僧曰 某甲截舌有分 保福遷化 人問師 保福拋却殼漏子向什麽處去也 師曰 且道保福在那箇殼漏子裏法眼別云 那箇是保福殼漏子閩帥夫人崔氏奉道自稱練師遣使送衣物至 云練師令就大師請取迴信 師曰 傳語練師領取迴信 須臾使却來師前唱喏便迴 師明日入府 練師曰 昨日謝大師迴信 師曰 却請昨日迴信看 練師展兩手 閩帥問師曰 練師適來呈信 還愜大師意否 師曰 猶較些子法眼別云 遮一轉語大王自道取曰未審大師意旨如何 師良久 帥曰 不可思議大師佛法深遠

打睡; 卽睡 打 表示人體發出某種動作

疏頭; 指募化之疏文

 

묻되 고인이 말씀이 있었으니 상봉하여 경출(擎出)하지 않아도 거의(擧意)하면 바로 지유(知有)한다 할 때 어떻습니까. 사왈(師曰) 지유(知有)했느냐 또는 아니냐前語를 가지고 保福에게 묻자 福云 이것은 이 누구의 말이냐. 僧云 丹霞의 말씀입니다. 福云 가거라, 나의 타수(打睡)妨礙하지 말아라. 스님이 승당에 들어가 소두(疏頭)를 거기(擧起)하고 가로되 견()이 곧 불견(不見)이니 도리어 보느냐. 대중이 대답이 없었다法眼代云 비록() 받아서 다른 곳에 得到하더라도 또한 감히 사람에게 보이지() 못합니다. 스님이 나산(羅山)에 이르러 새로 제작(製作)한 감자(龕子; 는 조사)를 보자 스님이 주장자로써 그것을 두드리고 가로되 예비(豫備)가 너무 심하다(大殺). 나산이 가로되 졸렬(拙劣)하게 포치(布置)했다. 사왈 도리어 들어감을 수긍하는가 또는 아닌가. 나산이 가로되 우(). 스님이 상당하자 대중이 모여 입정(入定)했다. 스님이 이에 1()을 끌어내고 가로되 대중은 이 중에게 예배하라. 우왈(又曰) 이 중이 무슨 장처(長處; 나은 곳)가 있어 바로 대중으로 하여금 예배하게 하는가. 대중이 대답이 없었다. 묻되 무엇이 이 문채(文彩)가 생하지 아니한 때의 일입니까. 사왈 네가 먼저 들어라(), 나는 뒤에 들겠다. 그 중이 단지 섰을 따름이었다法眼別云 화상의 듦을 청합니다. 사왈 네가 어떻게 들겠는가. 승왈(僧曰) 모갑이 혀를 자를 분한이 있습니다. 보복(保福)이 천화(遷化)하자 사람이 스님에게 묻되 보복이 각루자(殼漏子; 肉體)를 던져버리고 어느 곳을 향해 갔습니까. 사왈 그래 말하라, 보복이 어느(那箇) 각루자 속에 있느냐法眼別云 那箇가 이 보복의 각루자인가. 민수(閩帥) 부인(夫人) 최씨(崔氏)奉道하며 自稱 練師라 했다가 사자(使者)를 파견(派遣)해 의물(衣物)을 보내어 이르렀다. 이르되 연사(練師)가 대사에게 나아가 회신(迴信)을 청취(請取)하게 했습니다. 사왈 말을 전하여 연사(練師)가 회신(迴信)을 영취(領取)하시라 하라. 수유(須臾)에 사자가 스님 앞에 돌아와(却來) (; )을 창()하고 바로 돌아갔다. 스님이 명일(明日) 입부(入府)하자 연사(練師)가 가로되 어제 대사의 회신(迴信)에 감사(感謝)합니다. 사왈 도리어 어제의 회신을 보기를 청합니다. 연사가 두 손을 폈다. 민수(閩帥)가 스님에게 물어 가로되 연사(練師)가 적래(適來)에 서신(書信)을 보였는데 도리어 대사의 뜻에 맞습니까(). 사왈 오히려 조금은 상당합니다(較些子)法眼別云 一轉語大王이 스스로 말씀해 취하십시오. 가로되 미심하오니 대사의 의지(意旨)가 무엇입니까. 스님이 양구(良久)했다. 수왈(帥曰) 불가사의한 대사의 불법이 심원(深遠)합니다.

打睡; 곧 수()니 타()는 인체가 발출(發出)하는 모종(某種)의 동작을 표시함.

疏頭; 모화(募化)의 소문(疏文)을 가리킴.

 

僧擧 高麗有僧造一觀音像 於明州上船 衆力舁不起 因請入開元寺供養 問師 無刹不現身 爲什麽不肯去高麗 師曰 現身雖普 覩相生偏法眼別云 汝識得觀音未 有人問僧 點什麽燈 曰長明燈 曰什麽時點 曰去年點 曰長明何在 僧無語 師代曰 若不如此爭知公不受人謾法眼別云 利動君子師兩處開法 徒衆一千五百 化行閩越二十七載 後唐長興三年壬辰五月十七日歸寂 壽七十有九 臘六十 王氏建塔

長明燈; 燃於佛像前 晝夜長明不熄之燈 又作續明燈 無盡燈 長命燈 常明燈 按賢愚經三貧女難陀品 貧女難陀因無力供養佛陀及僧衆 而深爲感傷自責 某日乞得一錢 卽買得一燈之油 至祇園精舍供佛 自發誓願而去 翌日 諸燈盡滅 僅難陀之燈依然明亮 目連以欲滅之 竟不得滅 佛遂告知目連 此燈係發大菩提心者所施 聲聞之人無法毁損 甚至加之以四大海水或大風 亦長明不滅 此事或爲長明燈之起源

 

중이 거()했다. 고려(高麗)의 어떤 중이 한 관음상(觀音像)을 건조(建造)해 명주(明州)에서 상선(上船)하는데 대중의 힘으로 마주들어도 일어나지 않았다. 인하여 청해 개원사(開元寺)에 들어가 공양했다. 스님에게 묻되 현신(現身)하지 않는 국토(國土; )가 없다 했는데 무엇 때문에 고려로 감을 긍낙(肯諾)하지 않습니까. 사왈 현신(現身)이 비록 넓지만() ()을 보고 편견(偏見; )을 내었다法眼別云 네가 관음을 識得하느냐, 아니냐 어떤 사람이 중에게 묻되 무슨 등()을 점화(點火)했습니까. 가로되 장명등(長明燈)입니다. 가로되 어느 때 점등(點燈; )했습니까. 가로되 지난해 점등했습니다. 가로되 장명(長明; 늘 밝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중이 말이 없었다. 스님이 대왈(代曰) 만약 이와 같지 않다면 어찌 공()이 타인의 속임을 받지 않는 줄 알겠습니까法眼別云 利君子하게 합니다. 스님이 두 곳에서 개법(開法)했고 도중(徒衆)15백이었고 교화를 민월(閩越)에 행하기 27()였다. 후당(後唐) 장흥(長興) 3년 임진(壬辰; 932) 517일 귀적(歸寂)했다. 나이는 79며 납은 60이며 왕씨가 건탑(建塔)했다.

長明燈; 불상 앞에 켜서 주야로 늘 밝아서 꺼지지 않는 등임. 또 속명등(續明燈)ㆍ무진등ㆍ장명등(長命燈)ㆍ상명등으로 지음. 현우경3 빈녀난타품(貧女難陀品)을 안험컨대 빈녀 난타는 불타와 및 승중에게 공양할 능력이 없음으로 인해 깊이 감상(感傷)하며 자책함이 되었다. 어느 날 1()을 구걸해 얻어서 곧 1()의 기름을 사서 기원정사에 이르러 불타에게 공양하고는 스스로 서원을 발하고 떠났다. 다음날 모든 등은 다 꺼졌는데 겨우 난타의 등은 의연(依然)히 명랑(明亮)했다. 목련이 이를 꺼려고 했으나 마침내 껌을 얻지 못했다. 불타가 드디어 목련에게 고지하되 이 등은 대보리심을 발한 자가 보시한 바인 관계로 성문의 사람은 훼손할 법이 없다. 심지어 사대해수(四大海水)나 혹은 대풍을 가하더라도 또한 늘 밝아서 꺼지지 않는다. 이 사건이 혹 장명등의 기원히 됨인가 함.

 

福州大普山玄通禪師 福州福唐人也 受業於兜率山 師事雪峯經數稔 受心法止于大普焉 僧問 驪龍頷下珠如何取得 師乃拊掌瞬視 問方便以前事如何 師托出其僧 問如何是祖師西來意 師曰 咬骨頭漢出去 問撥塵見佛時如何 師曰 脫枷來商量 問急急相投請師接 師曰 鈍漢

骨頭; 指骨 頭 助詞 骨頭 代指人的身體

 

복주(福州) 대보산(大普山) 현통선사(玄通禪師). 복주(福州) 복당(福唐) 사람이며 도솔산에서 수업(受業)했고 설봉을 사사(師事)하기 몇 해였고 심법(心法)을 받고 대보(大普)에 머물렀다. 승문(僧問) 이룡(驪龍)의 턱 아래 구슬을 어떻게 취득(取得)합니까. 스님이 이에 손뼉을 치고(拊掌) 눈을 깜작이며 보았다. 묻되 방편 이전(以前)의 일은 무엇입니까. 스님이 그 중을 밀쳐내었다(托出). 묻되 무엇이 이 조사서래의입니까. 사왈(師曰) 골두를 무는 자(骨頭), 나거거라. 묻되 티끌을 헤쳐 부처를 볼 때 어떻습니까. 사왈 칼()을 벗고 오면 상량(商量)하겠다. 묻되 급급(急急)히 상투(相投)하오니 스님의 접인(接引; )을 청합니다. 사왈 둔한(鈍漢).

骨頭; ()를 가리킴. ()는 조사. 골두(骨頭)는 사람의 신체를 대체하여 가리킴.

 

杭州龍冊寺順德大師道怤 永嘉人也 姓陳氏 丱歲不食葷茹 親黨彊啖以枯魚隨卽嗢烏沒乙劣嘔吐 遂求出家 于本州開元寺受具 遊方抵閩川謁雪峯 峯問 什麽處人 曰溫州人 雪峯曰 恁麽卽與一宿覺是鄕人也 曰只如一宿覺是什麽處人 雪峯曰 好喫一頓棒且放過 一日師問 只如古德豈不是以心傳心 雪峯曰 兼不立文字語句 曰只如不立文字語句師如何傳 雪峯良久 師禮謝 雪峯曰 更問我一轉豈不好 曰就和尙請一轉問頭 雪峯曰 只恁麽爲別有商量 曰和尙恁麽卽得 雪峯曰 於汝作麽生 曰孤負殺人 雪峯有時謂衆曰 堂堂密密地 師出問曰 是什麽堂堂密密 雪峯起立曰 道什麽 師退步而立 雪峯垂語曰 此事得恁麽尊貴 得恁麽綿密 對曰 道怤自到來數年不聞和尙恁麽示誨 雪峯曰 我向前雖無 如今已有 莫有所妨麽 曰不敢 此是和尙不已而已 雪峯曰 致使我如此 師從此信入而且隨衆 閩中謂之小怤布衲

一轉; 一次 一遍 轉 量詞 相當于回 次 又指一轉語 一轉話

堂堂密密; 意謂大道高顯於於一切處

不已而已; 不得已而爲之

 

항주(杭州) 용책사(龍冊寺) 순덕대사(順德大師) 도부(道怤). 영가(永嘉) 사람이며 성이 진씨(陳氏). 관세(丱歲; 童年)훈여(葷茹; 냄새 나는 모든 채소)를 먹지 않았다. 친당(親黨; 친한 무리)이 강제로 마른 물고기를 먹이면 바로 곧 올()烏沒()乙劣했다(嗢噦嘔吐). 드디어 출가를 구했고 본주(本州) 개원사(開元寺)에서 수구(受具)했다. 유방(遊方)하다 민천(閩川)에 다다라() 설봉(雪峯)을 참알했다. 봉문(峯問) 어느 곳 사람이냐. 가로되 온주(溫州) 사람입니다. 설봉이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 일숙각(一宿覺; 玄覺)과 이 향인(鄕人)이구나. 가로되 지여(只如) 일숙각은 이 어느 곳 사람입니까. 설봉이 가로되 좋이 1돈방(頓棒)을 먹어야 하지만 다만() 방과(放過)한다. 어느 날 스님이 묻되 지여(只如) 고덕(古德)이 어찌 이 이심전심(以心傳心)하지 않았겠습니까. 설봉이 가로되 겸하여 문자의 어구(語句)를 세우지 않았다. 가로되 지여(只如) 문자의 어구를 세우지 않거늘 스님이 어떻게 전합니까. 설봉이 양구(良久)했다. 스님이 예배하며 감사했다(禮謝). 설봉이 가로되 다시 나에게 1(一轉)을 물음이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가로되 화상에게 나아가 1전의 문두(問頭; 는 조사)를 청합니다. 설봉이 가로되 다만 이러한가, 달리 상량(商量)이 있음이 되는가. 가로되 화상이 이러하심이 곧 옳습니다(). 설봉이 가로되 너에게는 어떠한가. 가로되 사람을 너무 저버립니다(孤負殺人). 설봉이 어떤 때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당당밀밀지(堂堂密密; 는 조사). 스님이 나가서 물어 가로되 이 무엇이 당당밀밀합니까. 설봉이 기립(起立)하여 가로되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스님이 퇴보(退步)하여 섰다. 설봉이 수어(垂語)하여 가로되 차사(此事)는 이렇게 존귀(尊貴)함을 얻고 이렇게 면밀(綿密)함을 얻는다. 대답해 가로되 도부(道怤)가 도래(到來)함으로부터 몇 년 동안 화상의 이러한 시회(示誨)를 듣지 못했습니다. 설봉이 가로되 내가 향전(向前; 往前)엔 비록 없었지만 여금엔 이미 있으니 방애(妨礙)되는 바가 있지 않는가. 가로되 불감(不敢)입니다만 이것은 이 화상이 불이이이(不已而已)입니다. 설봉이 가로되 나로 하여금 이와 같음에 이르게 했다(). 스님이 이로 좇아 신입()했고 다만() 수중(隨衆)했다. 민중(閩中)에서 그를 일러 소부포납(小怤布衲)이라 했다.

一轉; 1(). 1(). ()은 양사니 회()ㆍ차()에 상당함. 또 일전어(一轉語)ㆍ일전화(一轉話)를 가리킴.

堂堂密密; 뜻으로 이르자면 대도가 일체처에 높이 드러남.

不已而已; 부득이하여 그것을 함.

 

因普請處雪峯擧潙山見色便見心語 問師 還有過也無 曰古人爲什麽事 雪峯曰 雖然如此要共汝商量 曰恁麽卽不如道怤鋤地去 一日雪峯問師 何處來 曰從外來 雪峯曰 什麽處逢見達磨 曰更什麽處 雪峯曰 未信汝在 曰和尙莫恁麽粘膩好 雪峯肯之 師後遍歷諸方益資權智 因訪曹山寂和尙 問什麽處來 曰昨日離明水 寂曰 什麽時到明水 曰和尙到時到 寂曰 汝道我什麽時到 曰適來猶記得 寂曰 如是如是 師罷參受請止越州鏡淸禪苑 唱雪峯之旨 學者奔湊 副使皮光業者日休之子也 辭學宏贍屢擊難之 退謂人曰 怤師之高論 人莫窺其極也

權智; 又作方便智 通達權巧方便之智慧

皮光業; 字文通 五代吳越詩人 襄陽(今屬湖北)人 出生於蘇州 皮日休之子 十歲能屬文 美容儀 善談論 [百度百科]

 

보청(普請)하던 곳에서 설봉이 위산(潙山)의 견색편견심(見色便見心; 색을 보면 바로 마음을 본다)의 말을 들어 스님에게 묻되 도리어 허물이 있느냐 또는 없느냐 함으로 인해 가로되 고인이 무슨 일을 했습니까. 설봉이 가로되 비록 그러하여 이와 같지만 너와 함께 상량(商量)함을 요한다.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 도부(道怤)가 땅을 김매러(鋤地) 감만 같지 못합니다. 어느 날 설봉이 스님에게 묻되 어느 곳에서 오느냐. 가로되 밖으로부터 옵니다. 설봉이 가로되 어느 곳에서 달마를 봉견(逢見)했느냐. 가로되 다시 어느 곳입니까. 설봉이 가로되 너를 믿지 못한다. 가로되 화상은 이렇게 때를 붙이지(粘膩) 마셔야 좋습니다. 설봉이 수긍했다. 스님이 후에 제방을 편력(遍歷)하며 권지(權智)를 더욱 도왔다(益資). 조산적(曹山寂; 本寂) 화상을 참방함으로 인해 묻되 어느 곳에서 오느냐. 가로되 어제 명수(明水)를 떠났습니다. 적왈(寂曰) 어느 때 명수에 이르렀는가. 가로되 화상이 이를 때 이르렀습니다. 적왈(寂曰) 네가 말하라, 내가 어느 때 이르렀는가. 가로되 적래(適來)에 오히려 기득(記得)했습니다. 적왈(寂曰) 이와 같고 이와 같다. 스님이 파참(罷參)하고 수청(受請)하여 월주(越州) 경청선원(鏡淸禪苑)에 머물면서 설봉의 종지(宗旨; )를 창()했는데 학자가 분주(奔湊; 集聚. 會合)했다. 부사(副使; 正使屬官) 피광업(皮光業)이란 자는 일휴(日休)의 아들이며 사학(辭學)이 굉섬(宏贍)했고 자주() 격난(擊難; 批評)했는데 물러나서 사람들에게 일러 가로되 부사(怤師)의 고론(高論)은 사람이 그 극처(極處; )를 엿보지 못한다.

權智; 또 방편지로 지음. 권교(權巧)의 방편을 통달한 지혜.

皮光業; 자가 문통f(文通)이며 오대 오월(吳越)의 시인이니 양양(지금 호북에 속함) 사람이며 소주에서 출생했음. 피일휴의 아들이며 10세에 능히 속문(屬文)했고 용의(容儀)가 아름다웠고 담론을 잘했음 [백도백과].

 

新到僧參 師拈起拂子 僧曰 久嚮鏡淸猶有遮箇在 師曰 今日遇人又不遇人 問如何是靈源一直道 師曰 鏡湖水可殺深 師問僧 什麽處來 曰應天來 師曰 還見鰻黧魚麽 曰不見 師曰 闍梨不見鰻黧 鰻黧不見闍梨 曰總不恁麽 師曰 闍梨只解愼初護末 問學人未達其原請師方便 師曰 是什麽原 僧曰 其原 師曰 若是其原爭受方便 僧禮拜退後侍者問曰 和尙適來莫是成他問否 師曰無 曰莫是不成他問否 師曰無 曰未審畢竟意作麽生 師曰 一點水墨兩處成龍 師在帳中坐 有僧問訊 師撥帳問曰 當斷不斷返招其亂 僧曰 旣是當斷爲什麽不斷 師曰 我若盡法直恐無民 曰不怕無民請師盡法 師曰 維那拽出此僧著 又曰 休休我在南方識伊和尙來

 

신도승(新到僧)이 참()하자 스님이 불자를 집어 일으켰다. 승왈(僧曰) 오래 경청(鏡淸)을 향(; )했더니 오히려 저개(遮箇)가 있습니까. 사왈(師曰) 금일 사람을 만났지만 또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묻되 무엇이 이 영원(靈源)의 일직(一直)의 도입니까. 사왈 경호수(鏡湖水)가 가히 너무 깊구나(可殺深). 스님이 중에게 묻되 어느 곳에서 오느냐. 가로되 응천(應天)에서 옵니다. 사왈 도리어 만리어(鰻黧魚)를 보았느냐. 가로되 보지 못했습니다. 사왈 사리(闍梨)가 만리(鰻黧)를 보지 못했느냐, 만리가 사리를 보지 못했는가. 가로되 모두 이러하지 않습니다. 사왈 사리는 다만 신초호말(愼初護末; 처음을 삼가고 끝을 보호하다)할 줄 안다. 묻되 학인이 그 원(; 根源. 근본)에 도달하지 못했으니 스님의 방편을 청합니다. 사왈 이 무슨 원()이냐. 승왈(僧曰) 그 원()입니다. 사왈 만약 이 그 원()이라면 어찌 방편을 받겠는가. 중이 예배하고 물러간 후 시자가 문왈(問曰) 화상이 적래(適來)에 이는 그의 물음을 성취한 게 아닙니까. 사왈 아니다(). 가로되 이는 그의 물음을 성취하지 못한 게 아닙니까. 사왈 아니다. 가로되 미심하오니 필경 뜻이 무엇입니까. 사왈 일점(一點)의 수묵(水墨)이 두 곳에서 용()을 이루었다. 스님이 장중(帳中)에 있으면서 앉았는데 어떤 중이 문신(問訊)했다. 스님이 휘장(揮帳; )을 헤치며() 물어 가로되 마땅히 잘라야 하는데 자르지 못하면 도리어 그 난을 초래한다(當斷不斷返招其亂). 승왈(僧曰) 이미 이 당단(當斷; 마땅히 자르다)이거늘 무엇 때문에 자르지 못합니까. 사왈 내가 만약 진법(盡法; 법을 다 시행하다)하면 바로() 무민(無民; 백성이 없다)일까 염려한다. 가로되 무민(無民)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스님의 진법(盡法)을 청합니다. 사왈 유나(維那), 이 중을 끌어내어라. 또 가로되 그만두어라(), 그만두어라. 내가 남방에 있으면서 그 화상이 올 줄 알았다.

 

因普請鋤草次 浴頭請師浴 師不顧 如是三請 師擧钁作打勢 浴頭乃走 師召曰 來來 浴頭迴首 師曰 向後遇作家分明擧似 其僧後至保福擧前語 未了 保福以手掩其僧口 僧却迴擧似師 師曰 饒汝恁麽也未作家 師問荷玉什麽處來 曰天台來 師曰 我豈是問汝天台 曰和尙何得龍頭蛇尾 師曰 鏡淸今日失利 師看經 僧問 和尙看什麽經 師曰 我與古人鬪百草 師却問 汝會麽 曰小年也會恁麽來 師曰 如今作麽生 僧擧拳 師曰 我輸汝也 僧到參 師問 闍梨從什麽處來 曰佛國來 師曰 佛以何爲國 曰淸淨莊嚴爲國 師曰 國以何爲佛 曰妙淨眞常爲佛 師曰 闍梨從妙淨來莊嚴來 曰無不答對 師曰 噓噓別處有人 問汝不可作遮箇語話

浴頭; 又稱浴頭行者 隸屬知浴(浴主)之下 而供其差遣喚使 處理浴室事務之職役名稱 [百丈淸規四知浴條 象器箋職位類]

 

보청(普請)하여 풀을 매던 차에 욕두(浴頭)가 스님에게 목욕(沐浴)을 청했으나 스님이 돌아보지 않았다. 이와 같이 세 번 청했다. 스님이 괭이를 들어 때리는 자세를 지었다. 욕두가 이에 달아났다. 스님이 부르며 이르되 오너라, 오너라. 욕두가 머리를 돌렸다. 사왈(師曰) 향후(向後)에 작가를 만나거든 분명히 들어 보여라, 그 중이 후에 보복(保福)에 이르러 전어(前語)를 들었는데 마치지도 아니한 전에 보복이 손으로써 그 중의 입을 가렸다(). 중이 돌아와(却迴) 스님에게 들어 보이자 사왈 가령() 네가 이러하더라도 작가가 아니다. 스님이 하옥(荷玉)에게 묻되 어느 곳에서 오느냐. 가로되 천태에서 옵니다. 사왈 내가 어찌 이, 너에게 천태를 묻겠느냐. 가로되 화상이 어찌하여 용두사미를 얻습니까. 사왈 경청(鏡淸)이 금일 실리(失利)했다. 스님이 간경(看經)했다. 승문(僧問) 화상은 무슨 경을 봅니까. 사왈 나는 고인과 백초(百草)를 다툰다. 스님이 도리어 묻되 네가 아느냐. 가로되 소년(小年)에도 이렇게 올 줄 알았습니다. 사왈 여금엔 어떠한가. 중이 주먹을 들었다. 사왈 내가 너에게 졌다(). 중이 도참(到參)했다. 스님이 묻되 사리(闍梨)는 어느 곳으로 좇아왔느냐. 가로되 불국(佛國)에서 옵니다. 사왈 불()이 무엇으로써 국()을 삼느냐. 가로되 청정과 장엄으로써 국을 삼습니다. 사왈 국()은 무엇으로써 불()을 삼느냐. 가로되 묘정(妙淨)과 진상(眞常)으로써 불을 삼습니다. 사왈 사리는 묘정으로 좇아왔느냐 장엄에서 왔느냐. 가로되 답대(答對)하지 못함이 없습니다. 사왈 허허(噓噓) 별처(別處)에 사람이 있구나. 너에게 물으매 저개(遮箇)의 어화(語話)를 지음은 옳지 못하다.

浴頭; 또 명칭이 욕두행자(浴頭行者)니 지욕(知浴; 浴主)의 아래 예속되어 차견(差遣; 파견)과 환사(喚使; 불러서 시킴)에 이바지하면서 욕실의 사무를 처리하는 직역(職役)의 명칭 [백장청규4 지욕조. 상기전직위류].

 

錢王欲廣府中禪會 命居天龍寺 始見師乃曰 眞道人也 致禮勤厚 由是吳越盛於玄學 其後又創龍冊寺延請居焉 師上堂曰 如今事不得已向汝道 若自驗著實箇親切 到汝分上 因何特地生疎 只爲拋家日久流浪年深 一向緣塵致見如此 所以喚作背覺合塵 亦名捨父逃逝 今勸兄弟 未歇歇去好 未徹徹去好 大丈夫兒得恁麽無氣槪 還惆悵麽 終日茫茫地 何不且覓取箇管帶路好 也無人問我管帶一路 時有僧問 如何是管帶一路 師曰 噓噓要棒卽道 曰恁麽卽學人罪過也 師曰 幾被汝打破蔡州 問無源有路不歸時如何 師曰 遮箇師僧得坐便坐 問如何是心 師曰 是卽二頭 曰不是如何 師曰 又不成是頭 曰是不是總不恁麽時如何 師曰 更多饒過 問十二時中以何爲驗 師曰 得力卽向我道 僧曰諾 師曰 十萬八千猶可近 問如何是方便門速易成就 師曰 速易成就 曰爭奈學人領覽未的 師曰代得也代却

特地; 一反而 表轉折 二更加 特別 三特意做作 多餘累贅 此指一

打破蔡州; 舊說唐吳元濟 據蔡州城 押取幷汾二州 不隨天下 而不通信 此城高聳空 人難到故不能攻破 時天大雪 與城齊 此時李愬破之 資治通鑑二百四十 唐憲宗元和十二年(817)條曰 冬十月 李愬夜襲蔡州 擒吳元濟 檻送京師 碧巖錄第七十五則種電鈔 打破蔡州 方語死不弔 又命如懸絲

領覽; 領會 領受

 

전왕(錢王)이 부중(府中)의 선회(禪會)를 넓히고자 하여 천룡사(天龍寺)에 거주하라고 명()했는데 처음() 스님을 보고 이에 가로되 참다운 도인이다. 치례(致禮; 를 치르다)가 근후(勤厚; 殷勤하고 敦厚)했다. 이로 말미암아 오월(吳越)에 현학(玄學)이 왕성(旺盛)했다. 그 후에 또 용책사(龍冊寺)를 창건하여 맞이해 거주하기를 청했다. 스님이 상당해 가로되 여금에 사정이 부득이(不得已)하여 너희를 향해 말하나니 만약 스스로 착실(著實; 確實)히 친절(親切)함을 시험하려면 너희의 분상(分上)에 이르러 무엇 때문에 특지(特地) 생소(生疎)한가 하면 다만 포가(拋家)한 날이 오래되고 유랑(流浪)한 해가 깊기 때문이며 한결같은(一向) 연진(緣塵)으로 견해를 이룸(致見)이 이와 같은지라 소이로 배각합진(背覺合塵)이라 불러 지으며 또한 이름이 사부도서(捨父逃逝). 이제 형제(兄弟)에게 권하노니 쉬지() 못했거든 쉬어야 좋고(歇去好; 는 조사) 사무치지() 못했거든 사무쳐야 좋다(徹去好). 대장부아(大丈夫兒)가 이렇게 기개(氣槪)가 없음을 얻으니 도리어 추창(惆悵)하느냐. 종일(終日) 망망지(茫茫地; 는 조사)하면서 왜 다만() () 관대로(管帶路)의 좋음()을 멱취(覓取)하지 않느냐. 또한 나에게 관대일로(管帶一路)를 묻는 사람이 없구나. 때에 어떤 중이 묻되 무엇이 이 관대일로(管帶一路)입니까. 사왈 허허(噓噓), ()을 요한다면 곧 말하겠다. 가로되 이러하시다면 곧 학인의 죄과(罪過)입니다. 사왈 거의 네가 채주를 타파함(打破蔡州)을 입을 뻔했다. 묻되 근원이 없고 길이 있으나 돌아가지 않을 때 어떻습니까. 사왈 저개(遮箇)의 사승(師僧)은 득좌하여 바로 앉았다(得坐便坐). 묻되 무엇이 이 마음입니까. 사왈 이는 곧 이두(二頭). 가로되 이것이 아니면 무엇입니까(不是如何). 사왈 또 이 두()를 이루지 못했다. 가로되 이것이나 이것이 아니거나 모두() 이러하지 않을 때 어떻습니까. 사왈 다시 많고 넉넉하다(多饒過; 는 조사). 묻되 12시 중에 무엇으로써 시험합니까. 사왈 득력(得力)하면 곧 나를 향해 말하라. 승왈 낙(; ). 사왈 십만팔천(十萬八千; 십만팔천 리)은 오히려 가히 가깝다. 묻되 무엇이 이 방편문(方便門)을 속히 쉽게 성취함입니까. 사왈 속히 쉽게 성취했다. 가로되 학인이 영람(領覽)함이 명백(明白; )하지 못함을 어찌하겠습니까. 사왈 대득(代得)하고 또한 대각(代却)하라.

特地; 1. 반이(反而; 도리어). 전절(轉折)을 표시함. 2. 갱가(更加; 다시 더함). 특별. 3. 특의(特意)로 주작(做作)함이니 많이 남아 누췌(累贅; 군더더기). 여기에선 1을 가리킴.

打破蔡州; 구설(舊說)에 당나라의 오원제(吳元濟)가 채주성(蔡州城)을 근거지로 병분(幷汾) 2()를 압취해 천하를 따르지 않아 통신이 되지 않았음. 이 성은 허공에 높이 솟아 사람이 이르기 어려운 고로 능히 공격해 깨뜨리지 못했음. 때에 하늘이 대설(大雪)인지라 성과 제등하자 이때 이소(李愬)가 이를 타파했음. 자치통감240. 당 헌종 원화 12(817) ()에 가로되 동() 10월 이소(李愬)가 채주(蔡州)를 야습하여 오원제(吳元濟)를 사로잡아 경사로 함송(檻送)했다. 벽암록 제75칙 종전초. 타파채주(打破蔡州) 방어(方語) 사망에 조문하지 않음임. 또 명이 실에 매달린 것과 같음임.

領覽; 영회(領會; 깨달음). 영수(領受).

 

問如何是玄中玄 師曰 不是是什麽 曰還得當也無 師曰 木頭也解語 問如何是人無心合道 師曰 何不問道無心合人 曰如何是道無心合人 師曰 白雲乍可來靑嶂 明月那敎下碧天 問學人問不到處請師不答 和尙答不到處學人卽不問 師乃搊住曰 是我道理是汝道理 曰和尙若打學人 學人也卽却打也 師曰 得對相耕去 僧擧 有僧辭歸宗 宗問 什麽處去 曰百丈學五味禪去 歸宗不語 師乃曰 緣歸宗單行底事 僧問 如何是歸宗單行底事 師曰 棒了趁出院 僧禮拜 師曰 作麽生會 曰學人罪過 師曰 料汝恁麽去 問承師有言 諸方若不是走作便是籠罩人 未審和尙如何 師曰 被汝致此一問 直得當門齒落 問如何是親的密密底事 師曰 常用及人 曰不知者如何 師曰 好晴好雨

五味禪; 五味交雜之禪 一味禪之對稱 圭峰宗密於禪源諸詮集都序上之一中 分別一切禪爲五種 一外道禪 二凡夫禪 三小乘禪 四大乘禪 五最上乘禪 又稱如來淸淨禪 見上十三圭峰宗密章

當門齒; 又作版齒 板齒 謂前齒也

 

묻되 무엇이 이 현중현(玄中玄)입니까. 사왈(師曰) 이것이 아니면 이 무엇인가(不是是什麽). 가로되 도리어 당()함을 얻습니까 또는 아닙니까. 사왈 목두(木頭; 는 조사)도 말할 줄 안다. 묻되 무엇이 이 사람이 무심해야 도에 합함입니까(人無心合道). 사왈 왜 도가 무심해야 사람에 합함(道無心合人)을 묻지 않느냐. 가로되 무엇이 이 도가 무심해야 사람에 합함입니까. 사왈 백운은 차라리 청장(靑嶂)에 오라 함은 옳지만 명월을 어찌 벽천(碧天)에서 내려오게 하겠는가. 묻되 학인이 부도처(不到處)를 묻겠으니 스님의 부답(不答)을 청하고 화상이 부도처(不到處)에 답하면 학인이 곧 불문(不問)하겠습니다. 스님이 이에 붙잡아 머물게(搊住) 하고 가로되 이 나의 도리(道理)인가, 이 너의 도리인가. 가로되 화상이 만약 학인을 때리신다면 학인도 곧 도리어 때리겠습니다. 사왈 상대(相對; )를 얻어야 서로 경작(耕作; )하여 간다. 중이 거()했다. 어떤 중이 귀종(歸宗)에게 고별하자 종문(宗問) 어느 곳으로 가느냐. 가로되 백장(百丈)으로 오미선(五味禪)을 배우러 갑니다. 귀종이 말하지 않았다. 스님이 이에 가로되 귀종이 단행(單行)한 일이기 때문이다(). 승문(僧問) 무엇이 이 귀종이 단행한 일입니까. 사왈 몽둥이질 하고 나서(棒了) 사원에서 쫓아내었다. 중이 예배했다. 사왈 어떻게 이회(理會)하느냐. 가로되 학인의 죄과(罪過)입니다. 사왈 사료(思料; )컨대 네가 이렇게 가리라. 묻되 듣건대() 스님이 말씀이 있어 제방에서 만약 이 주작(走作)이 아니면 바로 이 농조(籠罩; 槪括 統攝)하는 사람이라 하셨습니다. 미심하오니 화상은 어떻습니까. 사왈 너의 이 일문(一問)에 이름()을 입자 바로 당문치(當門齒)가 떨어짐을 얻었다. 묻되 무엇이 이 친하고 밀밀(密密)한 일입니까. 사왈 상용(常用)하여 사람에 미친다. 가로되 알지 못하는 자는 어떻습니까. 사왈 갬을 좋아하고 비를 좋아한다(好晴好雨).

五味禪; 5()가 교잡(交雜)하는 선이니 1미선(一味禪)의 대칭. 규봉종밀(圭峰宗密)이 선원제전집도서상지1 중에 일체의 선()을 분별해 5종으로 삼았음. 1. 외도선(外道禪). 2. 범부선(凡夫禪). 3. 소승선(小乘禪). 4. 대승선(大乘禪). 5. 최상승선(最上乘禪) 또 호칭(呼稱)이 여래청정선(如來淸淨禪). 13 규봉종밀장(圭峯宗密章)을 보라.

當門齒; 또 판치(版齒)ㆍ판치(板齒)로 지음. 이르자면 앞니임.

 

師問僧 門外什麽聲 曰雨滴聲 師曰 衆生顚倒迷己逐物法眼別云畫出僧問 如何是同相 師將火筯插向鑪中 僧又問 如何是別相 師又將火筯插向一邊法眼別云 問不當理有僧引童子到曰 此兒子常愛問僧佛法 請和尙驗看 師乃令點茶 童子點茶來 師啜訖 過盞托與童子 童子近前接 師却縮手曰 還道得麽 童子曰 問將來法眼別云 和尙更喫茶否僧問 和尙此兒子見解如何 師曰 也只是一兩生持戒僧 師三處開法語要 隨門人編錄 今但梗槪而已 晉天福二年丁酉八月示滅 壽七十四 黑白哀號制服者甚衆 荼毘於大慈山獲舍利 就龍母山之陽建塔

同相; 六相之一 義不相違名同 謂義雖有種種差別 而同一法界緣起故也 如眼耳等諸根 雖各不同 而共一身 不相違背 故曰同相 [三藏法數十九]

別相; 六相之一 多卽非一爲別 謂理體雖一 而有種種差別之義也 如身體雖一 而眼耳鼻舌諸根 各各不同 故云別相 [三藏法數十九]

點茶; 又作奠茶 點 用開水(沸湯) (用水或酒澆注調制)(用沸水熱水燙浸)

梗槪; 指粗略大概大略的內容 要點

制服; 此指喪服

 

스님이 중에게 묻되 문밖에 무슨 소리인가. 가로되 빗방울 소리입니다. 사왈(師曰) 중생이 전도(顚倒)하여 자기를 미해 사물을 쫓는구나(迷己逐物)法眼別云 그려 내는구나(畫出). 승문(僧問) 무엇이 이 동상(同相)입니까. 스님이 화저(火筯; 저본에 火筋으로 지었음)를 가져다 화로 속을 향해 꽂았다. 중이 또 묻되 무엇이 이 별상(別相)입니까. 스님이 또 화저(火筯; 저본에 火筋으로 지었음)를 가져다 일변(一邊)을 향해 꽂았다法眼別云 물음이 이치에 합당하지 않다. 어떤 중이 동자(童子)를 인솔(引率; )하여 이르러 가로되 이 아자(兒子; 아이)는 늘 불법을 중에게 묻기 좋아합니다. 청컨대 화상이 시험해 보십시오. 스님이 이에 점다(點茶)하게 했다. 동자가 점다하여 오고 스님이 마시고 나서(啜訖) 잔을 건네어() 동자에게 밀쳐 주었다. 동자가 앞으로 다가와 접수(接受; )하자 스님이 도리어 손을 옴츠리며 가로되 도리어 말함을 얻겠는가. 동자가 가로되 물어 가지고 오십시오法眼別云 화상이 다시 喫茶하시겠습니까. 승문(僧問) 화상, 이 아자(兒子)의 견해가 어떻습니까. 사왈 또한 다만 이 한 두 생(一兩生)의 지계승(持戒僧)이다. 스님이 세 곳에서 개법(開法)한 어요(語要)는 수문인(隨門人)이 편록(編錄)했고 여금엔 단지 경개(梗槪)일 따름이다. () 천복(天福) 2년 정유(丁酉; 937) 8월 시멸(示滅)했고 나이는 74. 흑백(黑白; 승속)이 애호(哀號)했고 제복(制服)한 자가 심이 많았다. 대자산(大慈山)에서 다비(荼毘)했고 사리를 획득하여 용모산(龍母山)의 양(; )으로 나아가 건탑(建塔)했다.

同相; 6상의 하나. 뜻이 서로 위배되지 않음을 이름해 동()이다. 이르자면 뜻에 비록 갖가지 차별이 있지만 동일한 법계의 연기(緣起)인 연고다. 예컨대() 눈ㆍ귀 등 제근이 비록 각기 같지 않지만 한가지로 1()이라서 서로 위배되지 않으므로 고로 가로되 동상임 [삼장법수19].

別相; 6상의 하나. ()는 곧 일()이 아님이 별이 되니 이르자면 이체(理體)는 비록 일()이나 갖가지 차별의 뜻이 있음이다. 예컨대() 신체는 비록 일()이나 눈ㆍ귀ㆍ코ㆍ혀의 제근이 각각 같지 못하므로 고로 이르되 별상임 [삼장법수19].

點茶; 또 전다(奠茶)로 지음. ()은 개수(開水; 沸湯)를 써서 충(; 물이나 혹 술을 써 부어서 조제커나)(; 끓는 물이나 뜨거운 물을 써서 따뜻이 적심)함임.

梗槪; 조략(粗略)ㆍ대개(大概)ㆍ대략(大略)의 내용을 가리킴. 요점(要點).

制服; 여기에선 상복(喪服)을 가리킴.

福州長生山皎然禪師 本郡人 入雪峯室密受心印 執侍經十載 因與僧斫樹 雪峯曰 斫到心且住 師曰 斫却著 雪峯曰古人以心傳心 汝爲什麽道斫却 師擲下斧子曰傳 雪峯打一拄杖而去 僧問雪峯 如何是第一句 雪峯良久 僧退擧似於師 師曰 此是第二句 雪峯再令其僧來問 如何是第一句 師曰蒼天蒼天 雪峯普請般柴 問師曰 古人道 誰知席帽下 元是昔愁人 古人意作麽生 師側戴笠子曰 遮箇是什麽人語 雪峯問師 持經者能荷擔如來 作麽生是荷擔如來 師乃捧雪峯向禪床上著 雪峯普請歸 自將一束藤 路逢一僧 放下藤叉手立 其僧近前拈 雪峯卽蹋其僧歸院 後擧示於師曰 我今日蹋那僧得恁麽快 師對曰 和尙却替那僧入涅槃堂法眼住崇壽寺時 有二僧各說道理請師斷 法眼云 汝兩僧一時入涅槃堂 玄覺云 什麽處是替那僧入涅槃堂處 崇壽稠云 此一轉語却還老兄 東禪齊云 只如長生意作麽生

席帽; 古今注上 席帽 本古之圍帽也 男女通服之 以韋之四周 垂絲網之 施以朱翠 丈夫去飾 至煬帝淫侈 欲見女子之容 詔去帽 戴襆頭巾子幗也 以皂羅爲之 丈夫藤席爲之 骨鞔以繒 乃名席帽

 

복주(福州) 장생산(長生山) 교연선사(皎然禪師). 본군(本郡) 사람이며 설봉의 실()에 들어가 심인(心印)을 몰래 받았고 집시(執侍)하기 10()를 경과했다. 중과 더불어 나무를 자름()으로 인해 설봉이 가로되 잘라 심()에 이르거든 다만 머물러라. 사왈(師曰) 잘라버렸습니다(斫却著). 설봉이 가로되 고인이 이심전심(以心傳心)했거늘 네가 무엇 때문에 잘라버렸다고 말하는가. 스님이 도끼(斧子)를 던져 떨어뜨리고 가로되 전()했습니다. 설봉이 1주장(拄杖) 때리고 떠났다. 중이 설봉에게 묻되 무엇이 이 제1(第一句)입니까. 설봉이 양구(良久)했다. 중이 물러나 스님에게 들어 보이자 사왈 이것은 이 제2구다. 설봉이 다시 그 중으로 하여금 와서 묻게 하되 무엇이 이 제1구입니까. 사왈 창천(蒼天), 창천. 설봉이 보청(普請)하여 섶을 운반하는데(般柴) 스님에게 물어 가로되 고인이 말하되 석모(席帽) 아래가 원래 이 지난날의 수인(愁人)인 줄 누가 아느냐. 고인의 뜻이 무엇인가. 스님이 삿갓(笠子)을 비스듬히 이고(側戴) 가로되 이것(遮箇)은 이 어떤 사람의 말입니까. 설봉이 스님에게 묻되 지경자(持經者)는 능히 여래를 하담(荷擔)한다 하니 무엇이 이 여래를 하담함이냐. 스님이 이에 설봉을 받들어() 선상 위를 향해 놓았다(). 설봉이 보청(普請)하고 돌아오며 스스로 한 묶음의 등()을 가졌는데 길에서 1승을 만나자 등을 내려놓고 차수(叉手)하고 섰다. 그 중이 앞으로 다가가 집자() 설봉이 곧 그 중을 밟고는 귀원(歸院)했다. 후에 스님에게 들어 보이고 가로되 내가 금일 그 중(那僧)을 밟아 이렇게 시원함()을 얻었다. 스님이 대답해 가로되 화상은 도리어 그 중을 대체(代替)하여 열반당(涅槃堂)에 들어가야 합니다法眼崇壽寺할 때 二僧이 있어 각기 도리를 설하고 스님의 판단을 청했다. 법안이 이르되 너희 兩僧一時에 열반당에 들어가야 한다. 玄覺이 이르되 어느 곳이 이 那僧을 대체하여 열반당에 들어가야 하는 곳인가. 崇壽稠가 이르되 이 一轉語는 도리어 老兄에게 돌려준다. 東禪齊가 이르되 只如 長生의 뜻이 무엇인가

席帽; 고금주상(古今注上). 석모(席帽) 본래 옛적의 위모(圍帽)니 남녀가 이를 통복(通服; 통용)했다. (; 가죽)의 사주(四周; 四圍)에 사망(絲網)을 내렸고 주취(朱翠)를 베풀었다. 장부(丈夫)는 장식(裝飾)을 제거한다. 양제(煬帝)에 이르러 음치(淫侈)하여 여자의 용모를 보고자 하여 조칙으로 모()를 제거하고 복두건자괵(襆頭巾子幗; 襆頭幞頭와 같음. 은 여자의 머리꾸미개)을 쓰게 하고 검은 비단으로 그것을 만들었다. 장부는 등석(藤席)으로 이를 만들고 비단으로 골격을 씌웠으니 곧 이름이 석모(席帽).

 

師嘗訪一庵主欵話 庵主曰 近有一僧問某甲西來意 遂擧拂子示之 不知還得也無 師曰 爭敢道得與不得 有人問庵主 此事有人保任如虎頭帶角 有人嫌棄則不直一文錢 此事爲什麽毀譽不同 請試揀出看 曰適來出自偶然 爭揀得出 師曰 若恁麽此後不得爲人玄覺云 一等是恁麽事 爲什麽有得有失 上座若無智眼 難辨得失雪峯問師 光境俱亡復是何物 師曰 放皎然過敢有商量 雪峯曰 許汝過作麽生商量 曰皎然亦放和尙過 雪峯深許之 尋受記止于長生山分化焉 僧問 從上宗乘如何擧唱 師曰 不可爲闍梨荒却長生山也 問古人有言 無明卽佛性 煩惱不須除 如何是無明卽佛性 師忿然作色擧拳呵曰 今日打遮師僧去也 僧曰 如何是煩惱不須除 師以手㧝頭曰 遮師僧得恁麽發人業 問路逢達道人不將語默對 未審將什麽對 師曰 上紙墨堪作什麽 閩帥署禪主大師 莫知所終

欵話; 親切交談 懇談

 

스님이 일찍이 한 암주(庵主)를 방문해 관화(欵話)했다. 암주가 가로되 요사이 한 중이 있어 모갑에게 서래의(西來意)를 묻는지라 드리어 불자를 들어 보였습니다. 도리어 얻었는지() 또는 아닌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사왈(師曰) 어찌 감히 득()과 부득(不得)을 말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암주에게 묻되 차사(此事)는 어떤 사람이 보임(保任)하면 호두(虎頭)에 뿔을 띤 것과 같고 어떤 사람이 혐기(嫌棄)하면 곧 1문전(文錢)의 가치도 안된다 하니 차사(此事)는 무엇 때문에 훼예(毀譽)가 부동(不同)합니까. 청컨대 시험 삼아 가려 내어 보십시오. 가로되 적래(適來)에 우연(偶然)으로부터 나왔거늘 어찌 가려 냄을 얻겠는가. 사왈 만약 이러하다면 차후(此後)에 위인(爲人)함을 얻지 못합니다玄覺이 이르되 一等 이 이러한 일이거늘 무엇 때문에 이 있고 이 있는가. 上座가 만약 智眼이 없다면 득실을 분변하기 어렵다. 설봉이 스님에게 묻되 광경(光境)이 모두 없으면 다시 이 무슨 물건인가. 사왈 교연(皎然)의 허물을 방면하신다면 감히 상량(商量)이 있습니다. 설봉이 가로되 너의 허물을 허락한다. 어떻게 상량하겠는가. 가로되 교연도 또한 화상의 허물을 방면합니다. 설봉이 깊이 허가(許可)했다. 이윽고 수기(受記)하고 장생산(長生山)에 머물며 분화(分化)했다. 중이 묻되 종상(從上)의 종승(宗乘)을 어떻게 거창(擧唱)하시겠습니까. 사왈 사리(闍梨)를 위해 장생산을 황각(荒却)함은 옳지 못하다. 묻되 고인이 말씀이 있어 무명이 곧 불성이며 번뇌를 제거함을 쓰지 않는다. 무엇이 이 무명이 곧 불성입니까. 스님이 분연(忿然)히 작색(作色)하고 주먹을 들어 꾸짖으며 가로되 금일 이 사승(師僧)을 때릴 것이다. 승왈(僧曰) 무엇이 이 번뇌를 제거함을 쓰지 않음입니까. 스님이 손으로써 머리를 잡고() 가로되 이 사승(師僧)이 이렇게 인업(人業)을 발()함을 얻었다. 묻되 길에서 달도(達道)한 사람을 만나면 어묵(語默)을 가지고 상대하지 않는다. 미심하오니 무엇을 가지고 상대합니까. 사왈 지묵(紙墨)에 올려 차마 무엇하겠는가. 민수(閩帥)가 선주대사(禪主大師)로 서(; 署號)했다. 마친 바를 알지 못한다.

欵話; 친절하게 교담(交談). 간담(懇談).

 

信州鵝湖智孚禪師 福州人也 始依講肆肄業於長安 因思玄極之理 乃造雪峯師事數年 旣領心訣隨緣而止鵝湖 大張法席 僧問 萬法歸一一歸何所 師曰 非但闍梨一人忙 問虛空講經以何爲宗 師曰 闍梨不是聽衆出去 問五逆之子還受父約也無 師曰 雖有自裁未免傷己 問如何是佛向上人 師曰 情知闍梨不奈何 曰爲什麽不奈何 師曰 未必小兒得見君子 有人報云 徑山和尙遷化也 僧問 徑山遷化向什麽處去 師曰 大有靈利底過於闍梨 問在先一句請師道 師曰 脚跟下探取什麽 曰卽今見問 師曰 看闍梨變身不得 問雪峯拋下拄杖意作麽生 師以香匙拋下地 僧曰 未審此意如何 師曰 不是好種出去 問如何是鵝湖第一句 師曰 道什麽 曰如何卽是 師曰 妨我打睡 問不問不答時如何 師曰 問人焉知 問迷子未歸家時如何 師曰 不在途 曰歸後如何 師曰 正迷 問如何是源頭事 師曰 途中覓什麽 問如何是一句 師曰 會麽 曰恁麽莫便是否 師曰 蒼天蒼天 鏡淸問 如何是卽今底 師曰 何更卽今 淸曰 幾就支荷 師曰 語逆言順

五逆; 又作五逆罪 卽五重罪 指罪大惡極 極逆於理者 有大乘五逆 小乘五逆之分 一小乘五逆(單五逆) 指害母(又作殺母) 害父(又作殺父) 害阿羅漢(又作殺阿羅漢) 惡心出佛身血(又作出佛身血) 破僧(又作破和合僧 鬥亂衆僧)等五者 前二者爲棄恩田 後三者則壞德田 故稱五逆 五重罪 以其行爲將成爲墮無間地獄之因 故亦稱五無間業 略稱五無間或五不救罪 二大乘五逆(複五逆) 據大薩遮尼乾子所說經四擧出五大根本重罪 其一破壞塔寺 燒燬經像 奪取三寶之物 或敎唆他人行此等事 而心生歡喜 其二毁謗聲聞緣覺以及大乘法 其三妨礙出家人修行 或殺害出家人 其四犯小乘五逆罪之一 其五主張所有皆無業報 而行十不善業 或不畏後世果報 而敎唆他人行十惡等 慧沼於金光明最勝王經疏五中 將小乘五逆中之殺父殺母合爲一項 再加上誹謗正法(佛法)一項 而成立三乘通說之五逆

源頭; 水發源之處

 

신주(信州) 아호지부(鵝湖智孚) 선사. 복주(福州) 사람이며 처음 강사(講肆)에 의지해 장안에서 이업(肄業; 업을 익히다)했다. 현극지리(玄極之理)를 사모함으로 인해 이에 설봉으로 나아가 사사(師事)하기 몇 해였고 이미 심결(心訣)을 영수(領受)하고는 수연(隨緣)하여 아호(鵝湖)에 머물면서 법석(法席)을 크게 펼쳤다(). 승문(僧問)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거니와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갑니까. 사왈(師曰) 단지 사리(闍梨) 한 사람만 바쁜 게 아니다. 묻되 허공이 강경(講經)하면 무엇으로써 종()을 삼습니까. 사왈 사리는 이 청중(聽衆)이 아니니 나가거라. 묻되 오역지자(五逆之子)가 도리어 아버지의 제약(制約; )을 받습니까 또는 아닙니까. 사왈 비록 스스로 제재(制裁; )함이 있더라도 자기를 상()함을 면하지 못한다. 묻되 무엇이 이 불향상인(佛向上人)입니까. 사왈 정지(情知; 思料)컨대 사리(闍梨)는 어찌하지 못한다. 가로되 무엇 때문에 어찌하지 못합니까. 사왈 반드시 소아(小兒)가 군자를 득견(得見)함은 아니다. 어떤 사람이 알려() 이르되 경산화상(徑山和尙)이 천화(遷化)했습니다. 승문(僧問) 경산이 천화하여 어느 곳을 향해 갔습니까. 사왈 매우 영리가 있는 이(大有靈利底)가 사리(闍梨)를 초과한다. 묻되 앞에 있는(在先) 1구를 청컨대 스님이 말씀하십시오. 사왈 발꿈치(脚跟) 아래 무엇을 탐취(探取)하느냐. 가로되 즉금 물음을 보입니다(見問). 사왈 사리를 보건대 변신(變身)함을 얻지 못한다. 묻되 설봉이 주장자를 던져 떨어뜨린 뜻이 무엇입니까. 스님이 향시(香匙)를 땅에 던져 떨어뜨렸다. 승왈(僧曰) 미심하오니 이 뜻이 무엇입니까. 사왈 이 좋은 종자(種子; )가 아니구나, 나가거라. 묻되 무엇이 이 아호(鵝湖)의 제1구입니까. 사왈 무엇이라고 말하느냐. 가로되 어찌해야 곧 옳습니까. 사왈 나의 타수(打睡)를 방애(妨礙)하는구나. 묻되 불문부답(不問不答)할 때 어떻습니까. 사왈 타인에게 물으면(問人) 어찌 알겠는가. 묻되 미자(迷子)가 귀가(歸家)하지 않을 때 어떻습니까. 사왈 길에 있지 않다. 가로되 귀후(歸後)엔 어떻습니까. 사왈 바로 미()했다. 묻되 무엇이 이 원두사(源頭)입니까. 사왈 도중(途中)에서 무엇을 찾느냐. 묻되 무엇이 이 1구입니까. 사왈 아느냐. 가로되 이러함이 바로 옳지 않겠습니까. 사왈 창천(蒼天), 창천. 경청(鏡淸)이 묻되 무엇이 이 즉금의 것(卽今底)인가. 사왈 어찌하여 다시(何更) 즉금인가. 청왈(淸曰) 거의 지하(支荷; 機緣領受)로 나아갈 뻔했다. 사왈 어는 거스르고 언은 순하다(語逆言順).

五逆; 또 오역죄(五逆罪)로 지음. 5중죄(重罪)니 죄가 크고 악이 지극하여 이치에 극히 거스르는 것을 가리킴. 대승의 5()과 소승의 5역의 구분이 있음. 1. 소승5(小乘五逆; 單五逆) 해모(害母; 殺母로 지음)ㆍ해부(害父; 殺父로 지음)ㆍ해아라한(害阿羅漢; 殺阿羅漢으로 지음)ㆍ악심으로 불신에 피를 냄(出佛身血로 지음)ㆍ파승(破僧; 破和合僧으로 지음. 중승과 鬥亂) 5자를 가리킴. 앞의 2자는 기은전(棄恩田)이 되고 뒤의 3자는 곧 괴덕전(壞德田)이니 고로 명칭이 5()이며 5중죄임. 그 행위가 장차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질 인()이 되는지라 고로 또한 명칭이 5무간업이며 약칭이 5무간, 5불구죄(不救罪). 2. 대승5(大乘五逆; 複五逆) 대살차니건자소설경4에서 거출(擧出)5() 근본중죄에 의거하면 그 1은 탑사(塔寺)를 파괴하고 경상(經像)을 소훼(燒燬)하고 3()의 물건을 탈취함. 혹은 타인을 교사(敎唆)하여 이런 등의 일을 행하고 마음에 환희를 냄. 2는 성문, 연각 그리고 대승법을 훼방함. 3은 출가인의 수행을 방애(妨礙)하거나 혹 출가인을 살해함. 4는 소승 5역죄의 하나라도 범함. 5는 소유가 모두 업보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10불선업(不善業)을 행하거나 혹 후세의 과보를 두려워하지 않거나 타인을 교사하여 10악 등을 행하게 함. 혜소(慧沼)가 금광명최승왕경소5 중에서 소승 5() 중의 살부살모(殺父殺母)를 가지고 합하여 1()으로 삼고 다시 비방정법(佛法) 1항을 위에 더해 3승 통설(通說)5역을 성립했음.

源頭; 물의 발원(發源)한 곳.

 

漳州報恩院懷岳禪師 泉州人也 少依本州聖壽院受業 罷參雪峯止龍溪玄侶奔湊 僧問 十二時中如何行履 師曰 動卽死 曰不動時如何 師曰 猶是守古冢鬼 問如何是學人出身處 師曰 有什麽物纏縛闍梨 曰爭奈出身不得何 師曰 過在阿誰 問如何是報恩一靈物 師曰 喫如許多酒糟作麽 曰還露脚手也無 師曰 遮裏是什麽處所 僧問 牛頭未見四祖時如何 師曰 萬里一片雲 曰見後如何 師曰廓落地 僧問 如何是佛法大意 師曰 昨夜三更失却火 問黑雲斗暗誰當雨者 師曰 峻處先傾 問宗乘不却如何擧唱 師曰 山不自稱水無間斷 問佛未出世時如何 師曰 汝爭得知 問撥塵見佛時如何 師曰 什麽年中得見來 問師子在窟時如何 師曰 師子是什麽家具 又問 師子出窟時如何 師曰 師子在什麽處 問如何是目前佛 師曰 快禮拜 師臨遷化上堂示衆曰 山僧十二年來擧提宗敎 諸人怪我什麽處 若要聽三經五論 此去開元寺咫尺 言訖告寂

三經五論; 只數多經論之義

 

장주(漳州) 보은원(報恩院) 회악선사(懷岳禪師). 천주(泉州) 사람이며 소년(少年; )에 본주(本州) 성수원(聖壽院)에 의지하며 수업(受業)했고 설봉에서 파참(雪峯)하고 용계(龍溪)에 머물렀는데 현려(玄侶)가 분주(奔湊; 集聚. 會合)했다. 승문(僧問) 12시 중에 어떻게 행리(行履)합니까. 사왈(師曰) 움직이면 곧 죽는다. 가로되 움직이지 않을 때 어떻습니까. 사왈 오히려 이는 고총(古冢; 옛 무덤. 저본에 古冡으로 지었음)을 지키는 귀(). 묻되 무엇이 이 학인이 출신(出身; 省悟)할 곳입니까. 사왈 무슨 물건이 있어 사리(闍梨)를 전박(纏縛; 얽어매다)하는가. 가로되 출신(出身)함을 얻지 못함을 어찌하겠습니까. 사왈 허물이 누구(阿誰)에게 있는가. 묻되 무엇이 이 보은(報恩)의 한 영물(靈物)입니까. 사왈 허다한 것 같은 술지게미(酒糟)를 먹어 무엇하겠는가. 가로되 도리어 각수(脚手)를 드러냅니까 또는 아닙니까. 사왈 저리(遮裏)가 이 어떤 처소(處所)인가. 승문(僧問) 우두(牛頭; 法融)4조를 뵙지 않았을 때 어떻습니까. 사왈 만 리에 한 조각 구름이다. 가로되 뵌 후엔 어떻습니까. 사왈 확락지(廓落地; 空寂한 모양). 승문 무엇이 이 불법의 대의(大意)입니까. 사왈 어젯밤 3()에 불을 잃어버렸다. 묻되 흑운(黑雲)이 갑자기() 어두워지면 누가 비에 당하는 자입니까. 사왈 가파른 곳(峻處)이 먼저 기울어진다. 묻되 종승(宗乘)을 물리치지 않고(不却) 어떻게 거창(擧唱)합니까. 사왈 산이 자칭(自稱)하지 않고 물은 간단(間斷)함이 없다. 묻되 부처가 출세하지 않은 때 어떻습니까. 사왈 네가 어찌 득지(得知)하겠는가. 묻되 티끌을 헤쳐 부처를 볼 때 어떻습니까. 사왈 어느 해 가운데 득견(得見)하여 왔는가. 묻되 사자(師子)가 굴에 있을 때 어떻습니까. 사왈 사자가 이 무슨 가구(家具)인가. 또 묻되 사자가 굴에서 나왔을 때 어떻습니까. 사왈 사자가 어느 곳에 있느냐. 묻되 무엇이 이 목전(目前)의 부처입니까. 사왈 쾌()히 예배하라. 스님이 천화(遷化)에 임해 상당하여 시중해 가로되 산승이 12년 래에 종교(宗敎)를 거제(擧提; 들다)했거니와 제인이 나의 어느 곳을 괴이히 여기는가. 만약 삼경오론(三經五論)을 듣기를 요한다면 여기에서 개원사(開元寺)와의 거리()가 지척(咫尺)이다. 말을 마치자 고적(告寂)했다.

三經五論; 다만 수가 많은 경론의 뜻.

 

杭州西興化度悟眞大師師郁 泉州人也 自得雪峯心印 化緣盛于杭越之間 後居西興鎭之化度院 法席大興 僧問 如何是西來意 師擧拂子 僧曰 學人不會 師曰 喫茶去 問如何是無縫塔 師曰 五尺六尺 問如何是一塵 師曰 九世刹那分 曰如何含得法界 師曰 法界在什麽處 問谿谷各異師何明一 師曰 汝喘作麽 問學人初機 乞和尙指示入路 師曰 汝怪化度什麽處 問如何是隨色摩尼珠 師曰 靑黃赤白 曰如何是不隨色摩尼珠 師曰 靑黃赤白 問如何是西來意 師曰 是東來西來 問牛頭未見四祖時如何 師曰 鳥獸俱迷 曰見後如何 師曰 山深水冷 問維摩與文殊對談何事 師曰 唯有門前鏡湖水 淸風不改舊時波 師自是聲聞于遐邇 錢王欽其道德 奏紫衣師號

九世; 過現未三世 各具三世 合成九世

紫衣; 紫色之袈裟或上衣也 是非佛制之色 唐載初元年(690) 則天武后以紫衣賜重譯大雲經有功之僧法朗等 是爲賜紫衣之嚆矢 [僧史略下 行事鈔資持記下一之一 佛祖統紀四十三]

 

항주(杭州) 서흥(西興) 화도(化度) 오진대사(悟眞大師) 사욱(師郁). 천주(泉州) 사람이며 설봉의 심인(心印)을 얻음으로부터 화연(化緣)이 항월(杭越; 杭州越州) 사이에 왕성했고 후에 서흥진(西興鎭)의 화도원(化度院)게 거주했는데 법석이 대흥(大興)했다. 승문(僧問) 무엇이 이 서래의(西來意)입니까. 스님이 불자를 들었다. 승왈(僧曰) 학인이 알지 못하겠습니다. 사왈(師曰) 차 먹고 가게(喫茶去). 묻되 무엇이 이 무봉탑(無縫塔)입니까. 사왈 5(), 6척이다. 묻되 무엇이 이 일진(一塵)입니까. 사왈 구세(九世)가 찰나에 나뉜다. 가로되 어찌해야 법계를 함득(含得; 포함하다)합니까. 사왈 법계가 어느 곳에 있느냐. 묻되 계곡(谿谷)이 각기 다르거늘 스님은 왜 하나만 밝힙니까. 사왈 네가 헐떡거려() 무엇하려느냐. 묻되 학인은 초기(初機)니 화상이 입로(入路)를 지시하시기를 구걸합니다. 사왈 네가 화도(化度)의 어느 곳을 괴이히 여기느냐. 묻되 무엇이 이 수색(隨色)하는 마니주(摩尼珠)입니까. 사왈 청황적백(靑黃赤白)이다. 가로되 무엇이 이 수색하지 않는 마니주입니까. 사왈 청황적백이다. 묻되 무엇이 이 서래의(西來意)입니까. 사왈 이는 동에서 왔느냐, 서에서 왔느냐. 묻되 우두(牛頭)4조를 뵙지 않았을 때 어떻습니까. 사왈 조수(鳥獸)가 모두() ()했다. 가로되 뵌 후엔 어떻습니까. 사왈 산은 깊고 물은 차다(). 묻되 유마와 문수가 무슨 일을 대담(對談)했습니까. 사왈 오직 문 앞에 경호수(鏡湖水)가 있고 청풍이 구시(舊時)의 파도를 고치지 않는다. 스님이 이로부터 명성이 하이(遐邇; 遠近)에 들렸고 전왕(錢王)이 그의 도덕을 흠모했고 자의(紫衣)와 사호(師號)를 주청(奏請)했다.

九世; 과거ㆍ현재ㆍ미래 3()에 각기 3세를 갖추었으며 합하면 9세를 이룸.

紫衣; 자색의 가사 혹 상의(上衣)니 이는 불타가 제정한 색이 아님. 당 재초 원년(690) 측천무후가 자의(紫衣), 대운경(大雲經)을 중역(重譯)하면서 공이 있는 승려 법랑(法朗) 등에게 주었으며 이것이 사자의(賜紫衣)의 효시(嚆矢)가 됨 [승사략하. 행사초자지기하11. 불조통기43].

 

福州鼓山興聖國師神晏 大梁人也 姓李氏 幼惡葷羶樂聞鍾梵 年十二時有白氣數道騰于所居屋壁 師卽揮毫書其壁曰 白道從茲速改張 休來顯現作妖祥 定祛邪行歸眞見 必得超凡入聖鄕 題罷氣卽隨滅 年甫志學遘疾甚亟 夢神人與藥覺而頓愈 明年又夢梵僧告云 出家時至矣 遂依衛州白鹿山道規禪師披削 嵩嶽受具 謂同學曰 古德云 白四羯磨後全體戒定慧 豈準繩而可拘也 於是杖錫遍叩禪關 而但記語言存乎知解 及造雪嶺朗然符契 一日參雪峯 雪峯知其緣熟 忽起搊住曰 是什麽 師釋然了悟 亦忘其了心 唯擧手搖曳而已 雪峯曰 子作道理耶 師曰 何道理之有 雪峯審其懸解撫而印之 暨雪峯歸寂 閩帥於府城之左二十里 開鼓山創禪宮請揚宗致

妖祥; 亦作祅祥 指顯示災異的凶兆

志學; 指男子十五歲 孔子曰 吾十有五而志於學(論語爲政) 所以後代稱十五歲爲志學之年

白四羯磨; 又作白四 白四法 一白三羯磨 白卽告白之意 羯磨意譯爲業 作法等 白四羯磨 僧中行事務 如授戒之重法 向僧衆先告白其事 曰白 次三問其可否而決其事曰三羯磨 合一度之白與三度之羯磨曰白四羯磨 是最重之作法也 [羯磨疏一上 行事鈔資持記上一之五]

準繩; 原指工匠測定平直的工具 引申爲標準 準則 呂氏春秋分職 巧匠爲宮室 爲圓必以規 爲方必以矩 爲平直必以準繩

 

복주(福州) 고산(鼓山) 흥성국사(興聖國師) 신안(神晏). 대량(大梁) 사람이며 성이 이씨(李氏). 어릴 적에 훈전(葷羶)을 싫어했고 종범(鍾梵; 종소리와 誦經 소리) 듣기를 좋아했다. 나이 12 때 백기(白氣) 몇 줄기(數道)가 있어 소거(所居)의 옥벽(屋壁)에 올랐다(). 스님이 곧 그 벽에 휘호(揮毫)하여 서사(書寫; )해 가로되 백도(白道)가 이로 좇아 속히 개장(改張)하고/ 와서 현현(顯現)하여 요상(妖祥)을 지음을 그쳐라()/ () 사행(邪行)을 떨어 없애고() 진견(眞見)으로 돌아갈지니/ 반드시 초범(超凡)하여 성향(聖鄕)에 듦을 얻으리라. ()를 마치자() ()가 곧 따라서 없어졌다. 나이 겨우() 지학(志學)에 질병을 만나() 매우 심했다(; 저본에 으로 지었음). 꿈에 신인(神人)이 약을 주었는데 깨고나서 문득 나았다. 명년(明年)에 또 꿈에 범성(梵僧)이 고해 이르되 출가할 때가 이르렀다. 드디어 위주(衛州) 백록산(白鹿山) 도규선사(道規禪師)에게 의지해 피삭(披削)했고 숭악(嵩嶽)에서 수구(受具)했다. 동학(同學)에게 일러 가로되 고덕이 이르되 백사갈마(白四羯磨) 후에 전체가 계정혜(戒定慧)다 했거늘 어찌 준승(準繩)으로 가히 구속하겠는가. 이에 석장을 짚고(杖錫) 선관(禪關)을 두루 두드렸는데(遍叩) 단지 어언(語言)을 기억하고 지해(知解)를 두었으나 설령(雪嶺; 雪峯)에 나아감에 이르러 낭연(朗然)히 부계(符契; 符合)했다. 어느 날 설봉을 참()하자 설봉이 그 인연이 익었음을 알고 홀연히 일어나 추주(搊住; 붙잡아 머물게 하다)하고 가로되 이 뭣고. 스님이 석연(釋然; 의심 등이 풀리는 모양)하며 요오(了悟)했고 또한 그 요심(了心)마저 잊었고 오직 거수(擧手)하여 요예(搖曳; 흔들고 끌어당김)할 따름이었다. 설봉이 가로되 자네가 도리(道理)를 짓는가. 사왈(師曰) 무슨 도리가 있겠습니까. 설봉이 그 현해(懸解; 了悟)를 살펴서 어루만지며 인가했다. 설봉이 귀적(歸寂)함에 이르러 민수(閩帥)가 부성(府城)의 왼쪽 20리에 고산(鼓山)을 열고 선궁(禪宮; 禪寺)을 창건해 종치(宗致; 선종의 이치)를 거양(擧揚)하기를 청했다.

妖祥; 또한 요상(祅祥)으로 지음. 재이(災異)를 나타내 보이는 흉조를 가리킴.

志學; 남자 15세를 가리킴. 공자가 가로되 나는 15에 학습에 입지(立志)했다(논어 위정). 소이로 후대에 15세를 일컬어 지학지년(志學之年)이라 했음.

白四羯磨; 또 백사(白四)ㆍ백사법(白四法)ㆍ일백삼갈마(一白三羯磨)로 지음. ()은 곧 고백의 뜻이며 갈마(羯磨)는 의역하면 업()ㆍ작법(作法) 등이 됨. 백사갈마(白四羯磨)는 승중에서 사무를 행하면서 수계와 같은 중법(重法)이면 승중을 향해 먼저 그 일을 고백함을 가로되 백()이며 다음으로 세 번 그 가부를 물어 그 일을 결정함을 가로되 삼갈마(三羯磨)니 한 차례의 백()과 세 차례의 갈마(羯磨)를 합해 가로되 백사갈마(白四羯磨). 이것은 가장 엄중한 작법임 [갈마소1. 행사초자지기상15].

準繩; 원래 공장(工匠)이 평직(平直)을 측정하는 공구를 가리킴. 인신(引申; 轉義)하여 표준, 준칙이 됨. 여씨춘추 분직(分職). 교장(巧匠)이 궁실(宮室)을 만들면서 원()을 위해선 반드시 규(; 그림쇠)를 쓰고 방()을 위해선 반드시 구(; 곡척)를 쓰고 평직(平直)을 위해선 준승(準繩; 수준기와 먹줄)을 쓴다.

師上堂衆集 良久曰 南泉在日亦有人擧要 且不識南泉 卽今還有識南泉者麽 試出來對衆驗看 時有僧出禮拜才起 師曰 作麽生 僧近前曰 咨和尙 師曰 不才請退 又曰 經有經師論有論師律有律師 有函有號有部有帙 各有人傳持 且佛法是建立敎 禪道乃止啼之說 他諸聖興來 蓋爲人心不等 巧開方便遂有多門 受疾不同處方還異 在有破有 居空叱空 二患旣除中道須遣 鼓山所以道 句不當機言非展事 承言者喪滯句者迷 不唱言前寧譚句後 直至釋迦掩室 淨名杜口 大士梁時 童子當日 一問二問三問 盡有人了也 諸仁者作麽生 時有僧禮拜 師曰 高聲問 僧曰 學人咨和尙 師乃喝出 問己事未明以何爲驗 師抗音似未聞 其僧再問 師曰 一點隨流食咸不重

不才; 沒有才能 無才能者

釋迦掩室; 謂如來成道後 三七日間 坐思而不說法也 肇論云 釋迦掩室於摩竭 淨名杜口於毘那 肇論新疏下云 法華說 如來成佛 三七日中 而不說法 智度論七云 佛得道五十七日 不語等 義言掩室也

淨名杜口; 毘耶杜口 祖庭事苑一 毘耶杜口 梵云毘耶離 此言廣嚴 維摩所居之城 杜 閉也 維摩入不二法門品曰 文殊問維摩詰 我等各自說已 仁者當說 何等是菩薩入不二法門 時維摩詰默然無言 文殊歎曰 善哉善哉 乃至無有文字語言 是眞入不二法門

 

스님이 상당하자 대중이 모였다. 양구(良久)하고 가로되 남천(南泉)이 있던 날 또한 거요(擧要; 要點을 들다)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또() 남천을 알지 못했다. 즉금 도리어 남천을 아는 자가 있느냐, 시험 삼아 나와서 대중(對衆)하여 시험해 보아라. 때에 어떤 중이 나와서 예배하고 겨우 일어나자 사왈(師曰) 무엇하는가(作麽生). 중이 앞으로 다가가서 가로되 화상에게 묻습니다(). 사왈 부재(不才)로구나, 물러나기를 청한다. 또 가로되 경에는 경사(經師)가 있고 논에는 논사(論師)가 있고 율에는 율사(律師)가 있으며 유함유호(有函有號)하고 유부유질(有部有帙)하여 각기 전지(傳持)하는 사람이 있다. () 불법은 이 건립하는 교()며 선도(禪道)는 곧 지제지설(止啼之說)이다. 저 제성(諸聖)이 흥래(興來)함은 대개(大蓋) 인심(人心)이 제등(齊等)하지 못하기 때문에 교묘히 방편을 연지라 드디어 다문(多門)이 있다. 수질(受疾; 질병을 받다)이 같지 않으므로 처방(處方)도 도리어 달라서 유()에 있으면 유를 깨뜨리고 공()에 거주하면 공을 꾸짖나니 두 우환(憂患; )이 이미 제거되매 중도(中道)도 보냄을 쓴다(須遣). 고산(鼓山)이 소이로 말하되 구는 기에 당하지 않고(句不當機) 언은 사를 펴지 않나니(言非展事) 승언하는 자는 죽고(承言者喪) 체구하는 자는 미한다(滯句者迷). 언전을 창하지 않거늘(不唱言前) 어찌 구후를 얘기하겠는가(寧譚句後). 바로 석가가 엄실하고(釋迦掩室) 정명이 두구(淨名杜口)함에 이르나니 대사(大士)는 양나라 때(梁時), 동자(童子)는 당일(當日), 일문이문삼문(一問二問三問)하매 모두 깨친 사람이 있었다(盡有人了也). 제인자(諸仁者)는 어떠한가(作麽生). 때에 어떤 중이 예배했다. 사왈 고성(高聲)으로 물어라. 승왈(僧曰) 학인이 화상에게 묻습니다(). 스님이 이에 할하고 쫓아내었다(喝出). 묻되 기사(己事)를 밝히지 못했으니 무엇으로써 시험합니까. 스님이 항음(抗音; 겨루는 음성)으로 듣지 못한 것과 흡사하다 하자 그 중이 다시 물었다. 사왈 일점이 흐름을 따르니(一點隨流) 먹어도 모두 무겁지 않다(食咸不重).

不才; 재능이 있지 않음. 재능이 없는 자.

釋迦掩室; 이르자면 여래가 성도한 후 삼칠일(三七日; 21) 간 좌사(坐思)하며 설법하지 않았음임. 조론에 이르되 석가가 마갈에서 엄실하고(釋迦掩室於摩竭) 정명이 비야에서 두구했다(淨名杜口於毘那). 조론신소하에 이르되 법화경에서 설하기를 여래가 성불한 지 삼칠일 중에 설법하지 않았다. 지도론7에 이르되 불타가 득도한 지 57일 동안 말하지 않았다는 등이 뜻으로 말하자면 엄실(掩室)이다.

淨名杜口; 비야두구(毘耶杜口)와 같음. 조정사원1. 비야두구(毘耶杜口) 범어로 이르되 비야리(毗耶離; vaiśālī)는 여기에선 말하되 광엄(廣嚴)이니 유마(維摩)가 거처하는 바의 성(). ()는 닫음(). 유마경 입불이법문품(入不二法門品)에 가로되 문수가 유마힐(維摩詰; 淨名)에게 묻되 아등(我等)은 각자 설해 마쳤으니 인자(仁者; 상대의 경칭)가 마땅히 설하십시오. 무엇 등이 이 보살의 입불이법문입니까. 때에 유마힐이 묵연하며 말이 없었다. 문수가 감탄하며 가로되 선재 선재로다 내지 문자와 어언이 있지 않음이 이 참다운 입불이법문이다.

 

問如何是包盡乾坤底句 師曰 近前 僧近前 師曰 鈍置殺人 問如何紹得 師曰 犴寒岸二音𤞞音欲無風徒勞展掌 曰如何卽是 師曰錯 問學人便承當時如何 師曰 汝作麽生承當法燈別云 莫費力問如何是學人正立處 師曰 不從諸聖行法燈別云 汝擬亂走問千山萬山 阿那箇是正山 師曰 用正山作麽法燈云 千山萬山師與招慶相遇 招慶曰 家常 師曰 無厭生 招慶曰 且款款 師却云 家常 招慶曰 今日未有火 師曰 太鄙吝生 招慶曰 穩便將取去東禪齊拈云 此二尊宿語 還有得失也無 若有阿那箇得阿那箇失 若無得失 諸人未具行脚眼在問如何免得輪迴生死 師曰 把將生死來 問如何是宗門中事 師側掌曰 吽吽 問如何是向上一關棙子 師乃打之 問如何是鼓山正主 師曰 瞎作麽

鈍置; 意爲折磨 作弄 折騰 祖庭事苑一 鈍置 下當作躓 音致 礙不行也

家常; 一日常 平常 二禪人乞求布施的言語 亦用作動詞 乞討之義 此指二

無厭生; 無滿足 集韻 厭 足也 生 助詞

款款; 形容徐緩從容的樣子 款 緩也

太鄙吝生; 甚吝嗇 生 助詞

穩便; 妥當 便利

 

묻되 무엇이 이 건곤을 포진(包盡)하는 구()입니까. 사왈(師曰) 앞으로 다가오너라. 중이 앞으로 다가가자 사왈 사람을 너무 둔치하게 하는구나(鈍置殺人). 묻되 어떻게 이음을 얻습니까(紹得). 사왈 안(; 들개)寒岸二音(𤞞; 짐승 이름)音欲은 바람이 없거늘 도로(徒勞) 전장(展掌)하는구나. 가로되 어찌해야 곧 옳습니까. 사왈 틀렸다(). 묻되 학인이 바로 승당(承當)할 때 어떻습니까. 사왈 네가 어떻게 승당하느냐法燈別云 힘을 허비하지 말아라. 묻되 무엇이 이 학인이 바로 설 곳입니까(正立處). 사왈 제성(諸聖)의 행()을 좇지 말아라法燈別云 네가 亂走하려 하느냐. 묻되 천산만산(千山萬山)에 어느 것(阿那箇)이 이 정산(正山)입니까. 사왈 정산을 써서 무엇하려느냐法燈이 이르되 千山萬山이다. 스님과 초경(招慶)이 서로 만났다. 초경이 가로되 가상(家常). 사왈 만족함이 없구나(無厭生). 초경이 가로되 다만() 관관(款款)하라. 스님이 도리어 이르되 가상(家常). 초경이 가로되 금일 불()이 있지 않다. 사왈 너무 비린하구나(太鄙吝生). 초경이 가로되 온편하거든 다만 취하거라(穩便將取去)東禪齊拈云 二尊宿의 말에 도리어 득실이 있느냐 또는 없느냐. 만약 있다면 阿那箇가 얻고 阿那箇가 잃었느냐. 만약 득실이 없다면 諸人行脚眼을 갖추지 못했다. 묻되 어찌해야 윤회하는 생사를 면득(免得; 은 조사)합니까. 사왈 생사를 잡아 가지고 오너라. 묻되 무엇이 이 종문 가운데의 일입니까. 스님이 손바닥을 기울이며(側掌) 가로되 우우(吽吽). 묻되 무엇이 이 향상의 한 관려자(關棙子)입니까. 스님이 이에 때렸다. 묻되 무엇이 이 고산(鼓山)의 정주(正主)입니까. 사왈 눈멀어() 무엇하려느냐.

鈍置; 뜻은 절마(折磨; 괴롭히다)ㆍ희롱을 지음ㆍ절등(折騰; 반복하여 지음)이 됨. 조정사원1. 둔치(鈍置) 하는 마땅히 지()로 지어야 함. 음이 치니 막혀서 가지 못함임.

家常; 1. 일상. 평상. 2. 선인(禪人)이 보시를 걸구하는 언어임. 또한 써서 동사로도 쓰니 구걸하며 찾음의 뜻. 여기에선 2를 가리킴.

無厭生; 만족함이 없음. 집운(集韻) () ()이다. ()은 조사.

款款; 느리고 종용(從容)한 양자(樣子; 形狀) 형용함. ()은 느림().

太鄙吝生; 심하게 인색(). ()은 조사.

穩便; 타당(妥當). 편리(便利)

 

師問保福 古人道 非不非是不是 意作麽生 保福拈起茶盞 師曰 莫是非好 問如何是眞實人體 師曰 卽今是什麽體 曰究竟如何 師曰 爭得到恁麽地 問如何是佛法大意 師曰 金烏一點萬里無雲 師問僧 鼓山有不跨石門句 汝作麽生道 僧曰請 師乃打之 問如何是古人省心力處 師曰 汝何費力 問言滿天下無口過 如何是無口過 師曰 有什麽過 問如何是省要處 師曰 還自恥麽 師與閩帥瞻仰佛像 閩帥問 是什麽佛 曰請大王鑒 曰鑒卽不是佛 曰是什麽 無對長慶代云 久承大師在衆何得造次問從上宗乘如何擧唱 師以拂子驀口打 問如何是敎外別傳底事 師曰 喫茶去 又曰 今爲諸仁者刺頭入他諸聖化門裏抖擻不出 所以向仁者道 敎排不到 祖不西來 三世諸佛不能唱 十二分敎載不起 凡聖攝不得 古今傳不得 忽爾箇漢 未通箇消息 向他恁麽道 被他驀口摑 還怪得他麽 雖然如此 也不得亂摑 鼓山尋常道 更有一人不跨石門 須有不跨石門句 作麽生是不跨石門句 鼓山自住三十餘年 五湖四海來者 向高山頂上看山翫水 未見一人快利通得 如今還有人通得也不昧 兄弟珍重 乃有偈示衆曰 直下猶難會 尋言轉更賒 若論佛與祖 特地隔天涯 閩帥禮重常詢法要焉

口過; 言語的過失 孝經卿大夫 言滿天下無口過

省要處; 領悟禪法的關鍵之處

敎外別傳; 不依文字語言 直悟佛陀所悟之境界 卽稱爲敎外別傳 又稱單傳 此敎外別傳之禪法 亦卽菩提達磨所傳之祖師禪

箇漢; 箇 代詞 相當于這那 又相當于什麽

 

스님이 보복(保福)에게 묻되 고인이 말하되 비()가 비()가 아니며 시()가 시()가 아니라 한 뜻이 무엇인가. 보복이 찻잔을 집어 일으켰다. 사왈(師曰) 시비(是非)하지 말아야 좋으리라. 묻되 무엇이 이 진실한 사람의 체()입니까. 사왈 즉금은 이 무슨 체()인가. 가로되 구경(究竟)에 어떻습니까. 사왈 어찌 이러한 경지에 이름을 얻겠는가. 묻되 무엇이 이 불법의 대의(大意)입니까. 사왈 금오(金烏; )는 일점(一點)이며 만 리에 구름이 없다. 스님이 중에게 묻되 고산(鼓山), 석문(石門)을 타고 넘지 않는다(不跨)는 구()가 있다. 네가 어떻게 말하겠는가. 승왈(僧曰) 청합니다. 스님이 이에 때렸다. 묻되 무엇이 이 고인이 심력(心力)을 던() 곳입니까. 사왈 네가 왜 힘을 허비하느냐. 묻되 말이 천하에 가득하면 구과가 없다(言滿天下無口過) 했습니다. 무엇이 이 구과(口過)가 없음입니까. 사왈 무슨 허물()이 있으리오. 묻되 무엇이 이 성요처(省要處)입니까. 사왈 도리어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느냐(). 스님과 민수(閩帥)가 불상(佛像)을 첨앙(瞻仰)했다. 민수가 묻되 이 무슨 불()입니까. 가로되 청컨대 대왕이 감별(鑒別; )하십시오. 가로되 감별하면 곧 이 불이 아닙니다. 가로되 이 무엇입니까. 대답이 없었다長慶代云 大師在衆했다 함을 오래 들었는데(久承) 어찌 造次(輕率)를 얻습니까. 묻되 종상(從上)의 종승(宗乘)을 어떻게 거창(擧唱)합니까. 스님이 불자로써 입에다(驀口) 때렸다. 묻되 무엇이 이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일입니까. 사왈 차 먹고 가게(喫茶去). 또 가로되 여금에 제인자(諸仁者)가 자두(刺頭; 埋頭)하여 저 제성(諸聖)의 화문(化門) 속에 들어가 두수(抖擻; 는 떨칠 두. 는 떨칠 수)하여 나오지 못하기 때문에() 소이로 인자(仁者)를 향해 말하노니 교()로 안배(按排)하여 이르지 못하고 조사가 서래(西來)하지 않았나니 삼세제불이 능히 창()하지 못하고 십이분교가 실어() 일으키지 못한다. 범성(凡聖)이 거둠을 얻지 못하고(攝不得) 고금에 전함을 얻지 못한다. 홀연히(忽爾) 이 개한(箇漢)이 저() 소식(消息)을 통하지 못해 그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가 그가 입에다(驀口) 후려갈김()을 입는다면 도리어 그를 괴이히 여김을 얻겠는가. 비록 그러하여 이와 같으나 또한 난괵(亂摑)함을 얻지 말아야 하리라. 고산(鼓山)이 심상(尋常)에 말하되 다시 한 사람이 있어 석문(石門)을 타고 넘지 않으므로 모름지기 석문을 타고 넘지 않는 구가 있나니 무엇이 이, 석문을 타고 넘지 않는 구인가. 고산(鼓山)이 스스로 주()30여 년에 오호사해(五湖四海)에서 온 자가 고산(高山)의 정상(頂上)을 향해 간산완수(看山翫水)했지만 한 사람도 쾌리(快利; 銳利)하게 통득(通得)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 여금에 도리어 어떤 사람이 통득한다면 불매(不昧)하리라. 형제여, 진중(珍重)하라. 이에 게()가 있어 시중(示衆)해 가로되 직하(直下; 當下)는 오히려 알기 어렵고/ 언어에서 찾으면 더욱 다시 멀다()/ 만약 부처와 조사를 논한다면/ 특지(特地) 천애(天涯)처럼 막히리라. 민수(閩帥)가 예중(禮重)했고 늘 법요(法要)를 물었다().

口過; 언어의 과실. 효경 경대부(卿大夫). 말이 천하에 가득하면 구과(口過)가 없다(言滿天下無口過).

省要處; 선법을 영오(領悟)하는 관건(關鍵)의 곳.

敎外別傳; 문자와 어언(語言)에 의하지 않고 바로 불타가 깨친 바의 경계를 깨침을 곧 일컬어 교외별전이라 함. 또 명칭이 단전(單傳). 이 교외별전의 선법은 또한 곧 보리달마가 전한 바의 조사선임.

箇漢; ()는 대사(代詞)니 저()ㆍ나()에 상당함. 또 십마(什麽)에 상당함.

 

漳州隆壽興法大師紹卿 泉州人也 姓陳氏 幼于靈巖寺習經論 講業旣就而深慕禪那 乃問法于雪峯之室 服勤數載從緣開悟 因侍經行見芋葉動 雪峯指動葉視之 師對曰 紹卿甚生怕怖 雪峯曰 是汝屋裏底怕怖什麽 師於是恍然惺悟頓息他遊 尋受請居龍谿焉 僧問 古人道摩尼殿有四角一角常露 如何是常露底角 師擧拂子 問糧不畜一粒如何濟得萬人饑 師曰 俠客面前如奪劍 看君不是黠兒郞 問 大拍盲底人來 師還接否 師曰 前後大應得此便也 曰莫便是接否 師曰 遮漢來遮裏插嘴 問耳目不到處如何 師曰 汝無此作 曰恁麽卽聞也 師曰 眞箇聾 漢漳守王公欽尙祖風 爲奏紫衣師名

俠客; 祖庭事苑五 俠客 俠 音叶 俠之言俠也 以權力俠輔人也 荀悅云 立氣齊 作威福 結私交 以立彊於世者 謂之游俠 史(史記一二四)云 今游俠 其行雖不軌於正義 然其言必信 其行必果 已諾必誠 不愛其軀 赴士之阨困 旣已存亡死生矣 而不矜其能 羞伐其德 蓋亦有足多者焉 且緩急 人之所時有也

拍盲; 謂以手拍打己眼 若欲見物 如盲相似之義

 

장주(漳州) 융수(隆壽; 隆壽院) 흥법대사(興法大師; 賜號) 소경(紹卿). 천주(泉州) 사람이며 성이 진씨(陳氏). 어릴 적에 영암사(靈巖寺)에서 경론을 학습했고 강업(講業)을 이미 성취하자 선나(禪那)를 깊이 흠모했다. 이에 설봉지실(雪峯之室)에서 문법(問法)했고 복근(服勤)하기 몇 해()에 인연 따라 개오(開悟)했다. 모시고 경행(經行)하다 토란 잎(芋葉)이 동()함을 봄으로 인해 설봉이 동엽(動葉)을 가리키며 보였다(; 와 통함). 스님이 대답해 가로되 소경(紹卿)이 심히 파포(怕怖)를 냅니다. 설봉이 가로되 이는 너의 옥리의 것(屋裏底)이거늘 파포하여 무엇하리오. 스님이 이에 황연(恍然; 突然. 忽然)히 성오(惺悟)했고 타유(他遊; 다른 데를 遊行)를 문득 쉬었다. 이윽고 수청(受請)하여 용계(龍谿)에 거주했다. 승문(僧問) 고인이 말하되 마니전(摩尼殿)에 사각(四角)이 있는데 일각(一角)이 늘 드러났다. 무엇이 이 늘 드러난 각(; 모퉁이)입니까. 스님이 불자를 들었다. 묻되 양식(糧食; )을 한 알도 비축(備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만인(萬人)의 굶주림()을 구제합니까(濟得). 사왈(師曰) 협객(俠客)의 면전에서 검을 뺏으려고 할 것 같으면 그대를 보건대 이 힐아랑(黠兒郞; 聰慧의 사내)이 아니다. 묻되 매우 박맹한 사람(拍盲底人)이 온다면 스님이 도리어 접인(接引)하겠습니까. 사왈 전후(前後)로 크게 이 편의에 응해 얻었다. 가로되 바로 이 접인이 아니겠습니까. 사왈 저한(遮漢)이 이 속에 와서 주둥이를 꽂는구나. 묻되 이목(耳目)이 이르지 않는 곳은 어떻습니까. 사왈 너는 이 작(; 作略)이 없다.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 들었습니다(聞也). 사왈 진개(眞箇; 는 조사)로 귀먹었구나(). 한장수(漢漳守) 왕공(王公)이 조풍(祖風)을 흠상(欽尙; 崇尙)했고 자의(紫衣)와 사명(師名)을 주청(奏請)했다.

俠客; 조정사원5. 협객(俠客) ()은 음이 협(). ()은 말하자면 협()이니 권력(權力)으로써 사람을 협보(俠輔; 곁에서 도움)함임. 순열(荀悅)이 이르되 기()를 세워 가지런히 하고 위복(威福)을 지으며 사교(私交)를 맺고 세상에 굳셈을 세우는 자이니 이를 일러 유협(游俠)이라 한다. (; 사기124)에 이르되 지금의 유협(游俠)은 그 행()은 비록 정의(正義)를 본받지 않지만 그러나 그 말은 반드시 믿을 만하고 그 행은 반드시 결실(結實)하고 이미 허락하면 반드시 정성(精誠)스럽고 그 몸을 아끼지() 않고 사내의 액곤(阨困)에 다다라서는 이미 존망사생(存亡死生)의 사이이다. 그 능력을 자랑하지 않고 그 덕을 뽐냄()을 수치로 여기니 대개 또한 족히 많은 게 있는 자이다. 또 완급(緩急)은 사람에게 때로 있는 바이다.

拍盲; 이르자면 손으로써 자기의 눈을 때림임. 만약 사물을 보려하면 마치 맹인과 상사함의 뜻.

 

福州僊宗院仁慧大師行瑫 泉州人也 姓王氏 本州開元寺受業 預雪峯禪會聲聞四遠 閩帥請轉法輪玄徒奔至 上堂曰 我與釋迦同參 汝道參什麽人 時一僧出禮拜擬伸問 師曰錯 問如何是西來意 師曰 熊耳不曾藏 問直下事乞師方便 師曰 不因汝問我亦不道 問如何是西來意 師曰 白日無閑人

四遠; 一四方邊遠之地 二四方

 

복주(福州) 선종원(僊宗院) 인혜대사(仁慧大師; 賜號) 행도(行瑫). 천주(泉州) 사람이며 성이 왕씨(王氏). 본주(本州) 개원사(開元寺)에서 수업했고 설봉의 선회(禪會)에 참예(參預)했고 명성이 사원에 알려졌다(聲聞四遠). 민수(閩帥)가 전법륜(轉法輪)을 청했고 현도(玄徒)가 분지(奔至)했다. 상당하여 가로되 나와 석가는 동참(同參)이다. 너희가 말하라 어떤 사람을 참()했는가. 때에 1승이 나와 예배하고 질문을 펴려고 하자 사왈(師曰) 틀렸다(). 묻되 무엇이 이 서래의(西來意)입니까. 사왈 웅이(熊耳; 熊耳山)에 일찍이 감추지 않았다. 묻되 직하사(直下事)를 스님의 방편을 구걸합니다. 사왈 너의 물음을 인하지 않았다면 나도 또한 말하지 않는다. 묻되 무엇이 이 서래의(西來意)입니까. 사왈 대낮(白日)에 한인(閑人)이 없다.

四遠; 1. 사방의 변원(邊遠)의 땅. 2. 사방.

 

福州蓮華山永福院超證大師從弇先住漳州報恩院僧問 儒門以五常爲極則 未審宗門以何爲極則 師良久 僧曰 恁麽卽學人造次也 師曰 好與拄杖 問敎云 唯有一乘法 如何是一乘法 師曰 汝道我在遮裏作什麽 曰恁麽卽不知敎意也 師曰 雖然如此却不孤負汝 問不向問處領 猶是學人問處 和尙如何 師曰 喫茶去 長慶常云 盡法無民 師曰 永福卽不然 若不盡法又爭得民 時有僧曰 請師盡法 師曰 我不要汝納稅 問諸餘卽不問 聊徑處乞師垂慈 師曰 不快禮三拜 師上堂曰 咄咄看箭便歸方丈 問請師盡令 師曰 莫埋沒 問大衆雲集請師說法 師曰 聞麽 曰若更佇思應難得及 師曰 實卽得 問摩尼殿有四角一角常露 如何是常露底角 師曰 不可更點 師上堂於座邊立謂衆曰 二尊不竝化 便歸方丈

五常; 盂蘭盆經疏孝衡鈔上 五常者 謂仁義禮智信 好生惡殺曰仁 知恩報恩曰義 長幼恭勤曰禮 敏速多知曰智 立行可依曰信 又云 不殺爲仁 不盜爲義 不亂爲禮 不淫爲智 忠實爲信 由於此五 王者以之治國 君子以之立身 不可蹔亡謂之五常

 

복주(福州) 연화산(蓮華山) 영복원(永福院) 초증대사(超證大師) 종엄(從弇)먼저 漳州 報恩院했다. 승문(僧問) 유문(儒門)은 오상(五常)을 극칙(極則)으로 삼습니다. 미심하오니 종문(宗門)은 무엇을 극칙으로 삼습니까. 스님이 양구(良久)했다. 승왈(僧曰) 이러하다면 곧 학인이 조차(造次; 輕率)했습니다. 사왈(師曰) 좋이 주장(拄杖)을 주리라(주장자로 때려 주리라). 묻되 교운(敎云) 오직 일승법(一乘法)이 있다. 무엇이 이 일승법입니까. 사왈 네가 말하라, 내가 이 속에 있으면서 무엇을 하느냐.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 교의(敎意)를 알지 못함입니다. 사왈 비록 그러하여 이와 같지만 도리어 너를 저버리지(孤負) 않는다. 묻되 문처(問處)를 향해 영회(領會)하지 말아라 하지만 오히려 이 학인의 문처(問處)입니다. 화상은 어떻습니까. 사왈 차 마시고 가게. 장경(長慶)이 늘 이르되 진법무민(盡法無民; 법률을 다 시행하면 백성이 없다)이다. 사왈 영복(永福)은 곧 그렇지 않다. 만약 진법(盡法)하지 않는다면 어찌 득민(得民)하겠는가. 때에 어떤 중이 가로되 스님의 진법을 청합니다. 사왈 나는 너에게 납세(納稅)를 요구(要求; )하지 않는다. 묻되 모든 여타(餘他; )는 곧 묻지 않습니다. 요경처(聊徑處; 의지할 지름길의 처소), 스님의 수자((垂慈)를 구걸합니다. 사왈 쾌하니 못하구나(不快), 삼배(三拜)를 예배하라. 스님이 상당하여 가로되 돌돌(咄咄; 歎息하는 소리) 화살을 보아라(看箭). 바로 방장으로 돌아갔다. 묻되 스님이 영을 다하기를(盡令) 청합니다. 사왈 매몰(埋沒)하지 말아라. 묻되 대중이 운집했습니다. 스님의 설법을 청합니다. 사왈 듣느냐. 가로되 만약 다시 저사(佇思; 우두커니 서서 思惟)한다면 응당 미침을 얻기 어려울 것입니다. 사왈 실로 얻기 어렵다. 묻되 마니전(摩尼殿)에 사각(四角)이 있고 일각(一角)이 늘 드러났습니다. 무엇이 이 늘 드러난 모퉁이()입니까. 사왈 다시 점검()함은 옳지 못하다. 스님이 상당하여 좌변(座邊)에 서서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이존(二尊)이 함께 교화(竝化)하지 못한다. 바로 방장으로 돌아갔다.

五常; 우란분경소효형초상. 5()이란 것은 이르자면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다. 살림을 좋아하고 죽임을 싫어함을 가로되 인()이며 은혜를 알고 은혜를 갚음을 가로되 의()며 장유(長幼)를 공근(恭勤; 恭敬으로 의심됨)함을 가로되 예()며 민속(敏速)하고 다지(多知)를 가로되 지()며 입행(立行)에 가히 의지할만함을 가로되 신()이다. 또 이르되 불살(不殺)은 인()이 되고 부도(不盜)는 의()가 되고 불란(不亂)은 예()가 되고 불음(不淫)은 지()가 되고 충실(忠實)은 신()이 된다. 5로 말미암아 왕자(王者)는 이로써 치국(治國)하고 군자는 이로써 입신(立身)하나니 가히 잠시도 잊지 않으며 이를 일러 5상이다.

 

杭州龍華寺眞覺大師靈照 高麗人也 萍遊閩越升雪峯之堂 冥符玄旨 居唯一衲服勤衆務 閩中謂之照布衲 一夕指半月問溥上座 那一片什麽處去也 溥曰 莫妄想 師曰 失却一片也 衆雖歎美而恬澹自持 初止婺州齊雲山 上堂良久 忽舒手視其衆曰 乞取些子乞取些子 又曰 一人傳虛萬人傳實 僧問 草童能歌舞 未審今時還有無 師下座作舞曰 沙彌會麽 僧曰 不會 師曰 山僧蹋曲子也不會 問靈山會上法法相傳 未審齊雲將何付囑 師曰 不可爲汝一人荒却齊雲也 曰莫便是親付囑也無 師曰 莫令大衆笑

一人傳虛萬人傳實; 蓋眞理乃各人所自悟自得 一涉及語言文字 則失其實

靈山會上; 卽釋尊在靈鷲山說法度生時之會座 有二種說法 一指演說法華經之會座 法華經科註 靈山會上玅法華經 昔日世尊金口宣暢 二指拈花付法之會座 按大梵天王問佛決疑經 釋迦昔於靈山會上 手拈一花示衆 迦葉見之 破顔微笑 世尊遂付以正法眼藏

 

항주(杭州) 용화사(龍華寺) 진각대사(眞覺大師) 영조(靈照). 고려(高麗) 사람이다. 부평처럼 민월(閩越)에 노닐다가 설봉지당(雪峯之堂)에 올라 현지(玄旨)에 명부(冥符; 몰래 합함)했다. 거주하면서 오직 일납(一衲)으로 중무(衆務)에 복근(服勤)한지라 민중(閩中)에서 그를 일러 조포납(照布衲)이라 했다. 어느 날 저녁(一夕) 반월(半月)을 가리키며 부상좌(溥上座)에게 묻되 그() 일편(一片)은 어느 곳으로 갔는가. 부왈(溥曰) 망상하지 마십시오. 사왈(師曰) 일편을 잃어버렸다. 대중이 비록 탄미(歎美)했지만 염담(恬澹; 고요하면서 맑음)하며 자지(自持)했다. 처음 무주(婺州) 제운산(齊雲山)에 머물렀다. 상당하여 양구(良久)하고는 홀연히 손을 펴(舒手) 그 대중에게 보이며() 가로되 사자(些子)를 걸취(乞取)하라, 사자를 걸취하라. 또 가로되 한 사람이 허를 전하매 만 사람이 실로 전한다(一人傳虛萬人傳實). 승문(僧問) 초동(草童)이 능히 가무(歌舞)하거니와 미심하오니 금시(今時)에 도리어 있습니까 없습니까. 스님이 하좌(下座)하여 작무(作舞)하고 가로되 사미(沙彌), 아느냐(會麽). 승왈(僧曰) 알지 못합니다. 사왈 산승의 답곡자(蹋曲子; 는 조사)도 알지 못하느냐. 묻되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법법(法法)을 상전(相傳)했거니와 미심하오니 제운(齊雲; 靈照)은 무엇을 가져 부촉(付囑)하십니까. 사왈 너 한 사람을 위해 제운(齊雲; 齊雲山)을 황각(荒却)함은 옳지 못하다. 가로되 바로 이것이 친히 부촉함이 아니겠습니까 또는 아닙니까. 사왈 대중을 웃기지 말아라.

一人傳虛萬人傳實; 대개 진리는 곧 각인이 자오자득(自悟自得)하는 것이며 한 번 어언문자에 섭급(涉及)하면 곧 그 실()을 잃음.

靈山會上; 곧 석존이 영취산에 있으면서 설법하여 중생을 제도할 때의 회좌(會座). 두 가지 설법이 있음. 1은 법화경을 연설한 회좌를 가리킴. 법화경과주(法華經科註) 영산회상의 묘법화경을 석일에 세존이 금구(金口)로 선창(宣暢)했다. 2는 염화부법(拈花付法)의 회좌를 가리킴. 대범천왕문불결의경을 안험컨대 석가가 옛적에 영산회상에서 손으로 1()를 들어 시중하매 가섭이 이를 보고 파안미소했으며 세존이 드디어 정법안장을 부촉했음.

 

還丹一粒點鐵成金 至理一言點凡成聖 請師一點 師曰 還知齊雲點金成鐵麽 曰點金成鐵未之前聞 至理一言敢希垂示 師曰 句下不薦後悔難追 師次居越州鏡淸院海衆悅隨 一日謂衆曰 盡令去也 僧曰 請師盡令 師曰 吽吽 問如何是學人本分事 師曰 鏡淸不惜口 問請師雕琢 師曰 八成 曰爲什麽不十成 師曰 還知鏡淸生修理麽 師問僧 什麽處來 曰五峯來 師曰 來作什麽 曰禮拜和尙 師曰 何不自禮 曰禮了也 師曰 鏡湖水淺 問如何是第一句 師曰 莫錯下名言 曰師豈無方便 師曰 烏頭養雀兒 問向上一路千聖不傳 未審什麽人傳得 師曰 千聖也疑我 曰莫便是傳也無 師曰 晉帝斬嵆康

還丹; 又稱轉丹 丹 丹砂 朱沙 道家煉藥多用朱沙 故稱道家所煉藥爲丹 百度百科云 丹砂燒成水銀之後 放置到一定時間水銀又還原成丹砂 稱還丹 自稱服後可以卽刻成仙

八成; 八分成就之略

十成; 一謂事物之全部 二完全 徹底

嵆康; (224-263 一作二二四-二六二) 字叔夜 譙國銍縣(今安徽省濉溪縣)人 三國曹魏時著名思想家 音樂家 文學家 正始末年與阮籍等竹林名士共倡玄學新風 爲竹林七賢的精神領袖 官至曹魏中散大夫 世稱嵇中散 後因得罪鍾會 爲其誣陷 而被司馬昭處死 [百度百科]

 

묻되 환단(還丹) 일립(一粒)을 쇠에 점 찍으면 금을 이루고 지리(至理)의 일언(一言)으로 범부에 점 찍으면 성인을 이룹니다. 스님의 한 번 점 찍음을 청합니다. 사왈(師曰) 도리어 제운(齊雲)이 금에 점 찍어 쇠를 이루는 줄 아느냐. 가로되 금에 점 찍어 쇠를 이룬다 함은 전에 듣지 못했습니다. 지리의 일언을 감히 수시(垂示)하시기를 바랍니다(). 사왈 구하(句下)에서 불천(不薦; 領會하지 못함)하면 후회(後悔)해도 쫓기() 어렵다. 스님이 다음에 월주(越州) 경청원(鏡淸院)에 거주했고 해중(海衆)이 기뻐하며 따랐다. 어느 날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진령(盡令; 법령을 다 시행)하여 가겠다. 승왈(僧曰) 스님의 진령(盡令)을 청합니다. 사왈 우우(吽吽). 묻되 무엇이 이 학인의 본분사입니까. 사왈 경청(鏡淸)은 입을 아끼지 않는다(不惜口). 묻되 스님의 조탁(雕琢)을 청합니다. 사왈 팔성(八成)했다. 가로되 무엇 때문에 십성(十成)하지 않습니까. 사왈 도리어 경청(鏡淸)이 수리(修理)를 내는 줄 아느냐. 스님이 중에게 묻되 어느 곳에서 오느냐. 가로되 오봉(五峯)에서 옵니다. 사왈 와서 무엇을 하려느냐. 가로되 화상에게 예배하려 합니다. 사왈 왜 자기에게 예배하지 않느냐(不自禮). 가로되 예배해 마쳤습니다. 사왈 경호수(鏡湖水)가 얕다. 묻되 무엇이 이 제일구(第一句)입니까. 사왈 명언(名言; 名字와 언구)을 착하(錯下)하지 말아라. 가로되 스님이 어찌 방편이 없겠습니까. 사왈 오두(烏頭; 까마귀 머리)에 작아(雀兒; 참새)를 키운다(). 묻되 향상(向上)의 일로(一路)는 천성(千聖)도 전하지 못한다 하니 미심합니다, 어떤 사람이 전함을 얻습니까. 사왈 천성도 나를 의심한다. 가로되 바로 이 전함이 아니겠습니까 또는 아닙니까. 사왈 진제(晉帝)가 혜강(嵆康)을 베었다().

還丹; 또 명칭이 전단(轉丹). ()은 단사ㆍ주사니 도가에서 약을 제련(製鍊)하면서 많이 주사를 쓰므로 고로 도가에서 제련한 바의 약을 일컬어 단이라 함. 백도백과에 이르되 단사(丹砂)를 태워 수은을 이룬 후 방치하여 일정한 시간에 이른 수은을 또 환원(還原)하여 단사(丹砂)를 이루는데 일컬어 환단(還丹)이라 한다. 자칭하기를 복용한 후 가이(可以) 즉각 신선(神仙)이 된다.

八成; 팔분성취(八分成就)의 약칭.

十成; 1. 이르자면 사물의 전부. 2. 완전. 철저.

嵆康; (224-263. 한편으론 224-262로 지음) 자는 숙야(叔夜)며 초국(譙國) 질현(銍縣; 지금의 안휘성 수계현) 사람. 삼국 조위(曹魏) 때의 저명한 사상가ㆍ음악가ㆍ문학가임. 정시(正始) 말년 완적 등 죽림명사(竹林名士)와 현학(玄學)의 신풍(新風)을 공창(共倡)했고 죽림칠현의 정신의 영수(領袖)가 되었음. 벼슬이 조위(曹魏)의 중산대부에 이르렀으며 세칭이 혜중산(嵇中散). 후에 종회(鍾會)에게 득죄(得罪)함으로 인해 그의 무함(誣陷) 때문에 사마소(司馬昭)의 처소에서 죽임을 입었음 [백도백과].

 

問釋迦掩室於摩竭 淨名杜口於毘耶 此意如何 師曰 東廊下兩兩三三 師謂衆曰 諸方以毘盧法身爲極則 鏡淸遮裏卽不然 須知毘盧有師法身有主 問如何是毘盧師法身主 師曰 二公爭敢論 問古人道 見色便見心 此卽是色阿那箇是心 師曰 恁麽問莫欺山僧麽 問未剖以前請師斷 師曰 落在什麽處 曰恁麽卽失口也 師曰 寒山送潙山 又曰 住住闍梨失口山僧失口 曰惡虎不食子 師曰 驢頭出馬頭迴 師驀問一僧 記得麽 曰記得 師曰 道什麽 曰道什麽 師曰 淮南小兒入寺 問是什麽卽俊鷹俊鷂趁不及 師曰 闍梨別問山僧別答 曰請師別答 師曰 十里行人較一程 問金屑雖貴 眼裏著不得時如何 師曰 著不得還著得麽 僧禮拜 師曰 深沙神 問菩提樹下度衆生 如何是菩提樹 師曰 大似苦練樹 曰爲什麽似苦練樹 師曰 素非良馬何勞鞭影 後湖守錢公卜杭之西關創報慈院 延請開法 禪衆翕然依附 尋而錢王建龍華寺 迎金華傅大士靈骨道具寘焉 命師住持 晉天福十二年丁未閏七月二十六日終于本寺 壽七十八 塔于大慈山

兩兩三三; 又作三三兩兩 三箇人兩箇人 聚在一處作事 形容人數不多 不太集中 但又陸續地行動

淮南; 淮水以南

一程; 約計的道路里程 猶言一段路

深沙神; 佛說摩尼羅亶經曰 若有縣官盜賊水火 則當讀是摩尼羅亶經 諸鬼神不得復嬈害人 今是經諸佛口中所出 若有國中鬼 一者名深沙 二者名浮丘 是二鬼健行求人長短 若有頭痛目眩寒熱傷心 卽當擧是二鬼名字 便當說摩尼羅亶經 是諸鬼神無不破碎者 常曉和尙請來目錄曰 深沙神王像一軀 右唐代玄奘三藏遠涉五天感得此神 此是北方多聞天王化身也 今唐國人總重此神救災成益 其驗現前 無有一人不依行者 寺裏人家皆在此神 自見靈驗實不思議 具事如記文 請來如件

苦楝樹; 楝科的落葉喬木

 

묻되 석가가 마갈에서 엄실하고(釋迦掩室於摩竭) 정명이 비야에서 두구했다(淨名杜口於毘耶) 하니 이 뜻이 무엇입니까. 사왈(師曰) 동랑(東廊) 아래 양량삼삼(兩兩三三)이다. 스님이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제방에서 비로(毘盧)와 법신(法身)으로써 극칙(極則)을 삼거니와 경청(鏡淸)의 이 속은 곧 그렇지 않나니 비로에게 사()가 있고 법신에 주()가 있는 줄 수지(須知)해야 한다. 묻되 무엇이 이 비로의 사며 법신의 주입니까. 사왈 이공(二公)이 어찌 감히 논하겠는가. 묻되 고인이 말하되 색()을 보다가 바로 심()을 본다. 이것은 즉시(卽是) 색입니다, 어느 것(阿那箇)이 이 심입니까. 사왈 이렇게 물음이 산승을 속이는 게 아니겠는가. 되 부석(剖析; )하기 이전에 스님의 단절을 청합니다. 사왈 어느 곳에 떨어져 있는가. 가로되 이러하시다면 곧 실구(失口; 失言)했습니다. 사왈 한산(寒山)이 위산(潙山)을 송별했다. 또 가로되 그쳐라 그쳐라(住住). 사리(闍梨)의 실구(失口)냐 산승의 실구냐. 가로되 사나운 범(惡虎)이라도 새끼를 먹지 않습니다. 사왈 여두(驢頭)가 나가고 마두(馬頭)가 돌아오네. 스님이 갑자기() 1()에게 묻되 기득(記得)하느냐. 가로되 기득합니다. 사왈 무엇이라고 말했느냐. 가로되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사왈 회남(淮南)의 소아(小兒)가 입사(入寺)했다. 묻되 이 무엇이기에 곧 준응(俊鷹; 뛰어난 매)과 준요(俊鷂; 뛰어난 새매)가 쫓아가도() 미치지 못합니까. 사왈 사리(闍梨)가 별문(別問)하니 산승이 별답(別答)한다. 가로되(; 저본에 으로 지었음) 스님의 별답을 청합니다. 사왈 십 리의 행인이 일정 어긋난다(一程). 묻되 금가루가 비록 귀하지만 눈 속에 붙임을 얻지(著不得) 못할 때 어떻습니까. 사왈 붙임을 얻지 못함에 도리어 붙음을 얻느냐. 중이 예배했다. 사왈 심사신(深沙神)이다. 묻되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중생을 제도했다 하니 무엇이 이 보리수입니까. 사왈 고련수(苦練樹)와 매우 흡사하다(大似). 가로되 무엇 때문에 고련수와 흡사합니까. 사왈 본디() 양마(良馬)가 아니거늘 어찌 편영(鞭影)을 노고롭게 하겠는가. 후에 호수(湖守) 전공(錢公)이 항()의 서관(西關)을 선택해() 보자원(報慈院)을 창건하고 연청(延請)해 개법(開法)하게 하자 선중(禪衆)이 흡연(翕然)히 의부(依附)했다. 이윽고 전왕(錢王)이 용화사(龍華寺)를 건립하여 금화(金華) 부대사(傅大士)의 영골(靈骨)과 도구(道具)를 맞이해 두었고() 스님을 주지로 임명했다. () 천복(天福) 12년 정미(丁未; 947) 726일 본사(本寺)에서 마쳤다. 나이는 78이며 대자산(大慈山)에 탑을 세웠다.

兩兩三三; 또 삼삼양량(三三兩兩)으로 지음. 세 개의 사람이나 두 개의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있으면서 일을 함. 사람의 수가 많지 않고 매우 집중하지 않지만 다만 또 육속(陸續; 계속하여 끊이지 않음)하여 행동함을 형용.

淮南; 회수(淮水) 이남.

一程; 약계(約計; 約略計算)의 도로의 이정(里程)이니 1단로(段路)라 말함과 같음.

深沙神; 불설마니라단경(佛說摩尼羅亶經)에 가로되 만약 현관(縣官)에 도적과 수화(水火; 수재와 화재)가 있으면 곧 마땅히 이 마니라단경을 독송할지니 모든 귀신이 다시 사람을 요해(嬈害; 어지럽히고 상해)함을 얻지 못한다. 여금에 이 경은 제불의 입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에 국중(國中)에 귀()가 있으니 1자는 이름이 심사(深沙)2자는 이름이 부구(浮丘). 2()는 건행(健行)하며 사람의 장단(長短)을 구()한다. 만약 두통ㆍ목현(目眩)ㆍ한열(寒熱)ㆍ상심(傷心)이 있으면 곧 마땅히 이 2귀의 명자를 들면서 곧 마땅히 마니라단경을 설하면 이 모든 귀신이 파쇄(破碎)되지 않는 자가 없다. 상효화상(常曉和尙)이 청래(請來)한 목록에 가로되 심사신왕상(深沙神王像) 1() ()는 당대 현장삼장이 멀리 5()에 건너가 이 신을 감득(感得)했다. 이것은 이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의 화신이다. 여금의 당나라 사람들이 모두 이 신을 존중하나니 재난을 구제하고 이익을 성취한다. 그 영험이 현전하는지라 한 사람도 의지하여 행하지 않는 자가 있지 않다. 사원 속과 인가에 모두 이 신이 있다. 스스로 본 영험이 실로 부사의하여 기문(記文)과 같이 사실을 구비하여 건()과 같이 청래(請來)했다.

苦楝樹; 연과(楝科)의 낙엽교목(落葉喬木).

 

明州翠巖永明大師令參 湖州人也 自雪峯受記止于翠巖大張法席 問不借三寸請師道 師曰 茶堂裏貶剝去 問國師三喚侍者意旨如何 師曰 抑逼人作麽 問諸餘卽不問 師默之 僧曰 如何擧似於人 師喚侍者點茶來 師上堂曰 今夏與諸兄弟語論 看翠巖眉毛還在麽長慶聞擧云 生也問凡有言句盡是點污 如何是向上事 師曰 凡有言句盡是點污 問如何是省要處 師曰 大衆笑汝 問坦然不滯鋒鋩時如何 師云 大有人作此見解 曰畢竟如何 師曰 坦然不滯鋒鋩 問古人拈槌竪拂意旨如何 師曰 邪法難扶 問僧繇爲什麽寫誌公眞不得 師曰 作麽生合殺 問險惡道中以何爲津梁 師曰 藥山再三叮囑 問不帶凡聖當機何示 師曰 莫向人道翠巖靈利 問妙機言句盡皆不當 宗乘中事如何 師曰 禮拜著 曰學人不會 師曰 出家行脚禮拜也不會 錢王嚮師道風 請居龍冊寺終焉

寫誌公眞不得; 禪苑蒙求上 誌公難邈 (會元二)寶誌禪師 初金陵東陽民朱氏之婦 上巳日聞兒啼鷹巢中 梯樹得之 擧以爲子 七歲依鍾山大沙門僧檢出家 專修禪觀 …… (梁武帝)甞詔畫工張僧繇寫師像 僧繇下筆輙不自定 師遂以指剺面門 分披出十一面觀音 妙相殊麗或慈或威 僧繇竟不能寫

合殺; 結束 同合煞

叮囑; 叮嚀咐囑

 

명주(明州) 취암(翠巖; 취암산) 영명대사(永明大師) 영참(令參). 호주(湖州) 사람이며 설봉에서 수기(受記)함으로부터 취암(翠巖)에 머물며 법석을 크게 별였다. 묻되 삼촌(三寸; )을 빌리지 않고 스님의 말씀을 청합니다. 사왈(師曰) 다당(茶堂) 속으로 폄박(貶剝; 批評)하러 가거라. 묻되 국사가 시자를 세 번 부른 의지(意旨)가 무엇입니까. 사왈 사람을 억핍(抑逼)하여 무엇하려느냐. 묻되 모든 여타(餘他)는 곧 묻지 않겠습니다. 스님이 침묵했다. 승왈(僧曰) 어떻게 사람에게 들어 보이겠습니까. 스님이 시자를 불러 점다(點茶)하여 오라 했다. 스님이 상당하여 가로되 금년 여름 여러 형제와 더불어 어론(語論)했으니 보아라, 취암(翠巖)의 눈썹(眉毛)이 도리어 있느냐長慶함을 듣고 이르되 했다. 묻되 무릇 언구(言句)가 있음은 모두 이 점오(點污; 汚點)니 무엇이 이 향상사(向上事)입니까. 사왈 무릇 언구가 있음은 모두 이 점오(點污). 묻되 무엇이 이 성요처(省要處; 저본에 者要處로 지었음)입니까. 사왈 대중이 너를 웃는다. 묻되 탄연(坦然)하여 봉망(鋒鋩; 칼날)에 막히지() 않을 때 어떻습니까. 사운(師云) 대유인(大有人)이 이 견해를 짓는다. 가로되 필경 어떻습니까. 사왈 탄연하여 봉망에 막히지 않는다. 묻되 고인이 염추수불(拈槌竪拂)한 의지(意旨)가 무엇입니까. 사왈 사법(邪法)은 부지(扶持)하기 어렵다. 묻되 승요(僧繇)가 무엇 때문에 지공의 진(; 肖像)을 베낌을 얻지 못했습니까(寫誌公眞不得). 사왈 어떻게 해야 합쇄(合殺)하느냐. 묻되 험악도(險惡道) 가운데 무엇을 진량(津梁)으로 삼습니까. 사왈 약산(藥山)이 재삼(再三) 정촉(叮囑)했다. 묻되 범성(凡聖)을 띠지 않으면 당기(當機)하여 어떻게 보입니까(何示). 사왈 사람을 향해 취암(翠巖)이 영리(靈利)하다고 말하지 말아라. 묻되 묘기(妙機)의 언구(言句)는 모두 다 부당(不當)합니다. 종승(宗乘) 중의 일은 어떻습니까. 사왈 예배하거라(禮拜著). 가로되 학인이 알지 못하겠습니다. 사왈 출가하여 행각하면서 예배도 알지 못하느냐. 전왕(錢王)이 스님의 도풍(道風)을 향(; )했고 청하여 용책사(龍冊寺)에 거주하다가 마쳤다.

寫誌公眞不得; 선원몽구상. 지공난막(誌公難邈) (회원2) 보지선사(寶誌禪師) 처음 금릉 동양(東陽)의 주민 주씨(朱氏)의 며느리가 상사일(上巳日)에 아이가 독수리 둥지 속에서 우는 소리를 듣고 나무에 사다리를 놓아 그를 얻었고 일으켜 아들로 삼았다. 7세에 종산(鍾山)의 대사문 승검(僧檢)에게 의지해 출가했는데 오로지 선관(禪觀)을 닦았다 …… (양무제)일찍이 화공 장승요(張僧繇)를 불러 스님의 형상을 그리게 했다. 승요가 하칠(下筆; 붓을 댐)하자 문득 스스로 안정하지 못했다. 스님이 드디어 손가락으로 면문(面門)을 벗기어 분피(分披)하여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을 나타냈다. 묘한 모양이 수려(殊麗)했는데 혹은 자비롭고 혹은 위엄스러워 승요가 마침내 능히 그리지 못했다.

合殺; 결속. 합쇄(合煞)와 같음.

叮囑; 정녕(叮嚀)으로 부촉(咐囑).

 

景德傳燈錄卷第十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