景德傳燈錄卷第十九
吉州靑原山行思禪師第六世之三四十二人
福州雪峯義存禪師法嗣下四十二人
福州安國弘瑫禪師 1752
襄州雲蓋山歸本禪師 1760
韶州林泉和尙 1761
洛京南院和尙 1761
越州洞巖可休禪師 1762
定州法海院行周禪師 1762
杭州龍井通禪師 1762
漳州保福從展禪師 1763
泉州睡龍道溥禪師 1775
杭州龍興寺宗靖禪師 1776
福州南禪契璠禪師 1778
越州越山師鼐禪師 1779
南嶽金輪可觀禪師 1780
泉州福淸玄訥禪師 1782
韶州雲門文偃禪師 1783
衢州南臺仁禪師 1809
泉州東禪和尙 1810
餘杭大錢山從襲禪師 1810
福州永泰和尙 1811
池州和龍山守訥禪師 1812
建州夢筆和尙 1812
福州古田極樂元儼禪師 1813
福州芙蓉山如體禪師 1815
洛京憩鶴山和尙 1815
潭州潙山棲禪師 1816
吉州潮山延宗禪師 1816
益州普通山普明大師 1817
惰州雙泉梁家庵永禪師 1818
漳州保福超悟禪師 1818
太原孚上座 1819
南嶽惟勁禪師〈已上三十一人見錄〉 1822
台州十相審超禪師
江州廬山訥禪師
新羅國大無爲禪師
潞州玄暉禪師
湖州淸淨和尙
益州永安雪峯和尙
盧僊德明禪師
撫州明水懷忠禪師
益州懷果禪師
杭州耳相行修禪師
嵩山安德禪師〈已上一十一人無機緣語句不錄〉
靑原山行思禪師第六世之三
福州雪峯義存禪師法嗣下
福州安國院明眞大師弘瑫 泉州人也 姓陳氏 幼絕葷茹自誓出家 於龍華寺東禪始圓戒體 而造于雪峯 雪峯觀其少俊堪爲法器 乃導以本心信入過量 復遍參禪苑 獲諸方三昧 却迴雪峯 雪峯問 什麽處來 曰江西來 雪峯曰 什麽處見達磨 曰分明向和尙道 雪峯曰 道什麽 曰什麽處去來 一日雪峯見師忽搊住曰 盡乾坤是箇解脫門 把手敎伊入不肯入 曰和尙怪弘瑫不得 雪峯曰 雖然如此爭奈背後許多師僧何 師因擧國師碑文云 得之於心伊蘭作栴檀之樹 失之於旨甘露乃蒺䔧之園 拈問僧曰 一語須具得失兩意 汝作麽生道 僧擧拳曰 不可喚作拳頭也 師不肯 亦擧拳別云 只爲喚遮箇作拳頭 師受請止囷山毳徒臻集 後閩帥嚮師道德 命居安國寺大闡玄風 徒餘八百矣
●戒體; 防非止惡之功能也 戒法授受之作法成就時 指防非止惡之功能 發現於受者身中者謂之戒體 此戒體舊譯云無作 新譯云無表 隨順此戒體 而於身口意三業 表現如法之所作 謂之戒行
●少俊; 少年英俊
●過量; 超過思量分別
●伊蘭; <梵> eraṇḍa 慧琳音義二十五 伊蘭 具足應云伊那拔羅 此云極臭木也
●栴檀; <梵> candana 祖庭事苑七 栴檀林 此云與樂 以白檀能治熱病 赤檀能去風腫 皆除疾身安之藥 故名與樂 或云此土無故不飜 慈恩三藏傳云 秣羅矩吒國有秣剌耶山 崖谷崇深 中有栴檀香樹 樹類白楊 其質凉冷 蛇多附之 至冬方蟄 用之別檀也
●蒺䔧; 正作蒺蔾 同蒺藜 爾雅 茨 蒺藜 郭璞注 布地蔓生 細葉 子有三角 刺人 ▲六韜第四篇虎韜 狹路微徑 張鐵蒺藜 芒高四寸廣八寸 一千二百具 敗步騎
●毳徒; 僧徒 毳 指僧人衣服 毳 鳥獸的細毛
복주(福州) 안국원(安國院) 명진대사(明眞大師) 홍도(弘瑫). 천주(泉州) 사람이며 성이 진씨(陳氏)다. 어릴 적에 훈여(葷茹)를 끊고 출가를 자서(自誓)했고 용화사(龍華寺) 동선(東禪)에게서 비로소 계체(戒體)를 원만히 했고 설봉(雪峯)으로 나아갔다. 설봉이 그가 소준(少俊)하면서 법기(法器)가 됨을 감당할 만함을 보고 이에 본심(本心)으로써 인도(引導)하매 믿고 과량(過量)에 들었다. 다시 선원(禪苑)을 편참(遍參)하여 제방의 삼매를 획득하고 설봉으로 돌아왔다(却迴). 설봉이 묻되 어느 곳에서 오느냐. 가로되 강서(江西)에서 옵니다. 설봉이 가로되 어느 곳에서 달마를 보았느냐. 가로되 분명히 화상을 향해 말했습니다. 설봉이 가로되 무엇이라고 말했느냐. 가로되 어느 곳에 갔다 오셨습니까(什麽處去來). 어느 날 설봉이 스님을 보자 홀연히 추주(搊住; 붙잡아 머물게 함)하고 가로되 온 건곤이 시개(是箇; 이것. 이) 해탈문(解脫門)이거늘 손을 잡고 그(伊)로 하여금 들게 하여도 들어감을 수긍하지 않는다. 가로되 화상은 홍도(弘瑫)를 괴이하게 여김을 얻지 못합니다. 설봉이 가로되 비록 그러하여 이와 같지만 등 뒤의 허다한 사승(師僧)을 어찌하겠는가. 스님이 인하여 국사(國師; 慧忠國師)의 비문(碑文)을 들어 이르되 마음에서 얻으면 이란(伊蘭)이 전단(栴檀)의 나무가 되고 의지(意旨)에서 잃으면 감로(甘露)가 이에 질려(蒺䔧)의 동산(園)이다. 들어(拈) 중에게 물어 가로되 일어(一語)에 모름지기 득실(得失)의 양의(兩意)를 갖추어야 한다. 네가 어떻게 말하겠는가. 중이 주먹을 들고 가로되 주먹(拳頭)이라고 불러 지음은 옳지 못합니다. 스님이 수긍하지 않고 또한 주먹을 들고 별운(別云)하되 다만 이것(遮箇)을 일러 주먹(拳頭)이라 하기 때문이다. 스님이 수청(受請)해 균산(囷山)에 머물자 취도(毳徒)가 진집(臻集; 이르러 모이다)했다. 후에 민수(閩帥)가 스님의 도덕(道德)을 향(嚮)했고 명(命)하여 안국사(安國寺)에 거주하게 했는데 현풍(玄風)을 크게 열었고(闡) 도중(徒衆)이 8백 남짓이었다.
●戒體; 방비지악(防非止惡; 비리를 막고 악업을 그침)의 공능(功能)이니 계법을 수수(授受)하는 작법을 성취했을 때의 방비지악의 공능을 가리킴. 받는 자의 몸 속에 발현하는 것을 일러 계체라 함. 이 계체를 구역에선 이르되 무작(無作)이라 했고 신역에선 이르되 무표(無表)라 했음. 이 계체를 수순하여 신구의(身口意) 3업에 여법한 소작(所作)을 표현함을 일러 계행이라 함.
●少俊; 소년(少年)이면서 영준(英俊)함.
●過量; 사량과 분별을 초과함.
●伊蘭; <범> eraṇḍa. 혜림음의25. 이란(伊蘭) 구족하면 응당 이르되 이나발라(伊那拔羅)니 여기에선 이르되 극취목(極臭木)이다.
●栴檀; <범> candana. 조정사원7. 전단림(栴檀林) 여기에선 이르되 여락(與樂; 즐거움을 줌)임. 백단(白檀)으로써 능히 열병(熱病)을 치료하고 적단(赤檀)은 능히 풍종(風腫; 浮腫의 하나. 産後에 바람을 맞아서 바람을 싫어하므로 바람을 맞거나 차게 하면 더 붓는 症狀의 病症)을 제거함. 모두 질병을 다스려(除는 다스릴 제) 몸을 편안하게 하는 약이므로 고로 이름이 여락(與樂)임. 혹은 이르되 이 땅에는 없는 고로 번역하지 못한다. 자은삼장전(慈恩三藏傳; 大慈恩寺三藏法師傳四)에 이르되 말라구타국(秣羅矩吒國)에 말랄야산(秣剌耶山; 梵 Malaya)이 있는데 벼랑과 계곡이 높고 깊으며 가운데 전단향수(栴檀香樹)가 있으며 나무가 백양(白楊)과 유사하다. 그 성질이 양랭(凉冷)하므로 뱀이 많이 이에 붙는다. 겨울에 이르면 비로소 칩거(蟄居; 蟄은 숨을 칩)하므로 이를 써서 전단(栴檀)을 분별한다.
●蒺䔧; 바르게는 질려(蒺蔾)로 지음. 질려(蒺藜)와 같음. 이아(爾雅) 자(茨; 가시나무)는 질려(蒺藜; 남가새)다. 곽박주(郭璞注) 땅에 퍼져 등굴로 자란다. 가는 잎이며 씨에 삼각이 있어 사람을 찌른다. ▲육도(六韜) 제4편 호도(虎韜). 좁은 길과 작은 길에 철질려(鐵蒺藜)를 설치했는데 가시의 높이는 4촌(寸)이며 너비는 8촌(寸)이다. 1,200구(具; 양사)였으며 보병과 기병을 패퇴시켰다.
●毳徒; 승도(僧徒)니 취(毳)는 승인의 의복을 가리킴. 취(毳)는 새나 짐승의 세모(細毛).
僧問 如何是西來意 師曰 是卽是莫錯會 問如何是第一句 師曰 問問 問學人上來未盡其機請師盡機 師良久 僧禮拜 師曰 忽到別處人問 汝作麽生擧 曰終不敢錯擧 師曰 未出門已見笑具 問如何是達磨傳底心 師曰 素非後躅 問如何是宗乘中事 師曰 不可爲老兄散却衆也 問不落有無之機請師全道 師曰 汝試斷看 問如何是一毛頭事 師拈起袈裟 僧曰 乞師指示 師曰 抱璞不須頻下淚 來朝更獻楚王看 問寂寂無言時如何 師曰 更進一步 問凡有言句皆落因緣方便 不落因緣方便事如何 師曰 桔橰之士頻逢 抱甕之流罕遇 問向上一路千聖不傳 未審和尙如何傳 師曰 且留口喫飯著 問如何是高尙底人 師曰 河濱無洗耳之叟 磻溪絕垂釣之人
●更獻楚王; 見上十三風穴延沼章卞和
●洗耳之叟; 從容錄第二十八則 史記 許由隱於箕山 依山而食 就河而飮 堯讓帝位 由聞之臨河洗耳 巢父飮牛問曰 凡人洗面 公獨洗耳 由曰 聞堯請我爲九州長 故洗是非 父曰 豫章之木生於高山 工人莫得 子欲避世 何不深藏 今游人間苟求名譽 行待下飮 恐汚牛口 乃牽上流飮之
●磻溪; 水名 一名璜河 在今陝西寶雞市東南 源出南山茲谷 北流入渭水 相傳呂尙(姜太公)垂釣於此而遇周文王 ▲從容錄第十八則 周文王出獵 見姜子牙磻溪之谷 去水三尺 直鉤釣魚
승문(僧問) 무엇이 이 서래의(西來意)입니까. 사왈(師曰) 옳기는 곧 옳지만(是卽是) 착회(錯會)하지 말아라. 묻되 무엇이 이 제1구(第一句)입니까. 사왈 문문(問問; 묻는 물음)이다. 묻되 학인이 상래(上來; 올라오다)하여 그 기(機)를 다하지 못했으니 스님의 진기(盡機)를 청합니다. 스님이 양구(良久)하자 중이 예배했다. 사왈 홀연히 다른 곳에 이르매 사람이 묻는다면 네가 어떻게 들겠는가(擧). 가로되 마침내 감히 착거(錯擧)하지 않겠습니다. 사왈 출문(出門)하지도 않았는데 이미 웃음거리(笑具)를 보였다(見). 묻되 무엇이 이 달마가 전한 마음입니까. 사왈 본디(素) 후탁(後躅; 뒷자취)이 아니다. 묻되 무엇이 이 종승(宗乘) 중의 일입니까. 사왈 노형(老兄)을 위해 대중을 흩어버림은 옳지 못하다. 묻되 유무지기(有無之機)에 떨어지지 않고 스님의 전부 말씀하심을 청합니다. 사왈 네가 시험 삼아 판단(判斷)해 보아라. 묻되 무엇이 이 일모두(一毛頭; 頭는 조사)의 일입니까. 스님이 가사(袈裟)를 집어 일으켰다. 승왈(僧曰) 스님의 지시를 구걸합니다. 사왈 박(璞)을 안고 자주 눈물 떨어뜨림을 쓰지 말고 내조(來朝)에 다시 초왕에게 바쳐보아라(更獻楚王看). 묻되 적적(寂寂)하여 말이 없을 때 어떻습니까. 사왈 다시 일보(一步) 전진하라. 묻되 무릇 언구가 있으면 모두 인연과 방편에 떨어집니다. 인연과 방편에 떨어지지 않는 일이 무엇입니까. 사왈 두레박질하는 사내(桔橰之士)는 자주 만나고(頻逢) 독을 안은 무리(抱甕之流)는 드물게 만난다(罕遇). 묻되 향상일로(向上一路)는 천성(千聖)도 전하지 못합니다. 미심하오니 화상은 어떻게 전합니까. 사왈 다만(且) 입을 머물러 두었다가 끽반하거라(喫飯著). 묻되 무엇이 이 고상(高尙)한 사람입니까. 사왈 하빈(河濱; 냇가)엔 귀를 씻는 늙은이(洗耳之叟)가 없고 반계(磻溪)엔 낚시를 드리운 사람이 끊겼다.
●更獻楚王; 위 13 풍혈연소장(風穴延沼章) 변화(卞和)를 보라.
●洗耳之叟; 종용록 제28칙. 사기(史記) 허유(許由)가 기산(箕山)에 은거(隱居)하면서 산에 의지해 먹고 내에 나아가 마셨다. 요(堯)가 제위(帝位)를 양위(讓位)하려 했는데 허유가 그것을 듣고 내에 와서 귀를 씻었다. 소부(巢父. 父는 보로도 발음함)가 소에게 (물을) 먹이려 하다가 물어 가로되 범인(凡人)은 얼굴을 씻거늘 공(公)은 유독(惟獨) 귀를 씻는가. 허유가 가로되 요(堯)가 나를 청해 구주(九州; 禹가 중국을 아홉 주로 나누었으니 곧 冀ㆍ兗ㆍ靑ㆍ徐ㆍ荊ㆍ雍ㆍ豫ㆍ揚 梁)의 장(長)을 삼겠다 함을 들은지라 고로 시비를 씻음이라네. 소부가 가로되 예장(豫章; 木名)의 나무는 고산(高山)에 나는지라 공인(工人)이 얻지 못하거늘 자네가 세상을 피하고 싶다면 어찌 깊이 감추지 않고 이제 인간에 노닐면서 구차히 명예를 구하는가. 가서 아래에서 먹기를 기다리다간 소의 입을 더럽힐까 염려스럽네 하고는 곧 상류(上流)로 이끌어 그것을 먹게 했다.
●磻溪; 물 이름. 일명이 황하(璜河)니 지금의 섬서 보계시 동남에 있음. 수원(水源)이 남산 자곡에서 나와 북으로 흘러 위수(渭水)로 유입함. 서로 전하기를 여상(呂尙; 姜太公)이 여기에서 낚시를 드리웠다가 주문왕을 만났다 함. ▲종용록 제18칙. 주문왕(周文王)이 사냥을 나갔다가 반계의 계곡에서 강자아(姜子牙)를 보았는데 물과의 거리가 3자인 채 곧은 낚시로 물고기를 낚았다.
問十二時中如何救得生死 師曰 執鉢不須窺衆樂 履氷何得步參差 問學人擬問宗乘 師還許也無 師曰 但問 僧擬問 師乃喝出 問目前生死如何免得 師曰 把將生死來 問知有底人爲什麽道不得 師曰 汝爺名什麽 問如何是活人之劍 師曰 不敢瞎却汝 曰如何是殺人之刀 師曰 只遮箇是 問不犯鋒鋩如何知音 師曰 驢年去 問苦澁處乞師一言 師曰 可殺沈吟 曰爲什麽如此 師曰 也須相悉好 問常居正位底人 還消得人天供養否 師曰 消不得 曰爲什麽消不得 師曰 是什麽心行 曰什麽人消得 師曰 著衣喫飯底消得 師擧 稜和尙住招慶時 在法堂東角立謂僧曰 遮裏好致一問 僧便問 和尙爲何不居正位 稜曰 爲汝恁麽來 曰卽今作麽生 稜曰 用汝眼作麽 師擧畢乃曰 他家恁麽問別是箇道理 如今作麽生道 後安國曰恁麽卽大衆一時散去得也 師亦自代曰 恁麽卽大衆一時禮拜
●正位; 卽達悟之位 指法性 禪門中稱普遍存在之眞如爲正位 乃諸法之本體 相對於現象差別之傍位一語
묻되 12시 중에 어떻게 생사를 구득(救得)합니까. 사왈(師曰) 발우를 잡으면 중락(衆樂; 뭇 즐거움)을 엿봄을 쓰지 않거니와 얼음을 밟으매 어찌 걸음이 참치(參差)함을 얻으리오. 묻되 학인이 종승(宗乘)을 물으려고(擬問) 하는데 스님이 도리어 허락합니까 또는 아닙니까. 사왈 단지 물어라. 중이 물으려고 하자 스님이 할(喝)하고 쫓아내었다. 묻되 목전의 생사를 어떻게 면득(免得)합니까. 사왈 생사를 잡아 가지고(把將) 오너라. 묻되 지유(知有)하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말함을 얻지 못합니까. 사왈 너의 아버지(爺) 이름이 무엇인가. 묻되 무엇이 이 활인지검(活人之劍)입니까. 사왈 감히 너를 눈멀게 해버리지 않겠다. 가로되 무엇이 이 살인지도(殺人之刀)입니까. 사왈 다만 이것(遮箇)이 이것이다. 묻되 봉망(鋒鋩)을 범하지 않고 어떻게 지음(知音)합니까. 사왈 여년이리라(驢年去). 묻되 고삽(苦澁; 씁쓸하고 떫음)한 곳에 스님의 일언을 구걸합니다. 사왈 가히 너무 침음한다(可殺沈吟). 가로되 무엇 때문에 이와 같습니까. 사왈 또한 모름지기 상실(相悉; 자세히 알다)해야 좋으리라. 묻되 늘 정위(正位)에 거처하는 사람은 도리어 인천(人天)의 공양을 소득(消得; 소비하다)할 만합니까. 사왈 소비함을 얻지 못한다(消不得). 가로되 무엇 때문에 소비함을 얻지 못합니까. 사왈 이 무슨 심행(心行)인가. 가로되 어떤 사람이 소득(消得)합니까. 사왈 착의끽반(著衣喫飯)하는 이가 소득한다. 스님이 거(擧)했다. 릉화상(稜和尙)이 초경(招慶)에 주(住)할 때 법당의 동쪽 모퉁이에 서서 중에게 일러 가로되 이 속(遮裏)에 좋이 일문(一問)을 이룰(致) 만하다. 중이 바로 묻되 화상은 무엇 때문에 정위(正位)에 거처하지 않습니까. 릉왈(稜曰) 너를 위해 이렇게 왔다. 가로되 즉금은 어떻습니까. 릉왈 너의 눈을 써서 무엇하랴. 스님이 들어 마치고 이에 가로되 타가(他家; 家는 조사)가 이렇게 물음은 별다른 시개(是箇; 이. 이것)의 도리다. 여금에 어떻게 말하겠는가. 후에 안국(安國)이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 대중이 일시에 흩어져야(散去) 옳으리라(得也). 스님도 또한 스스로 대왈(代曰) 이러하다면 곧 대중이 일시에 예배해야 하리라.
●正位; 달오(達悟)의 위(位)니 법성을 가리킴. 선문 중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진여를 일컬어 정위라 함. 곧 제법의 본체니 현상 차별의 방위(傍位) 1어(語)에 상대됨.
襄州雲蓋山雙泉院歸本禪師〈亦曰西雙泉 以隋州有東雙泉故也〉 京兆府人也 幼出家 十六納戒念法華經 初禮雪峯 雪峯下禪床跨背而坐 師於是省覺 僧問 如何是雙泉 師曰可惜一雙眉 曰學人不會 師曰 不曾煩禹力 湍流事不知 問如何是西來的的意 師乃搊住 其僧變色 師曰 我遮裏無遮箇 師手指纖長特異于人 號手相大師
●隋州; 湖北省東北部都市隨縣的古稱 隋州南有護國守澄的道場隋城山護國院 智門光祚 守欽的道場龍居山智門寺 東四十里有雙尖山 西百二十里有大洪守遂 大洪慶預 大洪慶顯的道場大洪山(鄖山又大湖山)保壽寺等 [大明一統志六十一 大淸一通志二六七 讀史方輿紀要七十七]
양주(襄州) 운개산(雲蓋山) 쌍천원(雙泉院) 귀본선사(歸本禪師)〈또한 가로되 西雙泉이니 隋州에 東雙泉이 있기 때문의 연고다〉. 경조부(京兆府) 사람이며 어릴 적에 출가했고 16에 납계(納戒; 受戒)하고 법화경을 외웠다(念). 처음 설봉을 참례(參禮)하자 설봉이 선상에서 내려와 등에 걸터앉았다. 스님이 이에서 성각(省覺)했다. 승문(僧問) 무엇이 이 쌍천(雙泉)입니까. 사왈(師曰) 한 쌍의 눈썹이 가석(可惜)하다. 가로되 학인이 알지 못하겠습니다. 사왈 일찍이 우력(禹力)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면 단류(湍流; 여울의 흐름)의 일을 알지 못한다. 묻되 무엇이 이 서래(西來)의 적적(的的; 확실)한 뜻입니까. 스님이 이에 붙잡아 머물게 했다(搊住). 그 중이 변색(變色)하자 사왈 나의 이 속엔 이것(遮箇)이 없다. 스님은 손가락(手指)이 섬장(纖長)함이 타인과 특이(特異)했고 호가 수상대사(手相大師)다.
●隋州; 호북성 동북부 도시 수현(隨縣)의 고칭. 수주의 남쪽에 호국수징의 도량 수성산 호국원, 지문광조와 수흠의 도량 용거산 지문사가 있음. 동쪽 40리에 쌍첨산이 있고 서쪽 120리에 대홍수수ㆍ대홍경예ㆍ대홍경현의 도량 대홍산(大洪山; 운산 또 대호산) 보수사 등이 있음 [대명일통지61. 대청일통지267. 독사방여기요77].
韶州林泉和尙〈先住巘山〉 僧問 如何是塵 師曰 不覺成丘山 師謁白雲慈光大師辭出 白雲門送扶師下階曰 款款莫敎躂倒 師曰 忽然躂倒又作麽生 白雲曰 更不用扶也 師大笑而退
소주(韶州) 임천화상(林泉和尙)〈먼저 巘山에 住했다〉. 승문(僧問) 무엇이 이 티끌입니까. 사왈(師曰) 불각(不覺)에 구산(丘山)을 이룬다. 스님이 백운(白雲) 자광대사(慈光大師)를 예알해 고별하고 나가자 백운이 문송(門送)하면서 스님을 부축해 섬돌에 내려가며 가로되 관관(款款; 느리고 從容한 樣子)하여 달도(躂倒; 미끄러져 넘어짐)되게 하지 말아라. 사왈 홀연히 달도(躂倒)하면 또 어떻습니까. 백운이 가로되 다시 부축함을 쓰지 못한다. 스님이 크게 웃고 물러났다.
洛京南院和尙 問如何是法法不生 師曰 生也 有儒士博覽古今 時人呼爲張百會 一日來謁師 師曰 莫是張百會麽 曰不敢 師以手於空畫一畫曰 會麽 曰不會 師曰一尙不會 什麽處得百會來
낙경(洛京) 남원화상(南院和尙). 묻되 무엇이 이 법법(法法)이 불생(不生)입니까. 사왈(師曰) 생(生)했다. 유사(儒士)가 있어 고금을 박람(博覽)했고 시인(時人)이 호칭(呼稱)하기를 장백회(張百會)라 했다. 어느 날 와서 스님을 예알(禮謁)했다. 사왈 이 장백회가 아닌가. 가로되 불감(不敢)입니다. 스님이 손으로써 허공에 1획(畫)을 긋고 가로되 아느냐(會麽). 가로되 알지 못합니다(不會). 사왈 하나도 오히려 알지 못하거늘 어느 곳에서 백회(百會)를 얻어 왔느냐.
越州洞巖可休禪師 問如何是洞巖正主 師曰 開著 問如何是和尙親切爲人處 師曰 大海不宿屍 問如何是向上一路 師擧衣領示之 問學人遠來請師方便 師曰 方便了也
월주(越州) 동암(洞巖) 가휴선사(可休禪師). 묻되 무엇이 이 동암(洞巖)의 정주(正主)입니까. 사왈(師曰) 열렸다(開著). 묻되 무엇이 이 화상의, 친절하게 위인(爲人)하는 곳입니까. 사왈 대해(大海)는 시체를 재우지 않는다(不宿屍). 묻되 무엇이 이 향상일로(向上一路)입니까. 스님이 옷깃(衣領)을 들어 보였다. 묻되 학인이 멀리서 와 스님의 방편을 청합니다. 사왈 방편을 마쳤다(方便了也).
定州法海院行周禪師 問風恬浪靜時如何 師曰 吹倒南牆 問如何是道中寶 師曰 不露光 曰莫便是否 師曰 是卽露也
정주(定州) 법해원(法海院) 행주선사(行周禪師). 묻되 바람이 고요하고 물결이 고요할(風恬浪靜) 때 어떻습니까. 사왈(師曰) 남쪽 담장(南牆)을 불어 넘어뜨린다. 묻되 무엇이 이 도중(道中)의 보배입니까. 사왈 빛을 드러내지 않는다. 가로되 바로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왈 이는 곧 드러냄이다.
杭州龍井通禪師 處棲上座問 如何是龍井龍 師曰 意氣天然別 神筆畫不成 曰爲什麽畫不成 師曰 出群不戴角 不與類中同 曰還解行雨也無 師曰 普潤無邊際 處處皆結粒 曰還有宗門中事也無 師曰有 曰如何是宗門中事 師曰從來無形段 應物不曾虧 問如何是吹毛劍 師曰 拽出死屍著
항주(杭州) 용정통(龍井通) 선사. 처서(處棲) 상좌가 묻되 무엇이 이 용정(龍井)의 용(龍)입니까. 사왈(師曰) 의기(意氣)가 천연(天然)으로 달라 신필(神筆)로도 그림을 이루지 못한다. 가로되 무엇 때문에 그림을 이루지 못합니까. 사왈 무리(群)에서 벗어나 뿔을 이지 않았고 유중(類中; 무리 중)과 한가지가 아니다. 가로되 도리어 행우(行雨; 비를 내리다)할 줄 압니까 또는 아닙니까. 사왈 보윤(普潤; 널리 적시다)이 변제(邊際)가 없고 처처에 모두 결립(結粒; 낟알을 맺다)한다. 가로되 도리어 종문 중의 일이 있습니까 또는 없습니까. 사왈 있다. 가로되 무엇이 이 종문 중의 일입니까. 사왈 종래(從來)로 형단(形段)이 없어 사물에 응해도 일찍이 이지러지지 않는다. 묻되 무엇이 이 취모검(吹毛劍)입니까. 사왈 사시(死屍)를 끌어내어라.
漳州保福院從展禪師 福州人也 姓陳氏 年十五禮雪峯爲受業師 十八本州大中寺具戒 遊吳楚間 後歸執侍雪峯 一日忽召曰 還會麽 師欲近前 雪峯以杖拄之 師當下知歸 作禮而退 又常以古今方便詢于長慶稜和尙 稜深許之 長慶稜和尙有時云 寧說阿羅漢有三毒 不說如來有二種語 不道如來無語 只是無二種語 師曰 作麽生是如來語 曰聾人爭得聞 師曰 情知和尙向第二頭道 長慶却問 作麽生是如來語 師曰 喫茶去〈雲居錫云 什麽處是長慶向第二頭道處〉 因擧 盤山云 光境俱亡復是何物 洞山云 光境未亡復是何物 師曰 據此二尊者商量 猶未得勦絕 乃問長慶 如今作麽生道得勦絕 長慶良久 師曰 情知和尙向山鬼窟裏作活計 長慶却問 作麽生 師曰 兩手扶犁水過膝
●知歸; 識心見性 回歸心源
●勦絕; 同剿絕 滅絶 消滅
장주(漳州) 보복원(保福院) 종전선사(從展禪師). 복주(福州) 사람이며 성이 진씨(陳氏)다. 나이 15에 설봉을 예알(禮謁)하여 수업사(受業師)로 삼았고 18에 본주(本州) 대중사(大中寺)에서 구계(具戒)했다. 오초(吳楚) 사이를 유방(遊方)하다가 후에 돌아와 설봉을 집시(執侍)했다. 어느 날 홀연히 불러 가로되 도리어 아느냐. 스님이 앞으로 다가가려 하자 설봉이 주장자로써 버텼다. 스님이 당하(當下; 즉시)에 지귀(知歸)했고 작례(作禮)하고 물러났다. 또 늘 고금의 방편을 장경릉(長慶稜; 慧稜) 화상에게 물었는데(詢) 혜릉이 깊이 허가했다. 장경릉 화상이 어떤 때 이르되 차라리(寧) 아라한(阿羅漢)이 3독(毒)이 있다고 설할지언정 여래가 이종어(二種語)가 있다고 설하지 못한다. 여래가 말씀이 없다고 말함이 아니라 다만 이는 이종어가 없음이다. 사왈(師曰) 무엇이 이 여래어(如來語)인가. 가로되 농인(聾人)이 어찌 득문(得聞)하겠는가. 사왈 정지(情知; 思料)컨대 화상은 제2두(第二頭)를 향해 말했다. 장경이 도리어 묻되 무엇이 이 여래어인가. 사왈 차 먹고 가게〈雲居錫이 이르되 어느 곳이 이 장경이 제2두를 향해 말한 곳인가〉. 인하여 거(擧)했다. 반산(盤山)이 이르되 광경(光境)이 모두 망하면 다시 이 무슨 물건인가. 동산(洞山)이 이르되 광경이 망하지 않으면 다시 이 무슨 물건인가. 사왈 이 2존숙의 상량(商量)에 의거할진대 오히려 초절(勦絕)을 얻지 못했다. 이에 장경에게 묻되 여금에 어떻게 말해야 초절을 얻는가. 장경이 양구(良久)했다. 사왈 정지(情知)컨대 화상은 산귀굴(山鬼窟) 속을 향해 활계(活計)를 짓는다. 장경이 도리어 묻되 어떠한가. 사왈 두 손으로 쟁기를 부지(扶支)하니 물이 무릎에 이른다(過).
●知歸; 식심(識心)하고 견성하여 심원(心源)으로 회귀(回歸)함.
●勦絕; 초절(剿絕)과 같음. 멸절(滅絶). 소멸(消滅).
一日長慶問 見色便見心 還見船子麽 師曰見 曰船子且置 作麽生是心 師却指船子〈歸宗柔別云 和尙只解問人〉 雪峯謂衆曰 諸上座 到望州亭與上座相見了 到烏石嶺與上座相見了 到僧堂前與上座相見了 師擧問鵝湖曰 僧堂前相見卽且置 只如望州亭烏石嶺什麽處是相見 鵝湖驟步入方丈 師歸僧堂〈東禪齊云 此二尊宿會處 是相見不相見 試斷看〉
●望州亭; 在於雪峰山內
●烏石嶺; 雪峰山內有烏石嶺
어느 날 장경(長慶)이 묻되 색(色)을 보면 바로 심(心)을 본다. 도리어 선자(船子; 배. 子는 조사)를 보느냐. 사왈(師曰) 본다. 가로되 선자는 그래 두고 무엇이 이 심인가. 스님이 도리어 선자를 가리켰다〈歸宗柔가 別云 화상은 다만 사람에게 물을 줄만 아는가〉. 설봉이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제상좌(諸上座)여, 망주정(望州亭)에 이르러 상좌와 상견했고 오석령(烏石嶺)에 이르러 상좌와 상견했고 승당(僧堂) 앞에 이르러 상좌와 상견했다. 스님이 들어 아호(鵝湖)에게 물어 가로되 승당 앞에서 상견함은 곧 그래 두고 지여(只如) 망주정(望州亭)과 오석령(烏石嶺)의 어느 곳에서 이 상견했는가. 아호가 걸음을 달려(驟步) 방장에 들어갔다. 스님이 승당으로 돌아갔다〈東禪齊가 이르되 이 2존숙이 만난 곳은 이 상견인가, 상견이 아닌가. 시험 삼아 판단해 보아라〉.
●望州亭; 설봉산 안에 있음.
●烏石嶺; 설봉산 안에 오석령이 있음.
梁貞明四年丁丑歲 漳州刺史王公欽承道譽 創保福禪苑迎請居之 開堂日王公禮跪三請 躬自扶掖升堂 師曰 須起箇笑端作麽 然雖如此再三不容推免 諸仁者 還識麽 若識得便與古佛齊肩 時有僧出方禮拜 師曰 晴乾不肯去要待雨淋頭 僧乃申問曰 郡守崇建精舍大闡眞風 便請和尙擧揚宗敎 師曰 還會麽 曰恁麽卽群生有賴也 師曰 莫把那不淨塗污人好 僧出禮拜 師曰 大德好與麽莫覆却船子 問泯默將何爲則 師曰 落在什麽處 曰不會 師曰 𥋙〈五合切〉睡漢出去 師見一僧乃以杖子打露拄 又打其僧頭 僧作痛聲 師曰 那箇爲什麽不痛 僧無對〈玄覺代云 貪行拄杖〉
●晴乾不肯去要待雨淋頭; 暗指禪機已失 爲時已晩
●塗污; 侮辱 染污
●泯默; 寂然無聲 寂然無言
양(梁) 정명(貞明) 4년(四年; 마땅히 三年으로 지어야 함) 정축세(丁丑歲; 917) 장주자사(漳州刺史) 왕공(王公)이 도예(道譽)를 흠승(欽承; 흠모하며 承受)하여 보복선원(保福禪苑)을 창건하고 영청(迎請)하여 거주하게 했다. 개당일(開堂日)에 왕공이 예궤(禮跪)하며 삼청(三請)하고 몸소 스스로 부액(扶掖; 부축하다)하여 승당(升堂)케 했다. 사왈(師曰) 저(箇) 소단(笑端)을 일으킴을 써서 무엇하겠는가. 그러하여 비록 이와 같으나 재삼(再三)엔 퇴면(推免; 미루고 면함)을 용납하지 못한다. 제인자(諸仁者)여, 도리어 아느냐. 만약 식득(識得)하면 바로 고불과 어깨를 가지런히 할 것이다. 때에 어떤 중이 나와 금방(今方; 方) 예배하자 사왈 하늘이 개였을 적엔 떠남을 긍정하지 않더니 비 쏟아짐을 기다리려고 하는가(晴乾不肯去要待雨淋頭). 중이 이에 물음을 펴(申問) 가로되 군수(郡守)가 정사(精舍)를 숭건(崇建; 높이 건축)하여 진풍(眞風)을 크게 열었습니다. 바로 화상에게 청하오니 종교를 거양(擧揚)하십시오. 사왈 도리어 아느냐. 가로되 이러하시다면 곧 군생(群生)이 신뢰함이 있을 것입니다. 사왈 저 부정(不淨)을 가지고 사람을 도오(塗污)하지 말아야 좋으리라. 중이 나와서 예배했다. 사왈 대덕(大德)은 이러함이 좋나니(好與麽) 선자(船子; 배)를 엎어버리지 말아라. 묻되 민묵(泯默)하거늘 무엇을 가지고 법칙을 삼습니까. 사왈 어느 곳에 떨어져 있느냐. 가로되 알지 못합니다. 사왈 압(𥋙; 睡)〈五合切〉수한(睡漢)아 나가거라. 스님이 1승을 보자 이에 주장자로써 노주(露拄)를 때리고 또 그 중의 머리를 때렸다. 중이 아픈 소리를 짓자 사왈 나개(那箇)는 무엇 때문에 아프지 않느냐. 중이 대답이 없었다〈玄覺이 代云 貪行하는 拄杖입니다〉.
●晴乾不肯去要待雨淋頭; 선기를 이미 잃고 시각이 이미 늦음이 됨을 몰래 가리킴.
●塗污; 모욕(侮辱). 염오(染污).
●泯默; 적연(寂然)하여 소리가 없음. 적연하여 말이 없음.
問摩騰入漢一藏分明 達磨西來將何指示 師曰 上座行脚事作麽生 曰不會 師曰 不會會取好 莫傍家取人處分 若是久在叢林 麁委些子遠近 可以隨處任眞 其有初心後學未知次序 山僧所以不惜口業 向汝道塵劫來事只在如今 還會麽 然佛法付囑國王大臣郡守 昔同佛會今方如是 若是福祿榮貴則且不論 只如當時受佛付囑底事 還記得麽 若識得便與千聖齊肩 儻未識得 直須諦信此事不從人得 自己亦非 言多去道轉遠 直道言語道斷心行處滅 猶未是在 久立珍重
●隨處任眞; 亦作隨方任眞 謂得道者具平常心 處處事事順其自然 禪家認爲如此可養護悟心 也體現道法的日常運用
●言語道斷; 讚歎眞理深妙不可說之用語 常與心行處滅一語連用
●心行處滅; 心行之處滅絶 謂不及思慮分別之境地 ▲大乘起信論義記中本 離心緣者 非意言分別故心行處滅 非思慧境
묻되 마등(摩騰; 迦葉摩騰)이 입한(入漢)하매 일장(一藏)이 분명하거니와 달마가 서래하여 무엇을 가지고 지시했습니까. 사왈(師曰) 상좌의 행각사(行脚事)가 무엇인가(作麽生). 가로되 알지 못합니다(不會). 사왈 알지 못함을 회취(會取)해야 좋나니 방가(傍家)에서 타인의 처분(處分)을 취하지 말아라. 만약 이, 총림에 오래 있었다면 사자(些子; 些少)의 원근(遠近)을 대강 알아(麁委) 가이(可以) 수처임진(隨處任眞)하려니와 그 초심(初心)과 후학(後學)이 차서(次序; 차례의 순서)를 알지 못함이 있어 산승이 소이로 구업(口業)을 아끼지 않고 너희를 향해 말하되 진겁래사(塵劫來事)가 다만 여금에 있다 하노니 도리어 아느냐. 그러하여 불법을 국왕ㆍ대신ㆍ군수(郡守)에게 부촉(付囑)한다 했나니 옛적에 불회(佛會)에 동참(同參; 同)한지라 지금 바야흐로 이와 같다. 만약 이 복록(福祿)과 영귀(榮貴)라면 곧 또 논하지 않겠거니와 지여(只如) 당시에 부처의 부촉(付囑)을 받은 일을 도리어 기득(記得)하는가. 만약 식득(識得)한다면 바로 천성(千聖)과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하겠지만 만일(儻) 식득하지 못한다면 바로 모름지기 차사(此事)는 타인으로 좇아 얻지 않는 줄 체신(諦信; 確信)해야 하며 자기도 또한 아니다. 말이 많으면 도와 떨어짐이 더욱(轉) 멀며 바로 말하되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言語道斷) 심행의 처소가 멸한다(心行處滅) 하더라도 오히려 옳지 않다(未是在). 구립(久立)했다. 진중(珍重)하라.
●隨處任眞; 또한 수방임진(隨方任眞)으로 지음. 이르자면 도를 얻은 사람이 평상심을 갖추어 처처사사(處處事事)에 그 자연에 순응함임. 선가에서 인식하기를 이와 같아야 가히 오심(悟心)을 양호(養護)하고 또 도법의 일상의 운용을 체현(體現)한다 함.
●言語道斷; 진리는 심묘(深妙)하여 가히 설하지 못함을 찬탄하는 용어임. 늘 심행처멸(心行處滅) 1어(語)와 연용(連用)함.
●心行處滅; 심행의 처소가 멸절함이니 이르자면 사려와 분별이 미치지 아니하는 경지임. ▲대승기신론의기중본. 심연(心緣)을 여읜다는 것은 의언(意言)과 분별이 아닌 고로 심행처멸(心行處滅)이니 사혜(思慧)의 경계가 아님.
異日上堂大衆雲集 師曰 有人從佛殿後過 見是張三李四 從佛殿前過 爲什麽不見 且道佛法利害在什麽處 僧曰 爲有一分麁境所以不見 師乃叱之 自代曰 若是佛殿卽不見 僧曰 不是佛殿還可見否 師曰 不是佛殿見什麽 問十二時中如何據驗 師曰 恰好據驗 曰學人爲什麽不見 師曰 不可更揑目去也 問主伴重重極十方而齊唱 如何是極十方而齊唱 師曰 汝何不敎別人問 問因言辯意時如何 師曰 因什麽言 僧低頭良久 師曰 擊電之機徒勞佇思 問欲入無爲海 須乘般若船 如何是般若船 師曰 便請 曰便恁麽進去時如何 師曰 也是涅槃堂裏漢 師見僧喫飯乃托鉢曰 家常 僧曰 和尙是什麽心行
●張三李四; 假設的姓名排行 泛指某人 某些人
●據驗; 證據 憑據
다른 날에 상당하자 대중이 운집했다. 사왈(師曰) 어떤 사람이 불전(佛殿) 뒤로 좇아 지나가면 보매 이 장삼이사(張三李四)이거니와 불전 앞으로 좇아 지나가면 무엇 때문에 보지 못하느냐. 그래 말하라, 불법의 이해(利害)가 어느 곳에 있느냐. 승왈(僧曰) 일분(一分)의 추경(麁境; 거친 경계)이 있기 때문에 소이로 보지 못합니다. 스님이 이에 꾸짖었다(叱之). 스스로 대왈(代曰) 만약 이 불전이라면 곧 보지 못한다. 승왈 이 불전이 아니라면 도리어 가히 봅니까. 사왈 이 불전이 아니거늘 무엇을 보느냐. 묻되 12시 중에 어떻게 거험(據驗)합니까. 사왈 흡호(恰好) 거험이다. 가로되 학인은 무엇 때문에 보지 못합니까. 사왈 다시 날목(揑目)함은 옳지 못하다. 묻되 주반(主伴)이 겹겹이(重重) 시방(十方)에 다하여(極) 제창(齊唱)한다 하니 무엇이 이 시방에 다하여 제창함입니까. 사왈 너는 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묻게 하지 않느냐. 묻되 말로 인해 뜻을 분변할(因言辯意) 때 어떻습니까. 사왈 무슨 말을 인하느냐. 중이 머리를 숙이고 양구(良久)했다. 사왈 격전지기(擊電之機)인지라 저사(佇思)는 헛수고(徒勞)다. 묻되 무위해(無爲海)에 들어가고 싶으면 모름지기 반야선을 타야 합니다. 무엇이 이 반야선입니까. 사왈 바로 청한다. 가로되 바로 이러히 갈 때 어떻습니까. 사왈 또한 이 열반당 속의 사내(涅槃堂裏漢)다. 스님이, 중이 끽반(喫飯)함을 보고 이에 발우를 받들며(托鉢) 가로되 가상(家常; 구걸하는 소리). 승왈 화상은 이 무슨 심행(心行)입니까.
●張三李四; 가설적(假設的) 성명의 배행(排行; 순서대로 줄을 서다)이니 널리 모인(某人)ㆍ모사인(某些人; 몇몇 사람)을 가리킴.
●據驗; 증거(證據). 빙거(憑據).
有尼到參 師曰 阿誰 侍者報曰 覺師姑 師曰 旣是覺師姑用來作麽 尼曰 仁義道中卽不無 師自別云 和尙是什麽心行〈玄覺因擧 法眼見僧擔土 乃以一塊土放擔上云 吾助汝 僧云 謝和尙慈悲 法眼不肯 有一僧別云 和尙是什麽心行 法眼便休 玄覺徵云 此三則語一般別有道理 什麽處是心行處〉 閩帥遣使送朱記到 師上堂曰 去卽印住住卽印破 僧曰 不去不住用印奚爲 師乃打之 僧曰 恁麽卽山鬼窟裏全因今日也 師默而已〈玄覺云 什麽處是山鬼窟 叢林中道 住在不去不住處 便是山鬼窟 所以打破 如此商量正是鬼窟 且道 保福打伊意作麽生〉 師問僧 什麽處來 曰江西 師曰 學得底那 曰拈不出 師曰 作麽生〈法眼別云 謾語〉 僧無對
●師姑; 指年高德重之尼師 於宋元明淸間 師姑乃爲一般民間對尼師之泛稱
●朱記; 紅色印記 古代以膠泥封公文書簡 隋唐後改用紅色顔料塗印面 鈐於封口 稱朱記 [百度漢語]
어떤 니(尼)가 도참(到參)했다. 사왈(師曰) 누구인가(阿誰). 시자가 알려 가로되 각사고(覺師姑)입니다. 사왈 이미 이 각사고(覺師姑)이거늘 옴을 써서 무엇하겠는가. 니왈(尼曰) 인의(仁義)의 도중(道中)에선 곧 없지 않습니다. 스님이 스스로 별운(別云)하되 화상은 이 무슨 심행(心行)입니까〈玄覺이 인하여 擧했다. 法眼이 중을 보매 흙을 짊어졌다. 이에 한 덩어리의 흙을 짐 위에 놓고 이르되 내가 너를 도운다. 僧云 화상의 자비에 감사합니다. 법안이 不肯했다. 1승이 있어 別云 화상은 이 무슨 心行입니까. 법안이 바로 쉬었다. 玄覺이 徵云 이 三則語가 一般인가 달리 道理가 있는가. 어느 곳이 이 心行處인가〉. 민수(閩帥)가 사자(使者)를 보내 주기(朱記)를 보내어 이르렀다. 스님이 상당하여 가로되 떼면(去) 곧 인(印)이 머물고(住) 머물면 곧 인(印)이 깨어진다. 승왈(僧曰) 떼지 않고 머물지 않는다면 인(印)을 써서 무엇하겠습니까(奚爲). 스님이 이에 때렸다. 승왈 이러하시다면 곧 산귀굴(山鬼窟) 속이 전부 금일 때문일 것입니다. 스님이 묵연할 따름이었다〈玄覺이 이르되 어느 곳이 이 山鬼窟인가. 총림 중에서 말하되 떼지 않고 머물지 않는 곳에 住在함이 바로 이 산귀굴이다. 소이로 타파했다. 이와 같이 商量하면 바로 이 귀굴이다. 그래 말하라, 保福이 그를 때린 뜻이 무엇인가〉. 스님이 중에게 묻되 어느 곳에서 오느냐. 가로되 강서(江西)입니다. 사왈 배워 얻은 것인가(學得底那). 가로되 집어내지 못합니다(拈不出). 사왈 어찌하여서이냐(作麽生)〈法眼이 別云 謾語(헛된 말. 謾은 虛. 枉. 徒)다〉. 중이 대답이 없었다.
●師姑; 나이가 높고 덕이 무거운 니사(尼師)를 가리킴. 송ㆍ원ㆍ명ㆍ청 사이에선 사고는 곧 일반 민간에서 니사(尼師)에 대한 범칭(泛稱)이 되었음.
●朱記; 홍색의 인기(印記)니 고대 교니(膠泥)로 공문서간(公文書簡)을 봉(封)했음. 수ㆍ당 후에 홍색 안료(顔料)로 개용(改用)하여 인면(印面)에 바르고 봉구(封口)를 잠궜으며 명칭이 주기(朱記)임 [백도한어].
師擧洞山眞讚云 徒觀紙與墨 不是山中人 僧問 如何是山中人 師曰 汝試貌掠看 曰若不黠兒幾成貌掠 師曰 汝是黠兒 曰和尙是什麽心行 師曰 來言不豐 師見僧數錢 乃展手曰 乞我一錢 曰和尙因何到恁麽地 師曰 我到恁麽地 曰若到恁麽地 將取一文去 師曰 汝爲何到恁麽地 師問僧什麽處來 曰江西觀音 師曰 還見觀音麽 曰見 師曰 左邊見右邊見 曰見時不歷左右〈法眼別云 如和尙見〉 問如何是入火不燒入水不溺 師曰 若是水火卽被燒溺 師問飯頭 鑊闊多少 曰和尙試量看 師以手作量勢 曰 和尙莫謾某甲 師曰 却是汝謾我 問欲達無生路應須識本源 如何是本源 師良久却問侍者 適來僧問什麽 其僧再擧 師乃喝出 曰我不患聾 問學人近入叢林 乞師全示入路 師曰 若敎全示 我却禮拜汝
●貌掠; 同邈掠 猶描摹 邈 描繪 邈 同描 貌
●黠兒; 聰慧的人 兒 後綴
스님이 거(擧)했다. 동산(洞山)의 진찬(眞讚)에 이르되 도연히 종이와 먹을 보나니 이 산중(山中)의 사람이 아니다. 승문(僧問) 무엇이 이 산중의 사람입니까. 사왈(師曰) 네가 시험 삼아 막략(貌掠)해 보아라. 가로되 만약 힐아(黠兒)가 아니었다면 거의 막략(貌掠)을 이룰 뻔했습니다. 사왈 너는 이 힐아다. 가로되 화상은 이 무슨 심행(心行)입니까. 사왈 내언(來言)이 풍족하지 않다. 스님이 중을 보매 돈을 세었다. 이에 손을 펴고 가로되 나의 일전(一錢)을 구걸한다. 가로되 화상은 무엇 때문에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사왈 내가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다. 가로되 만약 이러한 지경에 이르셨다면 다만(將) 1문(文)을 취하여 가십시오. 사왈 너는 무엇 때문에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는가. 스님이 중에게 묻되 어느 곳에서 오느냐. 가로되 강서(江西) 관음(觀音)입니다. 사왈 도리어 관음을 보았느냐. 가로되 보았습니다. 사왈 좌변(左邊)을 보았느냐, 우변을 보았느냐. 가로되 볼 때 좌우를 겪지(歷) 않습니다〈法眼이 別云 화상의 봄과 같습니다〉. 묻되 무엇이 이 입화(入火)해도 타지 않고 입수(入水)해도 빠지지 않음입니까. 사왈 만약 이 수화(水火)라면 곧 소닉(燒溺)을 입는다. 스님이 반두(飯頭)에게 묻되 가마솥의 너비가 얼마인가(鑊闊多少). 가로되 화상이 시험 삼아 재어 보십시오. 스님이 손으로써 재는 자세(姿勢)를 지었다. 가로되 화상은 모갑을 속이지 마십시오. 사왈 도리어 이 네가 나를 속이는구나. 묻되 무생로(無生路)에 도달하려면 응당 꼭 본원(本源)을 알아야 한다 하니 무엇이 이 본원입니까. 스님이 양구(良久)하고 도리어 시자에게 묻되 적래(適來)에 중이 무엇을 물었느냐. 그 중이 재거(再擧)하자 스님이 이에 할(喝)하고 쫓아내었다. 가로되 나는 귀머거리의 질환이 아닙니다. 묻되 학인은 요사이 총림에 들었으니 스님이 입로(入路)를 전시(全示)하시기를 구걸합니다. 사왈 만약 전시(全示)하게 한다면 내가 도리어 너에게 예배해야 한다.
●貌掠; 막략(邈掠)과 같음. 묘마(描摹; 描寫)와 같음. 막(邈)은 묘회(描繪: 묘사하여 그림)니 막(邈)은 묘(描)ㆍ막(貌; 묘사하다)과 같음.
●黠兒; 총혜(聰慧)한 사람. 아(兒)는 후철(後綴).
師見一僧乃曰 汝作什麽業來 得恁麽長大 曰和尙短多少 師蹲身作短勢 僧曰 和尙莫謾人好 師曰 却是汝謾我 師令侍者屈隆壽長老云 但獨自來 莫將侍者來 壽曰 不許將來爭解離得 師曰 大殺恩愛 壽無對 師自代曰 更謝和尙上足傳示 師住保福僅一紀 學衆常不下七百 其接機利物不可備錄 閩帥禮重爲奏命服 唐天成三年戊子示有微疾 僧入丈室問訊 師謂之曰 吾與汝相識年深 有何方術相救 僧曰 方術甚有 聞說和尙不解忌口〈法燈別云 和尙解忌口麽〉 又謂衆曰 吾旬日來氣力困劣別無他 只是時至 僧問 時旣至矣 師去卽是住卽是 師曰道 曰恁麽卽某甲不敢造次 師曰 失錢遭罪 言訖跏趺告寂 卽三月二十一日也
●命服; 原指周代天子賜予元士至上公九種不同命爵的衣服 後泛指官員及其配偶按等級所穿的制服 [百度漢語]
●失錢遭罪; 遺失金錢而又遭罪科 喩指厄難上更逢苦難
스님이 1승을 보고 이에 가로되 너는 무슨 업을 지어 왔기에 이렇게 장대(長大)함을 얻었느냐. 가로되 화상은 짧기가 얼마입니까(短多少). 스님이 몸을 쭈구리며(蹲) 짧은 자세를 지었다. 승왈(僧曰) 화상은 사람을 속이지 말아야 좋을 것입니다. 사왈 도리어 이 네가 나를 속이는구나. 스님이 시자를 시켜 융수(隆壽) 장로를 굴(屈; 請)하게 하면서 이르되 단지 독자(獨自)로 오고 시자를 데리고 오지 말라 했다. 수왈(壽曰) 데리고 옴을 허락하지 않으면 어찌 이득(離得; 여의다)할 줄 알겠는가. 사왈 은애가 너무 심하다(大殺恩愛). 융수가 대답이 없었다. 스님이 스스로 대왈(代曰) 화상의 상족(上足)이 전시(傳示)함에 다시 감사한다. 스님이 보복(保福)에 주(住)한 지 거의 일기(一紀; 12년)였고 학중(學衆)이 늘 7백 아래가 아니었다. 그 접기(接機)하여 이물(利物)한 것을 가히 갖추어 기록하지 못한다. 민수(閩帥)가 예중(禮重; 예의로 존중)했고 명복(命服)을 주청(奏請)했다. 당 천성(天成) 3년 무자(戊子; 928)에 미질(微疾)이 있음을 보였다. 중이 장실(丈室)에 들어가 문신(問訊)하자 스님이 일러 가로되 나와 네가 서로 안 해가 깊으니 어떤 방술(方術)이 있어 상구(相救)하겠는가. 승왈 방술이 심히 있긴 하지만 말함을 듣건대 화상은 기구(忌口)할 줄 알지 못한다 하더이다〈法燈이 別云 화상은 忌口할 줄 아십니까〉. 또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내가 순일(旬日) 래에 기력이 곤렬(困劣; 虛弱)함은 달리 다른 게 없고 다만 이, 때가 이른 것이다(時至). 승문(僧問) 때가 이미 이르렀다면 스님이 떠남이 곧 옳습니까, 머묾이 곧 옳습니까. 사왈 말하라.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 모갑이 감히 조차(造次; 경솔)하지 못합니다. 사왈 돈 잃고 죄를 만났다(失錢遭罪). 말을 마치자 가부(跏趺)하고 고적(告寂)했다. 곧 3월 21일이다.
●命服; 원래는 주대(周代)에 천자가 원사(元士)에서 상공(上公)에 이르기까지, 9종의 같지 않은 명작(命爵; 命名한 작위)에게 내려 주는 의복을 가리켰음. 후에 널리 관원 및 그의 배우(配偶)가 등급을 살펴 입었던 제복(制服)을 가리켰음 [백도한어].
●失錢遭罪; 금전을 잃어버리고 또 죄과(罪科; 죄와 허물)를 만남이니 액난상에 다시 고난을 만남을 비유로 가리킴.
泉州睡龍山道溥號弘敎大師 福州福唐人也 姓鄭氏 寶林院受業 自雪峯印心住五峯 上堂曰 莫道空山無秖待 便歸方丈 僧問 凡有言句不出大千頂 未審頂外事如何 師曰 凡有言句不是大千頂 曰如何是大千頂 師曰 摩醯首羅天猶是小千界 問初心後學近入叢林 方便門中乞師指示 師敲門枋 僧曰 向上還有事也無 師曰有 曰如何是向上事 師再敲門枋
●秖待; 應待 秖 與秪祇用同
●小千界; 小千世界 古代印度人以四大洲及日月諸天爲一小世界 合一千小世界爲小千世界
천주(泉州) 수룡산(睡龍山) 도부(道溥) 호 홍교대사(弘敎大師). 복주(福州) 복당(福唐) 사람이며 성이 정씨(鄭氏)다. 보림원(寶林院)에서 수업했고 설봉에서 인심(印心)함으로부터 오봉(五峯)에 주(住)했다. 상당하여 가로되 공산(空山)에 지대(秖待)가 없다고 말하지 말아라. 바로 방장으로 돌아갔다. 승문(僧問) 무릇 언구가 있음은 대천(大千; 삼천대천세계)의 정수리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미심하오니 정수리 밖의 일은 어떻습니까. 사왈(師曰) 무릇 언구가 있음음 이 대천(大千)의 정수리가 아니다. 가로되 무엇이 이 대천의 정수리입니까. 사왈 마혜수라천(摩醯首羅天)도 오히려 이 소천계(小千界)다. 묻되 초심(初心)의 후학(後學)이 요사이 총림에 들었습니다. 방편문(方便門) 가운데서 스님의 지시를 구걸합니다. 스님이 문방(門枋; 門地枋)을 두드렸다. 승왈(僧曰) 향상(向上)에 도리어 일이 있습니까 또는 없습니까. 사왈 있다. 가로되 무엇이 이 향상사입니까. 스님이 다시 문방을 두드렸다.
●秖待; 응대(應待). 지(秖)는 지(秪)ㆍ지(祇)와 용이 같음.
●小千界; 소천세계(小千世界)니 고대 인도인은 4대주(大洲) 및 일월과 제천(諸天)을 1소세계(小世界)로 삼았고 1천 소세계를 합하여 소천세계로 삼았음.
杭州龍興宗靖禪師 台州人也 初參雪峯密承宗印 乃自誓充飯頭服勞逾十載 嘗於衆堂中袒一膊釘簾 雪峯覩而記曰 汝向後住持有千僧 其中無一人衲子也 師悔過辭歸故鄕住六通院 錢王命居龍興寺 有衆千餘唯三學講誦之徒 果如雪峯所誌 周廣順初年八十一 錢王請於寺之大殿演無上乘 黑白騈擁 僧問 如何是六通奇特之唱 師曰 天下擧去 問如何是六通家風 師曰 一條布衲一斤有餘 僧問 如何是學人進前一路 師曰 誰敢謾汝 曰豈無方便 師曰 早是屈抑也 問如何是和尙家風 師曰 早朝粥齋時飯 曰更請和尙道 師曰 老僧困 曰畢竟作麽生 師大笑而已 錢王特加禮重屢延入府 以始住院署六通大師 顯德元年甲寅季冬月示滅 壽八十四 塔于大慈山
●屈抑; 枉屈 壓抑
항주(杭州) 용흥(龍興) 종정선사(宗靖禪師). 태주(台州) 사람이다. 설봉을 초참(初參)하여 종인(宗印; 선종의 心印)을 몰래 승수(承受)했다. 이에 자서(自誓)하여 반두(飯頭)에 충당(充當)되어 복로(服勞)하기 10재(載)가 넘었다(逾). 일찍이 중당(衆堂) 중에서 한 팔뚝을 드러내고(袒) 발(簾)에 못질했는데 설봉이 보고서 기(記; 예언)하여 가로되 너는 향후에 주지하면서 천승(千僧)이 있겠지만 그 중에 한 사람의 납자(衲子)도 없으리라. 스님이 회과(悔過)하고 고별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육통원(六通院)에 주(住)했다. 전왕(錢王)이 명하여 용흥사(龍興寺)에 거주했는데 대중이 천여(千餘) 있었으나 오직 삼학(三學)을 강송(講誦)하는 무리(徒)였다. 과연 설봉이 지(誌; 예언)한 바와 같았다. 주(周) 광순(廣順; 951-954) 초 나이가 81이었고 전왕(錢王)이 청해 사원의 대전(大殿)에서 무상승(無上乘; 大乘)을 연설했는데 흑백(黑白; 승속)이 변옹(騈擁; 나란히 에워 쌈)했다. 승문(僧問) 무엇이 이 육통(六通)의 기특한 창(唱)입니까. 사왈(師曰) 천하가 들어 간다(擧去). 묻되 무엇이 이 육통의 가풍입니까. 사왈 일조(一條; 한 가닥)의 포납(布衲)이 1근 남짓이다(一斤有餘). 승문 무엇이 이 학인이 진전(進前)할 일로(一路)입니까. 사왈 누가 감히 너를 속이겠는가. 가로되 어찌 방편이 없겠습니까. 사왈 벌써 이는 굴억(屈抑)이다. 묻되 무엇이 이 화상의 가풍입니까. 사왈 조조(早朝)에 죽(粥)이며 재시(齋時)에 밥이다. 가로되 화상의 말씀을 다시 청합니다. 사왈 노승이 곤(困)하다. 가로되 필경 어떻습니까. 스님이 대소(大笑)할 따름이었다. 전왕(錢王)이 예중(禮重)을 특별히 더했고 자주 맞이해 입부(入府)했다. 처음 주(住)한 사원으로써 육통대사(六通大師)로 서(署; 署號)했다. 현덕(顯德) 원년 갑인(甲寅; 954) 계동월(季冬月; 12월) 시멸(示滅)했고 나이는 84며 대자산(大慈山)에 탑을 세웠다.
●屈抑; 왕굴(枉屈; 歪曲. 違背). 압억(壓抑).
福州南禪契璠禪師 上堂曰 若是名言妙句諸方總道了也 今日衆中還有超第一義者 致得一句麽 若有卽不孤負於人 時有僧問 如何是第一義 師曰 何不問第一義 曰見問 師曰 已落第二義也 問古佛曲調請師和 師曰 我不和汝雜亂底 曰未審爲什麽人和 師曰 什麽處去來
복주(福州) 남선(南禪) 계번선사(契璠禪師). 상당하여 가로되 만약 명언묘구(名言妙句)라면 제방에서 모두 말했다. 금일 중중(衆中)에서 도리어 제1의(第一義)를 초월할 자가 있다면 1구(一句)를 치득(致得; 이르게 하다)하라. 만약 있다면 곧 사람을 저버리지(孤負) 않으리라. 때에 어떤 중이 묻되 무엇이 이 제1의입니까. 사왈(師曰) 왜 제1의를 묻지 않느냐. 가로되 현재 묻습니다(見問). 사왈 이미 제2의(第二義)에 떨어졌다. 묻되 고불의 곡조에 스님의 창화(唱和; 和)를 청합니다. 사왈 나는 너의 잡란한 것(雜亂底)에 창화하지 않겠다. 가로되 미심하오니 어떤 사람을 위해 창화하겠습니까. 사왈 어느 곳에 갔다 왔느냐(什麽處去來).
越州諸暨縣越山師鼐號鑒眞禪師 初參雪峯而染指 後因閩王請於淸風樓齋 坐久 擧目忽覩日光 豁然頓曉 而有偈曰 淸風樓上赴官齋 此日平生眼豁開 方知普通年遠事 不從葱嶺路將來 歸呈雪峯 雪峯然之 僧問 如何是佛身 師曰 汝問那箇佛身 曰釋伽佛身 師曰 舌覆三千界 師臨終時集衆 示一偈曰 眼光隨色盡 耳識逐聲消 還源無別旨 今日與明朝 偈畢跏趺而逝
●染指; 謂略嘗於禪旨 稍有體會
●官齋; 官府所行之齋食
●普通年遠事; 指達磨祖師西來事
●耳識; 六識之一 由耳根生起分別聲境者
월주(越州) 제기현(諸暨縣) 월산(越山) 사내(師鼐) 호 감진선사(鑒眞禪師). 처음은 설봉을 참해 염지(染指)했고 후에 민왕(閩王)이 청풍루(淸風樓)의 재(齋)에 청함으로 인해 앉음이 오래였는데 눈을 들어 홀연히 일광을 보다가 활연(豁然)하며 돈효(頓曉; 돈오)했다. 게가 있어 가로되 청풍루 위에서 관재(官齋)에 다다라/ 이 날에 평생의 눈이 휑하게 열렸다/ 비로소 알았네 보통년의 먼 일(普通年遠事)이/ 총령(葱嶺)의 길을 좇아 가져온 게 아님을. 돌아와 설봉에게 보이자 설봉이 그렇다 하였다. 승문(僧問) 무엇이 이 불신(佛身)입니까. 사왈(師曰) 너는 어느 불(那箇佛)의 몸(身)을 묻느냐. 가로되 석가불(釋伽佛)의 몸입니다. 사왈 혀가 삼천계(三千界)를 덮는다. 스님이 임종 시(時) 대중을 모아 1게를 보여 가로되 안광(眼光)은 색 따라 다하고/ 이식(耳識)은 소리 쫓아 사라진다(消)/ 환원(還源)에 별지(別旨)가 없나니/ 금일과 명조(明朝)로다. 게를 마치자 가부(跏趺)하고 떠났다.
●染指; 이르자면 간략히 선지(禪旨)를 맛봄. 조금 체회(體會)함이 있음.
●官齋; 관부(官府)에서 행하는 바의 재식(齋食).
●耳識; 6식의 하나. 이근(耳根)으로 말미암아 성경(聲境)을 분별함을 생기(生起)하는 것.
●普通年遠事; 달마조사가 서래한 일을 가리킴.
南嶽金輪可觀禪師 福州福唐人也 姓薛氏 依石佛寺齊合禪師披剃 戒度旣圓 便參雪峯 雪峯曰 近前 師方近前作禮 雪峯擧足蹋之 師忽然冥契 師事十二載 復歷叢林止南嶽法輪峯 師上堂謂衆曰 我在雪峯遭他一蹋 直至如今眼不開 不知是何境界 僧問 如何是西來意 師曰 不是 大衆夜參後下堂 師召曰大衆 衆迴首 師曰 看月 大衆看月 師曰月似彎弓少雨多風 衆無對 問古人道 毘盧有師法身有主 如何是毘盧師法身主 師曰 不可床上安床 問如何是日用事 師拊掌三下 僧曰 學人未領此意 師曰 更待什麽 問從上宗乘如何爲人 師曰 我今日未喫茶 曰請師指示 師曰 過也 問正則不問請師傍指 師曰 抱取猫兒去 師問僧 什麽處來 曰華光 師卽托出閉門 僧無對 問路逢達道人 不將語默對 未審將何對 師曰 咄出去 師問僧 作麽生是覿面事 曰請師鑒 師曰 恁麽道還當麽 曰故爲卽不可 師曰 別是一著 問如何是靈源一路 師曰 蹋過作麽 雪峯院主有書來招師曰 山頭和尙年尊也 長老何不再入嶺一轉 師迴書曰 待山頭和尙別有見解卽入嶺 有僧問 如何是雪峯見解 師曰 我也驚
●一著; 本爲圍棋用語 猶言一事也 又一回一次也 又稱一著子
남악(南嶽) 금륜(金輪; 金輪院) 가관선사(可觀禪師). 복주(福州) 복당(福唐) 사람이며 성이 설씨(薛氏; 저본에 蘇氏로 지었음)다. 석불사 제합선사(齊合禪師)에게 의지해 피체(披剃)했고 계도(戒度; 戒波羅蜜)가 이미 원만하자 바로 설봉을 참했다. 설봉이 가로되 앞으로 다가오너라. 스님이 바야흐로 앞으로 다가가 작례(作禮)하는데 설봉이 발을 들어 밟았다. 스님이 홀연히 명계(冥契; 가만히 계합)했고 사사(師事)하기 12재(載)였다. 다시 총림을 경력(經歷)하다가 남악(南嶽) 법륜봉(法輪峯)에 머물렀다. 스님이 상당하여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내가 설봉에 있으면서 그의 한 번 밟음을 만나 바로 여금에 이르도록 눈을 뜨지 못해 이 무슨 경계인지 알지 못한다. 승문(僧問) 무엇이 이 서래의(西來意)입니까. 사왈(師曰) 옳지 못하다(不是). 대중이 야참(夜參)한 후 하당(下堂)하자 스님이 불러 가로되 대중(大衆)이여. 대중이 머리를 돌리자 사왈 달을 보아라. 대중이 달을 보았다. 사왈 달이 만궁(彎弓; 당긴 활)과 같으면 비가 적고 바람이 많다. 대중이 대답이 없었다. 묻되 고인이 말하되 비로(毘盧)에게도 스승(師)이 있고 법신에도 주(主)가 있다 했는데 무엇이 이 비로의 스승이며 법신의 주입니까. 사왈 상(床) 위에 상(床)을 안치함은 옳지 못하다. 묻되 무엇이 이 일용사(日用事)입니까. 스님이 세 번(三下) 손바닥을 두드렸다(拊掌). 승왈(僧曰) 학인이 이 뜻을 영회(領會)하지 못하겠습니다. 사왈 다시 무엇을 기다리느냐. 묻되 종상(從上)의 종승(宗乘; 宗門)은 어떻게 사람을 위했습니까. 사왈 내가 금일 끽다(喫茶)하지 못했다. 가로되 스님의 지시를 청합니다. 사왈 지나갔다(過也). 묻되 정(正)은 곧 묻지 않습니다. 스님의 방지(傍指; 곁에서 가리킴)를 청합니다. 사왈 고양이(猫兒)를 포취(抱取)하러 가거라. 스님이 중에게 묻되 어느 곳에서 오느냐. 가로되 화광(華光)입니다. 스님이 곧 밀어내고(托出) 폐문(閉門)했다. 중이 대답이 없었다. 묻되 길에서 달도(達道)한 사람을 만나면 어묵(語默)을 가지고 상대하지 말아라. 미심하오니 무엇을 가지고 상대합니까. 사왈 돌(咄), 나가거라. 스님이 중에게 묻되 무엇이 이 적면사(覿面事)인가. 가로되 스님의 감별(鑒別; 鑒)을 청합니다. 사왈 이러히 말하면 도리어 당하겠는가. 가로되 고의(故意)로 하면 곧 옳지 않습니다. 사왈 별다른 이 일착(一著)이다. 묻되 무엇이 이 영원(靈源)의 일로(一路)입니까. 사왈 밟아 지나서 무엇하랴. 설봉의 원주(院主)가 글이 있어 와서 스님을 초빙(招聘; 招)해 가로되 산두화상(山頭和尙)이 연존(年尊)하시거늘 장로는 왜 다시 1전(轉; 次) 입령(入嶺)하지 않습니까. 스님이 회서(迴書)하여 가로되 산두화상이 달리 견해가 있음을 기다렸다가 곧 입령하겠습니다. 어떤 중이 묻되 무엇이 이 설봉의 견해입니까. 사왈 나도 놀란다(驚).
●一著; 본래 위기(圍棋; 바둑) 용어가 됨. 1사(事)라고 말함과 같음. 또 1회, 1차임. 또 명칭이 일착자(一著子).
泉州福淸院玄訥禪師 高麗人也 初住福淸道場 傳象骨之燈 學者歸慕 泉守王公問 如何是宗乘中事 師叱之 僧問 如何是觸目菩提 師曰 闍梨失却半年糧 曰爲什麽失却半年糧 師曰 只爲圖他一斗米 問如何是淸淨法身 師曰 蝦蟇曲蟮 問敎云 唯一堅密身一切塵中現 如何是堅密身 師曰 驢馬猫兒 曰乞師指示 師曰 驢馬也不會 問如何是物物上辨明 師展一足示之 師住福淸三十年 大闡玄風終於本山
천주(泉州) 복청원(福淸院) 현눌선사(玄訥禪師). 고려 사람이다. 처음 복청도량(福淸道場)에 주(住)하면서 상골(象骨; 설봉)의 등(燈)을 전했고 학자가 귀모(歸慕)했다. 천수(泉守) 왕공(王公)이 묻되 무엇이 이 종승(宗乘) 중의 일입니까. 스님이 꾸짖었다(叱之). 승문(僧問) 무엇이 이 촉목보리(觸目菩提)입니까. 사왈(師曰) 사리(闍梨)는 반년(半年)의 양식(糧食)을 잃어버렸다. 가로되 무엇 때문에 반 년의 양식을 잃어버렸습니까. 사왈 다만 저 한 말의 쌀을 도모했기 때문이다. 묻되 무엇이 이 청정법신(淸淨法身)입니까. 사왈 두꺼비(蝦蟇)와 굽은 지렁이(曲蟮)다. 묻되 교운(敎云) 유일(唯一)한 견밀신(堅密身)이 일체의 진중(塵中)에 나타난다. 무엇이 이 견밀신입니까. 사왈 나귀ㆍ말ㆍ고양이(猫兒)다. 가로되 스님의 지시를 구걸합니다. 사왈 나귀와 말도 알지 못하느냐. 묻되 무엇이 이 물물상(物物上)에서 변명(辨明)함입니까. 스님이 한 발을 펴 보였다. 스님이 복청(福淸)에 주(住)한 30년에 현풍(玄風)을 크게 열었고 본산에서 마쳤다.
韶州雲門山文偃禪師 姑蘇嘉興人也 姓張氏 初參睦州陳尊宿發明大旨 後造雪峯而益資玄要 因藏器混衆 于韶州靈樹敏禪師法席居第一座 敏將滅度遺書於廣主 請接踵住持 師不忘本以雪峯爲師 開堂日廣主親臨曰 弟子請益 師曰 目前無異路〈法眼別云 不可無益於人〉 師云 莫道今日謾諸人好 抑不得已向諸人道遮裏作一場狼藉 忽遇明眼人見 謂之一場笑具 如今亦不能避得也 且問爾諸人 從上來有什麽事 欠少什麽 向爾道無事亦是謾爾也 須到遮田地始得 亦莫趁口頭亂問 自己心裏黑漫漫地 明朝後日大有事在 爾若是根性遲迴 且向古人建化門庭東覻西覻看 是箇什麽道理 汝欲得會麽 都緣是汝自家無量劫來妄想濃厚 一期聞人說著便生疑心 問佛問祖 向上向下求覓解會 轉沒交涉 擬心卽差 況復有言 莫是不擬心麽 更有什麽事 珍重
●狼藉; 狼臥之藉也 散亂之貌 ▲緇門警訓註上 狼性善顧多貪 其所止處 蹂躙其草 使之離披雜亂 故曰狼藉 蹂躙音由吝 車踏也
●遲迴; 猶豫不定
●建化門庭; 指適應中下根器的方便敎化法門
소주(韶州) 운문산(雲門山) 문언선사(文偃禪師; 864-949). 고소(姑蘇) 가흥(嘉興) 사람이며 성이 장씨(張氏)다. 목주(睦州) 진존숙(陳尊宿)을 초참(初參)하여 대지(大旨)를 발명(發明)했고 후에 설봉으로 나아가 현요(玄要; 현묘한 宗要)를 더욱 도왔다. 인하여 근기(根器)를 숨기고 대중에 섞였다가(混衆) 소주(韶州) 영수민(靈樹敏; 如敏) 선사의 법석에서 제1좌에 거처했다. 여민(如敏)이 장차 멸도(滅度)하려 하자 광주(廣主)에게 글을 남겨(遺書) 접종(接踵)하여 주지할 것을 청했다. 스님이 근본을 잊지 않고 설봉을 스승으로 삼았다. 개당일(開堂日)에 광주(廣主)가 친림(親臨)하여 가로되 제자가 청익(請益)합니다. 사왈(師曰) 목전에 이로(異路)가 없습니다〈法眼이 別云 사람에게 無益함은 옳지 못합니다〉. 사운(師云) 금일 제인(諸人)을 속임이 좋다고 말하지 말아라. 또한(抑) 부득이(不得已)하여 제인을 향해 말하되 이 속에서 한바탕 낭자(狼藉)를 짓는다 하거니와 홀연히 명안인(明眼人)이 봄을 만나면 이를 일러 한바탕 웃음거리(笑具)라 하리라. 여금에 능히 피함을 얻지 못해 또(且) 너희(爾) 제인에게 묻나니 종상래(從上來)로 무슨 일이 있느냐, 흠소(欠少)한 게 무엇인가. 너희를 향해 말하노니 무사(無事)라 함도 또한 이 너희를 속임이다. 모름지기 이(遮) 전지(田地; 程度. 境界)에 이르러야 비로소 옳나니 또한 구두(口頭)를 쫓아 어지럽게 묻지 말아라. 자기의 심리(心裏)가 흑만만지(黑漫漫地)면 명조(明朝)나 후일에 크게 일이 있을 것이다(大有事在). 너희가 만약 이 근성이 지회(遲迴)하다면 다만(且) 고인의 건화문정(建化門庭)을 향해 동처서처(東覻西覻)하여 보아라. 이것(是箇)이 무슨 도리인가. 너희가 이회(理會)를 얻고자 하느냐. 모두(都) 이는 너희의 자가(自家)가 무량겁래(無量劫來)로 망상이 농후(濃厚)하기 때문에(緣) 일기(一期)에 타인의 설함(說著)을 듣고 바로 의심을 내나니 문불문조(問佛問祖)하고 향상향하(向上向下)하면서 해회(解會)를 구멱(求覓)하거니와 더욱 교섭이 없다(轉沒交涉) 의심(擬心; 사려)하면 곧 어긋나거늘 하물며 다시 유언(有言)이겠는가. 이, 의심(擬心)하지 않겠는가, 다시 무슨 일이 있으리오. 진중(珍重)하라.
●狼藉; 이리가 누운 깔개니 산란한 모양. ▲치문경훈주상. 이리의 성질은 잘 돌아보고 탐욕이 많다. 그것이 머무는 곳에는 그 풀을 유린(蹂躙; 함부로 짓밟음)하여 그것으로 하여금 이피(離披; 흔들고 헤쳐다)하여 잡란하게 하는지라 고로 가로되 낭자(狼藉)다. 유린(蹂躙)은 음이 유린이니 수레가 밟음이다.
●遲迴; 유예(猶豫)하며 정하지 못함.
●建化門庭; 중하근기에 적응하는 방편의 교화법문을 가리킴.
師上堂云 我事不獲已 向爾諸人道直下無事 早是相埋沒了也 爾諸人更擬進步向前 尋言逐句求覓解會 千差萬巧廣設問難 只是贏得一場口滑 去道轉遠有什麽休歇時 此箇事若在言語上 三乘十二分敎豈是無言語 因什麽更道敎外別傳 若從學解機智得 只如十地聖人說法如雲如雨 猶被呵責 見性如隔羅縠 以此故知 一切有心天地懸殊 雖然如此若是得底人 道火不可燒口 終日說事不曾掛著脣齒 未曾道著一字 終日著衣喫飯 未嘗觸一粒米掛一縷線 雖然如此猶是門庭之說也 須實得恁麽始得 若約衲僧門下 句裏呈機徒勞佇思 直饒一句下承當得 猶是瞌睡漢 師云 三乘十二分敎橫說竪說 天下老和尙縱橫十字說 與我捻針鋒許說底道理來看 恁麽道死馬醫 雖然如此且有幾箇到此境界 不敢望汝言中有響句裏藏鋒 瞬目千差風恬浪靜 伏惟尙饗 珍重
●口滑; 謂言辭滑利而無實證
●門庭; 此指方便法門
●縱橫十字; 縱橫十字街頭 言其縱橫無礙通達自由
●死馬醫; 把死馬當作活馬醫 意謂對中下根器學人 盡最大的努力 用方便敎法 使之悟道
스님이 상당하여 이르되 내가 일이 불획이(不獲已; 不得已)하여 너희(爾) 제인을 향해 말하되 직하(直下; 즉시)에 무사(無事)라 하지만 벌써 이는 서로 매몰(埋沒)한 것이다. 너희 제인이 다시 진보(進步)하여 앞을 향해 말을 찾고 구절을 쫓으며 해회(解會)함을 구멱(求覓)하며 천차만교(千差萬巧)로 널리 문난(問難; 물어 힐난함)을 베풀려고 한다면 다만 이는 나머지(贏)로 한바탕의 구활(口滑)을 얻음이며 도와의 거리가 더욱 멀어지리니 무슨 휴헐(休歇)할 때가 있으리오. 차개사(此箇事)가 만약 언어상(言語上)에 있다면 3승(乘) 십이분교(十二分敎)에 어찌 이 언어가 없겠는가. 무엇으로 인해 다시 교외별전(敎外別傳)을 말하겠는가. 만약 학해(學解)와 기지(機智)로 좇아 얻는다면 지여(只如) 십지(十地) 성인이 설법하여 구름 같고 비 같더라도 오히려 가책(呵責)을 입되 견성이 나곡(羅縠)을 격(隔)한 것 같다 하였다. 이런 연고로써 알지니 일체의 유심(有心)은 천지(天地)처럼 현수(懸殊; 懸隔하게 다름)하다. 비록 그러하여 이와 같으나 만약 이 얻은 사람이라면 불을 말해도 가히 입을 태우지 않고 종일 설사(說事)해도 일찍이 순치(脣齒)에 걸지(掛著) 않으며 일찍이 한 글자도 말하지(道著) 않으며 종일 착의끽반(著衣喫飯)해도 일찍이 한 톨의 쌀에 닿거나 한 올의 실도 걸치지 않는다. 비록 그러하여 이와 같지만 오히려 이는 문정지설(門庭之說)이니 모름지기 이러함을 실로 얻어야 비로소 옳다. 만약 납승문하(衲僧門下)를 대약(大約)하자면 구리(句裏)에 정기(呈機)해도 도로(徒勞) 저사(佇思)며 직요(直饒; 가령) 1구(句) 아래 승당(承當)해 얻더라도 오히려 이 갑수한(瞌睡漢; 조는 자)이다. 사운(師云) 3승 십이분교가 횡설수설(橫說竪說)하고 천하 노화상이 종횡십자(縱橫十字)로 설하거니와 나에게 침봉(針鋒)만큼이라도 설한 도리를 집어(捻) 주어 와 보아라. 이러한 말은 사마의(死馬醫)다. 비록 그러하여 이와 같지만 다만(且) 몇 개가 이 경계에 이름이 있는가. 감히 너희에게 언중유향(言中有響)과 구리장봉(句裏藏鋒)을 바라지 않나니 눈을 깜작이면 천차(千差)며 바람이 고요하면 물결이 고요하다(風恬浪靜). 복유상향(伏惟尙饗). 진중(珍重)하라.
●口滑; 이르자면 언사는 매끄럽고 날카로우나 실증(實證)이 없음.
●門庭; 여기에선 방편법문을 가리킴.
●縱橫十字; 십자가두를 종횡함. 말하자면 그가 종횡무애하며 통달자유(通達自由)임.
●死馬醫; 죽은 말을 가지고 마땅히 산 말을 만드는 의사. 뜻으로 이르자면 중하근기의 학인을 상대하여 최대의 노력을 다하여 방편의 교법을 써서 그로 하여금 오도하게 함임.
師上堂云 諸兄弟盡是諸方參尋知識決擇生死 到處豈無尊宿垂慈方便之詞 還有透不得底句麽 出來擧看 老漢大家共爾商量 時有僧出來禮拜擬擧次 師云 去去西天路 迢迢十萬餘 問學人簇簇地商量箇什麽 云大衆久立 師云 擧一則語 敎汝直下承當 早是撒尿著汝頭上 直饒捻一毫頭 盡大地一時明得 也是剜肉作瘡 雖然如此汝亦須實到遮箇田地始得 若未切不得掠虛 却須退步向自己根脚下推尋看 是箇甚麽道理 實無絲髮與汝作解會與汝作疑惑 汝等各各且當人一段事大用現前 更不煩汝一毫頭氣力 便與祖佛無別 自是諸人信根淺薄惡業濃厚 突然起得許多頭角 擔鉢囊千鄕萬里受屈 且汝諸人有什麽不足處 大丈夫漢阿誰無分 觸目承當得 猶是不著便 不可受人欺謾取人處分 才見老和尙動口 便好把特石驀口塞 便是屎上靑蠅相似鬪競唼將去 三箇五箇聚頭地商量 苦屈兄弟 他古德一期爲爾諸人不奈何 所以方便垂一言半句通汝入路 遮般事拈放一邊 獨自著些子筋骨 豈不是有少許相親處 快與快與 時不待人出息不保入息 更有什麽身心別處閑用 切須在意在意珍重
●簇簇地; 叢列成行貌 地 助詞
●剜肉作瘡; 本來無瘡 剜好肉做成瘡 譏刺禪人無事生事 虛妄徒勞
●掠虛; 掠 卽掠取之意 虛 卽虛妄不實 掠虛 卽指僅模倣他人言語之表面行動
●根脚; 同脚根 卽脚跟 有行步作用
●頭角; 猶頭緖 端緖
●受屈; 屈 屈從 寃屈
●不著便; 不遇便宜 著 遇也 又附也 便 便宜
●特石; 祖庭事苑一 特石 大石也 如牛曰特牛 說文曰 特牛 牛父也 言其朴特
●苦屈; 悲嘆義
스님이 상당하여 이르되 여러 형제는 모두 이 제방에서 지식(知識)을 참심(參尋)하며 생사를 결택(決擇)하나니 도처(到處)에 어찌 존숙이 수자(垂慈)하는 방편지사(方便之詞)가 없겠는가. 도리어 투과하여 얻지 못한 구(句)가 있느냐. 나와서 들어보아라(擧看). 노한과 대가(大家; 大衆)가 그(爾)와 함께 상량(商量)하겠다. 때에 어떤 중이 나와서 예배하고 들려고(擬擧) 하던 차에 사운(師云) 거거(去去)하라, 서천로(西天路)가 멀고 멀어(迢迢) 십만여(十萬餘)다. 묻되 학인이 족족지(簇簇地) 저(箇) 무엇을 상량합니까. 이르되 대중이 구립(久立)했다. 사운(師云) 1칙(則)의 말을 들어 너희로 하여금 직하(直下)에 승당(承當)케 하더라도 벌써 이는 너희 두상(頭上)에 오줌을 뿌린 것이다(撒尿著). 직요(直饒) 일호두(一毫頭; 頭는 조사)를 집어(捻) 온 대지를 일시에 명득(明得)하더라도 또한 이 완육작창(剜肉作瘡)이다. 비록 그러하여 이와 같지만 너희가 또한 모름지기 실로 저개(遮箇)의 전지(田地; 경계)에 이르러야 비로소 옳다. 만약 간절하지 못하거든 약허(掠虛)를 얻지 말고 도리어 꼭 퇴보(退步)하여 자기의 근각(根脚; 脚根) 아래를 향해 추심(推尋)해 보아라. 이것(是箇)이 무슨 도리인가. 실로 사발(絲髮)만큼도 너희에게 해회(解會)를 지어 주거나 너희에게 의혹을 지어 줌이 없다. 너희 등이 각각 또 당인(當人)의 일단(一段)의 일은 대용(大用)이 현전하여 다시 너희를 한 터럭(一毫頭)만큼의 기력(氣力)으로 번뇌케 하지 않으며 바로 조불과 다름이 없음에랴. 스스로 이 제인의 신근(信根)이 천박하고 악업이 농후하여 돌연히 허다한 두각(頭角)을 일으켜(起得) 발낭(鉢囊)을 지고 천향(千鄕) 만 리에서 수굴(受屈)하니 그래(且) 너희 제인이 무슨 부족한 곳이 있느냐. 대장부한(大丈夫漢)이 누군들(阿誰) 분한이 없겠는가. 촉목(觸目)하여 승당(承當)함을 얻으면서도 오히려 이, 편의를 만나지 못한다(不著便). 타인의 기만을 받거나 타인의 처분을 취함은 옳지 않다. 겨우 노화상이 입을 움직임을 보면 곧 좋이 특석(特石)을 잡아 입에다 틀어막아야(驀口塞) 하거늘 곧 이 똥 위의 청승(靑蠅; 금파리)과 상사하여 다투어(鬪競) 빨아(唼; 저본에 接으로 지었음) 가져가서 세 개나 다섯 개가 머리를 모아 상량하니 형제를 괴롭게 굴종(屈從)시킴이다(苦屈). 저 고덕(古德)이 일기(一期)에 너희 제인을 어찌하지 못하기 때문에(爲) 소이로 방편으로 일언반구(一言半句)를 내려 너희에게 입로(入路)를 통하게 했다. 이러한 일(遮般事)은 집어다 일변(一邊)에 놓고 독자(獨自)로 사자(些子)의 근골(筋骨)을 붙인다면 어찌 이, 소허(少許; 少量) 상친(相親)한 곳이 있지 않겠는가. 쾌하다(快與), 쾌하다. 시간이 사람을 기다리지 않나니 출식(出息)이 입식(入息)을 보장(保障)하지 못하거늘 다시 무슨 신심(身心)이 있어 다른 곳에 쓸데없이 쓰겠는가(閑用). 간절히 꼭 뜻에 두고(在意) 뜻에 두어라. 진중(珍重)하라.
●簇簇地; 빽빽이 나열하여 줄을 이룬 모양. 지(地)는 조사.
●剜肉作瘡; 본래 종기가 없는데 호육(好肉)을 도려내어 종기를 만들어 이룸이니 선인(禪人)의, 무사생사(無事生事)하는 허망한 도로(徒勞; 헛수고)를 기자(譏刺; 헐뜯음)함.
●掠虛; 략(掠)은 곧 약취(掠取)의 뜻이며 허(虛)는 곧 허망하여 실답지 못함임. 약허(掠虛)는 곧 겨우 타인의 언어의 표면의 행동을 모방함을 가리킴.
●根脚; 각근(脚根)과 같음. 곧 각근(脚跟; 발뒤꿈치). 행보(行步; 보행)의 작용이 있음.
●頭角; 두서(頭緖)와 같음. 단서(端緖).
●受屈; 굴(屈)은 굴종. 원굴(寃屈; 원통하게 누명을 써서 마음이 맺히고 억울함).
●不著便;편의를 만나지 못함. 착(著)은 우(遇)임. 또 부(附)임. 편(便)은 편의.
●特石; 조정사원1. 특석(特石) 대석(大石)이니 마치 소를 가로되 특우(特牛)라 함과 같다. 설문에 가로되 특우는 우부(牛父; 수소)다 했는데 그 박특(朴特; 朴은 클 박. 순박할 박)을 말함이다.
●苦屈; 비탄(悲嘆)의 뜻.
師云 盡乾坤把一時將來著汝眼睫上 爾諸人聞恁麽道 不敢望爾出來性燥把老漢打一摑 且緩緩子細看 是有是無 是箇什麽道理 直饒向遮裏明得 若遇衲僧門下好搥折兩脚 汝若是箇人 聞說道什麽處有老宿出世 便好驀面唾污我耳目 汝若不是箇脚手 才聞人擧便當荷得 早落第二機也 汝且看 他德山和尙才見僧上來 拽拄杖便打趁 睦州和尙才見入門來 便云 且放汝三十棒 或時云見成公案 自餘之輩合作麽生 若是一般掠虛漢 食人涎唾 記得一堆一擔骨董 到處逞驢脣馬嘴 誇我解問十轉五轉話 饒爾從朝問到夜 論劫恁麽 還曾夢見也未 什麽處是與人著力處 似遮般底 有人屈衲僧齋 也道我得飯喫 堪什麽共語 他日閻羅王面前不取爾口解說
●性燥; 又作性懆性躁性僺 爽快 靈利 多指能迅疾無礙的領會禪義
●驀面; 驀 當 正對著
●當荷; 堪當荷負 荷 擔
●掠虛漢; 又作掠虛頭漢 掠 卽掠取之意 虛 卽虛妄不實 掠虛 卽指僅模倣他人言語之表面行動
●骨董; 又作骨蕫 價値不大的雜碎舊物 禪家多指陳腐常套的言句話頭等
사운(師云) 온 건곤을 잡아(把) 일시에 가져 와서 너희의 눈썹 위에 놓아라(著). 너희 제인이 이러한 말을 들으면 너희가 나와서 성조(性燥)로 노한을 잡아 후려침을 감히 바라지 않나니 다만(且) 느릿느릿(緩緩) 자세히 보아라. 이 있음인가 이 없음인가. 이것(是箇)이 무슨 도리인가. 직요(直饒; 가령) 이 속을 향해 명득(明得)하더라도 만약 납승문하(衲僧門下)를 만난다면 좋이 두 다리를 쳐서 부러뜨리리라. 너희가 만약 시개인(是箇人)이라면 어느 곳에 어떤 노숙(老宿)이 출세했다고 설해 말함을 듣거든 바로 좋이 얼굴에다(驀面) 침을 뱉아야 하리니 나의 이목(耳目)을 더렵혀서이다. 너희가 만약 이러한(是箇) 각수(脚手; 手脚)가 아니라면 겨우 타인의 듦을 듣고 당하(當荷)함을 얻더라도 벌써 제2기(第二機)에 떨어진다. 너희가 다만 보아라(且看), 저 덕산화상은 겨우 중이 올라옴을 보면 주장자를 끌어다 바로 때리고 쫓아내었고 목주화상(睦州和尙)은 겨우 입문(入門)하여 옴을 보면 바로 이르되 다만(且) 너에게 30방(棒) 놓는다. 혹시(或時) 이르되 현성공안(見成公案)이다. 자여(自餘; 其餘)의 무리(輩)는 합당히 어떻게 했는가(合作麽生). 만약 이 일반(一般)의 약허한(掠虛漢)일진대 타인의 연타(涎唾; 침)를 먹으매 한 무더기나 한 짐(一堆一擔)의 골동(骨董)을 기득(記得)하여 도처(到處)에서 여순마취(驢脣馬嘴)를 자랑하며(逞; 음이 정) 과시(誇示)하되 내가 10전(轉; 回. 次)이나 5전(轉)의 화(話)를 물을 줄 안다 하거니와 가령(饒) 네가 아침으로 좇아 물어 밤에 이르면서 논겁(論劫)토록 이러하더라도 도리어 일찍이 꿈에라도 보았느냐 또는 아니냐. 어느 곳이 이 사람에게 착력(著力)할 곳을 주었음인가. 이러함과 같은 것은(似遮般底) 어떤 사람이 납승을 굴(屈; 請)해 재(齋)하면 또한 말하되 내가 밥을 얻어 먹었다 하리니 차마(堪) 무엇을 함께 말하겠는가. 다른 날 염라왕(閻羅王)의 면전에서 그의 입(爾口)으로 해설함을 취하지 못하리라.
●性燥; 또 성조(性懆)ㆍ성조(性躁)ㆍ성초(性僺)로 지음. 상쾌함이며 영리함이니 다분히, 능히 신질(迅疾)하고 무애하게 선의(禪義)를 영회(領會)함을 가리킴.
●驀面; 맥(驀)은 당(當). 정대착(正對著).
●當荷; 감당하여 하부(荷負)함. 하(荷)는 담(擔).
●掠虛漢; 또 약허두한(掠虛頭漢)으로 지음. 략(掠)은 곧 약취(掠取)의 뜻이며 허(虛)는 곧 허망하여 실답지 못함. 약허(掠虛)는 곧 겨우 타인의 언어의 표면의 행동을 모방함을 가리킴.
●骨董; 또 골동(骨蕫)으로 지음. 가치가 크지 아니한 자질구레한 옛날 물건. 선가에선 다분히 진부(陳腐)하고 상투적(常套的)인 언구나 화두 등을 가리킴.
諸兄弟 若是得底人 他家依衆遣日 若也未得切莫容易過時 大須子細 古人大有葛藤相爲處 卽如雪峯和尙道 盡大地是汝 夾山云 百草頭識取老僧 市門頭認取天子 樂普云 一塵才擧大地全收 一毛師子全身 總是汝把取翻覆思量日久歲深 自然有箇入路 此事無爾替代處 莫非各在當人分上 老和尙出世只是爲爾證明 汝若有少許來由 且昧爾亦不得 爾若實未得方便 撥汝則不可 兄弟一等是蹋破草鞋 拋却師僧父母行脚 直須著些子精彩始得 實若有箇入頭處 遇著一個咬猪狗脚手 不惜性命入泥入水相爲 有可咬嚼 眨上眉毛高掛鉢囊 拗折拄杖 十年二十年擬取徹頭 莫愁不成辦 直是今生未得徹頭 來生亦不失人身 向此箇門中亦乃省力 不虛孤負平生 亦不孤負師僧父母十方施主 直須在意 莫空遊州獵縣 橫擔柱杖 一千二千里走趁 遮邊經冬那邊過夏 好山水堪取性 多齋供易得衣鉢 苦屈 圖他一粒米 失却半年糧 如此行脚有什麽利益 信心檀越把菜粒米作麽生消得 直須自看 時不待人 忽然一日眼光落地 到來前頭 將什麽抵擬 莫一似落湯螃蟹手脚忙亂 無爾掠虛說大話處 莫將等閑空過時光 一失人身萬劫不復 不是小事 莫據目前 古人尙道朝聞道夕死可矣 況我沙門 日夕合履踐箇什麽事 大須努力努力珍重
●精彩; 精神煥發 有風彩
●咬猪狗脚手; 同咬猪狗手脚 本色禪師接引學人或較量機鋒 不顧人情 手段奇特 這樣的禪師及其手段 稱爲咬猪狗手脚 手脚 手段 ▲碧巖錄第七十九則種電鈔 咬猪狗底手脚 俊狗咬殺野猪作略
●性命; 有情之性與命也
●成辦; 成功 完成 辨 辯 辦 竝通
●遊州獵縣; 指僧人四方行脚 獵 經歷
●取性; 隨意適性 任性
●衣鉢; 亦有用以稱僧家之錢財 蓋以錢財非僧家應持之物 故以婉曲之詞稱之
●眼光落地; 指臨終時也
●抵擬; 應對 對處
●落湯螃蟹; 放進熱水鍋裏燒煮的螃蟹 喩指死期來臨 湯 熱水
●大話; 虛誇不實的話
여러 형제여, 만약 이 얻은 사람이라면 타가(他家; 家는 名詞詞綴)가 대중에 의해 날을 보내려니와 만약에 얻지 못했다면 간절히 용이(容易)하게 시일을 지내지 말아야 하리니 매우 자세함을 써야 한다(大須子細). 고인이 갈등으로 상위(相爲)하는 곳이 매우 있었으니(大有) 곧 예컨대(如) 설봉화상이 말하되 온 대지가 이 너다. 협산(夾山)이 이르되 백초두(百草頭; 頭는 조사)에서 노승을 식취(識取)하고 시문두(市門頭)에서 천자를 인취(認取)하라. 낙보(樂普)가 이르되 1진(塵)을 겨우 들면 대지를 전수(全收)하고 1모(毛)가 사자(師子)의 전신(全身)이다. 모두 이 너희가 파취(把取)하여 번복(翻覆)하며 사량(思量)하되 일구세심(日久歲深)하면 자연히 저(箇) 입로(入路)가 있으리라. 차사(此事)는 너희(爾)를 체대(替代)할 곳이 없나니 각자 당인(當人)의 분상(分上)에 있지 않음이 없다. 노화상이 출세하여 다만 이, 너희(爾)를 위해 증명하리라. 너희가 만약 소허(少許; 少量)라도 내유(來由)가 있다면 또한(且) 너희를 암매(暗昧)하게 함을 또한 얻지 못한다. 너희가 만약 실로 방편을 얻지 못했다면 너희를 제거(撥)함이 곧 불가(不可)하다. 형제는 일등(一等; 一樣으로 평등함) 이 초혜(草鞋)를 답파(蹋破)하고 사승(師僧)과 부모를 던져버리고 행각하니 바로 꼭 사자(些子)의 정채(精彩)를 붙여야 비로소 옳다. 실로 만약 저(箇) 입두처(入頭處)가 있다면 일개의 돼지를 무는 개의 각수(咬猪狗脚手)를 만나매 성명(性命)을 아끼지 않고 입니입수(入泥入水)하여 상위(相爲)하면서 가히 교작(咬嚼; 씹다)함이 있으리라. 눈썹을 깜작이며(眨上; 저본에 劄上으로 지었음. 上은 조사) 발낭(鉢囊)을 높이 걸고 주장자를 요절(拗折)하고 10년이나 20년에 철두(徹頭)를 취하려고 하고 성판(成辦)하지 못함을 수심(愁心)하지 말아라. 바로 이 금생에 철두를 얻지 못하더라도 내생에 또한 인신(人身)을 잃지 않으리라. 차개(此箇)의 문중(門中)을 향해 또한 이에 힘을 던다면(省力) 헛되이 평생을 저버리지(孤負) 않을 것이며 또한 사승(師僧)ㆍ부모ㆍ시방의 시주를 저버리지 않으리라. 바로 꼭 뜻에 두고(在意) 공연히 유주엽현(遊州獵縣)하지 말지니 주장자를 횡담(橫擔)하고 1천이나 2천 리를 달려 쫓으면서 저변(遮邊)에서 경동(經冬)하고 나변(那邊)에서 과하(過夏)하며 좋은 산수(山水)에서 가히(堪) 취성(取性)하며 많은 재공(齋供)에 쉽게 의발(衣鉢)을 얻는다면 고굴(苦屈; 悲嘆의 뜻)이로다. 저 한 톨의 쌀을 도모하다가 반 년의 양식을 잃어버리나니 이와 같이 행각한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신심(信心)의 단월(檀越)이 채소(菜蔬)와 입미(粒米; 멥쌀)를 잡았거늘(把) 어떻게 소득(消得)하겠는가. 바로 꼭 스스로 볼지니 시일이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홀연히 어느 날 안광낙지(眼光落地)하여 면전에 도래(到來)하면 무엇을 가져 저의(抵擬)하겠는가. 낙탕방해(落湯螃蟹)와 일사(一似; 一如)하여 수각(手脚)이 망란(忙亂)하지 않겠는가. 너희가 약허(掠虛)하여 대화(大話)를 설할 곳이 없다. 등한(等閑)함을 가지고 공연히 시광(時光)을 지내지 말지니 한 번 인신(人身)을 잃으면 만겁(萬劫)토록 회복하지 못한다. 이 소사(小事)가 아니니 목전에 의거하지 말아라. 고인(古人; 孔子)도 오히려 말하되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옳다 했거늘 하물며 우리 사문(沙門)이겠는가. 일석(日夕)으로 합당히 저(箇) 무슨 일을 이천(履踐)해야 하는가. 매우 노력하고 노력함을 쓸지니(大須努力努力) 진중(珍重)하라.
●精彩; 정신이 환발(煥發; 환하게 발산)함. 풍채가 있음.
●咬猪狗脚手; 교저구수각(咬猪狗手脚)과 같음. 본색선사가 학인을 접인하거나 혹 기봉을 교량(較量)하면서 인정을 돌아보지 않고 수단이 기특하나니 이런 양상(樣相)의 선사 및 그 수단을 일컬어 교저구수각이라 함. 수각은 수단임. ▲벽암록 제79칙 종전초. 교저구수각(咬猪狗底手脚) 준구(俊狗; 뛰어난 개)가 멧돼지를 물어 죽이는 작략이다.
●性命; 유정의 성(性)과 명(命)임.
●成辦; 성공. 완성. 변(辨)ㆍ변(辯)ㆍ판(辦)은 모두 통함.
●遊州獵縣; 승인이 사방으로 행각함을 가리킴. 렵(獵)은 경력(經歷).
●取性;수의적성(隨意適性; 뜻에 따르고 본성에 맞춤). 임성(任性; 본성에 맡김).
●衣鉢; 또한 승가의 돈과 재물을 일컬음에 쓰임이 있음. 대개 돈과 재물은 승가가 응당 지녀야 할 물건이 아니므로 고로 완곡(婉曲)한 말로써 이를 일컬음임.
●眼光落地; 임종 시를 가리킴.
●抵擬; 응대. 대처(對處).
●落湯螃蟹; 뜨거운 물의 노구솥 속에 방진(放進)하여 소자(燒煮)된 방해(螃蟹; 게)니 죽을 시기가 와서 임함을 비유로 가리킴. 탕(湯)은 뜨거운 물.
●大話; 헛되이 자랑하며 실답지 못한 이야기.
師云 汝等沒可恁麽了 見人道著祖意 便問箇超佛越祖之談 汝且喚那箇爲佛那箇爲祖 且說箇超佛越祖底道理 問箇出三界 爾把將三界來看 有什麽見聞覺知隔礙著爾 有什麽聲色可與爾了 了什麽椀 以阿那箇爲差殊之見 他古聖不奈何 橫身爲物 道箇擧體全眞 物物覿體不可得 我向爾道 直下有什麽事 早是相埋沒了也 爾若實未有入頭處 且中私獨自參詳 除却著衣喫飯屙屎送尿 更有什麽事 無端起得許多妄想作什麽 更有一般底 恰似等閑相似 聚頭學得箇古人話路 識性記持妄想卜度 道我會佛法了也 只管說葛藤取性過時 更嫌不稱意 千鄕萬里拋却老爺孃師僧和尙 作遮去就 遮般打約野禿有什麽死急行脚去
●什麽椀; 椀 卽椀躂丘 椀脫丘的省略 猶言什麽東西 什麽玩意兒
사운(師云) 너희 등이 가히 이렇게 깨닫지(了) 말지니(沒) 사람이 조의(祖意)를 말함(道著)을 보고 바로 저(箇) 초불월조지담(超佛越祖之談)을 묻거니와 너희가 그래(且) 나개(那箇)를 일러 불(佛)이라 하며 나개를 조(祖)라고 하느냐. 또(且) 저(箇) 초불월조의 도리를 설하매 저(箇) 3계를 벗어남(出三界)을 묻나니 너희가 3계를 가지고(把將) 와 보아라. 무슨 견문각지(見聞覺知)가 있어 너희를 격애하며(隔礙著) 무슨 성색(聲色)이 있어 가히 너희에게 깨침(了)을 주느냐. 무슨 사발을 깨닫느냐(了什麽椀). 어느 것(阿那箇)을 차수지견(差殊之見)으로 삼느냐. 저 고성(古聖)이 어찌하지 못해 횡신(橫身)하여 사람(物)을 위하되 저(箇) 거체(擧體; 전체)가 전진(全眞)이라고 말하지만 물건마다 적체(覿體; 체를 보다)함을 불가득이다. 내가 너희를 향해 말하노니 직하(直下)에 무슨 일이 있느냐. 벌써 이는 서로 매몰한 것이다(埋沒了也). 너희가 만약 실로 입두처(入頭處)가 있지 않다면 다만(且) 가운데에 사사로이(私) 독자(獨自)로 참상(參詳)하라. 착의끽반(著衣喫飯)하고 아시송뇨(屙屎送尿)를 제해버리면 다시 무슨 일이 있느냐. 무단(無端)히 허다한 망상을 기득(起得)하여 무엇하겠는가. 다시 일반의 것(一般底)이 있어 흡사 등한(等閑)함과 상사(相似)하면서 취두(聚頭)하여 저(箇) 고인의 화로(話路)를 학득(學得)하여 식성(識性)으로 기지(記持)하고 망상으로 복탁(卜度)하면서 말하되 내가 불법을 이회(理會)했다 하고는 다만 갈등을 관대(管帶)하여 설하면서 취성(取性)하여 시일을 지내되 다시 뜻에 맞지 않은 것을 싫어 한다. 천향만리(千鄕萬里)에서 늙은 야양(爺孃; 부모)과 사승화상(師僧和尙)을 던져버리고 이런 거취(去就)를 지으니 이러한(遮般) 타약야독(打約野禿; 여러 禪錄에 打野榸漢으로 지었음)은 무슨 사급(死急)함이 있어 행각하겠는가.
●什麽椀; 완(椀)은 곧 완달구(椀躂丘)ㆍ완탈구(椀脫丘)의 생략이니 무슨(什麽) 동서(東西; 물건)인가, 무슨(什麽) 완의아(玩意兒; 玩具)인가 라고 말함과 같음.
師上堂云 故知時運澆漓迨于像季 近日師僧北去禮文殊 南去遊衡嶽 若恁麽行脚名字比丘徒消信施 苦哉苦哉 問著黑似漆相似 只管取性過時 設使有三箇兩箇 枉學多聞記持話路 到處覓相似言語印可老宿 輕忽上流作薄福德業 他日閻羅王釘爾之時 莫道無人向爾說 若是初心後學 直須著精神 莫空記人說 情多虛不如少實 向後只是自賺 有什麽事近前
●澆漓; 澆 薄也 指社會風氣不好 漓 澆漓 薄也 淺薄也
●像季; 季 末也 卽像法末法 正法像法末法三時中二時 其敎法相似於正法時代 故稱像法 正像末三時之年數 經論之異說多
●衡嶽; 卽衡山 又作南嶽 五嶽之一
●名字比丘; 但有比丘之名而無比丘之實者 謂無戒之僧也 ▲釋氏要覽上 善見律云 如有檀越 來請比丘 沙彌雖未具戒 亦入比丘數 是爲名字比丘
●信施; 卽信者向三寶布施財物 或指所施之財物
스님이 상당하여 이르되 고로 알지니 시운(時運)이 요리(澆漓)하여 상계(像季)에 이르렀다(迨). 근일(近日)의 사승(師僧)이 북으로 가서 문수(文殊)를 참례하고 남으로 가서 형악(衡嶽)을 유람하거니와 만약 이렇게 행각한다면 명자비구(名字比丘)가 도연(徒然)히 신시(信施)를 소비함이니 고재(苦哉)로다, 고재로다. 물으면(問著) 검기가 마치 칠(漆)과 상사(相似)하면서 다만 관대(管帶)하며 취성(取性)하여 시일을 지낸다. 설사 세 개나 두 개가 있더라도 헛되이(枉) 다문(多聞)을 배우고 화로(話路)를 기지(記持)하여 도처에서 상사(相似)한 언어로 인가(印可)하는 노숙(老宿)을 찾으면서 상류(上流)를 경홀(輕忽)하고 박복(薄福)한 덕업(德業)을 짓는다. 다른 날 염라왕이 너희를 못질할 때 너희를 향해 설한 사람이 없다고 말하지 말아라. 만약 이 초심(初心)이나 후학(後學)일진대 바로 꼭 정신을 붙이고 공연히 타인의 말을 기억하지 말아라. 참으로(情) 다허(多虛)가 소실(少實)만 같지 못하나니 향후에 다만 이 스스로 속으리라(賺). 무슨 일이 있어 근전(近前)하느냐.
●澆漓; 요(澆)는 박(薄)임. 사회의 풍기가 좋지 않음을 가리킴. 리(漓)는 요리(澆漓)니 박(薄)임. 천박함임.
●像季; 계(季)는 말(末)임. 곧 상법(像法)과 말법(末法)임. 정법ㆍ상법ㆍ말법 3시(時) 가운데 2시임. 그 교법이 정법시대와 상사하므로 고로 일컬어 상법(像法)임. 정상말(正像末) 3시의 연수(年數)는 경론의 이설이 많음.
●衡嶽; 곧 형산(衡山)이니 또 남악으로 지음. 5악(嶽)의 하나.
●名字比丘; 다만 비구의 이름만 있고 비구의 실상이 없는 자니 이르자면 계율이 없는 승려임. ▲석씨요람상. 선견율에 이르되 예컨대(如) 어떤 단월이 와서 비구를 초청하매 사미가 비록 구계(具戒)하지 못했지만 또한 비구의 수(數)에 드나니 이것을 명자비구(名字比丘)라 한다.
●信施; 곧 신자가 3보를 향해 보시하는 재물. 혹은 소시(所施)의 재물을 가리킴.
師上堂大衆雲集 師以拄杖指面前云 乾坤大地微塵諸佛總在裏許 爭佛法各覓勝負 還有人諫得麽 若無人諫得 待老漢與爾諫 時有僧出云 便請和尙諫 師云 遮野狐精 師云 汝諸人傍家行脚 皆是河南海北各各盡有生緣 所在還自知得麽 試出來擧看 老漢與汝證明 有麽有麽出來 汝若不知老漢謾爾去也 汝欲得知 若生緣在北 北有趙州和尙 五臺山有文殊 總在遮裏 若生緣在南 南有雪峯臥龍西堂鼓山 總在遮裏 汝欲得識麽 欲得識向遮裏識取 若不見亦莫掠虛 見麽見麽 且看老僧騎佛殿出去也 珍重
스님이 상당하자 대중이 운집했다. 스님이 주장자로써 면전을 가리키며 이르되 건곤대지(乾坤大地)와 미진(微塵)의 제불이 모두 이허(裏許; 內裏. 裏邊)에 있으면서 불법을 다투며 각기 승부를 찾는다. 도리어 간득(諫得)할 사람이 있느냐. 만약 간득할 사람이 없다면 노한이 너희에게 간(諫)하여 줌을 기다려라. 때에 어떤 중이 나와 이르되 화상의 간(諫)을 바로 청합니다. 사운(師云) 이 야호정(野狐精)아. 사운 너희 제인이 방가(傍家)로 행각하면서 모두 이 하남(河南)이나 해북(海北)에 각각 모두 생연(生緣)이 있으려니와 소재(所在)를 도리어 스스로 지득(知得)하느냐. 시험 삼아 나와서 들어보아라(擧看). 노한이 너희에게 증명해 주겠다. 있느냐, 있느냐, 나오너라. 너희가 만약 알지 못한다면 노한이 너희를 속이어 가겠다. 너희가 득지(得知)하고 싶으냐. 만약 생연(生緣)이 북에 있다면 북에 조주화상이 있고 오대산에 문수가 있어 모두 이 속(遮裏)에 있다. 만약 생연이 남에 있다면 남에 설봉(雪峯)ㆍ와룡(臥龍)ㆍ서당(西堂)ㆍ고산(鼓山)이 있어 모두 이 속에 있다. 너희가 앎을 얻고자 하느냐. 앎을 얻고자 한다면 이 속을 향해 식취(識取)하라. 만약 보지 못하더라도 또한 약허(掠虛)하지 말아라. 보느냐, 보느냐. 또 보아라, 노승이 불전(佛殿)을 타고(騎) 나간다. 진중(珍重)하라.
師上堂云 天親菩薩無端變作一條楖𣗖木杖 乃畫地一下云 塵沙諸佛盡向遮裏葛藤 便下堂 師云 我看爾諸人 二三機中不能覯得 空披衲衣何益 汝還會麽 與汝注破 久後諸方若見老宿擧一指竪一拂子云是禪是道 拽拄杖打破頭便行 若不如此 盡是天魔眷屬壞滅吾宗 汝若不會 且向葛藤社裏看 我尋常向汝道 微塵刹土三世諸佛 西天二十八祖唐土六祖 盡在拄杖頭上說法 神通變現聲應十方 一任縱橫 爾還會麽 若不會且莫掠虛 然雖據實實是諦見也未 直饒到此田地 未曾夢見衲僧沙彌在 三家村裏不逢一人 師驀起以拄杖劃地一下云 總在遮裏 又劃一下云 總從遮裏出去也 珍重
●天親; 梵名婆藪槃豆 又曰婆修槃陀 譯曰天親 新作伐蘇畔度 譯曰世親 波藪譯曰世天 婆藪槃豆傳曰 婆藪槃豆者 北天竺富婁沙富羅國(譯曰丈夫土國)人 佛滅後九百年而出 兄弟三人 皆名婆藪槃豆 長兄別稱阿僧伽(譯曰無著) 小弟別稱比鄰持跋婆(比鄰持母名 跋婆譯曰兒) 中子獨以通名稱 初於阿踰闍國薩婆多部出家 硏學小乘 旣通大毘婆沙論之義 爲衆講之 一日作一偈 共作六百偈 稱爲俱舍論 後用無著之示誨 懺悔小執之非 欲斷舌謝其罪 無著云 汝旣以舌誹謗大乘 更以此舌讚大乘可也 於是造唯識論等諸大乘論弘宣大敎 壽八十 寂於阿踰闍國
●覯得; 領悟 契合 得 助詞
스님이 상당하여 이르되 천친보살(天親菩薩)이 무단(無端)히 변화해 한 가닥의 즐률목(楖𣗖木) 지팡이(杖)가 되었다. 이에 땅에다 한 번(一下) 긋고 이르되 진사(塵沙)의 제불이 모두 이 속을 향해 갈등한다. 바로 하당(下堂)했다. 사운(師云) 내가 너희 제인을 보건대 이삼기(二三機) 중에서 능히 구득(覯得)하지 못하거늘 공연히 납의(衲衣)을 입어 무슨 이익이리오. 너희가 도리어 아느냐. 너희에게 주파(注破)해 주겠다. 오랜 후 제방에서 만약 노숙이 1지(指)를 들거나 1불자(拂子)를 세우고 이르되 이 선(禪)이며 이 도(道)다 함을 보거든 주장자를 끌어다 머리를 타파(打破)하고 바로 가거라(行). 만약 이와 같지 못하면 모두(盡) 이는 천마(天魔)의 권속(眷屬)이며 오종(吾宗)을 괴멸(壞滅)하리라. 너희가 만약 알지 못하거든 다만(且) 갈등사(葛藤社) 속을 향해 보아라. 내가 심상(尋常)에 너희를 향해 말하되 미진(微塵) 찰토(刹土)의 삼세제불과 서천(西天) 28조와 당토(唐土) 6조가 모두 주장두상(拄杖頭上)에 있으면서 설법한다. 신통을 변화해 나타내고 소리가 시방에 응하나니 종횡하는 대로 일임한다. 너희가 도리어 아느냐. 만약 알지 못하거든 또 약허(掠虛)하지 말아라. 그러하여 비록 사실에 의거했거니와 실로 이 체견(諦見; 자세히 보다)했느냐 또는 아니냐. 직요(直饒; 가령) 이 전지(田地)에 이르렀더라도 일찍이 꿈에도 납승(衲僧)이나 사미를 보지 못하여 있나니 삼가촌(三家村) 속에서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스님이 갑자기(驀) 일어나 주장자로써 땅에 한 번(一下) 긋고 이르되 모두 이 속에 있다. 또 한 번 긋고 이르되 모두 이 속으로 좇아 나가거라. 진중(珍重)하라.
●天親; 범명(梵名)은 바수반두(婆藪槃豆)며 또 가로되 바수반다(婆修槃陀)니 번역해 가로되 천친(天親)임. 신역으론 벌소반도(伐蘇畔度)로 지으며 번역해 가로되 세친(世親)임. 바수(波藪)는 번역해 가로되 세천(世天)임. 바수반두전(婆藪槃豆傳; 婆藪槃豆法師傳)에 가로되 바수반두란 자는 북천축 부루사부라국(富婁沙富羅國; 범 puruṣapura. 번역해 가로되 丈夫土國) 사람이다. 불타가 멸도한 후 9백 년에 출생했다. 형제 삼 인이 다 이름이 바수반두다. 장형(長兄)의 별칭이 아승가(阿僧伽; 梵 asa ṅga. 번역해 가로되 無著)며 소제(小弟)의 별칭이 비린지발바(比鄰持跋婆; 비린지는 어머니의 이름이며 발바는 번역해 가로되 兒)며 중자(中子)만 홀로 통명(通名)으로써 일컫는다. 처음에 아유사국(阿踰闍國) 살바다부(薩婆多部)에 출가해 소승을 연구하고 배워 이미 대비사론(大毘婆沙論)의 뜻을 통달했고 대중을 위해 이를 강설했다. 하루에 1게를 지어 공히 6백 게를 만들어 구사론(俱舍論)이라고 호칭했다. 후에 무착의 시회(示誨)를 채용해 소승에 집착한 그름을 참회했고 혀를 잘라 그 죄를 사죄하려 하자 무착이 이르되 네가 이미 혀로 대승을 비방했으니 다시 이 혀로 대승을 찬탄해야 옳다. 이에 유식론 등 여러 대승론을 지어 대교(大敎)를 홍선(弘宣)했다. 나이는 80이며 아유사국에서 입적했다.
●覯得; 영오(領悟; 깨달아 앎). 계합. 득(得)은 조사.
師上堂云 和尙子 衲僧直須明取衲僧鼻孔 且作麽生是衲僧鼻孔 衆皆無對 師云 摩訶般若波羅蜜 大普請下去 師上堂云 諸和尙子 饒爾道有什麽事 猶是頭上著頭 雪上加霜 棺木裏瞠眼 炙瘡瘢上著艾燋 遮箇一場狼藉不是小事 爾合作麽生 各自覓取箇托生處好 莫空遊州獵縣 只欲捉搦閑話 待老和尙口動 便問禪問道向上向下如何若何 大卷抄了塞在皮袋裏卜度 到處火鑪邊三箇五箇聚頭 口喃喃擧更道 遮箇是公才語 遮箇是從裏道出語 遮箇是就事上道底語 遮箇是體語體 爾屋裏老爺老孃 噇却飯了只管說夢 便道我會佛法了也 將知爾行脚驢年得箇休歇麽 更有一般底 才聞人說箇休歇處 便向陰界裏閉眉合眼 老鼠孔裏作活計 黑山下坐鬼趣裏體當 便道得箇入頭路 夢見麽 似遮般底殺一萬箇 有什麽罪過 喚作打底 不遇作家 至竟只是箇掠虛漢 爾若實有箇見處 試捻來看共爾商量 莫空不識好惡矻矻地聚頭說閑葛藤 莫敎老漢見捉來勘不相當搥折脚 莫道不道 爾還皮下有血麽 以拄杖一時趁下
●鼻孔; 喩指人人自有的 平常自然的本來面目 卽本性佛性 又指修行佛道者最重要之物 意卽佛道之根本 與頂門眼睛 爲同類用語
●炙瘡瘢上著艾燋; 見上十七瑞巖師彥章炙瘡上更著艾燋
●捉搦; 捉拿 捕捉 搦 廣韻 女角切
●公才; 相公之才
●黑山; 按俱舍論十一 南贍部洲之北 三處地方各有三重黑山 其地闇黑 爲惡鬼棲止之處 於禪林中 轉喩執著情識與分別 猶如陷於黑山之暗穴 無法動彈
●體當; 體驗 體會 當 後綴
●矻矻; 禪林疏語考證二 矻矻 文選李周翰註 勤作也 又軌範註 徤作 勞極貌
스님이 상당해 이르되 화상자(和尙子; 子는 조사)여, 납승은 바로 모름지기 납승의 비공(鼻孔)을 명취(明取)해야 하나니 그래 무엇이 이 납승의 비공인가. 대중이 모두 대답이 없었다. 사운(師云) 마하반야바라밀(摩訶般若波羅蜜), 대보청(大普請)하러 내려가거라. 스님이 상당해 이르되 여러 화상자(和尙子)여, 가령(饒) 너희가 말한들 무슨 일이 있겠는가. 오히려 이는 머리 위에 머리를 놓음이며(頭上著頭) 눈 위에 서리를 더함이며(雪上加霜) 관목(棺木) 속에서 눈을 휘둥그레 뜨고 봄이며 뜸질한 흉터 위에 쑥불을 놓음이다(炙瘡瘢上著艾燋). 이것은 한바탕의 낭자(狼籍)니 이는 작은 일이 아니다. 너희가 합당히 어찌해야 하는가(合作麽生), 각자 저(箇) 탁생(托生)할 곳을 멱취(覓取)해야 좋으리니 공연히 유주엽현(遊州獵縣)하지 말아라. 다만 한화(閑話)를 착냑(捉搦; 원음이 낙. 닉으로 발음하기도 함)하고자 하여 노화상의 구동(口動)을 기다렸다가 바로 문선문도(問禪問道)하고 향상향하(向上向下)하고 여하약하(如何若何)하며 대권(大卷)을 초(抄)하고 나서 피대(皮袋; 몸둥이) 속에 채워 두고(塞在) 복탁(卜度)하며 도처의 화로변(火鑪邊)에서 3개나 5개가 취두(聚頭)하여 입으로 중얼거리며(喃喃) 들고(擧)는 다시 말하되 이것(遮箇)은 이 공재어(公才語)며 이것은 이, 속으로 좇아 말해 낸 말이며(道出語) 이것은 이. 사상(事上)으로 나아가(就) 말한 말이며(道底語) 이것은 이 체어(體語)의 체(體)다. 너희 옥리(屋裏)의 노야노양(老爺老孃)이 밥을 먹어버리고는(噇却) 다만 관대(管帶)하여 설몽(說夢)하여 바로 말하되 내가 불법을 알았다. 이에(將) 아나니 너희가 행각하여 여년(驢年)에 저(箇) 휴헐(休歇)을 얻겠는가. 다시 일반의 것(一般底)이 있어 겨우 타인이 저(箇) 휴헐처(休歇處)를 설함을 들으면 바로 음계(陰界; 陰間. 저승) 속을 향해 폐미합안(閉眉合眼)하거나 노서(老鼠)의 구멍 속에서 활계(活計)를 짓거나 흑산(黑山) 아래에서 귀굴(鬼趣) 속에 앉아 체당(體當)하면서 바로 말하되 저(箇) 입두로(入頭路)를 얻었다 하나니 꿈에라도 보았느냐. 이러함과 같은 것(似遮般底)은 1만 개를 죽인들 무슨 죄과(罪過)가 있겠는가. 때릴 것(打底)이라고 불러 짓나니 작가를 만나지 못하여 필경에 이르러서도 다만 이것은 약허한(掠虛漢)이다. 너희가 만약 실로 저(箇) 견처(見處)가 있다면 시험 삼아 잡아(捻) 와 보아라, 너희와 함께 상량(商量)하겠다. 공연히 호오(好惡)를 알지 못하면서 골골지(矻矻地; 地는 조사) 취두(聚頭)하여 쓸데없는 갈등을 설하지 말아라. 노한으로 하여금 보고 잡아와서 감험(勘驗)해 상당(相當)하지 못하면 다리를 쳐서 부러뜨리게 하지 말아라. 말하지 않았다고 말하지 말지니 너희가 도리어 피하(皮下)에 피가 있느냐. 주장자로써 일시에 쫓아내었다(趁下; 下는 조사).
●鼻孔; 사람마다 스스로 있는 것, 평상의 자연적인 본래면목, 곧 본성의 불성을 비유로 가리킴. 또 불도를 수행하는 자의 가장 중요한 물건을 가리킴. 뜻이 곧 불도의 근본임. 정문(頂門)ㆍ안정(眼睛; 눈동자)과 동류(同類)의 용어가 됨.
●炙瘡瘢上著艾燋; 위 17 서암사언장(瑞巖師彥章) 자창상갱착애초(炙瘡上更著艾燋)를 보라.
●捉搦; 착나(捉拿). 포착(捕捉). 냑(搦) 광운 녀각절(女角切; 낙).
●公才; 상공(相公)의 재능.
●黑山; 구사론11을 안험(按驗)하니 남섬부주의 북쪽에 세 곳의 지방에 각기 세 겹의 흑산이 있는데 그 지방은 암흑이며 악귀가 서지(棲止)하는 곳이 됨. 선림 중에서는 전(轉)하여 정식(情識)과 분별에 집착하면 마치 흑산의 어두운 굴에 빠짐과 같아서 동탄(動彈)할 법이 없음에 비유함.
●體當; 체험. 체회(體會). 당(當)은 후철.
●矻矻; 선림소어고증2. 골골(矻矻) 문선 이주한 주(註) 부지런히 작업함이다. 또 궤범 주(註) 꿋꿋이 지음이다. 노고가 지극한 모양이다.
問如何是佛法大意 師曰 春來草自靑 師問新羅僧 將什麽物過海 曰草賊敗也 師引手曰 汝爲什麽在我遮裏 曰恰是 師曰 更𨁝跳 問牛頭未見四祖時如何 師曰 家家觀世音 曰見後如何 師曰 火裏蟭蟉吞大蟲 問如何是雲門一句 師曰 獵月二十五 問如何是雪嶺泥牛吼 師曰 天地黑 曰如何是雲門木馬嘶 師曰 山河走 問從上來事請師提綱 師曰 朝看東南暮看西北 曰便恁麽領會時如何 師曰 東屋裏點燈 西屋裏暗坐 問十二時中如何卽得不空過 師曰 向什麽處著此一問 曰學人不會請師擧 師曰 將筆硯來 僧乃取筆硯來 師作一頌曰 擧不顧 卽差互 擬思量 何劫悟
●𨁝跳; 𨁝 蹦也 又作踣跳 勃跳
묻되 무엇이 이 불법의 대의(大意)입니까. 사왈(師曰) 봄이 오매 풀이 저절로 푸르다. 스님이 신라승(新羅僧)에게 묻되 무슨 물건을 가지고 바다를 지났는가. 가로되 초적(草賊)이 패했습니다. 스님이 손을 늘어뜨리며(引手) 가로되 네가 무엇 때문에 나의 이 속(遮裏)에 있는가. 가로되 흡시(恰是). 사왈 다시 펄쩍 뛰는구나(𨁝跳). 묻되 우두(牛頭)가 4조를 뵙지 않았을 때 어떻습니까. 사왈 가가(家家)가 관세음(觀世音)이다. 가로되 뵌 후엔 어떻습니까, 사왈 불 속의 초료(蟭蟉)가 대중(大蟲; 범)을 삼켰다. 묻되 무엇이 이 운문의 1구입니까. 사왈 납월 25다. 묻되 무엇이 이 설령(雪嶺)의 이우(泥牛)가 부르짖음입니까. 사왈 천지가 캄캄하다(黑). 가로되 무엇이 이 운문의 목마가 우는(嘶) 것입니까. 사왈 산하가 달린다. 묻되 종상래사(從上來事)를 스님의 제강(提綱)을 청합니다. 사왈 아침에 동남을 보고 저녁에 서북을 본다. 가로되 바로 이렇게 영회(領會)할 때 어떻습니까. 사왈 동옥(東屋) 속에서 점등(點燈)하고 서옥(西屋) 속에 몰래 앉았다. 묻되 12시 중에 어찌해야 곧 공과(空過; 공연히 지냄)하지 않음을 얻겠습니까. 사왈 어느 곳을 향해 이 1문(問)을 붙이느냐. 가로되 학인이 알지 못하오니 스님의 거(擧)를 청합니다. 사왈 필연(筆硯)을 가지고 오너라. 중이 이에 필연을 취해 오자 스님이 1송을 지어 가로되 거(擧)하매 돌아보지 않아도/ 곧 차호(差互; 交錯)거늘/ 사량하려고 한다면/ 어느 겁에 깨치겠는가.
●𨁝跳; 발(𨁝)은 붕(蹦; 펄쩍 뛰다)임. 또 부도(踣跳)ㆍ발도(勃跳)로 지음.
問如何是學人自己 師曰 遊山翫水 曰如何是和尙自己 師曰 賴遇維那不在 問一口吞盡時如何 師曰 我在汝肚裏 曰和尙爲什麽在學人肚裏 師曰 還我話頭來 問如何是道 師曰去 曰學人不會請師道 師曰 闍梨公憑分明何得重判 問生死到來如何排遣 師展手曰 還我生死來 問如何是父母不聽不得出家 師曰淺 曰學人不會 師曰深 問如何是學人自己 師曰 汝怕我不知 問萬機俱盡時如何 師曰 與我拈却佛殿來與汝商量 曰佛殿豈關他事 師喝曰 遮謾語漢 問如何是敎外別傳一句 師曰 對衆將來 曰直得恁麽時如何 師曰 照從何立 問如何是和尙家風 師曰 門前有讀書人 問如何是透法身句 師曰 北斗裏藏身 問如何是西來意 師曰 久雨不晴 又曰粥飯氣 問古人橫說竪說猶未知向上關棙子 如何是向上關棙子 師曰 西山東嶺靑 問如何是西來意 師曰 河裏失錢河裏漉 師有時坐良久 僧問何似釋迦當時 師曰 大衆立久快禮三拜 師嘗有頌曰 雲門聳峻白雲低 水急遊魚不敢棲 入戶已知來見解 何煩再擧轢中泥
●還我話頭來; 汝所說謊了也 無實可信 還我爲汝所說賣事來 責爾虛也 [碧巖錄不二鈔]
●公憑; 官方的證明文件
●北斗裏藏身; 禪門拈頌集第一○一六則 拈頌說話曰 道家有北斗裏藏身訣也
●古人橫說竪說猶未知向上關棙子; 本錄九黃檗希運 且如四祖下牛頭融大師橫說竪說 猶未知向上關棙子
묻되 무엇이 이 학인의 자기(自己)입니까. 사왈(師曰) 산을 유람하고 물을 구경한다(遊山翫水). 가로되 무엇이 이 화상의 자기입니까. 사왈 다행히(賴) 유나(維那)가 있지 않음을 만났다. 묻되 한입으로 삼켜 없앴을 때 어떻습니까. 사왈 내가 너의 뱃속(肚裏)에 있다. 가로되 화상이 무엇 때문에 학인의 뱃속에 있습니까. 사왈 나에게 화두를 송환해 오너라(還我話頭來). 묻되 무엇이 이 도입니까. 사왈 가거라(去). 가로되 학인이 알지 못하겠으니 스님의 말씀을 청합니다. 사왈 사리(闍梨)는 공빙(公憑)이 분명하거늘 어찌 거듭 판정(判定; 判)함을 얻겠는가. 묻되 생사가 도래하면 어떻게 물리쳐 보냅니까(排遣). 스님이 손을 펴고 가로되 나에게 생사를 송환해 오너라. 묻되 무엇이 이 부모가 청허(聽許)하지 않으면 출가를 얻지 못합입니까. 사왈 얕다(淺). 가로되 학인이 알지 못하겠습니다. 사왈 깊다(深). 묻되 무엇이 이 학인의 자기입니까. 사왈 너는 내가 알지 못함을 두려워하는가. 묻되 만기(萬機)가 모두 다했을 때 어떻습니까. 사왈 나를 위해(與) 불전(佛殿)을 집어 물리치고(拈却) 오면 너와 더불어 상량(商量)하겠다. 가로되 불전이 어찌 그 일에 상관되겠습니까. 스님이 할(喝)하고 가로되 이 거짓말 하는 자(謾語漢)야. 묻되 무엇이 이 교외별전(敎外別傳)의 1구입니까. 사왈 대중(對衆)하여 가져 오너라. 가로되 바로 이러함을 얻을 때 어떻습니까. 사왈 비춤(照)이 어디로 좇아 서느냐. 묻되 무엇이 이 화상의 가풍입니까. 사왈 문 앞에 독서인(讀書人)이 있다. 묻되 무엇이 이 법신을 투과하는 구입니까(透法身句). 사왈 북두 속에 몸을 감춘다(北斗裏藏身). 묻되 무엇이 이 서래의(西來意)입니까. 사왈 오래 비 오고 개이지 않는다. 우왈(又曰) 죽반(粥飯)의 기운(氣)이다. 묻되 고인이 횡설수설했지만 오히려 향상의 관려자를 알지 못했다(古人橫說竪說猶未知向上關棙子) 하니 무엇이 이 향상의 관려자입니까. 사왈 서산(西山)의 동령(東嶺)이 푸르다. 묻되 무엇이 이 서래의입니까. 사왈 하리(河裏)에서 돈을 잃었으며 하리에서 건진다. 스님이 어떤 때 앉아 양구(良久)했다. 승문(僧問) 석가의 당시와 어찌 같습니까(何似). 사왈 대중이 선 지 오래니 쾌히 3배 예배하라. 스님이 일찍이 송이 있어 가로되 운문은 용준(聳峻; 높이 솟아 험준함)하여 백운이 낮고/ 물이 급해 유어(遊魚)가 감히 깃들지 못한다/ 입호(入戶)하매 이미 온 견해를 알거늘/ 어찌 노고롭게 역중(轢中)의 진흙을 거듭 들겠는가.
●還我話頭來; 네가 설한 바는 잠꼬대라서 실로 가히 믿을 게 없다. 너를 위해 설한 바인 매사(賣事)를 나에게 돌려달라. 그의 허(虛)를 책망(責望)함임 [벽암록불이초].
●公憑; 관방(官方; 관가의 법)의 증명문건(證明文件).
●北斗裏藏身;선문염송집 제1016칙 염송설화에 가로되 도가에 북두리장신결(北斗裏藏身訣)이 있다.
●古人橫說竪說猶未知向上關棙子; 본록(本錄) 9 황벽희운(九黃檗希運). 차여(且如; 例擧를 표시) 4조 아래의 우두융(牛頭融) 대사는 횡설수설(橫說竪說; 저본에 竪를 堅으로 지었음)했지만 오히려 향상(向上)의 관려자(關棙子)를 알지 못했다.
衢州南臺仁禪師 問如何是南臺境 師曰 不知貴 曰畢竟如何 師曰 闍梨卽今在什麽處 師後遷住本郡鎭境寺而終
구주(衢州) 남대인(南臺仁) 선사. 묻되 무엇이 이 남대(南臺)의 경계입니까. 사왈(師曰) 귀함을 알지 못한다. 가로되 필경 어떻습니까. 사왈 사리(闍梨)가 즉금 어느 곳에 있느냐. 스님이 후에 본군(本郡) 진경사(鎭境寺)로 옮겨 머물다가 마쳤다.
泉州東禪和尙 初開堂 僧問 人王迎請法王出世 如何提唱宗乘卽得不謬於祖風 師曰 還奈得麽 曰若不下水焉知有魚 師曰 莫閑言語 問如何是佛法最親切處 師曰 過也 問學人末後來 請師最先句 師曰 什麽處來 問如何是學人己分事 師曰苦 問如何是佛法大意 師曰 幸自可憐生 剛要異鄕邑
천주(泉州) 동선화상(東禪和尙). 처음 개당(開堂)하자 승문(僧問) 인왕(人王)이 영청(迎請)하고 법왕(法王)이 출세했습니다. 어떻게 종승(宗乘)을 제창(提唱)해야 곧 조풍(祖風)에 어긋나지(謬) 않음을 얻겠습니까. 사왈(師曰) 도리어 어찌함을 얻겠는가(還奈得麽). 가로되 만약 물에 내려가지 않으면 어찌 고기가 있는 줄 알겠습니까. 사왈 쓸데없는 언어를 하지 말아라. 묻되 무엇이 이 불법의 가장 친절한 곳입니까. 사왈 지나갔다. 묻되 학인이 말후(末後)에 왔으니 스님의 최선(最先)의 구(句)를 청합니다. 사왈 어느 곳에서 왔느냐. 묻되 무엇이 이 학인의 자기의 분상의 일(己分事)입니까. 사왈 괴롭다(苦). 묻되 무엇이 이 불법의 대의(大意)입니까. 사왈 행자가련생(幸自可憐生; 본래 可愛한 것)이거늘 다른 향읍(鄕邑)을 강요(剛要)하는가.
餘杭大錢山從襲禪師 雪峯之上足也 自本師印解洞曉宗要 常曰 擊關南鼓唱雪峯歌 後入浙中謁錢王 王欽服道化 命居此山而闡法焉 僧問 不因王請不因衆聚 請師直道西來的的意 師曰 那邊師僧過遮邊著 曰學人不會乞師指示 師曰 爭得恁麽不識好惡 問閉門造車出門合轍 如何是閉門造車 師曰 造車卽不問 汝作麽生是轍 曰學人不會乞師指示 師曰 巧匠施工不露斤斧
여항(餘杭) 대전산(大錢山) 종습선사(從襲禪師). 설봉의 상족(上足)이다. 본사(本師) 인해(印解)로부터 종요(宗要)를 통효(洞曉; 환히 깨닫다)했다. 늘 가로되 관남고(關南鼓)를 치고(擊) 설봉가(雪峯歌)를 창(唱)한다. 후에 절중(浙中)에 들어가 전왕(錢王)을 예알(禮謁)했는데 왕이 도화(道化)에 흠복(欽服)했고 명(命)하여 이 산에 거주하며 천법(闡法)하게 했다. 승문(僧問) 왕의 청을 인하지 않고 대중의 모임(聚)을 인하지 않고 스님에게 청하오니 서래(西來)의 적적(的的; 확실)한 뜻을 바로 말하십시오. 사왈(師曰) 저쪽(那邊)의 사승(師僧)은 이쪽(遮邊)에 이르거라(過). 가로되 학인이 알지 못하겠으니 스님의 지시를 구걸합니다. 사왈 어찌 이렇게 호오(好惡)를 알지 못함을 얻느냐. 묻되 폐문(閉門)하고 조거(造車)하매 출문(出門)하여 합철(合轍; 軌道에 합하다)한다 하니 무엇이 이 폐문하고 조거함입니까. 사왈 조거는 곧 묻지(問; 저본에 門으로 지었음) 않나니 네가 무엇이(作麽生) 이 철(轍)이라 하느냐. 가로되 학인이 알지 못하겠으니 스님의 지시를 구걸합니다. 사왈 교장(巧匠)이 시공(施工)하면 근부(斤斧; 도끼)를 드러내지 않는다.
福州永泰和尙 問承聞和尙見虎是否 師作虎聲 僧作打勢 師曰 遮死漢 問如何是天眞佛 師乃拊掌曰 不會不會
복주(福州) 영태화상(永泰和尙). 묻되 받들어 듣건대(承聞) 화상이 범을 보았다 하니 그렇습니까. 스님이 호성(虎聲)을 지었다. 중이 때리는 자세를 지었다. 사왈(師曰) 이 사한(死漢)아. 묻되 무엇이 이 천진불(天眞佛)입니까. 스님이 손바닥을 두드리고 가로되 알지 못한다(不會), 알지 못한다.
池州和龍山壽昌院守訥 號妙空禪師 福州閩縣人也 姓林氏 受業於古田壽峯 問未到龍門如何湊泊 師曰 立命難存 有新到僧參 師問 近離什麽處 曰不離方寸 師曰 不易來 僧亦曰不易來 師與一掌 問如何是傳底心 師曰 再三囑汝莫向人說 問如何是從上宗乘 師曰 向闍梨口裏著得麽 問省要處請師一接 師曰甚是省要
●立命; 修身養性以奉天命
지주(池州) 화룡산(和龍山) 수창원(壽昌院) 수눌(守訥) 호 묘공선사(妙空禪師). 복주(福州) 민현(閩縣) 사람이며 성이 임씨(林氏)니 고전(古田) 수봉(壽峯)에게서 수업(受業)했다. 묻되 용문(龍門)에 이르지 않고 어떻게 주박(湊泊; 머무르다)합니까. 사왈(師曰) 입명(立命)을 두기(存) 어렵다. 어떤 신도승(新到僧)이 참(參)했다. 사문(師問) 최근에 어느 곳을 떠났느냐. 가로되 방촌(方寸)을 여의지 않습니다. 사왈 쉽게 오지 못했구나. 중도 또한 가로되 쉽게 오지 못했습니다. 스님이 1장(掌)을 주었다. 묻되 무엇이 이 전(傳)한 마음입니까. 사왈 재삼(再三) 부촉(付囑)하노니 사람을 향해 설하지 말아라. 묻되 무엇이 이 종상(從上)의 종승(宗乘)입니까. 사왈 사리(闍梨)의 입속을 향해 놓음(著)을 얻겠느냐. 묻되 성요처(省要處)를 스님에게 청하오니 일접(一接)하십시오. 사왈 심히 이 성요다.
●立命; 수신(修身)하고 양성(養性)하며 천명(天命)을 받듦.
建州夢筆和尙 問如何是佛 師曰 不誑汝 曰莫便是否 師曰 汝誑他 閩王請師齋 問和尙還將得筆來也無 師曰 不是稽山繡管 慚非月裏兔毫 大王旣垂顧問 山僧敢不通呈 又問 如何是法王 師曰 不是夢筆家風
●稽山; 卽會稽山 原名茅山 亦稱畝山 位於浙江紹興北部平原南部 主峰在嵊州市西北 景區內有大禹陵 爐峰禪寺等名勝古跡 最高峰爲香爐峰 [百度百科]
●兔毫; 毛筆的一種 用兔毛制成 故名
건주(建州) 몽필화상(夢筆和尙). 묻되 무엇이 이 부처입니까. 사왈(師曰) 너를 속이지(誑) 않는다. 가로되 바로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왈 네가 그를 속인다. 민왕(閩王)이 스님을 청해 재(齋)하고 묻되 화상은 도리어 붓을 가져왔습니까 또는 아닙니까. 사왈 이 계산(稽山)의 수관(繡管)이 아니며 달 속의 토호(兔毫)가 아님이 부끄럽습니다. 대왕이 이미 고문(顧問)을 내리셨으나(垂) 산승이 감히 통정(通呈; 通報하여 보임)하지 못합니다. 또 묻되 무엇이 이 법왕입니까. 사왈 이 몽필(夢筆)의 가풍이 아닙니다.
●稽山; 즉 회계산(會稽山). 원명은 모산(茅山)이며 또 명칭이 묘산(畝山)임. 절강 소흥 북부평원의 남부에 위치함. 주봉은 승주시 서북에 있음. 경구(景區) 안에 대우릉과 노봉선사 등의 명승고적이 있으며 최고봉은 향로봉이 됨 [백도백과].
●兔毫; 모필의 일종. 토끼의 털을 사용해 만들어 이루는지라 고로 이름함.
福州古田極樂元儼禪師 問如何是極樂家風 師曰 滿目看不盡 問萬法本無根 未審敎學人承當什麽 師曰 莫䆿語 問久處暗室未達其源 今日上來乞師一接 師曰 莫閉眼作夜好 曰恁麽卽優曇華拆 曲爲今時 向上宗風如何垂示 師曰 汝還識也無 曰恁麽卽息疑去也 師曰 莫向大衆前䆿語 問摩騰入漢卽不問 達磨來梁時如何 師曰 如今豈謬 曰恁麽卽理出三乘華開五葉 師曰 說什麽三乘五葉 出去
●優曇華; 玄應音義二十一 烏曇跋羅花 舊言優曇波羅花 或作何雲婆羅花 此葉似梨 果大如捲 其味甛 無花而結子 亦有花而難値 故經中以喩希有者也 ▲合部金光明經壽量品 於無量時 諸佛世尊 乃出於世 譬如優曇婆羅華 於無量時乃出於世 ▲佛本行集經三十一 有一大樹 名優曇婆羅(隋言求願) 時彼樹有一大獼猴 在於樹頭 取果子食 ▲大寶積經一百九 譬如尼拘陀樹子 或優曇婆羅等諸樹子 雖復細小 而能生極大樹枝
복주(福州) 고전(古田) 극락(極樂; 極樂院) 원엄선사(元儼禪師). 묻되 무엇이 이 극락의 가풍입니까. 사왈(師曰) 눈 가득히 보아도 다하지 않는다. 묻되 만법은 본래 근본이 없는데 미심하오니 학인으로 하여금 무엇을 승당(承當)케 합니까. 사왈 예어(䆿語; 잠꼬대)하지 말아라. 묻되 오래 암실(暗室)에 거처하면서 그 근원(根源)을 통달(通達; 達)하지 못했습니다. 금일 올라왔으니 스님의 일접(一接)을 구걸합니다. 사왈 눈 감고 밤을 짓지 말아야 좋으니라.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 우담화(優曇華)가 터져(拆; 저본에 折로 지었음) 위곡(委曲)히 금시(今時)를 위합니다. 향상(向上)의 종풍을 어떻게 수시(垂示)하시겠습니까. 사왈 네가 도리어 아느냐 또는 아니냐.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 의심을 쉬어 가겠습니다(息疑去也). 사왈 대중 앞을 향해 예어(䆿語)하지 말아라. 묻되 마등(摩騰; 迦葉摩騰)의 입한(入漢)은 곧 묻지 않습니다. 달마가 내량(來梁)할 때 어떻습니까. 사왈 여금에 어찌 어긋나겠는가(謬).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 이치는 3승(乘)을 내고 꽃은 5엽(葉)을 피울 것입니다. 사왈 무슨 3승과 5엽을 설하느냐, 나가거라.
●優曇華; 현응음의21 오담발라화(烏曇跋羅花; 梵 udumbara) 구역(舊譯)에 말하되 우담바라화(優曇波羅花)며 혹은 하운바라화(何雲婆羅花)로 지었다. 이것의 잎은 배나무와 같고 열매는 크기가 주먹과 같으며 그 맛은 달다. 꽃이 없으면서 열매를 맺는다. 또한 꽃이 있음을 만나기 어려우므로 고로 경중에서 희유한 것에 비유한다. ▲합부금광명경 수량품. 무량한 때 제불세존이 세상에 출현했으니 비유컨대 우담바라화(優曇婆羅華)가 무량한 때 세상에 출현함과 같다. ▲불본행집경31. 한 큰 나무가 있었으니 이름이 우담바라(優曇婆羅; 隋나라 말로 求願)다. 때에 그 나무에 한 마리의 큰 원숭이(獼猴)가 있어 나무 꼭대기에 있으면서 과자(果子; 열매)를 취해 먹었다. ▲대보적경109. 비유컨대 니구타수자(尼拘陀樹子; 子는 씨)나 혹 우담바라(優曇婆羅) 등 여러 수자(樹子)가 비록 다시 세소(細小)하지만 능히 극대(極大)의 수지(樹枝)를 냄과 같다.
福州芙蓉山如體禪師 僧問 如何是古人曲調 師良久曰 聞麽 曰不聞 師示一頌曰 古曲發聲雄 今時韻亦同 若敎第一指 祖佛盡迷蹤
복주(福州) 부용산(芙蓉山) 여체선사(如體禪師). 승문(僧問) 무엇이 이 고인의 곡조입니까. 스님이 양구(良久)하고 가로되 듣느냐. 가로되 듣지 못합니다. 스님이 1송(頌)을 보여 가로되 고곡(古曲)의 발성(發聲)이 웅장(雄壯; 雄)하고/ 금시의 운(韻)도 또한 한가지다/ 만약 제일지(第一指)를 가르치려면(敎)/ 조불(祖佛)이 모두 자취(蹤)를 미(迷)한다.
洛京憩鶴山和尙 柏谷長老來訪 師曰 太老去也 谷曰 還我不老底來 師與一摑 問駿馬不入西秦時如何 師曰 向什麽處去
낙경(洛京) 게학산(憩鶴山) 화상. 백곡(柏谷) 장로가 내방(來訪)했다. 사왈(師曰) 너무 늙어 가는구나(太老去也). 곡왈(谷曰) 나에게 늙지 않는 것을 송환해 오너라. 스님이 한 번 후려갈겨 주었다. 묻되 준마(駿馬)가 서진(西秦)에 들지 않을 때 어떻습니까. 사왈 어느 곳을 향해 갔느냐.
潭州潙山棲禪師 問正恁麽時如何親近 師曰 汝擬作麽生親近 曰豈無方便門 師曰 開元龍興大藏小藏 問如何是速疾神通 師曰 新衣成弊帛 問如何是黃尋橋 師曰 賺却多少人 問不假忉忉 如何是和尙家風 師曰 莫作野干聲
담주(潭州) 위산서(潙山棲) 선사. 묻되 바로 이러한 때 어떻게 친근(親近)합니까. 사왈(師曰) 네가 어떻게 친근하려고 하느냐. 가로되 어찌 방편문(方便門)이 없겠습니까. 사왈 개원용흥(開元龍興)이며 대장소장(大藏小藏)이다. 묻되 무엇이 이 속질(速疾)의 신통입니까. 사왈 새옷이 해진 비단을 이루었다. 묻되 무엇이 이 황심교(黃尋橋)입니까. 사왈 다소인(多少人)을 속여버렸는가. 묻되 도도(忉忉; 多語)를 빌리지 않고 무엇이 이 화상의 가풍입니까. 사왈 야간성(野干聲)을 짓지 말아라.
吉州潮山延宗禪師 資福和尙來謁 師下禪床接 資福問曰 和尙住此山得幾年也 師曰 鈍鳥棲蘆困魚止箔 曰恁麽卽眞道人也 師曰 且坐喫茶 問如何是潮山 師曰不宿屍 曰如何是山中人 師曰 石上種紅蓮 問如何是和尙家風 師曰 切忌犯朝儀
●困魚止箔; 祖庭事苑五 困魚止箔 箔 簾也 寶藏論曰 夫進道之由 中有萬途 困魚止箔 病鳥栖蘆 說者曰 此擧事以況漸 言學者進悟之由也 途道也 卽八萬四千之法門 隨機各解 如困魚止小箔 病鳥栖蘆叢 雖各得所安 俱未至於大海深林也
길주(吉州) 조산(潮山) 연종선사(延宗禪師). 자복화상(資福和尙)이 내알(來謁)하자 스님이 선상에서 내려와 접대(接對)했다. 자복이 문왈(問曰) 화상이 이 산에 거주한 지 몇 년이나 지났습니까(得). 사왈(師曰) 둔조가 갈대에 깃들고(鈍鳥棲蘆) 곤어가 발에 머문다(困魚止箔).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 진도인(眞道人)입니다. 사왈 다만 앉아서 끽다(喫茶)하게. 묻되 무엇이 이 조산(潮山)입니까. 사왈 시체를 재우지 않는다. 가로되 무엇이 이 산중인(山中人)입니까. 사왈 돌 위에 홍련(紅蓮)을 심는다. 묻되 무엇이 이 화상의 가풍입니까. 사왈 조의(朝儀; 朝廷의 예의)를 범함을 간절히 기피(忌避)하라.
●困魚止箔; 조정사원5. 곤어지박(困魚止箔) 박(箔)은 렴(簾; 발)임. 보장론에 가로되 무릇 진도(進道)의 유래는 중간에 만도(萬途)가 있다. 곤궁한 고기가 발(簾)에 머물고(困魚止箔) 병든 새가 갈대에 깃든다(病鳥栖蘆). 설자(說者)가 가로되 이것은 일(事)을 들어 황점(況漸; 況은 비유할 황. 곧 비유의 漸次)을 삼음이다. 말하자면 학자의 진오(進悟; 進前하여 깨침)의 유래다. 도(途)는 도(道)니 곧 팔만사천의 법문이다. 근기를 따라 각기 이해함이 마치 곤궁한 고기가 작은 발에 머물고 병든 새가 갈대 숲(叢)에 깃드는 것과 같다. 비록 각기 평안한 곳을 얻었지만 모두 대해와 심림(深林)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益州普通山普明大師 問如何是佛性 師曰 汝無佛性 曰蠢動含靈皆有佛性 學人爲何却無 師曰 爲汝向外求 問如何是玄玄之珠 師曰 遮箇不是 曰如何是玄玄珠 曰失却也
익주(益州) 보통산(普通山) 보명대사(普明大師). 묻되 무엇이 이 불성입니까. 사왈(師曰) 너는 불성이 없다. 가로되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모두 불성이 있거늘 학인은 무엇 때문에(爲何) 도리어 없습니까. 사왈 네가 밖을 향해 구하기 때문이다. 묻되 무엇이 이 현현지주(玄玄之珠)입니까. 사왈 이것(遮箇)은 이것이 아니다. 가로되 무엇이 이 현현주(玄玄珠)입니까. 가로되 잃어버렸다.
隋州雙泉山梁家庵永禪師 問達磨九年面壁意如何 師曰 睡不著 護國長老來 師問 隨陽一境是男是女 各申一問問問各別 長老將何秖對 護國以手空中畫圓相 師曰 謝長老慈悲 曰不敢 師低頭不顧 問如何得頓息諸緣去 師曰 雪上更加霜
수주(隋州) 쌍천산(雙泉山) 양가암(梁家庵) 영선사(永禪師). 묻되 달마가 9년 면벽한 뜻이 무엇입니까. 사왈(師曰) 잠들지 못했다(睡不著). 호국장로(護國長老)가 왔다. 사문(師問) 수양(隨陽)의 일경(一境)은 이 남자인가 이 여자인가. 각각 일문(一問)을 펴는데 문문(問問)이 각기 다르다. 장로가 무엇을 가지고 지대(秖對)하겠는가. 호국이 손으로써 공중에 원상을 그렸다. 사왈 장로의 자비에 감사한다. 가로되 불감(不敢). 스님이 머리를 숙이고 돌아보지 않았다. 묻되 어찌해야 제연(諸緣)을 돈식(頓息)함을 얻어 가겠습니까. 사왈 설상에 다시 가상이다(雪上更加霜).
漳州保福院超悟禪師〈第二世住〉 問魚未透龍門時如何 師曰 養性深潭 曰透出時如何 師曰 才昇霄漢衆類難追 曰昇後如何 師曰 慈雲普覆潤及大千 曰還有不受潤者無 師曰有 曰如何是不受潤者 師曰直杌撐太陽
장주(漳州) 보복원(保福院) 초오선사(超悟禪師)〈第二世住〉. 묻되 물고기가 용문(龍門)을 투출(透出)하지 못했을 때 어떻습니까. 사왈 심담(深潭)에서 양성(養性)한다. 가로되 투출한 때 어떻습니까. 사왈 겨우 소한(霄漢; 하늘)에 오르매 중류(衆類)가 쫓기 어렵다. 가로되 오른 후엔 어떻습니까. 사왈 자운(慈雲)이 널리 덮어 윤택(潤澤)이 대천(大千)에 미친다. 가로되 도리어 윤택을 받지 않는 자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사왈 있다. 가로되 무엇이 이 윤택을 받지 않는 자입니까. 사왈 곧은 나무 그루터기(杌)가 태양을 지탱(支撑)한다.
太原孚上座 遍歷諸方名聞宇內 嘗遊浙中登徑山法會 一日於大佛殿前有僧問 上座曾到五臺否 師曰 曾到 曰還見文殊麽 師曰見 曰什麽處見 師曰 徑山佛殿前見 其僧後適閩川 擧似雪峯 曰何不敎伊入嶺來 師聞乃趨裝而邁 初上雪峯廨院憩錫 因分甘子與僧 長慶稜和尙問 什麽處將來 師曰 嶺外將來 曰遠涉不易擔負得來 師曰甘子甘子 方上參雪峯禮拜訖 立于座右 雪峯才顧視 師便下看主事 異日雪峯見師乃指日示之 師搖手而出 雪峯曰 汝不肯我 師曰 和尙搖頭某甲擺尾 什麽處不肯和尙 曰到處也須諱却
●廨院; 禪林中 主管寺院之會計接待等事務之處所
●憩錫; 意謂行脚僧人棲止于某寺院 或其他適宜之處 錫 拄杖
●甘子; 柑樹的果實
태원부(太原孚) 상좌. 제방을 편력(遍歷)하며 명성이 우내(宇內; 온 세상)에 알려졌다(聞). 일찍이 절중(浙中)을 유람하다가 경산법회(徑山法會)에 올랐다. 어느 날 대불전(大佛殿) 앞에서 어떤 중이 묻되 상좌는 일찍이 오대(五臺)에 이르렀는가. 사왈(師曰) 일찍이 이르렀다. 가로되 도리어 문수(文殊)를 보았는가. 사왈 보았다. 가로되 어느 곳에서 보았는가. 사왈 경산(徑山)의 불전(佛殿) 앞에서 보았다. 그 중이 후에 민천(閩川)에 갔다가(適) 설봉에게 들어 보이자 가로되 왜 그로 하여금 입령(入嶺)하여 오게 하지 않는가. 스님이 듣고서 이에 행장(行裝)을 달려(趨) 나아갔다(邁). 처음에 설봉에 올라 해원(廨院)에서 게석(憩錫)했다. 감자(甘子)를 나누어 중에게 줌으로 인해 장경릉(長慶稜) 화상이 묻되 어느 곳에서 가지고 왔는가. 사왈 영외(嶺外)에서 가지고 왔다. 가로되 원섭(遠涉)하면서 쉽게 담부(擔負)하여 얻어 오지 않았겠군. 사왈 감자(甘子), 감자. 바야흐로 올라가 설봉을 참(參)해 예배하여 마치자(訖) 좌우(座右)에 섰다. 설봉이 겨우 돌아보자 스님이 바로 내려가 주사(主事)를 보았다. 다른 날 설봉이 스님을 보자 이에 해를 가리켜 보였다. 스님이 손을 흔들며 나갔다. 설봉이 가로되 네가 나를 긍정하지 않느냐. 사왈 화상이 머리를 흔들매(搖) 모갑이 꼬리를 흔들거늘(擺) 어느 곳에서 화상을 긍정하지 않았습니까. 가로되 도처(到處)에서 또한 꼭 숨겨버려라(諱却).
●廨院; 선림 중 사원의 회계와 접대 등 사무를 주관하는 처소.
●憩錫; 뜻은 이르자면 행각하는 승인이 어떤 사원이나 혹 기타 마땅한 곳에 서지(棲止)함임. 석(錫)은 주장자.
●甘子; 감수(柑樹; 귤나무)의 과실(果實).
一日衆僧晩參 雪峯在中庭臥 師曰 五州管內只有遮和尙較些子 雪峯便起去 雪峯嘗問師曰 見說臨濟有三句是否 師曰是 曰作麽生是第一句 師擧目視之 雪峯曰 此猶是第二句 如何是第一句 師叉手而退 自此雪峯深器之 室中印解師資道成 師更不他遊而掌浴室焉 一日玄沙上問訊 雪峯曰 此間有箇老鼠子 今在浴室裏 玄沙曰 待與和尙勘破 言訖到浴室遇師打水 玄沙曰 相看上座 師曰 已相見了 玄沙曰 什麽劫中曾相見 師曰 𥋙睡作麽 玄沙却入方丈白雪峯曰 已勘破了 雪峯曰 作麽生勘伊 玄沙擧前語 雪峯曰 汝著賊也 鼓山晏和尙問師 父母未生時鼻孔在什麽處 師曰 老兄先道 晏曰 如今生也 汝道在什麽處 師不肯 晏却問 作麽生 師曰 將手中扇子來 晏與扇子再徵之 師默置 晏罔測 乃敺之一拳 師在庫前立 有僧問如何是觸目菩提 師踢狗子作聲走 僧無對 師曰 小狗子不消一踢 師不出世 諸方目爲太原孚上座 終于維揚
●印解; 印證解決之義
●相看; 賓主會見曰相看 禪林之語
어느 날 중승(衆僧)이 만참(晩參)에 설봉이 중정(中庭)에 있으면서 누웠다. 사왈(師曰) 오주(五州)의 관내(管內)에 다만 이 화상이 있어 조금은 상당하다(較些子). 설봉이 바로 일어나서 갔다. 설봉이 일찍이 스님에게 물어 가로되 말함을 듣건대(見說) 임제에 3구(句)가 있다고 하던데 그런가. 사왈 그렇습니다. 가로되 무엇이(作麽生) 이 제1구인가. 가로되 이것이 제1구입니다 하고 스님이 눈을 들어 보았다. 설봉이 가로되 이것은 오히려 이 제2구다. 무엇이 이 제1구인가. 스님이 차수(叉手)하고 물러났다. 이로부터 설봉이 깊이 법기(法器)로 여겼고 실중(室中)에서 인해(印解)하여 사자(師資)의 도가 이루어졌다. 스님이 다시 딴 데로 유방(遊方)하지 않고 욕실(浴室)을 관장(管掌)했다. 어느 날 현사(玄沙)가 올라와 문신(問訊)하자 설봉이 가로되 차간(此間)에 저(箇) 노서자(老鼠子; 子는 조사)가 있는데 지금 욕실 속에 있다. 현사가 가로되 화상을 위해(與) 감파(勘破)함을 기다리십시오. 말을 마치자 욕실에 이르러 타수(打水; 取水)하는 스님을 만났다. 현사가 가로되 상좌를 상간(相看)한다. 사왈 이미 상견했다. 현사가 가로되 어느 겁중(劫中)에 일찍이 상견했는가. 사왈 압수(𥋙睡; 𥋙은 睡)하여 무엇하겠는가. 현사가 도리어 방장에 들어가 설봉에게 사뢰어(白) 가로되 이미 감파했습니다. 설봉이 가로되 어떻게 그를 감파했는가. 현사가 전어(前語)를 들었다. 설봉이 가로되 너는 도적에게 붙었다(著賊也). 고산안(鼓山晏; 神晏) 화상이 스님에게 묻되 부모가 나지 않은 때(父母未生時) 비공(鼻孔)이 어느 곳에 있는가. 사왈 노형이 먼저 말하라. 안왈(晏曰) 여금에 났다(生也). 네가 말하라 어느 곳에 있느냐. 스님이 불긍(不肯)하자 안(晏)이 도리어 묻되 어떠한가. 사왈 수중의 부채(扇子)를 가지고 오너라. 안이 부채를 주고 다시 징문(徵問)하자 스님이 묵치(默置; 默然)했다. 안이 망측(罔測)하자 이에 한 주먹 때렸다(敺; 毆와 같음). 스님이 고전(庫前; 庫堂 앞)에 섰는데 어떤 중이 묻되 무엇이 이 촉목보리(觸目菩提)입니까. 스님이 개(狗子)를 차자(踢) 소리를 지르며 달아났다. 중이 대답이 없었다. 사왈 작은 개(小狗子)가 한 번 참(踢)도 쓰이지 않는다(不消). 스님은 출세하지 않았고 제방에서 명목(名目)해 태원부상좌(太原孚上座)라 했다. 유양(維揚)에서 마쳤다.
●印解; 인증(印證)하고 해결함의 뜻.
●相看; 빈주가 회견함을 가로되 상간이니 선림의 용어.
南嶽般舟道場寶聞大師惟勁 福州人也 素持苦行不衣繒纊 惟壞衲以度寒暑 時謂頭陀焉 初參雪峯深入淵奧 復問法玄沙之席心印符會 一日謂鑒上座曰 聞汝註楞嚴經 鑒曰 不敢 師曰 二文殊汝作麽生註 曰請師鑒 師乃揚袂而去 唐光化中入南嶽住報慈東藏〈亦號三生藏〉 藏中有鏡燈一座 卽華嚴第三祖賢首大師之所製也 師覩之頓喻廣大法界重重帝網之門 佛佛羅光之像 因美之曰 此先哲之奇功 苟非具不思議善權之智 何以創焉 乃著五字頌五章 覽之者悟理事相融 後終於南嶽 師於梁開平中撰續寶林傳四卷 紀貞元之後禪門繼踵之源流也 又製七言覺地頌 廣明諸敎緣起 別著南嶽高僧傳 皆流傳于世
●二文殊; 楞嚴經二 如是世尊 我眞文殊 無是文殊 何以故 若有是者 則二文殊 然我今日非無文殊 於中實無是非二相
●賢首; 唐代華嚴宗第三祖法藏 字賢首
●續寶林傳; 四卷 後梁惟勁編 內容集唐昭宗光化年(898-900)中以後宗師之機緣而成 然今佚而不傳 [釋氏稽古略三]
남악 반주도량(般舟道場) 보문대사(寶聞大師; 賜號) 유경(惟勁). 복주(福州) 사람이며 본디(素) 고행(苦行)을 가졌고 증광(繒纊; 비단옷과 솜옷)을 입지(衣) 않고 오직 괴납(壞衲)으로 한서(寒暑)를 지낸지라(以度) 당시에 이르기를 두타(頭陀)라 했다. 설봉을 초참(初參)하여 연오(淵奧; 深奧)에 심입(深入)했고 다시 현사지석(玄沙之席)에서 문법(問法)하여 심인(心印)이 부회(符會; 符合)했다. 어느 날 감상좌(鑒上座)에게 일러 가로되 듣건대 네가 릉엄경을 주(註)한다 하더라. 감왈(鑒曰) 불감(不敢)입니다. 사왈(師曰) 이문수(二文殊)를 네가 어떻게 주(註)하느냐. 가로되 스님의 감별(鑒別)을 청합니다. 스님이 이에 양몌(揚袂; 소매를 떨치다)하고 갔다. 당 광화(光化; 898-901) 중 남악에 들어가 보자(報慈) 동장(東藏)〈亦號三生藏〉에 거주했다. 장중(藏中)에 경등(鏡燈) 1좌(座; 量詞)가 있었으니 곧 화엄 제3조 현수대사(賢首大師)가 제작한 것이다(所製). 스님이 이를 보고 광대한 법계(法界)의 중중(重重)한 제망지문(帝網之門)과 불불(佛佛)의 나광지상(羅光之像; 광명을 펼친 像)을 문득 깨쳤다(喻). 인하여 찬미해 가로되 이것은 선철(先哲)의 기공(奇功)이다. 참으로(苟) 부사의(不思議)한 선권지지(善權之智)를 갖추지 않았다면 어떻게(何以) 창제(創製; 創)했겠는가. 이에 오자송(五字頌) 오장(五章)을 지었는데(著) 열람하는 자가 이사(理事)의 상융(相融)을 깨달았다. 후에 남악에서 마쳤다. 스님이 양(梁) 개평(開平; 907-911) 중 속보림전(續寶林傳) 4권을 지었는데 정원(貞元; 785-805) 후의 선문의 계종(繼踵)의 원류(源流)를 기록(紀; 記와 통함)했다. 또 칠언각지송(七言覺地頌)을 지었는데(製) 제교(諸敎)의 연기(緣起)를 널리 밝혔고 따로 남악고승전(南嶽高僧傳)을 지었다(著). 모두 세상에 유전(流傳)한다.
●二文殊; 릉엄경2. 이와 같습니다, 세존이시여. 나는 진문수(眞文殊)며 시(是)의 문수가 없습니다. 무슨 연고냐, 만약 시(是)가 있다면 곧 이문수(二文殊)이겠지만 그러나 나는 금일에 무(無)의 문수가 아니니 어중(於中)에 실로 시비이상(是非二相)이 없습니다.
●賢首; 당대 화엄종 제3조 법장(法藏)의 자가 현수.
●續寶林傳; 4권. 후량(後梁) 유경(惟勁)이 편(編)했음. 내용은 당 소종(昭宗) 광화년(光化年; 898-900) 중 이후의 종사의 기연을 모아 이루었음. 그러나 지금은 없어져서 전하지 않음 [석씨계고략3].
景德傳燈錄卷第十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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