荷澤會禪師法嗣
沂水蒙山光寶禪師
幷州人也 姓周氏 初謁荷澤 澤謂之曰 汝名光寶 名以定體 寶卽己有 光非外來 縱汝意用而無少乏 長夜蒙照而無間歇 汝還信否 師曰 信則信矣 未審光之與寶 同邪異邪 澤曰 光卽寶 寶卽光 何有同異之名乎 師曰 眼耳緣聲色時 爲復抗行 爲有回互 澤曰 抗互且置 汝指何法爲聲色之體乎 師曰 如師所說 卽無有聲色可得 澤曰 汝若了聲色體空 亦信眼耳諸根 及與凡與聖平等如幻 抗行回互 其理昭然 師由是領悟 禮辭而去 初隱沂水蒙山 於唐元和二年圓寂
●幷州; 今四川省太原
●抗行; 互相對立 不發生關係
●回互; 甲乙互相交雜涉入之意 如六根對於前境 能辨別其聲色等 謂之根境回互是也 彼華嚴所謂理事無礙及事事無礙 可配於此回互 理事各立 事事住位 可配於不回互
●昭然; 明明白白 顯而易見
기수(沂水; 山東) 몽산(蒙山) 광보선사(光寶禪師)
병주(幷州) 사람이며 성이 주씨(周氏)다. 처음 하택(荷澤; 神會)을 참알하자 하택이 일러 가로되 너의 이름이 광보(光寶)니 이름으로 체를 정한다(名以定體). 보(寶)는 곧 자기에게 있고 광(光)은 밖에서 구하지 않나니 비록(縱) 너의 뜻대로 쓰더라도 적거나 모자람(少乏)이 없다. 장야(長夜)에 비춤을 입어(蒙照) 간헐(間歇)이 없나니 네가 도리어 믿느냐. 사왈(師曰) 믿기는 곧 믿지만 미심하오니 광(光)과 보(寶)가 같습니까, 다릅니까. 하택이 가로되(澤曰) 광(光)이 곧 보(寶)며 보가 곧 광이거늘 무슨 동이(同異)의 이름이 있겠는가. 사왈 안이(眼耳)가 성색(聲色)을 반연(攀緣)할 때 다시 항행(抗行)이 됩니까, 회호(回互)가 있음이 됩니까. 택왈(澤曰) 항호(抗互; 抗行과 回互)는 그래 두고 네가 가리켜라, 어떤 법이 성색의 체가 되는가. 사왈 스님이 설하신 바와 같이 곧 가히 얻을 성색이 있지 않습니다. 택왈(澤曰) 네가 만약 성색의 체가 공(空)한 줄 깨닫는다면(了) 또한 안이(諸根)의 제근(諸根)이 및 범성(凡聖)과 더불어(與凡與聖) 평등하여 환(幻)과 같은 줄 믿으리니 항행과 회호의 그 이치가 소연(昭然)하다. 스님이 이로 말미암아 영오(領悟)했고 예사(禮辭; 예배하고 고별하다)하고 떠났으며 처음에 기수(沂水) 몽산(蒙山)에 은거했다. 당 원화(元和) 2년(807) 원적(圓寂)했다.
●幷州; 지금의 사천성(四川省) 태원(太原).
●抗行; 호상(互相) 대립하여 관계가 발생하지 않음.
●回互; 갑과 을이 호상 교잡(交雜)하면서 섭입(涉入)함의 뜻. 예컨대(如) 6근이 전경(前境)을 상대해 능히 그 소리와 색을 변별하는 등이니 이를 일러 근경(根境)이 회호(回互)한다 함이 이것임. 저 화엄에서 이른 바 이사무애(理事無礙) 및 사사무애(事事無礙)를 가히 이 회호에 짝하고 이사(理事)는 각각 서고 사사(事事)는 자리에 머무니 가히 불회호에 짝함.
●昭然; 명명백백(明明白白)함. 환해서 쉽게 봄.
六祖下三世四世〈旁出〉〈不列章次〉
六祖下五世〈旁出〉
遂州圓禪師法嗣
終南山圭峯宗密禪師者
果州西充人也 姓何氏 家本豪盛 髫齓通儒書 冠歲探釋典 唐元和二年將赴貢擧 偶造圓和尙法席 欣然契會 遂求披剃 當年進具 一日隨衆僧齋于府吏任灌家 居下位以次受經 得圓覺十二章 覧未終軸 感悟流涕 歸以所悟之旨告于圓 圓撫之曰 汝當大弘圓頓之敎 此諸佛授汝耳 行矣 無自滯於一隅也 師涕泣奉命 禮辭而去 因謁荊南忠禪師〈南印〉 忠曰 傳敎人也 當宣導於帝都 復見洛陽照禪師〈奉國神照〉 照曰 菩薩人也 誰能識之
●宗密; (780-841) 華嚴宗第五祖 唐代果州(四川西充)人 俗姓何 世稱圭峰禪師 圭山大師 諡號定慧禪師 元和二年(807)赴京師應貢擧 途經遂州 聽聞道圓和尙說法 乃隨其出家 竝受具足戒 又依道圓之勸 參淨衆寺神會之弟子益州南印禪師 再謁洛陽報國寺之神照 元和五年 入澄觀座下 受持華嚴敎學 元和十一年正月 止於終南山智炬寺 自誓不下山 於此遍覽藏經三年 撰有圓覺經科文二卷 後入終南山草堂寺 潛心修學 著圓覺經大疏三卷 再遷寺南之圭峰蘭若 專事誦經修禪 太和二年(828)徵入宮中講經 帝賜紫方袍 相國裴休與朝野之士多受其敎 未久請歸山 會昌元年正月六日 坐化於興福塔院 壽六十二 臘三十四 著禪源諸詮集一百卷(現僅存序) 原人論一卷 盂蘭盆經疏二卷 華嚴經綸貫十五卷 圓覺經大疏釋義抄十三卷 金剛般若經疏論纂要二卷 起信論疏注四卷 注華嚴法界觀門一卷 中華傳心地禪門師資承襲圖一卷等三十餘部 [宋高僧傳六 傳燈錄十三 禪宗正脈一 佛祖統紀二十九 五燈會元二 全唐文七四三圭峰禪師塔銘幷序]
●果州; 今四川南充
●貢擧; 古時地方官府向帝王薦擧人才 有鄕里選擧諸侯貢士之制 至漢始合貢擧爲一 而渾稱貢擧 明淸則泛指科擧制度 [百度漢語]
●圓覺; 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 全一卷 略稱圓覺修多羅了義經 圓覺經 唐代佛陀多羅譯 凡十二章 佛爲文殊師利等十二菩薩說大圓覺之妙理 開元釋敎錄九曰 沙門佛陀多羅 唐云覺救 北印度罽賓人也 於東都白馬寺譯圓覺了義經一部 此經近出不委何年 且弘道爲懷務甄詐妄 但眞詮不謬 豈假具知年月耶
●圓頓; 圓滿頓足之意 卽一切圓滿無缺 以圓滿具足之心 立地可達悟界 卽可頓速成佛 故有圓頓一乘 圓頓止觀等名稱出現 此爲天台敎義所言 又其圓頓之觀法則稱圓觀 此外 諸宗派中 究極之敎或修行 亦稱爲圓頓
종남산(終南山) 규봉종밀(圭峯宗密) 선사란 자는
과주(果州) 서충(西充) 사람이며 성이 하씨(何氏)니 집안이 본래 호성(豪盛; 强盛. 昌盛)했다. 초친(髫齓; 이를 갈 어린 나이)에 유서(儒書)를 통달했고 관세(冠歲; 남자 나이 20세)에 석전(釋典; 佛典)을 탐구(探究)했다. 당 원화(元和) 2년(807) 장차 공거(貢擧)에 다다르다가 원화상(圓和尙; 道圓)의 법석으로 나아감을 만났고 흔연(欣然)히 계회(契會; 領會)했다. 드디어 피체(披剃)를 구(求)했고 당년(當年)에 진구(進具)했다. 어느 날 중승(衆僧)을 따라 부리(府吏) 임관(任灌)의 집에서 재(齋)하는데 하위(下位)에 거처했고 차제(次第)로 수경(受經)했는데 원각(圓覺) 12장(章)을 얻었다. 열람(閱覽)하다가 권축(卷軸)을 마치지도 않았는데 감오(感悟)하여 눈물을 흘렸다. 돌아와 깨친 바의 의지(意旨)를 도원(道圓)에게 보고(報告)하자 도원이 어루만지며 가로되 너는 마땅히 원돈지교(圓頓之敎)를 대홍(大弘; 크게 弘布)하리라. 이것은 제불이 너에게 수여(授與)하셨다. 가거라(行矣) 한 모퉁이에 스스로 체재(滯在)하지 말아라. 스님이 체읍(涕泣)하며 봉명(奉命)하여 예사(禮辭)하고 떠났다. 인하여 형남(荊南) 충선사(忠禪師)〈南印〉를 예알(禮謁)하자 충왈(忠曰) 전교인(傳敎人)이구나. 마땅히 제도(帝都; 帝國의 首都)에서 선도(宣導; 開導)하라. 다시 낙양 조선사(照禪師)〈奉國神照〉를 참견(參見)하자 신조(神照)가 가로되 보살인(菩薩人)이구나. 누가 능히 알겠는가.
●宗密; (780-841) 화엄종 제5조. 당대 과주(사천 서충) 사람이니 속성은 하(何)며 세칭이 규봉선사(圭峰禪師)ㆍ규산대사(圭山大師)며 시호는 정혜선사(定慧禪師). 원화 2년(807)경사(京師)에 다다라 공거(貢擧)에 응하는데 길이 수주(遂州)를 경유했으며 도원화상(道圓和尙)의 설법을 청문(聽聞)하고 이에 그를 따라 출가했고 아울러 구족계를 받았음. 또 도원의 권유에 의해 정중사(淨衆寺) 신회(神會)의 제자 익주 남인선사(南印禪師)를 참했고 다시 낙양 보국사의 신조(神照)를 참알했음. 원화 5년 징관(澄觀)의 좌하(座下)에 들어가 화엄교학을 수지(受持)했음. 원화 11 년 정월 종남산 지거사(智炬寺)에 머물면서 스스로 맹세하기를 하산하지 않겠다 했음. 여기에서 장경을 3년 동안 편람(遍覽)했고 찬술(撰述)에 원각경과문(圓覺經科文) 2권이 있음. 후에 종남산 초당사(草堂寺)에 들어가 잠심(潛心; 마음을 가라앉힘)하고 수학하면서 원각경대소(圓覺經大疏) 3권을 지었음. 다시 사원 남쪽의 규봉란야(圭峰蘭若)로 옮겨 오로지 송경수선(誦經修禪)에 종사했음. 태화(太和) 2년(828) 불러 궁중에 들어가 강경했는데 제(帝)가 자방포(紫方袍)를 주었음. 상국(相國) 배휴(裴休)와 조야지사(朝野之士)가 많이들 그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오래지 않아 귀산(歸山)을 청했음. 회창(會昌) 원년 정월 6일 흥복탑원(興福塔院)에서 좌화(坐化)했으니 나이는 62며 납은 34. 선원제전집 100권(현재 겨우 序만 남았음)ㆍ원인론 1권ㆍ우란분경소 2권ㆍ화엄경윤관 15권ㆍ원각경대소석의초 13권ㆍ금강반야경소론찬요 2권ㆍ기신론소주 4권ㆍ주화엄법계관문 1권ㆍ중화전심지선문사자승습도 1권 등 30여 부를 지었음 [송고승전6. 전등록13. 선종정맥1. 불조통기29. 오등회원2. 전당문743규봉선사탑명병서].
●果州; 지금의 사천(四川) 남충(南充).
●貢擧; 옛 시절에 지방의 관부(官府)에서 제왕을 향해 인재를 천거했는데 향리의 선거(選擧)와 제후의 공사(貢士)의 제도가 있었음. 한나라에 이르러 비로소 공거를 합해 하나로 삼았으며 공거를 혼칭했음. 명ㆍ청은 곧 널리 과거제도를 가리켰음 [백도한어].
●圓覺;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이니 모두 1권이며 약칭(略稱)이 원각수다라요의경(圓覺修多羅了義經)ㆍ원각경임. 당대(唐代) 불타다라(佛陀多羅)가 번역했고 무릇 12장(章)임. 부처가 문수사리(文殊師利) 등 12보살을 위해 대원각(大圓覺)의 묘리(妙理)를 설했음. 개원석교록9에 가로되 사문 불타다라는 당(唐)에선 이르되 각구(覺救)니 북인도 계빈(罽賓) 사람이다. 동도(東都) 백마사(白馬寺)에서 원각요의경(圓覺了義經) 1부를 번역했다. 이 경은 최근에 나왔지만 어떤 해인지 알지 못한다. 또 홍도(弘道)를 품고 사망(詐妄)을 힘써 밝혔다. 단지 진전(眞詮)이라 그릇되지 않거늘 어찌 연월(年月)을 갖추어 앎을 빌리려 하는가.
●圓頓; 원만하고 돈족(頓足)함의 뜻이니 곧 일체가 원만무결함. 원만히 구족한 마음으로 입지(立地; 즉시. 바로)에 가히 도달하는 오계(悟界)니 곧 가히 돈속(頓速)히 성불하는지라 고로 원돈일승(圓頓一乘), 원돈지관(圓頓止觀) 등의 명칭이 출현했음. 이것은 천태교의(天台敎義)에서 말하는 바가 되며 또 그 원돈의 관법을 곧 일컬어 원관(圓觀)이라 함. 이 밖에 여러 종파 중에 구극(究極)의 교나 혹 수행을 또한 일컬어 원돈이라 함.
尋抵襄漢 因病僧付華嚴疏 卽上都澄觀大師之所撰也 師未甞聽習 一覧而講 自欣所遇曰 向者諸師述作 罕窮厥旨 未若此疏辭源流暢 幽賾煥然 吾禪遇南宗 敎逢圓覺 一言之下 心地開通 一軸之中 義天朗耀 今復偶茲絕筆 罄竭于懷 暨講終 思見疏主 時屬門人泰恭斷臂醻恩 師先齎書上疏主 遙敘師資 往復慶慰 尋泰恭痊損 方隨侍至上都 執弟子之禮 觀曰 毗盧華藏 能隨我遊者 其汝乎 師預觀之室 惟日新其德 而認筌執象之患永亡矣 北遊淸涼山 回住鄠縣草堂寺 未幾復入終南圭峯蘭若
●華嚴疏; 全稱大方廣佛華嚴經疏 六十卷 唐 澄觀撰 又稱淸涼疏 收於大正藏第三十五冊
●澄觀; (738-839) 唐代僧 華嚴宗第四祖 俗姓夏侯 字大休 越州山陰(浙江紹興)人 號淸涼國師 華嚴菩薩 華嚴疏主 十一歲 依寶林寺霈禪師出家 十四歲得度 身長九尺四寸 垂手過膝 口四十齒 目光夜發 晝乃不眴 日記萬言 七行俱下 才供二筆 嘗以十事自勵 嘗問徑山欽西來宗旨 默受印記 住五臺山 疏華嚴經 後居京師 德宗迎入內 賜號淸涼國師 生歷九朝 爲七帝門師 開成四年示寂 世壽一○二(一說元和年中示寂 壽七十餘) 塔於終南 名曰妙覺 著作頗多 有大方廣佛華嚴經疏六十卷 隨疏演義鈔九十卷 華嚴經綱要三卷 五蘊觀 三聖圓融觀門等三十多種 [宋高僧傳五 佛祖統紀二十九 指月錄二 禪苑蒙求中]
●幽赜; 幽深精微
●義天; 全稱第一義天 第一義淨天 卽住大涅槃之諸佛菩薩 或十住等之菩薩 皆稱爲義天 蓋以善解諸法之義 故以喩第一義空之妙理爲天 ▲涅槃經二十二 義天者 十住菩薩摩訶薩等 以何義故十住菩薩名爲義天 以能善解諸法義故 云何爲義 見一切法是空義故
●絕筆; 指絕妙無比之詩文書畫
●罄竭; 空竭 匱乏
●慶慰; 慶賀慰問
●華藏; 緇門警訓註中 華藏者 蓮花含子之處 目之曰華藏 今刹種及刹 爲大蓮華之所含藏故云華藏
●蘭若; 佛寺 ▲祖庭事苑七 蘭若 梵云阿蘭若 此言寂靜處
이윽고 양한(襄漢)에 다다랐는데 인하여 병승(病僧)이 화엄소(華嚴疏)를 주었으니(付) 곧 상도(上都; 京都) 징관대사(澄觀大師)가 지은 것(所撰)이다. 스님이 일찍이 청습(聽習)하지 않았지만 일람(一覽)하자 강설(講說; 講)했다. 스님이 만난 바를 기뻐하며 가로되 향자(向者; 접때. 지난번)에 제사(諸師)의 술작(述作)은 그 지취(厥旨)를 궁진(窮盡)함이 드무나니 차소(此疏)의 사원(辭源)이 유창(流暢)하고 유색(幽賾)하여 환연(煥然)함만 같지 못하다. 내가 선(禪)은 남종(南宗)을 만났고 교(敎)는 원각(圓覺)을 만나 일언지하(一言之下)에 심지(心地)가 개통(開通)하고 일축지중(一軸之中)에 의천(義天)이 낭요(朗耀)했는데 이제 다시 이(茲) 절필(絕筆)을 대하여(偶) 회포(懷抱; 懷)를 경갈(罄竭)했다. 강설을 마침에 이르자(暨) 소주(疏主)를 친견함을 생각했다. 때에 문인(門人) 태공(太恭)이 단비(斷臂)하여 수은(醻恩; 은혜에 보답)함에 당한지라(屬) 스님이 먼저 서신을 보내어(齎書) 소주(疏主)에게 올려 멀리서 사자(師資)를 펴고(敍) 경위(慶慰)를 왕복(往復)했다. 이윽고 태공(太恭)이 손상(損傷)이 나은지라(痊) 바야흐로 수시(隨侍)하며 상도(上都)에 이르러 제자지례(弟子之禮)를 가졌다. 징관(澄觀)이 가로되 비로(毗盧; 毗盧遮那)의 화장(華藏)을 능히 나를 따라 노닐 자는 그 너인가 하노라. 스님이 징관의 실(室)에 참예(參預)하여 오직(惟) 그 덕(德)을 일신(日新)하고 인전(認筌)과 집상(執象)의 우환을 길이 없앴다(亡). 북쪽으로 청량산(淸涼山)에 노닐다가 돌아와(回) 호현(鄠縣) 초당사(草堂寺)에 주(住)했다가 오래지 않아(未幾) 다시 종남(終南)의 규봉란야(圭峯蘭若)에 들어갔다.
●華嚴疏; 전칭이 대방광불화엄경소니 60권. 당 징관(澄觀)이 찬(撰)했음. 또 명칭이 청량소(淸涼疏)니 대정장 제35책에 수록되었음.
●澄觀; (738-839) 당대승. 화엄종 제4조. 속성은 하후(夏侯)며 자는 대휴(大休)니 월주 산음(절강 소흥) 사람이며 호가 청량국사(淸涼國師)ㆍ화엄보살ㆍ화엄소주(華嚴疏主). 11세에 보림사 패선사(霈禪師)에게 의지해 출가했고 14세에 득도했음. 신장이 9척4촌이었고 손을 내리면 무릎에 이르렀음. 입이 40치(齒)였고 목광(目光)이 밤에 발했고 낮에는 곧 눈을 깜작이지 않았음. 하루에 만언(萬言)을 기억했고 7행(行)을 구하(俱下; 한꺼번에 읽어 내림)했음. 재능이 2필(筆)로 이바지했고 일찍이 10사(事)로 자려(自勵)했음. 일찍이 경산흠(徑山欽)에게 서래종지(西來宗旨)를 물어 묵묵히 인기(印記)를 받았음. 오대산에 거주하며 화엄경을 소(疏)했고 후에 경사(京師)에 거주했음. 덕종(德宗)이 내전으로 영입하여 청량국사란 호를 주었음. 출생해 9조(朝)를 경력하면서 7제(帝)의 문사(門師)가 되었음. 개성 4년 시적했고 세수는 102(一說에 元和年 중에 시적했고 나이는 70여). 종남산에 탑을 세웠고 이름해 가로되 묘각. 저작이 파다하였음. 대방광불화엄경소 60권ㆍ수소연의초 90권ㆍ화엄경강요 3권ㆍ오온관ㆍ삼성원융관문 등 30다종(多種)이 있음 [송고승전5. 불조통기29. 지월록2. 선원몽구중].
●幽赜; 유심(幽深)하고 정미(精微)함.
●義天; 전칭이 제일의천(第一義天)ㆍ제일의정천(第一義淨天)이니 곧 대열반에 머무는 제불보살 혹 10주(住) 등의 보살을 모두 일컬어 의천이라 함. 대개 제법의 뜻을 잘 해석하는지라 고로 제일의공(第一義空)의 묘리를 비유하여 천(天)이라 함. ▲열반경22. 의천(義天)이란 것은 십주보살마하살 등이니 무슨 뜻을 쓰는 고로 십주보살을 이름해 의천이라 하는가. 모든 법의(法義)를 능히 잘 이해하는 연고다. 무엇을 의(義)라 하는가, 일체법이 이 공의(空義)임을 보는 연고다.
●絕筆; 절묘하여 무비(無比)의 시문이나 서화(書畫)를 가리킴.
●罄竭; 공갈(空竭; 다해서 없어짐). 궤핍(匱乏; 다 없어짐).
●慶慰; 경하(慶賀)하고 위문함.
●華藏; 치문경훈주중. 화장이란 것은 연화가 씨를 함장(含藏)하는 곳이니 이를 명목해 가로되 화장임. 여금의 찰종(刹種) 및 찰(刹)은 큰 연화가 함장한 곳인 고로 이르되 화장임.
●蘭若; 불사(佛寺). ▲조정사원7. 란야(蘭若) 범어로 이르되 아란야(阿蘭若; 梵 araṇya)는 여기 말로는 적정한 곳이다.
大和中徵入內 賜紫衣 帝累問法要 朝士歸慕 唯相國裴公休 深入堂奧 受敎爲外護 師以禪敎學者互相非毀 遂著禪源諸詮 寫錄諸家所述 詮表禪門根源道理 文字句偈 集爲一藏〈或云一百卷〉 以貽後代 其都序略云 禪是天竺之語 具云禪那 此云思惟修 亦云靜慮 皆定慧之通稱也 源者是一切衆生本覺眞性 亦名佛性 亦名心地 悟之名慧 修之名定 定慧通名爲禪 此性是禪之本源 故云禪源 亦名禪那 理行者 此之本源是禪理 忘情契之是禪行 故云理行 然今所集諸家述作 多譚禪理 少說禪行 故且以禪源題之 今時有人但目眞性爲禪者 是不達理行之旨 又不辨華竺之音也 然非離眞性 別有禪體 但衆生迷眞合塵 卽名散亂 背塵合眞 方名禪定 若直論本性 卽非眞非妄 無背無合 無定無亂 誰言禪乎 況此眞性 非唯是禪門之源 亦是萬法之源 故名法性 亦是衆生迷悟之源 故名如來藏藏識〈出楞伽經〉 亦是諸佛萬德之源 故名佛性〈涅槃等經〉 亦是菩薩萬行之源 故名心地〈梵網經云 是諸佛之本源 行菩薩道之根本 是大衆諸佛子之根本也〉 萬行不出六波羅蜜 禪者但是六中之一 當其第五 豈可都目眞性 爲一禪行哉 然禪定一行最爲神妙 能發起性上無漏智慧 一切妙用 萬行萬德 乃至神通光明 皆從定發 故三乘人欲求聖道 必須修禪 離此無門 離此無路 至於念佛求生淨土 亦修十六觀禪 及念佛三昧般舟三昧等也 又眞性卽不垢不淨 凡聖無差 禪門則有淺有深 階級殊等 謂帶異計欣上厭下而修者 是外道禪 正信因果 亦以欣厭而修者 是凡夫禪 悟我空偏眞之理而修者 是小乘禪 悟我法二空所顯眞理而修者 是大乘禪〈上四類 皆有四色四空之異也〉 若頓悟自心本來淸淨 元無煩惱 無漏智性本自具足 此心卽佛 畢竟無異 依此而修者 是最上乘禪 亦名如來淸淨禪 亦名一行三昧 亦名眞如三昧 此是一切三昧根本 若能念念修習 自然漸得百千三昧 達磨門下展轉相傳者 是此禪也 達磨未到 古來諸家所解 皆是前四禪八定 諸高僧修之 皆得功用 南嶽天台令依三諦之理修三止三觀 敎義雖最圓妙 然其趣入門戶次第 亦只是前之諸禪行相 唯達磨所傳者 頓同佛體 迥異諸門 故宗習者難得其旨 得卽成聖 疾證菩提 失卽成邪 速入塗炭 先祖革昧防失 故且人傳一人 後代已有所憑 故任千燈千照 洎乎法久成弊 錯謬者多 故經論學人疑謗亦衆 原夫佛說頓敎漸敎 禪開頓門漸門 二敎二門 各相符契 今講者偏彰漸義 禪者偏播頓宗 禪講相逢 胡越之隔 宗密不知宿生何作熏得此心 自未解脫 欲解他縛 爲法亡於軀命 愍人切於神情〈亦如淨名經云 若自有縛 能解他縛 無有是處 然欲罷不能 驗是宿習難改故〉 每歎人與法差 法爲人病 故別撰經律論疏 大開戒定慧門 顯頓悟資於漸修 證師說符於佛意 意旣本末而委示 文乃浩博而難尋 汎學雖多 秉志者少 況迹涉名相 誰辨金鍮 徒自疲勞 未見機感 雖佛說悲增是行 而自慮愛見難防 遂捨衆入山 習定均慧 前後息慮 相繼十年 微細習情起滅彰於靜慮 差別法義 羅列現於空心 虛隙日光纖埃擾擾 淸潭水底影像昭昭 豈比夫空守默之癡禪 但尋文之狂慧者也 然本因了自心而辨諸敎 故懇情於心宗 又因辨諸敎而解修心 故虔誠於敎義 敎也者 諸佛菩薩所留經論也 禪也者 諸善知識所述句偈也 但佛經開張 羅大千八部之衆 禪偈撮略 就此方一類之機 羅衆則莾蕩難依 就機則指的易用 今之纂集意在斯焉
●朝士; 朝廷之士 泛稱中央官員
●堂奧; 玉篇 奧 謂室中隱奧之處 ▲淮南子時則訓 涼風始至 蟋蟀居奧 ▲禪林寶訓音義 堂奧 正房曰堂 幽深曰奧
●外護; 乃僧侶以外之在家人 如族親檀越等 爲佛敎所從事之種種善行 如供給僧尼衣食以助其安穩修行 或盡力援護佛法之弘通等 亦卽從外部以權力財富知識或勞力等 護持佛敎 竝掃除種種障礙以利傳道 從事以上諸行者 亦稱爲外護
●詮表; 解釋和表達
●如來藏; 眞如在煩惱中 謂之如來藏 眞如出煩惱 謂之法身 ▲入楞伽經一 寂滅者 名爲一心 一心者 名爲如來藏
●藏識; 八識十名之一 蘊積諸法 名爲藏識 [宗鏡錄五十]
●梵網經; 二卷 全稱梵網經盧舍那佛說菩薩心地戒品第十 又作梵網經菩薩心地品 梵網戒品 相傳爲後秦鳩摩羅什譯 然未能確定 收於大正藏第二十四冊 說明菩薩修道之階位及應受持之十重四十八輕之戒相 其廣本之卷數 有諸多異說 據僧肇梵網經序所載 凡六十一品百二十卷 此爲第十品 蓋以大梵天王之因陀羅網 重重交錯無相障閡 諸佛之敎門亦重重無盡 莊嚴法身無所障閡 一部所詮之法門重重無盡 譬如梵王之網 故稱梵網經 [開元釋敎錄四 顯戒論中]
●六波羅蜜; 又稱六度 波羅蜜 舊譯爲度 三藏法數十九 六度[出六度集經] 一檀那 梵語檀那 華言布施 二尸羅 梵語尸羅 華言性善 謂好行善道 不自放逸 此據義而譯也 正翻止得 謂止惡得善也 又翻爲戒 謂戒能防止身口所作之惡也 三羼提 梵語羼提 華言忍辱 四毘梨耶 梵語毘梨耶 華言精進 五禪那 梵語禪那 華言靜慮 六般若 梵語般若 華言智慧 ▲祖庭事苑七 六度 一布施 二持戒 三忍辱 四精進 五禪定 六智慧 度以到彼岸爲義
●般舟三昧; 定行之一種 在一特定期間(七日至九十日)內 修行三昧 得見諸佛 [般舟三昧經上 大智度論三十三]
●南嶽; 慧思(515-577) 南北朝時代之高僧 武津(河南上蔡)人 俗姓李 世稱南嶽尊者 思大和尙 思禪師 天台宗第三祖 自幼歸佛樂法 心愛法華經 年十五出家 後參河南慧文禪師 得授觀心之法 北齊天保五年(554) 師至光州 不分遠近 爲衆演說 長達十四年之久 又師於河南南部之大蘇山傳法與智顗 陳代光大二年(568)始入湖南衡山(南嶽) 悟三生行道之迹 講筵益盛 居止十年 遂有南嶽尊者之稱 倍受宣帝禮遇 尊稱大禪師 故思大和尙 又稱思禪師 蓋基於此 太建九年 晏然而化 壽六十三 著作多半門徒筆記而成 如法華經安樂行義一卷 諸法無諍三昧法門二卷 大乘止觀法門四卷 四十二字門二卷 受菩薩戒儀一卷等 自撰者有南嶽思大禪師立誓願文一卷 [續高僧傳十七 弘贊法華傳四 佛祖統紀六 佛祖歷代通載十一]
●天台; 智顗(538-597) 天台宗開宗祖師(一說三祖 卽以慧文慧思爲初祖二祖) 隋代荊州華容(湖南潛江西南)人 俗姓陳 字德安 世稱天台智者 智者大師 天台大師 年十八出家 初謁大蘇山慧思 卽示普賢道場 爲說四安樂行 大師誦法華經 至藥王品曰 是眞精進 是名眞法供養如來 乃悟法華三昧 獲旋陀羅尼 見靈山一會儼然未散 及辭思遊化 思曰 汝於陳國有緣 往必利益 太建七年(575) 抵建康瓦棺寺 創弘禪法 僕射徐陵 尙書毛喜等貴望 並稟禪旨 甞夢登高山見一僧以手招之 是年九月至天台山 定光出迎曰 憶昨相招否 大師驚異而禮之 乃創菴行道 陳宣帝詔師還都居光宅寺 隋文帝開皇九年(58 9)陳國滅 大師乃憩廬山 開皇十一年晉王廣任總江淮 十一月二十三日於楊州總管金城 請大師設僧會 授菩薩戒 奉師號曰智者 久之還廬山 晉王再請出山 爲蕭妃救患 建齋七日行光明懺 疾瘳再還廬山 過衡峰屆荊部 留玉泉寺 開皇十七年(597)十一月二十四日歸寂於台山石城寺 壽六十七 僧臘四十 大師造大寺三十六所 命寫經一十五藏 著經疏百餘卷 造金銅土木等像八十萬軀 度僧一萬五千人 五十餘州道俗受菩薩戒者不可勝紀 大師謂法華爲一乘妙典 開方便之權門 示眞實之妙理 會衆善之小行 歸廣大之一乘 遂出玄義 曰釋名辯體明宗論 用判敎相之五重也 後世宗之曰天台敎 [釋氏稽古略二 唐高僧傳二十一 佛祖統紀六 傳燈錄二十七]
●三止三觀; 止 是止息妄念 觀 是反觀自性 祖庭事苑七云 天台智者以龍樹偈云 因緣所生法 我說卽是空 亦名爲假名 亦名中道義 乃依一心三諦之理 示三止三觀 ▲宗鏡錄八十二 若台敎總論二種止觀 一相待止觀 二絶待止觀 前是拙度 後是巧度 相待止觀者 有三止三觀 三止者 一止息義 二停止義 三不止止義 三觀者 一觀穿義 二觀達義 三不觀觀義 絶待止觀者 有三止三觀 三止者 一體眞止 二方便隨緣止 三息二邊分別止 三觀者 一從假入空 名二諦觀 二從空入假 名平等觀 三二觀爲方便道 得入中道 雙照二諦 心心寂滅 自然流入薩婆若海 名中道第一義諦觀
●塗炭; 尙書 仲虺之誥第二 民墜塗炭 注 夏桀昏亂 不恤下民 民之危險 若陷泥墜火無救
●胡越; 疏遠之貌 ▲維摩經略疏垂裕記二 胡越者 胡在北 越在南 文選古詩云 胡馬嘶北風 越鳥巢南枝 正弼曰 同舟而濟 胡越何患於異心
●莽蕩; 遼闊無際
태화(大和; 827-835) 중에 불러(徵) 입내(入內)하매 자의(紫衣)를 주었다. 황제가 누차(屢次) 법요를 물었고 조사(朝士)가 귀모(歸慕)했는데 오직(惟) 상국(相國) 배공(裴公) 휴(休)가 당오(堂奧)에 심입(深入)했고 수교(受敎)하여 외호(外護)가 되었다. 스님이 선교(禪敎) 학자가 호상(互相) 비훼(非毀; 비난하고 헐뜯다)했기 때문에(以) 드디어 선원제전(禪源諸詮)을 지어(著) 제가(諸家)의 소술(所述)을 사록(寫錄)해 선문(禪門)의 근원과 도리, 문자와 구게(句偈)를 전표(詮表)해 모아서(集) 일장(一藏)으로 만들어(爲)〈或云 一百卷〉 후대(後代)에 남겼다(貽). 그 도서(都序)를 약운(略云)하자면 선(禪)은 이 천축의 말이니 갖추어 이르면 선나(禪那)며 여기에선 이르되 사유수(思惟修)며 또한 이르되 정려(靜慮)니 모두 이 정혜(定慧)의 통칭(通稱)이다. 원(源)이란 것은 이 일체중생의 본각(本覺)의 진성(眞性)이니 또한 이름이 불성이며 또한 이름이 심지(心地)다. 이를 깨치면 이름이 혜(慧)며 이를 닦으면 이름이 정(定)이며 정혜(定慧)를 통명(通名; 통틀어 이름)하면 선(禪)이다. 이 성(性)은 이 선(禪)의 본원(本源)인지라 고로 이르되 선원(禪源)이며 또한 이름이 선나(禪那)다. 이행(理行)이란 것은 이것의 본원(本源)이 이 선리(禪理)며 망정(忘情)하여 이에 계합하면 이 선행(禪行)인지라 고로 이르되 이행(理行)이다. 그러나 여금에 소집(所集)한 제가(諸家)의 술작(述作)은 선리(禪理)를 많이 말하고(譚) 선행(禪行)을 적게 설하는지라 고로 또(且) 선원(禪源)으로써 이를 제(題)했다. 금시(今時)에 어떤 사람이 단지 진성(眞性)을 명목(名目)해 선(禪)이라고 하는 것은 이는 이행(理行)의 지취를 통달하지 못하고 또 화축(華竺; 중화와 천축)의 음(音)을 분변하지 못했음이다. 그러나 진성(眞性)을 여의고 따로 선쳬(禪體)가 있음이 아니니 단지 중생이 미진합진(迷眞合塵)하면 곧 이름이 산란(散亂)이며 배진합진(背塵合眞)하면 바야흐로 이름이 선정(禪定)이다. 만약 본성(本性)을 직론(直論)하자면 곧 비진비망(非眞非妄)이며 무배무합(無背無合)이며 무정무란(無定無亂)이거늘 누가 선(禪)을 말하겠는가. 하물며 이 진성(眞性)은 이 선문지원(禪門之源)일 뿐만(唯) 아니라 역시 만법지원(萬法之源)인지라 고로 이름이 법성(法性)이며 역시 중생의 미오지원(迷悟之源)인지라 고로 이름이 여래장(如來藏)의 장식(藏識)〈楞伽經에 나온다〉이며 역시 제불의 만덕지원(萬德之源)인지라 고로 이름이 불성이며〈涅槃 등의 經〉 역시 보살의 만행지원(萬行之源)인지라 고로 이름이 심지(心地)다〈梵網經에 이르되 이는 諸佛之本源이며 菩薩道를 행하는 근본이며 이는 大衆과 諸佛子의 근본이다〉. 만행(萬行)이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벗어나지 못하나니 선(禪)이란 것은 단지 이 여섯 중의 하나며 그 제5에 해당하거늘 어찌 가히 진성(眞性)을 도목(都目)해 1선행(禪行)이라 하겠는가. 그러나 선정(禪定) 1행(行)이 가장 신묘(神妙)하여 능히 성상(性上)의 무루지혜(無漏智慧)를 발기(發起)하나니 일체의 묘용(妙用)과 만행만덕(萬行萬德) 내지 신통과 광명이 모두 정(定)으로 좇아 발기(發起; 發)하는지라 고로 삼승(三乘)의 사람(人; 學人)이 성도(聖道)를 구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수선(修禪)을 써야(須) 한다. 이를 여의고는 문(門)이 없고 이를 여의고는 길이 없나니 염불하여 정토에 출생하기를 구함에 이르러서도 또한 16관선(觀禪) 및 염불삼매ㆍ반주삼매(般舟三昧) 등을 닦아야 한다. 또 진성(眞性)은 곧 불구부정(不垢不淨)함은 범성(凡聖)이 무차(無差)나 선문(禪門)은 곧 유천유심(有淺有深)하여 계급이 수등(殊等; 등급이 다름)하다. 이르자면 이계(異計)를 가지고 흔상염하(欣上厭下)하여 닦는 것은 이 외도선(外道禪)이다. 인과를 정신(正信)하되 또한 흔염(欣厭)으로써 닦는 것은 이 범부선(凡夫禪)이다. 아공(我空) 편진(偏眞)의 이치를 깨쳐 닦는 것은 이 소승선(小乘禪)이다. 아법(我法) 2공(空)이 나타낸 바 진리를 깨쳐 닦는 것은 이 대승선(大乘禪)이다〈上의 四類는 모두 四色四空의 다름이 있다〉. 만약 자심(自心)이 본래 청정하고 원래 번뇌가 없으며 무루지성(無漏智性)을 본래 스스로 구족했으며 이 마음이 이 부처라 필경 다름이 없음을 돈오(頓悟)하여 이에 의해 닦는 것은 이 최상승선(最上乘禪)이며 또한 이름이 여래청정선(如來淸淨禪)이며 또한 이름이 일행삼매(一行三昧)며 또한 이름이 진여삼매(眞如三昧)다. 이것은 이 일체의 삼매의 근본이니 만약 능히 염념(念念)에 수습(修習)하면 자연히 점점 백천삼매(百千三昧)를 얻는다. 달마문하에 전전(展轉)히 상전(相傳)하는 것은 이는 이 선이다. 달마가 도래하지 아니한, 고래(古來)의 제가(諸家)의 소해(所解)는 모두 이 앞의 4선8정(四禪八定)이며 여러 고승이 이를 닦아 모두 공용(功用)을 얻었다. 남악천태(南嶽天台)가 3제(諦)의 이치에 의해 3지3관(三止三觀)을 닦게 한 교의(敎義)가 비록 가장 원묘(圓妙)하지만 그러나 그 문호에 취입(趣入)하는 차제(次第) 또한 다만 이 앞의 제선(諸禪)의 행상(行相)이다. 오직 달마가 전한 바의 것은 단박에(頓) 불체(佛體)와 같아서 제문(諸門)과 형이(逈異)한지라 고로 종습(宗習; 선종을 修習)하는 자가 그 지취를 얻기 어렵다. 얻으면 곧 성법(聖法)을 이루고 빨리 보리(菩提)를 증득하려니와 잃으면 곧 사법(邪法)을 이루어 속히 도탄(塗炭)에 들어간다. 선조(先祖)가 혁매(革昧; 昏昧를 고치다)하여 방실(防失; 실패를 방지)한지라 고로 다만(且) 인(人; 1인)이 1인(人)에게 전했으나 후대엔 이미 소빙(所憑)이 있는지라 고로 천등(千燈)이 천조(千照)하는 대로 일임했다. 법이 오래되매 폐(弊)를 이룸에 이르러(洎) 착류자(錯謬者)가 많은지라 고로 경론(經論)의 학인이 의방(疑謗) 또한 많았다. 원부(原夫) 불타는 돈교와 점교를 설했고 선(禪)은 돈문(頓門)과 점문(漸門)을 열었다. 2교(敎)와 2문(門)이 각기 서로 부계(符契)하거늘 여금에 강자(講者)는 점의(漸義)를 편창(偏彰)하고 선자(禪者)는 돈종(頓宗)을 편파(偏播)하니 선강(禪講)이 상봉하매 호월(胡越)의 간격이다. 종밀(宗密)이 숙생(宿生)에 어떻게 차심(此心)을 훈득(薰得)함을 지은 지 알지 못하나 스스로 해탈하지 못하고서 남의 계박(繫縛)을 해탈케 하고자 하여 법을 위해 구명(軀命)을 잊고(亡) 사람을 가엾게 여김이 신정(神情)에 간절했다〈또한 淨名經과 같나니 이르되 만약 스스로 繫縛이 있으면서 능히 남의 계박을 해탈게 함은 옳은 곳이 있지 않지만 그러나 그만두려고 하여도 능하지 못함은 이 宿習을 고치기 어려움을 證驗함인 연고다〉. 매번 인(人)과 법(法)이 어긋나고 법이 인병(人病)이 됨을 차탄(嗟歎)한지라 고로 경률(經律)의 논소(論疏)를 별찬(別撰)하여 계정혜(戒定慧)의 문을 크게 열되 돈오(頓悟)가 점수(漸修)를 도움(資)을 나타내고(顯) 사설(師說)이 불의(佛意)에 부합(符合)함을 증명했다. 뜻은 이미 본말(本末)을 위곡(委曲)히 보였으나 글은 이에 호박(浩博)하여 찿기 어려웠고 범학(汎學; 널리 배움)은 비록 많지만 병지(秉志)한 자가 적었다. 하물며 자취가 명상(名相)에 건너거늘 누가 금유(金鍮)를 분변하겠는가. 도연히 스스로 피로하고 기감(機感)을 보지 못했으니 비록 불타가 설해 비증(悲增; 悲心의 增上)을 이 행하더라도 애견(愛見)은 방지하기 어려움을 스스로 염려했다. 드디어 사중(捨衆)하고 입산하여 정(定)이 혜(慧)와 균등함을 수습(修習)했으니 전후로 식려(息慮)한 게 10년을 상계(相繼)했다. 미세한 습정(習情)이 기멸(起滅)하며 정려(靜慮)에 나타나고(彰) 차별의 법의(法義)가 나열(羅列)하여 공심(空心)에 나타나며(現) 허극(虛隙; 空隙이니 빈 공간)의 일광(日光)에 섬애(纖埃)가 요요(擾擾)하고 청담(淸潭)의 수저(水底)에 영상(影像)이 소소(昭昭)하거늘 어찌 공연히 수묵(守默)하는 치선(癡禪)이나 단지 심문(尋文)하는 광혜(狂慧)에 비하겠는가. 그러하여 본래 자심(自心)을 깨침으로(了) 인해 제교(諸敎)를 분변하는지라 고로 심종(心宗)에 정(情)이 간절(懇切)하고 또 제교(諸敎)를 분변함으로 인해 수심(修心)을 이해하는지라 고로 교의(敎義)에 경건(敬虔)한 정성(精誠)이다. 교(敎)란 것은 제불보살이 유하(留下)한 바 경론이며 선(禪)이란 것은 제선지식(諸善知識)이 서술한 바 구게(句偈)다. 단지 불경(佛經)은 개장(開張)하여 대천(大千)의 팔부지중(八部之衆)에게 펼쳤고(羅) 선게(禪偈)는 촬략(撮略)하여 차방(此方)의 일류지기(一類之機)에게 나아갔다(就). 나중(羅衆; 대중에게 펼치다)하면 곧 망탕(莽蕩)하여 의지(依止)하기 어렵고 취기(就機; 근기에 나아가다)하면 곧 지적(指的; 꼭 집어서 분명하게 가리킴)하여 쓰기 쉽나니 지금의 찬집(纂集)하는 뜻이 여기에 있다.
●朝士; 조정지사(朝廷之士). 널리 중앙의 관원을 일컬음.
●堂奧; 옥편 오(奧) 이르자면 실중의 은오(隱奧)한 곳이다. ▲회남자 시칙훈. 서늘한 바람이 비로소 이르니 귀뚜라미가 거오(居奧)한다. ▲선림보훈음의. 당오 정방(正房)을 가로되 당(堂)이며 유심(幽深)을 가로되 오(奧)다.
●外護; 곧 승려 이외의 재가인, 예컨대(如) 족친(族親)이나 단월 등이 불교를 위해 종사하는 바의 갖가지 선행임. 예컨대(如) 승니의 의식(衣食)을 공급하여 그 안온(安穩)한 수행을 도우거나 혹 힘을 다해 불법의 홍통(弘通)을 원호(援護)하는 등, 또한 곧 외부로부터 권력ㆍ재부(財富)ㆍ지식 혹 노력 등으로 불교를 호지(護持)하거나 아울러 갖가지 장애를 소제(掃除)하여 전도(傳道)에 이롭게 함. 이상의 제행(諸行)에 종사하는 것을 또한 일컬어 외호라 함.
●詮表; 해석과 표달(表達; 表明. 講說),
●如來藏; 진여가 번뇌 속에 있으면 이를 일러 여래장이며 진여가 번뇌에서 나오면 이를 일러 법신임. ▲입릉가경1. 적멸이란 것은 이름해 일심이며 일심이란 것은 이름해 여래장이다.
●藏識; 8식 10명의 하나. 제법을 온적(蘊積)한지라 이름하여 장식임 [종경록50].
●梵網經; 2권. 전칭이 범망경로사나불설보살심지계품제십(梵網經盧舍那佛說菩薩心地戒品第十)이며 또 범망경보살심지품ㆍ범망계품으로 지음. 상전(相傳)하기를 후진(後秦) 구마라집이 역(譯)했다 하나 그러나 능히 확정하지 못함. 대정장 제24책에 수록되었음. 보살의 수도할 계위(階位)와 및 응당 수지(受持)할 십중사십팔경(十重四十八輕)의 계상(戒相)을 설명(說明)했음. 그 광본(廣本)의 권수(卷數)는 여러 이설이 있음. 승조(僧肇)의 범망경서에 실린 바에 의거하자면 무릇 64품 120권이며 이것은 제10품이 됨. 대개 대범천왕의 인다라망(因陀羅網)은 중중교착(重重交錯)하여 서로 장애(障閡)가 없으며 제불의 교문(敎門)도 또한 중중무진하고 법신을 장엄하되 장애되는 바가 없으며 1부(部)의 소전(所詮)의 법문도 중중무진하나니 비유컨대 범왕의 망(網)과 같은지라 고로 명칭이 범망경임 [개원석교록4. 현계론중].
●六波羅蜜; 또 6도(度)로 일컬음. 바라밀을 구역에 도(度)라 했음. 삼장법수19. 육도(六度) [출육도집경] 1. 단나(檀那; 梵 dāna) 범어 단나는 화언(華言)으론 보시임. 2. 시라(尸羅; 梵 śīla) 범어 시라는 화언으론 성선(性善)이니 이르자면 선도(善道)를 행하기를 좋아해 스스로 방일하지 않음임. 이것은 뜻에 의거해 번역했음이며 바로 번역하면 지득(止得)이니 이르자면 악을 그치고 선을 얻음임. 또 계(戒)로 번역함. 이르자면 계는 능히 몸과 입으로 짓는 바의 악을 방지함. 3. 찬제(羼提; 梵 kṣānti) 범어 찬제는 화언으론 인욕임. 4. 비리야(毗梨耶; 梵 vīrya) 범어 비리야는 화언으론 정진임. 5. 선나(禪那; 梵 dhyāna) 범어 선나는 화언으론 정려(靜慮)임. 6. 반야(般若; 梵 prajñā) 범어 반야는 화언으론 지혜임. ▲조정사원7. 6도(度) 1은 보시며 2는 지계며 3은 인욕이며 4는 정진이며 5는 선정이며 6은 지혜임. 도(度)는 도피안(到彼岸)으로 뜻을 삼음.
●般舟三昧; 정행(定行)의 일종. 하나의 특정한 기간(7일에서 90일에 이르기까지) 안에 있으면서 삼매를 수행하여 제불을 득견함 [반주삼매경상. 대지도론33].
●南嶽; 혜사(慧思; 515-577)니 남북조시대의 고승. 무진(武津; 하남 상채) 사람이며 속성은 이(李). 세칭이 남악존자(南嶽尊者)ㆍ사대화상(思大和尙)ㆍ사선사(思禪師)니 천태종 제3조. 어릴 적부터 불타에게 귀의하고 불법을 좋아했으며 마음에 법화경을 사랑했음. 나이 15에 출가했고 후에 하남(河南) 혜문선사(慧文禪師)를 참해 관심지법(觀心之法)을 득수(得授)했음. 북제(北齊) 천보 5년(554) 스님이 광주(光州)에 이르러 원근을 분별하지 않고 대중을 위해 연설했으며 길게는 14년의 장구함에 도달했음. 또 스님이 하남 남부의 대소산(大蘇山)에서 지의(智顗)에게 전법했음. 진대(陳代) 광대 2년(568) 비로소 호남 형산(衡山; 南嶽)에 들어가 삼생행도(三生行道)의 자취를 깨쳤으며 강연(講筵)이 더욱 흥성했음. 거지(居止)한 지 10년이라 드디어 남악존자의 명칭이 있음. 선제(宣帝)의 예우를 배수(倍受)했고 존칭하여 대선사(大禪師)라 했으며 고로 사대화상(思大和尙), 또 사선사(思禪師)라 일컬었음이 대개 여기에서 기본(基本)했음. 태건 9년 안연(晏然)히 화(化)했으니 나이는 63. 저작은 다반(多半; 대부분)이 문도의 필기(筆記)로 이루어졌으니 예컨대(如) 법화경안락행의 1권ㆍ제법무쟁삼매법문 2권ㆍ대승지관법문 4권ㆍ사십이자문 2권ㆍ수보살계의 1권 등임. 자찬(自撰)한 것은 남악사대선사입서원문 1권임 [속고승전17. 홍찬법화전4. 불조통기6. 불조역대통재11].
●天台; 지의(智顗; 538-597)니 천태종을 개종(開宗)한 조사(祖師; 一說엔 三祖니 곧 慧文과 慧思를 初祖와 二祖로 삼음). 수대(隋代) 형주 화용(華容; 호남 잠강 서남) 사람이며 속성은 진(陳)이며 자가 덕안(德安)이며 세칭이 천태지자(天台智者)ㆍ지자대사(智者大師)ㆍ천태대사(天台大師). 나이 18에 출가했으며 처음에 대소산(大蘇山) 혜사(慧思)를 알현(謁見)했는데 곧 보현도량(普賢道場)을 보이며 4안락행(四安樂行)을 설했음. 대사가 법화경을 외우다가 약왕품(藥王品)에 가로되 이것이 참 정진(精進)이며 이 이름이 여래에게 참으로 법공양함이다 함에 이르러 곧 법화삼매(法華三昧)를 깨쳐 선다라니(旋陀羅尼)를 획득했으며 영산일회(靈山一會)가 엄연(儼然)하여 흩어지지 않았음을 보았음. 그리고 혜사에게 고별하고 유화(遊化)하려 하자 혜사가 가로되 너는 진(陳)나라에 인연이 있으니 간다면 반드시 이익이 있을 것이다. 대건(太建) 7년(575) 건강(建康) 와관사(瓦棺寺)에 다다라 선법(禪法)을 창홍(創弘)했는데 복야(僕射) 서릉(徐陵)과 상서(尙書) 모희(毛喜) 등이 존귀하게 여기며 앙망(仰望)했고 아울러 선지(禪旨)를 받았음. 일찍이 꿈에 높은 산에 올라 한 승인을 보았는데 손으로 그를 불렀음. 이 해 9월에 천태산에 이르자 정광(定光)이 나와 영접하며 가로되 지난날 상초(相招)함을 기억하느냐. 대사가 경이(驚異)하며 예배하고 이에 암자를 창건하고 행도(行道)했음. 진(陳) 선제(宣帝)가 스님을 불러 환도(還都)하여 광택사(光宅寺)에 거주케 했는데 수(隋) 문제(文帝) 개황(開皇) 9년(589) 진(陳)나라가 멸망하자 대사는 이에 여산(廬山)에서 쉬었음. 개황 11년 진왕(晉王) 광(廣; 훗날의 隋煬帝)이 강회(江淮)의 총관(總管)에 임명되자 11월 23일 양주(楊州) 총관금성(總管金城)에서 대사를 초청해 승회(僧會)를 베풀고 보살계를 받았으며 스님을 받들어 호(號)해 가로되 지자(智者)라 했음. 오랜만에 여산(廬山)에 돌아갔다가 진왕(晉王)이 다시 요청해 산을 나와 소비(蕭妃)를 위해 구환(救患)했으며 7일 동안의 재(齋)를 건립하고 광명참(光明懺)을 행했으며 질환(疾患)이 낫자 다시 여산으로 돌아가다가 형봉(衡峰)을 지나 형부(荊部)에 이르자 옥천사(玉泉寺)에 머물렀음. 개황 17년(597) 12월 24일 천태산 석성사(石城寺)에서 귀적(歸寂)했으니 나이는 67이며 승랍은 40. 대사는 큰 절 36곳을 건조했고 명령해 15장(藏)을 사경(寫經)케 했으며 경소(經疏) 100여 권을 지었고 금동토목(金銅土木) 등의 상(像) 80만 구(軀)를 조성했으며 1만 5천 사람을 도승(度僧)했고 50여 주(州)에서 도속(道俗; 僧俗)이 보살계를 받은 자를 가히 다 기록하지 못함. 대사가 이르되 법화(法華)는 1승(乘)의 묘전(妙典)이 되며 방편의 권문(權門)을 열어 진실한 묘리(妙理)를 보였으며 중선(衆善)의 소행(小行)을 모아 광대한 1승(乘)으로 귀납(歸納)했다 하고는 드디어 현의(玄義)를 발출(拔出)하여 가로되 석명변체명종론(釋名辯體明宗論)이니 교상(敎相)의 5중(重)을 판석(判釋)한 것임. 후세에 이를 종앙(宗仰)해 가로되 천태교(天台敎)라 했음 [석씨계고략2. 당고승전21. 불조통기6. 전등록27].
●三止三觀; 지(止)는 이 망념을 지식(止息)함이며 관(觀)은 이 자성을 반관(反觀)함임. 조정사원7에 이르되 천태지자가 용수의 게에 이르되 인연으로 난 바의 법은/ 내가 곧 이 공(空)이라고 설하나니/ 또한 이름하여 가명(假名)이며/ 또한 이름이 중도(中道)의 뜻이다 했으므로 이에 일심삼제(一心三諦)의 이치에 의해 3지(止)와 삼관(三觀; 空觀ㆍ假觀ㆍ中觀)을 개시(開示)했다. ▲종경록82. 이에(若) 태교에서 2종 지관을 총론했다. 1은 상대지관(相待止觀)이며 2는 절대지관(絶待止觀)이니 앞은 이 졸도(拙度)며 후는 이 교도(巧度)다. 상대지관이란 것은 3지3관(三止三觀)이 있다. 3지(止)란 것은 1은 지식의(止息義)며 2는 정지의(停止義)며 3은 부지지의(不止止義)다. 3관(觀)이란 것은 1은 관천의(觀穿義)며 2는 관달의(觀達義)며 3은 불관관의(不觀觀義)다. 절대지관이란 것은 3지3관(三止三觀)이 있다. 3지란 것은 1은 체진지(體眞止)며 2는 방편수연지(方便隨緣止)며 3은 식이변분별지(息二邊分別止)다. 3관이란 것은 1은 종가입공(從假入空)이니 이름이 이제관(二諦觀)이며 2는 종공입가(從空入假)니 이름이 평등관이며 3은 이관위방편도(二觀爲方便道)니 중도에 득입하여 2제(諦)를 쌍조(雙照)하고 심심(心心)이 적멸이라 자연히 살바야해(薩婆若海)로 유입하나니 이름이 중도제일의제관(中道第一義諦觀)이다.
●塗炭; 상서 중훼지고 제2. 백성이 도탄(塗炭)에 추락했다. 주(注) 하걸(夏桀)이 혼란하여 하민(下民; 백성)의 위험을 불쌍하게 여기지 않음이 마치 진흙탕에 빠지고 불에 추락해도 구제하지 않음과 같다.
●胡越; 소원한 모양. ▲유마경약소수유기2. 호월(胡越)이란 것은 호(胡)는 북방에 있고 월(越)은 남방에 있음. 문선(文選) 고시(古詩)에 이르되 호마(胡馬)는 북풍에 울고 월조(越鳥)는 남지(南枝)에 둥지를 튼다. 정필(正弼)이 가로되 동주(同舟; 한 배에 同乘)하여 건너거늘 호월(胡越)이 어찌 이심(異心)을 우환으로 여기겠는가.
●莽蕩; 요활(遼闊; 멀고 넓음)하여 가가 없음(無際).
裴休爲之序曰 諸宗門下 皆有達人 然各安所習 通少局多 故數十年來 師法益壞 以承稟爲戶牖 各自開張 以經論爲干戈 互相攻擊 情隨函矢而遷變〈周禮曰 函人爲甲 孟子曰 矢人豈不仁於函人哉 函人唯恐傷人 矢人唯恐不傷人 葢所習之術使然也 今學者但隨宗徒 彼此相非耳〉 法逐人我以高低 是非紛拏 莫能辨析 則向者世尊菩薩諸方敎宗 適足以起諍 後人增煩惱病 何利益之有 我圭峯大師久而歎曰 吾丁此時不可以默矣 於是以如來三種敎義 印禪宗三種法門 鎔缾盤釵釧爲一金 攪酥酪醍醐爲一味 振綱領而擧者皆順〈荀子云 如振裘領 屈五指而頓之 順者不可勝數〉 據會要而來者同趣〈周易略例云 據會要以觀方來 則六合輻湊 未足多也 都序據圓敎以印諸宗 雖百家亦無所不統也〉 尙恐學者之難明也 又復直示宗源之本末 眞妄之和合 空性之隱顯 法義之差殊 頓漸之異同 遮表之回互 權實之深淺 通局之是非 若吾師者 捧佛日而委曲回照 疑曀盡除 順佛心而橫亘大悲 窮劫蒙益 則世尊爲闡敎之主 吾師爲會敎之人 本末相符 遠近相照 可謂畢一代時敎之能事矣 或曰 自如來未甞大都而通之 今一旦違宗趣而不守 廢關防而不據 無乃乖秘藏密契之道乎 答曰 如來初雖別說三乘 後乃通爲一道〈三十年前 或說小乘 或說空敎 或說相敎 或說性敎 聞者各隨機證悟 不相通知也 四十年後 坐靈鷲而會三乘 詣拘尸而顯一性 前後之軌則也〉 故涅槃經迦葉菩薩曰 諸佛有密語無密藏 世尊讚之曰 如來之言開發顯露 淸淨無翳 愚人不解 謂之秘藏 智者了達 則不名藏 此其證也 故王道興則外戶不閉 而守在戎夷 佛道備則諸法總持 而防在魔外〈涅槃圓敎和會諸法 唯揀別魔說及外道邪宗〉 不當復執情攘臂於其間也〈師又著圓覺大小二疏鈔 法界觀門原人等論 皆裴休爲之序引 盛行于世〉
●序; 禪林寶訓音義云 序 篇首也 猶門之庠序也 ▲圓覺疏鈔隨文要解一 又序者 庠序也 爾雅云 東西牆曰序 欲識宅舍之淺深 先觀庠序 欲識其人 先觀額目 欲知作者之意 先觀其序
●戶牖; 一門窗 門戶 二比喻學術上的門戶 流派
●周禮; 儒家十三經之一 世傳爲周公旦所著 但實際上可能是戰國時期歸納創作而成 周禮儀禮和禮記 合稱三禮 [百度百科]
●函人; 造鎧甲的工匠
●孟子; (前372?-前289?) 戰國時代儒學者 鄒(山東省 鄒城市)人 名軻 字子輿 子車 師孔子之孫子思 治儒術之道 通五經 尤長於詩書(是詩未有禮記) 孟子見梁惠王 王曰 叟不遠千里而來 亦將有以利吾國乎 孟子曰 王何必曰利 亦有仁義而已矣 孟子與高第弟子公孫丑萬章之徒難疑答問 著書七篇 述堯舜之道 孟子曰 楊子取爲我拔一毛而利天下不爲也 墨子兼愛摩頂放踵 利天下爲之(放 至也) [佛祖統紀三十五]
●矢人; 造箭的工匠
●紛拏; 紛爭 爭論
●適足; 充足適度而不過分
●綱領; 網綱衣領
●荀子; (約前313-前238) 名況 字卿 戰國末期趙國人 著名思想家 文學家 政治家 時人尊稱荀卿 又稱孫卿 因荀與孫二字古音相通故 曾三次出任齊國稷下學宮的祭酒 後爲楚蘭陵(位於今山東蘭陵縣)令 對孟子的性善論 荀子提倡性惡論 著有荀子 全書共三十二篇 [百度百科]
●會要; 綱領 樞紐
●輻輳; 形容人或物聚集像車輻集中於車轂一樣 也作輻湊
●一代時敎; 指釋尊自成道至滅度之一生中所說之敎法 卽三藏 十二部經 八萬四千法門等 又作一代敎 一代諸敎 一代敎門
●關防; 防守 警備
●靈鷲; 靈鷲山 梵語耆闍崛 位於中印度摩揭陀國王舍城東北 簡稱靈山 或稱鷲峰 靈嶽 山形似鷲頭 又以山中多鷲故名 如來嘗講法華等大乘經於此 ▲玄應音義六 耆闍崛山 或言伊沙崛山 或言揭梨馱羅鳩胝山 皆訛也 正言姞栗陀羅矩吒山 此譯云鷲臺 又云鷲峰 言此山旣栖鷲鳥 又類高臺也 舊譯云鷲頭 或云靈鷲者一義也 又言靈者仙靈也 按梵本無靈義 依別記云 此鳥有靈 知人死活 人欲死時 則群翔彼家 待其送林 則飛下而食 以能懸知 故號靈鷲也
●拘尸; 拘尸那 又稱拘尸羅 拘絺羅 拘尸那揭羅 拘夷那竭 俱尸那 古稱拘舍婆提 此云上茅城 香茅城 茅宮城 茅城 耎草城 角城 此城位於佛世時十六大國中之末羅國 城北希連河邊之雙樹間 卽佛陀涅槃處 [雜阿含經二十三 長阿含二遊行經 涅槃經二十九 大智度論二 南海寄歸內法傳一 玄應音義二十一 翻譯名義集三]
●戎夷; 西戎與東夷
●攘臂; 宣袂出臂也 孟子云 馮婦攘臂下車 [禪林寶訓音義]
●法界觀門; 一卷 杜順(557-640)撰 又作修大方廣佛華嚴法界觀門 華嚴法界觀門 收於大正藏第四十五冊 本書竝非一獨立流通之書 而收錄於其他之書中 或錄於註釋書之中 例如法藏之發菩提心章 澄觀之法界玄鏡 宗密之註華嚴法界觀門等書中 皆附有本書
●原人; 卽華嚴原人論 一卷 唐宗密述 收於大正藏第四十五冊 論尋討人道 以唯一眞心爲其本者
배휴(裴休)가 서(序)를 지어(爲) 가로되 제종(諸宗)의 문하(門下)에 모두 달인(達人)이 있지만 그러나 각기 소습(所習)에 안주(安住; 安)하여 통창(通暢; 通)은 적고 국집(局執; 局)은 많다. 고로 수십 년 래에 사법(師法)이 더욱(益) 무너져 승품(承稟)으로써 호유(戶牖)를 삼아 각자 개장(開張)하되 경론으로써 간과(干戈; 방패와 창)로 삼아 호상(互相) 공격(攻擊)한다. 정(情)은 함시(函矢) 따라 천변(遷變)하고〈周禮에 가로되 函人이 甲(갑옷)을 만든다. 孟子가 가로되 矢人이 어찌 函人보다 不仁하리오만 函人은 오직 사람을 상할까 두려워하고 矢人은 오직 사람을 손상하지 못할까 두려워한다. 대개 익한 바의 기술이 그렇게 하게 함이다. 여금의 학자가 단지 宗徒 따라 피차 서로 비난할 뿐이다〉 법(法)은 인아(人我)를 쫓아 고저(高低)하니 시비가 분나(紛拏)하여 능히 변석(辨析)함이 없다. 곧 향자(向者; 접때)에 세존과 보살의 제방(諸方)의 교종(敎宗)이 적족(適足)히 기쟁(起諍)하고 후인이 번뇌병(煩惱病)을 더하니(增)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규봉(圭峰) 대사가 오래 탄식해 가로되 내가 차시(此時)에 당해(丁; 當) 묵연함은 옳지 못하다. 이에 여래의 3종 교의(敎義)로써 선종(禪宗)의 3종 법문(法門)에 인(印)을 치니 병(甁)ㆍ반(盤)ㆍ차천(釵釧; 비녀와 팔찌)을 녹여 일금(一金)으로 삼고 소(酥)ㆍ락(酪) 제호(醍醐)를 저어(攪) 일미(一味)로 삼았다. 강령(綱領)을 떨치매 들리는 자(擧者)가 다 순(順)하고〈荀子에 이르되 예컨대(如) 裘領을 떨치며 五指를 굽힐(屈) 것 같으면 조아리며(頓) 順하는 자를 가히 다 세지 못한다〉 회요(會要)에 의거하매 내자(來者)가 한가지로 취향(趣向)하나〈周易略例에 이르되 會要에 依據하여 사방에서 옴을 보건대 곧 六合이 복주(輻輳)함이 족히 많음이 아니다. 都序가 圓敎에 의거하여 諸宗에 印을 치매 비록 百家일지라도 또한 統合하지 못하는 바 없다〉 오히려 학자가 밝히기 어려울까 염려하여 또 다시 종원(宗源)의 본말(本末)ㆍ진망(眞妄)의 화합(和合)ㆍ공성(空性)의 은현(隱顯)ㆍ법의(法義)의 차수(差殊)ㆍ돈점(頓漸)의 이동(異同)ㆍ차표(遮表)의 회호(回互)ㆍ권실(權實)의 심천(深淺)ㆍ통국(通局)의 시비(是非)를 직시(直示)했다. 이에(若) 오사(吾師)는 불일(佛日)을 받들어(捧) 위곡(委曲)히 회조(迴照)하매 의일(疑曀; 의심의 가림)이 모두(盡) 제거되고 불심(佛心)에 순(順)하여 대비(大悲)에 횡긍(橫亘)하매 궁겁(窮劫)토록 이익을 입혔다. 곧 세존은 천교지주(闡敎之主)가 되고 오사(吾師)는 회교지인(會敎之人)이 되어 본말(本末)이 상부(相符)하고 원근(遠近)이 상조(相照)하니 가위(可謂) 일대시교(一代時敎)의 능사(能事)를 마쳤다(畢) 하리라. 혹왈(或曰) 스스로 여래가 일찍이 대도(大都; 크게 모으다)하여 통하지 않았거늘 여금의 일단(一旦)에 종취(宗趣)에 위배하면서 지키지 않고 관방(關防)을 폐(廢)하여 의거(依據)하지 않으면 이에 비장밀계(祕藏密契)의 도에 어긋나지(乖) 않겠는가(無). 답왈(答曰) 여래가 처음에 비록 3승(乘)을 별설(別說)했으나 후에 곧(乃) 통틀어 일도(一道)로 삼았다〈三十年 前에 혹 小乘을 설하고 혹 空敎를 설하고 혹 相敎를 설하고 혹 性敎를 설해 聞者가 각자 隨機하여 證悟하매 相通해 알지 못했다. 四十年 後에 靈鷲에 앉아 三乘을 모았고(會) 拘尸로 나아가 一性을 나타냈으니 前後의 軌則이다〉. 고로 열반경 가섭보살이 가로되 제불은 밀어(密語)가 있고 밀장(密藏)이 없습니다. 세존이 칭찬해 가로되 여래지언(如來之言)은 개발(開發)하고 현로(顯露)하여 청정하고 가림(翳)이 없거늘 우인(愚人)이 이해하지 못해 이를 일러 비장(祕藏)이라 하거니와 지자(智者)는 요달(了達)하여 곧 장(藏; 密藏)이라고 이름하지 않는다 했으니 이것이 그 증거다. 고로 왕도(王道)가 흥하면 곧 외호(外戶)를 닫지 않음은 융이(戎夷)를 수비함에 있고 불도(佛道)가 구비(具備)되면 곧 제법을 총지(總持)함은 마외(魔外)를 방비함에 있으니〈涅槃의 圓敎가 諸法을 和會하지만 오직 魔說 및 外道와 邪宗을 揀別할 뿐이다〉 다시 집정(執情)하여 그 사이에 양비(攘臂)함은 부당(不當)하다〈스님은 또 圓覺大小二疏鈔ㆍ法界觀門ㆍ原人 等의 논을 지었는데 모두 裴休가 序引을 지었고 세상에 성행한다〉.
●序; 선림보훈음의에 이르되 서(序)는 편수(篇首)니 문(門)의 상서(庠序)와 같다. ▲원각소초수문요해1. 또 서(序)란 것은 상서(庠序)다. 이아(爾雅)에 이르되 동서(東西)의 담장을 가로되 서(序)라 했다. 택사(宅舍)의 천심(淺深)을 알고자 한다면 먼저 상서(庠序)를 보고 그 사람을 알고자 한다면 먼저 그 이마와 눈(額目)을 보고 작자의 뜻을 알고자 한다면 먼저 그 서(序)를 보라.
●戶牖; 1. 문창(門窗). 문호(門戶). 2. 학술상(學術上)의 문호, 유파(流派)에 비유함.
●周禮; 유가(儒家) 13경의 하나. 세상에서 전하기를 주공단(周公旦)이 지은 것이라 함. 다만 실제상으론 이 전국시기 귀납(歸納)하여 창작해 이루었음이 가능함. 주례 의례와 예기를 합칭하여 3례(禮)라 함 [백도백과].
●函人; 개갑(鎧甲; 쇠 미늘을 달아 만든 갑옷)을 만드는 공장(工匠).
●孟子; (前 372 ?-前 289 ?) 전국시대 유학자. 추(鄒; 산동성 추성시) 사람이며 이름은 가(軻)며 자는 자여(子輿)ㆍ자거(子車).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를 사사하여 유술(儒術)의 도를 다스렸으며 5경(經)을 통달했음. 더욱이 시서(詩書; 이 시는 예기에 있지 아니함)에 뛰어났음. 맹자가 양혜왕(梁惠王)을 알현하자 왕이 가로되 노인이 천 리를 멀다 하지 않고 오셨으니 또한 장차 우리나라를 이롭게 함이 있습니까. 맹자가 가로되 왕이 하필 이(利)를 말하십니까. 또한 인의(仁義)가 있을 따름입니다. 맹자가 고제(高第; 높은 재능) 제자인 공손축(公孫丑)ㆍ만장(萬章)의 도제와 의심을 힐난하며 답하고 물은 저서가 7편(書名 孟子)인데 요순의 도를 서술했음. 맹자가 가로되 양자(楊子)는 나(자신)를 위함을 취했으니 한 털을 뽑아 천하를 이롭게 하더라도 하지 않는다 했고 묵자(墨子)는 겸애(兼愛)로 마정방종(摩頂放踵; 정수리부터 갈아 닳아져서 발꿈치까지 이른다는 뜻)토록 천하에 이롭다면 그것을 한다(放은 至임) [불조통기35].
●矢人; 화살을 만드는 공장(工匠).
●紛拏; 분쟁(紛爭). 쟁론(爭論).
●適足; 충족하고 적도(適度; 程度에 적합)하여 과분(過分)하지 않음.
●綱領; 망강(網綱; 그물의 벼리)과 의령(衣領; 옷깃).
●荀子; (약 前 313-前 238) 이름은 황(況)이며 자는 경(卿)이니 전국 말기 조(趙)나라 사람. 저명한 사상가ㆍ문학가ㆍ정치가며 시인(時人)이 존칭하여 순경(荀卿)이라 했음. 또 명칭이 손경(孫卿)이니 순(荀)과 손(孫) 2자는 고음(古音)에 상통(相通)했기 때문의 연고임. 일찍이 3차례 제국(齊國) 직하학궁(稷下學宮)의 제주(祭酒)로 출임(出任; 나와서 관직을 맡음)했음. 후에 초(楚)의 난릉(蘭陵; 지금의 산동 난릉현)령(令)이 되었음. 맹자의 성선론(性善論)에 대해 순자는 성악론(性惡論)을 제창했음. 저서에 순자(荀子)가 있고 전서가 공히 32편임 [백도백과].
●會要; 강령(綱領). 추뉴(樞紐; 중요 關鍵. 中樞).
●輻輳; 사람이나 혹 물건의 취집(聚集)한 형상이 수레의 바퀴살이 수레의 바퀴통에 집중함과 한 모양임을 형용함. 또 복주(輻湊)로 지음.
●一代時敎; 석존이 성도로부터 멸도에 이르기까지의 일생 중에 설한 바의 교법(敎法)을 가리킴. 곧 삼장ㆍ십이부경ㆍ팔만사천법문 등. 또 일대교ㆍ일대제교(一代諸敎)ㆍ일대교문으로 지음.
●關防; 방수(防守). 경비(警備).
●靈鷲; 영취산(靈鷲山)이니 범어는 기사굴(耆闍崛; 梵 Gṛdhrakūṭa). 중인도 마갈타국(摩揭陀國; 梵 Magadha) 왕사성의 동북에 위치함. 간칭(簡稱)이 영산(靈山) 혹은 취봉(鷲峰)ㆍ영악(靈嶽). 산형(山形)이 독수리 머리와 같으며 또 산중에 독수리가 많은 연고로써 이름함. 여래가 일찍이 법화(法華) 등의 대승경전을 여기에서 강설했음. ▲현응음의6. 기사굴산(耆闍崛山) 혹은 말하되 이사굴산(伊沙崛山)이라 하거나 혹은 말하되 갈리다라구지산(揭梨馱羅鳩胝山)이라 함은 다 잘못이다. 바른 말로는 길률다라구다산(姞栗陀羅矩吒山)이니 여기에서 번역해 이르자면 취대(鷲臺)이며 또 이르되 취봉(鷲峯)이다. 말하자면 이 산에 이미 독수리가 서식하며 또 고대(高臺)에 견줌이다. 구역(舊譯)에 이르되 취두(鷲頭)라 하거나 혹은 이르되 영취(靈鷲)라 한 것과 한 뜻이다. 또 말하되 영(靈)이란 것은 선령(仙靈)이라 하거니와 범본을 안험하니 영(靈)의 뜻이 없다. 별기(別記)에 의하니 이르기를 이 새는 영(靈)이 있어 사람의 사활(死活)을 안다. 사람이 죽으려고 할 때 곧 무리가 그 집에 날아가 그 송림(送林; 林野에 보냄)을 기다렸다가 곧 날아 내려와서 먹는다. 능히 멀리 알기 때문에 고로 호가 영취다.
●拘尸; 구시나(拘尸那; 梵 Kusinagara)니 또 명칭이 구시라ㆍ구치라ㆍ구시나갈라ㆍ구이나갈ㆍ구시나(俱尸那)임. 고칭은 구사바제(拘舍婆提; 梵 Kuśāvatī)니 여기에선 이르되 상모성ㆍ향모성ㆍ모궁성ㆍ모성ㆍ연초성ㆍ각성임. 이 성은 불세(佛世; 부처 스스로가 교화하는 시대) 시 16대국 중의 말라국(末羅國; 梵 Malla)에 위치했음. 성 북쪽의 희련하(希連河) 가의 쌍수 사이는 곧 불타의 열반처임 [잡아함경23. 장아함2유행경. 열반경29. 대지도론2. 남해기귀내법전1. 현응음의21. 번역명의집3].
●戎夷; 서융과 동이.
●攘臂; 선몌(宣袂; 소매를 흔들다)하며 팔을 내밀음임. 맹자에 이르되 풍부(馮婦)가 양비(攘臂; 소매를 걷어올리다)하고 수레에서 내렸다 [선림보훈음의].
●法界觀門; 1권. 두순(557-640)이 지었음. 또 수대방광불화엄법계관문ㆍ화엄법계관문으로 지음. 대정장 제45책에 수록되었음. 본서는 모두 하나의 독립하여 유통되는 서책이 아니라 기타의 서책 중에 수록되었음. 혹 주석서의 가운데 수록되었으니 예여(例如) 법장의 발보리심장ㆍ징관의 법계현경ㆍ종밀의 주화엄법계관문 등의 서책 중 모두 본서가 첨부되어 있음.
●原人; 곧 화엄원인론(華嚴原人論)이니 1권. 당 종밀(宗密)이 술(述)했고 대정장 제45책에 수록되었음. 인도(人道)를 심토(尋討)하여 유일(唯一)한 진심이 그 근본이 됨을 논한 것.
蕭俛相公呈己見解 請禪師注釋 荷澤云 見淸淨體於諸三昧八萬四千諸波羅蜜門 皆於見上一時起用 名爲慧眼 若當眞知相應之時萬化寂滅〈善惡不思 空有不念 萬法俱從思想緣念而生 皆是虛空 故云化也 旣一念不生 則萬法不起 故不待泯之 自然寂滅也〉 此時更無所見〈照體獨立 夢智亡階〉 三昧諸波羅蜜門 亦一時空寂 更無所得〈散亂與三昧 此岸與彼岸 是相待對治之說 若知心無念 見性無生 則定亂眞妄 一時空寂 故無所得也〉 不審此是見上一時起用否〈然見性圓明 理絕相累 卽絕相爲妙用 住相爲執情 於八萬法門 一一皆爾 一法有 爲一塵 一法空 爲一用 故云 見淸淨體 則一時起用矣〉 望於此後示及俛狀
●蕭俛; (?-842) 一作蕭俯 字思謙 南蘭陵(今江蘇省 常州市 武進區)人 唐朝宰相 [百度百科]
●八萬四千;乃數量極多之形容詞 略作八萬 煩惱種類極多 喩稱八萬四千煩惱 八萬四千塵勞 佛所說之敎法及其意義至爲繁複 故亦總稱八萬四千法門(八萬法門) 八萬四千法藏(八萬法藏) 八萬四千法蘊(八萬法蘊) [往生要集上]
●示及; 見示 談到 常用作書劄中的敬語
소면(蕭俛) 상공(相公)이 자기의 견해를 보이며(呈) 선사(禪師)의 주석(注釋)을 청해 가로되 하택(荷澤)이 이르되 제삼매(諸三昧)와 팔만사천(八萬四千) 제바라밀문(諸波羅蜜門)에서 청정한 체(體)를 보면 모두 견상(見上)에서 일시(一時)의 기용(起用)이며 이름하여 혜안(慧眼)이다. 만약 진여가 상응하는 때에 당(當)하면 만화(萬化)가 적멸(寂滅)이다〈善惡을 不思하고 空有를 不念함이다. 萬法이 모두 思想의 緣念으로 좇아 生하므로 모두 이 허공인지라 고로 이르되 化다. 이미 一念이 不生하면 곧 萬法이 不起하는지라 고로 泯滅을 기다리지 않아도 자연히 적멸이다〉. 차시(此時)에 다시 소견(所見)이 없고〈照體가 獨立하고 夢智가 계급이 없다(亡)〉 삼매와 제바라밀문(諸波羅蜜門)도 또한 일시에 공적(空寂)하여 다시 소득이 없다〈散亂과 三昧, 此岸과 彼岸은 이 相待하여 對治하는 說이다. 만약 마음이 無念이며 見性(보는 자성)이 無生임을 알면 곧 定亂과 眞妄이 일시에 空寂한지라 고로 소득이 없다〉. 불심(不審)하나니 이것은 이 견상(見上)의 일시의 기용(起用)입니까〈그러하여 見性이 圓明하면 理에 相의 累가 단절되고 곧 相이 단절됨이 妙用이 된다. 住相하면 執情이 되어 八萬法門에 一一이 모두 그러하다. 一法이 있음은 一塵이 되고 一法이 空하면 一用이 되는지라 고로 이르되 청정한 體를 보면 곧 一時의 起用이다〉. 바라건대 차후(此後)에 소면(蕭俛)에게 서장(書狀)을 시급(示及)하십시오.
●蕭俛; (?-842) 한편으론 소부(蕭俯)로 지음. 자는 사겸(思謙)이며 남난릉(南蘭陵; 지금의 江蘇省 常州市 武進區) 사람이니 당조(唐朝)의 재상(宰相) [백도백과]
●八萬四千;곧 수량의 극다(極多)의 형용사(形容詞)임. 간략히 팔만(八萬)으로 지음. 번뇌의 종류가 극다하여 비유로 일컬어 팔만사천번뇌ㆍ팔만사천진로(八萬四千塵勞)라 하고 부처가 설한 바의 교법(敎法) 및 그 의의(意義)가 지극히 번복(繁複)한지라 고로 또한 총칭(總稱)하여 팔만사천법문(八萬四千法門; 八萬法門)ㆍ팔반사천법장(八萬四千法藏; 八萬法藏)ㆍ팔만사천법온(八萬四千法蘊; 八萬法蘊)이라 함 [왕생요집상].
●示及; 현시(見示; 보이다). 담도(談到; 얘기하다. 到는 用이 動詞 후에 있으면서 補語가 됨). 상용(常用)하여 서차(書劄; 書札) 중의 경어(敬語)로 씀.
答史山人十問 一問 如何是道 何以修之 爲復必須修成 爲復不假功用 答 無礙是道 覺妄是修 道雖本圓 妄起爲累 妄念都盡 卽是修成 二問 道若因修而成 卽是造作 便同世間法虛僞不實 成而復壞 何名出世 答 造作是結業 名虛僞世間 無作是修行 卽眞實出世 三問 其所修者 爲頓爲漸 漸則忘前失後 何以集合而成 頓則萬行多方 豈得一時圓滿 答 眞理卽悟而頓圓 妄情息之而漸盡 頓圓如初生孩子 一日而肢體已全 漸修如長養成人 多年而志氣方立 四問 凡修心地之法 爲當悟心卽了 爲當別有行門 若別有行門 何名南宗頓旨 若悟卽同諸佛 何不發神通光明 答 識冰池而全水 藉陽氣而鎔消 悟凡夫而卽眞 資法力而修習 冰消則水流潤 方呈溉滌之功 妄盡則心靈通 始發通光之應 修心之外 無別行門 五問 若但修心而得佛者 何故諸經復說必須莊嚴佛土 敎化衆生 方名成道 答 鏡明而影像千差 心淨而神通萬應 影像類莊嚴佛國 神通則敎化衆生 莊嚴而卽非莊嚴 影像而亦色非色 六問 諸經皆說度脫衆生 且衆生卽非衆生 何故更勞度脫 答 衆生若是實度之則爲勞 旣自云卽非衆生 何不例度而無度 七問 諸經說佛常住 或卽說佛滅度 常卽不滅 滅卽非常 豈不相違 答 離一切相 卽名諸佛 何有出世入滅之實乎 見出沒者在乎機緣 機緣應則菩提樹下而出現 機緣盡則娑羅林間而涅槃 其猶淨水無心 無像不現 像非我有 葢外質之去來 相非佛身 豈如來之出沒 八問 云何佛化所生 吾如彼生 佛旣無生 生是何義 若言心生法生 心滅法滅 何以得無生法忍邪 答 旣云如化 化卽是空 空卽無生 何詰生義 生滅滅已 寂滅爲眞 忍可此法無生 名曰無生法忍 九問 諸佛成道說法 秖爲度脫衆生 衆生旣有六道 佛何但住在人中現化 又佛滅後付法於迦葉 以心傳心 乃至此方六祖 每代秖傳一人 旣云於一切衆生皆得一子之地 何以傳授不普 答 日月麗天 六合俱照 而盲者不見 盆下不知 非日月不普 是障隔之咎也 度與不度 義類如斯 非局人天 揀於鬼畜 但人道能結集 傳授不絕 故秖知佛現人中也 滅度後委付迦葉 展轉相承一人者 此亦槩論 當代爲宗敎主 如土無二王 非得度者唯爾數也 十問 和尙因何發心 慕何法而出家 今如何修行 得何法味 所行得至何處地位 今住心邪 修心邪 若住心妨修心 若修心則動念不安 云何名爲學道 若安心一定 則何異定性之徒 伏願大德運大慈悲 如理如如次第 爲說 答 覺四大如坏幻 達六塵如空華 悟自心爲佛心 見本性爲法性 是發心也 知心無住 卽是修行 無住而知 卽爲法味 住著於法 斯爲動念 故如人入闇 則無所見 今無所住 不染不著 故如人有目及日光 明見種種法 豈爲定性之徒 旣無所住著 何論處所
●無生法忍; 謂觀諸法無生無滅之理而諦認之 安住且不動心 又作無生忍 無生忍法 大智度論五十 無生法忍者 於無生滅諸法實相中 信受通達 無礙不退 是名無生忍 ▲禪林疏語考證三 無生法忍 棱嚴云 無生法忍 註 眞如實相名無生法忍 無漏眞知名之爲忍 得此智時忍可印持法無生理 決定不謬 境智相冥名無生忍 瑜伽論云 何名忍 自無憤勃 不報他怨 故名忍
●一子之地; 指菩薩證得化他之果 以平等慈悲心 憐憫一切衆生一如己子之階位
●麗天; 麗 附著也 易離卦 彖曰 離 麗也 日月麗乎天 百穀草木麗乎土(云云) 王弼注 麗 附著也
●六合; 天地與四方 天下 宇宙 ▲祖庭事苑五 六合 莊子(齊物論) 六合之外 聖人存而不論 六合之內 聖人論而不議
●宗敎; 一宗門之敎意 二禪宗與敎宗 此指二
●定性; 因果不易 名曰定性
●坏幻; 慧琳音義八十八 坏幻 上配枚反 說文云 坯 瓦不燒也 從土不聲 下還慣反
사산인(史山人)의 10문(問)에 답하다. 1문(問) 무엇이 이 도(道)며 어떻게(何以) 이를 닦습니까. 다시 수성(修成; 닦아서 이루다)이 필수(必須)가 됩니까. 다시 공용(功用)을 빌리지 않음이 됩니까. 답(答) 무애(無礙)가 이 도(道)며 각망(覺妄; 妄을 깨닫다)이 이 수(修)다. 도는 비록 본래 원명(圓明; 圓)하지만 망념(妄念; 妄)이 일어남이 누(累)가 되나니 망념(妄念)이 모두(都) 없어지면 곧 이것이 수성(修成)이다. 2문(問) 도를 만약 수(修)로 인해 이룬다면 즉시(卽是) 조작(造作)인지라 바로 세간법(世間法)의 허위불실(虛僞不實; 허위며 진실이 아님)과 같아서(同) 이루어졌다가(成) 다시 무너지거늘 어찌 출세(出世; 출세간법)라고 이름하겠습니까. 답(答) 조작(造作)은 이 결업(結業)이며 이름이 허위(虛僞)의 세간(世間)이다. 무작(無作; 조작이 없음)이 이 수행(修行)이니 곧 진실한 출세(出世)다. 3문(問) 그 닦는 바의 것(所修者)은 돈(頓)이 됩니까, 점(漸)이 됩니까. 점(漸)은 곧 망전실후(忘前失後)거늘 어떻게(何以) 집합(集合)하여 이루며 돈(頓)은 곧 만행다방(萬行多方; 만행의 많은 방법)이거늘 어찌 일시(一時)에 원만(圓滿)함을 얻습니까. 답(答) 진리(眞理)는 곧 깨달아 돈원(頓圓; 문득 원만)하지만 망정(妄情)은 그것을 쉬어서(息) 점진(漸盡)한다. 돈원(頓圓)은 처음 출생한 해자(孩子; 아이)가 하루 만에 지체(肢體)가 이미 완전함과 같고 점수(漸修)는 장양(長養)하여 사람을 이룸과 같나니 여러 해(多年)라야 지기(志氣)가 비로소 선다. 4문(問) 무릇 심지(心地)를 닦는 법은 마땅히 오심(悟心)하면 곧 마침(了)이 됩니까. 마땅히 따로 행문(行門)이 있음이 됩니까. 만약 따로 행문이 있다면 어찌 이름해 남종(南宗)의 돈지(頓旨)라 할 것이며 만약 깨치자 곧 제불과 같다면(同) 왜 신통광명(神通光明)을 발출(發出)하지 못합니까. 답(答) 빙지(氷池)가 전수(全水)임을 알더라도 양기(陽氣)를 빌려야(籍) 용소(鎔消; 녹이다)하고 범부(凡夫)가 즉진(卽眞)임을 깨치더라도 법력(法力)을 갖추어야(資) 수습(修習)한다. 얼음(氷)이 녹으면 곧 물이 흘러 윤택(潤澤; 潤)하나니 바야흐로 개척지공(漑滌之功; 물을 대고 씻는 功力)을 보이고(呈) 망념(妄念; 妄)이 없어져야 곧 마음이 영통(靈通)하나니 비로소(始) 통광지응(通光之應; 빛이 통과하는 感應)을 발출(發出; 發)한다. 수심(修心)의 밖에 달리 행문(行門)이 없다. 5문(問) 만약 단지 수심(修心)하여 득불(得佛)한다면 무슨 연고로 제경(諸經)에 다시 설하되 필수(必須)로 불토를 장엄하고 중생을 교화해야 바야흐로 이름해 성도(成道)라고 합니까. 답(答) 거울이 밝으면 영상(影像)이 천차(千差)며 마음이 깨끗하면 신통(神通)이 만응(萬應)이니 영상은 불국을 장엄함과 유사(類似; 類)하고 신통은 곧 중생을 교화함이니 장엄이 곧 장엄이 아니며 영상이 또한 색이면서 색이 아니다. 6문(問) 제경(諸經)에 모두 설하되 중생을 도탈(度脫)하지만 중생이 또(且) 곧 중생이 아니라 하니 무슨 연고로 다시 노고롭게 도탈(度脫)합니까. 답(答) 중생을 만약 이 실로 도탈(度)한다면 곧 노고(勞苦)가 되겠지만 이미 스스로 이르되 곧 중생이 아니라 했으니 어찌 도탈해도 도탈함이 없는 사례(事例; 例)가 아니겠는가. 7문(問) 제경(諸經)에 설하되 부처가 상주(常住)한다 하고 혹은 곧 설하되 부처가 멸도(滅度)했다 하거니와 상(常)은 곧 멸(滅)이 아니며 멸은 곧 상이 아니니 어찌 상위(相違)함이 아니겠습니까. 답(答) 일체상(一切相)을 여읨을 곧 이름해 제불(諸佛)이거늘 어찌 출세(出世)와 입멸(入滅)의 실상(實相; 實)이 있겠는가. 출몰(出沒)을 보는 것은 기연(機緣)에 있나니 기연이 응하면 곧 보리수하(菩提樹下)에서 출현하고 기연이 다하면 곧 사라림간(娑羅林間)에서 열반한다. 그것은 마치(猶) 정수(淨水)가 무심(無心)하여 상(像)을 나타내지 않음이 없지만 상(像)은 나에게 있음(我有)이 아니라 대개 외질(外質)의 거래(去來)며 상(相)은 불신(佛身)이 아니거늘 어찌 여래의 출몰이겠는가. 8문(問) 어찌하여(云何) 불(佛)은 화(化; 幻化)의 소생(所生)이며 나는 그(彼; 佛)의 생(生)과 같다(이 2구는 유마경에 나옴) 했습니까. 불(佛)이 이미 무생(無生)이거늘 생(生)은 이 무슨 뜻입니까. 만약 말하되 마음이 생하면 법도 생하고 마음이 멸하면 법도 멸한다 한다면 어찌하여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습니까. 답(答) 이미 이르되 여화(如化; 幻化와 같음)라 했으니 화(化)는 즉시(卽是) 공(空)이며 공은 곧 무생(無生)이거늘 어찌 생의 뜻을 힐문(詰問)하는가. 생멸이 멸하고 나서 적멸이 진(眞)이 되며 차법(此法)의 무생(無生)을 인가(忍可)함을 이름해 가로되 무생법인(無生法忍)이다. 9문(問) 제불이 성도(成道)하여 설법함은 다만(秖) 중생을 도탈(度脫)하기 위함이거니와 중생이 이미 육도(六道)가 있거늘 부처가 왜 단지 인중(人中)에 주재(住在)하며 현화(現化)합니까. 또 불멸후(佛滅後) 가섭에게 부법(付法)하며 이심전심(以心傳心)했고 내지 차방(此方)의 6조(祖)가 매대(每代)에 다만 1인에게 전했습니다. 이미 이르되 일체중생에 모두 일자지지(一子之地)를 얻는다 했거늘 무슨 까닭으로(何以) 전수(傳授)가 넓지(普) 않습니까. 답(答) 일월(日月)이 여천(麗天; 하늘에 붙다)하여 육합(六合)을 모두 비추지만 맹자(盲者)는 보지 못하고 분하(盆下; 동이 아래)는 알지 못하나니 일월이 넓지(普) 않음이 아니라 이는 장격(障隔)의 허물(咎)이다. 도(度; 도탈)와 부도(不度)의 뜻도 유사(類似)하기가 이와 같나니 인천(人天)에 국한(局限; 局)하고 귀축(鬼畜; 餓鬼道와 畜生道)을 간별(揀別; 揀)함이 아니다. 단지 인도(人道)는 능히 결집(結集)하고 전수(傳授)하여 단절되지 않는지라 고로 다만(秖) 불(佛)이 인중(人中)에 나타남을 아는 것이다. 멸도(滅度)한 후 가섭에게 위부(委付; 托付)하여 전전(展轉)히 1인(人)이 상승(相承)한 것은 이것 또한 대개(大槪; 槩) 당대(當代)에 종교(宗敎)의 주(主)가 된 이를 논함이니 국토에 2왕(王)이 없음과 같다. 득도(得度)하지 못했다는 것은 오직 너의 셈(數)이다. 10문(問) 화상은 무엇으로 인해 발심(發心)했으며 어떤 법을 흠모하여 출가했으며 여금에 어떻게 수행하여 어떤 법미(法味)를 얻었으며 소행(所行)은 어느 곳의 지위에 이름을 얻었으며 주심(住心)하게 합니까, 수심(修心)합니까. 만약 주심(住心)한다면 수심(修心)에 방애(妨礙)되고 만약 수심(修心)한다면 곧 동념(動念)하여 불안(不安)하거늘 어떻게 이름하여 학도(學道)라 하겠습니까. 만약 일정(一定)하게 안심(安心)한다면 곧 어찌 정성(定性)의 무리(徒)와 다르겠습니까. 복원(伏願)컨대 대덕(大德)은 대자비를 운행하여 이치와 같이 여여(如如)하게 차제(次第)로 설하십시오. 답(答) 4대(大)가 배환(坏幻)과 같음을 깨닫고(覺) 6진(塵)이 공화(空華)와 같음을 통달하고 자심(自心)이 불심(佛心)이 됨을 깨닫고(悟) 본성(本性)이 법성(法性)이 됨을 보았으니 이 발심(發心)이다. 마음이 머묾 없음을 아는 게 즉시(卽是) 수행이며 머묾 없이 아는 게 곧 법미(法味)가 되며 법에 주착(住著)하면 이것이(斯) 동념(動念)이 된다. 고로 사람이 입암(入闇)하면 곧 보이는 바가 없음과 같다. 여금에 머무는 바가 없고 물들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지라 고로 사람이 눈 및 일광(日光)이 있어 갖가지 법을 환희 봄과 같거늘 어찌 정성(定性)의 무리(徒)가 될 것이며 이미 주착(住著)하는 바가 없거늘 어찌 처소를 논하겠는가.
●無生法忍; 이르자면 제법의 무생무멸의 이치를 관하여 그것을 체인(諦認; 자세하게 분변하고 인식함)하고 안주하면서 또 마음을 움직이지 않음. 또 무생인(無生忍)ㆍ무생인법(無生忍法)으로 지음. 대지도론50. 무생법인이란 것은 생멸이 없는 제법의 실상 중에서 신수(信受)하여 통달하고 무애하면서 불퇴하나니 이 이름이 무생인(無生忍)이다. ▲선림소어고증3. 무생법인(無生法忍) 릉엄에 이르되 무생법인(無生法忍). 주(註) 진여의 실상을 무생법인이라고 이름하며 무루(無漏)의 진지(眞知)를 이름하여 인(忍)이라 한다. 이 지(智)를 얻을 때 법의 무생의 이치를 인가인지(忍可印持)하므로 결정코 어긋나지 않아 경지(境智)가 상명(相冥)함을 이름이 무생인(無生忍)이다. 유가론(瑜伽論)에 이르되 어찌하여 이름이 인(忍)인가. 스스로 분발(憤勃; 분을 발끈 냄)함이 없어 남에게 원한을 갚지 않으므로 고로 이름이 인(忍)이다.
●一子之地; 보살이 화타(化他)의 과를 증득하여 평등한 자비심으로 일체중생을 자기의 자식과 일여(一如)하게 연민하는 계위(階位)를 가리킴.
●麗天; 려(麗)는 부착임. 역 이괘(離卦) 단(彖)에 가로되 리(離)는 려(麗)다. 일월이 하늘에 려(麗)하매 백곡과 초목이 땅에 려(麗)한다 (운운) 왕필의 주(注) 려(麗)는 부착이다.
●六合; 천지와 사방이니 천하, 우주. ▲조정사원5. 육합(六合) 장자(齊物論) 육합의 밖은 성인이 두되 논하지 않으며 육합의 안은 성인이 논하되 의(議; 시비를 가림)하지 않는다.
●宗敎; 1. 종문의 교의(敎意). 2. 선종과 교종. 여기에선 2를 가리킴.
●定性; 인과가 바뀌지 않음을 이름해 가로되 정성(定性)임.
●坏幻; 혜림음의88 배환(坏幻) 상은 배매반(配枚反; 배)이다. 설문(說文)에 이르되 배(坯) 기와를 굽지 않았다. 토(土)를 좇고 부성(不聲)이다. 하는 환관반(還慣反; 환)이다.
又山南溫造尙書問 悟理息妄之人 不結業一期壽終之後 靈性何依 師曰 一切衆生 無不具有覺性 靈明空寂 與佛無殊 但以無始劫來 未曾了悟 妄執身 爲我相 故生愛惡等情 隨情造業 隨業受報 生老病死 長劫輪回 然身中覺性 未曾生死 如夢被驅役 而身本安閑 如水作冰 而濕性不易 若能悟此性 卽是法身 本自無生 何有依託 靈靈不昧 了了常知 無所從來 亦無所去 然多生妄執 習以性成 喜怒哀樂微細流注 眞理雖然頓達 此情難以卒除 須長覺察 損之又損 如風頓止波浪漸停 豈可一生所修 便同諸佛力用 但可以空寂爲自體 勿認色身 以靈知爲自心 勿認妄念 妄念若起 都不隨之 卽臨命終時 自然業不能繫 雖有中陰 所向自由 天上人間 隨意寄託 若愛惡之念已泯 卽不受分段之身 自能易短爲長 易麤爲妙 若微細流注 一切寂滅 唯圓覺大智朗然獨存 卽隨機應現千百億化身 度有緣衆生 名之爲佛 謹對釋曰 馬鳴菩薩撮略百本大乘經宗旨 以造大乘起信論 論中立宗 說一切衆生心 有覺義不覺義 覺中復有本覺義始覺義 上所述者 雖但約照理觀心處言之 而法義亦同彼論 謂從初至與佛無殊 是本覺也 從但以無始下 是不覺也 從若能悟此下 是始覺也 始覺中復有頓悟漸修 從若能至亦無所去 是頓悟也 從然多生妄執下 是漸修也 漸修中從初發心乃至成佛 有三位自在 從初至隨意寄託者 是受生自在也 從若愛惡之念下 是變易自在也 從若微細流注下至末 是究竟自在也 又從但可以空寂爲自體至自然業不能繫 正是悟理之人朝暮行心修習止觀之要節也 宗密先有八句之偈 顯示此意 曾於尙書處誦之 奉命解釋 偈曰 作有義事是惺悟心 作無義事是狂亂心 狂亂隨情念 臨終被業牽 惺悟不由情 臨終能轉業
●溫造; (766-835) 宇簡輿 號水南山人 並州祁縣(今山西太原市祁縣)人 唐朝大臣 [百度百科]
●中陰; 又云中有 死此生彼 中間所受之陰形也 陰者五陰之陰(新譯云五蘊) 俱舍宗以爲有一定之中陰 成實宗以爲無之 大乘宗以爲有無不定 謂極善極惡之人 無中陰 直至所至 餘皆有之 ▲大乘義章八 命報終謝 名爲無有 生後死前 名爲本有 兩身之間 所受陰形 名爲中有
●分段之身; 卽分段生死之身 爲凡夫輪迴於六道 所受各種不同果報之身 亦卽壽命有長短 形體有大小等之差別限度之身
또 산남(山南) 온조(溫造) 상서(尙書)가 묻되 오리(悟理)하여 식망(息妄; 망념을 쉬다)한 사람은 결업(結業)하지 않나니 일기(一期)의 수명(壽命)을 마친 후 영성(靈性)이 어디에 의지합니까. 답(答) 일체중생이 각성(覺性)을 갖추어 있지 않음이 없으며 영명(靈明)하고 공적(空寂)하여 부처와 다름이 없지만 단지 무시겁래(無始劫來)로 일찍이 요오(無始劫來)하지 못했기 때문에(以) 신(身)을 망집(妄執)하여 아상(我相)으로 삼는지라 고로 애오(愛惡) 등의 정(情)을 내어 정(情)을 따라 조업(造業)하고 업을 따라 수보(受報)하면서 생로병사하며 장겁(長劫)에 윤회합니다. 그러나 신중(身中)의 각성(覺性)은 일찍이 생사(生死)하지 않나니 꿈에 구역(驅役; 役使)을 입어도 신(身)은 본래 안한(安閑)함과 같으며 물이 얼음이 되어도 습성(濕性)은 바뀌지 않음과 같습니다. 만약 능히 차성(此性)이 즉시(卽是) 법신(法身)임을 깨닫는다면 본래 스스로 무생(無生)이거늘 어찌 의탁(依託)함이 있겠습니까. 영영(靈靈)하여 불매(不昧)하고 요료(了了)하여 상지(常知)하나니 좇아오는 바도 없고 또한 가는 바도 없습니다. 그러나 다생(多生)의 망집(妄執)으로 익혀(習) 성(性)을 이룬지라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미세하게 유주(流注)하면서 진리를 비록 그렇게 돈달(頓達)하더라도 차정(此情)은 졸제(卒除; 갑자기 제거)하기 어렵나니 모름지기 늘 각찰(覺察)하여 덜고(損) 또 덜어야 합니다. 바람이 돈지(頓止)해도 파랑(波浪)은 점정(漸停)함과 같거늘 어지 가히 일생(一生)에 닦은 바로 곧(便) 제불의 역용(力用)과 같겠습니까. 단지 가히 공적(空寂)을 자체(自體)로 삼고 색신(色身)을 인정하지 말아야 하며 영지(靈知)를 자심(自心)으로 삼고 망념(妄念)을 인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망념이 만약 일어나더라도 모두(都) 그것을 따르지 않으면 곧 명종(命終)에 임했을 때 자연히 업이 능히 계박(繫縛)하지 못하며 비록 중음(中陰)이 있더라도 향하는 바가 자유(自由)라서 천상인간(天上人間)에 뜻대로 기탁(寄託)합니다. 만약 애오지념(愛惡之念)이 이미 민멸(泯滅)하면 곧 분단지신(分段之身)을 받지 않으며 스스로 능히 단(短)을 바꾸어 장(長)으로 삼고 추(麤)를 바꾸어 묘(妙)로 삼습니다. 만약 미세하게 유주(流注)하더라도 일체가 적멸(寂滅)이니 오직 원각(圓覺)의 대지(大智)만 낭연(朗然)히 독존(獨存)합니다. 곧 수기(隨機)하여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을 응현(應現; 응해 나타냄)하고 유연중생(有緣衆生)을 도탈(度脫)하리니 이를 이름해 불(佛)입니다. 삼가(謹) 대석(對釋)하여 가로되 마명보살(馬鳴菩薩)이 백본(百本) 대승경(大乘經)의 종지(宗旨)를 촬략(撮略)하여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 지었는데 논중(論中)에 입종(立宗)하되 일체중생의 마음에 각의(覺義)와 불각의(不覺義)가 있고 각중(覺中)에 다시 본각의(本覺義)와 시각의(始覺義)가 있음을 설했습니다. 위에 소술(所述)한 것은 비록 단지 조리(照理)하고 관심(觀心)하는 곳을 대약(大約)하여 말했으며 법의(法義) 또한 피론(彼論)과 같습니다. 이르자면 초(初)로부터 여불무수(與佛無殊)에 이르기까지는 이 본각(本覺)이며 단이무시(但以無始) 아래로부터는 이 불각(不覺)이며 약능오차(若能悟此) 아래로부터는 이 시각(始覺)입니다. 시각(始覺) 중에 다시 돈오점수(頓悟漸修)가 있으니 약능(若能)으로부터 역무소거(亦無所去)에 이르기까지는 이 돈오(頓悟)며 연다생망집(然多生妄執) 아래로부터는 이 점수(漸修)입니다. 점수(漸修) 중에 초발심(初發心)으로부터 이에 성불(成佛)에 이르기까지 삼위자재(三位自在)가 있으니 초(初)로부터 수의기탁자(隨意寄託者)에 이르기까지는 이 수생자재(受生自在)며 약애오지념(若愛惡之念) 아래로부터는 이 변역자재(變易自在)며 약미세유주(若微細流注) 아래로부터 말(末)에 이르기까지는 이 구경자재(究竟自在)입니다. 또 단가이공적위자체(但可以空寂爲自體; 단지 가히 空寂을 自體로 삼다)로부터 자연업불능계(自然業不能繫)에 이르기까지는 바로 이 오리지인(悟理之人)이 조모(朝暮)에 행하는 마음이니 지관(止觀)을 수습(修習)하는 요절(要節)입니다. 종밀(宗密)이 먼저 8구(句)의 게가 있어 이 뜻을 현시(顯示)했으며 일찍이 상서(尙書)의 처소에서 이를 외워(誦) 봉명(奉命)하여 해석했습니다. 게왈(偈曰) 유의사(有義事)를 지음은 이 성오심(惺悟心)이며/ 무의사(無義事)를 지음은 이 광란심(狂亂心)이다/ 광란(狂亂)은 정념(情念)을 따르고/ 임종에 업의 견인(牽引)을 입거니와/ 성오(惺悟)는 정(情)을 말미암지 않아/ 임종에 능히 전업(轉業)한다
●溫造; (766-835) 자는 간여(簡輿)며 호는 수남산인(水南山人)이니 병주(並州) 기현(祁縣; 지금의 山西 太原市 祁縣) 사람이며 당조(唐朝)의 대신(大臣) [백도백과].
●中陰; 또 이르되 중유(中有)니 여기에서 죽어 저기에서 출생하는 중간에 받는 바의 음형(陰形)임. 음(陰)이란 것은 5음(五陰; 新譯으론 이르되 五蘊)의 음(陰)임. 구사종(俱舍宗)에선 일정한 중음이 있다 하고 성실종(成實宗)에선 그것이 없다 하고 대승종(大乘宗)에선 유무(有無)를 정(定)하지 못한다 하니 이르자면 극선극악(極善極惡)의 사람은 중음(中陰)이 없이 바로 이를 곳에 이르며 나머지는 모두 이것이 있다 함. ▲대승의장8. 명보(命報)가 종사(終謝; 마쳐서 사라짐)함을 이름해 무유(無有)며 생후사전(生後死前)을 이름해 본유(本有)며 두 몸(無有와 本有)의 중간에 받는 바의 음형(陰形)을 이름해 중유(中有)이다.
●分段之身; 곧 분단생사의 몸. 범부가 6도에 윤회하면서 받는 바 각종 같지 아니한 과보의 몸이 됨. 또한 곧 수명에 장단이 있고 형체에 대소 등의 차별과 한도가 있는 몸임.
師會昌元年正月六日 於興福院誡門人 令舁屍施鳥獸 焚其骨而散之 勿得悲慕以亂禪觀 每淸明上山講道七日 其餘住持儀則當合律科 違者非吾弟子 言訖坐滅 道俗等奉全身于圭峯 茶毗得舍利 明白潤大 後門人泣而求之 皆得於煨燼 乃藏之石室 暨宣宗再闢眞敎 追諡定慧禪師 塔曰靑蓮
스님이 회창(會昌) 원년(元年; 841) 정월 6일 흥복탑원(興福塔院)에서 문인에게 훈계(訓誡)하되 시체를 마주들어 조수(鳥獸)에게 베풀고 그 뼈를 태워 흩게 했다. 비모(悲慕)하면서 선관(禪觀)을 어지럽게 함을 얻지 말라 했고 매번 청명(淸明)에 산에 올라 반드시 7일 동안 강도(講道)하고 그 나머지 주지(住持)의 의칙(儀則)은 마땅히 율과(律科)에 적합해야 하고 위배하는 자는 나의 제자가 아니다 했다. 말을 마치자 좌멸(坐滅)했다. 도속(道俗) 등이 규봉(圭峯)에 전신(全身)을 받들었다. 다비(茶毗)하여 사리를 얻었는데 명백하고 윤대(潤大)했다. 후에 문인(門人)이 읍(泣)하면서 이를 구했는데 모두 외신(煨燼; 잿더미)에서 얻었고 이에 석실에 저장(貯藏)했다. 선종(宣宗)이 진교(眞敎)를 재벽(再闢)함에 이르러(暨) 추시(追諡)하여 정혜선사(定慧禪師)라 했고 탑왈(塔曰) 청련(靑蓮)이라 했다.
西天東土應化聖賢
文殊菩薩
一日令善財採藥曰 是藥者採將來 善財徧觀大地 無不是藥 却來白曰 無有不是藥者 殊曰 是藥者採將來 善財遂於地上拈一莖草 度與文殊 文殊接得 呈起示衆曰 此藥亦能殺人 亦能活人 文殊問菴提遮女曰 生以何爲義 女曰 生以不生生爲生義 殊曰 如何是生以不生生爲生義 女曰 若能明知地水火風四緣未甞自得有所和合 而能隨其所宜 是爲生義 殊曰 死以何爲義 女曰 死以不死死爲死義 殊曰 如何是死以不死死爲死義 女曰 若能明知地水火風四緣未甞自得有所離散 而能隨其所宜 是爲死義 菴提遮女問文殊曰 明知生是不生之理 爲甚麽却被生死之所流轉 殊曰 其力未充
●菴提遮女; 從容錄五第七十則 菴提遮女 婆羅門種 舍衛城西二十餘里 長提村婆私膩長者女也 因家作大會 命(召也)佛及僧 提遮故得振其嘉聲焉 文殊大士問 頗有明知生不生相 爲生所留者否 女曰 有之 雖自明見 其力未充 而爲生所留者是也
문수보살(文殊菩薩)
어느 날 선재(善財)를 시켜 약을 캐게 하면서 가로되 이 약인 것을 캐어 가지고 오너라. 선재가 두루 대지(大地)를 관하매 이 약이 아닌 게 없었다. 돌아와 사뢰어 가로되 이 약이 아닌 게 있지 않습니다. 문수가 가로되 이 약인 것을 캐어 가지고 오너라. 선재가 드디어 지상에서 한 줄기의 풀을 집어 문수에게 건네주었다. 문수가 접득(接得; 접수)하고는 보여 일으키며 시중(示衆)해 가로되 이 약은 또한 능히 사람을 죽이고 또한 능히 사람을 살린다. 문수가 암제차녀(菴提遮女)에게 물어 가로되 생(生)은 무엇으로써 뜻을 삼느냐. 여왈(女曰) 생(生)은 불생생(不生生; 不生의 生)으로써 생(生)의 뜻이 된다. 수왈(殊曰) 무엇이 이 생(生)은 불생생(不生生)으로써 생(生)의 뜻이 되는가. 여왈(女曰) 만약 능히 지수화풍(地水火風)의 4연(緣)이 일찍이 스스로 화합(和合)하는 바 있음을 얻지 못하면서도 능히 그 소의(所宜)를 따르는 줄 밝게 안다면 이 생(生)의 뜻이 된다. 수왈(殊曰) 사(死)는 무엇으로써 뜻을 삼느냐. 여왈(女曰) 사(死)는 불사사(不死死; 不死의 死)로써 사(死)의 뜻이 된다. 수왈(殊曰) 무엇이 이 사(死)는 불사사(不死死)로써 사(死)의 뜻이 되는가. 여왈(女曰) 만약 능히 지수화풍(地水火風)의 4연(緣)이 일찍이 스스로 이산(離散)하는 바 있음을 얻지 못하면서도 능히 그 소의(所宜)를 따르는 줄 밝게 안다면 이 사(死)의 뜻이 된다. 암제차녀가 문수에게 물어 가로되 생(生)이 이 불생()의 이치임을 밝게 알았더라도 무엇 때문에 도리어 생사(不生)에 유전(流轉)하는 바를 입는가. 수왈(殊曰) 그 힘이 충분하지 못해서이다.
●菴提遮女; 종용록5 제70칙. 암제차녀(菴提遮女) 바라문종(婆羅門種)이다. 사위성 서쪽 20여 리 장제촌 바사니장자(婆私膩長者)의 딸이다. 집에서 대회(大會)를 함으로 인해 불타와 승인을 불렀다(命; 召임). 제차(提遮)가 고로 그 가성(嘉聲)을 진작함을 얻었다. 문수대사가 묻되 자못 생(生)이 불생(不生)의 상(相)임을 밝게 알았더라도 생(生)에 소류(所留)하는 게 있는가. 여자가 가로되 그것이 있다. 비록 스스로 밝게 보았더라도 그 힘이 충분하지 못해서 생에 소류(所留)하는 게 이것이다.
天親菩薩
從彌勒內宮而下 無著菩薩問曰 人間四百年 彼天爲一晝夜 彌勒於一時中成就五百億天子證無生法忍 未審說甚麽法 天親曰 秖說這箇法 秖是梵音淸雅 令人樂聞
●天親; 梵名婆藪槃豆 又曰婆修槃陀 譯曰天親 新作伐蘇畔度 譯曰世親 波藪譯曰世天 婆藪槃豆傳曰 婆藪槃豆者 北天竺富婁沙富羅國(譯曰丈夫土國)人 佛滅後九百年而出 兄弟三人 皆名婆藪槃豆 長兄別稱阿僧伽(譯曰無著) 小弟別稱比鄰持跋婆(比鄰持母名 跋婆譯曰兒) 中子獨以通名稱 初於阿踰闍國薩婆多部出家 姸學小乘 旣通大毘婆沙論之義 爲衆講之 一日作一偈 共作六百偈 稱爲俱舍論 後用無著之示誨 懺悔小執之非 欲斷舌謝其罪 無著云 汝旣以舌誹謗大乘 更以此舌讚大乘可也 於是造唯識論等諸大乘論弘宣大敎 壽八十 寂於阿踰闍國
●彌勒內宮; 卽彌勒內院 兜率天二院之一 兜率天爲欲界六天之第四天有內外二院 內院稱善法堂 爲彌勒菩薩最後身之住處 菩薩常於此處 爲諸天人說法 [觀彌勒上生兜率天經 普曜經一]
●無著; 梵語阿僧伽 生於西元四五世紀頃 爲古代印度大乘佛敎瑜伽行派創始人之一 又稱無障礙 北印度健馱邏國布路沙布邏人 依婆藪槃豆法師傳 父名憍尸迦 爲國師婆羅門 有兄弟三人 皆稱婆藪槃豆 師初於小乘薩婆多部(說一切有部)出家 因思惟空義 不能得入 欲自殺身 賓頭羅阿羅漢 在東毘提訶觀見此事 從彼方來 爲說小乘空觀 如敎觀之卽便得入 雖得小乘空觀意猶未安 謂理不應止爾 因此乘神通 往兜率多天諮問彌勒菩薩 彌勒菩薩爲說大乘空觀 還閻浮提如說思惟 遂達大乘空觀 後又數往兜率天學瑜伽師地論等大乘之深義 竝集衆宣說之 由是大乘瑜伽之法門傳至四方 師致力於法相大乘之宣揚 又撰論疏釋諸大乘經 其弟世親本習小乘 後依其勸遂歸大乘 竭力擧揚大乘敎義 著有金剛般若論 順中論 攝大乘論 大乘阿毘達磨雜集論 顯揚聖敎論頌 六門敎授習定論頌等 [金剛仙論十 瑜伽師地論釋 西域記五 南海寄歸內法傳四 往五天竺國傳]
●秖; 與秪祇用同
●梵音; 一又作梵聲 佛菩薩之音聲 卽佛報得淸淨微妙之音聲 亦卽具四辯八音之妙音 佛三十二相中卽有梵音相 二爲梵唄之一種 此指一
천친보살(天親菩薩)
미륵내궁(彌勒內宮)으로 좇아 내려오자 무착보살(無著菩薩)이 물어 가로되 인간의 4백 년이 그 천(天)에선 1주야가 되며 미륵이 일시중(一時中)에 5백억 천자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함을 성취한다. 미심하니 무슨 법을 설하던가. 천친이 이르되 다만(秖) 저개법(這箇法)을 설하나니 다만 이 범음(梵音)이 청아(淸雅)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요문(樂聞; 듣기를 좋아하다)하게 하더이다.
●天親; 범명(梵名)은 바수반두(婆藪槃豆)며 또 가로되 바수반다(婆修槃陀)니 번역해 가로되 천친(天親)임. 신역으론 벌소반도(伐蘇畔度)로 지으며 번역해 가로되 세친(世親)임. 바수(波藪)는 번역해 가로되 세천(世天)임. 바수반두전(婆藪槃豆傳; 婆藪槃豆法師傳)에 가로되 바수반두란 자는 북천축 부루사부라국(富婁沙富羅國; 범 puruṣapura. 번역해 가로되 丈夫土國) 사람이다. 불타가 멸도한 후 9백 년에 출생했다. 형제 삼 인이 다 이름이 바수반두다. 장형(長兄)의 별칭이 아승가(阿僧伽; 梵 asa ṅga. 번역해 가로되 無著)며 소제(小弟)의 별칭이 비린지발바(比鄰持跋婆; 비린지는 어머니의 이름이며 발바는 번역해 가로되 兒)며 중자(中子)만 홀로 통명(通名)으로써 일컫는다. 처음에 아유사국(阿踰闍國) 살바다부(薩婆多部)에 출가해 소승을 연구하고 배워 이미 대비사론(大毘婆沙論)의 뜻을 통달했고 대중을 위해 이를 강설했다. 하루에 1게를 지어 공히 6백 게를 만들어 구사론(俱舍論)이라고 호칭했다. 후에 무착의 시회(示誨)를 채용해 소승에 집착한 그름을 참회했고 혀를 잘라 그 죄를 사죄하려 하자 무착이 이르되 네가 이미 혀로 대승을 비방했으니 다시 이 혀로 대승을 찬탄해야 옳다. 이에 유식론 등 여러 대승론을 지어 대교(大敎)를 홍선(弘宣)했다. 나이는 80이며 아유사국에서 입적했다.
●彌勒內宮; 곧 미륵내원(彌勒內院)이니 도솔천 2원(院)의 하나. 도솔천은 욕계 6천의 제4천이 되며 내외 2원이 있음. 내원은 명칭이 선법당(善法堂)이 되며 미륵보살 최후신(最後身)의 주처가 됨. 보살이 늘 이곳에서 여러 천인을 위해 설법함 [관미륵상생도솔천경. 보요경1].
●無著; 범어로 아승가(阿僧伽; 梵 asaṅga)니 서원(西元) 4, 5세기 경에 출생했으며 고대 인도 대승불교 유가행파(瑜伽行派)의 창시인의 하나가 됨. 또 명칭이 무장애며 북인도 건타라국 포로사포라(布路沙布邏; 梵 Pu ruṣa-pura) 사람. 바수반두법사전에 의거하자면 부친의 이름은 교시가(憍尸迦; 梵 Kauśika)니 국사바라문(國師婆羅門)이 되며 형제 3인이 있었고 모두 명칭이 바수반두(婆藪槃豆; 梵 Vasubandhu)였음. 스님이 처음에 소승 살바다부(薩婆多部; 설일체유부)에서 출가했으며 공의(空義)를 사유하다가 능히 득입하지 못함으로 인해 스스로 몸을 죽이려고 했음. 빈두라(賓頭羅; 梵 Piṇdola) 아라한이 동비제하(東毘提訶; 梵 Videha)에 있으면서 이 일을 관견(觀見)하고는 그 지방으로부터 와서 소승공관(小乘空觀)을 설했으며 가르침과 같이 관하고는 곧 바로 득입했음. 비록 소승공관을 얻었으나 뜻에 오히려 평안하지 못해 이르기를 이치가 응당 이에 머물지만은 않으리라. 이로 인해 신통을 타고 도솔다천(兜率多天)에 가서 미륵보살에게 자문(諮問)하자 미륵보살이 대승공관(大乘空觀)을 설했음. 염부제로 돌아와 설함과 같이 사유했고 드디어 대승공관을 달통했음. 후에 또 자주 도솔천에 가서 유가사지론 등 대승의 심의(深義)를 배웠으며 아울러 대중을 소집해 이를 선설(宣說)했음. 이로 말미암아 대승 유가의 법문이 사방으로 전해 이르렀음. 스님이 법상대승(法相大乘)의 선양에 치력(致力; 힘쓰다)했으며 또 논을 지어 여러 대승경을 소석(疏釋)했음. 그의 동생 세친(世親)은 본래 소승을 학습했는데 후에 그의 권유에 의해 드디어 대승으로 귀의했으며 힘을 다해 대승교의를 거양했음. 저서에 금강반야론ㆍ순중론ㆍ섭대승론ㆍ대승아비달마잡집론ㆍ현양성교론송ㆍ육문교수습정론송 등이 있음 [금강선론10. 유가사지론석. 서역기5. 남해기귀내법전4. 왕오천축국전].
●秖; 지(秪)ㆍ지(祇)와 용(用)이 같음.
●梵音; 1. 또 범성(梵聲)으로 지음. 불보살의 음성이니 곧 불타가 과보로 얻은 청정하고 미묘한 음성. 또 곧 사변팔음(四辯八音)을 갖춘 묘음이니 불타의 32상 중에 곧 범음상(梵音相)이 있음. 2. 범패의 일종이 됨. 여기에선 1을 가리킴.
維摩會上 三十二菩薩各說不二法門 文殊曰 我於一切法 無言無說 無示無識 離諸問答 是爲菩薩入不二法門 於是文殊又問維摩 仁者當說 何等是菩薩入不二法門 維摩默然 文殊讚曰 乃至無有語言文字 是菩薩眞入不二法門
●維摩; 維摩詰 梵語毘摩羅詰利帝 又作毘摩羅詰 維摩詰 華言無垢稱 淨名 滅垢鳴 爲佛陀之在家弟子 乃中印度毘舍離城之長者 [維摩經義疏一 注維摩詰經一 玄應音義八]
유마회상(維摩會上)에서 32보살이 각자 불이법문(不二法門)을 설했다. 문수가 가로되 나는 일체법에 무언무설(無言無說)하고 무시무식(無示無識)하여 모든 문답을 여의었으니 이것이 보살의 입불이법문(入不二法門)이 됩니다. 이에 문수가 또 유마에게 묻되 인자(仁者; 상대의 敬稱)가 마땅히 설하십시오. 무엇 등이 이 보살의 입불이법문(入不二法門)입니까. 유마가 묵연했다. 문수가 감탄하며 가로되 내지 어언문자(語言文字)가 있지 않음이 보살의 참다운 입불이법문입니다.
●維摩; 유마힐(維摩詰; 梵 vimalakīrti)이니 범어로 비마라힐리제(毘摩羅詰利帝)며 또 비마라힐(毘摩羅詰)ㆍ유마힐(維摩詰)로 지음. 화언(華言)으로 무구칭(無垢稱)ㆍ정명(淨名)ㆍ멸구명(滅垢鳴)임. 불타의 재가제자(在家弟子)가 되니 곧 중인도 비사리성의 장자임 [유마경의소1. 주유마힐경1. 현응음의8].
善財
參五十三員善知識 末後到彌勒閣前 見樓閣門閉 瞻仰讚嘆 見彌勒從別處來 善財作禮曰 願樓閣門開 令我得入 尋時彌勒至善財前 彈指一聲 樓閣門開 善財入已 閣門卽閉 見百千萬億樓閣 一一樓閣內有一彌勒 領諸眷屬幷一善財而立其前 善財因無著菩薩問曰 我欲見文殊 何者卽是 財曰 汝發一念心淸淨卽是 無著曰 我發一念心淸淨 爲甚麽不見 財曰 是眞見文殊
●善財; 按華嚴經入法界品 文殊師利在福城東 住莊嚴幢娑羅林中 其時福城長者子有五百童子 善財其一人也 善財生時 種種珍寶自然涌出 以此事故 父母親屬及善相師 共呼此兒名曰善財 善財詣文殊師利所發心 從此漸次南行 參五十三知識而證入法界
●參五十三員善知識; 出華嚴經 下略記顚末 一參 善財最初受文殊敎 往勝樂國妙峰山 參德雲比丘 二參 善財承敎 向海門國 參海雲比丘 三參 善財承敎 至楞伽道邊 海岸聚落 參善住比丘 四參 善財承敎 至達里鼻茶國自在城 參彌伽大士 梵語達里鼻茶 華言消融 五參 善財承敎 漸次遊行十有二年 至住林城 參解脫長者 六參 善財承敎 至閻浮提畔利伽羅國 參海幢比丘 七參 善財承敎 至海潮處普莊嚴國 參休捨優婆夷 八參 善財承敎 向那羅素國 參毘目瞿沙仙人 梵語那羅素 華言不懶惰 九參 善財承敎 至伊沙那聚落 參勝熱婆羅門 梵語伊沙那 華言長直 十參 善財承敎 至師子奮迅城 參慈行童女 十一參 善財承敎 至三眼國 參善見比丘 十二參 善財承敎 至名聞國河渚中 參自在主童子 十三參 善財承敎 至海住大城 參具足優婆夷 十四參 善財承敎 至大興城 參明智居士 十五參 善財承敎 至師子大城 參法寶髻長者 十六參 善財承敎 至藤根國普門城 參普眼長者 十七參 善財承敎 至多羅幢城 參無厭足王 十八參 善財承敎 至妙光城 參大光王 十九參 善財承敎 至安住國 參不動優婆夷 二十參 善財承敎 至都薩羅城 參遍行外道 二十一參 善財承敎 至廣大國 參鬻香長者 名優鉢羅華 二十二參 善財承敎 至樓閣大城 參婆施羅船師 二十三參 善財承敎 至可樂城 參無上勝長者 二十四參 善財承敎 至輸那國迦陵迦林城 參師子頻申比丘尼 梵語輸那 華言勇猛 梵語迦陵迦 華言相鬪戰 二十五參 善財承敎 至險難國寶莊嚴城 參婆須蜜多女 二十六參 善財承敎 至善度城 參鞞瑟胝羅居士 二十七參 善財承敎 至補怛洛迦山 參觀自在菩薩 梵語補怛洛迦 華言海島 又云小白華 二十八參 善財承敎已 爾時東方有一菩薩 名曰正趣 從空中來 放身光明 映蔽一切日月星電 觀自在菩薩 遂令善財參禮 二十九參 善財承敎 至墯羅鉢底城 參大天神 三十參 善財承敎 至摩竭提國菩提場中 參安住地神 三十一參 善財承敎 至摩竭提國迦毘羅城 參婆珊婆演底主夜神 三十二參 善財承敎 至摩竭提國菩提場中 參普德淨光主夜神 三十三參 善財承敎 卽於菩提場右邊 參喜目觀察衆生主夜神 三十四參 善財承敎 卽於會中 參普救衆生妙德夜神 三十五參 善財承敎 參寂靜音海主夜神 三十六參 善財承敎 卽於菩提場如來會中 參守護一切衆生主夜神 三十七參 善財承敎 卽於此佛會中 參開敷一切樹花主夜神 三十八參 善財承敎 卽於會中 參大願精進力救護衆生夜神 三十九參 善財承敎 至藍毘尼園 參妙德圓滿神 四十參 善財承敎 至迦毘羅城 參釋迦瞿波女 四十一參 善財承敎 一心欲詣摩耶夫人所 四十二參 善財承敎 遂往天宮 參王女天主光 四十三參 善財承敎 從天宮下 至迦毘羅城 參遍友童子 四十四參 善財承敎 卽於會中 參善知衆藝童子 四十五參 善財承敎 至摩竭提國婆怛那城 參賢勝優婆夷 四十六參 善財承敎 至沃田城 參堅固解脫長者 四十七參 善財承敎 卽於本城 參妙月長者 四十八參 善財承敎 至出生城 參無勝軍長者 四十九參 善財承敎 至城南法聚落 參最寂靜婆羅門 五十參 善財承敎 至妙意華門城 參德生童子及有德童女 五十一參 善財承敎 至海岸國大莊嚴園 其中有一廣大樓閣 名毘盧遮那莊嚴殿 善財於樓閣前 恭敬頂禮 讚歎稱揚 一心願見彌勒菩薩 時彌勒菩薩 從別處來 爲說種種法要 五十二參 善財承敎 到普門國蘇摩那城 思惟觀察 喜欲奉覲文殊師利 爾時文殊師利 遙伸右手 過一百一十由旬 按善財頂 爲說妙法 五十三參 善財於文殊師利所 得三昧已 普攝諸根 一心求見普賢菩薩 起大精進 心無退轉 卽見普賢菩薩在如來前衆會之中 坐寶蓮華師子之座 [三藏法數三十七]
●尋時; 尋 不久
선재(善財)
53원의 선지식을 참방하고(參五十三員善知識) 말후에 미륵각(彌勒閣) 앞에 이르러 누각문이 닫혔음을 보고 첨앙(瞻仰)하며 찬탄(讚嘆)했다. 미륵이 다른 곳(別處)으로부터 옴을 보고는 선재가 작례(作禮)하고 가로되 원컨대 누각문을 여시어 나로 하여금 득입(得入)하게 하십시오. 심시(尋時)에 미륵이 선재 앞에 이르러 손가락을 퉁겨 한 번 소리를 내자 누각문이 열렸다. 선재가 들어간 다음 누각문이 곧 닫혔다. 백천만억 누각이 보였고 하나하나의 누각 안에 1미륵이 있었고 여러 권속(眷屬)과 아울러 1선재를 거느리고 그 앞에 섰다. 선재(善財)가, 무착보살(無著菩薩)이 물어 가로되 내가 문수(文殊)를 보고 싶은데 어떤 것(何者)이 곧 이것인가 함으로 인해 선재가 가로되 네가 일념심(一念心)의 청정(淸淨)을 일으키면(發) 곧 이것이다. 무착이 가로되 내가 일념심의 청정을 일으켰거늘 무엇 때문에 보지 못하는가. 선재가 가로되 이것이 참으로 문수를 본 것이다.
●善財; 화엄경 입법계품을 안험컨대 문수사리가 복성(福城)의 동쪽에 있으면서 장엄당사라림 중에 머물렀다. 그때 복성의 장자(長者)가 아들이 5백 동자가 있었는데 선재도 그 한 사람이다. 선재가 태어났을 때 갖가지 진보(珍寶)가 자연히 용출했다. 이 일을 쓴 고로 부모와 친속 및 선상사(善相師)가 모두 이 아이를 호칭하며 이름해 가로되 선재라 했다. 선재가 문수사리의 처소에 나아가서 발심하여 여기로부터 점차 남행하여 53지식을 참알하여 법계에 증입(證入)했다.
●參五十三員善知識; 화엄경에 나옴. 아래에 간략히 전말을 기재함. 1참(參) 선재가 최초에 문수의 가르침을 받아 승락국(勝樂國) 묘봉산(妙峰山)에 가서 덕운비구(德雲比丘; 梵 Meghaśrī-bhikṣu)를 참례했다. 2참 선재가 가르침을 받아 해문국(海門國)을 향하여 해운비구(海雲比丘; 梵 Sāgara-megha)를 참례했다. 3참 선재가 가르침을 받아 릉가도변(楞伽道邊)의 해안취락(海岸聚落)에 이르러 선주비구(善住比丘; 梵 Su-pratiṣṭhita)를 참례했다. 4참 선재가 가르침을 받아 달리비다국(達里鼻茶國) 자재성에 이르러 미가대사(彌伽大士; 梵 Megha-dramiḍa)를 참례했다. 범어로 달리비다는 화언(華言)으로 소융(消融)임. 5참 선재가 가르침을 받아 점차 유행하여 12년 만에 주림성(住林城)에 이르러 해탈장자(解脫長者; 梵 Vimuktika-śreṣṭhin)를 참례했다. 6참 선재가 가르침을 받아 염부제반(閻浮提畔)의 리가라국(利伽羅國)에 이르러 해당비구(海幢比丘; 梵 Sāgara-dhvaja)를 참례했다. 7참 선재가 가르침을 받아 해조처(海潮處)의 보장엄국(普莊嚴國)에 이르러 휴사우바이(休捨優婆夷; 梵 Āśā)를 참례했다. 8참 선재가 가르침을 받아 나라소국(那羅素國)을 향해 비목구사선인(毗目瞿沙仙人; 梵 Bhīṣmottara- nirghoṣa)을 참례했다. 범어로 나라소는 화언(華言)으로 불나타(不懶惰)임. 9참 선재가 가르침을 받아 이사나취락(伊沙那聚落)에 이르러 승열바라문(勝熱婆羅門; 梵 Jayoṣmāya)을 참례했다. 범어로 이사나는 화언(華言)으로 장직(長直)임. 10참 선재가 가르침을 받아 사자분신성(師子奮迅城)에 이르러 자행동녀(慈行童女; 梵 Maītrāyaṇī)를 참례했다. 11참 선재가 가르침을 받아 삼안국(三眼國)에 이르러 선견비구(善見比丘; 梵 Su-darśana)를 참례했다. 12참 선재가 가르침을 받아 명문국(名聞國)의 하저(河渚) 가운데 이르러 자재주동자(自在主童子; 梵 Indriyeśvara)를 참례했다. 13참 선재가 가르침을 받아 해주대성(海住大城)에 이르러 구족우바이(具足優婆夷; 梵 Prabhūtā)를 참례했다. 14참 선재가 가르침을 받아 대흥성(大興城)에 이르러 명지거사(明智居士; 梵 Vidvan)를 참례했다. 15참 선재가 가르침을 받아 사자대성(師子大城)에 이르러 법보계장자(法寶髻長者; 梵 Ratna-cūḍa)를 참례했다. 16참 선재가 가르침을 받아 등근국(藤根國)의 보문성(普門城)에 이르러 보안장자(普眼長者; 梵 Samanta-netra)를 참례했다. 17참 선재가 가르침을 받아 다라당성(多羅幢城)에 이르러 무염족왕(無厭足王; 梵 Anala)을 참례했다. 18참 선재가 가르침을 받아 묘광성(妙光城)에 이르러 대광왕(大光王; 梵 Mahā-prabha)을 참례했다. 19참 선재가 가르침을 받아 안주국(安住國)에 이르러 부동우바이(不動優婆夷; 梵 Acalā)를 참례했다. 20참 선재가 가르침을 받아 도살라성(都薩羅城)에 이르러 편행외도(遍行外道; 梵 Sarva-gāmin)를 참례했다. 21참 선재가 가르침을 받아 광대국(廣大國)에 이르러 육향장자(鬻香長者; 梵 Utpala- bhūti)를 참례했다. 이름이 우발라화(優鉢羅華)다. 22참 선재가 가르침을 받아 누각대성(樓閣大城)에 이르러 바시라선사(婆施羅船師; 梵 Vairocana)를 참례했다. 23참 선재가 가르침을 받아 가락성(可樂城)에 이르러 무상승장자(無上勝長者; 梵 Jayottama)를 참례했다. 24참 선재가 가르침을 받아 수나국(輸那國)의 가릉가림성(迦陵迦林城)에 이르러 사자빈신비구니(師子頻申比丘尼; 梵 Si ṃha-vijṛmbhitā)를 참례했다. 범어로 수나는 화언으로 용맹이며 범어로 가릉가는 화언(華言)으로 상투전(相鬪戰)임. 25참 선재가 가르침을 받아 험난국(險難國)의 보장엄성(寶莊嚴城)에 이르러 바수밀다녀(婆須蜜多女; 梵 Vasumitrā)를 참례했다. 26참 선재가 가르침을 받아 선도성(善度城)에 이르러 비슬지라거사(鞞瑟胝羅居士; 梵 Veṣṭhila)를 참례했다. 27참 선재가 가르침을 받아 보달락가산(補怛洛迦山)에 이르러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梵 Avalokiteśvara)을 참례했다. 범어로 보달락가는 화언(華言)으로 해도(海島)며 또 이르되 소백화(小白華)임. 28참 선재가 가르침을 받은 다음 이때 동방에 한 보살이 있었으니 이름해 가로되 정취(正趣; 梵 Ananya-gāmin)였다. 공중으로부터 와서 몸의 광명을 놓으니 일체의 일월성전(日月星電)을 비추어 가렸다. 관자재보살이 드디어 선재로 하여금 참례케 했다. 29참 선재가 가르침을 받아 타라발지성(墯羅鉢底城)에 이르러 대천신(大天神; 梵 Mahā-deva)을 참례했다. 30참 선재가 가르침을 받아 마갈제국(摩竭提國)의 보리장중(菩提場中)에 이르러 안주지신(安住地神; 梵 Sthāvarā)을 참례했다. 31참 선재가 가르침을 받아 마갈제국의 가비라성(迦毘羅城)에 이르러 바산바연지주야신(婆珊婆演底主夜神; 梵 Vasantī)을 참례했다. 32참 선재가 가르침을 받아 마갈제국의 보리장중(菩提場中)에 이르러 보덕정광주야신(普德淨光主夜神; 梵 Samanta-gambhīra-śrī-vimala-prabhā)을 참례했다. 33참 선재가 가르침을 받아 곧 보리장 우변에서 희목관찰중생주야신(喜目觀察衆生主夜神; 梵 Pramudita-nayana-jagad-virocanā)을 참례했다. 34참 선재가 가르침을 받아 곧 회중에서 보구중생묘덕야신(普救衆生妙德夜神; 梵 Samanta-sattva-trāṇojaḥ-śrī)을 참례했다. 35참 선재가 가르침을 받아 적정음해주야신(寂靜音海主夜神; 梵 Praśānta-ruta- sāgaravatī)을 참례했다. 36참 선재가 가르침을 받아 곧 보리장 여래회중에서 수호일체중생주야신(守護一切衆生主夜神; 梵 Sarva-nagara- rakśā-sambhava-tejaḥ-śrī)을 참례했다. 37참 선재가 가르침을 받아 곧 이 불회(佛會) 중에서 개부일체수화주야신(開敷一切樹花主夜神; 梵 Sarva-vṛksa-praphullana-sukha-saṃvāsā)을 참례했다. 38참 선재가 가르침을 받아 곧 회중에서 대원정진력구호중생야신(大願精進力救護衆生夜神; 梵 Sarva-jagad-rakṣī-praṇidhāna-vīya-prabhā)을 참례했다. 39참 선재가 가르침을 받아 람비니원(藍毘尼園)에 이르러 묘덕원만신(妙德圓滿神; 梵 Su-tejo-maṇḍalarati-śrī)을 참례했다. 40참 선재가 가르침을 받아 가비라성(迦毘羅城)에 이르러 석가구파녀(釋迦瞿波女; 梵 Gopā)를 참례했다. 41참 선재가 가르침을 받아 일심으로 마야부인(摩耶夫人; 梵 Māyā)의 처소에 이르려 했다. 42참 선재가 가르침을 받아 드디어 천궁(天宮)에 가서 왕녀천주광(王女天主光; 梵 Su rendrābhā)을 참례했다. 43참 선재가 가르침을 받아 천궁으로부터 내려와 가비라성에 이르러 편우동자(遍友童子; 梵 Viśvā-mitra)를 참례했다. 44참 선재가 가르침을 받아 곧 회중에서 선지중예동자(善知衆藝童子; 梵 Śilpābhijña)를 참례했다. 45참 선재가 가르침을 받아 마갈제국의 바달나성(婆怛那城)에 이르러 현승우바이(賢勝優婆夷; 梵 Bhadro ttamā)를 참례했다. 46참 선재가 가르침을 받아 옥전성(沃田城)에 이르러 견고해탈장자(堅固解脫長者; 梵 Muktā-sāra)를 참례했다. 47참 선재가 가르침을 받아 곧 본성(本城)에서 묘월장자(妙月長者; 梵 Su-cand ra)를 참례했다. 48참 선재가 가르침을 받아 출생성(出生城)에 이르러 무승군장자(無勝軍長者; 梵 Ajita-sena)를 참례했다. 49참 선재가 가르침을 받아 성남(城南) 법취락(法聚落)에 이르러 최적정바라문(最寂靜婆羅門; 梵 Śiva-rāgra)을 참례했다. 50참 선재가 가르침을 받아 묘의화문성(妙意華門城)에 이르러 덕생동자(德生童子; 梵 Śrī- sambhava) 와 및 유덕동녀(有德童女; 梵 Śrī-matī)를 참례했다. 51참 선재가 가르침을 받아 해안국(海岸國) 대장엄원(大莊嚴園)에 이르렀다. 그 중에 한 광대한 누각이 있었으니 이름이 비로자나장엄전(毘盧遮那莊嚴殿)이다. 선재가 누각 앞에서 공경정례(恭敬頂禮)하고 찬탄칭양(讚歎稱揚)하며 일심으로 미륵보살(彌勒菩薩; 梵 Maitreya)을 보기를 원했다. 때에 미륵보살이 별처(別處)로부터 와서 위하여 갖가지 법요(法要)를 설했다. 52참 선재가 가르침을 받아 보문국(普門國) 소마나성(蘇摩那城)에 이르러 사유하고 관찰하며 기쁘게 문수사리(文殊師利; 梵 Mañju-śrī)를 봉근(奉覲)하려고 했다. 이때 문수사리가 멀리서 오른손을 뻗어 110유순(由旬)을 지나와 선재의 정수리를 어루만지며 위해 묘법을 설했다. 53참 선재가 문수사리의 처소에서 삼매를 얻은 다음 제근(諸根)을 보섭(普攝)하고 일심으로 보현보살(普賢菩薩; 梵 Samanta- bhadra)을 구견(求見)하며 큰 정진을 일으켜 마음에 퇴전이 없었다. 곧 보현보살이 여래 앞 중회(衆會) 가운데 보련화사자지좌(寶蓮華師子之座)에 앉아 있음을 보았다 [삼장법수37].
●尋時; 심(尋)은 불구(不久)임.
須菩提尊者
在巖中宴坐 諸天雨華讚嘆 者曰 空中雨華讚嘆 復是何人 云何讚嘆 天曰 我是梵天 敬重尊者善說般若 者曰 我於般若未甞說一字 汝云何讚嘆 天曰 如是尊者無說 我乃無聞 無說無聞 是眞說般若 尊者一日說法次 帝釋雨華 者乃問 此華從天得邪 從地得邪 從人得邪 釋曰 弗也 者曰 從何得邪 釋乃擧手 者曰 如是如是
수보리(須菩提) 존자(尊者)
암중(巖中)에 있으면서 연좌(宴坐)했는데 제천(諸天)이 꽃을 뿌리며(雨華) 찬탄했다. 존자가 가로되 공중에서 꽃을 뿌리며 찬탄하는 이는 다시 이 어떤 사람이며 어찌하여 찬탄하는가. 천(天)이 가로되 나는 이 범천(梵天)입니다. 존자가 반야를 잘 설함을 경중(敬重; 공경하고 존중)합니다. 존자가 가로되 나는 반야에 일찍이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거늘 네가 어찌하여 찬탄하는가. 범천이 가로되 이와 같이 존자가 설함이 없고 내가 이에 들음이 없으니 설함 없고 들음 없음이 이 참으로 반야를 설함입니다. 존자(尊者)가 어느 날 설법하던 차에 제석(帝釋)이 꽃을 뿌렸다. 존자가 이에 묻되 이 꽃은 하늘로 좇아 얻었느냐, 땅으로 좇아 얻었느냐, 사람으로 좇아 얻었느냐. 제석이 가로되 아닙니다(弗也). 존자가 가로되 어디로 좇아 얻었는가. 제석이 이에 거수(擧手)했다. 존자가 가로되 이와 같고 이와 같다.
舍利弗尊者
因入城遙見月上女出城 舍利弗心口思惟 此姊見佛 不知得忍不得忍否 我當問之 纔近便問 大姊往甚麽處去 女曰 如舍利弗與麽去 弗曰 我方入城 汝方出城 何言如我恁麽去 女曰 諸佛弟子 當依何住 弗曰 諸佛弟子依大涅槃而住 女曰 諸佛弟子旣依大涅槃而住 而我亦如舍利弗與麽去 舍利弗問須菩提 夢中說六波羅蜜與覺時同異 提曰 此義深遠 吾不能說 會中有彌勒大士 汝往彼問 舍利弗問彌勒 彌勒云 誰名彌勒 誰是彌勒 舍利弗問天女曰 何以不轉女身 女曰 我從十二年來求女人相 了不可得 當何所轉 卽時天女以神通力變舍利弗 令如天女 女自化身如舍利弗 乃問言 何以不轉女身 舍利弗以天女像而答言 我今不知云何轉面而變爲女身
●舍利弗; <梵> śāriputra <巴> sāriputta 佛陀十大弟子之一 又作舍利弗多 舍利弗羅 舍利弗怛羅 舍利弗多羅 奢利富多羅 設利弗呾羅 此翻爲鶖鷺子 秋露子 鶖子 鴝鵒子 鸜鵒子 梵漢竝譯 則稱舍利子 譯名爲身子 梵語舍利 譯曰身 弗多羅 譯曰子 舍利者鳥名 卽鶖鷺鳥也 其母之眼似之 因名舍利 此是其子 故曰舍利子 或鶖鷺子 是佛弟子中第一之智者也 [雜阿含經四十五 增一阿含經三弟子品 同三十三 佛所行讚四大弟子出家品 中本起經上 大智度論十一 同四十五 玄應音義三]
●月上女; 乃印度毘耶離城長者毘摩羅詰之女 名月上 初生不久 忽大如八歲 姿容端麗 城中求婚者衆 月上女卽告以七日之後 當自選其人 屆期 月上女昇虛空中說偈 大衆聞偈而止貪欲 其後月上女遇舍利弗 竝與之先後詣佛所 與舍利弗等對闡深義 [月上女經上]
●與麽; 原爲宋代之俗語 又作恁麽 伊麽 漝麽 意卽這麽 如此 指物之辭也
●天女; <梵> devakanyā 梵云泥縛迦儞 華言天女 指欲界天之女性 色界以上之諸天無淫欲 故亦無男女之相
사리불(舍利弗) 존자(尊者)
입성(入城)하다가 멀리서 월상녀(月上女)의 출성(出城)을 봄으로 인해 사리불이 심구(心口)로 사유(思惟)하되 이 누이(姊)는 불타를 참견(參見; 見)했는데 인(忍; 法印)을 얻었는지 인(忍)을 얻지 못했는지 알지 못하겠으니 내가 마땅히 그에게 물어야 겠다. 겨우 접근하자 바로 묻되 대자(大姊)는 어느 곳으로 가는가. 여왈(女曰) 사리불과 같이 이렇게(與麽) 갑니다. 불왈(弗曰) 나는 방금 입성하고 너는 방금 출성하는데 어찌하여 말하기를 나와 같이 이렇게(恁麽) 간다고 하는가. 여왈(女曰) 제불의 제자는 마땅히 어디에 의(依)해 머뭅니까. 불왈(弗曰) 제불의 제자는 대열반에 의해 머문다. 여왈(女曰) 제불의 제자가 이미 대열반에 의해 머무는지라 나도 또한 사리불과 같이 이렇게 갑니다. 사리불(舍利弗)이 수보리(須菩提)에게 묻되 몽중에서 6바라밀을 설하면 깨었을 때와 같은가 다른가. 수보리가 가로되 이 뜻이 심원(深遠)하니 내가 능히 설하지 못한다. 회중(會中)에 미륵대사(彌勒大士)가 있으니 네가 거기에 가서 물어라. 사리불이 미륵에게 둗자 미륵이 이르되 누구의 이름이 미륵이며 누가 이 미륵인가. 사리불(舍利弗)이 천녀(天女)에게 물어 가로되 무엇 때문에(何以) 여자의 몸을 전변(轉變; 轉)하지 않는가. 여왈(女曰) 내가 12년 래로부터 여인의 상(相)을 구(求)했지만 마침내 가히 얻지 못했거늘 마땅히 무엇을 전변(轉變)할 바이겠는가. 즉시(卽時) 천녀가 신통력(神通力)으로써 사리불을 변화시켜 천녀와 같게 하고 천녀는 스스로 몸을 변화해 사리불과 같았다. 이에 물어 말하되 무엇 때문에 여신(女身)을 전환(轉換; 轉)하지 않느냐. 사리불이 천녀상(天女像)으로써 답해 말하되 내가 지금 어떻게(云何) 전면(轉面)하여 여신(女身)으로 변화된 줄 알지 못한다.
●舍利弗; <범> śāriputra. <파> sāriputta. 불타 10대 제자의 하나. 또 사리불다ㆍ사리불라ㆍ사리불달라ㆍ사리불다라ㆍ사리부다라ㆍ설리불달라로 지음. 여기에선 추로자(鶖鷺子)ㆍ추로자(秋露子)ㆍ추자(鶖子)ㆍ구욕자(鴝鵒子)ㆍ구욕자(鸜鵒子)로 번역함. 범한(梵漢)을 아울러 번역하면 곧 명칭이 사리자(舍利子)니 번역한 이름은 신자(身子)가 됨. 범어 사리는 번역해 가로되 신(身)이며 불다라는 번역해 가로되 자(子)임. 사리란 것은 새 이름이니 곧 추로조(鶖鷺鳥)임. 그 모친의 눈이 이와 흡사한지라 인해 사리로 이름했으며 이것은 이 그의 아들인지라 고로 가로되 사리자 혹 추로자임. 이는 불제자 중 제1의 지자(智者)임 [잡아함경45. 증일아함경3제자품, 동33. 불소행찬4대제자출가품. 중본기경상. 대지도론11, 동45. 현응음의3].
●月上女; 곧 인도 비야리성(毘耶離城)의 장자 비마라힐(毘摩羅詰)의 딸이니 이름이 월상임. 처음 출생한 지 오래지 않아 홀연히 커져서 8세와 같았음. 자용(姿容)이 단려(端麗)하여 성중에서 구혼자가 많았는데 월상녀가 곧 고하기를 7일 후에 마땅히 스스로 그 사람을 선택하겠다. 기일에 이르자 월상녀가 허공 중에 올라 게를 설했고 대중이 게를 듣자 탐욕을 그쳤음. 그 후 월상녀가 사리불을 만나 아울러 함께 선후로 불타의 처소에 이르러 사리불 등과 깊은 뜻을 대천(對闡)했음 [월상녀경상].
●與麽; 원래 송대(宋代)의 속어가 됨. 또 임마(恁麽)ㆍ이마(伊麽)ㆍ습마(漝麽)로 지음. 뜻은 곧 저마(這麽)ㆍ여차(如此)니 지물지사(指物之辭)임.
●天女; <범> devakanyā. 범어로 이르되 니박가이(泥縛迦儞)는 화언으론 천녀니 욕계천의 여성을 가리킴. 색계 이상의 제천은 음욕이 없으므로 고로 또한 남녀의 상(相)이 없음.
殃崛摩羅尊者
未出家時 外道受敎 爲嬌尸迦 欲登王位 用千人拇指爲花冠 已得九百九十九 唯欠一指 遂欲殺母取指 時佛在靈山 以天眼觀之 乃作沙門在殃崛前 殃崛遂釋母欲殺佛 佛徐行 殃崛急行 追之不及 乃喚曰 瞿曇 住住 佛告曰 我住久矣 是汝不住 殃崛聞之 心忽開悟 遂棄刃 投佛出家
●央崛魔羅; <梵> aṅgulimālya 佛陀弟子之一 又作殃堀摩羅 鴦崛摩羅 鴦掘摩羅 央掘摩羅 央掘魔羅 央仇魔羅 鴦窶利摩羅 鴦掘摩 此翻爲指鬘 指髻 或一切世間現 若梵漢竝擧 則稱鴦崛鬘 鴦崛髻 又稱指鬘外道 初爲住於室羅伐悉底城之凶人 嘗師事邪師摩尼跋陀羅 恭順謙敬 後以師母誣其凌辱之罪 其師遂命其出遊修行 竝囑殺害千人 各取一指作鬘 始得授以涅槃之法 央掘摩羅於是出城殺人 每殺一人則取一指爲華鬘 故有指鬘之稱 至九百九十九人時 欲弑其母以成一千之數 佛陀遙知而愍 遂前往化度之 央掘摩羅見佛陀前來 執劍趨前 意欲害之 後經佛陀爲說正法 乃改過懺悔而入佛門 後證得羅漢果 [增壹阿含經三十一 雜阿含經三十八 央掘魔羅經 大唐西域記六]
●嬌尸迦; 又作憍尸迦 忉利天(三十三天)之主
앙굴마라(殃崛摩羅) 존자
출가하지 않았을 때 외도(外道)에게 가르침을 받아 교시가(嬌尸迦)가 되어 왕위(王位)에 오르려고 했다. 천인(千人)의 엄지손가락(拇指)을 사용해 화관(花冠)을 만드는데(爲) 이미 999를 얻었고 오직 한 손가락이 모자랐고 드디어 살모(殺母)하여 손가락을 취하려고 했다. 때에 불타가 영산(靈山)에 있으면서 천안(天眼)으로써 관(觀)하고는 이에 사문(沙門)이 되어 앙굴 앞에 섰다. 앙굴이 드디어 모친을 석방(釋放)하고 살불(殺佛)하려고 했다. 불타는 서행(徐行)하고 앙굴은 급행(急行)하면서 쫓아가도 미치지 못했다. 이에 불러 가로되 구담(瞿曇)아, 머물러라(住), 머물러라. 불타가 고(告)해 가로되 나는 머문 지 오래되었건만 이 네가 머물지 않는구나. 앙굴이 이를 듣자 마음이 홀연히 개오(開悟)했다. 드디어 칼을 버리고 불타에게 투신해 출가했다.
●央崛魔羅; <범> aṅgulimālya. 불타의 제자의 하나. 도 앙굴마라(殃堀摩羅)ㆍ앙굴마라(鴦崛摩羅)ㆍ앙굴마라(鴦掘摩羅)ㆍ앙굴마라(央掘摩羅)ㆍ앙굴마라(央掘魔羅)ㆍ앙구마라(央仇魔羅)ㆍ앙구리마라(鴦窶利摩羅)ㆍ앙굴마(鴦掘摩)로 지음. 여기에서 번역하면 지만(指鬘)ㆍ지계(指髻) 혹 일체세간현(一切世間現)임. 만약 범한(梵漢)을 병거(竝擧)하면 곧 호칭이 앙굴만(鴦崛鬘)ㆍ앙굴계(鴦崛髻)며 또 명칭이 지만외도(指鬘外道)임. 처음에 실라벌실지성에 거주하는 흉인(凶人)이 되었음. 일찍이 사사(邪師) 마니발타라(摩尼跋陀羅)를 사사(師事)하며 공순(恭順)하고 겸경(謙敬)했는데 후에 사모(師母)가 그 능욕지죄(凌辱之罪)로 무함(誣陷)한지라 그의 스승이 드디어 그에게 명해 출유(出遊)하며 수행하라 했고 아울러 부촉하기를 천 사람을 살해하여 각기 한 손가락을 취해 화만(華鬘; 鬘은 머리의 장식)을 만들어야 비로소 열반의 법을 득수(得授)한다 했음. 앙굴마라가 이에 성을 나서서 살인했는데 매번 한 사람을 죽이면 곧 한 손가락을 취해 화만(華鬘)을 만든지라 고로 지만(指鬘)의 명칭이 있음. 999인에 이르렀을 때 그의 모친을 죽여 1천의 수를 이루려고 하자 불타가 멀리서 이를 알고는 불쌍히 여겨 드디어 앞으로 가서 그를 제도하려고 했음. 앙굴마라가 불타가 앞으로 옴을 보고는 검을 잡고 앞으로 달려가 뜻에 그를 살해하려고 했으나 불타가 정법을 설함을 경과한 후에 곧 개과(改過)하고 참회했고 불문에 들었으며 후에 라한과를 증득했음 [증일아함경31. 잡아함경38. 앙굴마라경. 대당서역기6].
●嬌尸迦; 또 교시가(憍尸迦; 梵 kauśika)로 지음. 도리천(忉利天; 三十三天)의 주(主).
賓頭盧尊者
因阿育王內宮齋三萬大阿羅漢 躬自行香 見第一座無人 王問其故 海意尊者曰 此是賓頭盧位 此人近見佛來 王曰 今在何處 者曰 且待須臾 言訖 賓頭盧從空而下 王請就座禮敬 者不顧 王乃問 承聞尊者親見佛來是否 者以手䇿起眉曰 會麽 王曰 不會 者曰 阿耨達池龍王曾請佛齋 吾是時亦預其數
●賓頭盧; <梵> Piṇḍola 又作賓頭盧頗羅墮誓 賓頭盧頗羅墮 賓度羅跋羅墮闍 賓頭盧突羅闍 爲佛弟子 十六羅漢之一 永住於世 現白頭長眉之相 賓頭盧爲名 譯作不動 跋羅墮闍爲姓 譯作利根 捷疾 重瞳 爲婆羅門十八姓之一 師原爲優塡王輔相之子 年少出家學道 證得阿羅漢果 有神通 曾以顯神通於世人之前 受佛陀呵責 不許住於閻浮提 令至西瞿耶尼洲施化 後雖聽還 而不許其入於涅槃 使永住於南天之摩梨山度化衆生 [雜阿含經二十三 同四十三 十誦律三十七 四分律五十一 大智度論二十六 阿育王傳三]
●行香; 一乃施主爲僧衆設齋食時 先以香分配大衆 而行燒香繞塔禮拜之儀式 二燒香謂爲行香 此指一
●阿耨達池; <梵> anavatapta 爲閻浮提四大河之發源地 又作阿耨大泉 阿那達池 阿那婆答多池 阿那婆踏池 略稱阿耨 此云淸涼池 無熱惱池 此池位於大雪山之北香醉山 有龍王居之 名爲阿耨達 池東爲恆河出口 南爲信度河 西爲縛芻河 北爲徙多河 [長阿含經十八 起世經一 大樓炭經一 西域記一 翻譯名義集七]
빈두로(賓頭盧) 존자(尊者)
아육왕(阿育王)이 내궁(內宮)에서 3만 대아라한에게 재(齋)함으로 인해 몸소 행향(行香)했다. 제1좌에 사람이 없음을 보고 왕이 그 연고를 묻자 해의존자(海意尊者)가 가로되 이것은 이 빈두로(賓頭盧)의 자리입니다. 이 사람은 최근에 불타를 친견하고 왔습니다. 왕왈(王曰) 지금 어느 곳에 있습니까. 존자가 가로되 다만(且) 수유(須臾) 기다리십시오. 말을 마치자 빈두로가 허공으로 좇아 내려왔다. 왕이 취좌(就座)를 청하고 예경(禮敬)했다. 존자가 돌아보지 않았다. 왕이 이에 묻되 받들어 듣건대 존자가 여래를 친견하고 왔다 하니 그렇습니까. 존자가 손으로써 눈썹을 책기(策起; 들어 일으킴)하며 가로되 아시겠습니까. 왕왈(王曰) 알지 못합니다. 존자가 가로되 아뇩달지(阿耨達池) 용왕이 일찍이 불타를 청해 재(齋)를 했는데 나도 이때 또한 그 수에 참예(參預)했습니다.
●賓頭盧; <범> Piṇḍola. 또 빈두로파라타서ㆍ빈두로파라타ㆍ빈두로발라타사(賓度羅跋羅墮闍; 梵 Piṇḍ ola–bhāradvāja)ㆍ빈두로돌라사로 지음. 불타의 제자가 되며 16라한의 하나. 영원히 세상에 거주하며 흰 머리에 긴 눈썹의 형상을 나타냄. 빈두로(賓頭盧)는 이름이 되고 번역하면 부동(不動)으로 지으며 발라사타(跋羅墮闍)는 성이 되고 번역하면 이근(利根)ㆍ첩질(捷疾)ㆍ중동(重瞳)이 됨. 바라문 18성(姓)의 하나가 됨. 스님은 원래 우전왕의 보상(輔相)의 아들이 되며 연소할 적에 출가하여 학도했고 아라한과를 증득했으며 신통이 있었음. 일찍이 신통을 세인들의 앞에서 나타낸지라 불타의 가책(呵責)을 받아 염부제에 거주함을 불허했고 서구야니주에 이르러 교화를 베풀게 했음. 후에 비록 귀환을 청허했으나 그에게 열반에 듦을 허락하지 않고 남천축의 마리산(摩梨山)에 영주하며 중생을 도화(度化)하게 했음 [잡아함경23, 동43. 십송률37. 사분율51. 대지도론26. 아육왕전3].
●行香; 1. 곧 시주가 승중을 위해 재식(齋食)을 베풀 때 먼저 향을 대중에게 분배하여 향을 사르고 탑을 돌면서 예배를 행하는 의식임. 2. 소향(燒香)을 일러 행향이라 함. 여기에선 1을 가리킴.
●阿耨達池; <범> anavatapta. 염부제 4대하(大河)의 발원지가 됨. 또 아뇩대천ㆍ아나달지ㆍ아나바답다지ㆍ아나바답지로 지으며 약칭이 아뇩(阿耨)임. 여기에선 이르되 청량지(淸涼池)ㆍ무열뇌지(無熱惱池)며 이 못은 대설산의 북방 향취산(香醉山)에 위치하며 용왕이 이에 거주해 있으며 이름해 아뇩달임. 못의 동쪽은 항하(恆河)의 출구가 되고 남쪽은 신도하(信度河)가 되고 서쪽은 박추하(縛芻河)가 되고 북쪽은 사다하(徙多河)가 됨 [장아함경18. 기세경1. 대루탄경1. 서역기1. 번역명의집7].
障蔽魔王
領諸眷屬一千年 隨金剛齊菩薩覔起處不得 忽一日得見 乃問曰 汝當依何而住 我一千年覔汝起處不得 齊曰 我不依有住而住 不依無住而住 如是而住
●障蔽魔王; 自在王菩薩經上 時有魔子 名曰障礙 見金剛齊比丘 如是持戒 修習聖法 正念無倒 與八萬四千諸魔及其眷屬 貫鉀持兵 來到其所 自隱其身 觀是比丘心在何行 千歲隨逐 乃至不見一念心散可得惱壞 …… 魔言比丘 我於千歲 求汝心行 不能知處 比丘言 汝若以恒河沙劫求之 亦不能得 何以故 是心不在內不在外不在中 汝寧能得幻化人心所行處不 答言 幻化之人尙無有心 況心行處(云云)
장폐마왕(障蔽魔王)
모든 권속(眷屬)을 거느리고 1천 년 동안 금강제보살(金剛齊菩薩)을 따르면서 일어나는 곳을 찾았지만 얻지 못했다. 홀연히 어느 날 봄을 얻고 이에 물어 가로되 네가 마땅히 어디에 의해 머물렀기에 내가 1천 년 동안 너의 일어나는 곳을 찾아도 얻지 못했는가. 금강제가 가로되 나는 유주(有住)에 의해 머물지 않고 무주(無住)에 의해 머물지 않았나니 이와 같이 머물렀다.
●障蔽魔王; 자재왕보살경상 때에 마자(魔子)가 있었으니 이름해 가로되 장애(障礙)였다. 금강제비구(金剛齊比丘)를 보매 이와 같이 지계하고 성법(聖法)을 닦으면서 정념이 거꾸러지지 않았다. 팔만사천의 모든 마와 및 그 권속과 갑옷을 꿰어 입고 병기를 가지고 와서 그 처소에 이르렀다. 스스로 그 몸을 숨기고 이 비구의 마음이 어디에 있으면서 행하는지를 살폈다. 천세(千歲)를 따르며 쫓았지만 내지 한 생각이라도 마음이 산란하여 가히 뇌괴(惱壞)함을 얻음을 보지 못했다 …… 마(魔)가 비구에게 말하되 내가 천세(千歲)에 너의 심행(心行)을 구했지만 능히 거처를 알지 못했다. 비구가 말하되 네가 만약 항하사겁을 구하더라도 또한 능히 얻지 못한다. 무슨 연고인가 하면 이 마음은 안에 있지도 않고 밖에 있지도 않고 중간에 있지도 않다. 네가 어찌 능히 환화인(幻化人)의 마음의 행하는 바의 곳을 얻겠는가. 답해 말하되 환화의 사람은 오히려 마음이 있지 않거늘 하물며 심행의 처소리오 (운운).
那吒太子
析肉還母 析骨還父 然後現本身 運大神力 爲父母說法
●那吒; 北方毘沙門天王第三子 毘沙門儀軌云 北方大毘沙門天王 …… 天王第三子那吒太子 捧塔常隨天王
나타태자(那吒太子)
살을 쪼개어 어머니에게 돌려주고 뼈를 쪼개어 아버지에게 돌려준 연후에 본신(本身)을 나타내고 대신력(大神力)을 운행하여 부모를 위해 설법했다.
●那吒; 북방 비사문천왕의 제3자. 비사문의궤에 이르되 북방 대비사문천왕 …… 천왕의 제3자 나타태자(那吒太子; 梵 Nalakūvara)는 탑을 받들고 늘 천왕을 따른다.
秦跋陀禪師
問生法師講何經論 生曰 大般若經 師曰 作麽生說色空義 曰 衆微聚曰色 衆微無自性曰空 師曰 衆微未聚 喚作甚麽 生罔措 師又問 別講何經論 曰 大涅槃經 師曰 如何說涅槃之義 曰 涅而不生 槃而不滅 不生不滅 故曰涅槃 師曰 這箇是如來涅槃 那箇是法師涅槃 曰 涅槃之義 豈有二邪 某甲秖如此 未審禪師如何說涅槃 師拈起如意曰 還見麽 曰 見 師曰 見箇甚麽 曰 見禪師手中如意 師將如意擲於地曰 見麽 曰 見 師曰 見箇甚麽 曰 見禪師手中如意墮地 師斥曰 觀公見解 未出常流 何得名喧宇宙 拂衣而去 其徒懷疑不已 乃追師扣問 我師說色空涅槃不契 未審禪師如何說色空義 師曰 不道汝師說得不是 汝師秖說得果上色空 不會說得因中色空 其徒曰 如何是因中色空 師曰 一微空故衆微空 衆微空故一微空 一微空中無衆微 衆微空中無一微
●跋陀禪師; 指佛馱跋陀羅(359-429) 晉代竺僧 此云覺賢 迦毘羅衛人 童齡出家 受禪業於佛大先 智嚴遊學西域 請與俱至長安 羅什迎與同處 屢就決疑 後與什議不合 乃率弟子慧觀等四十餘人南去 慧遠迎至廬山 譯達摩多羅禪經 已而適江陵 復至京師道場寺 譯華嚴經六十卷 觀佛三昧海經 僧祇律 修行方便論等 [梁高僧傳二 佛祖統紀二十七 傳法正宗記九 祖庭事苑六]
●生法師; 道生(355-434) 劉宋僧 本姓魏 鉅鹿人 値竺法汰而出家 遂姓竺 入廬山 幽棲七年 鑽仰群經 後與慧叡慧嚴同遊長安 從羅什受學 後還都 止靑園寺 著二諦論 佛性常有論 法身無色論 佛無淨土論等 守文之徒 多生嫌嫉 又六卷之泥洹經 先至京師 生剖析經理 立闡提成佛之義 時大本未傳 舊學不許之 以爲邪說 遂擯於衆中 生袖手入平江虎丘山 竪石爲聽徒 講涅槃經 至闡提有佛性處曰 如我所說 契佛心否 群石皆首肯 後遊廬山 居銷景巖 聞曇無讖在北涼 重譯涅槃之後品 至南京見之 果如生言 宋元嘉十一年十一月寂 [高僧傳七 釋氏稽古略二]
●如意; 爪杖 祖庭事苑七 痒和子 卽如意
진(秦) 발타선사(跋陀禪師)
생법사(生法師)에게 묻되 무슨 경론을 강설합니까. 생왈(生曰) 대반야경(大般若經)입니다. 사왈(師曰) 어떻게 색공(色空)의 뜻을 설합니까. 가로되 중미(衆微)의 모임(聚)을 가로되 색(色)이며 중미가 자성이 없음을 가로되 공(空) 사왈 중미가 모이지 않아서는 무엇이라고 불러 짓습니까. 생(生)이 망조(罔措; 罔知所措니 어찌할 바를 모름)했다. 스님이 또 묻되 달리 무슨 경론을 강설합니까. 가로되 대열반경입니다. 사왈 어떻게 열반의 뜻을 설합니까. 가로되 열(涅)은 불생(不生)이며 반(槃)은 불멸(不滅)이니 불생불멸이므로 고로 가로되 열반입니다. 사왈 이것(這箇)은 이 여래의 열반입니다. 어느 것(那箇)이 이 법사의 열반입니까. 가로되 열반의 뜻에 어찌 둘이 있겠습니까. 모갑(某甲)은 단지 이와 같거니와 미심(未審) 하나니 선사(禪師)는 어떻게 열반을 설합니까. 스님이 여의(如意; 爪杖)를 잡아 일으키며 가로되 도리어 봅니까. 가로되 봅니다. 사왈 이(箇) 무엇을 봅니까. 가로되 선사의 손안의 여의를 봅니다. 스님이 여의를 가지고 땅에 던지고는 가로되 봅니까. 가로되 봅니다. 스님이 가로되 이 무엇을 봅니까. 가로되 선사의 손안의 여의가 땅에 떨어졌음을 봅니다. 스님이 가리키며(斥) 가로되 공(公)의 견해를 보건대 상류(常流)를 벗어나지 못하거늘 어찌하여 이름이 우주에 떠들썩함을 얻었습니까. 옷을 떨치고 떠났다. 그 도중(徒衆)이 의심을 품어 말지 않았다. 이에 스님을 쫓아가서 구문(扣問; 扣는 물을 구. 두드릴 구)했다. 우리 스님이 색공(色空)과 열반을 설했으나 계합치 못했습니다. 미심하나니 선사는 어떻게 색공(色空)의 뜻을 설하십니까. 사왈 너희 스님이 설해 얻은 게 옳지 않다고 말함이 아니라 너희 스님은 단지 과상(果上)의 색공을 설해 얻었고 인중(因中)의 색공을 설함(說得)을 알지 못했다. 그 도중이 가로되 무엇이 이 인중의 색공입니까. 사왈 일미(一微)가 공(空)한 고로 중미(衆微)가 공했고 중미가 공한 고로 일미가 공했다. 일미가 공한 중에 중미가 없고 중미가 공한 중에 일미가 없다.
●跋陀禪師;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 359-429. 梵 Buddhabhadra)를 가리킴. 진대(晉代) 천축승. 여기에선 이르되 각현(覺賢)이니 가비라위(迦毘羅衛) 사람. 동자의 나이(童齡)에 출가하여 불대선(佛大先; 梵 buddhasena)에게서 선업(禪業)을 받았음. 지엄(智嚴)이 서역에 유학하다가 청하여 함께 장안에 이르렀고 라집이 맞이해 함께 거처하면서 여러 차례 나아가 결의(決疑)했음. 후에 라집과의 의논이 합치하지 않아 이에 제자 혜관(慧觀) 등 40여 인을 데리고 남방으로 갔는데 혜원이 맞이해 여산에 이르렀고 달마다라선경(達摩多羅禪經)을 번역했음. 이미 그러고는 강릉으로 갔고 다시 경사 도량사에 이르러 화엄경 60권ㆍ관불삼매해경ㆍ승기율ㆍ수행방편론 등을 번역했음 [양고승전2. 불조통기27. 전법정종기9. 조정사원6].
●生法師; 도생(道生; 355-434)이니 유송승(劉宋僧). 본성은 위(魏)며 거록 사람. 축법태(竺法汰)를 만나 출가했으며 드디어 성을 축(竺)이라 했음. 여산에 들어가 7년 동안 고요히 쉬면서 뭇 경을 찬앙(鑽仰; 칭송하면서 우러러봄)했음. 후에 혜예ㆍ혜엄과 함께 장안을 유람하다가 라집을 좇아 수학했음. 뒤에 도읍으로 돌아가 청원사에 머물면서 이제론ㆍ불성상유론ㆍ법신무색론ㆍ불무정토론 등을 지었는데 문구를 지키는 무리가 많이 혐의와 질투를 내었음. 또 6권의 니원경이 먼저 경사에 이르렀는데 도생이 경의 이치를 부석(剖析; 분석)하여 천제(闡提)도 성불한다는 뜻을 세웠음. 때에 대본(大本)이 전래되지 않았으며 구학(舊學)이 그것을 허가하지 않고 삿된 설로 삼았으며 드디어 대중 가운데서 쫓아내었음. 도생이 수수(袖手; 1. 팔짱을 낌. 2. 어떤 일에 직접 나서지 않고 버려둠)하고 평강 호구산(虎丘山)으로 들어가 돌을 세워 청도(聽徒; 청중)로 삼고 열반경을 강설했는데 천제(闡提)도 불성이 있다는 곳에 이르자 가로되 내가 설한 바와 같으며 불심에 계합하는가, 뭇 돌이 다 수긍하였음. 후에 여산을 유람하다가 소경암에 거주했음. 담무참이 북량에 있으면서 열반경의 후품을 거듭 번역한다 함을 들었는데 남경에 이르러 그것을 보니 과연 도생의 말과 같았음. 송 원가 11년 11월에 시적했음 [고승전7. 석씨계고략2].
●如意; 조장(爪杖). 조정사원7. 양화자(痒和子) 곧 여의(如意)다.
寶誌禪師
初金陵東陽民朱氏之婦 上巳日聞兒啼鷹巢中 梯樹得之 擧以爲子 七歲依鍾山大沙門僧儉出家 專修禪觀 宋太始二年髮而徒跣 著錦袍往來皖山劒水之下 以翦尺拂子拄杖頭 負之而行 天鑑二年梁武帝詔問 弟子煩惑未除 何以治之 答曰 十二 帝問 其旨如何 答曰 在書字時節刻漏中 帝益不曉 帝甞詔畫工張僧繇寫師像 僧繇下筆輙不自定 師遂以指𠢐面門 分披出十二面觀音 妙相殊麗 或慈或威 僧繇竟不能寫 他日與帝臨江縱望 有物泝流而上 師以杖引之 隨杖而至 乃紫旃檀也 卽以屬供奉官兪紹 令雕師像 頃刻而成 神采如生 師問一梵僧 承聞尊者喚我作屠兒 曾見我殺生麽 曰 見 師曰 有見見 無見見 不有不無見 若有見見是凡夫見 無見見是聲聞見 不有不無見是外道見 未審尊者如何見 梵僧曰 你有此等見邪〈汾陽曰 不枉西來〉 師垂語曰 終日拈香擇火 不知身是道場 又曰 大道秖在目前 要且目前難覩 欲識大道眞體 不離聲色言語 又曰 京都鄴都浩浩 還是菩提大道〈法眼曰 京都鄴都浩浩 不是菩提大道〉
●寶誌; (418-514) 南朝僧 又作寶志 保誌 世稱寶公 志公 誌公和尙 金城(陝西南鄭 或江蘇句容)人 俗姓朱 年少出家 師事道林寺僧儉 修習禪業 劉宋泰始年間(466-471) 往來於都邑 居無定所 時或賦詩 其言每似讖記 四民遂爭就問福禍 齊武帝以其惑衆 投之於獄 然日日見師遊行於市里 乃往獄中檢視 卻見師猶在獄中 帝聞之 乃迎入華林園供養 禁其出入 而師不爲所拘 仍常遊訪龍光 罽賓 興皇 淨名等諸寺 至梁武帝建國 始解其禁 師每與帝長談 所言皆經論義 師於天監十三年十二月示寂 壽九十六 敕葬鍾山獨龍阜 於墓側立開善寺 諡號廣濟大師 後代續有追贈 如妙覺大師 道林眞覺菩薩 道林眞覺大師 慈應惠感大師 普濟聖師菩薩 一際眞密禪師等號 師嘗爲學者述文字釋訓三十卷 十四科頌十四首 十二時頌十二首 大乘讚十首等 [梁高僧傳十 佛祖統紀三十六 同三十七 佛祖歷代通載十 寶華山志七誌公法師墓誌銘 神僧傳四]
●金陵; 江蘇金陵 又江寧 建業 建康 應天府 南京等稱之 吳 東晉 宋 齊 梁 陳 明等之都邑 鍾山靈谷寺 攝山棲霞寺 鳳山天界寺 石頭山淸涼寺 上下瓦官寺 牛頭山弘覺寺 幽棲山祖堂寺等中國禪宗大叢林 在此集中 [金陵梵刹志 讀史方輿紀要二十]
●上巳日; 卽三月三日也 [禪林寶訓音義]
●刻漏; 古計時器 以銅爲壺 底穿孔 壺中立一有刻度的箭形浮標 壺中水滴漏漸少 箭上度數卽漸次顯露 視之可知時刻 [漢語詞語]
●張僧繇; 梁代居士 著名畵家 吳(江蘇蘇州)人 以孝悌聞 嘗爲吳興太守 善作佛天像 武帝所造諸寺 多命之繪飾 所作定光 大日諸如來像 世推神品 又嘗雜繪孔子十哲於佛天之列 後有滅法者 盡毁諸寺 獨此宇得全
●面門; 面部 ▲華嚴經探玄記三 面門者 諸德有三釋 一云是口 一云是面之正容非別口也 光統師云 鼻下口上中間是也
●神采; 精神和風采 表現出來的精神面貌
●梵僧; 一指西域或印度東來之異國僧侶 一指持戒淸淨(卽修梵行)之修行僧 後來亦漸用以泛指一般僧人 蓋以出家修行佛道者 必以出離俗世 捨棄雜染 斷除淫欲爲基本要務之故
●屠兒; 屠夫 兒 後綴
●垂語; 垂示之語也 禪門宗匠上堂提撕學人曰垂示
보지선사(寶誌禪師)
처음에 금릉(金陵) 동양(東陽)의 주민(住民; 民) 주씨(朱氏)의 아내(婦)가 상사일(上巳日)에 응소(鷹巢; 매의 둥지) 중에서 아이의 울음을 들었다. 나무에 사다리를 놓아(梯樹) 이를 얻었고 들어(擧) 아들로 삼았다. 7세에 종산(鍾山) 대사문(大沙門) 승검(僧儉)에게 의지해 출가했고 오로지 선관(禪觀)을 닦았다. 송(宋) 태시(太始; 泰始) 2년(466) 머리털을 기르고(髮) 맨발(徒跣)로 금포(錦袍)를 입고(著) 환산(皖山) 검수(劒水) 아래를 왕래했다. 전척(翦尺; 가위와 자)ㆍ불자(拂子)ㆍ주장두(拄杖頭; 주장자. 頭는 조사)를 짊어지고 다녔다. 천감(天鑑) 2년(503) 양무제가 불러(詔) 묻되 제자(弟子)가 번혹(煩惑)을 제(除)하지 못했으니 무엇으로써(何以) 그것을 다스려야 합니까. 답왈(答曰) 십이(十二)입니다. 제문(帝問) 그 의지(意旨)가 무엇입니까. 답왈(答曰) 서자시절각루(書字時節刻漏) 가운데 있습니다. 제(帝)가 더욱 깨닫지 못했다. 제(帝)가 일찍이 화공(畫工) 장승요(張僧繇)를 불러 스님의 형상(形像)을 베끼게(寫) 했다. 승요가 하칠(下筆; 붓을 댐)하자 문득(輙) 스스로 안정(安定; 定)하지 못했다. 스님이 드디어 손가락으로써 면문(面門)을 벗기어(𠢐; 리) 분피(分披)하여 십이면관음을 나타냈다(出). 묘상(妙相)이 수려(殊麗)했는데 혹은 자비롭고 혹은 위엄스러워 승요가 마침내 능히 베끼지 못했다. 타일(他日)에 제(帝)와 더불어 강에 임해 종망(縱望; 마음대로 봄)하는데 어떤 물건(有物)이 흐름을 거슬러 올라왔다. 스님이 지팡이로써 그것을 당겼더니 지팡이 따라 이르렀고 곧 자전단(紫旃檀)이었다. 곧 공봉관(供奉官) 유소(兪紹)에게 부촉(付屬)해 사상(師像)을 새기게(雕) 했다. 경각(頃刻)에 완성했는데 신채(神采)가 산 것 같았다. 스님이 한 범승(梵僧)에게 물었다. 받들어 듣건대 존자가 나를 일러 도아(屠兒)가 되었으며 일찍이 내가 살생함을 보았다 했습니까. 가로되 보았다. 사왈(師曰) 봄이 있어 보았습니까(有見見). 봄이 없이 보았습니까(無見見). 있음도 아니며 없음도 아니면서 보았습니까(不有不無見). 만약 봄이 있어 보았다면 이는 범부의 봄이며 봄이 없이 보았다면 이는 성문의 봄이며 있음도 아니며 없음도 아니면서 보았다면 이는 외도의 봄입니다. 미심하오니 존자는 어떻게 보았습니까. 범승이 가로되 너는 이런 등의 봄이 있는가〈汾陽曰 헛되이 西來하지 않았다〉. 스님이 수어(垂語)하여 가로되 종일 향을 집고 불을 고르지만 몸이 이 도량(道場)인 줄 알지 못한다. 또 가로되 대도(大道)가 다만 목전에 있지만/ 요차(要且; 도리어. 終乃) 목전을 보기 어렵다/ 대도의 진체(眞體)를 알고자 한다면/ 성색(聲色)과 언어를 여의지 않는다. 또 가로되 경도(京都)와 업도(鄴都)가 호호(浩浩; 가없이 드넓음)하니 도리어 이 보리(菩提)의 大道다〈法眼曰 京都와 鄴都가 浩浩하니 이 보리의 대도가 아니다〉.
●寶誌; (418-514) 남조승(南朝僧). 또 보지(寶志)ㆍ보지(保誌)로 지음. 세칭이 보공(寶公)ㆍ지공(志公)ㆍ지공화상(誌公和尙)임. 금성(섬서 남정 혹 강소 구용) 사람이며 속성은 주(朱). 연소할 적에 출가하여 도림사 승검(僧儉)을 사사(師事)했고 선업(禪業)을 수습(修習)했음. 유송(劉宋) 태시년 간(466-471) 도읍에 왕래하며 거처에 정한 곳이 없었음. 때로 혹 시를 읊었는데 그 말이 매번 참기(讖記)와 같았으며 사민(四民; 士ㆍ農ㆍ工ㆍ商)이 드디어 다투며 문으로 나아가 복화(福禍)를 물었음. 제무제(齊武帝)가 그것을 혹중(惑衆; 무리를 惑亂함)이라 하여 뇌옥(牢獄) 에 투옥(投獄)시켰음. 그러나 날마다 시리(市里)에 유행하는 스님을 본지라 이에 뇌옥 속에 가서 검시(檢視)하였는데 도리어 스님이 아직 옥 속에 있음을 보았음. 제(帝)가 이를 듣고 드디어 화림원으로 영입해 공양하고 그의 출입을 금지시켰으나 스님은 구애되는 바가 되지 않고 그대로 늘 용광ㆍ계빈ㆍ흥황ㆍ정명 등 여러 사원을 유방(遊訪)했음. 양무제가 건국함에 이르러 비로소 그 금지가 풀렸음. 스님이 매번 무제와 길게 얘기했는데 말하는 바가 모두 경론의 뜻이었음. 스님이 천감 13년 12월에 시적했는데 나이는 96이며 칙령으로 종산(鍾山) 독룡부(獨龍阜)에 장사 지내고 묘 곁에 개선사를 세웠음. 시호는 광제대사. 후대에 이어서 추증(追贈)이 있었으니 묘각대사ㆍ도림진각보살ㆍ도림진각대사ㆍ자응혜감대사ㆍ보제성사보살ㆍ일제진밀선사 등과 같은 호임. 스님이 일찍이 학자를 위해 문자석훈(文字釋訓) 30권ㆍ14과송 14수ㆍ십이시송 12수ㆍ대승찬 10수 등을 서술했음 [양고승전10. 불조통기36, 동37. 불조역대통재10. 보화산지7지공법사묘지명. 신승전4].
●金陵; 강소 금릉이니 또 강녕ㆍ건업ㆍ건강ㆍ응천부ㆍ남경 등으로 호칭함. 오ㆍ동진ㆍ송ㆍ제ㆍ양ㆍ진ㆍ명 등의 도읍. 종산 영곡사ㆍ섭산 서하사ㆍ봉산 천계사ㆍ석두산 청량사ㆍ상하와관사(上下瓦官寺; 상와관사와 하와관사)ㆍ우두산 홍각사ㆍ유서산 조당사 등 중국선종의 대총림이 여기에 집중해 있음 [금릉 범찰지. 독사방여기요20].
●上巳日; 곧 3월 3일임 [선림보훈음의].
●刻漏; 옛날의 계시기(計時器)니 구리로써 호(壺; 병. 단지)를 만들고 호중(壺中)에 하나의 각도(刻度)가 있는 화살 형상(形象)의 부표(浮標)를 세우고 호중(壺中)의 물방울이 새서 점차 감소하면 전상(箭上)의 도수(度數)가 곧 점차 현로(顯露)함. 이를 보고 가히 시각을 앎 [한어사어].
●張僧繇; 양대(梁代) 거사며 저명한 화가니 오(吳; 강소 소주) 사람. 효제(孝悌)로 알려졌음. 일찍이 오흥태수가 되었고 불ㆍ천상(天像)을 잘 만들었음. 무제가 건조한 바 여러 사원에 많이 그에게 회식(繪飾)을 명했음. 만든 바 정광(定光)ㆍ대일(大日) 여러 여래상(如來像)은 세상에서 신품(神品)으로 받듦(推). 또 일찍이 공자와 10철(哲)을 불천(佛天)의 열(列)에 잡회(雜繪)했는데 후에 멸법자(滅法者)가 있어 모든 사원은 모두 훼멸했지만 유독 이 사우(寺宇)만 온전함을 얻었음.
●面門; 얼굴 부위. ▲화엄경탐현기3. 면문이란 것은 여러 숙덕이 세 해석이 있다. 1은 이르되 입이다. 1은 이르되 이 얼굴의 정용(正容)이며 다른 입이 아니다. 광통율사가 이르되 코 아래와 입 위의 중간이 이것이다.
●神采; 정신과 풍채. 표현해 나오는 정신과 면모(面貌).
●梵僧; 1은 서역 혹은 인도에서 동토로 온 이국 승려를 가리킴. 1은 지계청정(持戒淸淨; 곧 梵行을 닦음)한 수행승을 가리킴. 후래에 또한 점차 써서 일반의 승인을 널리 가리켰음. 대개 출가하여 불도를 수행하는 자는 반드시 속세를 출리(出離)하고 잡염(雜染)을 사기(捨棄)하고 음욕을 단제(斷除)함이 기본의 요무(要務)가 되는 연고임.
●屠兒; 도부(屠夫; 도살하는 사람)니 아는 후철(後綴; 접미사).
●垂語; 수시(垂示)의 말임. 선문의 종장이 상당하여 학인에게 제시(提撕)함을 가로되 수시(垂示)임.
善慧大士者
婺州義烏縣人也 齊建武四年丁丑五月八日 降于雙林鄕傳宣慈家 本名翕 年十六納劉氏女名妙光 生普建普成二子 二十四與里人稽亭浦漉魚 獲已沈籠水中 祝曰 去者適 止者留 人或謂之愚 會有天竺僧嵩頭陀曰 我與汝毗婆尸佛所發誓 今兜率宮衣鉢見在 何日當還 因命臨水觀影 見圓光寶葢 大士笑謂之曰 鑪韛之所多鈍鐵 良醫之門足病人 度生爲急 何思彼樂乎 嵩指松山頂曰 此可棲矣 大士躬耕而居之 有人盜菽麥瓜果 大士卽與籃籠盛去 日常營作 夜則行道 見釋迦金粟定光三如來 放光襲其體 大士乃曰 我得首楞嚴定 天嘉二年 感七佛相隨 釋迦引前 維摩接後 唯釋尊數顧共語 爲我補處也 其山頂黃雲盤旋若葢 因號雲黃山 梁武帝請講金剛經 士纔陞座 以尺揮按一下 便下座 帝愕然 聖師曰 陛下還會麽 帝曰 不會 聖師曰 大士講經竟 又一日講經次 帝至 大衆皆起 唯士端坐不動 近臣報曰 聖駕在此 何不起 士曰 法地若動 一切不安 大士一日披衲頂冠靸履朝見 帝問 是僧邪 士以手指冠 帝曰 是道邪 士以手指靸履 帝曰 是俗邪 士以手指衲衣
●善慧; 傅翕(497-569) 南朝梁代禪宗著名之尊宿 東陽烏傷(浙江義烏)人 字玄風 號善慧 又稱善慧大士 魚行大士 傅大士 雙林大士 東陽大士 烏傷居士 與寶誌共稱爲梁代二大士 嘗與里人共捕魚 每得魚則盛於竹籠 沈入深水 竝謂 欲去者去 欲止者留 時人以之爲愚 年十六 娶劉氏女妙光 生普建普成二子 年二十四 於沂水取魚 適逢胡僧嵩頭陀(名達摩) 遂棄魚具 入烏傷縣松山雙檮樹下結庵 自號雙林樹下當來解脫善慧大士 自稱由兜率天宮來說法 日常營作 夜歸行道 苦行七年 自謂得首楞嚴定 竝能通儒道典籍 學徒漸集 衆皆虔誠精進 不惜身命 梁大通六年(53 4) 遣弟子傅暀上書致武帝 獻上中下三善之策 閏十二月 帝召入禁闕 講經於重雲殿 大同元年(535)四月 還松山 五年 重赴鍾山 於壽光殿與帝論眞諦 作偈頌呈之 六年(一說五年) 營造松山雙檮樹間之佛殿 九重塼塔 竝於斯地寫經律千餘卷 此卽雙林寺 七年 自宣爲賢劫千佛之一佛 十年 捨屋宇田地 設大施會 太淸二年(549) 欲焚身供養三寶 弟子堅留之 代士燒身者十九人 士乃止之 未久亂起 梁亡 傅翕家居徒衆甚多 講說不輟 每率徒衆焚指燃臂以供佛 嘗營齋轉法華經二十一遍 屢設無遮會 竝於會稽鑄寶王像十尊 爲便於讀大藏經 建有輪藏 令衆轉之 可得大利益 故後世所作輪藏皆安置其父子三人之像 此外 士於天台之一心三觀有其獨到之領略 而以三觀四運爲其心要 倡導三觀一心四運推檢之說 陳太建元年四月 集弟子告誡畢 趺坐入寂 壽七十三 弟子葬之於雙林山頂 號彌勒下生 撰有心王銘 語錄四卷 還源詩等 [善慧大士錄 續高僧傳二十五 傳燈錄二十七 同三十 神僧傳四]
●寶葢; 傘之美稱 卽指七寶嚴飾之天蓋 懸於佛菩薩或戒師等之高座上 作爲莊嚴具
●鑪韛; 同爐韛 (一)火爐與風囊 煉鐵設備 喩指將僧人造就成法器的禪家法會 韛 鼓風吹火 使火旺烈的皮革囊袋 (二)喩指禪師或禪家應機接物 引導學人的手段 此指(一)
●首楞嚴定; 首楞嚴三昧也 慧琳音義二十六 首楞嚴三昧 此云勇健定也 此經中自釋云 首楞嚴者 於一切事究竟堅固也 ▲涅槃經二十五 首楞嚴三昧者 有五種名 一者首楞嚴三昧 二者般若波羅蜜 三者金剛三昧 四者師子吼三昧 五者佛性 隨其所作處處得名 …… 首楞者名一切畢竟 嚴者名堅 一切畢竟而得堅固 名首楞嚴 以是故言 首楞嚴定 名爲佛性
●金剛經; 金剛般若波羅蜜經 一卷 姚秦鳩摩羅什譯 略稱金剛般若經 金剛經 異譯本有五種 一北魏菩提流支譯(同題) 二陳眞諦譯(同題) 三隋代達磨笈多譯之金剛能斷般若波羅蜜經(略稱金剛能斷經) 四唐代玄奘譯之能斷金剛般若波羅蜜多經(大般若波羅蜜多經卷五七七能斷金剛分) 五唐代義淨譯之能斷金剛般若波羅蜜多經(略稱能斷金剛經)
선혜대사(善慧大士)란 자는
무주(婺州) 의오현(義烏縣) 사람이다. 제(齊) 건무(建武) 4년 정축(丁丑; 497) 5월 8일 쌍림향(雙林鄕) 부선자가(傅宣慈家)에 강생(降生)했으며 본명은 흡(翕)이다. 나이 16에 유씨(劉氏)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니(納; 娶妻) 이름이 묘광(妙光)이었고 보건(普建)ㆍ보성(普成) 두 아들을 낳았다. 24에 마을 사람과 계정포(稽亭浦)에서 물고기를 걸렀는데(漉魚) 얻고 나서 수중에 침롱(沈籠)하고 축원해 가로되 갈 자는 가고(去者適) 머물 자는 머물러라(止者留). 사람이 혹 이를 일러 어리석다 하였다. 마침(會) 천축승(天竺僧) 숭두타(嵩頭陀)가 있어 가로되 나와 네가 비바시불(毗婆尸佛)의 처소에서 발서(發誓)했는데 지금 도솔궁(兜率宮)에 의발(衣鉢)이 현재(見在)한다. 어느 날 마땅히 귀환하겠는가. 인하여 명(命)해 임수(臨水)하여 그림자를 보라 했다. 원광(圓光)의 보개(寶葢)를 보았다. 대사가 웃으며 일러 가로되 노배지소(鑪韛之所)에 둔철(鈍鐵)이 많고 양의지문(良醫之門)에 병인(病人)이 많다(足). 도생(度生; 중생을 제도함)이 급함이 되거늘 어찌 그곳(彼)의 낙(樂)을 생각하겠는가. 숭(嵩)이 송산(松山)의 꼭대기(頂)를 가리키며 가로되 여기(此)가 가히 쉴(棲) 만하다. 대사(大士)가 몸소 경작(耕作; 耕)하며 거주했다. 어떤 사람이 콩ㆍ보리ㆍ오이ㆍ과일을 훔치자 대사(大士)가 곧 광주리와 농(籠)을 주며 담아 가게 했다. 낮에는 늘 영작(營作)하고 밤엔 곧 행도(行道)했다. 보매 석가ㆍ금속(金粟)ㆍ정광(定光) 3여래가 방광하여 그의 몸을 엄습(掩襲)했다. 대사가 이에 가로되 내가 수릉엄정(首楞嚴定)을 얻었다. 천가(天嘉) 2년(561) 7불(佛)이 상수(相隨)함을 감득(感得; 感)했다. 석가가 앞에서 인도(引導; 引)하고 유마(維摩)가 뒤에서 접인(接引; 接)했다. 오직 석존(釋尊)이 자주(數) 돌아보며 함께 얘기했는데 나의 보처(補處)가 된다 하였다. 그 산정(山頂)에 황운(黃雲)이 반선(盤旋; 徘徊)함이 산개(傘葢; 葢)와 같았고 인하여 호가 운황산(雲黃山)이다. 양무제(梁武帝)가 금강경(金剛經) 강설을 청했다. 대사(大士)가 겨우 승좌(陞座)하자 척(尺)으로써 한 번(一下) 휘둘러 누르고는(揮按) 바로 하좌했다. 무제가 악연(愕然; 놀라는 모양)했다. 성사(聖師; 誌公을 가리킴)가 가로되 폐하(陛下) 도리어 아시겠습니까. 제왈(帝曰) 알지 못합니다. 성사(聖師)가 가로되 대사가 강경(講經)을 마쳤습니다. 또 어느 날 강경하던 차에 무제가 이르자 대중이 모두 일어났다. 오직 대사만 단좌(端坐)하여 움직이지 않았다. 근신(近臣)이 알려 가로되 성가(聖駕)가 여기에 있거늘 왜 일어나지 않습니까. 사왈(士曰) 법지(法地)가 만약 움직이면 일체가 불안합니다. 대사가 어느 날 납의를 입고(披衲) 갓을 이고(頂冠) 신을 끌면서(靸履; 靸은 拖鞋) 조현(朝見)했다. 제문(帝問) 이 승(僧)인가. 대사가 손으로써 갓을 가리켰다. 제왈(帝曰) 이 도(道)인가. 대사가 손으로써 삽리(靸履)를 가리켰다. 제왈(帝曰) 이 속(俗)인가. 대사가 손으로써 납의(衲衣)를 가리켰다.
●善慧; 부흡(傅翕; 497-569)이니 남조 양대(梁代) 선종의 저명한 존숙이며 동양 오상(절강 의오) 사람이니 자는 현풍(玄風)이며 호는 선혜(善慧). 또 호칭이 선혜대사(善慧大士)ㆍ어행대사(魚行大士)ㆍ부대사(傅大士)ㆍ쌍림대사(雙林大士)ㆍ동양대사(東陽大士)ㆍ오상거사(烏傷居士). 보지(寶誌)와 공칭(共稱)하여 양대(梁代)의 2대사(大士)라 함. 일찍이 마을 사람과 함께 물고기를 잡았는데 매번 물고기를 얻으면 곧 죽롱(竹籠)에 담아 깊은 물에 담가 넣고는 아울러 이르되 떠나려는 자는 떠나고 머무려고 하는 자는 머물러라. 당시의 사람들이 이를 어리석음으로 삼았음. 나이 16에 유씨(劉氏)의 딸 묘광(妙光)에게 장가들어 보건(普建)과 보성(普成) 두 아들을 낳았음. 나이 24에 기수(沂水)에서 물고기를 취하는데 마침 호승(胡僧) 숭두타(嵩頭陀; 이름이 달마)를 만났고 드디어 어구(魚具)를 버리고 오상현 송산(松山) 쌍도수(雙檮樹) 아래 들어가 암자를 엮고 스스로 호하기를 쌍림수하당래해탈선혜대사(雙林樹下當來解脫善慧大士)라 했음. 자칭하기를 도솔천궁으로부터 와서 설법한다 했음. 낮에는 늘 영작(營作)하고 밤에는 돌아와 행도(行道)하면서 고행하기 7년이었음. 스스로 이르기를 수릉엄정을 얻었다 했고 아울러 능히 유도(儒道)의 전적을 통달했음. 학도가 점차 모였고 대중이 모두 건성(虔誠)으로 정진하며 신명을 아끼지 않았음. 양 대통 6년(534) 제자 부왕을 보내어 무제에게 서신을 올려 이르게 했으며 상중하 3선(善)의 책략을 바쳤음. 윤 12월 무제가 금궐(禁闕)로 불러들여 중운전(重雲殿)에서 강경(講經)하게 했음. 대동 원년(535) 4월 송산으로 돌아갔음. 5년 다시 종산(鍾山)에 다다라 수광전(壽光殿)에서 무제와 진제(眞諦)를 논했고 게송을 지어 그에게 보였음. 6년(일설에 5년) 송산 쌍도수 사이의 불전(佛殿)과 9중(重)의 전탑(塼塔)을 영조(營造)하고 아울러 이 땅에서 경률 천여 권을 서사했으니 이것이 곧 쌍림사(雙林寺)임. 7년 스스로 선포하기를 현겁천불의 1불(佛)이라 했음. 10년 옥우(屋宇)와 전지(田地)를 희사해 대시회(大施會)를 베풀었음. 태청 2년(549) 분신하여 삼보에 공양하려 하자 제자들이 굳게 그것을 만류했으며 대사를 대신해 소신(燒身)한 자가 19인이었음. 대사가 이에 그것을 그치게 했음. 오래지 않아 난이 일어나 양(梁)이 망했음. 부흡가(傅翕家)에 거처하는 도중이 매우 많았으며 강설을 거치지 않았음. 매번 도중을 거느리며 손가락을 태우고 팔을 태워 공불(供佛)했음. 일찍이 영재(營齋)하며 법화경 21편(遍)을 전독했고 여러 차례 무차회(無遮會)를 개설했음. 아울러 회계(會稽)에 보왕상(寶王像) 10존(尊)을 주성(鑄成)했고 대장경을 전독(轉讀)하기에 편하도록 윤장(輪藏)을 건립했으며 대중으로 하여금 그것을 돌리게 하면서 가히 대이익을 얻게 했음. 고로 후세에 만든 바 윤장에는 모두 그 부자 3인의 형상을 안치했음. 이 밖에 대사는 천태의 일심삼관(一心三觀)에 그만이 독도(獨到)한 영략(領略)이 있었고 삼관사운(三觀四運)을 그 심요(心要)로 삼아 삼관일심사운추검(三觀一心四運推檢)의 설을 창도(倡導)했음. 진(陳) 태건 원년 4월 제자를 소집해 고계(告誡)를 마치자 부좌(趺坐)하고 입적했으니 나이는 73. 제자들이 쌍림의 산정에 장사 지내고 미륵하생이라고 호했음. 찬술(撰述)에 심왕명ㆍ어록 4권ㆍ환원시 등이 있음 [선혜대사록. 속고승전25. 전등록27, 동30. 신승전4].
●寶葢; 산(傘)의 미칭. 곧 7보로 엄식(嚴飾)한 천개(天蓋)를 가리킴. 불보살 혹 계사(戒師) 등의 높은 법좌 위에 매달아 장엄구로 삼음.
●鑪韛; 노배(爐韛)와 같음. (1). 화로와 풍낭(風囊; 풀무. 허풍선)이니 쇠를 불리는 설비임. 승인을 가지고 조취(造就; 育成)하여 법기를 이루게 하는 선가의 법회를 비유로 가리킴. 배(韛)는 바람을 두드려 불을 불어 불로 하여금 왕렬(旺烈)하게 하는 피혁의 주머니. (2). 선사나 혹 선가가 응기접물(應機接物)하면서 학인을 인도하는 수단을 비유로 가리킴. 여기에선 (1)을 가리킴.
●首楞嚴定; 수릉엄삼매(首楞嚴三昧; 梵 śūraṃgama–samādhi)임. 혜림음의26. 수릉엄삼매(首楞嚴三昧) 여기에선 이르되 용건정(勇健定)이다. 이 경 중에 스스로 해석해 이르되 수릉엄이란 것은 일체의 일에 구경견고(究竟堅固)다. ▲열반경25. 수릉엄삼매(首楞嚴三昧)란 것은 5종의 이름이 있다. 1자는 수릉엄삼매며 2자는 반야바라밀이며 3자는 금강삼매며 4자는 사자후삼매며 5자는 불성이다. 그 소작(所作)을 따라 곳곳에서 이름을 얻는다 …… 수릉(首楞)이란 것은 일체필경(一切畢竟)이며 엄(嚴)이란 것은 이름이 견(堅)이니 일체가 필경에 견고를 얻음을 이름해 수릉엄이다. 이런 고로 말하되 수릉엄정은 이름하여 불성이다.
●金剛經; 금강반야바라밀경이니 1권이며 요진 구마라집이 번역했음. 약칭이 금강반야경ㆍ금강경임. 이역본(異譯本)으로 5종이 있음. 1. 북위 보리류지 역(譯; 同題). 2. 진 진제 역(同題). 3. 수대 달마급다 역의 금강능단반야바라밀경(약칭이 금강능단경). 4. 당대 현장 역의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대반야바라밀다경 권577의 능단금강분). 5 당대 의정 역의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약칭이 능단금강경).
大士心王銘曰 觀心空王 玄妙難測 無形無相 有大神力 能滅千災 成就萬德 體性雖空 能施法則 觀之無形 呼之有聲 爲大法將 心戒傳經 水中鹽味 色裏膠靑 決定是有 不見其形 心王亦爾 身內居停 面門出入 應物隨情 自在無礙 所作皆成 了本識心 識心見佛 是心是佛 是佛是心 念念佛心 佛心念佛 欲得早成 戒心自律 淨律淨心 心卽是佛 除此心王 更無別佛 欲求成佛 莫染一物 心性雖空 貪嗔體實 入此法門 端坐成佛 到彼岸已 得波羅蜜 慕道眞士 自觀自心 知佛在內 不向外尋 卽心卽佛 卽佛卽心 心明識佛 曉了識心 離心非佛 離佛非心 非佛莫測 無所堪任 執空滯寂 於此漂沉 諸佛菩薩 非此安心 明心大士 悟此玄音 身心性妙 用無更改 是故智者 放心自在 莫言心王 空無體性 能使色身 作邪作正 非有非無 隱顯不定 心性離空 能凡能聖 是故相勸 好自防愼 刹那造作 還復漂沉 淸淨心智 如世黃金 般若法藏 竝在身心 無爲法寶 非淺非深 諸佛菩薩 了此本心 有緣遇者 非去來今
●心戒; 又作一心戒 大乘戒之通義 謂制止心念邪惡不正之戒 而南山四分律宗於制戒立深防分限二者 其中分限卽爲心戒
●膠靑; 阿膠中之靑色染料
●波羅蜜; <梵> pāramitā 又作波羅蜜多 波囉弭多 播囉弭多 譯言究竟 到彼岸 度無極 又單譯曰度 ▲大乘義章十二 波羅蜜者 是外國語 此翻爲度 亦名到彼岸 …… 波羅者岸 蜜者是到 ▲俱舍光記十八 波羅 此云彼岸 蜜多此云到 菩薩能到自乘所往圓滿功德彼岸處故 ▲慧琳音義一 播囉弭多 唐言彼岸到 今迴文云到彼岸
●刹那; <梵> kṣaṇa 指極短的時間 ▲仁王護國般若波羅蜜多經上 一念中有九十刹那 一刹那經九百生滅 諸有爲法悉皆空故 ▲俱舍論十二 如壯士一疾彈指頃 六十五刹那 如是名爲一刹那量
대사(大士) 심왕명(心王銘)에 가로되 심공왕(心空王)을 관(觀)하매/ 현묘하고 난측(難測)하나니/ 무형무상(無形無相)하고/ 대신력(大神力)이 있다/ 능히 천재(千災)를 없애고(滅)/ 만덕(萬德)을 성취했나니/ 체성(體性)이 비록 공했으나/ 능히 법칙을 베푼다/ 이를 관(觀)하매 무형(無形)이며/ 이를 부르매 유성(有聲)이니/ 대법장(大法將)이 되어/ 심계(心戒)로 전경(傳經)한다/ 수중(水中)의 염미(鹽味)와/ 색리(色裏)의 교청(膠靑)은/ 결정코 이 있음이나/ 그 형상(形相)을 보지 못한다/ 심왕(心王)도 또한 그러하여/ 신내(身內)에선 거정(居停; 거처해 머묾)하고/ 면문(面門; 面部)으로 출입하며/ 응물(應物)하여 수정(隨情)하되/ 자재하고 무애하며/ 소작(所作)을 모두 이룬다/ 근본을 깨치면 마음을 알고/ 마음을 알면 견불(見佛)하나니/ 이 심(心)이 이 불(佛)이며/ 이 불이 이 심이다/ 염념(念念)이 불심(佛心)이니/ 불심으로 염불한다/ 조성(早成)을 얻고자 한다면/ 계심(戒心)으로 자율(自律)하라/ 정률(淨律)이 정심(淨心)이며/ 심이 즉시(卽是) 불이다/ 이 심왕(心王)을 제하면/ 다시 별불(別佛)이 없나니/ 성불을 구하고 싶다면/ 일물(一物)에도 물들지 말아라/ 심성(心性)이 비록 공했으나/ 탐진(貪嗔)의 체가 실답나니/ 이 법문에 들면/ 단좌(端坐)하여 성불하고/ 피안(彼岸)에 이르고 나서/ 바라밀(波羅蜜)을 얻는다/ 모도(慕道)하는 진사(眞士)는/ 자심(自心)을 자관(自觀)하나니/ 불(佛)이 안에 있음을 알고/ 밖을 향해 찾지 않는다/ 곧 심(心)이 곧 불이며/ 곧 불이 곧 심이니/ 심이 밝으면 불을 알고/ 깨달아 마치면(曉了) 심을 안다/ 심을 여의면 불이 아니고/ 불을 여의면 심이 아니며/ 불이 아니면 막측(莫測)하고/ 감임(堪任)할 바가 없다/ 집공(執空)하고 체적(滯寂)하면/ 여기에서 표침(漂沉)하나니/ 제불보살은/ 여기에서 안심(安心)하지 않고/ 명심대사(明心大士)는/ 이 현음(玄音)을 깨친다/ 신심(身心)의 성(性)이 묘하며/ 쓰매 다시 개변(改變)이 없나니/ 이런 고로 지자(智者)는/ 방심(放心)하여 자재하다/ 심왕이/ 공무(空無)의 체성(體性)이라고 말하지 말지니/ 능히 색신을 부려/ 작사(作邪)하고 작정(作正)한다/ 비유비무(非有非無)며/ 은현(隱顯)이 부정(不定)이니/ 심성(心性)은 공(空)을 여의어/ 능범능성(能凡能聖; 능히 범성이 됨)한다/ 이런 고로 상권(相勸)하노니/ 잘(好) 스스로 방신(防愼)하라/ 찰나(刹那)에 조작하고/ 도리어 다시 표침(漂沉)하나니/ 청정한 심지(心智)는/ 세상의 황금과 같고/ 반야의 법장(法藏)은/ 모두(竝) 신심(身心)에 있으며/ 무위(無爲)의 법보(法寶)는/ 얕음도 아니고 깊음도 아니다/ 제불보살이/ 이 본심을 깨쳤나니/ 인연이 있어 만나는 자는/ 거래금(去來今; 과거ㆍ미래ㆍ現今)이 아니다.
●心戒; 또 일심계로 지음. 대승계의 통의(通義)니 이르자면 심념의 사악과 부정(不正)을 제지(制止)하는 계며 남산 사분율종(四分律宗)에서 제계(制戒)에 심방(深防)과 분한(分限)의 2자를 세웠는데 그 중 분한이 곧 심계가 됨.
●膠靑; 아교(阿膠) 중의 청색 염료.
●波羅蜜; <범> pāramitā. 또 바라밀다(波羅蜜多)ㆍ바라미다(波囉弭多)ㆍ파라미다(播囉弭多)로 지으며 번역해 말하면 구경(究竟)ㆍ도피안(到彼岸)ㆍ도무극(度無極)이며 또 단역(單譯)해 가로되 도(度)임. ▲대승의장12. 바라밀(波羅蜜)이란 것은 이 외국어다. 여기에선 번역해 도(度)라 하며 또 이름이 도피안(到彼岸)이다 …… 바라(波羅)란 것은 안(岸)이며 밀(蜜)이란 것은 이 도(到)다. ▲구사광기18. 바라(波羅)는 여기에선 이르되 피안(彼岸)이며 밀다(蜜多)는 여기에선 이르되 도(到)다. 보살이 자승(自乘)하여 가는 바, 원만한 공덕의 피안의 처소에 능히 이르는 연고다. ▲혜림음의1. 파라미다(播囉弭多) 당나라 말로는 피안도(彼岸到)다. 여금에 회문(迴文)해 이르되 도피안이다.
●刹那; <범> kṣaṇa. 극히 짧은 시간을 가리킴. ▲인왕호국반야바라밀다경상. 1념(念) 가운데 90찰나가 있으며 1찰나에 9백 생멸을 경과한다. 모든 유위법이 모두 다 공(空)인 연고이다. ▲구사론12. 예컨대(如) 장사(壯士)가 한 번 급히 손가락을 퉁기는 경각에 65찰나이다. 이와 같음을 1찰나의 양(量)이라고 이름한다.
有偈曰 夜夜抱佛眠 朝朝還共起 起坐鎭相隨 語默同居止 纖毫不相離 如身影相似 欲識佛去處 秖這語聲是 又曰 空手把鋤頭 步行騎水牛 人從橋上過 橋流水不流 又曰 有物先天地 無形本寂寥 能爲萬象主 不逐四時凋 四相偈 曰生曰老曰病曰死 識託浮泡起 生從愛慾來 昔時曾長大 今日復嬰孩 星眼隨人轉 朱唇向乳開 爲憐迷覺性 還却受輪回 覧鏡容顔改 登階氣力衰 咄哉今已老 趨拜復還虧 身似臨崖樹 心如念水龜 尙猶耽有漏 不肯學無爲 忽染沉痾疾 因成臥病身 妻兒愁不語 朋友厭相親 楚痛抽千脉 呻吟徹四隣 不知前路險 猶尙恣貪嗔 精魄隨生路 遊魂入死關 秖聞千萬去 不見一人還 寶馬空嘶立 庭華永絕攀 早求無上道 應免四方山
●星眼; 明亮美麗的眼睛
●趨拜; 趨走拜謁 亦泛指請安問候時所行禮節
●無爲; 無造作之意 有爲之對稱 卽非由因緣所造作 離生滅變化而絶對常住之法 又作無爲法 原是涅槃之異名 後世更於涅槃以外 立種種無爲 於是産生三無爲六無爲九無爲等諸說 ▲祖庭事苑六 無爲 華嚴疏主云 爲 作也 作卽生滅 寂寞沖虛 湛然常住無彼造作 故名無爲 又瑜伽云 無生滅不繫屬因緣 是名無爲 又智論云 無得故名曰無爲 又淨名云 不墮數故(上文竝出華嚴經疏二十四)
●沉痾; 久治不愈的病
●精魄; 精魂 魂魄
●四方山; 用以表示人身無常 必受生老病死等四相逼迫之譬喩 別譯雜阿含四 則以四山比喩老病死衰耗四相 增一阿含經二十六四意斷品 以四山比喩老病死及無常 ▲涅槃經二十七 有四大山從四方來欲害人民 …… 四山卽是衆生生老病死
게(偈)가 있어 가로되 밤마다 부처를 안고 자고/ 아침마다 도리어 함께 일어나나니/ 기좌(起坐)에 늘(鎭) 서로 따르고/ 어묵(語默)에 함께 거지(居止)한다/ 섬호(纖毫)만큼도 서로 여의지 않음이/ 마치 몸과 그림자와 서로 같다/ 부처의 거처(去處)를 알고자 하느냐/ 단지 이 어성(語聲)이 이것이다. 우왈(又曰) 빈손인데 호미(鋤頭; 頭는 조사)를 잡았고/ 보행(步行)인데 수우(水牛; 물소)를 탔다/ 사람이 다리 위를 좇아 지나가는데/ 다리는 흐르고 물은 흐르지 않더라. 우왈(又曰) 물건이 있어 천지보다 앞이지만/ 형상(形相)이 없어 본래 적료(寂寥)하다/ 능히 만상(萬象)의 주인이면서/ 사시(四時)를 따라 시들지 않는다.. 사상게(四相偈) 왈생왈로왈병왈사(曰生曰老曰病曰死) 식(識)이 부포(浮泡)에 기탁(寄託)해 일어나고/ 생(生)은 애욕(愛慾)으로 좇아오나니/ 석시(昔時)에 일찍이 장대(長大)했는데/ 금일 다시 영해(嬰孩; 어린아이)로다/ 성안(星眼)은 사람 따라 회전하고/ 주순(朱唇; 붉은 입술)은 젖을 향해 열리더니/ 가엾게도(憐) 각성(覺性)을 미(迷)했기 때문에/ 도리어(還却) 윤회(輪回)를 받는다/ 거울을 보매(覧) 용안(容顔)이 바뀌고(改)/ 섬돌(階)에 오르매 기력이 쇠약(衰弱)하나니/ 돌재(咄哉)로다, 이제 이미 늙었나니/ 추배(趨拜)도 다시 도리어 줄었다(虧)/ 몸은 언덕에 임(臨)한 나무와 같고/ 마음은 물을 생각하는 거북과 같나니/ 오히려 아직(尙猶) 유루(有漏)를 즐기고(耽)/ 무위(無爲)를 배움을 긍낙(肯諾; 肯)하지 않는구나/ 홀연히 침아(沉痾)의 질병에 감염(感染)되면/ 인하여 와병(臥病)의 몸을 이루나니/ 처아(妻兒)는 수심(愁心)하며 말하지 않고/ 붕우(朋友)는 상친(相親)하기를 싫어한다/ 초통(楚痛; 아프고 괴로움)은 천맥(千脉)을 뽑고(抽)/ 신음(呻吟)은 사린(四隣; 사방의 이웃)에 사무치거늘/ 전로(前路)의 험(險)함을 알지 못하고/ 아직 오히려(猶尙) 마음대로(恣) 탐진(貪嗔)한다/ 정백(精魄)은 생로(生路)를 따르고/ 유혼(遊魂)은 사관(死關)에 들어가나니/ 다만 천만(千萬)이 갔다 함은 들었지만/ 한 사람도 돌아옴을 보지 못했다/ 보마(寶馬)는 공연히 울며 섰고/ 정화(庭華)는 길이 반등(攀登)을 끊었나니/ 일찍 무상도(無上道)를 배워야/ 응당 사방산(四方山)을 면하리라.
●星眼; 명량(明亮)하고 미려(美麗)한 눈동자.
●趨拜; 달려가서 배알(拜謁)함. 또한 널리 청안(請安)한지 문후(問候)할 때 행하는 바의 예절.
●無爲; 조작이 없음의 뜻이니 유위의 대칭임. 곧 인연으로 말미암아 조작된 바가 아닌, 생멸변화(生滅變化)를 여읜 절대상주(絶對常住)의 법임. 또 무위법으로 지으며 원래 이것은 열반의 다른 이름임. 후세에 다시 열반의 밖에 갖가지 무위를 세워 이에 3무위ㆍ6무위ㆍ9무위 등의 여러 설을 산생(産生)했음. ▲조정사원6. 무위(無爲) 화엄소주(華嚴疏主. 澄觀)가 이르되 위(爲)는 작(作)이며 작(作)은 곧 생멸이다. 적막(寂寞)하고 충허(沖虛. 沖은 빌 충)하여 담연(湛然)히 상주(常住)하며 저 조작(造作)이 없으므로 고로 이름이 무위다. 또 유가(瑜伽)에 이르되 생멸이 없고 인연에 계속(繫屬)하지 않나니 이 이름이 무위다. 또 지론(智論)에 이르되 얻음이 없는 고로 이름해 가로되 무위다. 또 정명(淨名. 維摩詰經)에 이르되 수(數)에 떨어지지 않는 연고라 하였다(위의 글은 모두 華嚴經疏24에 나옴).
●沉痾; 오래 치료해도 낫지 않는 병.
●精魄; 정혼(精魂). 혼백(魂魄).
●四方山; 인신(人身)이 무상(無常)하여 반드시 생ㆍ로ㆍ병ㆍ사 등 4상(相)의 핍박을 받음을 표시하는 비유로 사용함. 별역잡아함4에선 곧 4산을 노ㆍ병ㆍ사ㆍ쇠모(衰耗)의 4상(相)에 비유했고 증일아함경26 사의단품에선 4산을 노ㆍ병ㆍ사 및 무상에 비유했음. ▲열반경27. 4대산(大山)이 있어 사방으로부터 와서 인민을 해하려고 한다 …… 4산은 곧 이 중생의 생ㆍ로ㆍ병ㆍ사다.
南嶽慧思禪師
武津李氏子 因誌公令人傳語曰 何不下山敎化衆生 目視雲漢作甚麽 師曰 三世諸佛 被我一口呑盡 何處更有衆生可化 示衆曰 道源不遠 性海非遙 但向己求 莫從他覔 覔卽不得 得亦不眞 偈曰 頓悟心源開寶藏 隱顯靈通現眞相 獨行獨坐常巍巍 百億化身無數量 縱令畐塞滿虛空 看時不見微塵相 可笑物兮無比況 口吐明珠光晃晃 尋常見說不思議 一語標名言下當 又曰 天不能葢地不載 無去無來無障礙 無長無短無靑黃 不在中間及內外 超羣出衆太虛玄 指物傳心人不會
●慧思; (515-577) 南北朝時代之高僧 武津(河南上蔡)人 俗姓李 世稱南嶽尊者 思大和尙 思禪師 天台宗第三祖 自幼歸佛樂法 心愛法華經 年十五出家 後參河南慧文禪師 得授觀心之法 北齊天保五年(554) 師至光州 不分遠近 爲衆演說 長達十四年之久 又師於河南南部之大蘇山傳法與智顗 陳代光大二年(568)始入湖南衡山(南嶽) 悟三生行道之迹 講筵益盛 居止十年 遂有南嶽尊者之稱 倍受宣帝禮遇 尊稱大禪師 故思大和尙 又稱思禪師 蓋基於此 太建九年 晏然而化 壽六十三 著作多半門徒筆記而成 如法華經安樂行義一卷 諸法無諍三昧法門二卷 大乘止觀法門四卷 四十二字門二卷 受菩薩戒儀一卷等 自撰者有南嶽思大禪師立誓願文一卷 [續高僧傳十七 弘贊法華傳四 佛祖統紀六 佛祖歷代通載十一] ▲聯燈會要二十九 南岳慧思禪師 因誌公令人傳語云 何不下山 敎化衆生 目視雲漢 作甚麽 師云 三世諸佛 被我一口呑盡 何處更有衆生可化
●雲漢; 一銀河 天河 二高天 天
남악(南嶽) 혜사선사(慧思禪師)
무진(武津) 이씨(李氏)의 아들이다. 지공(誌公)이 사람을 시켜 말을 전해 가로되 왜 하산하여 중생을 교화하지 않고 눈으로 운한(雲漢)을 보아서 무엇하리오 함으로 인해 스님이 가로되 삼세제불도 내가 한입에 삼켜 없앰을 입었거늘 어느 곳에 다시 중생이 있어 가히 교화하겠는가. 시중(示衆)하여 가로되 도원(道源)이 멀지 않고(不遠) 성해(性海)가 멀지 않나니(非遙) 단지 자기를 향해 구하고 남을 좇아 찾지 말아라. 찾으면 곧 얻지 못하고 얻더라도 또한 진(眞)이 아니다. 게왈(偈曰) 심원(心源)을 돈오(頓悟)하여 보장(寶藏)을 여니/ 은현(隱顯)하며 영통(靈通)하여 진상(眞相)을 나타낸다/ 독행(獨行)하고 독좌(獨坐)하며 늘 외외(巍巍)하나니/ 백억 화신(化身)이 무수한 양(量)이다/ 비록(縱) 복색(畐塞; 充塞)하여 허공에 가득하게 하더라도/ 볼 때 미진상(微塵相)도 보이지 않는다/ 가히 우습구나 물건을 비황(比況; 比喩)하지 못하나니(無)/ 입으로 명주(明珠)를 토하매 빛이 황황(晃晃; 매우 빛남)하구나/ 심상(尋常)에 설을 보임(見說)이 부사의하나니/ 일어(一語)로 이름을 표(標)하면 언하(言下)에 승당(承當; 當)하라. 우왈(又曰) 하늘이 능히 덮지 못하고 땅이 싣지 못하나니/ 무거무래(無去無來)하고 장애가 없으며/ 무장무단(無長無短)하고 청황(靑黃)이 없으며/ 중간 및 내외에 있지 않다/ 초군출중(超群出衆)하여 매우 허현(虛玄)하나니/ 사물을 가리키며 전심(傳心)하나 사람이 알지 못하네.
●慧思; (515-577) 남북조시대의 고승. 무진(武津; 하남 상채) 사람이며 속성은 이(李). 세칭이 남악존자(南嶽尊者)ㆍ사대화상(思大和尙)ㆍ사선사(思禪師)니 천태종 제3조. 어릴 적부터 불타에게 귀의하고 불법을 좋아했으며 마음에 법화경을 사랑했음. 나이 15에 출가했고 후에 하남(河南) 혜문선사(慧文禪師)를 참해 관심지법(觀心之法)을 득수(得授)했음. 북제(北齊) 천보 5년(554) 스님이 광주(光州)에 이르러 원근을 분별하지 않고 대중을 위해 연설했으며 길게는 14년의 장구함에 도달했음. 또 스님이 하남 남부의 대소산(大蘇山)에서 지의(智顗)에게 전법했음. 진대(陳代) 광대 2년(568) 비로소 호남 형산(衡山; 南嶽)에 들어가 삼생행도(三生行道)의 자취를 깨쳤으며 강연(講筵)이 더욱 흥성했음. 거지(居止)한 지 10년이라 드디어 남악존자의 명칭이 있음. 선제(宣帝)의 예우를 배수(倍受)했고 존칭하여 대선사(大禪師)라 했으며 고로 사대화상(思大和尙), 또 사선사(思禪師)라 일컬었음이 대개 여기에서 기본(基本)했음. 태건 9년 안연(晏然)히 화(化)했으니 나이는 63. 저작은 다반(多半; 대부분)이 문도의 필기(筆記)로 이루어졌으니 예컨대(如) 법화경안락행의 1권ㆍ제법무쟁삼매법문 2권ㆍ대승지관법문 4권ㆍ사십이자문 2권ㆍ수보살계의 1권 등임. 자찬(自撰)한 것은 남악사대선사입서원문 1권임 [속고승전17. 홍찬법화전4. 불조통기6. 불조역대통재11].
●雲漢; 1. 은하. 천하(天河). 2. 고천(高天). 천.
天台山修禪寺智者禪師
諱智顗 荊州華容陳氏子 在南嶽誦法華經至藥王品曰 是眞精進 是名眞法 供養如來 於是悟法華三昧獲旋陀羅尼 見靈山一會 儼然未散
●智顗; (538-597) 天台宗開宗祖師(一說三祖 卽以慧文慧思爲初祖二祖) 隋代荊州華容(湖南潛江西南)人 俗姓陳 字德安 世稱天台智者 智者大師 天台大師 年十八出家 初謁大蘇山慧思 卽示普賢道場 爲說四安樂行 大師誦法華經 至藥王品曰 是眞精進 是名眞法供養如來 乃悟法華三昧 獲旋陀羅尼 見靈山一會儼然未散 及辭思遊化 思曰 汝於陳國有緣 往必利益 太建七年(575) 抵建康瓦棺寺 創弘禪法 僕射徐陵 尙書毛喜等貴望 並稟禪旨 甞夢登高山見一僧以手招之 是年九月至天台山 定光出迎曰 憶昨相招否 大師驚異而禮之 乃創菴行道 陳宣帝詔師還都居光宅寺 隋文帝開皇九年(589)陳國滅 大師乃憩廬山 開皇十一年晉王廣任總江淮 十一月二十三日於楊州總管金城 請大師設僧會 授菩薩戒 奉師號曰智者 久之還廬山 晉王再請出山 爲蕭妃救患 建齋七日行光明懺 疾瘳再還廬山 過衡峰屆荊部 留玉泉寺 開皇十七年(597)十一月二十四日歸寂於台山石城寺 壽六十七 僧臘四十 大師造大寺三十六所 命寫經一十五藏 著經疏百餘卷 造金銅土木等像八十萬軀 度僧一萬五千人 五十餘州道俗受菩薩戒者不可勝紀 大師謂法華爲一乘妙典 開方便之權門 示眞實之妙理 會衆善之小行 歸廣大之一乘 遂出玄義 曰釋名辯體明宗論 用判敎相之五重也 後世宗之曰天台敎 [釋氏稽古略二 唐高僧傳二十一 佛祖統紀六 傳燈錄二十七]
●法華三昧; 三諦圓融之妙理 分明現前 障中道之無明止息 謂之法華三昧 此法華三昧之名 爲法華經妙音菩薩品所說十六三昧之異名 法華三昧者 天台之意 三諦圓融爲一實 譬之權實不二之花(花實爲實 花瓣爲權法) 攝一切法使歸一實相也 [法華文句記十 法華義疏十二]
●旋陀羅尼; 天台宗據法華經普賢菩薩勸發品之說 立有旋陀羅尼 百千萬億旋陀羅尼 法音方便陀羅尼等三陀羅尼 而以之配於空假中三觀 ▲蓮華經玄義五上 如經文云 得三陀羅尼 但名似道 未是眞道 旋陀羅尼 是旋假入眞 百千旋陀羅尼 是旋眞入俗 法音方便 正是伏道 未得入中(云云)
천태산(天台山) 수선사(修禪寺) 지자선사(智者禪師)
휘(諱)가 지의(智顗)며 형주(荊州) 화용(華容) 진씨(陳氏)의 아들이다. 남악에 있으면서 법화경(法華經)을 외웠는데 약왕품(藥王品)에 이르자 가로되 이것이 참 정진이며 이 이름이 참으로 여래에게 법공양(法供養)함이다. 이에서 법화삼매(法華三昧)를 깨쳐 선다라니(旋陀羅尼)를 얻었는데 영산의 일회(一會)가 엄연(儼然)하여 흩어지지 않음을 보았다.
●智顗; (538-597) 천태종을 개종(開宗)한 조사(祖師; 一說엔 三祖니 곧 慧文과 慧思를 初祖와 二祖로 삼음). 수대(隋代) 형주 화용(華容; 호남 잠강 서남) 사람이며 속성은 진(陳)이며 자가 덕안(德安)이며 세칭이 천태지자(天台智者)ㆍ지자대사(智者大師)ㆍ천태대사(天台大師). 나이 18에 출가했으며 처음에 대소산(大蘇山) 혜사(慧思)를 알현(謁見)했는데 곧 보현도량(普賢道場)을 보이며 4안락행(四安樂行)을 설했음. 대사가 법화경을 외우다가 약왕품(藥王品)에 가로되 이것이 참 정진(精進)이며 이 이름이 여래에게 참으로 법공양함이다 함에 이르러 곧 법화삼매(法華三昧)를 깨쳐 선다라니(旋陀羅尼)를 획득했으며 영산일회(靈山一會)가 엄연(儼然)하여 흩어지지 않았음을 보았음. 그리고 혜사에게 고별하고 유화(遊化)하려 하자 혜사가 가로되 너는 진(陳)나라에 인연이 있으니 간다면 반드시 이익이 있을 것이다. 대건(太建) 7년(575) 건강(建康) 와관사(瓦棺寺)에 다다라 선법(禪法)을 창홍(創弘)했는데 복야(僕射) 서릉(徐陵)과 상서(尙書) 모희(毛喜) 등이 존귀하게 여기며 앙망(仰望)했고 아울러 선지(禪旨)를 받았음. 일찍이 꿈에 높은 산에 올라 한 승인을 보았는데 손으로 그를 불렀음. 이 해 9월에 천태산에 이르자 정광(定光)이 나와 영접하며 가로되 지난날 상초(相招)함을 기억하느냐. 대사가 경이(驚異)하며 예배하고 이에 암자를 창건하고 행도(行道)했음. 진(陳) 선제(宣帝)가 스님을 불러 환도(還都)하여 광택사(光宅寺)에 거주케 했는데 수(隋) 문제(文帝) 개황(開皇) 9년(589) 진(陳)나라가 멸망하자 대사는 이에 여산(廬山)에서 쉬었음. 개황 11년 진왕(晉王) 광(廣; 훗날의 隋煬帝)이 강회(江淮)의 총관(總管)에 임명되자 11월 23일 양주(楊州) 총관금성(總管金城)에서 대사를 초청해 승회(僧會)를 베풀고 보살계를 받았으며 스님을 받들어 호(號)해 가로되 지자(智者)라 했음. 오랜만에 여산(廬山)에 돌아갔다가 진왕(晉王)이 다시 요청해 산을 나와 소비(蕭妃)를 위해 구환(救患)했으며 7일 동안의 재(齋)를 건립하고 광명참(光明懺)을 행했으며 질환(疾患)이 낫자 다시 여산으로 돌아가다가 형봉(衡峰)을 지나 형부(荊部)에 이르자 옥천사(玉泉寺)에 머물렀음. 개황 17년(597) 12월 24일 천태산 석성사(石城寺)에서 귀적(歸寂)했으니 나이는 67이며 승랍은 40. 대사는 큰 절 36곳을 건조했고 명령해 15장(藏)을 사경(寫經)케 했으며 경소(經疏) 100여 권을 지었고 금동토목(金銅土木) 등의 상(像) 80만 구(軀)를 조성했으며 1만5천 사람을 도승(度僧)했고 50여 주(州)에서 도속(道俗; 僧俗)이 보살계를 받은 자를 가히 다 기록하지 못함. 대사가 이르되 법화(法華)는 1승(乘)의 묘전(妙典)이 되며 방편의 권문(權門)을 열어 진실한 묘리(妙理)를 보였으며 중선(衆善)의 소행(小行)을 모아 광대한 1승(乘)으로 귀납(歸納)했다 하고는 드디어 현의(玄義)를 발출(拔出)하여 가로되 석명변체명종론(釋名辯體明宗論)이니 교상(敎相)의 5중(重)을 판석(判釋)한 것임. 후세에 이를 종앙(宗仰)해 가로되 천태교(天台敎)라 했음 [석씨계고략2. 당고승전21. 불조통기6. 전등록27].
●法華三昧; 3제(諦) 원융의 묘리가 분명히 현전하여 중도(中道)를 장애하는 무명이 지식(止息)함을 일컬어 법화삼매라 함. 이 법화삼매의 명칭은 법화경 묘음보살품에서 설한 바 16삼매의 다른 이름이 됨. 법화삼매란 것은 천태의 뜻으론 3제가 원융함이 1실(實)이 되며 권실불이지화(權實不二之花; 花實은 實이 되고 花瓣은 權法이 됨)에 비유하나니 일체법을 거두어 1실상으로 돌아가게 함 [법화문구기10. 법화의소12].
●旋陀羅尼; 천태종에서 법화경 보현보살권발품의 설에 의거하여 선다라니ㆍ백천만억선다라니ㆍ법음방편다라니 등 3다라니를 세워 있으며 이로써 공가중(空假中) 3관(觀)에 짝했음. ▲연화경현의5상. 예컨대(如) 경문에 이르되 3다라니를 얻음은 단지 이름이 사도(似道)며 이 진도(眞道)가 아니다. 선다라니(旋陀羅尼)는 이는 선가(旋假)하여 입진(入眞)함이며 백천선다라니는 이는 선진(旋眞)하여 입속(入俗)함이며 법음방편(法音方便)은 바로 이 복도(伏道)며 입중(入中)을 얻지 못했음이다 (운운).
泗州僧伽大聖
或問 師何姓 師曰 姓何 曰 何國人 師曰 何國人
●泗州; 今江蘇盱眙東北
●僧伽; (628-710) 唐代西域僧 葱嶺北何國人 一說碎葉人 俗姓何 唐龍朔(661–66 3)初年 來西涼府 又遊歷江淮之地 居止於楚州龍興寺 後於泗州臨淮縣(安徽省)信義坊 得金像一尊 上有古香積之銘記及普照王佛之銘 遂建臨淮寺 師屢次顯現神異 嘗現十一面觀音形 世稱觀音大士化身 景龍二年(708) 受中宗之詔入內道場 被尊爲國師 未久 卽住京師薦福寺 因治衆病 祈雨有驗 蒙賜普光王寺之額於臨淮寺 景龍四年三月二日示寂於薦福寺 世壽八十三 懿宗咸通二年(861) 賜號證聖大師 宋眞宗大中祥符六年(1013) 敕賜普照明覺大師之諡號 [宋高僧傳十八 太平廣記九十六 全唐文二六三]
사주(泗州) 승가(僧伽) 대성(大聖)
혹문(或問; 누가 묻되) 스님은 무슨(何) 성(姓)입니까. 사왈(師曰) 성이 하(何)다. 가로되 어떤(何) 나라 사람입니까. 사왈 하국(何國) 사람이다.
●泗州; 지금의 강소 우이(盱眙) 동북.
●僧伽; (628-710) 당대 서역승. 총령 북방 하국(何國) 사람이니 일설엔 쇄섭(碎葉) 사람이라 함. 속성은 하(何)며 당 용삭(661 –663) 초년 서량부에 도래했음. 또 강회(江淮)의 땅을 유력하다가 초주 용흥사게 거지(居止)했음. 후에 사주(泗州) 임회현(안휘성) 신의방(信義坊)에서 금상(金像) 1존(尊; 量詞)을 얻었는데 위에 고향적(古香積)의 명기(銘記) 및 보조왕불(普照王佛)의 명(銘)이 있었음. 드디어 임회사(臨淮寺)를 건립했음. 스님이 누차에 신이(神異)를 나타내었고 일찍이 11면 관음형을 나타낸지라 세칭이 관음대사의 화신임. 경룡 2년(708) 중종의 부름을 받아 내도량(內道場)에 들어갔고 국사로 존칭됨을 입었음. 오래지 않아 곧 경사 천복사에 거주했는데 대중의 병을 치료함으로 인해 기우(祈雨)하자 영험이 있었음. 임회사에 보광왕사(普光王寺)의 편액을 몽사(蒙賜)했음. 경룡 4년 3월 2일 천복사에서 시적했음. 세수 83. 의종 함통 2년(861) 사호(賜號)하여 증성대사(證聖大師)라 했고 송 진종 대중상부 6년(1013) 보조명각대사란 시호를 칙사(敕賜)했음 [송고승전18. 태평광기96. 전당문263].
天台山豐干禪師
因寒山問 古鏡未磨時如何照燭 師曰 冰壺無影像 猿猴探水月 曰 此是不照燭也 更請道看 師曰 萬德不將來 敎我道甚麽 寒山拾得俱作禮而退 師欲遊五臺 問寒山拾得曰 汝共我去遊五臺 便是我同流 若不共我去遊五臺 不是我同流 山曰 你去遊五臺作甚麽 師曰 禮文殊 山曰 你不是我同流 師尋獨入五臺 逢一老人 便問 莫是文殊麽 曰 豈可有二文殊 師作禮未起 忽然不見〈趙州代曰 文殊 文殊〉
●豐干; 唐代僧 又作封干 善作詩 與寒山拾得竝稱國淸寺三隱 剪髮齊眉 穿布衣 身長七尺餘 初居天台山國淸寺 晝任舂米之職 夜則吟咏 言語無準 多似預記 人或借問 則只答以隨時二字 更無他語 嘗誦唱道歌 乘虎直入松門 衆僧驚懼 先天(712-713)年間 行化於京兆(長安) 曾爲太守閭丘胤治病 按傳燈錄二十七 豐干滅後 閭丘胤因師謂寒拾二人文殊普賢故 入山訪之 見寒拾二人圍鑪語笑 閭丘不覺致拜 二人連聲咄叱 寺僧驚愕曰 大官何拜風狂漢耶 寒山復執閭丘手 笑而言曰 豐干饒舌 由是 叢林遂有豐干饒舌之語 [聯燈會要二十九 宋高僧傳十九]
●代曰; 又作代云 上文拈擧之公案話頭 若缺答語 禪家代擬答語 示以代云 是禪家說法的一種形式 也是禪家語錄的一種類型
천태산(天台山) 풍간선사(豐干禪師)
한산(寒山)이 묻되 고경(古鏡)을 갈지 않았을 때 어떻게 조촉(照燭; 비추다)합니까 함으로 인해 사왈(師曰) 빙호(氷壺; 얼음 항아리)에 영상(影像)이 없거늘 원후(猨猴; 원숭이)가 수월(水月)을 찾는구나(探). 가로되 이것은 이 조촉(照燭)이 아니니 다시 청하건대 말씀해 보십시오. 사왈 만덕(萬德)을 가지고 오지 않았거늘 나로 하여금 무엇을 말하게 하느냐. 한산과 습득이 모두 작례(作禮)하고 물러났다. 스님이 오대(五臺; 오대산)를 유람하고 싶어 한산과 습득에게 물어 가로되 너희가 나와 함께 오대(五臺)에 가서 유람한다면 바로 이 나와 동류(同流)지만 만약 나와 함께 오대에 가서 유람하지 않는다면 이 나와 동류가 아니다. 한산이 가로되 네가 오대에 가서 유람하며 무엇을 하려느냐. 사왈 문수(文殊)에게 예배하겠다. 한산이 가로되 너는 이 나와 동류가 아니다. 스님이 이윽고 홀로 오대에 들어가 한 노인을 만나자 바로 묻되 이 문수(文殊)가 아닙니까. 가로되 어찌 가히 두 문수가 있으리오. 스님이 작례하고 일어나지 않았는데 홀연히 보이지 않았다〈趙州가 代曰 文殊여, 文殊여〉.
●豐干; 당대승. 또 봉간(封干)으로 지음. 시(詩)를 잘 지었고 한산(寒山)ㆍ습득(拾得)과 함께 국청사(國淸寺)의 삼은(三隱)으로 나란히 일컬음. 머리카락을 잘라 눈썹과 가지런하고 포의(布衣)를 걸쳤고 신장(身長)은 7척 가량이었음. 처음 천태산(天台山) 국청사(國淸寺)에 거주하면서 낮에는 쌀을 빻는 직무를 맡고 밤에는 곧 음영(吟咏)했는데 언어가 표준(標準)이 없고 다분히 예기(預記; 預言)와 흡사했음. 사람이 혹 차문(借問; 물어봄)하면 곧 다만 수시(隨時) 2자로 답하고 다시 다른 말이 없었음. 일찍이 창도가(唱道歌)를 외우며 범을 타고 바로 송문(松門)에 들어오매 중승(衆僧)이 경구(驚懼)하기도 했음. 선천(先天; 712-713)년 간 경조(京兆; 長安)에서 행화(行化)하며 일찍이 태수(太守) 여구윤(閭丘胤)을 위해 병을 치료했음. 전등록27을 안험(按驗)하니 풍간(豐干)이 입멸한 후 여구윤이, 스님이 이르기를 한산과 습득 두 사람은 문수와 보현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입산하여 방문했는데 한산과 습득 두 사람이 화로(火爐)에 둘러 앉아 어소(語笑)함을 보고 여구윤이 불각(不覺)에 절을 드리자 두 사람이 연성(連聲)으로 꾸짖는지라 사승(寺僧)이 경악(驚愕)하고 가로되 대관(大官)이 왜 풍광한(風狂漢; 미친 놈)에게 절을 하십니까. 한산이 다시 여구윤의 손을 잡고 웃으며 말해 가로되 풍간이 요설(饒舌)이로다. 이로부터 총림에 드디어 풍간요설(豐干饒舌)이란 말이 있음 [연등회요29. 송고승전19].
●代曰; 또 대운(代云)으로 지음. 상문(上文)에 염거(拈擧)한 공안화두에 만약 답어가 결손하면 선가가 대신해 답어하려 하면서 대운(代云)으로 보임. 이는 선가의 설법의 일종 형식임. 또 이는 선가어록의 일종 유형임.
天台山寒山子
因衆僧炙茄次 將茄串向一僧背上打一下 僧回首 山呈起茄串曰 是甚麽 僧曰 這風顚漢 山向傍僧曰 你道這僧費却我多少鹽醋 因趙州遊天台 路次相逢 山見牛跡 問州曰 上座還識牛麽 州曰 不識 山指牛跡曰 此是五百羅漢遊山 州曰 旣是羅漢 爲甚麽却作牛去 山曰 蒼天蒼天 州呵呵大笑 山曰 作甚麽 州曰 蒼天蒼天 山曰 這廝兒宛有大人之作
●寒山; 唐代隱士 亦稱寒山子 住天台山寒巖幽窟中 因不詳其姓氏 故稱寒山 容貌枯悴布襦零落 以樺皮爲冠 曳大木履 時來國淸寺 就拾得取衆僧殘食菜滓食之 寒山之行跡近於顚狂 來至國淸寺中 或於廊下徐行 或時叫躁凌人 或望空漫罵 寺僧不耐 以仗逼逐之 輒翻身撫掌 呵呵大笑而退 好吟詩唱偈 常契於佛理 臺州刺史閭丘胤曾慕名相訪 寒山見太守來 與拾得連臂笑傲 出寺而避之 閭丘胤復往寒巖謁問 竝送衣裳藥物等 二士高聲喝之曰 賊賊 便縮身入巖石縫中 復言 報汝諸人 各各努力 其石縫忽然而合 閭丘哀慕 令僧道翹尋其遺物 於林間得葉上所書辭頌 及題村墅人家屋壁 共三百餘首傳布人間 曹山本寂注釋謂之對寒山子詩 潙山曾在天台山會見寒山 趙州亦曾與寒山相互問答 其族姓不詳 年代亦有異說 或謂是唐玄宗先天年中之人 或太宗貞觀年中之人 或憲宗元和年中之人 據近人考證 生於睿宗景雲(710-711)初年 代宗大曆(766-77 9)年間 隱居於天台山 傳說其爲文殊菩薩之化身 與豐干(彌陀化身) 拾得(普賢化身) 號稱三聖 或稱三隱 又以三者皆隱棲天台山國淸寺 故亦稱國淸三隱 淸雍正十一年(1733) 封寒山爲和聖 拾得爲合聖 竝稱和合二聖 或和合二仙 [宋高僧傳十九 傳燈錄二十七 佛祖統紀三十九 佛祖歷代通載二十 釋氏稽古略三 天台山國淸禪寺三隱集記] ▲佛祖統紀五十四 豐干彌陀化現 寒山文殊化現 拾得普賢化現 唐太宗正觀七年(633)
●風顚漢; 神經錯亂失常的人 風 後作瘋 顚狂病 又狂疾也 風顚卽顚狂病
●上座; 參禪僧中的首座稱爲上座 多用作對禪僧的尊稱 ▲四分律刪繁補闕行事鈔下三之二 毘尼母云 從無夏至九夏是下座 十夏至十九夏名中座 二十夏至四十九夏名上座 五十夏已去 一切沙門國王所尊敬 是耆舊長老 ▲釋氏要覽一 五分律云 齊幾名上座 佛言上更無人名上座 毘婆沙論云 有三上座 一生年上座 卽尊長耆舊具戒名眞生故 二世俗上座 卽知法富貴大財大位大族大力大眷屬 雖年二十 皆應和合推爲上座 三法性上座 卽阿羅漢 婆沙論云 夫上座者 心安住故不爲世違順傾動 是名上座
●蒼天; (一)感嘆語 或爲哭喊語 常見重復使用 多用于感嘆譏刺對方不契禪機 亦用以示機接機 (二)四天之一 春天也 法苑珠林四 爾雅曰 穹蒼蒼天也(李巡曰 古時人質仰視天形 穹隆而高 其色蒼蒼 故曰穹蒼也) 春爲蒼天(李巡曰 春萬物始生 其色蒼蒼 故曰蒼天也) 此指(一)
●廝兒; 小孩兒 童子
●大人; 對長輩身分高的人的尊稱 大 敬詞 如大人大夫 有人君之德 故稱大人 又對非凡之人 上等根器者的稱呼
천태산(天台山) 한산자(寒山子)
중승(衆僧)이 가지(茄)를 굽던 차로 인해 가곶(茄串; 串은 꼬챙이 곶. 꼬챙이 찬)을 가져다 한 중의 등 위를 향해 한 번 때렸다. 중이 머리를 돌리자 한산이 가곶을 정기(呈起)하며 가로되 이 뭣고(是甚麽). 중이 가로되 이 풍전한(風顚漢; 미친 놈)아. 한산이 옆의 중을 향해 가로되 네가 말하라, 이 중이 나의 얼마의 염초(鹽醋)를 써버렸나. 조주(趙州)가 천태(天台)를 유람함으로 인해 노차(路次; 途中)에서 상봉했다. 한산이 우적(牛跡)을 보고 조주에게 물어 가로되 상좌(上座)는 도리어 소를 아느냐. 주왈(州曰) 알지 못한다. 한산이 우적(牛跡)을 가리키며 가로되 이것은 이 5백 라한(羅漢)이 유산(遊山)한 것이다. 주왈(州曰) 이미 이 라한이거늘 무엇 때문에 도리어 소가 되었느냐. 산왈(山曰) 창천(蒼天), 창천. 조주가 하하(呵呵; 原音이 하)하며 대소(大笑)했다. 산왈(山曰) 무엇 하느냐. 주왈(州曰) 창천(蒼天), 창천. 산왈(山曰) 이 시아(廝兒)는 완연히 대인(大人)의 작(作; 作略)이 있다.
●寒山; 당대의 은사(隱士)며 또한 호칭이 한산자(寒山子)니 천태산 한암(寒巖)의 유굴(幽窟) 속에 거주했음. 그 성씨가 불상(不詳)함으로 인해 고로 명칭이 한산임. 용모가 고췌(枯悴)하고 포유(布襦; 저고리)는 영락(零落; 떨어져 너덜거림)했고 화피(樺皮; 자작나무 껍질)로 갓을 만들고 큰 나막신을 끌었으며 때로 국청사(國淸寺)에 와서 습득(拾得)에게 나아가 중승의 잔식(殘食)이나 채재(菜滓; 滓는 찌꺼기 재)를 취해 그것을 먹었음. 한산의 행적은 전광(顚狂; 미치광이)에 가까웠음. 국청사 속에 내지(來至)하여 혹은 낭하(廊下)에서 서행(徐行)하고 혹은 때로 규조(叫躁; 부르짖으며 떠듦)하며 타인을 능멸하고 혹은 허공을 바라보며 만매(漫罵; 함부로 꾸짖음)했음. 사승(寺僧)이 참지 못해 지팡이로 핍박하여 쫓아내면 번번이 몸을 뒤집어 손뼉을 치면서 하하 대소하며 물러났음. 음시창게(吟詩唱偈)를 좋아했는데 항상 불리(佛理)에 계합했음. 대주자사(臺州刺史) 여구윤(閭丘胤)이 일찍이 모명(慕名)하여 상방(相訪)했는데 한산이 태수가 옴을 보고는 습득과 연비(連臂)하여 소오(笑傲; 웃으며 날뜀)하고는 사원에서 나가 그를 피했음. 여구윤이 다시 한암으로 가서 알문(謁問)하고 아울러 의상과 약물 등을 송부했는데 2사(士)가 고성으로 그를 꾸짖으며 가로되 도적아, 도적아, 하고는 곧 몸을 옴츠려 암석의 틈 속으로 들어갔는데 다시 말하되 너희 제인에게 알리나니 각각 노력하라. 그 돌의 틈이 홀연히 봉합되었음. 여구윤이 애모(哀慕)하여 승 도교(道翹)를 시켜 그의 유물을 찾게 했는데 임간(林間)에서 잎 위에 서사한 바의 사송(辭頌) 및 촌서(村墅; 농막)와 인가의 가옥의 벽에 제(題)한 것을 얻었으니 공히 300여 수가 인간에 전포(傳布)되었음. 조산본적(曹山本寂)이 주석하여 이를 일러 대한산자시(對寒山子詩)라 했음. 위산(潙山)이 일찍이 천태산에서 한산을 회견(會見)했고 조주도 또한 일찍이 한산과 상호 문답했음. 그 족성(族姓)은 불상(不詳)이며 연대도 또한 이설(異說)이 있음. 혹 이르기를 이는 당 현종 선천년 중의 사람이라 하고 혹은 태종 정관년 중의 사람이라 하고 혹은 헌종 원화년 중의 사람이라 함. 근인(近人)의 고증에 의거하면 예종 경운(710-711) 초년에 출생했고 대종 대력(766-779)년 간 천태산에 은거했음. 전설에 그는 문수보살의 화신이라 하며 풍간(미타 화신) 습득(보현 화신)과 더불어 호칭이 3성(聖)이며 혹은 호칭이 3은(隱)임. 또 3자가 모두 천태산 국청사에 은서(隱棲)한지라 고로 또한 명칭이 국청삼은(國淸三隱)임. 청 옹정 11년(1733) 한산을 화성(和聖)에 봉하고 습득을 합성(合聖)이라 했으니 병칭이 화합2성(和合二聖) 혹 화합2선(和合二仙)임 [송고승전19. 전등록27. 불조통기39. 불조역대통재20. 석씨계고략3. 천태산국청선사삼은집기]. ▲불조통기54. 풍간은 미타화현이며 한산(寒山)은 문수화현이며 습득은 보현화현이다. 당태종 정관 7년(633).
●風顚漢; 신경(神經)이 착란(錯亂)하여 실상(失常; 정상적이지 못함)한 사람. 풍(風)은 후에 풍(瘋)으로 지었음. 전광병(癲狂病; 狂症. 지랄병)이며 또 광질(狂疾)임. 풍전(風顚)은 곧 전광병.
●上座; 참선승(參禪僧) 중에 수좌(首座)를 상좌(上座)라고 호칭함. 다분히 선승(禪僧)에 대한 존칭으로 쓰임. ▲사분율산번보궐행사초하3지2. 비니모(毘尼母)에 이르되 무하(無夏)로부터 내지 9하(夏)는 이 하좌(下座)며 10하(夏) 내지 19하(夏)는 이름이 중좌(中座)며 20하 내지 49하는 이름이 상좌(上座)며 50하 이거(已去; 이후)는 일체의 사문과 국왕이 존경하는 바이니 이는 기구장로(耆舊長老)다. ▲석씨요람1. 오분율(五分律)에 이르되 얼마나 제등(齊等)해야 이름이 상좌(上座)입니까. 불타가 말씀하시되 위에 다시 사람이 없음을 이름해 상좌다. 비바사론(毘婆沙論)에 이르되 세 상좌가 있다. 1은 생년상좌(生年上座)니 곧 존장(尊長)과 기구(耆舊. 노인)와 구계(具戒)니 이름이 진성(眞生)인 연고다. 2는 세속상좌(世俗上座)니 곧 법을 알고 부귀하며 많은 재물과 큰 지위와 큰 종족과 큰 역량과 많은 권속이면 비록 나이가 20이라도 다 응당 화합(和合)하여 추대해 상좌로 삼는다. 3은 법성상좌(法性上座)니 곧 아라한이다. 바사론(婆沙論)에 이르되 무릇 상좌란 것은 마음이 안주한 고로 세상의 위순(違順)에 경동(傾動)하지 않나니 이 이름이 상좌다.
●蒼天; (1). 감탄어. 혹은 곡함어(哭喊語; 울부짖는 말)가 됨. 늘 중복으로 사용함을 보임. 다분히 상대방의, 선기(禪機)에 계합하지 못함을 감탄(感嘆)하며 기자(譏刺)에 사용함. 또한 시기접기(示機接機)로 사용함. (2). 4천(天)의 하나니 춘천(春天)임. 법원주림4. 이아(爾雅)에 가로되 궁창(穹蒼)은 창천이다(李巡이 가로되 古時에 人質이 하늘 형상을 우러러보매 穹隆하면서 높으며 그 색이 蒼蒼한지라 고로 가로되 궁창이다). 여기에선 (1)을 가리킴.
●廝兒; 소해아(小孩兒; 작은 아이). 동자.
●大人; 장배(長輩; 나이와 지위 등이 높은 사람)나 신분이 높은 사람에 대한 존칭. 대(大)는 경사(敬詞)니 대인ㆍ대부 같은 것. 인군(人君)의 덕이 있는지라 고로 대인으로 호칭함. 또 비범한 사람이나 상등근기자에 대한 칭호.
天台山拾得子
一日掃地 寺主問 汝名拾得 因豐干拾得汝歸 汝畢竟姓箇甚麽 拾得放下掃帚 叉手而立 主再問 拾得拈掃帚掃地而去 寒山搥胸曰 蒼天蒼天 拾得曰 作甚麽 山曰 不見道東家人死 西家人助哀 二人作舞 笑哭而出 國淸寺半月念戒衆集 拾得拍手曰 聚頭作想那事如何 維那叱之 得曰 大德且住 無嗔卽是戒 心淨卽出家 我性與你合 一切法無差
●拾得子; 子 古代對男子的尊稱 唐代天台山國淸寺厨中有二苦行 曰寒山子 拾得 初 豐干禪師山中經行 至赤城道側 聞兒啼聲遂尋之 見一子可數歲 初謂牧牛子 及問之云 孤棄于此 豐干乃名爲拾得 携至國淸寺 忽一日輒爾登座與佛像對盤而餐 復於憍陳如上座塑形前呼曰 小果聲聞僧驅之 常日齋畢 澄濾食滓 以筒盛之 寒山來卽負之而去 有護伽藍神廟 每日僧厨下食 爲烏所有 拾得以杖抶之曰 汝食不能護 安能護伽藍乎 此夕神附夢于合寺僧曰 拾得打我 詰旦諸僧說夢符同 一寺紛然牒申州縣 郡符至云 賢士隱遁菩薩應身 宜用旌之 號拾得爲賢士 後道翹纂錄寒山文句 於寺土地神廟壁 見拾得偈詞 附寒山集中 [傳燈錄二十七 神僧傳六 宋高僧傳十九]
●寺主; 指統掌一寺之庶務者 與住持同義 亦爲統領寺院內綱規之三綱之一 東晉時卽有此種職稱 以梁武帝任命法雲爲光宅寺寺主爲始 唐以後稱爲院主或監寺 日本則以大化元年(645) 敕命惠明爲百濟寺寺主爲最早 [續高僧傳五 百丈淸規四]
●國淸寺; 位於浙江天台縣北天台山佛隴峰南麓 乃天台宗之發源地 初 定光禪師住此峰 嘗謂弟子曰 不久將有勝善知識 領徒衆集居此山 之後 果有智顗渡江至此 大布敎法 竝欲於佛隴之南建寺 未成而示寂 隋開皇十八年(596) 晉王楊廣(卽煬帝)乃爲智顗設千僧齋 興工建殿宇 初名天台山寺 後因智顗初入此山時 定光曾夢告 三國(北周 北齊 陳)合而爲一 有大勢力人能爲此寺 寺若成 國卽淸 當稱爲國淸寺 隋大業元年(605) 遂賜額國淸寺 未久 灌頂住之 後成爲天台宗根本道場 南宋建炎二年(1128) 敕令重修 建炎四年下詔易敎爲禪 此後國淸寺成爲禪寺 寺之左右有五峰環擁 雙澗環流合於前 有橋名豐干橋 傳爲唐代豐干與寒山拾得嬉遊之地 又從豐干禪師與此寺之因緣 可知雖宋代以後方改爲禪寺 然早於唐初已漸禪化 後經數度增建 寺域號稱古來天下四絶之一 [國淸百錄序 隋天台智者大師別傳 天台山全志 古今圖書集成山川典第一二三]
●那事; 隱指悟道成佛之事
●維那; 禪院中的職事僧 主持法事儀式 管理僧衆紀律等
천태산(天台山) 습득자(拾得子)
어느 날 소지(掃地)하는데 사주( 寺主)가 묻되 너의 이름은 습득(拾得)이다. 풍간(豐干)이 너를 습득하여 돌아왔기 때문이거니와(因) 너는 필경 성(姓)이 이(箇) 무엇이냐. 습득이 소추(掃帚; 쓰는 비)를 내려놓고(放下) 차수(叉手)하고 섰다. 사주가 다시 묻자 습득이 소추(掃帚)를 집어 땅을 쓸고 떠났다. 한산이 가슴을 치며 가로되 창천(蒼天), 창천. 습득이 가로되 무엇 하느냐. 한산이 가로되 말함을 보지 못했는가, 동가(東家)의 사람이 죽으면 서가(西家)의 사람이 조애(助哀)한다. 두 사람이 춤추며 소곡(笑哭)하며 나갔다. 국청사(國淸寺)에서 반월(半月)마다 염계(念戒; 계를 외움)하며 대중이 모였다. 습득이 박수(拍手)하며 가로되 취두(聚頭)하여 생각을 짓거니와 나사(那事)는 어떠한가. 유나(維那)가 꾸짖었다. 습득이 가로되 대덕(大德)은 다만 멈추어라(且住). 성냄 없음이 즉시(卽是) 계(戒)며/ 마음이 깨끗해야 곧 출가다/ 나의 성품이 너와 합하나니/ 일체법이 어긋남이 없다.
●拾得子; 자(子)는 고대(古代) 남자에 대한 존칭(尊稱). 당대 천태산 국청사(國淸寺) 부엌 가운데 두 고행(苦行)이 있었으니 가로되 한산자(寒山子)와 습득(拾得)임. 처음에 풍간선사(豐干禪師)가 산중을 경행(經行)하다가 적성(赤城)의 길 옆에 이르렀음. 아이의 우는 소리를 듣고 드디어 그것을 찾았는데 가히 몇 살쯤 되는 한 아이(子는 兒임)를 보았음. 처음엔 이르기를 소를 치는 아이인가 했는데 및 물으니 이르기를 외롭게 여기에 버려졌다 했다. 풍간이 이에 습득이라고 이름했으며 데리고 국청사(國淸寺)에 이르렀음. 홀연히 어느 날 갑자기 등좌하여 불상과 대반(對盤)하여 밥을 먹었고 다시 교진여상좌의 소형(塑形) 앞에서 불러 가로되 소과(小果) 성문승(聲聞僧)아 너를 쫓아내리라. 상일(常日; 평일)에 재를 마치면 음식 찌꺼기를 맑게 걸러 통으로 그것을 담았고 한산이 와서 곧 그것을 지고 떠났음. 호가람신묘(護伽藍神廟)가 있었는데 매일 승주(僧厨)에서 하식(下食; 밥을 내려줌)하면 까마귀의 소유가 되었음. 습득이 지팡이로 그를 매질하며 가로되 너의 밥도 능히 보호하지 못하면서 어찌 능히 가람을 보호하겠는가. 이 날 밤에 신이 합사(合寺; 全寺)의 승중에게 꿈을 부착하여 가로되 습득이 나를 때립니다. 힐단(詰旦; 이른 아침)에 모든 승중이 꿈을 설하매 부동(符同; 부합)한지라 1사(寺)가 분연(紛然)하면서 주현(州縣)에 문서로 신고(申告)했음. 군부(郡符; 군의 공문)가 이르러 이르되 현사(賢士)의 은둔이며 보살의 응신이다. 마땅히 이를 드러냄을 써야 한다. 습득을 현사(賢士)로 호칭한다. 후에 도교(道翹)가 한산의 문구를 찬록(纂錄)하면서 사원 토지신 묘벽(廟壁)에서 습득의 게사(偈詞)를 발견하고 한산집 가운데 첨부했음 [전등록27. 신승전6. 송고승전19].
●寺主; 한 사원의 서무를 통장(統掌; 모두 관장함)하는 자니 주지와 같은 뜻. 또 사원 내 강규(綱規)를 통령(統領)하는 3강(綱)의 하나가 됨. 동진(東晉) 때 곧 이 종류의 직칭이 있었음. 양무제가 법운을 임명해 광택사 사주로 삼은 게 시작이 됨. 당 이후로는 원주(院主) 혹 감사(監寺)로 호칭했음. 일본은 곧 대화 원년(645) 칙명으로 혜명을 백제사 사주로 삼은 게 최조(最早)가 됨 [속고승전5. 백장청규4].
●國淸寺; 절강 천태현 북쪽 천태산 불롱봉 남쪽 기슭에 위치함. 곧 천태종의 발원지. 처음 정광선사(定光禪師)가 이 봉우리에 거주하면서 일찍이 제자에게 일러 가로되 오래지 않은 장래에 수승한 선지식이 있어 도중을 거느리고 이 산에 모여 거주할 것이다. 그 후 과연 지의(智顗)가 도강하여 여기에 이름이 있었음. 아울러 불롱의 남쪽에 절을 건립하려고 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시적했음. 수 개황 18년(596) 진왕 양광(楊廣; 즉 양제)이 이에 지의를 위해 천승재(千僧齋)를 베풀고 공사를 일으켜 전우(殿宇)를 건립했으며 처음의 명칭은 천태산사였음. 후에 지의가 처음 이 산에 들어왔을 때 정광이 일찍이 꿈에 고하기를 3국(북주ㆍ북제ㆍ진)이 통합되어 하나가 되면 큰 세력이 있는 사람이 능히 이 절을 지을 것이다. 절이 만약 완성되면 나라가 곧 깨끗해지리니 마땅히 일컬어 국청사로 하라 했음으로 인해 수 대업 원년605) 드디어 국청사란 편액을 주었음. 오래지 않아 관정(灌頂)이 여기에 거주했고 차후에 천태종의 근본도량이 되었음. 남송 건염 2년(1128) 칙령으로 중수했고 건염 4년 조서를 내려 교를 바꾸어 선으로 삼았으며 차후로 국청사는 선사(禪寺)가 되었음. 절의 좌우에 5봉이 환옹(環擁)하여 있으며 두 개울이 돌아 흐르다가 앞에서 합침. 다리가 있으니 이름이 풍간교며 전하기를 당대 풍간이 한산ㆍ습득과 장난치며 놀던 땅이라 함. 또 풍간선사와 이 절의 인연을 좇아 가히 아나니 비록 송대 이후에 비로소 선사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일찍 당초(唐初)에 이미 점점 선화(禪化)했음. 후에 수 차례 증건(增建)을 겪었으며 사역(寺域)을 호칭하기를 고래로 천하 사절(四絶)의 하나라 함 [국청백록서. 수천태지자대사별전. 천태산전지. 고금도서집성산천전제123].
●那事; 오도하고 성불하는 일을 은유(隱喩)로 가리킴.
●維那; 선원 중의 직사승(職事僧)이니 법사(法事)의 의식을 주지(主持)하고 승중의 기율(紀律) 등을 관리함.
明州奉化縣布袋和尙
自稱契此 形裁腲〈烏罪切〉脮〈奴罪切〉 蹙額皤腹 出語無定 寢臥隨處 常以杖荷一布囊幷破席 凡供身之具 盡貯囊中 入鄽肆聚落 見物則乞 或醯醢魚𦵔 纔接入口 分少許投囊中 時號長汀子 一日 有僧在師前行 師乃拊其背 僧回首 師曰 乞我一文錢 曰 道得卽與汝一文 師放下布袋 叉手而立 白鹿和尙問 如何是布袋 師便放下布袋 曰 如何是布袋下事 師負之而去 先保福和尙問 如何是佛法大意 師放下布袋叉手 福曰 爲秖如此 爲更有向上事 師負之而去 師在街衢立 有僧問 和尙在這裏作甚麽 師曰 等箇人 曰 來也 來也〈歸宗柔和尙別曰 歸去來〉 師曰 汝不是這箇人 曰 如何是這箇人 師曰 乞我一文錢
●明州; 浙江省寧波之古名
●一文錢; 文 量詞 用于計算銅錢的基本單位 南北朝以來 銅錢圓形 中有方孔 一面鑄有文字 故稱錢一枚爲一文
●向上事; 指禪人領悟微妙禪法 進入無上至眞之境界
●別曰; 又作別云 對于上文拈擧之公案語句 禪家認爲不合己意 另外再擬機語代替之 示以別云 是禪家說法的一種形式 也是禪家語錄的一種類型
명주(明州) 봉화현(奉化縣) 포대화상(布袋和尙)
자칭이 계차(契此)다. 형재(形裁; 裁는 材임)가 외(腲; 살찔 외)〈烏罪切; 외〉퇴(脮; 살찔 퇴)〈奴罪切; 뇌〉했으며 이마가 쭈그러졌고 배가 불룩했다(蹙額皤腹). 내뱉는 말이 정(定)함이 없고 자고(寢) 눕는 것은 곳을 따랐다(隨處). 늘 주장자로써 하나의 포낭(布囊; 포대주머니)과 아울러 해진 깔개(破席)를 짊어졌으며(荷) 무릇 몸을 공급(供給)하는 도구(道具)를 모두 주머니 속에 저장(貯藏)했다. 전사(鄽肆; 가게)나 취락(聚落)에 들어가 물건을 보면 곧 구걸했으며 혹 식초(醯; 혜)ㆍ젓갈(醢; 해)ㆍ물고기(魚)ㆍ김치(葅)를 겨우 접하면 입에 넣었으며 조금(少許) 나누어 주머니 속에 투입했다. 당시에 호하기를 장정자(長汀子)라 했다. 어느 날 어떤 중이 스님의 앞에서 가자 스님이 이에 그의 등을 두드렸다(拊). 중이 머리를 돌리자 사왈(師曰) 나에게 1문전(一文錢; 저본에 一紋錢으로 지었음)을 급여(給與; 乞)하라. 가로되 도득(道得; 말함을 얻다)하면 곧 너에에 1문(文; 저본에 紋으로 지었음)을 주겠다. 스님이 포대(布袋)를 내려놓고 차수(叉手)하고 섰다. 백록화상(白鹿和尙)이 묻되 무엇이 이 포대(布袋)인가. 스님이 바로 포대를 내려놓았다(放下). 가로되 무엇이 이 포대하사(布袋下事)인가. 스님이 그것을 지고(負) 갔다. 선보복(先保福) 화상이 묻되 무엇이 이 불법의 대의(大意)인가. 스님이 포대를 내려놓고 차수(叉手)했다. 보복이 가로되 다만 이와 같음이 되는가, 다시 향상사(向上事)가 있음이 되는가. 스님이 그것을 지고 갔다. 스님이 가구(街衢; 街道)에 있으면서 섰는데 어떤 중이 묻되 화상이 저리(這裏; 이 속)에 있으면서 무엇 합니까. 사왈(師曰) 이 사람을 기다린다(等箇人). 가로되 왔습니다, 왔습니다〈歸宗柔 和尙이 別曰 돌아갔다(歸去來)〉. 사왈 너는 이 저개(這箇) 사람이 아니다. 가로되 무엇이 저개의 사람입니까. 사왈 나에게 1문전(文錢)을 급여(給與; 乞)하라.
●明州; 절강성 영파(寧波)의 옛 이름.
●一文錢; 문(文)은 양사(量詞)임. 동전을 계산하는 데 쓰는 기본 단위. 남북조 이래로 동전은 원형이었고 가운데 네모난 구멍이 있으며 한 면에 문자를 주조해 있으므로 고로 동전 1매를 일컬어 1문(文)이라 함.
●向上事; 선인(禪人)이 미묘한 선법을 영오(領悟)하여 위없는 지진(至眞)의 경계에 진입함을 가리킴.
●別曰; 또 별운(別云)으로 지음. 윗글의 염거(拈擧)의 공안 어구에 대해 선가가 인식하기를 자기의 뜻에 맞지 않으면 영외(另外; 이것을 제한 밖)에 다시 기어(機語)를 헤아려 이에 대체하여 별운(別云)을 보임이니 이것은 선가의 설법의 일종 형식임. 또 이는 선가 어록의 일종 유형(類型)임.
師有歌曰 秖箇心心心是佛 十方世界最靈物 縱橫妙用可憐生 一切不如心眞實 騰騰自在無所爲 閑閑究竟出家兒 若覩目前眞大道 不見纖毫也大奇 萬法何殊心何異 何勞更用尋經義 心王本自絕多知 智者秖明無學地 非聖非凡復若何 不强分別聖情孤 無價心珠本圓淨 凡是異相妄空呼 人能弘道道分明 無量淸高稱道情 擕錫若登故國路 莫愁諸處不聞聲
●心王; 心之主作用 對於心所之伴作用 而謂爲心王 心王者 總了別所對之境 心所者 對之而起貪瞋等之情也 ▲四念處一 心者心王 異乎木石
스님이 가(歌)가 있어 가로되 다만 이(箇) 심심(心心)이란 심(心)이 이 불(佛)이니/ 시방세계에 가장 영물(靈物)이로다/ 종횡으로 묘용(妙用)함이 가련생(可憐生; 生은 조사)이니/ 일체가 심(心)의 진실만 같지 못하다./ 등등(騰騰)하며 자재하되 하는 바가 없나니/ 한한(閑閑)하며 구경(究竟)에 출가아(出家兒)로다/ 만약 목전의 참 대도(大道)를 본다면(覩)/ 섬호(纖毫)도 보이지 않으니 또한 크게 기이하도다./ 만법이 어찌 다르며(殊) 심이 어찌 다르리오(異)/ 어찌 노고롭게 다시 경의(經義)를 찾음을 쓰리오/ 심왕(心王)은 본래 저절로 다지(多知)가 끊겼나니/ 지자(智者)는 다만 무학지(無學地)를 밝힌다./ 비성비범(非聖非凡)이거늘 다시 어찌하리오(若何)/ 억지로(强) 분별하지 않으니 성정(聖情)이 외롭다(孤)/ 무가(無價)의 심주(心珠)가 본래 원정(圓淨)하나니/ 무릇 이 이상(異相)은 망공(妄空)이라 부른다(呼)./ 사람이 능히 홍도(弘道)하니 도가 분명하고/ 무량한 청정(淸淨; 淸)이 높으니 도정(道情)이라 일컫는다/ 석장(錫杖)을 가지고 만약 고국(故國)의 길에 오르면/ 제처(諸處)에서 소리를 듣지 못함을 근심치 말아라.
●心王; 심의 주작용(主作用)이니 심소(心所)의 반작용(伴作用)에 대해 이르되 심왕이라 함. 심왕이란 것은 소대(所對)의 경계를 모두 요별(了別)하며 심소란 것은 이에 대해 탐진 등의 감정을 일으킴임. ▲사념처1. 심이란 것은 심왕이니 목석과 다르다.
又有偈曰 是非憎愛世偏多 子細思量柰我何 寬却肚腸須忍辱 豁開心地任從他 若逢知己須依分 縱遇冤家也共和 若能了此心頭事 自然證得六波羅 我有一布袋 虛空無罣礙 展開遍十方 入時觀自在 吾有三寶堂 裏空無色相 不高亦不低 無遮亦無障 學者體不如 來者難得樣 智慧解安排 千中無一匠 四門四果生 十方盡供養 吾有一軀佛 世人皆不識 不塑亦不裝 不雕亦不刻 無一滴灰泥 無一點彩色 人畫畫不成 賊偸偸不得 體相本自然 淸淨非拂拭 雖然是一軀 分身千百億 又有偈曰 一鉢千家飯 孤身萬里遊 靑目覩人少 問路白雲頭 梁貞明二年丙子三月 師將示滅 於岳林寺東廊下端坐磐石 而說偈曰 彌勒眞彌勒 分身千百億 時時示時人 時人自不識 偈畢 安然而化 其後復現於他州 亦負布袋而行 四衆競圖其像
●罣礙; 謂障於前後左右上下而進退無途也 罣爲四面之障礙
또 게가 있어 가로되 시비와 증애(憎愛)가 세상에 치우치게 많나니/ 자세히 사량하매 나를 어찌하겠는가/ 두장(肚腸)을 넓혀서(寬却) 모름지기 인욕하고/ 심지(心地)를 활짝 열어(豁開) 그에 맡기고 좇아라./ 만약 지기(知己)를 만나면 꼭 분한(分限; 分)에 의하고/ 비록(縱) 원가(冤家; 怨家와 같음)를 만나더라도 또한 함께 화합하라/ 만약 능히 이 심두(心頭; 心上. 心間)의 일을 깨닫는다면/ 자연히 6바라(波羅; 波羅蜜)를 증득하리라. 나에게 한 포대(布袋)가 있나니/ 허공이라 괘애(罣礙)가 없다/ 전개(展開)하면 시방(十方)에 두루하고/ 들어 올 땐 관자재(觀自在)다./ 나에게 삼보당(三寶堂)이 있나니/ 속(裏)이 공(空)해 색상(色相)이 없다/ 높지도 않고 또한 낮지도 않고/ 가림(遮)이 없고 또한 장애도 없다./ 학자의 체(體)가 같지 못해/ 내자(來者)가 양식(樣式; 樣)을 얻기 어렵다/ 지혜로 안배(安排)할 줄 알아야 하거늘/ 천(千) 가운데 일장(一匠)도 없다/ 사문(四門)에 사과(四果)가 나와(生)/ 시방이 모두 공양한다./ 나에게 1구(軀; 量詞)의 불(佛)이 있나니/ 세인(世人)이 모두 알지 못한다/ 빚지(塑) 못하고 꾸미지(裝) 못하고/ 새기지 못하고 또한 깎지 못한다(不雕亦不刻)./ 한 방울(滴)의 회니(灰泥; 재의 진흙)도 없고/ 한 점의 채색(彩色)도 없다/ 사람이 그리려고 해도 그림을 이루지 못하고/ 도적이 훜치려고 해도 훔침을 얻지 못한다./ 체상(體相)이 본래 자연이며/ 청정하여 불식(拂拭)하지 않는다/ 비록 그러히 이 1구(軀)지만/ 분신(分身)이 천백억(千百億)이다. 또 게가 있어 가로되 일발(一鉢)에 천가(千家)의 밥이며/ 고신(孤身)이 만 리를 유행(遊行)한다/ 청목(靑目)으로 사람을 봄(覩)이 적고/ 백운두(白雲頭; 頭는 조사)에게 길을 묻는다. 양(梁) 정명(貞明) 2년(二年; 저본에 三年으로 지었음) 병자(丙子; 916) 3월 스님이 장차 시멸(示滅)하려 하자 악림사(嶽林寺) 동랑(東廊) 아래에서 반석(磐石)에 단정히 앉아 게를 설해 가로되 미륵 진미륵(眞彌勒)이여/ 분신(分身)이 천백억(千百億)이로다/ 시시(時時)로 시인(時人)에게 보이건만/ 시인(時人)이 스스로 알지 못하네. 게를 마치자 안연(安然)히 화거(化去; 化)했다. 그 후 다시 타주(他州)에 나타났고 또한 포대를 지고 다녔다. 이에 4중(衆)이 다투어 그 상(像)을 그렸다(圖).
●罣礙; 이르자면 전후ㆍ좌우ㆍ상하를 막아 진퇴할 길이 없음임. 괘(罣)는 사면의 장애가 됨.
法華志言大士
壽春許氏子 弱冠遊東都 繼得度於七俱胝院 留講肆久之 一日 讀雲門錄忽契悟 未幾宿命遂通 獨語笑 口吻囁嚅 日常不輟 世傳誦法華 因以名之 丞相呂許公問佛法大意 師曰 本來無一物 一味却成眞 集仙王質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曰 靑山影裏潑藍起 寶塔高吟撼曉風 又曰 請法華燒香 師曰 未從齋戒覔 不向佛邊求 國子助敎徐岳問祖師西來意 師曰 街頭東畔底 徐曰 某甲未會 師曰 三般人會不得 僧問 世有佛不 師曰 寺裏文殊 有問師 凡邪聖邪 遂擧手曰 我不在此住 慶曆戊子十一月二十三日將化 謂人曰 我從無量劫來 成就逝多國土 分身揚化 今南歸矣 言畢右脇而逝
●弱冠; 祖庭事苑六 弱冠 音貫 冠束也 男子二十曰弱冠
●囁嚅; 一竊竊私語貌 二欲言又止貌
●齋戒; 淸心之不淨曰齋 禁身之過非曰戒 ▲大乘義章十二 防禁故名爲戒 潔淸故名爲齋 ▲周易韓康伯注 洗心曰齋 防患曰戒
●國子; 國子監 隋朝以後的中央官學 爲中國古代敎育體系中的最高學府 又稱國子學或國子寺 [百度百科]
법화(法華) 지언대사(志言大士)
수춘(壽春) 허씨(許氏)의 아들이다. 약관(弱冠)에 동도(東都)에서 노닐었고 이어서 칠구지원(七俱胝院)에서 득도(度得)했고 강사(講肆)에 머문 지 오래되었다. 어느 날 운문록(雲門錄)을 읽다가 홀연히 계오(契悟)했고 미기(未幾; 不久)에 숙명(宿命)을 드디어 통했다. 홀로 어소(語笑)하면서 입술(口吻)이 섭유(囁嚅)하며 일상(日常)에 거두지 않았다. 세간에서 전하되 법화(法華)를 외웠다 하며 이로 인해 그를 이름했다. 승상(丞相) 여허공(呂許公)이 불법대의(佛法大意)를 묻자 사왈(師曰) 본래 한 물건도 없나니 일미(一味)가 도리어 진(眞)을 이룬다. 집선(集仙) 왕질(王質)이 묻되 무엇이 이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입니까. 사왈 청산의 그림자 속에 남빛(藍)이 활발히(潑) 일어나고 보탑(寶塔)이 높이 읊으며 효풍(曉風)을 흔든다(撼). 우왈(又曰) 법화(法華)에게 소향(燒香)을 청합니다. 사왈 재계(齋戒)로 좇아 찾지 말고(未) 불변(佛邊)을 향해 구하지 말아라. 국자(國子) 조교(助敎) 서악(徐岳)이 조사서래의를 묻자 사왈 가두(街頭) 동반(東畔)의 밑이다. 서왈(徐曰) 모갑이 알지 못하겠습니다. 사왈 세 가지 사람이 이회(理會)함을 얻지 못한다. 승문(僧問) 세상에 부처가 있습니까. 사왈 사리(寺裏)의 문수(文殊)다. 어떤 이(有)가 스님에게 묻되 범부입니까, 성인입니까. 드디어 거수(擧手)하고 가로되 나는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경력(慶曆) 무자(戊子; 1048) 11월 23일 장차 화(化; 遷化)하려고 하자 사람들에게 일러 가로되 내가 무량겁(無量劫)으로 좇아오면서 서다국토(逝多國土)를 성취했고 분신(分身)하여 양화(揚化; 弘揚함. 교화함)했는데 이제는 남쪽으로 돌아간다. 말을 마치자 우협(右脇)으로 서거했다.
●弱冠; 조정사원6. 약관(弱冠) 음이 관이니 관속(冠束)이다. 남자 20을 가로되 약관이다.
●囁嚅; 1. 절절(竊竊; 가만가만)히 사적으로 말하는 모양. 2. 말하려다가 또 그치는 모양.
●齋戒; 마음의 부정을 깨끗이 함을 가로되 재(齋)며 몸의 과비(過非)를 금함을 가로되 계(戒)임. ▲대승의장12. 방금(防禁)하는 고로 이름하여 계(戒)며 결청(潔淸)하는 고로 이름하여 재(齋)다. ▲주역 한강백 주(注) 세심(洗心)을 가로되 재(齋)며 방환(防患)을 가로되 계(戒)다.
●國子; 국자감(國子監)이니 수조(隋朝) 이후의 중앙관학(국가에서 세운 학교)이니 중국 고대 교육체계 중의 최고 학부가 됨. 또 명칭이 국자학 혹 국자시(國子寺) [백도백과].
扣冰澡先古佛
建寧新豐翁氏子 母夢比丘 風神烱然 荷錫求宿 人指謂曰 是辟支佛 已而孕 生於武宗會昌四年 香霧滿室 彌日不散 年十三求出家 父母許之 依烏山興福寺行全爲師 咸通乙酉落髮受具 初以講說 爲衆所歸 棄謁雪峯 手擕鳧茈一包醬一器獻之 峯曰 包中是何物 師曰 鳧茈 峯曰 何處得來 師曰 泥中得 峯曰 泥深多少 師曰 無丈數 峯曰 還更有麽 曰 轉有轉深 又問 器中何物 曰 醬 峯曰 何處得來 曰 自合得 峯曰 還熟也未 曰 不較多 峯異之曰 子異日必爲王者師 後自鵞湖歸溫嶺結庵〈今爲永豐寺〉繼居將軍巖 二虎侍側 神人獻地 爲瑞巖院 學者爭集 嘗謂衆曰 古聖修行 須憑苦節 吾今夏則衣楮 冬則扣冰而浴 故世人號爲扣冰古佛 後住靈曜 上堂 四衆雲臻 敎老僧說箇甚麽 便下座 有僧燒炭 積成火龕曰 請師入此修行 曰 眞玉不隨流水化 琉璃爭奪衆星明 曰 莫秖這便是麽 曰 且莫認奴作郞 曰 畢竟如何 曰 梅華臘月開 天成戊子應閩主之召 延居內堂 敬拜曰 謝師遠降 賜茶次 師提起橐子曰 大王會麽 曰 不會 曰 人王法王 各自照了 留十日以疾辭 至十二月二日 沐浴陞堂 告衆而逝 王與道俗備香薪蘇油茶毗之 祥耀滿山 獲舍利五色 塔於瑞嚴正寢 諡曰妙應法威慈濟禪師
●王者; 此指國家的最高統治者
●認奴作郞; 將奴僕錯認作主人 喩參學者不明自心是佛自我爲主 却向外尋覓成佛之道 將種種言敎施設權宜法門認作佛法 郞 主人
●蘇油; 牛乳所製之油 或食或塗身
구빙(扣冰) 조선(澡先) 고불(古佛)
건녕(建寧) 신풍(新豐) 옹씨(翁氏)의 아들이다. 모친이 비구(比丘)를 꿈꾸었는데 풍신(風神; 風采)이 경연(烱然; 환히 빛나는 모양)했고 석장(錫杖)을 짊어지고 숙박(宿泊)을 구했다. 사람이 가리키며 일러 가로되 이는 벽지불(辟支佛)이다. 이미 그러고선 잉태(孕胎)했고 무종(武宗) 회창(會昌) 4년(844)에 출생했다. 향무(香霧)가 만실(滿室)했고 미일(彌日; 終日) 흩어지지 않았다. 나이 13에 출가를 구했고 부모가 허락했다. 오산(烏山) 흥복사(興福寺) 행전(行全)에게 의지해 스승으로 삼았고 함통(咸通) 을유(乙酉; 865) 낙발(落髮)하고 수구(受具)했다. 처음엔 강설로써 중인(衆人)이 귀의하는 바가 되었는데 버리고 설봉(雪峯)을 참알했다. 손에 부자(鳧茈; 올방개) 1포(包; 꾸러미)와 장(醬) 1기(器)를 가지고 바쳤다. 봉왈(峯曰) 포중(包中)에 이 무슨 물건인가. 사왈(師曰) 부자(鳧茈)입니다. 봉왈 어느 곳에서 얻어 왔느냐. 사왈 진흙 속에서 얻었습니다. 봉왈 진흙의 깊이가 얼마이던가. 사왈 장수(丈數)가 없습니다. 봉왈 도리어 다시 있는가. 가로되 구르면(轉) 더욱(轉) 깊음이 있습니다. 우문(又問) 기중(器中)에 무슨 물건인가. 가로되 장(醬)입니다. 봉왈 어느 곳에서 얻어 왔느냐. 가로되 스스로 제작(製作; 合)해 얻었습니다. 봉왈 도리어 익었느냐 또는 아니냐. 가로되 많이 어긋나지 않습니다(不較多). 설봉이 기이하게 여기고 가로되 자네는 다른 날 반드시 왕자(王者)의 스승이 될 것이다. 후에 아호(鵞湖)로부터 온령(溫嶺)으로 돌아와 결암(結庵)했고〈지금 永豐寺가 되었다〉 이어서 장군암(將軍巖)에 거주했다. 2호(虎)가 곁에서 모셨고 신인(神人)이 땅을 바쳐 서운원(瑞巖院)이 되었고 학자가 다투어 모였다. 일찍이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고성(古聖)이 수행하면서 모름지기 고절(苦節)에 의빙(依憑)했다. 내가 금하(今夏)에 곧 종이옷을 입고(衣楮) 겨울엔 곧 얼음을 두드려(扣冰) 목욕하겠다. 고로 세인이 호(號)하여 구빙고불(扣冰古佛)이라 했다. 후에 영요(靈曜)에 주(住)했다. 상당(上堂) 4중(衆)이 운진(雲臻; 운집)하여 노승으로 하여금 저(箇) 무엇을 설하게 하느냐. 바로 하좌했다. 어떤 중이 숯을 태워 화감(火龕)을 적성(積成)하고 가로되 청컨대 스님이 여기에 들어와 수행하십시오. 가로되 진옥(眞玉)은 유수(流水) 따라 변화하지 않거늘 유리(琉璃)가 어찌 중성(衆星)의 밝음을 빼앗겠느냐. 가로되 다만 이것(這)이 바로 이것(是)이 아니겠습니까. 가로되 다만(且) 인노작랑(認奴作郞)하지 말아라. 가로되 필경 어떻습니까. 가로되 매화(梅華)는 납월(臘月)에 핀다(開). 천성(天成) 무자(戊子; 928) 민주(閩主)의 부름에 응했는데 맞이해 내당(內堂)에 거처케 하고 경배(敬拜)하고 가로되 스님의 원강(遠降; 멀리서 降臨함)에 감사합니다. 차를 주던(賜茶) 차에 스님이 탁자(橐子; 纏帶)를 제기(提起)하고 가로되 대왕은 아십니까. 가로되 알지 못합니다. 가로되 인왕(人王)과 법왕(法王)이 각자 비추었습니다(照了). 10일 머물다가 질병 때문에(以疾) 고별했다. 12월 2일에 이르러 목욕하고 승당하여 고중(告衆)하고 서거했다. 왕과 도속(道俗)이 향신(香薪)과 소유(蘇油)를 갖추어(備) 다비(茶毗)했는데 상서로운 빛(祥耀)이 만산(滿山)했다. 사리를 획득했는데 오색(五色)이었다. 서암(瑞嚴)의 정침(正寢)에 탑을 세웠고 시왈(諡曰) 묘응법위자제선사( 妙應法威慈濟禪師)라 했다.
●王者; 여기에선 국가의 최고 통치자를 가리킴.
●認奴作郞; 노복(奴僕)을 가지고 착인(錯認)하여 주인으로 삼음이니 참학자가 자심이 이 부처라서 자아가 주인이 됨을 밝히지 못하고 도리어 밖을 향해 성불할 도를 심멱(尋覓)하면서 갖가지 언교(言敎)의 시설인 권의법문(權宜法門)을 가지고 인정해 불법으로 삼음에 비유함. 랑(郞)은 주인.
●蘇油; 우유로 제조한 바의 기름이니 혹 먹기도 하고 혹 몸에 바르기도 함.
千歲寶掌和尙
中印度人也 周威烈十二年丁卯 降神受質 左手握拳 七歲祝髮乃展 因名寶掌 魏晉間東遊此土 入蜀禮普賢 留大慈 常不食 日誦般若等經千餘卷 有詠之者曰 勞勞玉齒寒 似迸巖泉急 有時中夜坐 堦前神鬼泣 一日謂衆曰 吾有願住世千歲 今年六百二十有六 故以千歲稱之 次遊五臺 徙居祝融峯之華嚴 黃梅之雙峯 廬山之東林 尋抵建鄴 會達磨入梁 師就扣其旨開悟 武帝高其道臘 延入內庭 未幾如吳 有偈曰 梁城遇導師 參禪了心地 飄零二浙遊 更盡佳山水 順流東下 由千頃至天竺 往鄮峯 登太白 穿鴈蕩 盤礴於翠峯七十二庵 回赤城 憩雲門法華諸暨漁浦赤符大巖等處 返飛來 棲止石竇 有行盡支那四百州 此中徧稱道人遊之句 時貞觀十五年也 後居浦江之寶嚴 與朗禪師友善 每通問 遣白犬馳往 朗亦以靑猿爲使令 故題朗壁曰 白犬銜書至 靑猿洗鉢回 師所經處 後皆成寶坊 顯慶二年正旦 手塑一像 至九日像成 問其徒慧雲曰 此肖誰 雲曰 與和尙無異 卽澡浴易衣趺坐 謂雲曰 吾住世已一千七十二年 今將謝世 聽吾偈曰 本來無生死 今亦示生死 我得去住心 他生復來此 頃時囑曰 吾滅後六十年 有僧來取吾骨 勿拒 言訖而逝 入滅五十四年 有刺浮長老自雲門至塔所 禮曰 冀塔洞開 少選塔戶果啓 其骨連環若黃金 浮卽持往秦望山 建窣堵波奉藏 以周威烈丁卯至唐高宗顯慶丁巳 攷之實一千七十二年 抵此土 歲歷四百餘 僧史皆失載 開元中慧雲門人宗一者 嘗勒石識之
●勞勞; 言語繼續不休的樣子
●二浙; 浙東浙西的合稱 泛指今浙江全省 上海市和江蘇長江以南部分
●盤礴; 一回環旋繞 二反復姸究 此指一
●通問; 相互問候 互通音信
●窣堵波; <梵> stūpa 又作窣覩波 藪斗婆 數斗波 塔婆 兜婆 塔 浮圖等 奉安佛物或經文 又爲標幟死者生存者之德 埋舍利 牙 髮等 以金石土木築造 使瞻仰者 譯曰大聚 方墳 圓塚 靈廟 高顯處 功德聚等 [西域記一 法華文句三 玄應音義六 慧琳音義二]
천세보장화상(千歲寶掌和尙)
중인도(中印度) 사람이니 주(周) 위열(威烈) 12년 정묘(丁卯; 前 414)에 강신(降神; 神靈이 降臨함)하여 수질(受質; 形體를 받음)하였다. 왼손으로 주먹을 쥐었는데 7세에 축발(祝髮. 祝은 깎을 축)하고서 곧 펴졌으므로 인하여 이름이 보장(寶掌)이다. 위진간(魏晋間)에 동쪽 이 땅으로 유람(遊覽)하여 촉(蜀)에 들어가 보현(普賢)에 예배하고 대자(大慈)에 머물렀는데 늘 먹지 않았고 매일 반야(般若) 등의 경 수천 권을 독송(讀誦)했다. 이를 읊는 자가 가로되 노로(勞勞)하며 옥치(玉齒)가 차고(寒)/ 암천(巖泉)이 흩어져 달아남(迸)과 같이 급하다/ 어떤 때 중야(中夜; 한밤중)에 앉았더니/ 섬돌 앞에 신귀(神鬼)가 읍(泣)하더라. 어느 날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내가 소원이 있어 천세(千歲) 주세(住世)함인데 금년에 626이다. 고로 천세(千歲)로써 그를 일컫는다. 다음에 오대(五臺)를 유람했고 축융봉(祝融峯)의 화엄(華嚴)ㆍ황매(黃梅)의 쌍봉(雙峯)ㆍ여산(廬山)의 동림(東林)으로 옮겨 거주했고 이윽고 건업(建鄴)에 다다랐다. 달마가 양(梁)에 들어옴을 만나 스님이 나아가 그 의지(意旨)를 물어(扣) 개오(開悟)했다. 무제(武帝)가 그의 도랍(道臘)을 고상(高尙)히 여겨 내정(內庭)으로 연입(延入)했다. 미기(未幾; 不久)에 오(吳)로 갔다(如). 게가 있어 가로되 양성(梁城)에서 도사(導師)를 만났고/ 참선하여 심지(心地)를 깨쳤다/ 표령(飄零)하며 이절(二浙)에 노닐고/ 다시 아름다운(佳) 산수(山水)를 다했다. 흐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갔고 천경(千頃)을 말미암아 천축(天竺)에 이르렀고 무봉(鄮峯)에 갔고 태백(太白)에 올랐고 안탕(鴈蕩)을 천과(穿過; 穿)하고 취봉(翠峯)의 72봉(庵)을 반박(盤礴)했고 적성(赤城)으로 회귀(回歸; 回)했고 운문(雲門)ㆍ법화(法華)ㆍ제기(諸暨)ㆍ어포(漁浦)ㆍ적부(赤符)ㆍ대암(大巖) 등의 처소에서 휴게(休憩)했고 비래(飛來)로 돌아와 석두(石竇)에 서지(棲止)했다. 지나(支那) 사백주(四百州)를 행진(行盡)했나니 이 중에 도인(道人)의 유람을 두루 일컫는다 라는 구(句)가 있다. 당시는 정관(貞觀) 15년(641)이다. 후에 포강(浦江)의 보엄(寶嚴)에 거주했는데 낭선사(朗禪師)와 우선(友善; 벗으로 잘 지냄)했다. 매번 통문(通問)하면서 백견(白犬)을 보내어 달려갔고 낭(朗)도 또한 청원(靑猿)을 사령(使令; 심부름꾼)으로 삼았다. 고로 낭(朗)의 벽(壁)에 제(題)해 가로되 백견(白犬)이 글을 물고 이르고 청원(靑猿)이 발우를 씻고 돌아온다. 스님이 경유했던 바의 처소는 후에 모두 보방(寶坊; 寺院)을 이루었다. 현경(顯慶) 2년(657) 정단(正旦; 元旦)에 손수 일상(一像)을 소조(塑造)하여 9일에 이르러 상(像)을 완성하고는 그 도제(徒弟)인 혜운(慧雲)에게 물어 가로되 이것이 누구를 닮았느냐. 혜운이 가로되 화상과 다르지 않습니다. 곧 조욕(澡浴)하고 옷을 갈아입고 부좌(趺坐)하고 혜운에게 일러 가로되 내가 세상에 머문 지 이미 1천7십2년인데 이제 다만(將) 사세(謝世; 逝世)할까 한다. 나의 게를 들어라. 가로되 본래 생사가 없는데/ 지금 또 생사를 보인다/ 내가 거주(去住)하는 마음을 얻었나니/ 타생(他生)에 다시 여기에 오리라. 경시(頃時; 一段의 시간)에 촉왈(囑曰) 내가 멸후(滅後) 60년에 어떤 중이 와서 나의 뼈를 취하리니 거절(拒絶)하지 말아라. 말을 마치자 서거했다. 입멸(入滅)한 지 54년 만에 자부(刺浮) 장로(長老)가 있어 운문(雲門)으로부터 탑소(塔所)에 이르렀다. 예배하고 가로되 바라건대(冀) 탑이 활짝(洞) 열리소서. 소선(少選; 不久. 須臾)에 탑호(塔戶)가 과연 열렸는데(啓) 그 뼈가 연환(連環)했고 황금과 같았다. 자부(刺浮)가 곧 가지고 진망산(秦望山)에 가서 솔도파(窣堵波)를 건립하고 봉장(奉藏)했다. 주(周) 위열(威烈) 정묘(丁卯; 前 414)에서 당 고종 현경(顯慶) 정사(丁巳; 657)에 이르렀으니 이를 고찰(考察; 攷)하건대 실로 1천7십2년인 것이다. 차토(此土)에 다다라 해(歲)를 4백여 지났는데 승사(僧史)에서 모두 기재(記載)를 잃었다. 개원(開元; 713-741) 중 혜운(慧雲)의 문인 종일(宗一)이란 자가 일찍이 돌에 새기고(勒) 이를 적었다(識).
●勞勞; 언어가 계속하여 쉬지 않는 양자(樣子).
●二浙; 절동(浙東)과 절서(浙西)의 합칭(合稱). 널리 지금의 절강 전성(全省), 상해시와 강소(江蘇). 장강 이남 부분을 가리킴.
●盤礴; 1. 회환선요(回環旋繞; 주위를 빙빙 돌다). 2. 반복하며 연구함. 여기에선 1을 가리킴.
●通問; 상호 문후(問候)함. 서로 음신(音信)을 통함.
●窣堵波; <범> stūpa. 또 솔도파(窣覩波)ㆍ수두파(藪斗婆)ㆍ수두파(數斗波)ㆍ탑파(塔婆)ㆍ두파(兜婆)ㆍ탑ㆍ부도(浮圖) 등으로 지음. 불물(佛物) 혹 경문을 봉안함. 또 죽은 자나 생존자의 덕을 표치(標幟)함. 사리ㆍ이빨ㆍ머리카락 등을 묻으며 금석이나 토목(土木)으로 축조하여 첨앙(瞻仰)하게 하는 것. 번역해 가로되 대취(大聚)ㆍ방분(方墳)ㆍ원총(圓塚)ㆍ영묘(靈廟)ㆍ고현처(高顯處)ㆍ공덕취(功德聚) 등임 [서역기1. 법화문구3. 현응음의6. 혜림음의2].
五燈會元卷第二
오등회원 주역(五燈會元 註譯) 주문 제본
2024. 12월 말 번역 필. 5책 1질. 합4,615쪽. 本註와 補註 총 6,500 目. 미출간. 원문과 출처가 분명한 한문 주석을 넣고 다시 전체를 한글 번역. 주문 요청이 있을 시 인쇄소 에 부탁해 5일 내에 복사 제
pyungsimsa.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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