五祖下四世
益州無相禪師法嗣
益州保唐寺無住禪師
初得法於無相大師 乃居南陽白崖山 專務宴寂經累歲 學者漸至 勤請不已 自此垂誨 雖廣演言敎 而唯以無念爲宗 唐相國杜鴻漸出撫坤維 聞師名 思一瞻禮 遣使到山延請 時節度使崔寧亦命諸寺僧徒遠出迎引 至空慧寺 時杜公與戎帥 召三學碩德俱會寺中 致禮訖 公問曰 弟子聞今和尙說無憶無念莫妄三句法門 是否 師曰 然 公曰 此三句是一是三 師曰 無憶名戒 無念名定 莫妄名慧 一心不生 具戒定慧 非一非三也 公曰 後句妄字莫是從心之忘乎 曰 從女者是也 公曰 有據否 師曰 法句經云 若起精進心 是妄非精進 若能心不妄 精進無有涯 公聞疑情盪然 公又問 師還以三句示人否 師曰 初心學人 還令息念 澄停識浪 水淸影現 悟無念體 寂滅現前 無念亦不立也 于時庭樹鵶鳴 公問 師聞否 師曰 聞 鵶去已 又問 師聞否 師曰 聞 公曰 鵶去無聲 云何言聞 師乃普告大衆曰 佛世難値 正法難聞 各各諦聽 聞無有聞 非關聞性 本來不生 何曾有滅 有聲之時 是聲塵自生 無聲之時 是聲塵自滅 而此聞性 不隨聲生 不隨聲滅 悟此聞性 則免聲塵之所轉 當知聞無生滅 聞無去來 公與僚屬大衆稽首 又問 何名第一義 第一義者 從何次第得入 師曰 第一義無有次第 亦無出入 世諦一切有 第一義卽無 諸法無性性 說名第一義 佛言有法名俗諦 無性第一義 公曰 如師開示 實不可思議 公又曰 弟子性識微淺 昔因公暇 撰得起信論章疏兩卷 可得稱佛法否 師曰 夫造章疏 皆用識心 思量分別 有爲有作 起心動念 然可造成 據論文云 當知一切法 從本以來 離言說相 離名字相 離心緣相 畢竟平等 無有變異 唯有一心 故名眞如 今相公著言說相 著名字相 著心緣相 旣著種種相 云何是佛法 公起作禮曰 弟子亦曾問諸供奉大德 皆讚弟子不可思議 當知彼等但狥人情 師今從理解說 合心地法 實是眞理不可思議 公又問 云何不生 云何不滅 如何得解脫 師曰 見境心不起名不生 不生卽不滅 旣無生滅 卽不被前塵所縛 當處解脫 不生名無念 無念卽無滅 無念卽無縛 無念卽無脫 擧要而言 識心卽離念 見性卽解脫 離識心見性外 更有法門證無上菩提者 無有是處 公曰 何名識心見性 師曰 一切學道人 隨念流浪 葢爲不識眞心 眞心者 念生亦不順生 念滅亦不依寂 不來不去 不定不亂 不取不捨 不沈不浮 無爲無相 活鱍鱍平常自在 此心體畢竟不可得 無可知覺 觸目皆如 無非見性也 公與大衆作禮稱讚 踊躍而去 師後居保唐寺而終
●益州; 四川省首都 位於成都平野南東 有圜悟克勤道場昭覺寺 釋氏稽古略三云 益州 西川成都府也
●無相; (684-762) 新羅國僧 俗姓金 世稱金和上 東海大師 本是新羅王族 於新羅之群南寺出家受戒後 開元十六年(728) 隨入唐使航海至華 謁玄宗 住禪定寺 未久入蜀 至資州(今四川資中)德純寺 欲師事處寂 時處寂因病不得引見 然無相燃一指供養 遂得留止二年 二十四年 處寂遣人喚無相 付囑從智詵所傳之達磨衣 遂隱山中修頭陀行 後應請開禪法 住成都府淨衆寺 化導二十年 天寶末年玄宗入蜀曾召見之 禮錫豐隆 寶應元年(762)五月 將信衣付囑無住 十九日坐化 壽七十九 師於每年十二月及正月 設道場說法 先引聲敎念佛 次說無憶無念莫妄三句 後世之淨衆宗 卽指無相之法系 其傳承及敎旨 見於宗密中華傳心地禪門師資承襲圖 [圓覺經大疏鈔三下 宋高僧傳十九 曆代法寶記 傳燈錄四 禪學思想史上(忽滑谷快天) 禪宗史姸究(宇井伯壽)]
●大師; 初果以上 乃至諸佛菩薩 堪爲衆生之師範 故稱大師 ▲瑜伽師地論八十二 能善敎誡聲聞弟子一切應作不應作事 故名大師 又能化導無量衆生 令苦寂滅 故名大師 又爲摧滅邪穢外道出現世間 故名大師
●白崖山; 在今河南省鄧縣西北
●相國; 戰國時代稱爲相邦 如秦國呂不韋 漢高祖劉邦卽位 爲避諱改爲相國 漢朝相國最初由蕭何擔任 後代對擔任宰相的官員 也敬稱相國 [百度百科]
●杜鴻漸; (?-769) 字子巽 唐代 濮州(山東鄄城北)人 金剛智三藏弟子 出撫巴蜀 遣使白崖山 請無住入城問法 後與杜黃裳同日拜相 大歷四年(769)罷官 同年臨終命朝服加僧伽梨 薙鬚髮 以沙門法葬 謚號文憲 [名公法喜志二 佛法金湯編八 宋高僧傳一 舊唐書一〇八 新唐書一二六]
●坤維; 指西南方
●節度使; 唐代開始設立的地方軍政長官 一種對邊疆進行有效防備 而設立的官位 屬官有行軍司馬 參謀掌書記等 但是在唐代安史之亂 卻將這個官位推到了末路 [百度百科]
●崔寧; 衛州(今衛輝市)人 本名旰 是唐代名將 喜縱橫之術 [百度百科]
●戎帥; 一軍隊的統帥 二指戎族軍隊的主將 此指一
●三學; 指戒學(持行戒規 防非止惡) 定學(集思靜慮 觀照佛理) 慧學(斷除疑惑 達到解脫) 是佛敎的全部內容
●碩德; 精于佛法的高僧
●戒定慧; 指戒律禪定與智慧 按翻譯名義集四 防非止惡爲戒 息慮靜緣爲定 破惡證眞爲慧 學此三法可達無上涅槃 故稱三學
●法句經; 二卷 三十九品七五二頌(今計有七五八頌) 印度法救撰集 三國吳之維祇難等譯 收集諸經中佛之自說偈編集而成 收於大正藏第四冊 吳大帝黃武三年(224) 維祇難齎來二十六品五百頌 後又增十三品 合爲三十九品七五二頌 巴利語之原本現存
●聲塵; 六塵之一 謂絲竹環珮之聲 及男女歌詠聲等 是名聲塵
●僚屬; 舊時稱下屬的官吏
●世諦; 對眞諦之稱 世者世間世俗 諦者事實又道理 世間之事實 又世俗人所知之道理 謂之世諦 又曰俗諦 世俗諦 覆俗諦等 ▲涅槃經十四 善男子 世諦者卽第一義諦 世尊 若爾者則無二諦 佛言 善男子 有善方便 隨順衆生 說有二諦
●俗諦; 隨順世俗而說生滅等有之諦理 卽指世間之事實與俗知之理 又作世俗諦 世諦 有諦 眞諦之對稱 ▲碧巖錄第一則 眞諦以明非有 俗諦以明非無
●性識; 天分 悟性 佛敎稱衆生的根性心識
●公暇; 公務閑暇之際 指休假
●心緣; 言起心而攀緣外境也 爲慮知心外事物之義
익주(益州) 보당사(保唐寺) 무주선사(無住禪師)
처음에 무상대사(無相大師)에게서 득법하고 이에 남양(南陽) 백애산(白崖山)에 거주하면서 연적(宴寂; 安息, 寂滅)에 오로지(專) 힘쓰며(務) 몇(累) 해를 경과했다. 학자가 점차 이르러 근청(勤請)하여 말지 않자 이로부터 수회(垂誨; 가르침을 내리다)했다. 비록 언교(言敎)를 광연(廣演)했으나 오직 무념(無念)을 종(宗)으로 삼았다. 당(唐) 상국(相國) 두홍점(杜鴻漸)이 나가서 곤유(坤維)를 무마(撫摩; 撫)하다가 스님의 명성을 듣고 한 번 첨례(瞻禮)하기를 사념했으며 사자(使者)를 보내어 산에 이르러 연청(延請)했다. 당시에 절도사(節度使) 최녕(崔寧)도 또한 제사(諸寺)의 승도(僧徒)에게 명령해 원출(遠出)하여 영인(迎引; 迎接하고 引導하다)하게 했다. 공혜사(空慧寺)에 이르렀고 때에 두공(杜公)과 융수(戎帥; 최녕을 가리킴)가 삼학(三學)의 석덕(碩德)을 불러 모두 사중(寺中)에 모여 치례(致禮)하여 마치자 공(公)이 문왈(問曰) 제자(弟子)가 듣건대 여금에 화상(和尙; 無相大師를 가리킴; 전등록에 金和尙으로 지었음)이 무억(無憶)ㆍ무념(無念)ㆍ막망(莫妄) 3구(句) 법문을 설했다 하니 그렇습니까. 사왈(師曰) 그렇습니다. 공왈(公曰) 이 3구는 이 하나입니까, 이 셋입니까. 사왈 무억(無憶)은 이름이 계(戒)며 무념(無念)은 이름이 정(定)이며 막망(莫妄)은 이름이 혜(慧)니 일심이 나지 않으면 계정혜(戒定慧)를 갖추며 하나도 아니고 셋도 아닙니다. 공왈 후구(後句)의 망자(妄字)는 이 심(心)을 좇는 망(忘)이 아니겠습니까. 가로되 녀(女)를 좇는 것이 옳습니다. 공왈 근거가 있습니까. 사왈 법구경(法句經)에 이르되 만약 정진한다는 마음을 일으키면/ 이는 망(妄; 허망)이며 정진이 아니다/ 만약 능히 마음이 허망하지 않으면/ 정진이 끝(涯)이 있지 않으리라. 공이 듣고서 의정(疑情)이 소탕되었다(掃蕩; 盪然). 공이 우문(又問) 스님도 도리어 3구(句)로써 시인(示人)하십니까. 사왈 초심(初心)의 학인은 도리어 식념(息念)하게 합니다. 식랑(識浪)을 징정(澄停)하면 물이 맑아져 그림자가 나타나 무념체(無念體)를 깨쳐 적멸이 현전(現前)하거니와 무념도 또한 세우지 않습니다. 우시(于時; 당시)에 정수(庭樹)에 까마귀가 울었다. 공이 묻되 스님은 듣습니까. 사왈 듣습니다. 까마귀가 떠나고 나서 또 묻되 스님은 듣습니까. 사왈 듣습니다. 공왈(公曰) 까마귀가 떠나 소리가 없거늘 어찌하여(云何) 듣는다고 말합니까. 스님이 이에 대중에게 보고(普告)하여 가르되 불세(佛世)는 만나기(値) 어렵고 정법은 듣기 어렵나니 각각 체청(諦聽)하라. 문(聞)은 문(聞)이 있지 않아 문성(聞性)에 상관되지 않는다. 본래 불생(不生)이거늘 어찌 일찍이 멸(滅)이 있으랴. 소리(聲)가 있을 때 이 성진(聲塵)이 자생(自生)했고 소리가 없을 때 이 성진이 자멸(自滅)했다. 이 문성(聞性)은 소리 따라 생하지 않고 소리 따라 멸하지 않는다. 이 문성(聞性)을 깨치면 곧 성진(聲塵)의 소전(所轉)을 면한다. 당지(當知)하라, 문(聞)은 생멸이 없으며 문은 거래가 없다. 공(公)과 요속(僚屬)ㆍ대중이 계수(稽首)했다. 우문(又問) 무엇을 이름해 제일의(第一義)라 하며 제일의란 것은 어디로 좇아 차제(次第)로 득입(得入)합니까. 사왈 제일의란 것은 차제가 있지 않고 또한 출입이 없다. 세제(世諦)엔 일체가 있지만 제일의엔 곧 없다. 제법(諸法)의 무성(無性)의 성(性)을 설명(說名)해 제일의라 한다. 불언(佛言)하시되 유법(有法)은 이름이 속제(俗諦)며 무성(無性)은 제일의다. 공왈(公曰) 스님의 개시(開示) 같은 것은 실로 불가사의합니다. 공이 또 가로되 제자는 성식(性識)이 미천(微淺)하지만 지난날 공가(公暇)로 인해 기신론장소(起信論章疏) 양권(兩卷)을 찬득(撰得)했는데 가히 불법에 칭합(稱合)함을 얻습니까. 사왈 무릇 장소(章疏)를 지음은 모두 식심(識心)을 사용하여 사량(思量)하고 분별하며 유위유작(有爲有作)하여 기심동념(起心動念)하여 그렇게(然) 가히 조성(造成)합니다. 논문에 의거하자면 이르되 당지(當知)하라, 일체법은 종본이래(從本以來)로 언설상(言說相)을 여의었고 명자상(名字相)을 여의었고 심연상(心緣相)을 여의었다. 필경 평등하여 변이(變異)가 있지 않고 오직 일심만 있는지라 고로 이름이 진여(眞如)다. 여금에 상공(相公)은 언설상(言說相)에 집착했고 명자상(名字相)에 집착했고 심연상(心緣相)에 집착했습니다. 이미 갖가지 상(相)에 집착했거늘 어떻게(云何) 이 불법이라 하겠습니까. 공이 일어나 작례(作禮)하고 가로되 제자가 또한 일찍이 여러 공봉대덕(供奉大德)에게 물었는데 모두 제자를 칭찬하며 불가사의라 했습니다. 당지(當知)하나니 피등(彼等)은 단지 인정(人情)을 따랐습니다(徇). 스님이 이제 이치를 좇아 해설하여 심지법(心地法)에 합하니 실로 이는 진리며 불가사의합니다. 공이 또 묻되 어찌해야(云何) 불생(不生)이며 어찌해야 불멸(不滅)이며 어찌해야 해탈을 얻습니까. 사왈 경계를 보고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 이름이 불생이며 불생하면 곧 불멸입니다. 이미 생멸이 없어 곧 전진(前塵)에 계박(繫縛)되는 바를 입지 않고 당처(當處)에서 해탈합니다. 불생을 이름해 무념이며 무념이 곧 무멸(無滅)이며 무념이 곧 무박(無縛)이며 무념이 곧 무탈(無脫; 해탈이 없음)입니다. 요점(要點)을 들어 말하자면 식심(識心)이 곧 이념(離念)이며 견성이 곧 해탈이니 식심과 견성을 여읜 밖에 다시 법문이 있어 무상보리(無上苦提)를 증득한다는 것은 옳은 곳이 있지 않습니다. 공왈(公曰) 무엇을 이름해 식심견성(識心見性)이라 합니까. 사왈 일체의 학도인(學道人)이 수념(隨念)하여 유랑(流浪)함은 대개 진심(眞心)을 알지 못하기 때문(爲)입니다. 진심이란 것은 사념이 생해도 또한 생을 좇지(順) 않고 사념이 멸해도 또한 적(寂; 적멸)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불래불거(不來不去)하고 부정불란(不定不亂)하고 불취불사(不取不捨)하고 불침불부(不沈不浮)하고 무위무상(無爲無相)이니 활발발(活鱍鱍)하여 평상(平常)의 자재(自在)입니다. 이 마음의 체는 필경 불가득이며 가히 지각(知覺)이 없으며 눈에 닿는 대로(觸目) 모두 여(如)라서 견성이 아님이 없습니다. 공과 대중이 작례하고 칭찬하고 용약(踊躍)하며 떠났다. 스님이 후에 보당사(保唐寺)에 거주하다가 마쳤다.
●益州; 사천성 수도. 성도평야 남동에 위치하며 원오극근의 도량 소각사가 있음. 석씨계고략3에 이르되 익주는 서천(西川) 성도부(成都府)다.
●無相; (684-762) 신라국승. 속성은 김이며 세칭이 김화상(金和上)ㆍ동해대사(東海大師). 본래 이 신라의 왕족이었음. 신라의 군남사(群南寺)에서 출가하고 수계한 후 개원 16년(728) 입당사(入唐使)를 따라 항해하여 중화에 이르렀고 현종을 알현하고 선정사에 거주했음. 오래지 않아 촉에 들어가 자주(지금의 사천 자중) 덕순사에 이르러 처적(處寂)을 사사하려 했음. 때에 처적이 병으로 인해 인견(引見;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불러 봄)을 얻지 못했음. 그러나 무상이 한 손가락을 태워 공양하자 비로소 3년 동안 유지(留止; 머묾)함을 얻었음. 24년 처적이 사람을 보내 무상을 불러 지선(智詵)으로부터 전수한 바의 달마의(達磨衣)를 부촉했음. 드디어 산중에서 은거하며 두타행을 닦았음. 후에 요청에 응해 선법을 열고 성도부(成都府) 정중사(淨衆寺)에 주(住)하면서 화도(化導)하기 20년이었음. 천보 말년 현종이 촉에 들어가 일찍이 그를 불러 상견했으며 예석(禮錫; 예물로 주다)이 풍륭(豐隆)했음. 보응 원년(762) 5월 신의(信衣)를 가져다가 무주(無住)에게 부촉하고 19일 좌화(坐化)했음. 나이 79. 스님은 매년 12월 및 정월에 도량을 시설하고 설법했는데 먼저 인성(引聲; 소리를 길게 끌면서 늘임)하여 염불하게 하고는 다음으론 무억(無憶)ㆍ무념(無念)ㆍ막망(莫妄) 3구를 설했음. 후세의 정중종(淨衆宗)은 곧 무상(無相)의 법계(法系)를 가리켰음. 그의 전승(傳承) 및 교지(敎旨)는 종밀(宗密)의 중화전심지선문사자승습도(中華傳心地禪門師資承襲圖)에 보임 [원각경대소초3하. 송고승전19. 역대법보기. 전등록4. 선학사상사상(忽滑谷快天; 누카리아 카이텐). 선종사연구(宇井伯壽; 우이하쿠쥬)].
●大師; 초과(初果) 이상 내지 제불보살은 가히 중생의 사범이 되는지라 고로 명칭이 대사임. ▲유가사지론82. 능히 성문제자에게 일체 응작(應作)ㆍ불응작(不應作)의 일을 교계(敎誡)하는지라 고로 명칭이 대사(大師)다. 또 능히 무량한 중생을 화도(化導)하여 고(苦)를 적멸하게 하는지라 고로 명칭이 대사다. 또 삿되고 더러운 외도가 세간에 출현함을 최멸(摧滅)하는지라 고로 명칭이 대사다.
●白崖山; 지금의 하남성 등현(鄧縣) 서북에 있음.
●相國; 전국시대엔 일컬어 상방(相邦)이라 했음. 예컨대(如) 진나라 여불위를 한고조 유방(劉邦)이 즉위하자 휘(諱)를 피해 고쳐 상국(相國)이라 했음. 한조의 상국은 최초에 소하가 담임함으로 말미암았음. 후대에 재상을 담임한 관원에 대해 또한 경칭하여 상국이라 했음 [백도백과].
●杜鴻漸; (?-769) 자는 자손(子巽)이며 당대 복주(산동 견성 북) 사람. 금강지삼장의 제자임. 나가서 파촉(巴蜀)을 무마하고 백애산에 사자를 보내어 무주(無住)를 청해 입성(入城)하게 하고 법을 물었음. 후에 두황상과 같은 날에 재상에 제배(除拜)되었음. 대력 4년(769) 파관(罷官)되었음. 같은 해 임종에, 명령하여 조복(朝服)에 승가리를 더하고 수염과 머리를 깎고 사문법(沙門法)으로 장사 지내게 했음. 시호는 문헌 [명공법희지2. 불법금탕편8. 송고승전1. 구당서108. 신당서126].
●坤維; 서남방을 가리킴.
●節度使; 당대에 설립을 개시한 지방 군정장관(軍政長官). 일종의, 변강(邊疆; 변경)에 대해 유효한 방비를 진행하려고 설립한 관위(官位)임. 속관(屬官)에 행군사마ㆍ참모장서기 등이 있었음. 다만 이는 당대 안사지란(安史之亂)에 도리어 이 관위를 가져다 밀어버려서 말로에 이르렀음 [백도백과].
●崔寧; 위주(衛州; 지금의 衛輝市) 사람이며 본명은 간(旰). 이는 당대의 명장이며 종횡지술(縱橫之術)을 좋아했음 [백도백과].
●戎帥; 1. 군대의 통수(統帥). 2. 융족 군대의 주장(主將)을 가리킴. 여기에선 1을 가리킴.
●三學; 계학(戒學; 戒規를 持行하여 비행을 막고 악을 그침)ㆍ정학(定學; 靜慮를 集思하고 佛理를 관조함)ㆍ혜학(慧學; 의혹을 단제하고 해탈에 달도함)을 가리킴. 이는 불교의 전부의 내용임.
●碩德; 불법에 정통한 고승.
●戒定慧; 계율 선정과 지혜를 가리킴. 번역명의집4를 안험컨대 방비지악(防非止惡; 비리를 막고 악업을 그침)이 계가 되고 식려정연(息慮靜緣; 사려를 쉬고 사연을 고요히 함)이 정이 되고 파악증진(破惡證眞; 악을 깨뜨리고 진을 증험함)이 혜가 됨. 이 3법을 배우면 가히 위없는 열반에 도달하는지라 고로 명칭이 3학임.
●法句經; 2권. 39품 752송(여금에 합계 758송이 있음)임. 인도 법구(法救)가 찬집(撰集)했고 삼국 오(吳)의 유기난(維祇難) 등이 번역했음. 제경 중 불타의 자설게(自說偈)를 수집하여 편집해 이루었음. 대정장 제4책에 수록되었음. 오 대제 황무 3년(224) 유기난이 26품 5백 송을 싸 가지고 왔는데 후에 또 13품을 더하여 합계가 39품 752송이 되었음. 파리어(巴利語)의 원본이 현존함.
●聲塵; 6진의 하나. 이르자면 사죽(絲竹; 管絃)과 환패(環珮; 고리 모양의 패옥)의 소리 및 남녀의 가영(歌詠) 소리 등이니 이 이름이 성진임.
●僚屬; 구시(舊時)에 하속(下屬)의 관리를 일컬었음.
●世諦; 진제(眞諦)를 상대한 일컬음임. 세(世)란 것은 세간ㆍ세속이며 제(諦)란 것은 사실이며 또 도리임. 세간의 사실, 또 세속인이 아는 바의 도리를 세제라고 이르며 또 가로되 속제ㆍ세속제ㆍ부속제(覆俗諦) 등임. ▲열반경14. 선남자여, 세제(世諦)란 것은 곧 제일의제니라. 세존이시여, 만약 그러하다면 곧 2제(諦)가 없습니까. 불타가 말씀하시되 선남자여, 좋은 방편이 있어 중생을 수순(隨順)하므로 2제의 있음을 설한다.
●俗諦; 세속을 수순(隨順)하여 생멸 등 유(有)의 체리(諦理)를 설함. 곧 세간의 사실과 속지(俗知)의 이치를 가리킴. 또 세속제(世俗諦; 諦의 慣音이 제)ㆍ세제(世諦)ㆍ유제(有諦)로 지음. 진제(眞諦)의 대칭. ▲벽암록 제1칙. 진제(眞諦)는 비유(非有)를 밝히고 속제(俗諦)는 비무(非無)를 밝힌다.
●性識; 천분(天分; 天資). 오성(悟性). 불교에선 중생의 근성을 일컬어 심식이라 함.
●公暇; 공무(公務)가 한가(閑暇)할 즈음. 휴가(休假)를 가리킴.
●心緣; 말하자면 마음을 일으켜 외경(外境)을 반연(攀緣)함. 마음 밖의 사물을 여지(慮知)함의 뜻.
六祖大鑒禪師旁出法嗣第一世
西域崛多三藏者
天竺人也 於六祖言下契悟 後遊五臺 見一僧結庵靜坐 師問曰 孤坐奚爲 曰 觀靜 師曰 觀者何人 靜者何物 其僧作禮 問曰 此理何如 師曰汝何不自觀自靜 彼僧茫然 師曰 汝出誰門邪 曰 秀禪師 師曰 我西域異道最下種者不墮此見 兀然空坐 於道何益 其僧却問 師所師者何人 師曰 我師六祖 汝何不速往曹溪決其眞要 其僧卽往參六祖 六祖垂誨 與師符合 僧卽悟入 師後不知所終
●異道; 指信不同敎義的人 卽異敎徒
●兀然; 不動貌 又混沌無知 隨性自在的樣子
서역(西域) 굴다삼장(崛多三藏)이란 자는
천축 사람이다. 6조의 언하에 계오(契悟)했다. 후에 오대(五臺)를 유행(遊行)하다가 1승(僧)을 보매 결암(結庵)하고 정좌(靜坐)했다. 스님이 문왈(問曰) 고좌(孤坐)하여 무엇을 하느냐(奚爲). 가로되 관정(觀靜)합니다. 사왈(師曰) 관(觀)하는 자는 어떤 사람이며 정(靜)이란 것은 무슨 물건인가. 그 중이 작례(作禮)하고 문왈(問曰) 이 이치가 어떻습니까(何如). 사왈 너는 왜 자관자정(自觀自靜)하지 않느냐. 그 중이 망연(茫然)했다. 사왈 너는 누구의 문(門)에서 나왔느냐. 가로되 수선사(秀禪師; 神秀)입니다. 사왈 우리 서역에 이도(異道)의 가장 하종자(下種者)도 이런 견해에 떨어지지 않는다. 올연(兀然)히 공좌(空坐)한다면 도에 무슨 이익이겠는가. 그 중이 도리어 묻되 스님이 사사(師事)하는 바는 어떤 사람입니까. 사왈 나의 스승은 6조다. 너는 왜 속히 조계로 가서 진요(眞要)을 결택(決擇)하지 않느냐. 그 중이 곧 6조를 왕참(往參)하자 6조가 수회(垂誨)했고 스님과 더불어 부합(符合)한지라 중이 곧 오입(悟入)했다. 스님은 후에 마친 곳을 알지 못한다.
●異道; 같지 아니한 교의(敎義)를 믿는 사람을 가리킴이니 곧 이교도.
●兀然; 움직이지 않는 모양. 또 혼돈하여 앎이 없으며 성품 따라 자재한 양자(樣子; 形狀).
韶州法海禪師者
曲江人也 初見六祖 問曰 卽心卽佛 願垂指喻 祖曰 前念不生卽心 後念不滅卽佛 成一切相卽心 離一切相卽佛 吾若具說 窮劫不盡 聽吾偈曰 卽心名慧 卽佛乃定 定慧等持 意中淸淨 悟此法門 由汝習性 用本無生 雙脩是正 師信受 以偈贊曰 卽心元是佛 不悟而自屈 我知定慧因 雙脩離諸物
●窮劫; 無窮之劫 極言時間之遙遠
소주(韶州) 법해선사(法海禪師)란 자는
곡강(曲江) 사람이다. 6조를 초견(初見)하여 문왈(問曰) 즉심즉불(卽心卽佛)을 원컨대 지유(指諭; 指示하고 曉諭하다)를 내리십시오(垂). 조왈(祖曰) 전념(前念)이 불생(不生)함이 곧 심(心)이며 후념(後念)이 불멸(不滅)함이 곧 불(佛)이며 일체상(一切相)을 이룸이 곧 심이며 일체상을 여읨이 곧 불이다. 내가 만약 갖추어 설한다면 궁겁(窮劫)토록 다하지 않는다. 오게(吾偈)를 들어라, 가로되 즉심(卽心)은 이름이 혜(慧)며/ 즉불(卽佛)은 곧 정(定)이다/ 정혜(定慧)를 등지(等持; 평등히 維持)해야/ 의중(意中)이 청정하다/ 이 법문(法門)을 깨침은/ 너의 습성(習性)을 말미암는다/ 용(用)은 본래 무생(無生)이니/ 쌍수(雙脩)해야 이 정(正)이다. 스님이 신수(信受)하고 게로써 찬왈(讚曰) 곧 마음(卽心)이 원래 이 부처니/ 불오(不悟)하면 스스로 굴복한다/ 내가 정혜(定慧)의 인(因)을 알았나니/ 쌍수(雙修)해야 제물(諸物)을 여읜다.
●窮劫; 무궁한 겁. 시간의 요원함을 극단적으로 말함.
吉州志誠禪師者
本州太和人也 初參秀禪師 後因兩宗盛化 秀之徒衆往往譏南宗曰 能大師不識一字 有何所長 秀曰 他得無師之智 深悟上乘 吾不如也 且吾師五祖親付衣法 豈徒然哉 吾所恨不能遠去親近 虛受國恩 汝等諸人無滯於此 可往曹谿質疑 他日回 當爲吾說 師聞此語 禮辭至韶陽 隨衆參請 不言來處 時六祖告衆曰 今有盜法之人 潛在此會 師出禮拜 具陳其事 祖曰 汝師若爲示衆 師曰 甞指誨大衆 令住心觀靜 長坐不臥 祖曰 住心觀靜 是病非禪 長坐拘身 於理何益 聽吾偈曰 生來坐不臥 死去臥不坐 一具臭骨頭 何爲立功過 師曰 未審和尙以何法誨人 祖曰 吾若言有法與人 卽爲誑汝 但且隨方解縛 假名三昧 聽吾偈曰 心地無非自性戒 心地無癡自性慧 心地無亂自性定 不增不減自金剛 身去身來本三昧 師聞偈悔謝 卽誓依歸 乃呈偈曰 五蘊幻身 幻何究竟 回趣眞如 法還不淨
●上乘; 又云上衍 大乘之異名 ▲世親攝論一 如是三藏下乘上乘有差別故則成二藏 一聲聞藏 二菩薩藏
●臭骨頭; 一指骰子 二指肉體 此指二
●功過; 功績與過錯
길주(吉州) 지성선사(志誠禪師)란 자는
본주(本州; 吉州를 가리킴) 태화(太和) 사람이다. 신수선사(神秀禪師)를 초참(初參)했다. 후에 양종(兩宗; 남북 양종)이 성화(盛化)함으로 인해 신수의 도중(徒衆)이 왕왕(往往) 남종(南宗)을 비웃으며(譏) 가로되 능대사(能大師)는 1자(字)도 알지 못하거늘 무슨 나은(長) 바가 있겠는가. 신수가 가로되 그는 무사지지(無師之智)를 얻었고 깊이 상승(上乘)을 깨달았으며 나는 같지 못하다. 또 오사(吾師) 5조가 친히 의법(衣法)을 부촉했거늘 어찌 도연(徒然)하겠는가. 내가 한(恨)하는 바는 능히 멀리 가서 친근(親近)하지 못하고 헛되이 국은(國恩)을 받음이다. 너희 등 제인(諸人)은 여기에 체류(滯留)하지 말고 가히 조계로 가서 질의(質疑)하라. 다른 날 돌아오거든(回) 마땅히 나를 위해 설하라. 스님이 이 말을 듣자 예사(禮辭)하고 소양(韶陽)에 이르러 대중 따라 참청(參請)하되 내처(來處)를 말하지 않았다. 때에 6조가 고중(告衆)하여 가로되 지금 도법지인(盜法之人)이 있어 몰래 차회(此會)에 있다. 스님이 나가서 예배하고 그 일을 갖추어 진술했다. 조왈(祖曰) 너의 스승은 어떻게(若爲) 시중(示衆)하느냐. 사왈(師曰) 늘 대중에게 지회(指誨; 指導하며 敎誨)하되 주심(住心)하여 관정(觀靜)하고 장좌불와(長坐不臥)하게 합니다. 조왈(祖曰) 주심하여 관정함은 이 병(病)이며 선(禪)이 아니다. 장좌(長坐)함은 몸을 구속하거늘 이치에 무슨 이익이리오. 나의 게를 들어라, 가로되 살아서는 앉기만 하고 눕지 못하더니/ 죽어서는 눕기만 하고 앉지 못하네/ 원래 이 냄새나는 골두(臭骨頭; 육체)이거늘/ 무엇을 위해 공과(功過)를 세우리오. 사왈 미심하오니 화상은 무슨 법으로써 사람을 가르치십니까(誨). 조왈(祖曰) 내가 만약 말하되 법이 있어 사람에게 준다 하면 곧 너희를 속임(誑)이 된다. 단차(但且; 단지) 방편 따라 해박(解縛)하나니 가명(假名)이 삼매(三昧)다. 나의 게를 들어라, 가로되 심지(心地)에 그름이 없음이 자성의 계(戒)며/ 심지에 어리석음이 없음이 자성의 혜(慧)며/ 심지에 어지러움이 없음이 자성의 정(定)이며/ 부증불퇴(不增不退)가 저절로 금강(金剛)이며/ 신거신래(身去身來)가 본래의 삼매다. 스님이 문게(聞偈)하고 회사(悔謝; 회개하며 謝過)했다. 곧 의귀(依歸)를 맹서하고 이에 1게를 보여(呈) 이르되 5온(蘊)의 환신(幻身)이거늘/ 환(幻)이 어찌 구경(究竟)이겠는가/ 진여(眞如)로 회취(迴趣)하더라도/ 법은 도리어 부정(不淨)하다.
●上乘; 또 이르되 상연(上衍)이니 대승의 다른 이름. ▲세친 섭론1. 이와 같이 3장(藏)의 하승(下乘)과 상승(上乘)에 차별이 있는 고로 곧 2장을 이루나니 1은 성문장이며 2는 보살장이다.
●臭骨頭; 1. 투자(骰子; 주사위)를 가리킴. 2. 육체를 가리킴. 여기에선 2를 가리킴.
●功過; 공적(功績)과 과착(過錯).
匾擔山曉了禪師者
傳記不載 唯北宗門人忽雷澄禪師撰塔碑盛行于世 其略曰 師住匾擔山 號曉了 六祖之嫡嗣也 師得無心之心 了無相之相 無相者森羅眩目 無心者分別熾然 絕一言一響 響莫可傳 傳之行矣 言莫可窮 窮之非矣 師得無無之無 不無於無也 吾今以有有之有 不有於有也 不有之有 去來非增 不無之無 涅槃非滅 嗚呼 師住世兮曹谿明 師寂滅兮法舟傾 師譚無說兮寰宇盈 師示迷徒兮了義乘 匾擔山色垂茲色 空谷猶留曉了名
●嫡嗣; 正宗正統的法嗣 嫡 指正宗正統
●嗚呼; 祖庭事苑五 西漢注 嗚呼 或作於戲 或作烏虛 或烏呼者 義皆同 蓋嘆聲也 俗之讀者 隨字而別文 曲爲解釋 云有吉凶善惡之殊 是不通其大旨也 義例具詩及尙書 不可一一徧擧之
●寰宇; 寰內 天下 全世界
편담산(匾擔山) 효료선사(曉了禪師)란 자는
전기(傳記)가 실리지 않았다. 오직 북종(北宗)의 문인(門人) 홀뢰징(忽雷澄) 선사가 찬(撰)한 탑비(塔碑)가 세상에 성행한다. 그것을 약왈(略曰) 스님은 편담산에 거주했고 법호(法號)가 효료(曉了)며 6조의 적사(嫡嗣)다. 스님은 무심(無心)의 심(心)을 얻었고 무상(無相)의 상(相)을 깨쳤다(了). 무상(無相)이란 것은 삼라(森羅)가 현목(眩目; 눈이 부심)하고 무심(無心)이란 것은 분별이 치연(熾然)하다. 1언1향(一言一響)이 단절되었다. 향(響)은 가히 전하지 못하나니 이를 전하면 행함이며 언(言)은 가히 궁구하지 못하나니 이를 궁구하면 그르다(非). 스님은 무무(無無)의 무(無)를 얻었으니 무가 없지 않고 나는 이제 유유(有有)의 유(有)를 쓰나니(以) 유에 있지 않다. 불유(不有)의 유(有)라 거래하여도 증가하지 않고 불무(不無)의 무(無)라 열반하여도 멸하지 않는다. 오호(嗚呼)라 스님이 주세(住世)하매 조계가 밝더니 스님이 적멸하매 법주(法舟)가 기울었다. 스님의 담설(談說; 譚)은 무설(無說)이니 환우(寰宇)에 가득하고 스님이 미도(迷徒)에게 보임은 요의(了義)의 승(乘)이다. 편담(匾擔)의 산색이 이 색을 드리우고 공곡(空谷)에 아직(猶) 효료(曉了)의 이름이 머문다(留).
●嫡嗣; 정종정통(正宗正統)의 법사(法嗣). 적(嫡)은 정종정통을 가리킴.
●嗚呼; 조정사원5. 서한주(西漢注) 오호(嗚呼) 혹은 오희(於戲; 於는 탄식할 오)로 지으며 혹은 오허(烏虛) 혹은 오호(烏呼)로 짓는 것은 뜻이 다 같다. 대개 탄식하는 소리다. 세속에서 읽는 자가 글자를 따라 글을 구별하여 자세히 해석해 이르기를 길흉과 선악의 다름이 있다 함은 이는 그 대지(大旨)를 통달하지 못했음이다. 의례(義例)는 시(詩)와 및 상서에 구비했거니와 가히 낱낱이 그것을 두루 들지 못한다.
●寰宇; 환내(寰內). 천하. 전세계.
洪州法達禪師者
洪州豐城人也 七歲出家 誦法華經 進具之後 禮拜六祖 頭不至地 祖訶曰 禮不投地 何如不禮 汝心中必有一物 蘊習何事邪 師曰 念法華經已及三千部 祖曰 汝若念至萬部 得其經意 不以爲勝 則與吾偕行 汝今負此事業 都不知過 聽吾偈曰 禮本折慢幢 頭奚不至地 有我罪卽生 亡功福無比 祖又曰 汝名甚麽 對曰 名法達 祖曰 汝名法達 何曾達法 復說偈曰 汝今名法達 勤誦未休歇 空誦但循聲 明心號菩薩 汝今有緣故 吾今爲汝說 但信佛無言 蓮華從口發 師聞偈悔過曰 而今而後 當謙恭一切 惟願和尙大慈 略說經中義理 祖曰 汝念此經 以何爲宗 師曰 學人愚鈍 從來但依文誦念 豈知宗趣 祖曰 汝試爲吾念一徧 吾當爲汝解說 師卽高聲念經 至方便品 祖曰 止 此經元來以因緣出世爲宗 縱說多種譬喻 亦無越於此 何者因緣 唯一大事 一大事卽佛知見也 汝愼勿錯解經意 見他道開示悟入 自是佛之知見 我輩無分 若作此解 乃是謗經毀佛也 彼旣是佛 已具知見 何用更開 汝今當信 佛知見者 只汝自心 更無別體 葢爲一切衆生自蔽光明 貪愛塵境 外緣內擾 甘受驅馳 便勞他從三昧起 種種苦口 勸令寢息 莫向外求 與佛無二 故云開佛知見 汝但勞勞執念 謂爲功課者 何異氂牛愛尾也 師曰 若然者但得解義 不勞誦經邪 祖曰 經有何過 豈障汝念 只爲迷悟在人 損益由汝 聽吾偈曰 心迷法華轉 心悟轉法華 誦久不明己 與義作讐家 無念念卽正 有念念成邪 有無俱不計 長御白牛車 師聞偈再啓曰 經云諸大聲聞 乃至菩薩 皆盡思度量 尙不能測於佛智 今令凡夫但悟自心 便名佛之知見 自非上根 未免疑謗 又經說三車 大牛之車與白牛車如何區別 願和尙再垂宣說 祖曰 經意分明 汝自迷背 諸三乘人不能測佛智者 患在度量也 饒伊盡思共推 轉加懸遠 佛本爲凡夫說 不爲佛說 此理若不肯信者 從他退席 殊不知坐却白牛車 更於門外覔三車 況經文明向汝道 無二亦無三 汝何不省 三車是假 爲昔時故 一乘是實 爲今時故 只敎你去假歸實 歸實之後 實亦無名 應知所有珍財 盡屬於汝 由汝受用 更不作父想 亦不作子想 亦無用想 是名持法華經 從劫至劫 手不釋卷 從晝至夜 無不念時也 師旣蒙啓發 踊躍歡喜 以偈贊曰 經誦三千部 曹谿一句亡 未明出世旨 寧歇累生狂 羊鹿牛權設 初中後善揚 誰知火宅內 元是法中王 祖曰 汝今後方可爲念經僧也 師從此領旨 亦不輟誦持
●洪州; 江西南昌縣之通稱 隋初稱洪州 煬帝改豫章郡 唐代復名洪州 五代稱南昌縣 宋代名新建縣
●法華經; 妙法蓮華經 七卷或八卷 略稱妙法華經 法華經 漢譯妙法蓮華經有六種 現存者三種 西晉竺法護譯正法華經十卷二十七品(286) 後秦鳩摩羅什譯妙法蓮華經八卷二十八品(406) 隋闍那崛多與達磨笈多譯添品妙法蓮華經七卷二十七品(601)
●義理; 言論或文章的內容和道理
●宗趣; 宗謂宗旨 又修行之要徑也 趣者 趣向 歸趣也
●苦口; 反復懇切地說
●勞勞; 勞頓
●功課; 僧家修行的課目 課業
●白牛車; 比喩大乘敎法 微妙禪法 按法華經譬喩品中 有羊車 鹿車 和牛車之喩 以牛車最爲上 爲菩薩乘坐 故有此語
홍주(洪州) 법달선사(法達禪師)란 자는
홍주(洪州) 풍성(豐城)사람이다. 7세에 출가했고 법화경(法華經)을 외웠다(誦). 진구(進具)한 후에 6조에게 예배하는데 머리가 땅에 이르지 않았다. 6조가 꾸짖으며 가로되 예배하면서 투지(投地)하지 않는다면 어찌 예배하지 않음만 같으랴. 너의 심중에 반드시 1물(物)이 있으리니 어떤 일을 온습(蘊習; 쌓고 익히다)했느냐. 사왈(師曰) 법화경을 외워(念) 이미 3천 부(部)에 이르렀습니다. 조왈(祖曰) 네가 만약 외워 만 부에 이르고 그 경의(經意)를 얻었으되 수승(殊勝)함으로 삼지 않는다면 곧 나와 더불어 함께 행하리라. 네가 이제 이 사업(事業)을 지고도(負) 도무지 허물을 알지 못하니 나의 게를 들어라, 가로되 예배는 본래 만당(慢幢)을 꺾음이거늘/ 머리가 어찌하여 땅에 이르지 않느냐/ 아(我)가 있으면 죄가 곧 생겨나고/ 공(功)을 없애야(亡) 복이 무비(無比)니라. 6조가 또 가로되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甚麽). 대답해 가로되 이름이 법달(法達)입니다. 조왈(祖曰) 너의 이름이 법달(法達)이지만 어찌 일찍이 달법(達法)했겠는가. 다시 게를 설해 가로되 너의 지금 이름이 법달이지만/ 부지런히 외워도(誦) 휴헐(休歇)하지 못했다/ 공연히 외우기만 하면 단지 소리를 좇음이며(循)/ 마음을 밝혀야 호가 보살이다/ 네가 이제 인연이 있는 연고로/ 내가 이제 너를 위해 설하겠다/ 단지 부처가 말씀이 없는 줄 믿으면/ 연화(蓮華)가 입으로 좇아 발생하리라. 스님이 게를 듣자 회과(悔過)하고 가로되 이금(而今; 如今) 이후(而後; 以後)에 마땅히 일체에게 겸공(謙恭; 謙遜히 공경)하겠습니다. 오직 원컨대 화상은 대자(大慈)로 경중의 의리(義理)를 약설(略說)하십시오. 조왈(祖曰) 네가 이 경을 외우거니와(念) 무엇으로써 종(宗)을 삼느냐. 사왈 학인은 우둔(愚鈍)하여 종래(從來)로 단지 의문(依文)하여 송념(誦念)하거늘 어찌 종취(宗趣)를 알겠습니까. 조왈(祖曰) 네가 시험 삼아 나를 위해 1편(徧; 回. 次) 외워라. 내가 마땅히 너를 위해 해설하겠다. 스님이 곧 고성(高聲)으로 경을 외웠다(念). 방편품(方便品)에 이르자 조왈 그쳐라(止), 이 경은 원래 인연(因緣)과 출세(出世)를 종(宗)으로 삼는다. 비록(縱) 여러 가지의 비유를 설하더라도 또한 이것을 초월함이 없다. 무엇이(何者) 인연인가 하면 오직 일대사(一大事)니 일대사란 불(佛)의 지견(知見)이다. 너는 삼가 경의(經意)를 착해(錯解)하지 말아라. 그(他; 佛)가 말하되 개시오입(開示悟入)이라 함을 보고 스스로 이 불(佛)의 지견인지라 아배(我輩)는 분한(分限)이 없다 하느냐, 만약 이런 견해를 짓는다면 곧 이 방경훼불(謗經毀佛)함이다. 그가 이미 이 불(佛)이라서 이미 지견을 갖추었거늘 어찌 다시 엶을 쓰겠는가. 네가 이제 마땅히 믿을지니 불의 지견이란 것은 다만 너의 자심(自心)이며 다시 다른 체(體)가 없다. 대개 일체중생이 스스로 광명(光明)을 차폐(遮蔽)하여 진경(塵境; 六塵 경계)을 탐애(貪愛)하고 외연(外緣)과 내요(內擾)로 구치(驅馳)를 감수(甘受)하는지라 바로(便) 그(他; 세존)를 노고롭게 하여 삼매(三昧)로 좇아 일어나 갖가지 고구(苦口)로 권해 침식(寢息; 停息)하여 밖을 향해 구하지 말게 했으며 부처와 더불어 둘이 아닌지라 고로 이르되 불의 지견을 연다 하였다. 네가 단지 노로(勞勞)하면서 집념(執念)하며 이르기를 공과(功課)라 한다면 이우(犛牛; 검은 소)가 꼬리를 사랑함과 어찌 다르겠는가. 사왈 만약 그러하다면 단지 해의(解義)함을 얻고 노고롭게 송경(誦經)하지 말아야 합니까. 조왈 경에 무슨 허물이 있으며 어찌 너의 외움(念)을 장애하겠느냐. 다만 미오(迷悟)는 사람에게 있고 손익은 너를 말미암음이 되나니 나의 게를 들어라, 가로되 마음이 미(迷)하면 법화(法華)에 굴리고/ 마음이 깨달으면 법화를 굴린다/ 송경(誦經)을 오래 하면서 자기를 밝히지 못하면/ 뜻과 수가(讐家; 怨家)를 지으리라. 무념(無念)이면 염(念)이 곧 바르고/ 유념(有念)이면 염(念)이 삿됨을 이룬다/ 유무를 다 계탁(計度)하지 않아야/ 늘 백우거(白牛車)를 부린다(御). 스님이 게를 듣자 다시 사뢰어(再啓) 가로되 경운(經云) 모든 대성문(大聲聞) 내지 보살이 모두 다 사유하고 탁량(度量)해도 오히려 능히 불지(佛智)를 헤아리지 못한다 했거늘 이제 범부로 하여금 단지 자심(自心)을 깨닫게 하면서 바로(便) 이름이 불(佛)의 지견이라 하시니 스스로 상근(上根)이 아닐진대 의방(疑謗)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 경에 3거(車)를 설했으니 대우지거(大牛之車)와 백우거(白牛車)를 어떻게 구별합니까. 원컨대 화상이 선설(宣說)을 다시 내리십시오. 조왈 경의(經意)가 분명하거늘 네가 스스로 미배(迷背)한다. 모든 3승(三乘)의 사람이 불지(佛智)를 능히 헤아리지 못한다는 것은 우환(憂患)이 탁량(度量)에 있다. 가령(饒) 그들이 모두 사유하고 함께 추리(推理)한다 하더라도 더욱(轉) 현원(懸遠; 아득히 멂)만 더한다. 부처는 본래 범부를 위해 설하며 부처를 위해 설하지 않는다. 이 이치를 만약 긍신(肯信; 수긍해 믿음)하지 않는 자일진대 그로 좇아 퇴석(退席)하거니와 백우거(白牛車)에 좌각(坐却; 却은 조사)하고 다시 문밖에서 3거(車)를 찾는 줄 너무 알지 못한다. 하물며 경문에 명백하게 너를 향해 말하되 둘도 없고 또한 셋도 없다 하였거늘 네가 왜 성찰하지 못하느냐. 3거(車)는 이 가(假)니 석시(昔時)가 되는 연고며 1승(乘)은 이 실(實)이니 금시(今時)가 되는 연고이다. 다만 너로 하여금 가(假)를 제거하고 실(實)로 돌아가게 하고 실(實)로 돌아간 후엔 실(實)도 또한 이름이 없다. 응당 알지니 소유한 진보(珍財)가 모두 너에게 속하며 너로 말미암아 수용(受用)한다. 다시 부(父)라는 사상(思想)을 짓지 말고 또한 자(子)라는 사상을 짓지 말고 또한 용(用)이란 사상이 없어야 이 이름이 법화경을 수지(受持)함이다. 겁(劫)으로 좇아 겁에 이르도록 손에 경권(經卷)을 놓지(釋) 않으며 낮으로 좇아 밤에 이르도록 외우지(念) 않을 때가 없다. 스님이 이미 계발(啓發)을 받자(蒙) 용약(踊躍)하고 환희했고 게로써 찬탄해 가로되 경을 3천 부(部) 외웠으나/ 조계(曹谿; 혜능)의 1구에 망했다/ 출세(出世; 출세간)의 지취를 밝히지 못하면/ 어찌(寧) 누생(累生)의 광병(狂病)을 쉬겠는가(歇). 양(羊)ㆍ녹(鹿)ㆍ우(牛)는 권설(權設; 잠시 시설함)이며/ 초중후(初中後)에 잘 선양(宣揚)했다/ 누가 화택(火宅) 내에/ 원래 이 법중왕(法中王)인 줄 아느냐. 조왈 너는 금후(今後)로 바야흐로 가히 염경승(念經僧)이라 할 만하다. 스님이 이로 좇아 현지(玄旨)를 영회(領會)했고 또한 송지(誦持)를 그치지(輟) 않았다.
●洪州; 강서 남창현의 통칭. 수초(隋初)에 홍주로 일컬었고 양제가 예장군으로 고쳤음. 당대(唐代) 다시 홍주로 이름했고 오대(五代) 남창현이라 호칭했고 송대(宋代) 이름하여 신건현이라 했음.
●法華經; 묘법연화경이니 7권 혹은 8권. 약칭이 묘법화경ㆍ법화경. 한역(漢譯) 묘법연화경은 6종이 있으며 현존하는 것은 3종임. 서진(西晉) 축법호(竺法護)가 번역한 정법화경(正法華經) 10권 27품(286)과 후진(後秦)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번역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8권 28품(406)과 수(隋) 사나굴다(闍那崛多)와 달마급다(達磨笈多)가 번역한 첨품묘법연화경(添品妙法蓮華經) 7권 27품(601)임.
●義理; 언론 혹 문장의 내용과 도리.言論或文章的內容和道理
●宗趣; 종(宗)은 종지(宗旨)를 말함이며 또 수행의 요경(要徑)임. 취(趣)란 것은 취향이니 귀취(歸趣)임.
●苦口; 반복하며 간절히 설함.
●勞勞; 노돈(勞頓; 수고스럽게 애를 씀).
●功課; 승가의 수행의 과목(課目)ㆍ과업(課業).
●白牛車; 대승의 교법과 미묘한 선법에 비유함. 안험컨대 법화경 비유품 중에 양거(羊車) 녹거(鹿車)와 우거(牛車)의 비유가 있음. 우거로서 가장 상(上)으로 삼으며 보살이 승좌(乘坐)하기 때문에 고로 이 말이 있음.
壽州智通禪師者
安豐人也 初看楞伽經約千餘徧 而不會三身四智 禮拜六祖 求解其義 祖曰 三身者 淸淨法身 汝之性也 圓滿報身 汝之智也 千百億化身 汝之行也 若離本性 別說三身 卽名有身無智 若悟三身無有自性 卽名四智菩提 聽吾偈曰 自性具三身 發明成四智 不離見聞緣 超然登佛地 吾今爲汝說 諦信永無迷 莫學馳求者 終日說菩提 師曰 四智之義 可得聞乎 祖曰 旣會三身 便明四智 何更問邪 若離三身 別譚四智 此名有智無身也 卽此有智 還成無智 復說偈曰 大圓鏡智性淸淨 平等性智心無病 妙觀察智見非功 成所作智同圓鏡 五八六七果因轉 但用名言無實性 若於轉處不留情 繁興永處那伽定〈轉識爲智者 敎中云 轉前五識 爲成所作智 轉第六識 爲妙觀察智 轉第七識 爲平等性智 轉第八識 爲大圓鏡智 雖六七因中轉 五八果上轉 但轉其名而不轉其體也〉 師禮謝 以偈贊曰 三身元我體 四智本心明 身智融無礙 應物任隨形 起修皆妄動 守住匪眞精 妙旨因師曉 終亡汙染名
●諦信; 確信 虔誠地相信
●四智; 翻譯名義集五 佛地經明四智 一大圓鏡智者 如依圓鏡 衆像影現 如是依止如來智鏡 諸處境識衆像影現 二平等性智者 證得一切領受緣起 平等法性 圓滿成故 三妙觀察智者 住持一切陀羅尼門三摩地門 無礙辯才 說諸妙法故 四成所作智者 勤身化業 示現種種 摧伏諸伎引諸衆生 令入聖敎成解脫故 ▲祖庭事苑七 四智 前眼等五識是成所作智 第六意識是妙觀察智 第七末那是平等性智 第八阿賴耶識是大圓鏡智 在衆生時 智劣識强 但名爲識 當佛地時 智强識劣 但名爲智 六七因中轉 五八果上轉 所謂轉名而不轉其體也
●那伽; <梵> nāga 此云龍 象 無罪 不來 稱佛或阿羅漢爲摩訶那伽 喩其有大力用 又佛之禪定 稱爲那伽定 或那伽大定 ▲玄應音義二十三 那伽 有三義 一云龍 二云象 三云不來 孔雀經名佛爲那伽 由佛不更來生死故也 ▲大智度論三 摩訶那伽 摩訶言大 那名無 伽名罪 阿羅漢諸煩惱斷 以是故名大無罪 ▲俱舍論十三 有餘部說 諸佛世尊常在定故 心唯是善 無無記心 故契經說 那伽行在定 那伽住在定 那伽坐在定 那伽臥在定
수주(壽州) 지통선사(智通禪師)란 자는
안풍(安豐) 사람이다. 처음 릉가경(楞伽經)을 약 천여 편(徧; 回) 보았으나 삼신사지(三身四智)를 이회(理會)하지 못해 6조에게 예배하고 그 뜻을 해석함을 구했다. 조왈(祖曰) 3신(身)이란 것은 청정법신(淸淨法身)은 너의 성(性)이며 원만보산(圓滿報身)은 너의 지(智)며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은 너의 행(行)이다. 만약 본성(本性)을 여의고 달리 3신을 설하면 곧 이름이 유신무지(有身無智)며 만약 3신이 자성이 있지 않음을 깨달으면 곧 이름이 사지보리(四智菩提)다. 나의 게를 들어라, 가로되 자성이 3신(身)을 갖추었으니/ 발명(發明)하면 4지(智)를 이룬다/ 견문(見聞)의 인연을 여의지 않고/ 초연(超然)히 불지(佛地)에 오른다/ 내가 이제 너를 위해 설했으니/ 체신(諦信; 확신)하면 길이 미혹하지 않으리라/ 치구(馳求)하는 자의/ 종일 보리(菩提)를 설함을 배우지 말아라. 사왈(師曰) 4지(四智)의 뜻을 가히 득문(得聞)하겠습니까. 조왈(祖曰) 이미 3신(身)을 이회(理會)했다면 바로 4지를 밝히거늘 어찌 다시 묻느냐. 만약 3신을 여의고 달리 4지를 담설(談說; 譚)한다면 이 이름이 유지무신(有智無身)이니 곧 이 유지(有智)가 도리어 무지(無智)를 이룬다. 다시 게를 설해 가로되 대원경지(大圓鏡智)는 성(性)이 청정하고/ 평등성지(平等性智)는 심(心)이 무병(無病)이며/ 묘관찰지(妙觀察智)는 견(見)이 공(功)이 아니며/ 성소작지(成所作智)는 원경(圓鏡)과 같다/ 5, 8, 6, 7은 과(果)와 인(因)에 전(轉)하고/ 단지 명(名)을 쓰는 것은 실성(實性)이 없다/ 만약 전(轉)하는 곳에 정(情)을 머물지 않는다면/ 번흥(繁興)하여 길이 나가정(那伽定)에 거처하리라〈식(識)을 전(轉)하여 지(智)가 된다는 것은 교중(敎中)에 이르되 전5식(前五識)을 전(轉)하여 성소작지(成所作智)가 되고 제6식을 전하여 묘관찰지(妙觀察智)가 되고 제7식을 전하여 평등성지(平等性智)가 되고 제8식을 전하여 대원경지(大圓鏡智)가 된다. 비록 6, 7은 인중(因中)에서 전하고 5, 8은 과상(果上)에서 전하지만 단지 그 명(名)만 전하고 그 체(體)는 전하지 않는다〉. 스님이 예사(禮謝)하고 게로써 찬왈(贊曰) 3신(身)은 원래 나의 체(體)며/ 4지(智)는 본래 심(心)의 명(明)이다/ 신(身)과 지(智)가 녹아 무애(無礙)하나니/ 응물(應物)하여 마음대로 형상(形相)을 따른다/ 닦음을 일으키면 다 허망한 동작이며/ 머묾을 지키면 참다운 정진(精進)이 아니다/ 묘지(妙旨)를 스님으로 인해 깨달으니(曉)/ 마침내 오염(汙染)의 이름이 없다(亡).
●諦信; 확신이니 건성지(虔誠地)에서 상신(相信)함.
●四智; 번역명의집5. 불지경에 4지(智)를 밝혔다. 1. 대원경지(大圓鏡智)란 것은 원경(圓鏡)에 의해 중상(衆像)의 그림자가 나타남과 같나니 이와 같이 여래지경(如來智鏡)에 의지해 모든 곳의 경식(境識; 客觀的인 外境)의 중상(衆像)의 그림자가 나타난다. 2. 평등성지(平等性智)란 것은 일체의 영수(領受)하는 연기(緣起)를 증득하여 평등한 법성을 원만히 이루는 연고다. 3. 묘관찰지(妙觀察智)란 것은 일체의 다라니문과 삼마지문(三摩地門)에 주지(住持)하여 무애의 변재로 모든 묘법을 설하는 연고다. 4. 성소작지(成所作智)란 것은 정근하는 몸과 교화의 업으로 갖가지를 시현하고 제기(諸伎)를 최복(摧伏)하며 모든 중생을 인도하여 성교(聖敎)에 들게 해 해탈을 이루게 하는 연고다. ▲조정사원7. 4지(智) 전의 안 등 5식(眼識ㆍ耳識ㆍ鼻識ㆍ舌識ㆍ身識)은 이 성소작지며 제6 의식은 이 묘관찰지며 제7 말나(末那)는 이 평등성지며 제8 아뢰야식은 이 대원경지임. 중생에게 있을 때는 지(智)가 열등하고 식(識)이 강력하므로 단지 이름하여 식이지만 불지(佛地)에 당했을 때는 지가 강력하고 식이 열등하므로 단지 이름하여 지(智)임. 6, 7(제6 의식과 제7 말나식)은 인중(因中)에 전(轉)하고 5, 8(眼 등 5식과 제8 아뢰야식)은 과상(果上)에 전하나니 이른 바 명(名)은 전(轉)하지만 그 체(體)는 전하지 않음.
●那伽; <범> nāga. 여기에선 이르되 용ㆍ상(象; 코끼리)ㆍ무죄ㆍ불래(오지 않음)임. 부처나 혹 아라한을 일컬어 마하나가라 함. 그가 대력용(大力用)이 있음에 비유함. 또 부처의 선정을 일컬어 나가정 혹 나가대정이라 함. ▲현응음의23. 나가(那伽) 세 뜻이 있다. 1은 이르되 용이며 2는 이르되 상(코끼리)이며 3은 이르되 불래(不來; 오지 않음)다. 공작경에 부처를 이름하여 나가라 했으니 부처는 생사에 다시 오지 않기 때문의 연고이다. ▲대지도론3. 마하나가(摩訶那伽) 마하는 말하자면 대(大)며 나(那)는 이름이 무(無)며 가(伽)는 이름이 죄(罪)다. 아라한은 모든 번뇌가 끊어졌나니 이런 연고로써 이름이 대무죄(大無罪)다. ▲구사론13. 어떤 다른 부파에선 설하기를 제불세존은 늘 정(定)에 있는 고로 마음이 오직 이 선(善)이라 무기심(無記心)이 없다. 고로 계경에 설하기를 나가는 행(行)이 정(定)에 있고 나가는 주(住)가 정에 있고 나가는 좌(坐)가 정에 있고 나가는 와(臥)가 정에 있다.
江西志徹禪師
姓張氏 名行昌 少任俠 自南北分化 二宗主雖亡彼我 而徒侶競起愛憎 時北宗門人自立秀禪師爲第六祖 而忌大鑑傳衣爲天下所聞 然祖預知其事 卽置金十兩於方丈 時行昌受北宗門人之囑 懷刃入祖室 將欲加害 祖舒頸而就 行昌揮刃者三 都無所損 祖曰 正劒不邪 邪劒不正 只負汝金 不負汝命 行昌驚仆 久而方蘇 求哀悔過 卽願出家 祖遂與金曰 汝且去 恐徒衆翻害於汝 汝可他日易形而來 吾當攝受 行昌稟旨宵遁 投僧出家 具戒精進 一日憶祖之言 遠來禮覲 祖曰 吾久念於汝 汝來何晩 曰 昨蒙和尙捨罪 今雖出家苦行 終難報於深恩 其唯傳法度生乎 弟子甞覽涅槃經 未曉常無常義 乞和尙慈悲 略爲宣說 祖曰 無常者 卽佛性也 有常者 卽善惡一切諸法分別心也 曰 和尙所說 大違經文 祖曰 吾傳佛心印 安敢違於佛經 曰 經說佛性是常 和尙却言無常 善惡諸法乃至菩提心 皆是無常 和尙却言是常 此卽相違 令學人轉加疑惑 祖曰 涅槃經 吾昔者聽尼無盡藏讀誦一徧 便爲講說 無一字一義不合經文 乃至爲汝 終無二說 曰 學人識量淺昧 願和尙委曲開示 祖曰 汝知否佛性若常 更說甚麽善惡諸法 乃至窮劫 無有一人發菩提心者 故吾說無常 正是佛說眞常之道也 又一切諸法若無常者 卽物物皆有自性 容受生死 而眞常性有不徧之處 故吾說常者 正是佛說眞無常義也 佛比 爲凡夫外道執於邪常 諸二乘人於常計無常 共成八倒 故於涅槃了義敎中 破彼偏見而顯說眞常眞樂眞我眞淨 汝今依言背義 以斷滅無常及確定死常 而錯解佛之圓妙最後微言 縱覧千徧 有何所益 行昌忽如醉醒 乃說偈曰 因守無常心 佛演有常性 不知方便者 猶春池拾礫 我今不施功 佛性而見前 非師相授與 我亦無所得 祖曰 汝今徹也 宜名志徹 師禮謝而去
●任俠; 憑借權威勇力或財力等手段 扶助弱小 幫助他人
●方丈; 一丈四方之室 又作方丈室 丈室 卽禪寺中住持之居室或客殿 亦稱函丈 正堂 堂頭 印度之僧房多以方一丈爲制 維摩禪室亦依此制 遂有方一丈之說 轉而指住持之居室 今轉義爲禪林住持 或對師家之尊稱 通稱方丈 或方丈和尙 [維摩經文疏二十二 法苑珠林二十九 大唐西域求法高僧傳上慧輪傳] ▲祖庭事苑六 方丈 今以禪林正寢爲方丈 蓋取則毘耶離城維摩之室 以一丈之室 能容三萬二千師子之座 有不可思議之妙事故也 唐王玄策爲使西域 過其居 以手版縱橫量之 得十笏 因以爲名
●八倒; 八顚倒 凡夫二乘各有四倒 合爲八顚倒 宗鏡錄三十九 此四念處 破八顚倒 一不淨中作淨想 二苦中作樂想 三無常中作常想 四無我中作我想 此是外道凡夫四倒 又一淨中作不淨想 二樂中作苦想 三常中作無常想 四我中作無我想 此是二乘四倒 共成八倒 是以修四念處觀 破八顚倒
●了義敎; 完全顯了述盡佛法道理之敎 稱爲了義敎
강서(江西) 지철선사(志徹禪師)
성이 장씨(張氏)며 이름은 행창(行昌)이니 소년(少年)에 임협(任俠)이었다. 남북(南北)에서 분화(分化)함으로부터 두 종주(宗主)는 비록 피아(彼我)가 없었으나 도려(徒侶)가 애증(愛憎)을 경기(競起)했다. 때에 북종(北宗)의 문인(門人)들이 스스로 수선사(秀禪師; 神秀)를 세워 제6조로 삼았고 대감(大鑑; 6조의 시호)이 전의(傳衣)한 것이 천하에 알려진(聞) 바가 되었음을 시기(猜忌)하였다. 그러나 6조가 그 사실을 미리 알고 곧 금(金) 10량(兩)을 방장(方丈)에 안치했다. 때에 행창(行昌)이 북종(北宗) 문인(門人)의 부촉을 받고 칼을 품고 조실(祖室; 조사의 방)에 들어가 장차 가해(加害)하려고 했다. 6조가 목을 펴 나아갔다. 행창이 칼을 휘두른 게 세 번이었으나 모두 손상(損傷)되는 바가 없었다. 조왈(祖曰) 정검(正劍)은 삿되지 않고 사검(邪劍)은 바르지 않다. 다만 너에게 금을 빚졌고 너에게 목숨을 빚지지 않았다. 행창이 놀라 넘어졌다가(仆) 오래되어서야 바야흐로 깨어났고 애달프게 회과(悔過)를 구하고 곧 출가를 원했다. 6조가 드디어 금을 주며 가로되 너는 다만 가거라, 도중(徒衆)이 도리어 너를 해칠까 염려스럽다. 너는 가히 다른 날 역형(易形)하고 오너라, 내가 마땅히 섭수(攝受)하겠다. 행창이 의지(意旨)를 받고 밤에 달아났다. 투승(投僧; 승인에게 투신)하여 출가했고 구계(具戒)하고 정진(精進)했다. 어느 날 조사의 말씀을 추억(追憶)하고는 멀리서 와 예근(禮覲; 예배하고 뵘)했다. 조왈(祖曰) 내가 오래 너를 염려했다. 너의 옴이 어찌하여 늦었는가. 가로되 지난날 화상의 사죄(捨罪)를 입었고 지금(只今) 비록 출가하여 고행(苦行)하지만 마침내 심은(深恩)에 보답하기 어렵거늘 그 전법(傳法)하고 도생(度生; 중생을 제도)함을 생각하겠습니까(唯). 제자가 늘(嘗; 常에 상당함) 열반경을 보는데 상(常)과 무상(無常)의 뜻을 깨닫지(曉) 못하겠습니다. 화상의 자비로 간략히 선설(宣說)하시기를 구걸합니다. 조왈 무상(無常)이란 것은 곧 불성(佛性)이며 유상(有常)이란 것은 곧 선악(善惡)과 일체의 제법(諸法)을 분별하는 마음이다. 가로되 화상이 설하는 바는 경문(經文)과 크게 위배됩니다. 조왈 나는 불타의 심인(心印)을 전수(傳受)했거늘 어찌(安) 감히 불경에 위배되겠는가. 가로되 경에 설하되 불성은 이 상(常)이라 했거늘 화상은 도리어 말씀하기를 무상(無常)이라 하고 선악의 제법 내지 보리심(菩提心)은 다 이 무상(無常)이라 했거늘 화상은 도리어 말씀하기를 이 상(常)이라 하시니 이것이 곧 서로 위배되어 학인으로 하여금 더욱(轉) 의혹을 더하게 합니다. 조왈 열반경은 내가 지난날(昔者) 니(尼) 무진장(無盡藏)이 1편(徧) 독송함을 들었고 바로(便) 강설했나니 1자1의(一字一義)도 경문에 적합하지 않음이 없었고 내지 너를 위함에도 마침내 2설(說)이 없다. 가로되 학인의 식량(識量)이 천매(淺昧)하니 원컨대 화상이 위곡(委曲)히 개시(開示)하십시오. 조왈 네가 아느냐, 불성이 만약 상(常)일진댄 다시 무슨 선악제법(善惡諸法)을 설할 것이며 내지(乃至) 궁겁(窮劫; 무궁한 겁)토록 한 사람도 보리심(菩提心)을 발할 자 있지 않으므로 고로 내가 설한 무상(無常)이 바로 이 불타가 설하신 진상(眞常)의 도(道)다. 또 일체제법(一切諸法)이 만약 무상(無常)한 것일진댄 곧 물건마다 모두 자성(自性)이 있어서 생사(生死)를 용수(容受)하므로 진상성(眞常性)이 두루하지 못하는 곳이 있으리니 고로 내가 설한 상(常)이란 것이 바로 이 불타가 설하신 참다운 무상(無常)의 뜻이다. 불타가 비교하시되 범부와 외도는 사상(邪常)에 집착하고 모든 2승(乘)의 사람은 상(常)에서 무상(無常)을 계탁(計度)하여 공(共)히 8도(八倒)를 이루는지라 고로 열반 요의교(了義敎) 중에서 그 편견(偏見)을 깨뜨리고 진상(眞常)ㆍ진락(眞樂)ㆍ진아(眞我)ㆍ진정(眞淨)을 현설(顯說)하였다. 너는 지금 의언(依言)하고 배의(背義)하여 단멸(斷滅), 무상(無常) 및 확정(確定)의 사상(死常)으로써 불타의 원묘(圓妙)한 최후의 미언(微言)을 착해(錯解)하니 비록(縱) 천편(千遍)을 열람하더라도 무슨 이익되는 바가 있겠느냐. 행창이 홀연히 취성(醉醒)함과 같았고 이에 게를 설해 가로되 무상심(無常心)을 수호(守護)하기 때문에(因)/ 불타가 유상성(有常性)을 설하셨다/ 방편을 알지 못하는 자는/ 춘지(春池)에서 자갈을 줍는 것과 같다/ 내가 이제 공(功)을 베풀지 않고도/ 불성이 현전(見前)한다/ 스님이 서로 수여(授與)하지 않으셨다면/ 나도 또한 소득이 없었으리라. 조왈 네가 이제 통했으니(徹) 의당(宜當) 이름이 지철(志徹)이다. 스님이 예사(禮謝)하고 떠났다.
●任俠; 권위, 용력(勇力) 혹 재력 등의 수단을 빙차(憑借)하여 약소(弱小)를 부조(扶助)하고 타인을 방조(幫助)함.
●方丈; 1장(丈)의 사방의 실(室)이니 또 방장실ㆍ장실로 지음. 곧 선사(禪寺) 중 주지의 거실 혹 객전(客殿). 또 명칭이 함장(函丈)ㆍ정당(正堂)ㆍ당두(堂頭). 인도의 승방은 다분히 사방 1장을 제도(制度)로 삼았으며 유마의 선실(禪室)도 또한 이 제도에 의했으니 드디어 사방 1장의 설이 있음. 전(轉)하여 주지의 거실을 가리키며 이제 전의(轉義)하여 선림의 주지가 됨. 혹 사가(師家)에 대한 존칭이니 통칭이 방장이며 혹 방장화상임 [유마경문소22. 법원주림29. 대당서역구법고승전상혜륜전]. ▲조정사원6. 방장(方丈) 여금에 선림(禪林; 禪寺)의 정침(正寢; 거처하는 곳이 아닌 주로 일을 보는 곳으로 쓰는 몸채의 방)을 방장으로 삼음은 대개 비야리성(毗耶離城)의 유마(維摩)의 방에서 궤칙(軌則)을 취했다. 1장(丈)의 실내에 능히 3만2천의 사자(師子)의 좌(座)를 용수(容受)했음은 불가사의의 묘사(妙事)가 있는 연고이다. 당나라의 왕현책(王玄策)이 서역에 사신(使臣)이 되어 그 거처를 지나다가 수판(手版; 笏을 일컬음. 手板)으로 종횡(縱橫)을 재었는데 십홀(十笏; 笏은 官員이 임금을 만날 때 朝服에 갖추어 손에 쥐던 물건. 길이 한 자쯤 너비 두 치쯤이며 얄팍하고 길쭉히 생겼음)을 얻었으므로 인하여 이름으로 삼았다.
●八倒; 8전도(顚倒)니 범부와 2승(乘)이 각기 4도(倒)가 있어 합하면 8전도가 됨. ▲종경록39. 이 4념처(念處)는 8전도(顚倒)를 타파한다. 1. 부정(不淨) 중에서 정상(淨想)을 지음. 2. 고(苦) 중에서 낙상(樂想)을 지음. 3. 무상(無常) 중에서 상상(常想)을 지음. 4. 무아 중에서 아상(我想)을 지음. 이것은 이 외도와 범부의 4도(倒)다. 또 1. 정(淨) 중에 부정상(不淨想)을 지음. 2. 낙(樂) 중에 고상(苦想)을 지음. 3. 상(常) 중에 무상상(無常想)을 지음. 4. 아(我) 중에 무아상(無我想)을 지음. 이것은 이 2승(乘)의 4도(倒)다. 공히 8도(倒)를 이룬다. 이런 까닭으로 4념처관을 닦아서 8전도를 타파한다.
●了義敎; 완전히 현료(顯了)하게 불법의 도리를 서술하여 다하는 교를 일컬어 요의교(了義敎)라 함.
信州智常禪師者
本州貴谿人也 髫年出家 志求見性 一日參六祖 祖問 汝從何來 欲求何事 師曰 學人近禮大通和尙 蒙示見性成佛之義 未決狐疑 至吉州遇人指迷 令投和尙 伏願垂慈攝受 祖曰 彼有何言句 汝試擧看 吾與汝證明 師曰 初到彼三月 未蒙開示 以爲法切故 於中夜獨入方丈 禮拜哀請 大通乃曰 汝見虛空否 對曰 見 彼曰 汝見虛空有相貌否 對曰 虛空無形 有何相貌 彼曰 汝之本性猶如虛空 返觀自性 了無一物可見 是名正見 無一物可知 是名眞知 無有靑黃長短 但見本源淸淨 覺體圓明 卽名見性成佛 亦名極樂世界 亦名如來知見 學人雖聞此說 猶未決了 乞和尙示誨 令無凝滯 祖曰 彼師所說 猶存見知 故令汝未了 吾今示汝一偈曰 不見一法存無見 大似浮雲遮日面 不知一法守空知 還如太虛生閃電 此之知見瞥然興 錯認何曾解方便 汝當一念自知非 自己靈光常顯見 師聞偈已 心意豁然 乃述一偈曰 無端起知解 著相求菩提 情存一念悟 寧越昔時迷 自性覺源體 隨照枉遷流 不入祖師室 茫然趣兩頭
●信州; 今江西上饒市 廣輿記十二江西廣信府曰 唐宋曰信州
●極樂世界; 卽指阿彌陀佛之淨土 又稱極樂淨土 極樂國土 西方淨土 安養世界 安樂國 自此世間向西而去 經過十萬億佛土之彼方 卽爲極樂淨土 [無量壽經上 阿彌陀經疏(窺基) 無量壽經義疏(慧遠)]
●凝滯; 停留不動 拘泥
신주(信州) 지상선사(智常禪師)란 자는
본주(本州) 귀계(貴谿) 사람이다. 초년(髫年; 어린 나이. 髫는 다박머리)에 출가했고 의지(意志)가 견성(見性)을 구했다. 어느 날 6조에게 참례(參禮)하자 6조가 묻되 너는 어디로부터 왔으며 무슨 일을 구하려고 하느냐. 사왈(師曰) 학인(學人)이 최근에 대통화상(大通和尙)을 참례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의 뜻을 보임을 입었습니다만 호의(狐疑)를 결단(決斷)하지 못했습니다. 길주(吉州)에 이르러 사람을 만났는데 미혹을 가리키며 화상에게 투알(投謁; 投)하게 했습니다. 복원(伏願)컨대 자비를 내려 섭수(攝受)하십시오. 조왈(祖曰) 그가 무슨 언구가 있었는지 네가 시험 삼아 들어보아라(擧看). 내가 너에게 증명해 주겠다. 사왈(師曰) 처음 거기에 이르러 석 달 동안 개시(開示)를 입지(蒙) 못했습니다. 법을 위함히 간절한 연고로 중야(中夜)에 홀로 방장(方丈)에 들어가 예배하고 애청(哀請)하자 대통(大通)이 이에 가로되 너는 허공을 보느냐. 대답해 가로되 봅니다. 그가 가로되 네가 허공을 보매 상모(相貌)가 있느냐. 대답해 가로되 허공은 무형(無形)이거늘 무슨 상모가 있겠습니까. 그가 가로되 너의 본성은 마치 허공과 같다. 자성을 반관(返觀)한다면 마침내(了) 가히 볼 1물(物)도 없나니 이 이름이 정견(正見)이며 가히 알 1물도 없나니 이 이름이 진지(眞知)다. 청황장단(靑黃長短)이 있지 않고 단지 본원(本源)의 청정과 각체(覺體)의 원명(圓明)만 봄을 곧 이름해 견성성불이며 또한 이름이 극락세계(極樂世界)며 또한 이름이 여래지견(如來知見)이다. 학인이 비록 이 설을 들었지만 오히려 결료(決了; 決斷하여 明了)하지 못했으니 화상의 회시(誨示; 가르쳐 보임)하여 응체(凝滯)가 없게 하시기를 구걸합니다. 조왈 그 스님이 설한 바는 아직 견지(見知)를 둔지라 고로 너로 하여금 결료(決了)하지 못하게 했다. 내가 이제 너에게 1게를 보이겠다. 가로되 1법도 보지 않음은 무견(無見; 無라는 見)을 두나니/ 부운(浮雲)이 일면(日面)을 가림과 매우 흡사(大似)하다/ 1법도 알지 않음은 공지(空知; 空이란 知)를 지킴이니/ 도리어 태허(太虛; 하늘)에 섬전(閃電)이 발생함과 같다/ 이 지견(知見)을 별연(瞥然; 갑자기)히 일으키면/ 착인(錯認)이거늘 어찌 일찍이 방편을 알겠는가/ 네가 마땅히 일념에 스스로 그른 줄 안다면/ 자기의 영광(靈光)이 늘 현현(顯現)하리라. 스님이 게를 듣고 나서 심의(心意)가 활연(豁然)하여 이에 1게를 서술하여 가로되 무단(無端)히 지해(知解)를 일으켜/ 착상(著相)하며 보리(菩提)를 구했다/ 뜻(情)에 일념의 오(悟)를 둔다면/ 어찌(寧) 석시(昔時)의 미(迷)를 초월하겠는가/ 자성의 각원(覺源)의 체(體)는/ 비춤 따라 헛되이(枉) 천류(遷流)한다/ 조사실(祖師室)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망연(茫然)히 양두(兩頭)로 취향(趣向)했으리라.
●信州; 지금의 강서 상요시(上饒市). 광여기12 강서 광신부에 가로되 당ㆍ송에서 가로되 신주(信州)라 했다.
●極樂世界; 곧 아미타불의 정토를 가리킴. 또 명칭이 극락정토ㆍ극락국토ㆍ서방정토ㆍ안양세계ㆍ안락국. 이 세간으로부터 서방으로 향하여 가서 십만억 불토를 경과한 그 지방이 곧 극락정토가 됨 [무량수경상. 아미타경소(규기). 무량수경의소(혜원)].
●凝滯; 정류하여 움직이지 않음. 구니(拘泥; 구애. 구속).
廣州志道禪師者
南海人也 初參六祖問曰 學人自出家覧涅槃經僅十餘載 未明大意 願和尙垂誨 祖曰 汝何處未了 對曰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 於此疑惑 祖曰 汝作麽生疑 對曰 一切衆生皆有二身 謂色身法身也 色身無常 有生有滅 法身有常 無知無覺 經云生滅滅已 寂滅爲樂者 未審是何身寂滅 何身受樂 若色身者 色身滅時 四大分散 全是苦 苦不可言樂 若法身寂滅 卽同草木瓦石 誰當受樂 又法性是生滅之體 五蘊是生滅之用 一體五用 生滅是常 生則從體起用 滅則攝用歸體 若聽更生 卽有情之類不斷不滅 若不聽更生 卽永歸寂滅 同於無情之物 如是則一切諸法 被涅槃之所禁伏 尙不得生 何樂之有 祖曰 汝是釋子 何習外道斷常邪見 而議最上乘法 據汝所解 卽色身外 別有法身 離生滅求於寂滅 又推涅槃常樂 言有身受者 斯乃執吝生死 耽著世樂 汝今當知 佛爲一切迷人 認五蘊和合 爲自體相 分別一切法 爲外塵相 好生惡死 念念遷流 不知夢幻虛假 枉受輪迴 以常樂涅槃翻爲苦相 終日馳求 佛愍此故 乃示涅槃眞樂 刹那無有生相 刹那無有滅相 更無生滅可滅 是則寂滅見前 當見前之時 亦無見前之量 乃謂常樂 此樂無有受者 亦無不受者 豈有一體五用之名 何況更言涅槃禁伏諸法 令永不生 斯乃謗佛毀法 聽吾偈曰 無上大涅槃 圓明常寂照 凡愚謂之死 外道執爲斷 諸求二乘人 目以 爲無作 盡屬情所計 六十二見本 妄立虛假名 何爲眞實義 唯有過量人 通達無取捨 以知五蘊法 及以蘊中我 外現衆色象 一一音聲相 平等如夢幻 不起凡聖見 不作涅槃解 二邊三際斷 常應諸根用 而不起用想 分別一切法 不起分別想 劫火燒海底 風皷山相擊 眞常寂滅樂 涅槃相如是 吾今强言說 令汝捨邪見 汝勿隨言解 許汝知少分 師聞偈踊躍 作禮而退
●廣州; 廣東省西江流域 梁武帝時達磨大師初來上陸地 天寶(742-756)初名南海郡 乾元(758-760)初稱廣州
●斷常; 斷見與常見 外道所計 不出斷常二見 或執爲有 卽是常見 或執爲無 卽是斷見 於有見中及計一異 遂有四句 一執有法與有等性其體定一 二執有法與有等性其體定異 三執有法與有等性亦一亦異 四執有法與有等性非一非異 見成唯識論一
●六十二見; 指古代印度外道所執之六十二種錯誤見解 此有數種異說
●過量人; 指超越思量分別 不落途程 不歷階位的禪悟者
●三際; 指前際(過去) 今際(現在) 後際(未來)
●劫火; 又作劫盡火 劫燒 壞劫時所起之火災 於佛敎之世界觀中 謂世界之成立分爲成住壞空四劫 於壞劫之末必起火災水災風災 火災之時 天上出現七日輪 初禪天以下全爲劫火所燒 [長阿含二十一世記經三災品 中阿含二七日經 法華經五如來壽量品 俱舍論十二]
광주(廣州) 지도선사(志道禪師)란 자는
남해(南海) 사람이다. 처음 6조를 참알하여 물어 가로되 학인은 출가함으로부터 열반경을 열람하기 거의(僅) 10여 재(載)이지만 대의(大意)를 밝히지 못했으니 화상의 수회(垂誨)를 원합니다. 조왈(祖曰) 너는 어느 곳에서 밝히지 못했느냐. 대왈(對曰) 제행(諸行)은 무상(無常)하며/ 이 생멸법(生滅法)이니/ 생멸이 멸한 다음/ 적멸(寂滅)이 낙이 된다. 여기에서 의혹합니다. 조왈 네가 어떻게(作麽生) 의혹하느냐. 대왈(對曰) 일체중생은 모두 2신(身)이 있으니 이르자면 색신(色身)과 법신(法身)입니다. 색신은 무상(無常)하여 유생유멸(有生有滅)하고 법신(法身)은 유상(有常)하여 무지무각(無知無覺)합니다. 경운(經云) 생멸이 멸한 다음 적멸이 낙이 된다는 것은 미심(未審)하오니 이 어떤 신(身)이 적멸이며 어떤 신이 낙을 받습니까. 만약 색신이라 할진대 색신은 멸할 때 4대(四大)가 분산(分散)하여 전연(全然)히 이 고(苦)며 고를 가히 낙(樂)이라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법신이 적멸이라 한다면 곧 초목와석(草木瓦石)과 같거늘 무엇이(誰) 마땅히 낙을 받습니까. 또 법성(法性)은 이 생멸의 체(體)며 5온(蘊)은 이 생멸의 용(用)이니 1체(體)에 5용(用)하면서 생멸이 이 상(常)입니다. 생(生)은 곧 체(體)로 좇아 용(用)을 일으키고 멸(滅)은 곧 용을 거두어 체로 돌아갑니다. 만약 갱생(更生)을 청허(聽許; 聽)한다면 곧 유정지류(有情之類)가 부단불멸(不斷不滅)할 것이며 만약 갱생을 청허하지 않는다면 곧 영원히 적멸로 돌아가 무정지물(無情之物)과 같을 것입니다. 이와 같다면 곧 일체제법(一切諸法)이 열반의 금복(禁伏; 禁止하고 伏斷)하는 바를 입어 오히려 생(生)을 얻지 못하거늘 무슨 낙(樂)이 있겠습니까. 조왈 너는 이 석자(釋子)이면서 왜 외도(外道)의 단상(斷常)의 사견(邪見)을 익혀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의논하느냐. 너의 이해하는 바에 의거하자면 곧 색신 밖에 따로 법신이 있으며 생멸을 여의고 적멸을 구한다. 또 열반의 상락(常樂)을 추구(推究)하여 말하되 수용(受用)할 몸이 있다 하거니와 이는 곧 생사를 집린(執悋; 집착해 아끼다)하고 세락(世樂)에 탐착(耽著)함이다. 너는 이제 당지(當知)하라. 불타가 일체 미인(迷人)이 5온(蘊)의 화합을 인정하여 자체상(自體相)으로 삼고 일체법을 분별하여 외진상(外塵相)으로 삼고 호생오사(好生惡死)하면서 염념(念念)이 천류(遷流)하면서 몽환(夢幻)이며 허가(虛假)임을 알지 못하고 헛되이 윤회(輪迴)를 받고 상락(常樂)의 열반을 도리어 고상(苦相)으로 삼고 종일(終日) 치구(馳求)하기 때문에(爲) 불타가 이를 불쌍히 여긴 연고로 이에 열반의 진락(眞樂)을 보였다. 찰나(刹那)에도 생상(生相)이 있지 않고 찰나에도 멸상(滅相)이 있지 않고 다시 가히 멸할 생멸이 없나니 이것이 곧 적멸이 현전(見前)함이다. 현전함을 당한 때 또한 현전한다는 사량(思量)이 없나니 이에 상락(常樂)이라고 이른다. 이 낙은 수자(受者)가 있지 않고 또한 불수자(不受者)도 없거늘 어찌 1체5용(一體五用)의 이름이 있겠는가. 어찌 하물며 다시 말하되 열반이 제법을 금복(禁伏)하여 영원히 나지 않게 한다 하느냐. 이는 곧 방불훼법(謗佛毀法)이다. 나의 게를 들어라 가로되 위없는 대열반이/ 원명(圓明)하여 늘 적조(寂照)하거늘/ 범우(凡愚)는 이를 일러 사(死)라 하고/ 외도는 집착하여 단(斷; 斷滅)이라 한다/ 모든 2승(乘)을 구하는 사람은/ 명목(名目)해 무작이라 하나니/ 모두 정(情)의 소계(所計; 計謀하는 바)에 속하고/ 6십2견(六十二見)의 근본이다/ 허망하게 허가(虛假)의 이름을 세우니/ 어찌 진실한 뜻이라 하겠는가/ 오직 과량인(過量人)이 있어/ 통달하여 취사(取捨)가 없다/ 5온법(蘊法)과/ 및 온중(蘊中)의 아(我)를 알므로써/ 밖으로 뭇 색상(色象)과/ 하나하나의 음성상(音聲相)을 나타낸다/ 평등히 몽환(夢幻)과 같아서/ 범성(凡聖)이란 견해를 일으키지 않고/ 열반이란 이해를 짓지 않나니/ 2변(邊)과 3제(三際)가 끊긴다/ 늘 제근(諸根)에 응해 쓰되(用)/ 용(用)이란 상념(想念)을 일으키지 않고/ 일체법을 분별하되/ 분별하는 상념(想念)을 일으키지 않는다/ 겁화(劫火)가 해저를 태우고/ 바람이 두드려 산이 서로 부딪치나니/ 진상(眞常)의 적멸락이여/ 열반상(涅槃相)이 이와 같다/ 내가 이제 강경(强硬; 强)한 언설로/ 너로 하여금 사견(邪見)을 버리게 했으니/ 네가 말을 따라 이해를 내지 않으면/ 너에게 소분(少分) 안다고 허락하겠다. 스님이 게를 듣고 용약(踊躍)하며 작례(作禮)하고 물러났다.
●廣州; 광동성 서강 유역이니 양무제 시 달마대사가 처음 와서 상륙한 땅임. 천보(742-756) 초에 명칭이 남해군이었고 건원(758-760) 초에 광주로 일컬었음.
●斷常; 단견과 상견이니 외도가 헤아리는 바는 단ㆍ상 2견을 벗어나지 못함. 혹은 집착해 유(有)로 삼음은 곧 이 상견이며 혹 집착해 무(無)로 삼으면 곧 이 단견임. 유견(有見) 중에 일이(一異)를 헤아림에 이르는지라 드디어 4구가 있음. 1은 유법(有法)과 유(有) 등의 자성이 그 체가 꼭 일(一)이라고 집착함이며 2는 유법과 유 등의 자성이 그 체가 꼭 이(異)라고 집착함이며 3은 유법과 유 등의 자성이 역일역이(亦一亦異)라고 집착함이며 4는 유법과 유 등의 자성이 비일비이(非一非異)라고 집착함. 성유식론1을 보라.
●六十二見; 고대 인도의 외도들이 집착한 바의 62종의 착오의 견해를 가리킴. 여기에 몇 가지 이설이 있음.
●過量人; 사량과 분별을 초월하고 도정(途程)에 떨어지지 않고 계위(階位)를 겪지 않는 선오자(禪悟者)를 가리킴.
●三際; 전제(과거)ㆍ금제(현재)ㆍ후제(미래)를 가리킴.
●劫火; 또 겁진화(劫盡火)ㆍ겁소(劫燒)로 지음. 괴겁(壞劫) 시에 일어나는 바의 화재. 불교의 세계관 중에선 이르자면 세계의 성립을 성주괴공의 4겁으로 분리하며 괴겁의 말에 반드시 화재ㆍ수재ㆍ풍재를 일으킴. 화재의 때에 천상에서 7일륜이 출현하여 초선천 이하는 전부 겁화에 타는 바가 됨 [장아함21세기경삼재품. 중아함2칠일경. 법화경5여래수량품. 구사론12].
永嘉眞覺禪師
諱玄覺 本郡戴氏子 丱歲出家 徧探三藏 精天台止觀圓妙法門 於四威儀中 常冥禪觀 後因左谿朗禪師激勵 與東陽䇿禪師同詣曹溪 初到振錫 繞祖三匝 卓然而立 祖曰 夫沙門者 具三千威儀 八萬細行 大德自何方而來 生大我慢 師曰 生死事大 無常迅速 祖曰 何不體取無生了無速乎 師曰 體卽無生 了本無速 祖曰 如是如是 于時大衆無不愕然 師方具威儀參禮 須臾告辭 祖曰 返大速乎 師曰 本自非動 豈有速邪 祖曰 誰知非動 師曰 仁者自生分別 祖曰 汝甚得無生之意 師曰 無生豈有意邪 祖曰 無意誰當分別 師曰 分別亦非意 祖歎曰 善哉善哉 少留一宿 時謂一宿覺矣 師翌日下山 乃回溫州 學者輻湊 著證道歌一首 及禪宗悟修圓旨 自淺之深 慶州刺史魏靖緝而序之 成十篇 目爲永嘉集 竝行于世
●諱; 指已故的帝王或尊長的名 鄭玄注 諱 先王名 淸代顧炎武日知錄二十三 生曰名 死曰諱 今人多生而稱人之名曰諱
●天台止觀; 天台止觀有四本 一曰圓頓止觀 大師於荊州玉泉寺說 章安記爲十卷 二曰漸次止觀 在瓦官寺說 弟子法愼記 本三十卷 章安治定爲十卷 今禪波羅蜜是 三曰不定止觀 卽陳尙書令毛喜請大師出 有一卷 今六妙門是 四曰小止觀 卽今文是 亦名童蒙止觀 大師爲俗兄陳鍼出 寔大部之梗槪 入道之樞機 曰止觀 曰定慧 曰寂照 曰明靜 皆同出而異名也 [百度文庫]
●左谿朗; 玄朗(673-754) 唐代僧 乃天台宗第八祖 婺州烏傷縣(浙江義烏)人 一作浙江東陽人 俗姓傅 傅大士之六代孫 字慧明 號左溪 九歲出家 武后如意元年(692 中宗嗣聖九年) 二十歲 蒙敕住東陽淸泰寺 因就光州岸律師受具足戒 曾至會稽妙喜寺與印宗禪師姸學禪要 詣東陽天宮寺 從慧威學法華經等 復依恭禪師修習止觀 門下有中興天台宗之湛然 與新羅人法融 理應 純英等名僧輩出 天寶十三年示寂 世壽八十二 撰有法華科文二卷 [永嘉集 宋高僧傳二十六 釋氏稽古略三]
●三千威儀八萬細行; 爲佛弟子持守日常威儀之作法 坐作進退有威德儀則 稱爲威儀 比丘所應持守之二百五十戒 配以行住坐臥四威儀 合爲一千戒 循轉三世(一說三聚淨戒) 卽成三千威儀 再配以身口七支(殺 盜 淫 兩舌 惡口 妄言 綺語) 貪瞋癡三毒及等分等四種煩惱 共成八萬四千 諸經擧其大數 但稱八萬細行 淨心誡觀法以小乘大乘之不同著眼 而謂菩薩戒有八萬威儀 聲聞戒有三千威儀 又八宗綱要上謂 僧戒與尼戒不同 僧有二百五十戒 卽三千威儀 六萬細行 尼有三百四十戒 卽八萬威儀 十二萬細行 考諸文獻 最早採用三千威儀之名目者 卽中庸之優優大哉 禮儀三百 威儀三千 [楞嚴經文句五 法華三大部補注十一 大藏法數六十八]
●溫州; 浙江省東南部永嘉縣的古稱 因氣候溫和 故稱溫州 永嘉玄覺 鏡淸道怤等出生地 府城西有松臺山淨光寺 玄覺曾住此而作證道歌
●證道歌; 永嘉證道歌 一卷 又作永嘉眞覺禪師證道歌 證道歌 唐永嘉玄覺(665–7 13)撰 收於大正藏第四十八冊 全文有二四七句 共一八一四字(一作二六七句 一八一七字) 爲古體詩之體裁 或四句或六句一解 只分五十一解 揭示其悟境之要旨 撰述年代推定爲神龍五年(705)頃 本書以流麗之文體敘述禪宗眞髓 乃禪文學之絶唱 故廣受禪門喜愛 注釋書有 宋彦琪知訥的證道歌注各一種 元永盛的證道歌注頌
●永嘉集; 禪宗永嘉集 一卷 又稱永嘉禪集 永嘉禪宗集 永嘉集 唐代永嘉玄覺(665–713)撰 慶州刺史魏靜輯 今收錄於嘉興藏第四冊 龍藏第一二七冊 大正藏第四十八冊 內容以天台止觀遮照之旨 解釋禪宗之禪 揭示禪定之用意及修行之歷程 共分十篇 第一慕道志儀 第二戒憍奢意 第三淨修三業 第四奢摩他頌 第五毘婆舍那頌 第六優畢叉頌 第七三乘漸次 第八理事不二 第九勸友人書 第十發願文 卷首附有魏靜之序 初三門爲序分 次五門爲正宗分 後二門爲流通分 本書爲台禪融合之初作 故頗受矚目 有關之注釋書有宋僧行靖之永嘉集註二卷 明僧傳燈之永嘉禪宗集註二卷等
영가(永嘉) 진각선사(眞覺禪師)
휘(諱)는 현각(玄覺)이며 본군(本郡) 대씨(戴氏)의 아들이다. 관세(丱歲; 童年)에 출가하여 삼장(三藏)을 두루 탐구(探究)했고 천태지관(天台止觀)의 원묘법문(圓妙法門)에 정통했고 사위의(四威儀) 중에 늘 선관(禪觀)을 명상(冥想)했다. 후에 좌계랑(左谿朗) 선사의 격려(激勵)로 인해 동양책(東陽策; 6조의 法嗣 玄策) 선사와 함께 조계로 나아갔다. 처음 이르러 석장(錫杖)을 떨치고 6조를 세 바퀴 돌고 탁연(卓然)히 섰다. 조왈(祖曰) 무릇 사문(沙門)이란 자는 삼천위의(三千威儀)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을 갖추어야 하거늘 대덕(大德)은 어느 지방으로부터 왔기에 큰 아만을 내는가. 사왈(師曰) 생사(生死)의 일이 크고 무상(無常)이 신속(迅速)합니다. 조왈 어찌하여 무생(無生)을 체취(體取; 體得)하고 무속(無速)을 요득(了得)하지 않는가. 사왈 체취하니 곧 무생이며 요득하니 본래 신속(迅速)이 없더이다. 조왈 이와 같고 이와 같다. 우시(于時; 당시)에 대중이 악연(愕然)하지 않음이 없었다. 스님이 비로소 위의를 갖추어 참례하고 수유(須臾)에 고별을 고했다. 조왈 도리어 너무 신속하지 않는가. 사왈 본래 스스로 움직임이 아니거늘 어찌 신속이 있으리오. 조왈 누가 움직이지 않음임을 아는가. 사왈 인자(仁者)가 스스로 분별을 내십니다. 조왈 네가 심(甚)히 무생(無生)의 뜻을 얻었다. 사왈 무생이거늘 어찌 뜻(意)이 있으리오. 조왈 무의(無意)이거늘 누가 마땅히 분별하는가. 사왈 분별하여도 또한 뜻이 아닙니다. 6조가 감탄하며 가로되 선재선재(善哉善哉)로다. 조금 머물러 일숙(一宿)한지라 당시에 이르기를 일숙각(一宿覺)이라 했다. 스님이 익일(翌日) 하산하여 이에 온주(溫州)로 돌아갔다. 학자가 복주(輻湊)했다. 증도가(證道歌) 1수(首; 量詞) 및 선종의 오수(悟修)의 원지(圓旨)를 천(淺)으로부터의 심(深)을 지었는데 경주자사(慶州刺史) 위정(魏靖)이 모아서(緝) 이에 서(序)했고 10편(十篇)을 이루었으며 제목을 영가집(永嘉集)이라 했고 아울러 세상에 성행(盛行)한다.
●諱; 이미 고인(故人)이 된 제왕(帝王)이나 혹은 존장(尊長)의 이름을 가리킴. 정현(鄭玄)의 주(注) 휘(諱) 선왕(先王)의 이름이다. 청대(淸代) 고염무(顧炎武)의 일지록23. 살아서는 가로되 명(名)이며 죽어서는 가로되 휘(諱)이다. 지금 사람들이 많이들 살아서도 사람의 이름을 일컬어 가로되 휘(諱)라 한다.
●天台止觀; 천태지관은 4본(本)이 있음. 1은 가로되 원돈지관(圓頓止觀)이니 대사(大師)가 형주(荊州) 옥천사(玉泉寺)에서 설했고 장안(章安)이 기록했으며 10권이 됨. 2는 가로되 점차지관(漸次止觀)이니 와관사(瓦官寺)에서 설했고 제자 법신(法愼)이 기록했으며 본래 30권이었으나 장안(章安)이 치정(治定)하여 10권으로 만들었음. 지금의 선바라밀(禪波羅蜜)이 이것임. 3은 가로되 부정지관(不定止觀)이니 곧 진(陳) 상서령(尙書令) 모희(毛喜)의 청으로 대사가 내었음. 1권이 있으며 지금의 육묘문(六妙門)이 이것임. 4는 가로되 소지관(小止觀)이니 즉금의 문(文)이 이것이며 또 이름이 동몽지관(童蒙止觀)임. 대사가 속형(俗兄) 진침(陳鍼)을 위해 내었음. 참으로(寔) 대부(大部)의 경개(梗槪; 대강의 줄거리)며 입도(入道)의 추기(樞機)니 가로되 지관(止觀)이며 가로되 정혜(定慧)며 가로되 적조(寂照)며 가로되 명정(明靜)이거니와 모두 동출(同出)하여 다른 이름임 [백도문고].
●左谿朗; 현랑(玄朗; 673-754)이니 당대승. 곧 천태종 제8조. 무주 오상현(절강 의오) 사람이니 한편으론 절강 동양(東陽) 사람이라 함. 속성은 부(傅)니 부대사(傅大士)의 6대손(六代孫)이며 자는 혜명(慧明)이며 호가 좌계(左溪). 9세에 출가했고 무후(武后) 여의 원년(692; 中宗 嗣聖 九年) 20세에 몽칙(蒙敕)하여 동양 청태사에 주(住)했고 인하여 광주 안율사에게 나아가 구족계를 받았음. 일찍이 회계 묘희사에 이르러 인종선사(印宗禪師)와 선요(禪要)를 연학(姸學)했음. 동양(東陽) 천궁사에 나아가 혜위(慧威)로부터 법화경 등을 배웠음. 다시 공선사(恭禪師)에게 의지하며 지관(止觀)을 수습(修習)했음. 문하에 천태종을 중흥한 담연(湛然)과 신라 사람 법융(法融)ㆍ이응(理應)ㆍ순영(純英) 등 명승을 배출했음. 천보 13년 시적했고 세수는 82. 찬(撰)에 법화과문 2권이 있음 [영가집. 송고승전26. 석씨계고략3].
●三千威儀八萬細行; 불제자가 지수(持守)하는 일상의 위의의 작법이 됨. 앉고 일하고 나아가고 물러서면서 위덕과 의칙(儀則)이 있음을 일컬어 위의라 함. 비구가 응당 지수(持守)하는 바의 250계를 행ㆍ주ㆍ좌ㆍ와 4위의에 배합하면 합계가 1천 계(戒)가 되고 삼세(三世; 일설엔 三聚淨戒)에 순전(循轉)하면 곧 3천 위의(威儀)를 이룸. 다시 신구(身口)의 칠지(七支; 殺ㆍ盜ㆍ淫ㆍ兩舌ㆍ惡口ㆍ妄言ㆍ綺語)와 탐ㆍ진ㆍ치 3독 및 등분(等分) 등 4종 번뇌에 다시 배합하면 공히 8만4천을 이룸. 여러 경에서 그 대수(大數)를 들어 다만 팔만세행(八萬細行)으로 일컬음. 정심계관법(淨心誡觀法)은 소승과 대승의 같지 않음에 착안하여 이르기를 보살계에 8만 위의가 있고 성문계에 3천 위의가 있다 했음. 또 팔종강요상(八宗綱要上)에서 이르기를 승계(僧戒)와 니계(尼戒)가 같지 않아 승(僧)은 250계가 있으니 곧 3천 위의에 6만 세행이며 니(尼)는 340계가 있으니 곧 8만 위의에 12만 세행이라 했음. 여러 문헌을 상고(詳考)하니 가장 일찍 삼천위의의 명목을 채용한 것은 곧 중용의 우우대재(優優大哉)라 예의가 3백이며 위의가 3천이다 [릉엄경문구5. 법화삼대부보주11. 대장법수68].
●溫州; 절강성 동남부 영가현(永嘉縣)의 고칭(古稱). 기후가 온화함으로 인해 고로 명칭이 온주임. 영가현각과 경청도부 등의 출생지. 부성(府城) 서쪽에 송대산 정광사가 있으며 현각이 일찍이 여기에 거주하면서 증도가를 지었음.
●證道歌; 영가증도가(永嘉證道歌)니 1권. 또 영가진각선사증도가ㆍ증도가로 지음. 당(唐) 영가현각(永嘉玄覺; 665-713)이 지었음(撰). 대정장(大正藏) 제48책에 수록되었으며 전문(全文)이 247구(句), 공히 1,814자(한편으론 267구, 1,814자로 지음)가 있음. 고체시(古體詩)의 체재(體裁)로 되었으며 혹은 4구, 혹은 6구가 1해(解)며 단지 51해(解)로 나뉘었음. 그의 오경(悟境)의 요지(要旨)를 게시(揭示)했음. 찬술연대(撰述年代)는 추정(推定)하기를 신룡 5년(705) 경(頃)임. 본서는 유려(流麗)한 문체(文體)로 선종의 진수(眞髓)를 서술했으며 곧 선문학(禪文學)의 절창(絶唱)인지라 고로 널리 선문의 희애(喜愛)를 받음. 주석서는 송(宋) 언기(彦琪)와 지눌(知訥)의 증도가주(證道歌注) 각 1종과 원(元) 영성(永盛)의 증도가주송(證道歌注頌)이 있음.
●永嘉集; 선종영가집(禪宗永嘉集) 1권. 또 명칭이 영가선집(永嘉禪集)ㆍ영가선종집(永嘉禪宗集)ㆍ영가집(永嘉集)임. 당대 영가현각(永嘉玄覺; 665–713)이 지었고(撰) 경주자사(慶州刺史) 위정(魏靜)이 집(輯)했으며 지금 가흥장 제4책ㆍ용장 제127책ㆍ대정장 제48책에 수록되었음. 내용은 천태지관(天台止觀)의 차조(遮照)의 뜻으로써 선종의 선(禪)을 해석하여 선정(禪定)의 용의(用意) 및 수행의 역정(歷程)을 게시(揭示)하였음. 모두 10편(篇)으로 분류했음. 제1 모도지의(慕道志儀), 제2 계교사의(戒憍奢意), 제3 정수삼업(淨修三業), 제4 사마타송(奢摩他頌), 제5 비바사나송(毘婆舍那頌), 제6 우필차송(優畢叉頌), 제7 삼승점차(三乘漸次), 제8 이사불이(理事不二), 제9 권우인서(勸友人書), 제10 발원문(發願文)임. 권수에 위정의 서가 첨부되어 있음. 초 3문(門)은 서분(序分)이 되고 다음 5문은 정종분(正宗分)이 되고 후 2문은 유통분(流通分)이 됨. 본서는 태선(台禪; 천태와 선종) 융합의 초작(初作)이 되는지라 고로 자못 촉목(矚目)을 받음. 관련(關聯)이 있는 주석서에 송승(宋僧) 행정(行靖)의 영가집주(永嘉集註) 2권, 명승(明僧) 전등(傳燈)의 영가선종집주(永嘉禪宗集註) 2권 등이 있음.
慕道志儀第一 夫欲修道 先須立志 及事師儀則 彰乎軌訓 故標第一 明慕道儀式 戒憍奢意第二 初雖立志修道 善識軌儀 若三業憍奢 妄心擾動 何能得定 故次第二 明戒憍奢意也 淨修三業第三 前戒憍奢 略標綱要 今子細檢責 令麁過不生 故次第三 明淨修三業 戒乎身口意也 奢摩他頌第四 已檢責身口 令麁過不生 次須入門修道漸次 不出定慧五種起心 六種料揀 故次第四 明奢摩他頌也 毗婆舍那頌第五 非戒不禪 非禪不慧 上旣修定 定久慧明 故次第五 明毗婆舍那頌也 優畢叉頌第六 偏修於定 定久則沈 偏學於慧 慧多心動 故次第六 明優畢叉頌等於定慧 令不沈動 使定慧均等 捨於二邊 三乘漸次第七 定慧旣均 則寂而常照 三觀一心 何疑不遣 何照不圓 自解雖明 悲他未悟 悟有深淺 故次第七 明三乘漸次也 事理不二第八 三乘悟理 理無不窮 窮理在事 了事卽理 故次第八 明事理不二 卽事而眞 用祛倒見也 勸友人書第九 事理旣融 內心自瑩 復悲遠學 虛擲寸陰 故次第九 明勸友人書也 發願文第十 勸友雖是悲他 專心在一 情猶未普 故次第十 明發願文 誓度一切也
●檢責; 檢察指責 又作撿責
●奢摩他; <梵> śamatha 又作舍摩他 此云止息 亦曰寂靜 謂正定離沈掉也 [慧琳音義二十一 翻梵語三]
●五種起心; 永嘉禪宗集註下 復次初修心人 入門之後 須識五念 一故起 二串習 三接續 四別生 五卽靜
●六種料簡; 永嘉禪宗集註下 復次若一念相應之時 須識六種料簡 一識病 二識藥 三識對治 四識過生 五識是非 六識正助 ◆料簡; 判定 辨明
●毗婆舍那; <梵> vipaśyanā 又作毘鉢舍那 譯曰觀 見 種種觀察等 觀見事理也 [起信論元曉疏下 慧琳音義十八 慧苑音義上]
●優畢叉; 等持之意 就是奢摩他和毗婆舍那要等持 止觀雙運 定慧等持 行於中道 類似天台宗的一心三觀
●三觀一心; 又作一心三觀 又曰圓融三觀 不可思議三觀 或不次第三觀 爲天台圓敎之觀法 利根菩薩之所修習 原出於大智度論二十七所謂三智一心中得之文 又得中論觀四諦品 衆因緣生法 我說卽是無 亦爲是假名 亦是中道義之意 天台智者之義 因之而立 ▲人天眼目五 大師(指天台智者) 於藏中得龍樹所造中論 覽至第四卷 破諸法性有定性則無因果等事 如頌曰 因緣所生法 我說卽是空 亦名爲假名 亦名中道義 次頌云 未曾有一法 不從因緣生 是故一切法 無不是空者 繇此述一心三觀 曰空曰假曰中 若據敎意 大凡一偈 皆有四句以成其意耳 智者離爲三觀似枝蔓 又未詳傳授 因此便言 遠稟龍樹 以樹爲祖 近稟思大 則可知矣
●遠學; 遠方的學者
●寸陰; 猶寸晷 指暫短的光陰
모도지의(慕道志儀; 慕道하는 志儀) 제1. 무릇 수도하려면 먼저 입지(立志)를 쓰고 및 의칙(儀則)을 사사(事師)해야 궤훈(軌訓)을 나타내는지라(彰) 고로 표(標)하여 제1 모도의식(慕道儀式)을 밝힌다.
계교사의(戒憍奢意; 憍奢意를 경계하다) 제2. 초(初)에 비록 입지(立志)하여 수도하며 궤의(軌儀)를 잘 알더라도 만약 3업(三業)이 교사(憍奢)하면 망심(妄心)이 요동(擾動)하거늘 어찌 능히 득정(得定)하겠는가, 고로 차(次)에 제2 계교사의(戒憍奢意)를 밝힌다.
정수삼업(淨修三業; 三業을 淨修하다) 제3. 앞에 계교사(戒憍奢)하여 강요(綱要)를 약표(略標)했고 여금에 자세히 검책(檢責)하여 추과(麁過)가 나지 않게 하는지라 고로 차(次)에 제3 정수삼업(淨修三業)을 밝혀 신구의(身口意)를 경계(警戒)한다.
사마타송(奢摩他頌) 제4. 이미 신구(身口)를 검책(檢責)하여 추과(麁過)가 나지 않게 했으니 차(次)에 입문수도(入門修道)의 점차(漸次)를 쓰매 정혜(定慧)ㆍ오종기심(五種起心)ㆍ육종요간(六種料簡)을 벗어나지 않는지라 고로 차(次)에 제4 사마타송(奢摩他頌)을 밝힌다.
비바사나송(毗婆舍那頌) 제5. 계(戒)가 아니면 선(禪)이 아니며 선이 아니면 혜(慧)가 아니다. 위에서 이미 정(定)을 닦았고 정이 오래되면 혜(慧)가 밝은지라 고로 차(次)에 제5 비바사나송(毗婆舍那頌)을 밝힌다.
우필차송(優畢叉頌) 제6. 치우치게 정(定)을 닦으면 정이 오래되매 곧 침(沈)하고 치우치게 혜(慧)를 배우면 혜가 많아져 심(心)이 동하는지라 고로 차(次)에 제6 우필차송(優畢叉頌)을 밝혀 정혜(定慧)를 균등(均等)히 해 침동(沈動)하게 하지 않고 정혜를 균등하게 해 2변(邊)을 버린다.
삼승점차(三乘漸次) 제7. 정혜가 이미 균등하면 곧 적(寂)하면서 상조(常照)하여 삼관일심(三觀一心)이거늘 무슨 의심인들 보내지(遣) 않으며 무슨 조(照)인들 원만하지 않겠는가. 자기의 해(解)는 비록 밝으나 타인의 미오(未悟)를 슬퍼하나니(悲) 오(悟)에 심천(深淺)이 있는지라 고로 차(次)에 제7 삼승점차(三乘漸次)를 밝힌다.
사리불이(事理不二) 제8. 3승(乘)을 오리(悟理)하니 리(理)를 궁진(窮盡)하지 않음이 없고 리(理)를 궁진하매 사(事)에 있고 사를 요달(了達)하매 곧 리(理)인지라 고로 차(次)에 제8 사리불이(事理不二)를 밝히나니 즉사(卽事)하여 진(眞)이라서 써 도견(倒見)을 거제(祛除)한다.
권우인서(勸友人書; 友人에게 권하는 書) 제9. 사리(事理)를 이미 용융(熔融)하매 내심(內心)이 저절로 밝고 다시 원학(遠學)이 촌음(寸陰)을 헛되이 던짐을 슬퍼하는지라 고로 차(次)에 제9 권우인서(勸友人書)를 밝힌다.
발원문(發願文) 제10. 권우인(勸友人)이 비록 이 남을 슬퍼하여 전심(專心)이 재일(在一)하지만 정(情)이 아직 넓지(普) 않은지라 고로 차(次)에 제10 발원문을 밝혀 일체를 서도(誓度)한다.
●檢責; 검찰(檢察)하고 지책(指責)함. 또 검책(撿責)으로 지음.
●奢摩他; <범> śamatha. 또 사마타(舍摩他)로 지음. 여기에선 이르되 지식(止息)이며 또 가로되 적정(寂靜)이니 이르자면 정정(正定)으로 침도(沈掉)를 여읨임 [혜림음의21. 번범어3].
●五種起心; 영가선종집주하 부차(復次) 처음 수심(修心)하는 사람이 입문한 후에 모름지기 5념(念)을 알아야 한다. 1. 고기(故起). 2 관습(串習). 3. 접속. 4별생(別生). 5. 즉정(卽靜).
●六種料簡; 영가선종집주하 부차(復次) 만약 일념이 상응할 때 모름지기 육종요간(六種料簡)을 알아야 한다. 1. 식병(識病). 2. 식약(識藥). 3. 식대치(識對治). 4. 식과생(識過生). 5. 식시비(識是非). 6. 식정조(識正助). ◆料簡; 판정(判定). 변명(辨明).
●毗婆舍那; <범> vipaśyanā. 또 비발사나(毘鉢舍那)로 지음. 번역해 가로되 관(觀)ㆍ견(見)ㆍ종종관찰(種種觀察)등이니 사리(事理)를 관견(觀見)함임 [기신론원효소하. 혜림음의18. 혜원음의상].
●優畢叉; 등지(等持)의 뜻. 이 사마타(奢摩他)와 비바사나(毗婆舍那)로 나아가 등지(等持)를 요함이니 지관(止觀)을 쌍운(雙運)하고 정혜를 등지(等持)하여 중도를 행함. 천태종의 1심3관(一心三觀)과 유사함.
●三觀一心; 또 일심삼관(一心三觀)으로 지음. 또 가로되 원융삼관ㆍ불가사의삼관 혹 불차제삼관(不次第三觀)이니 천태 원교의 관법이 되며 이근보살(利根菩薩)이 수습(修習)하는 것임. 근원은 대지도론27에서 이른 바 삼지일심(三智一心) 중에서 얻은 글임. 또 중론 관사제품(觀四諦品) 뭇 인연으로 난 법은/ 내가 설하기를 곧 이는 없다(無)/ 또한 이는 가명(假名)이 되며/ 역시 중도(中道)의 뜻이다의 뜻에서 얻었음. 천태지자의 뜻은 이로 인해 세웠음. ▲인천안목5. 대사(천태지자를 가리킴)가 장중(藏中)에서 용수가 지은 바 중론을 얻었는데 열람하다가 제4권에 이르자 설파하기를 모든 법성에 정성(定性)이 있다면 인과 등의 일이 없다 했음. 예컨대(如) 송왈 인연으로 난 바의 법은/ 내가 설하기를 곧 이 공(空)이다/ 또한 이름해 가명(假名)이며/ 또한 이름이 중도(中道)의 뜻이다. 다음 송에 이르되 1법이라도/ 인연으로부터 나지 아니함이 일찍이 있지 않나니/ 이런 고로 일체법은/ 이 공(空)이 아닌 게 없다. 이로 말미암아 1심3관(一心三觀)을 서술했으니 왈공왈가왈중(曰空曰假曰中)이다. 만약 교의(敎意)에 의거하면 대범(大凡) 1게지만 모두 4구가 있어 그 뜻을 이루었다. 지자가 3관(觀)을 원리(遠離)하면 지만(枝蔓)과 같고 또 전수(傳授)가 미상(未詳)인지라 이로 인해 곧 말하기를 멀리로는 용수에게서 품수(稟受)하여 용수를 시조로 삼고 가까이로는 사대(思大)에게서 품수했다 했으니 곧 가히 알 것이다.
●遠學; 먼 지방의 학자.
●寸陰; 촌구(寸晷; 매우 짧은 동안의 시간)니 잠단(暫短)의 광음을 가리킴.
優畢叉頌略曰 復次觀心十門 初則言其法爾 次則出其觀體 三則語其相應 四則警其上慢 五則誡其疎怠 六則重出觀體 七則明其是非 八則簡其詮旨 九則觸途成觀 十則妙契玄源
●初則; 祖庭事苑七 一則 宗門因緣不言一節一段 而言一則者 蓋則以制字 从貝从刀 貝 人所寶也 刀 人所利也 所發之語 若刀之制物 以有則也 故人皆寶之 以爲終身之利焉 是知謂一則者 不無深意也
우필차송(優畢叉頌) 약왈(略曰) 부차(復次) 관심십문(觀心十門) 초칙(初則) 언기법이(言其法爾) 차칙(次則) 출기관체(出其觀體) 3칙 어기상응(語其相應) 4칙 경기상만(警其上慢) 5칙 계기소태(誡其疎怠) 6칙 중출관체(重出觀體) 7칙 명기시비(明其是非) 8칙 간기전지(簡其詮旨) 9칙 촉도성관(觸途成觀) 10칙 묘계현원(妙契玄源).
●初則; 조정사원7. 일칙(一則) 종문의 인연을 1절(節)이나 1단(段)이라고 말하지 않고 1칙(則)이라고 말하는 것은 대개 칙(則)은 제자(制字)가 패(貝)를 좇고 도(刀)를 좇기 때문임. 패(貝)는 사람이 보배로 여기는 것이며 도(刀)는 사람에게 이익되는 것이니 발하는 바의 말이 도(刀)가 물건을 만듦과 같아서 법칙이 있기 때문임. 고로 사람들이 다 이를 보배로 여겨 종신(終身)의 이익을 삼음. 이로 알지니 1칙이라고 이르는 것이 깊은 뜻이 없지 않음.
第一言其法爾者 夫心性虛通 動靜之源莫二 眞如絕慮 緣計之念非殊 惑見紛馳 窮之則唯一寂 靈源不狀 鑒之則以千差 千差不同 法眼之名自立 一寂非異 慧眼之號斯存 理量雙銷 佛眼之功圓著 是以三諦一境 法身之理常淸 三智一心 般若之明常照 境智冥合 解脫之應隨機 非縱非橫 圓伊之道玄會 故知三德妙性 宛爾無乖 一心深廣難思 何出要而非路 是以卽心爲道者 可謂尋流而得源矣 第二出其觀體者 只知一念 卽空不空 非空非不空 第三語其相應者 心與空相應 則譏毀讚譽 何憂何喜 身與空相應 則刀割香塗 何苦何樂 依報與空相應 則施與劫奪 何得何失 心與空不空相應 則愛見都忘 慈悲普救 身與空不空相應 則內同枯木 外現威儀 依報與空不空相應 則永絕貪求 資財給濟 心與空不空非空非不空相應 則實相初明 開佛知見 身與空不空非空非不空相應 則一塵入正受 諸塵三昧起 依報與空不空非空非不空相應 則香臺寶閣嚴土化生 第四警其上慢者 若不爾者 則未相應也 第五誡其疎怠者 然渡海應須上船 非船何以能渡 修心必須入觀 非觀無以明心 心尙未明 相應何日 思之勿自恃也 第六重出觀體者 只知一念卽空不空 非有非無 不知卽念卽空不空 非非有非非無 第七明其是非者 心不是有 心不是無 心不非有 心不非無 是有是無卽墮是 非有非無卽墮非 如是只是是非之非 未是非是非非之是 今以雙非破兩是 是破非是猶是非 又以雙非破兩非 非破非非卽是是 如是只是非是非非之是 未是不非不不非 不是不不是 是非之惑 綿微難見 神淸慮靜 細而姸之 第八簡其詮旨者 然而至理無言 假文言以明其旨 旨宗非觀 藉修觀以會其宗 若旨之未明 則言之未的 若宗之未會 則觀之未深 深觀乃會其宗 的言必明其旨 旨宗旣其明會 言觀何得復存邪 第九觸途成觀者 夫再演言詞 重標觀體 欲明宗旨無異 言觀有逐方移 移言則言理無差 改觀則觀旨不異 不異之旨卽理 無差之理卽宗 宗旨一而二名 言觀明其弄引耳 第十妙契玄源者 夫悟心之士 寧執觀而迷旨 達敎之人 豈滯言而惑理 理明則言語道斷 何言之能議 旨會則心行處滅 何觀之能思 心言不能思議者 可謂妙契環中矣 先天二年十月十七日 安坐示滅 塔于西山之陽 諡無相大師 塔曰淨光
●法眼; 五眼之一 分明觀達緣生差別之法 謂之法眼
●慧眼; 智慧之眼 爲二乘所證之眼 爲三眼之一 五眼之一 了知諸法平等 性空之智慧 故稱慧眼
●佛眼; 五眼之一 佛名覺者 覺者之眼云佛眼 照了諸法實相之眼也 又別於前之四眼 四眼至佛則總名爲佛眼
●三諦; 指三種眞理 據天台宗 諸法實相之眞理分爲空假中三諦 一空諦 又作眞諦 無諦 諸法本空 衆生不了 執之爲實而生妄見 若以空觀對治之 則執情自忘 情忘卽能離於諸相 了悟眞空之理 二假諦 又作俗諦 有諦 諸法雖卽本空 然因緣聚時則歷歷宛然 於空中立一切法 故稱假諦 三中諦 又作中道第一義諦 以中觀觀之 諸法本來不離二邊 不卽二邊 非眞非俗 卽眞卽俗 淸淨洞徹 圓融無礙 故稱中諦
●三智; 智度論所說 一一切智 聲聞緣覺之智也 知一切法之總相者 總相卽空相也 二道種智 菩薩之智也 知一切種種差別之道法者 三一切種智 佛智也 佛智圓明 通達總相別相化道斷惑一切種之法者 天台以之配於空假中三諦之觀智 然三智就人分別 雖如上各別 而就法之勝劣分別之 則以上兼下 於一切種智中容餘二智 猶如五眼中之佛眼容餘四眼也 [智度論二十七 止觀三 四敎儀集註下]
●圓伊; 伊字係由三點組成 關於伊字之書體有多種 灌頂(561-632)於大般涅槃經疏六 認爲伊字有新舊之分 竝以舊伊字譬喩別敎敎理之無法圓融 而以新伊字譬喩圓敎之圓融相卽之理 此種新伊(圓伊) 又稱眞伊
●三德; 此指涅槃經所說大涅槃所具之三德 一法身德 二般若德 三解脫德 此三者 各有常樂我淨之四德 故名三德 而此三德 不一不異 不縱不橫 如伊字之三點 首羅之三目 稱爲大涅槃之祕密藏
●宛爾; 宛 事物眞實可見 歷歷在目 爾 助詞 相當于然
●依報; 謂心身者 正實之果報也 此心身依止之身外諸物 謂之依報 如世界國土 家屋 衣食等是
●愛見; 執著於人而起愛也
●正受; 梵語三昧 此云正受
●香臺寶閣嚴土化生; 永嘉禪宗集註下 香臺寶閣者 自受用身所居實報莊嚴土也 卽以之而嚴土自用 卽以之而嚴土化生
●上慢; 增上慢 言我得增上之法而起慢心也 如未得聖道 謂爲已得是也 七慢之一
●詮旨; 闡明要旨
●心行處滅; 心行之處滅絶 謂不及思慮分別之境地
●環中; 莊子齊物論 彼是莫得其偶 謂之道樞 樞始得其環中 以應無窮 ▲肇論疏下 妙契環中 語出莊子 此以喩中道無生理也 莊子內篇云 彼是善得其偶 謂之道樞 樞始得其環中 以應乎無窮 郭象注云 是非反覆相尋無窮 謂之環中 環中空也
제1 언기법이(言其法爾; 그 법이 그러함을 말하다. 其字 補入)란 것은 무릇 심성(心性)이 허통(虛通)하여 동정(動靜)의 근원이 둘이 아니며 진여(眞如)는 절려(絕慮)라 연계(緣計; 攀緣과 計度)의 상념(想念)이 다르지 않다(非殊). 혹견(惑見)이 분치(紛馳)하지만 이를 궁구하면 곧 유일(唯一)한 적(寂)이며 영원(靈源)이 형상(形狀)이 아니지만(不) 이를 감조(鑒照)하면 곧 천차(千差)를 쓴다(以). 천차(千差)로 부동(不同)하니 법안(法眼)의 명(名)이 서고(立) 일적(一寂)이 비이(非異)하니 혜안(慧眼)의 호(號)를 이(斯)에 두고 이량(理量; 理智와 量智)이 쌍소(雙銷)하니 불안(佛眼)의 공(功)이 뚜렷이(圓) 나타난디(著). 이런 까닭으로 3제(三諦)가 1경(境)인 법신지리(法身之理)가 상청(常淸)하고 3지(三智)가 1심(心)인 반야지명(般若之明)이 상조(常照)하고 경지(境智)가 명합(冥合)한 해탈지응(解脫之應)이 수기(隨機)하고 비종비횡(非縱非橫)인 원이지도(圓伊之道)가 현회(玄會; 玄妙하게 會合)한다. 고로 아나니 3덕(三德)의 묘성(妙性)이 완이(宛爾)하여 어그러지지 않고 1심(心)은 심광(深廣)하여 사유하기 어렵나니 어찌 출요(出要; 生死를 벗어나는 要領)하는 로(路; 菩提之路)가 아니겠는가. 이런 까닭으로 즉심(卽心)하여 도(道)로 삼는 자는 가위(可謂) 흐름을 찾아 근원을 얻는다 하리라. 제2 출기관체(出其觀體; 그 觀體를 내다)란 것은 다만 일념이 즉공(卽空)이며 불공(不空)이며 비공(非空)이며 비불공(非不空)임을 안다. 제3 어기상응(語其相應; 그 상응을 말하다)이란 것은 심(心)이 공(空)과 더불어 상응하면 곧 기훼(譏毀)와 찬예(讚譽)에 무엇을 근심하며 무엇을 기뻐하겠는가. 신(身)이 공(空)과 더불어 상응하면 곧 도할(刀割; 칼로 베다)과 향도(香塗; 향으로 바르다)에 무엇을 괴로워하며 무엇을 즐거워하겠는가. 의보(依報)가 공(空)과 더불어 상응하면 곧 시여(施與)함과 겁탈(劫奪)하매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겠는가. 심(心)이 공불공(空不空)과 더불어 상응하면 곧 애견(愛見)을 모두(都) 잊고 자비(慈悲)로 보구(普救)한다. 신(身)이 공불공(空不空)과 더불어 상응하면 곧 안으론 고목(枯木)과 같고 밖으론 위의(威儀)를 나타낸다. 의보(依報)가 공불공(空不空)과 더불어 상응하면 곧 길이 탐구(貪求)를 끊고 자재(資財)로 급제(給濟)한다. 심(心)이 공불공(空不空)ㆍ비공비불공(非空非不空)과 더불어 상응하면 곧 실상(實相)을 초명(初明)하고 불지견을 연다(開佛知見). 신(身)이 공불공(空不空)ㆍ비공비불공非空非不空)과 더불어 상응하면 곧 1진(塵)이 정수(正受)에 들어가매 제진(諸塵)이 삼매(三昧)에서 일어난다. 의보(依報)가 공불공(空不空)ㆍ비공비불공(非空非不空)과 더불어 상응하면 곧 향대와 보각으로 엄토하고 화생(化生; 중생을 교화)한다(香臺寶閣嚴土化生). 제4 경기상만(警其上慢; 그 上慢을 警戒하다)이란 것은 만약 그렇지 않을진댄 곧 상응하지 못한다. 제5 계기소태(誡其疎怠; 그 疎怠를 警戒하다)란 것은 그러하여 도해(渡海)하려면 응당 꼭 상선(上船)해야 하나니 배가 아니면 무엇으로써 능히 건너겠는가. 수심(修心)하려면 입관(入觀)이 필수(必須; 必要)니 관(觀)이 아니면 무엇으로써 마음을 밝히겠는가. 마음도 오히려 밝히지 못했거늘 어떤 날에 상응하겠는가. 이를 사유해 자시(自恃)하지 말아야 한다. 제6 중출관체(重出觀體; 거듭 觀體를 내다)란 것은 다만 일념(一念)이 즉공(卽空)이면서 불공(不空)임을 알아 비유비무(非有非無)다. 즉념(卽念)이 즉공(卽空)이면서 불공(不空)임을 알지 못해 비비유비비무(非非有非非無)다. 제7 명기시비(明其是非; 그 시비를 밝히다)란 것은 심(心)은 이 유(有)가 아니며 심은 이 무(無)가 아니며 심은 비유(非有)가 아니며 심은 비무(非無)가 아니다. 이 유(有)와 이 무(無)는 곧 시(是)에 떨어지고 비유(非有)와 비무(非無)는 곧 비(非)에 떨어진다. 이와 같이 다만 이 시비(是非)의 비(非)는 이 비시(非是)가 아니며 비비(非非)의 시(是)다. 여금에 쌍비(雙非)로써 양시(兩是)를 파(破)하나니 이 파(破)는 시(是)가 아니라 오히려 이 비(非)다. 또 쌍비(雙非)로써 양비(兩非)를 파(破)하나니 비비(非非)를 파함이 아니라 곧 시시(是是)다. 이와 같이 다만 시(是)는 시(是)가 아니라 비비(非非)의 시(是)니 이 비(非)가 아니며 불비(不非)가 아니며 시(是)가 아니며 불시(不是)가 아니다. 시비지혹(是非之惑)이 면미(綿微; 細微)하여 보기 어렵나니 정신을 맑히고 사려를 고요히 해 자세히 이를 연구하라. 제8 간기전지(簡其詮旨; 그 詮旨를 柬擇하다. 簡은 柬과 통함)란 것은 그러하여 지리(至理)는 언어가 없지만 문언(文言)을 빌려야(假) 그 의지(意旨; 旨)를 밝히고 지종(旨宗; 意旨와 宗趣)은 관(觀)이 아니지만 수관(修觀)을 빌려야(藉) 그 종(宗)을 안다(會). 만약 지(旨)를 밝히지 못하면 곧 언(言)이 적당(的當; 的)하지 못하고 만약 종(宗)을 이회(理會)하지 못하면 곧 관(觀)이 깊지(深) 못하다. 심관(深觀)이라야 이에 그 종(宗)을 알고(會) 적언(的言; 的當한 말)이라야 반드시 그 지(旨)를 밝힌다. 지종(旨宗)을 이미 그 환히 알거늘(明會) 언관(言觀)을 어찌 다시 둠을 얻겠는가. 제9 촉도성관(觸途成觀)이란 것은 무릇 언사(言詞)를 재연(再演)하고 관체(觀體)를 중표(重標)하여 종지(宗旨)가 다름(異)이 없음을 밝히려고 한다. 언(言)과 관(觀)은 방위 따라 옮김(移)이 있나니 이언(移言)하면 곧 언리(言理)가 어긋남이 없고 개관(改觀)하면 곧 관지(觀旨)가 다르지(異) 않다. 다르지 아니한 지(旨)는 곧 리(理)며 어긋남이 없는 리(理)는 곧 종(宗)이다. 종지(宗旨)는 하나면서 두 이름이며 언관(言觀)은 그 농인(弄引)임을 밝혔을 뿐이다. 제10 묘계현원(妙契玄源; 玄源에 妙契하다)이란 것은 무릇 오심지사(悟心之士)가 어찌(寧) 집관(執觀)하여 미지(迷旨)하겠는가. 달교지인(達敎之人)이 어찌 체언(滯言)하여 혹리(惑理; 理를 惑하다)하겠는가. 리(理)가 밝으면 곧 언어도단(言語道斷)이거늘 무슨 말로 능히 의논(議論)하며 지(旨)를 알면(會) 곧 심행처멸(心行處滅)이거늘 무슨 관(觀)으로 능히 사유하겠는가. 심(心)과 언(言)으로 능히 사의(思議)하지 못하는 것이니 가위(可謂) 환중(環中)에 묘계(妙契)한다 하리라. 선천(先天) 2년(713) 10월 17일 안좌(安坐)하여 시멸(示滅)했다. 서산(西山)의 양(陽; 南)에 탑을 세웠고 시(諡)가 무상대사(無相大師)며 탑왈(塔曰) 정광(淨光)이다.
●法眼; 5안의 하나. 연생(緣生)의 차별의 법을 분명히 관달(觀達)함을 일컬어 법안이라 함.
●慧眼; 지혜의 눈이니 2승(乘)이 소증(所證)하는 눈이 되며 3안(眼)의 하나, 5안의 하나가 됨. 제법이 평등한 성공(性空)의 지혜를 요지(了知)하므로 고로 명칭이 혜안임.
●佛眼; 5안(眼)의 하나. 불타를 이름해 각자(覺者)며 각자의 눈을 일러 불안이라 함. 제법실상을 비추는 눈임. 또 앞의 4안과 구별하자면 4안이 불(佛)에 이르면 곧 총명(總名)이 불안이 됨.
●三諦; 3종의 진리를 가리킴. 천태종에 의거하면 제법실상의 진리를 공가중(空假中) 3제(諦; 慣音이 제)로 분류함. 1. 공제(空諦) 또 진제(眞諦)로 지음. 제법이 본공(本空)임을 중생이 불료(不了)하고 이에 집착해 실(實)로 삼아 망견(妄見)을 내나니 만약 공관(空觀)으로 이에 대치(對治)하면 곧 집정(執情)을 스스로 잊으며 집정을 잊으면 곧 능히 제상(諸相)을 여의고 진공의 이치를 요오(了悟)함. 2. 가제(假諦) 또 속제(俗諦)ㆍ유제(有諦)로 지음. 제법이 비록 곧 본공이나 그러나 인연이 모일 때 곧 역력완연(歷歷宛然)하나니 공(空) 가운데 일체법을 세우므로 고로 명칭이 가제(假諦)임. 3. 중제(中諦) 또 중도제일의제(中道第一義諦)로 지음. 중관(中觀)으로 이를 관하면 제법이 본래 2변(邊)을 여의지 않고 2변에 즉(卽; 붙다)하지도 않아서 비진비속(非眞非俗)이며 즉진즉속(卽眞卽俗)이며 청정히 통철(洞徹)하고 원융하여 무애한지라 고로 명칭이 중제임.
●三智; 지도론에서 설한 것. 1. 일체지(一切智) 성문과 연각의 지(智)임. 일체법의 총상(總相)을 아는 것. 총상은 곧 공상(空相)임. 2. 도종지(道種智) 보살의 지임. 일체의 갖가지 차별의 도법을 아는 것. 3. 일체종지(一切種智) 불지(佛智)임. 불지는 원명하여 총상ㆍ별상ㆍ화도(化道)ㆍ단혹(斷惑)의 일체종(一切種)의 법을 통달한 것임. 천태는 이것으로써 공가중(空假中) 3제(諦)의 관지(觀智)에 짝했음. 그러나 3지(智)는 사람으로 나아가 분별하면 비록 위와 같이 각기 다르지만 법의 승렬(勝劣)로 나아가 그것을 분별한다면 곧 상(上)으로써 하(下)를 겸함. 일체종지 중에 나머지 2지를 용납함이 마치 5안(眼) 중의 불안이 나머지 4안을 용납함과 같음 [지도론27. 지관3. 사교의집주하].
●圓伊; 이자(伊字; ∴)는 이 3점(點)으로 말미암아 조성(組成)되었고 이자의 서체(書體)에 관해 여러 종류가 있음. 관정(灌頂; 561-632)이 대반열반경소6에서 인식하기를 이자는 신구(新舊)의 구분이 있다 했으며 아울러 구이자(舊伊字)로 별교(別敎) 교리의 원융한 법이 없음에 비유했고 신이자(新伊字)로 원교(圓敎)의 원융상즉(圓融相卽)의 이치에 비유했음. 이 종류의 신이(新伊; 圓伊)를 또 일컬어 진이(眞伊)라 함.
●三德; 여기에선 열반경에서 설한 바 대열반이 갖춘 바의 3덕을 가리킴이니 1은 법신덕이며 2는 반야덕이며 3은 해탈덕임. 이 3자는 각기 상락아정(常樂我淨)의 4덕이 있는지라 고로 이름이 3덕임. 이 3덕이 하나도 아니고 다름도 아니며 가로도 아니고 세로도 아님이 이자(伊字)의 3점(點)과 수라(首羅)의 3목(目)과 같으며 호칭하기를 대열반의 비밀장이라 함.
●宛爾; 완(宛)은 사물이 진실로 가히 보임. 역력히 눈에 있음. 이(爾)는 조사임. 연(然)에 상당함.
●依報; 이르자면 심신(心身)이란 것은 정실(正實)의 과보며 이 심신이 의지하는 몸 밖의 모든 사물을 일러 의보(依報)라 함. 예컨대(如) 세계와 국토, 가옥과 의식 등이 이것임.
●愛見; 사람에게 집착해 애(愛)를 일으킴.
●正受; 범어 삼매는 여기에선 이르되 정수(正受)임.
●香臺寶閣嚴土化生; 영가선종집주하 향대보각(香臺寶閣)이란 것은 자수용신(自受用身)이 거주하는 바의 실보장엄토(實報莊嚴土)이다. 곧 이로써 엄토(嚴土)하여 자용(自用)하고 곧 이로써 엄토(嚴土)하고 화생(化生; 중생을 교화)한다.
●上慢; 증상만(增上慢)이니 나는 증상(增上)의 법을 얻었다고 말하면서 만심(慢心)을 일으킴이니 예컨대(如) 성도(聖道)를 얻지 못했으면서 이르기를 이미 얻었다고 함이 이것임. 7만(慢)의 하나.
●詮旨; 요지(要旨)를 천명(闡明)함.
●心行處滅; 심행의 처소가 멸절(滅絶)함이니 이르자면 사려와 분별이 미치지 아니하는 경지임
●環中; 장자 제물론. 그것과 이것이 그 짝을 얻지 못하나니 이를 일러 도추(道樞)라 한다. 추(樞)가 비로소 그 환중(環中)을 얻으면 응함이 무궁하다. ▲조론소하. 묘계환중(妙契環中) 말이 장자에 나온다. 이것은 중도(中道)의 무생(無生)의 이치에 비유함이다. 장자 내편(內篇)에 이르되 그것과 이것이 그 짝을 잘 얻음을 일러 도추(道樞)라 한다. 추(樞)가 비로소 그 환중(環中)을 얻으면 응함이 무궁하다. 곽상(郭象)의 주(注)에 이르되 시비가 반복하면서 상심(相尋)하여 무궁함을 일러 환중(環中)이라 한다. 환중(環中)은 공(空)이다.
溫州淨居尼玄機 唐景雲中得度 常習定於大日山石窟中 一日忽念曰 法性湛然 本無去住 厭喧趍寂 豈爲達邪 乃往參雪峯 峯問 甚處來 曰 大日山來 峯曰 日出也未 師曰 若出則鎔却雪峯 峯曰 汝名甚麽 師曰 玄機 峯曰 日織多少 師曰 寸絲不挂 遂禮拜退 纔行三五步 峯召曰 袈裟角拖地也 師回首 峯曰 大好寸絲不挂〈世傳玄機乃永嘉大師女弟 甞同遊方 以景雲歲日考之是矣 所見雪峯 非眞覺存也 永嘉旣到曹谿 必嶺下雪峯也 未詳法嗣 故附於此〉
●大好; 一諷刺性地重復對方語句時 前加大好 相當于好一箇 二十分 非常 此指一
온주(溫州) 정거니(淨居尼) 현기(玄機)는 당 경운(景雲; 710- 711) 중에 득도(得度)했고 늘 태일산(大日山) 석굴(石窟) 가운데에서 습정(習定)했다. 어느 날 홀연히 사념(思念)해 가로되 법성(法性)이 담연(湛然)하여 본래 거주(去住)가 없다. 시끄러움을 싫어해 고요함을 추구(追求; 趍)함이 어찌 달도(達道; 達)가 되겠는가. 이에 설봉(雪峯)을 왕참(往參)했다. 봉문(峯問) 어느 곳에서 오느냐. 가로되 태일산(大日山)에서 왔습니다. 봉왈(峯曰) 해가 나왔느냐 또는 아니냐. 사왈(師曰) 만약 나왔다면 곧 설봉(雪峯)을 녹여버렸을 것입니다. 봉왈(峯曰) 너의 이름이 무엇인가. 사왈 현기(玄機)입니다. 봉왈 하루에 얼마를 짜느냐(織). 사왈 촌사(寸絲)도 걸치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예배하고 물러나는데 겨우 3, 5보(步) 가자 설봉이 부르고 가로되 가사(袈裟)의 모퉁이(角)가 땅에 끌린다(拖). 스님이 머리를 돌리자 봉왈 대호(大好) 촌사(寸絲)도 걸치지 않았구나〈세간에서 전하기를 玄機는 곧 永嘉大師의 여동생이며 일찍이 함계 遊方했다. 景雲의 歲日로 考察하건대 이것이다. 본 바의 雪峯은 眞覺存(眞覺義存)이 아니다. 영가가 이미 曹谿에 이르렀으니 반드시 嶺下의 雪峯일 것이다. 未詳法嗣인지라 고로 여기에 附錄한다〉.
●大好; 1. 풍자성지(諷刺性地)에서 상대방의 어구를 중복할 때 앞에 대호(大好)를 더함. 호일개(好一箇)에 상당함. 2. 십분(十分). 비상(非常). 여기에선 1을 가리킴.
司空山本淨禪師者
絳州人也 姓張氏 幼歲披緇于曹谿之室受記 𨽻司空山無相寺 唐天寶三年玄宗遣中使楊光庭入山 採常春藤 因造丈室 禮問曰 弟子慕道斯久 願和尙慈悲 略垂開示 師曰 天下禪宗碩學 咸會京師 天使歸朝 足可咨決 貧道隈山傍水 無所用心 光庭泣拜 師曰 休禮貧道 天使爲求佛邪 問道邪 曰 弟子智識昏昧 未審佛之與道 其義云何 師曰 若欲求佛 卽心是佛 若欲會道 無心是道 曰 云何卽心是佛 師曰 佛因心悟 心以佛彰 若悟無心 佛亦不有 曰 云何無心是道 師曰 道本無心 無心名道 若了無心 無心卽道 光庭作禮信受 旣回闕 庭具以山中所遇奏聞 卽勑光庭詔師到京 勑住白蓮亭
●司空山; 位於安徽省太湖縣西北六十里 山中有無相寺 二祖慧可傳衣鉢於三祖僧璨之所 又司空本淨於此振宗風 [大明一統志十四 大淸一統志七十六]
●披緇; 穿上黑色僧衣 指出家爲僧
●中使; 宫中派出的使者 多指宦官
●丈室; 寺院住持僧的房間
●禪宗; 又稱佛心宗 達磨宗 指以菩提達磨爲初祖 探究心性本源 以期見性成佛之大乘宗派 兼含天台三論二系 而不限於達磨宗 唐中葉以降 達磨宗興盛 禪宗遂專指達磨宗而言
●京師; 公羊傳五桓公九年曰 京師者何 天子之居也 京者何 大也 師者何 衆也 天子之居必以衆大之辭言之 [大慧書栲栳珠]
●天使; 諸侯國稱天子使者曰天使 又指天子使臣 一般由宦官擔任
●隈山傍水; 挨著山水
●奏聞; 臣下將事情向帝王報告
사공산(司空山) 본정선사(本淨禪師)란 자는
강주(絳州; 지금의 산서성 新絳) 사람이며 성은 장씨(張氏)다. 유세(幼歲)에 조계지실(曹谿之室)에서 피치(披緇)하고 수기(受記)했으며 사공산 무상사(無相寺)에 예속되었다. 당(唐) 천보(天寶) 3년(744) 현종(玄宗)이 중사(中使) 양광정(楊光庭)을 보내 입산하여 상춘등(常春藤)을 캐게(采) 했는데 인하여 장실(丈室)로 나아가 예문(禮問)해 가로되 제자가 모도(慕道)한 지 이에 오래되었습니다. 원컨대 화상이 자비로 간략히 개시(開示)를 내리십시오. 사왈(師曰) 천하의 선종(禪宗) 석학(碩學)이 모두(咸) 경사(京師)에 모였는데 천사(天使)가 조정(朝廷)에 돌아가면 족히 가히 자결(咨決; 斷決)하리니 빈도(貧道)는 외산방수(隈山傍水)하여 용심(用心)하는 바가 없습니다. 광정(光庭)이 읍배(泣拜)하자 사왈 빈도(貧道)에게 예배하지 마시오. 천사(天使)는 불(佛)을 구합니까, 도(道)를 묻습니까. 가로되 제자는 지식(智識)이 혼매(昏昧)합니다. 미심(未審)하오니 불(佛)과 도(道)는 그 뜻(義)이 무엇입니까(云何). 사왈 만약 구불(求佛)하려고 한다면 곧 마음(卽心)이 이 부처며 만약 회도(會道; 도를 알다)하려고 한다면 무심(無心)이 이 도입니다. 가로되 어찌하여(云何) 곧 마음(卽心)이 이 부처입니까. 사왈 부처는 마음으로 인해 깨치고 마음은 부처를 써서(以) 나타나거니와(彰) 만약 무심을 깨달으면 부처도 또한 있지 않습니다. 가로되 어찌하여 무심이 이 도입니까. 사왈 도는 본래 무심이며 무심을 이름해 도니 만약 무심을 깨달으면(了) 무심이 곧 도입니다. 광정(光庭)이 작례(作禮)하고 신수(信受)했다. 이미 대궐로 돌아가자 광정이 산중에서 만났던 바를 갖추어 주문(奏聞)했고 곧 광정에게 칙명해 스님을 불러(詔) 경사(京師; 京)에 이르게 하고 칙명으로 백련정(白蓮亭)에 거주했다.
●司空山; 안휘성 태호현 서북 60리에 위치함. 산중에 무상사(無相寺)가 있으며 2조 혜가가 3조 승찬에게 의발을 전한 곳임. 또 사공본정(司空本淨)이 여기에서 종풍을 떨쳤음 [대명일통지14. 대청일통지76].
●披緇; 흑색의 승의(僧衣)를 위에 입음이니 출가하여 승인이 됨을 가리킴.
●中使; 궁중에서 파출(派出)한 사자니 다분히 환관을 가리킴.
●丈室; 사원 주지승의 방간(房間).
●禪宗; 또 불심종ㆍ달마종이라 일컬음. 보리달마를 초조(初祖)로 삼아 심성(心性)의 본원(本源)을 탐구(探究)하여 견성성불을 기약하는 대승종파를 가리킴. 겸하여 천태(天台) 삼론종(三論宗) 두 계통을 포함하므로 달마종에 국한되지 않음. 당나라 중엽 이강(以降; 이후)으로 달마종이 흥성하였으므로 선종이라 하면 드디어 오로지 달마종을 가리켜 말함.
●京師; 공양전5 환공 9년에 가로되 경사(京師)란 것은 무엇인가 하면 천자의 거처다. 경(京)이란 것은 무엇인가, 대(大)다. 사(師)란 것은 무엇인가, 중(衆)이다. 천자의 거처는 반드시 중대(衆大)의 말로 이를 말한다 [대혜서고로주].
●天使; 제후국이 천자의 사자를 일컬어 가로되 천사라 함. 또 천자의 사신을 가리킴. 일반으로 환관으로 말미암아 담임함.
●隈山傍水; 산수에 애착(挨著; 기댐)함.
●奏聞; 신하가 사정(事情)을 가지고 제왕(帝王)을 향해 보고함.
越明年正月十五日 召兩街名僧碩學赴內道場 與師闡揚佛理 時有遠禪師者 抗聲謂師曰 今對聖上 較量宗旨 應須直問直答 不假繁辭 只如禪師所見 以何爲道 師曰 無心是道 遠曰 道因心有 何得言無心是道 師曰 道本無名 因心名道 心名若有 道不虛然 窮心旣無 道憑何立 二俱虛妄 總是假名 遠曰 禪師見有身心 是道已否 師曰 山僧身心本來是道 遠曰 適言無心是道 今又言身心本來是道 豈不相違 師曰 無心是道 心泯道無 心道一如 故言無心是道 身心本來是道 道亦本是身心 身心本旣是空 道亦窮源無有 遠曰 觀禪師形質甚小 却會此理 師曰 大德只見山僧相 不見山僧無相 見相者是大德所見 經云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其道 若以相爲實 窮劫不能見道 遠曰 今請禪師於相上說於無相 師曰 淨名經云 四大無主 身亦無我 無我所見 與道相應 大德若以四大有主是我 若有我見 窮劫不可會道也 遠聞語失色 逡巡避席 師有偈曰 四大無主復如水 遇曲逢直無彼此 淨穢兩處不生心 壅決何曾有二意 觸境但似水無心 在世縱橫有何事 復云 一大如是 四大亦然 若明四大無主 卽悟無心 若了無心 自然契道
●兩街; 左右街 原是唐代之官職名稱 唐代時 長安有六街 分爲左三街右三街 左右街使司掌巡察巡警之責 德宗貞元年間(785-805) 沿用左右街之名稱 而置左右街大功德使 專門總理僧尼之名籍 唐憲宗元和年間(806 -820) 於兩街功德使之下 設置僧錄 以雲邃爲右街僧錄 端甫爲左街僧錄 又左右僧錄司有時倂爲一職 稱爲兩街僧錄或左右街僧錄 [大宋僧史略中 釋門正統四 宋高僧傳六 同十七 同二十九]
●已否; 亦作以否以不 猶言與否 表疑問之詞 其作用相當於現代漢語中的嗎 不 同否
●山僧; 猶云山野僧 謙辭也
●卽見其道; 金剛經云 則見如來
●淨名經; 維摩經之異名
●逡巡; 徘徊不前 猶豫不決
명년(明年)으로 넘어가(越) 정월 15일에 양가(兩街)의 명승(名僧)과 석학(碩學)을 불러(召) 내도량(內道場)에 다다라 스님과 더불어 불리(佛理)를 천양(闡揚)하게 했다. 당시에 원선사(遠禪師)란 자가 있어 항성(抗聲)으로 스님에게 일러 가로되 지금 성상(聖上)을 대면하여 종지(宗旨)를 교량(校量)하니 응당 모름지기 직문직답(直問直答)하고 번사(繁辭)를 빌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지여(只如) 선사(禪師)의 소견(所見)으론 무엇으로써 도를 삼습니까. 사왈(師曰) 무심(無心)이 이 도입니다. 원왈(遠曰) 도는 마음으로 인해 있거늘 어찌 무심이 이 도라고 말함을 얻습니까. 사왈(師曰) 도는 본래 이름이 없고 마음으로 인해 이름을 도라 합니다. 마음과 이름이 만약 있다면 도가 허연(虛然)하지 않겠으나 마음을 궁구하매 이미 없거늘 도(道)인들 무엇에 의빙(依憑)해 성립하겠습니까. 둘 다 허망하며 모두 이 가명(假名)입니다. 원왈(遠曰) 선사는 신심(身心)이 있음을 이 도라고 보십니까(已否). 사왈 산승(山僧)은 신심(身心)이 본래 이 도입니다. 원왈(遠曰) 아까(適) 말씀하되 무심이 이 도라 했거늘 지금 또 말하되 신심(身心)이 본래 이 도라 하니 어찌 서로 위배(違背)되지 않겠습니까. 사왈 무심이 이 도며 심(心)이 망하면(泯) 도(道)도 없습니다. 심과 도가 일여(一如)한지라 고로 말하되 무심이 이 도라 했습니다. 신심(身心)이 본래 이 도며 도도 또한 본시(本是) 신심(身心)입니다. 신심(身心)이 본래 이미 이 공(空)한지라 도도 또한 근원(根源)을 궁구하면 있지 않습니다. 원왈(遠曰) 선사를 보건대 형질(形質)이 심(甚)히 작거늘 도리어 이 도리를 아십니다. 사왈 대덕(大德)은 다만 산승의 상(相)만 보고 산승의 무상(無相)을 보지 못하나니 상을 보는 것은 이 대덕의 소견(所見)입니다. 경(經; 금강경)에 이르되 무릇 있는 바 상(相)은 다 이 허망이니 만약 제상(諸相)이 상(相)이 아님을 보면 곧 그 도를 본다(卽見其道) 했습니다. 만약 상(相)을 실(實)로 삼으면 궁겁(窮劫; 無窮한 겁)토록 능히 견도(見道)하지 못합니다. 원왈(遠曰) 지금 선사에게 청하나니 상상(相上; 上은 방면을 표시)에서 무상(無相)을 설하십시오. 사왈 정명경(淨名經; 卷中)에 이르되 4대(大)는 무주(無主)며 몸도 또한 무아(無我)라 했으니 아(我)라는 소견(所見)이 없어야 도와 더불어 상응합니다. 대덕이 만약 4대(大)로써 주(主)가 있고 이 아(我)라 하여 만약 아견(我見)이 있다면 궁겁토록 가히 도를 알지 못합니다. 원공(遠)이 말씀을 듣자 실색(失色)하고 준순(逡巡)하며 좌석을 피했다. 스님이 게가 있어 가로되 4대(大)는 주(主)가 없고 다시 물과 같나니/ 굽음을 만나거나(遇) 곧음(直)을 만나거나(逢) 피차(彼此)가 없다/ 정예(淨穢) 양처(兩處)에서 마음을 생기(生起)하지 않거늘/ 옹결(壅決; 막힘과 뚫림)에 어찌 일찍이 두 뜻이 있으랴/ 촉경(觸境)하매 단지 물의 무심함과 같다면/ 재세(在世)하며 종횡(縱橫)한들 무슨 일이 있으리오. 다시 이르되 1대(大; 水大를 가리킴)가 이와 같아서 4대(大)도 또한 그러하나니 만약 4대에 주(主)가 없음을 밝힌다면 곧 무심을 깨치고 만약 무심을 깨친다면(了) 자연히 도와 계합하리라.
●兩街; 좌우가(左右街)니 원래 이 당대(唐代)의 관직의 명칭이었음. 당대의 시절에 장안에 6가(街)가 있었는데 나누어 좌3가(左三街) 우3가(右三街)로 삼았음. 좌우가사(左右街使)는 순찰과 순경(巡警)의 책무를 맡아 장악했음. 덕종(德宗) 정원년 간(785-805) 좌우가의 명칭을 따라 써 좌우가대공덕사(左右街大功德使)를 설치하였는데 전문적으로 승니의 명적(名籍)을 총리(總理)하였음. 당 헌종(憲宗) 원화년 간(806-820) 양가(兩街)의 공덕사(功德使) 아래 승록(僧錄)을 설치했고 운수(雲邃)를 우가승록으로 삼고 단보(端甫)를 좌가승록으로 삼았음. 또 좌우승록사는 어떤 때엔 합병하여 1직(職)으로 만들었으며 양가승록 혹은 좌우가승록이라고 일컬었음 [대송승사략중. 석문정통4. 송고승전6, 동17, 동29].
●已否; 또한 이부(以否)ㆍ이무(以不)로 지음. 여부(與否)라고 말함과 같음. 의문을 표하는 사(詞)니 그 작용은 현대(現代) 한어(漢語) 중의 마(嗎; 조사. 무엇)에 상당함. 부(不)는 부(否)와 같음.
●山僧; 산야승(山野僧)이라고 이름과 같음. 겸사(謙辭)임.
●卽見其道; 금강경에 이르되 곧 여래를 본다.
●淨名經; 유마경의 다른 이름.
●逡巡; 배회(徘徊)하며 전진하지 못함. 유예(猶豫)하며 결정하지 못함.
志明禪師問 若言無心是道 瓦礫無心亦應是道 又曰 身心本來是道 四生十類皆有身心 亦應是道 師曰 大德若作見聞覺知解會 與道懸殊 卽是求見聞覺知之者 非是求道之人 經云 無眼耳鼻舌身意 六根尙無 見聞覺知憑何而立 窮本不有 何處存心 焉得不同草木瓦礫 明杜口而退 師有偈曰 見聞覺知無障礙 聲香味觸常三昧 如鳥空中只麽飛 無取無捨無憎愛 若會應處本無心 始得名 爲觀自在
●四生十類; 四生 胎生 卵生 濕生 化生 十類 地獄 餓鬼 畜牲 阿修羅 人 天 聲聞 緣覺 菩薩 佛
●只麽; 就這樣 如此 麽 這麽那麽的省文
●觀自在; 慈恩寺三藏法師傳二 阿縛盧枳多伊濕伐羅菩薩像 唐言觀自在 合字連聲梵語如上 分文而言 卽阿縛盧枳多譯曰觀 伊濕伐羅譯曰自在 舊云光世音 或觀世音 或觀世音自在 皆訛也
지명선사(志明禪師)가 묻되 만약 말하되 무심(無心)이 이 도라고 한다면 와력(瓦礫)도 무심하니 또한 응당 이 도라야 할 것입니다. 또 가로되 신심(身心)이 본래 이 도라고 할진대 사생십류(四生十類)가 모두 신심(身心)이 있으니 또한 응당 이 도라야 할 것입니다. 사왈(師曰) 대덕(大德)이 만약 견문각지(見聞覺知)로 해회(解會; 領會)를 짓는다면 도와 현수(懸殊; 아주 다름)하여 즉시(卽是) 견문각지를 구하는 자며 이 구도지인(求道之人)이 아닙니다. 경(經)에 이르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가 없다. 6근(根)도 오히려 없거늘 견문각지를 무엇에 의빙해 세우리오. 근본을 궁구하매 있지 않거늘 어느 곳에 마음을 두겠으며 어찌(焉) 초목와력(草木瓦礫)과 같지 않음을 얻겠습니까. 지명(志明)이 입을 닫고(杜口) 물러났다. 스님이 또 게가 있어 가로되 견문각지가 장애가 없고/ 성향미촉(聲香味觸)도 늘 삼매다/ 마치 새가 공중에 다만(只麽) 낢과 같아서/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고 증애도 없다/ 만약 응하는 곳이 본래 무심임을 안다면/ 비로소 관자재(觀自在)라고 이름함을 얻는다.
●四生十類; 사생(四生)은 태생ㆍ난생ㆍ습생ㆍ화생이며 십류(十類)는 지옥ㆍ아귀ㆍ축생ㆍ아수라ㆍ인ㆍ천ㆍ성문ㆍ연각ㆍ보살ㆍ불.
●只麽; 바로 저양(這樣; 이 모양)ㆍ이와 같이. 마(麽)는 저마나마(這麽那麽)의 생문(省文).
●觀自在; 자은사삼장법사전2. 아바로기다이습벌라보살상(阿縛盧枳多伊濕伐羅菩薩像) 당나라 말로는 관자재다. 글자를 합하고 소리를 연결한 범어는 위와 같다. 글을 나누어 말하자면 곧 아바로기다는 번역해 가로되 관(觀)이며 이습벌라는 번역해 가로되 자재(自在)다. 예전에 이른 광세음 혹은 관세음 혹은 관세음자재는 다 그르다.
眞禪師問 道旣無心 佛有心否 佛之與道 是一是二 師曰 不一不二 曰 佛度衆生 爲有心故 道不度人 爲無心故 一度一不度 何得無二 師曰 若言佛度衆生道無度者 此是大德妄生二見 如山僧卽不然 佛是虛名 道亦妄立 二俱不實 總是假名 一假之中 如何分二 曰 佛之與道 總是假名 當立名時 是誰爲立 若有立者 何得言無 師曰 佛之與道 因心而立 推窮立心 心亦是無 心旣是無 卽悟二俱不實 知如夢幻 卽悟本空 彊立佛道二名 此是二乘人見解 師乃說無修無作偈曰 見道方修道 不見復何修 道性如虛空 虛空何所修 徧觀修道者 撥火覔浮漚 但看弄傀儡 線斷一時休
●傀儡; 祖庭事苑六 傀儡 上口猥切 下落猥切 又云窟此磊 作偶人以戲喜欲舞 本喪家樂也 漢末始用之於喜會 齊後主高緯尤所好 高麗國亦有之
진선사(眞禪師)가 묻되 도가 이미 무심(無心)이면 불(佛)은 유심(有心)입니까. 불(佛)과 도(道)는 이 하나입니까, 이 둘입니까. 사왈(師曰)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습니다. 가로되 부처가 중생을 제도(濟度)함은 유심(有心)한 연고며 도가 사람을 제도하지 못함은 무심(無心)한 연고입니다. 하나는 제도하고 하나는 제도하지 못하거늘 어찌 무이(無二)라 함을 얻습니까. 사왈 만약 말하되 부처는 중생을 제도하고 도는 제도함이 없다고 한다면 이것은 이 대덕(大德)이 허망하게 2견(見)을 낸 것입니다. 예컨대(如) 산승은 곧 그렇지 않나니 부처는 이 허명(虛名)이며 도도 또한 망립(妄立)했습니다. 둘 모두(俱) 실(實)이 아니라 모두(總) 이 가명(假名)이거늘 일가(一假)의 가운데 어찌 둘을 나누겠습니까. 문왈(問曰) 불(佛)과 도(道)가 모두 이 가명(假名)이라면 이름을 건립할 때를 당해 이 누가 건립했습니까. 만약 건립한 자가 있다면 어찌 없다 함을 얻습니까. 사왈 불과 도는 마음으로 인해 건립했고 건립한 마음을 추궁(推窮)하매 마음도 역시(無) 없습니다. 마음이 이미 이 없을진대 곧 둘 모두 실(實)이 아님을 깨칠 것입니다. 몽환(夢幻)과 같은 줄 알아야 곧 본공(本空)을 깨닫습니다. 억지로(彊) 불도(佛道) 2명(名)을 건립함은 이것은 이 이승인(二乘人)의 견해입니다. 스님이 이에 무수무작게(無修無作偈)를 설해 가로되 도를 보아야 비로소 도를 닦거늘/ 보지 못했다면 다시 어떻게 닦으리오/ 도의 자성(自性)은 허공과 같거늘/ 허공을 어떻게 닦을 바이겠는가/ 수도하는 자를 두루 보매/ 불을 헤쳐서 뜬 거품을 찾음이로다/ 다만 괴뢰(傀儡) 놀림을 보아라/ 실이 끊어지면 일시에 쉬느니라
●傀儡; 조정사원6. 괴뢰(傀儡) 상은 구외절(口猥切; 괴)이며 하는 락외절(落猥切; 뢰)임. 또 이르되 굴차뢰(窟此磊)임. 우인(偶人; 허수아비)을 만들어 희희(戲喜)하며 춤을 추려고 하는 것이며 본래 상가(喪家)의 오락임. 한말에 비로소 희회(喜會)에 이를 썼으며 제(齊; 北齊)의 후주인 고위(高緯)가 더욱 좋아했던 것이며 고려국에도 또한 이것이 있음.
法空禪師問 佛之與道 俱是假名 十二分敎 亦應不實 何以從前尊宿皆言修道 師曰 大德錯會經意 道本無修 大德彊修 道本無作 大德彊作 道本無事 彊生多事 道本無知 於中强知 如此見解 與道相違 從前尊宿不應如是 自是大德不會 請思之 師有偈曰 道體本無修 不修自合道 若起修道心 此人不會道 棄却一眞性 却入閙浩浩 忽逢修道人 第一莫向道
●十二分敎; 與十二部經 十二分經同 三藏法數三十四 十二分經[亦名十二部經出大智度論] 一修多羅 梵語修多羅 華言契經 契者 上契諸佛之理 下契衆生之機 經者 法也常也 十界同遵曰法 三世不易曰常 此聖敎之總名也 又修多羅卽是長行 直說法相 隨其義理長短 不以字數爲拘也 二祇夜 梵語祇夜 華言應頌 又云重頌 謂應前長行之文 重宣其義 或六句四句三句二句 皆名頌也 三伽陀 梵語伽陀 華言諷頌 謂不頌長行 直說偈句 如金光明經中空品等是也 四尼陀羅 梵語尼陀羅 華言因緣 如經中有人問故爲說是事 如律中有人犯是事故制是戒 如來所說一切根本緣起之事 皆名因緣 如法華經中化城喩品說宿世因緣等是也 五伊帝目多 梵語伊帝目多 華言本事 謂說諸菩薩弟子因地所行之事 如法華經中本事品云 藥王菩薩於日月淨明德佛所 得法歡喜 卽然身臂 以爲供養 修諸苦行 求菩提道等是也 六闍多伽 梵語闍多伽 華言本生 謂說佛菩薩本地受生之事 如涅槃經云 比丘當知 我於過去作鹿羆麞兔龍 及作金翅鳥粟散王轉輪聖王之類是也 七阿浮達磨 梵語阿浮達磨 華言未曾有 亦云希有 謂如佛初生時 卽行七步 足迹之處 皆有蓮華 放大光明 遍照十方世界 而發是言 我是度一切衆生生老病死者 地大震動 天雨衆華 樹出音聲 作天妓樂 如是等無量希有之事是也 八婆陀 梵語婆陀 具云阿波陀那 華言譬喩 謂如來說法 爲鈍根者 假譬喩以曉示之 令其開解 如法華經中火宅藥草等喩是也 九優婆提舍 梵語優婆提舍 華言論議 謂諸經中問答辯論諸法之事 如法華經提婆達多品中 智積菩薩與文殊師利 論說妙法等是也 十優陀那 梵語優陀那 華言自說 謂無有人問 如來以他心智 觀衆生機 而自宣說 如楞嚴會上說五十種魔事 不待阿難請問 又如彌陀經無有緣起 自告舍利弗等是也 五十種魔者 謂色受想行識五陰 各有十種也 十一毘佛略 梵語毘佛略 華言方廣 方者法也 廣者大也 又正理曰方 包富曰廣 謂大乘方等經典 其義廣大 猶如虛空也 十二和伽羅 梵語和伽羅 華言授記 謂如來爲諸菩薩辟支佛聲聞 授作佛記 如法華經云 汝阿逸多 於當來世 而成佛道 號曰彌勒等是也
●鬧浩浩; 猶鬧哄哄 喧鬧貌
법공선사(法空禪師)자 묻되 불(佛)과 도(道)가 모두(俱) 이 가명(假名)이라면 십이분교(十二分敎)도 또한 응당 실(實)이 아닐 것이거늘 무슨 까닭으로 종전(從前)의 존숙(尊宿)이 모두 수도(修道)를 말했습니까. 사왈(師曰) 대덕(大德)은 경의(經意)를 착회(錯會)했습니다. 도는 본래 닦음(修)이 없거늘 대덕이 억지(彊)로 닦고 도는 본래 지음(作)이 없거늘 대덕이 억지로 짓고 도는 본래 무사(無事)이거늘 억지로 다사(多事)를 내고 도는 본래 앎(知)이 없거늘 어중(於中)에 억지로 아니 이와 같은 견해는 도와 상위(相違)합니다. 종전(從前)의 존숙은 응당 이와 같지 않았거늘 스스로 이 대덕이 알지 못하니 청컨대 이를 사유하시오. 스님이 또 게가 있어 가로되 도체(道體)는 본래 무수(無修)라서/ 불수(不修)라야 저절로 도에 합하나니/ 만약 수도하는 마음을 일으키면/ 이 사람은 도를 알지 못한다/ 1진성(眞性)을 버려버리고/ 도리어 요호호(鬧浩浩)에 들어가나니/ 홀연히 수도하는 사람을 만나거든/ 첫째로 향해 말하지 말아라.
●十二分敎; 12부경(十二部經)ㆍ12분경(十二分經)과 같음. 삼장법수34 십이분경(十二分經) [또한 이름이 12부경. 출대지도론] 1. 수다라(修多羅; 梵 sūtra) 범어 수다라는 화언(華言; 中華의 말)으론 계경(契經)이다. 계(契)란 것은 위로 제불의 이치에 계합(契合)하고 아래로 중생의 근기(根機)에 계합함이다. 경(經)이란 것은 법(法)이며 상(常)이다. 10계(界)가 한가지로 준수(遵守)함을 가로되 법이며 3세(世)에 바뀌지 않음을 가로되 상(常)이니 이는 성교(聖敎)의 총명(總名)이다. 또 수다라는 곧 이 장행(長行)이니 바로 법상(法相)을 설해 그 의리(義理)의 장단(長短)을 따르고 글자 수로써 구애되지 않는다. 2. 기야(祇夜; 梵 geya) 범어 기야는 화언으론 응송(應頌)이며 또 이르되 중송(重頌)이니 이르자면 앞의 장행의 문(文)에 응하여 거듭 그 뜻을 선포(宣布)함이다. 혹은 6구(句)ㆍ4구ㆍ3구ㆍ2구를 다 송(頌)이라고 이름한다. 3. 가타(伽陀; 梵 gāthā) 범어 가타는 화언으론 풍송(諷頌)이다. 이르자면 장행을 송(頌)하지 않고 바로 게구(偈句)를 설함이니 예컨대(如) 금광명경(金光明經) 중의 공품(空品) 등이 이것이다. 4. 니다라(尼陀羅; 梵 nidāna) 범어 니다라는 화언으론 인연이다. 예컨대(如) 경중(經中)에 어떤 사람이 묻는 고로 이 일을 설하나니 예컨대(如) 율중(律中)에 어떤 사람이 이 일을 범하는 고로 이 계를 제정(制定)함이다. 여래가 설하는 바 일체의 근본 연기(緣起)의 일을 다 인연이라고 이름한다. 예컨대(如) 법화경 중 화성유품(化城喩品)에서 숙세(宿世)의 인연을 설하는 등이 이것이다. 5. 이제목다(伊帝目多; 梵 itivṛtt aka) 범어 이제목다는 화언으론 본사(本事)니 이르자면 모든 보살과 제자의 인지(因地)에서 행한 바의 일을 설함이니 예컨대(如) 법화경 중 본사품(本事品)에 이르되 약왕보살(藥王菩薩)이 일월정명덕불(日月淨明德佛)의 처소에서 법을 얻어 환희하여 곧 몸과 팔을 태워 공양으로 삼아 모든 고행을 닦아 보리도(菩提道)를 구하는 등이 이것이다. 6. 사다가(闍多伽; 梵 jātaka) 범어 사다가는 화언으론 본생(本生)이니 이르자면 부처와 보살의 본지(本地)의 수생(受生)의 일을 설함이다. 예컨대(如) 열반경에 이르되 비구여 마땅히 알라, 내가 과거에 사슴ㆍ큰 곰ㆍ노루ㆍ토끼ㆍ용을 지었으며 및 금시조ㆍ속산왕(粟散王)ㆍ전륜성왕을 지었다 한 종류가 이것이다. 7. 아부달마(阿浮達磨; 梵 adbhuta-dharma) 범어 아부달마는 화언으론 미증유(未曾有)며 또는 이르되 희유(希有)니 이르자면 예컨대(如) 부처가 처음 탄생할 때 곧 일곱 걸음를 행하고 족적(足迹)의 곳에 다 연화(蓮華)가 있어 큰 광명을 놓아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면서 이 말씀을 발하되 나는 곧 일체중생의 생로병사(生老病死)를 제도하는 자이니라. 땅이 크게 진동하고 하늘에서 뭇 꽃을 내리고 나무들이 음성을 내어 천기(天妓)의 음악을 짓는 이와 같은 등의 무량한 희유(希有)의 일이 이것이다. 8. 바타(婆陀) 범어 바타는 갖추어 이르자면 아바다나(阿波陀那; 梵 avadāna)니 화언으론 비유(譬喩)다. 이르자면 여래가 설법하면서 둔근(鈍根)인 자를 위해 비유를 빌려 타일러서 그에게 보여 그로 하여금 개해(開解)케 함이다. 예컨대(如) 법화경 중 화택(火宅)ㆍ약초(藥草) 등의 비유가 이것이다. 9. 우바제사(優婆提舍; 梵 upadeśa) 범어 우바제사는 화언으론 논의(論議)니 이르자면 제경(諸經) 중에 제법(諸法)의 일을 문답하고 변론(辯論)함이다. 예컨대(如) 법화경 제바달다품(提婆達多品) 중 지적보살(智積菩薩)과 문수사리가 묘법(妙法)을 논설하는 등이 이것이다. 10. 우다나(優陀那; 梵 udāna) 범어 우다나는 화언으로 자설(自說)이니 이르자면 묻는 사람이 있지 않는데 여래가 타심지(他心智)로 중생의 근기를 관하여 스스로 선설(宣說)함이다. 예컨대(如) 릉엄회상(楞嚴會上)에서 50종 마사(魔事)를 설했는데 아난의 청문(請問)을 기다리지 않았다. 또 예컨대(如) 미타경은 연기(緣起)가 있지 않는데 스스로 사리불(舍利弗) 등에게 고한 등이 이것이다. 50종 마(魔)란 것은 이르자면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5음(陰)에 각기 10종이 있다. 11. 비불략(毗佛略; 梵 vaipulya) 범어 비불략은 화언으로 방광(方廣)이니 방(方)이란 것은 법(法)이며 광(廣)이란 것은 대(大)다. 또 바른 이치를 가로되 방(方)이며 포괄(包括)함이 풍부함을 가로되 광(廣)이다. 이르자면 대승방등경전(大乘方等經典)은 그 뜻이 광대하여 마치 허공과 같음이다. 12. 화가라(和伽羅; 梵 vyākaraṇa) 범어 화가라는 화언으론 수기(授記)다. 이르자면 여래가 모든 보살ㆍ벽지불(辟支佛)ㆍ성문(聲聞)을 위해 작불(作佛)의 기(記)를 줌이니 예컨대(如) 법화경에 이르되 너 아일다(阿逸多)는 당래세(當來世)에 불도를 이루리니 호하여 가로되 미륵이니라 한 등이 이것이다.
●鬧浩浩; 요홍홍(鬧哄哄; 시끄럽게 떠들썩함)과 같음. 훤뇨(喧鬧; 여러 사람이 왁자하게 떠듦)한 모양.
安禪師問 道旣假名 佛云妄立 十二分敎亦是接物度生 一切是妄 以何爲眞 師曰 爲有妄故 將眞對妄 推窮妄性本空 眞亦何曾有故 故知眞妄總是假名 二事對治 都無實體 窮其根本 一切皆空 曰 旣言一切是妄 妄亦同眞 眞妄無殊 復是何物 師曰 若言何物 何物亦妄 經云 無相似 無比況 言語道斷 如鳥飛空 安慙伏不知所措 師有偈曰 推眞眞無相 窮妄妄無形 返觀推窮心 知心亦假名 會道亦如此 到頭亦只寧
●接物度生; 卽接引化度世間衆生 物 人也
●慙伏; 同慚伏 亦作慚服 慚愧而伏地 羞愧而心服
●只寧; 義同只麽
안선사(安禪師)가 묻되 도(道)가 이미 가명(假名)이며 불(佛)도 망립(妄立)이라고 이르시니 십이분교(十二分敎)도 역시(亦是) 접물도생(接物度生)이거늘 일체(一切)가 이 망(妄)이라면 무엇으로써 진(眞)을 삼습니까. 사왈(師曰) 망(妄)이 있기 때문의 연고로 진(眞)을 가져 망(妄)에 상대하거니와 망성(妄性)을 추궁(推窮)하건대 본공(本空)이거늘 진(眞)인들 어찌 일찍이 있는 연고이겠습니까. 고로 알지니 진망(眞妄)이 모두(總) 이 가명(假名)이며 2사(事)를 대치(對治)하므로 모두 실체가 없고 그 근본을 추궁하건대 일체가 다 공(空)입니다. 가로되 이미 말하되 일체가 이 망(妄)이라 했으니 망도 또한 진(眞)과 같아서 진망(眞妄)이 다르지 않으리니 다시 이 무슨 물건입니까. 사왈 만약 무슨 물건이냐고 말한다면 무슨 물건이라 함도 또한 망(妄)입니다. 경운(經云) 상사(相似)함이 없고 비황(比況; 比較)함이 없다 하니 언어도단(言語道斷)이며 새가 허공에 낢과 같습니다. 안(安)이 참복(慙伏)하고 조치(措置)할 바를 알지 못했다. 스님이 또 게가 있어 가로되 진(眞)을 추구하매 진은 무상(無相)이며/ 망(妄)을 추궁하매 망은 무형(無形)이다/ 추궁하는 마음을 돌이켜 보매/ 아는 마음도 또한 가명(假名)이다/ 도를 이회(理會)함도 또한 이와 같아서/ 마침내(到頭) 또한 지녕(只寧; 다만 이러함)이다.
●接物度生; 곧 세간 중생을 접인(接引)하고 화도(化度)함. 물(物)은 인(人)임.
●慙伏; 참복(慚伏)과 같음. 또한 참복(慚服)으로 지음. 부끄러워하면서(慚愧) 땅에 엎드림. 부끄러워하면서(羞愧) 마음으로 복종(服從)함.
●只寧; 뜻이 지마(只麽)와 같음.
達性禪師問 禪師至妙至微 眞妄雙泯 佛道兩亡 修行性空 名相不實 世界如幻 一切假名 作此解時 不可斷絕衆生善惡二根 師曰 善惡二根 皆因心有 窮心若有 根亦非虛 推心旣無 根因何立 經云 善不善法 從心化生 善惡業緣 本無有實 師有偈曰 善旣從心生 惡豈離心有 善惡是外緣 於心實不有 捨惡歸何處 取善令誰守 傷嗟二見人 攀緣兩頭走 若悟本無心 始悔從前咎
●攀緣; 攀取緣慮 心念執著于塵俗事物 如同猿猴攀樹 佛家稱爲攀緣
달성선사(達性禪師)가 묻되 선(禪)은 이 지묘지미(至妙至微)합니다. 진망(眞妄)이 쌍민(雙泯; 雙亡)하고 불도(佛道)가 양망(兩亡)하고 수행(修行)의 자성이 공(空)했고 명상(名相)이 실제(實際)가 아니고 세계(世界)는 환(幻)과 같고 일체는 가명(假名)이거니와 이 견해를 지을 때 중생의 선악(善惡) 2근(根)을 단절함은 옳지 못할 것입니다. 사왈(師曰) 선악 2근은 모두 마음으로 인해 있고 마음을 추궁하매 만약 있다면 근(根)도 또한 허(虛)가 아니겠지만 마음을 추구하매 이미 없거늘 근(根)인들 무엇으로 인해 건립하겠습니까. 경(經; 金剛三昧經)에 이르되 선(善)과 불선(不善)의 법이 마음으로 좇아 변화해 생겨난다 했으니 선악의 업연(業緣)이 본래 실(實)이 있지 않습니다. 스님이 또 게가 있어 가로되 선(善)이 이미 마음으로 좇아 생겨나거늘/ 악(惡)인들 어찌 마음을 여의고 있겠는가/ 선악은 이 외연(外緣)이며/ 마음엔 실로 있지 않다/ 악을 버려 어느 곳으로 보내며/ 선을 취해 누구로 하여금 지키게 하나/ 이견(二見)의 사람을 상차(傷嗟; 悲傷하며 感歎)하나니/ 반연(攀緣)하며 양두(兩頭)로 달리는구나/ 만약 본래 무심임을 깨치면/ 비로소 종전(從前)의 허물(咎)을 후회하리라.
●攀緣; 연려(緣慮)를 반취(攀取; 당겨서 취함)함이니 심념이 진속(塵俗)의 사물에 집착함이 마치 원후(猿猴; 원숭이)가 반수(攀樹; 나무에 매달림. 나무를 잡아당김)함과 같음이니 불가에서 반연으로 호칭함.
又有近臣問曰 此身從何而來 百年之後復歸何處 師曰 如人夢時 從何而來 睡覺時 從何而去 曰 夢時不可言無 旣覺不可言有 雖有有無 來往無所 師曰 貧道此身 亦如其夢 師有偈曰 視生如在夢 夢裏實是閙 忽覺萬事休 還同睡時悟 智者會悟夢 迷人信夢閙 會夢如兩般 一悟無別悟 富貴與貧賤 更無分別路 上元二年歸寂 諡大曉禪師
또 근신(近臣)이 있어 문왈(問曰) 이 몸은 어디로 좇아왔으며 백 년 후에 다시 어느 곳으로 돌아갑니까. 사왈(師曰) 사람이 꿈꿀 때 어디로 좇아오며 잠에서 깨었을 때 어디로 좇아가느냐 함과 같습니다. 가로되 꿈꿀 때 가히 없다고 말하지 못하고 이미 깨어선 가히 있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비록 유무(有無)가 있더라도 내왕(來往)에 처소가 없습니다. 사왈 빈도(貧道)의 이 몸도 또한 그 꿈과 같습니다. 스님이 게가 있어 가로되 삶을 보매 꿈에 있음과 같아서/ 꿈 속에 실로 이 시끄럽다가(鬧)/ 홀연히 깨매 만사를 쉬나니/ 도리어 잘 때의 깸(悟)과 같다/ 지자(智者)는 꿈인 줄 알아(會) 깨닫고/ 미인(迷人)은 꿈의 시끄러움을 믿나니/ 꿈이 양반(兩般)과 같은 줄 알다가(會)/ 한 번 깨매 별다른 깸이 없다/ 부귀와 빈천(貧賤)이/ 다시 분별할 길이 없다. 상원(上元) 2년(761) 귀적(歸寂)했고 시(諡)가 대효선사(大曉禪師)다.
玄䇿禪師者
婺州金華人也 遊方時屆于河朔 有隍禪師者 曾謁黃梅 自謂正受 師知隍所得未眞 往問曰 汝坐於此作麽 隍曰 入定 師曰 汝言入定 有心邪 無心邪 若有心者 一切蠢動之類 皆應得定 若無心者 一切草木之流 亦合得定 曰 我正入定時 則不見有有無之心 師曰 旣不見有有無之心 卽是常定 何有出入 若有出入 則非大定 隍無語良久問 師嗣誰 師曰 我師曹谿六祖 曰 六祖以何爲禪定 師曰 我師云 夫妙湛圓寂 體用如如 五陰本空 六塵非有 不出不入 不定不亂 禪性無住 離住禪寂 禪性無生 離生禪想 心如虛空 亦無虛空之量 隍聞此說 遂造于曹谿 請決疑翳 而祖意與師冥符 隍始開悟 師後却歸金華 大開法席
●婺州; 今浙江省金華
●河朔; 地區名 古代泛指黃河以北的地區
●大定; 佛海瞎堂廣錄二 上(指宋孝宗)曰 修禪定者如何 師奏云 初機若有所習 則不名大定 大定等虛空 了無修習處 亦無起滅出入處 陛下看此習定之者 盡是未證果位凡夫 直饒習到四禪八定 亦未爲究竟 故圭峰宗密禪師云 非想定後 還作飛貍之身
현책선사(玄䇿禪師)란 자는
현책선사(玄策禪師)란 자는 무주(婺州) 금화(金華) 사람이다. 유방(遊方)할 때 하삭(河朔)에 이르렀다(屆). 황선사(隍禪師; 智隍)란 자가 있었는데 일찍이 황매(黃梅; 5조)를 참알했고 스스로 이르기를 정수(正受; 삼매)라 했다. 황(隍)이 얻은 바가 진(眞)이 아님을 스님이 알고 가서 문왈(問曰) 네가 여기에서 앉아 무엇하느냐. 황이 가로되 입정(入定)한다. 사왈(師曰) 네가 입정을 말하니 유심(有心)인가 무심(無心)인가. 만약 유심이라고 한다면 일체의 준동지류(蠢動之類)가 모두 응당 득정(得定)할 것이며 만약 무심이라고 한다면 일체의 초목지류(草木之流)도 또한 합당히 득정(得定)하리라. 가로되 내가 바로(正) 입정할 때 곧 유무지심(有無之心)이 있음으로 보지 않는다. 사왈 이미 유무지심이 있음으로 보지 않는다 하니 즉시(卽是) 상정(常定; 항상 定)이거늘 어찌 출입이 있을 것이며 만약 출입이 있다면 곧 대정(大定)이 아니다. 황이 말없이 양구(良久)하고는 묻되 스님은 누구를 이었는가. 사왈 나의 스승은 조계 6조다. 가로되 6조는 무엇으로써 선정(禪定)을 삼느냐. 사왈 나의 스승이 이르되 무릇 묘담(妙湛)하고 원적(圓寂)하여 체용(體用)이 여여(如如)하고 5음(陰)은 본래 공(空)했고 6진(塵)이 있음이 아니다. 불출불입(不出不入)하고 부정불란(不定不亂)하나니 선성(禪性)은 무주(無住)라서 선적(禪寂)에 머묾을 여의었고 선성(禪性)은 무생(無生)이라서 선상(禪想)을 생기(生起)함을 여의었다. 마음이 허공과 같지만 또한 허공이란 사량(思量)이 없다. 황이 이 설을 듣자 드디어 조계로 나아가 의예(疑翳)를 결단(決斷)함을 청했고 6조의 뜻이 스님과 명부(冥符; 默契. 暗合)했고 지황이 비로소 개오(開悟)했다. 스님이 후에 금화로 돌아가(却歸) 법석을 크게 열었다.
●婺州; 지금의 절강성 금화(金華).
●河朔; 지구(地區)의 이름. 고대 널리 황하 이북의 지구를 가리켰음.
●大定; 불해할당광록2. 상(上; 송효종을 가리킴)이 가로되 선정(禪定)을 닦는 자는 어떻습니까. 스님이 아뢰어 이르되 초기(初機)가 만약 수습(修習)하는 바가 있다면 곧 대정(大定)으로 이름하지 못합니다. 대정은 허공과 같아서 마침내 수습(修習)할 곳이 없으며 또한 기멸(起滅)하고 출입하는 곳이 없습니다. 폐하가 이 습정(習定)하는 자를 보십시오. 모두 이 과위(果位)를 증득하지 못한 범부입니다. 직요(直饒; 가령. 卽使) 수습하여 사선팔정(四禪八定)에 이르더라도 또한 구경이 되지 않습니다. 고로 규봉종밀선사가 이르되 비상정(非想定)의 뒤에 도리어 비리(飛貍; 貍는 살쾡이. 너구리)의 몸을 짓는다 했습니다.
河北智隍禪師者
始參五祖 雖甞咨決而循乎漸行 乃往河北結庵長坐 積二十餘載 不見惰容 後遇䇿禪師激勵 遂往參六祖 祖愍其遠來 便垂開決 師於言下豁然契悟 前二十年所得心都無影響 其夜河北檀越士庶 忽聞空中有聲曰 隍禪師今日得道也 後回河北 開化四衆
하북(河北) 지황선사(智隍禪師)란 자는
처음 5조를 참알했고 비록 일찍이 자결(咨決; 물어 決擇)했으나 점행(漸行)을 따랐다(循). 이에 하북으로 가서 결암(結庵)하고 장좌(長坐)했는데 20여 재(載)를 쌓으면서 게으른 모습(惰容)을 보이지 않았다. 후에 책선사(策禪師; 玄策)의 격려(激勵)를 만나 드디어 6조를 참알했다. 6조가 그 원래(遠來)를 불쌍히 여겨 바로 개결(開決; 開示하여 決斷함)을 드리우자 스님이 언하에 활연(豁然)히 계오(契悟)했다. 앞 20년 동안 얻은 바 마음에 모두(都) 영향(影響)이 없었다. 그날 밤 하북의 단월(檀越)과 사서(士庶)가 공중에서 소리가 있음을 홀연히 들었으니 가로되 황선사(隍禪師)가 금일 득도했다. 후에 하북으로 돌아가 4중(衆)을 개화(開化)했다.
南陽慧忠國師者
越州諸暨人也 姓冉氏 自受心印 居南陽白崖山黨子谷 四十餘祀不下山 道行聞于帝里 唐肅宗上元二年 勑中使孫朝進賷詔徵赴京 待以師禮 初居千福寺西禪院 及代宗臨御 復迎止光宅精藍十有六載 隨機說法 時有西天大耳三藏到京 云得他心通 肅宗命國師試驗 三藏纔見師便禮拜 立于右邊 師問曰 汝得他心通那 對曰 不敢 師曰 汝道老僧卽今在甚麽處 曰 和尙是一國之師 何得却去西川看競渡 良久再問 汝道老僧卽今在甚麽處 曰 和尙是一國之師 何得却在天津橋上看弄猢猻 師良久復問 汝道老僧只今在甚麽處 藏罔測 師叱曰 這野狐精 他心通在甚麽處 藏無對〈僧問仰山曰 大耳三藏第三度 爲甚麽不見國師 山曰 前兩度是涉境心 後入自受用三昧 所以不見 又有僧問玄沙 沙曰 汝道前兩度還見麽 玄覺云 前兩度見 後來爲甚麽不見 且道利害在甚麽處 僧問趙州 大耳三藏第三度不見國師 未審國師在甚麽處 州云 在三藏鼻孔上 僧後問玄沙 旣在鼻孔上 爲甚麽不見 沙云 只爲太近〉
●南陽; 河南省西南部都市 位於漢水支流連接地 西通關中 東通江淮 南通巴蜀 北通開封洛陽的交通要地 城內龍興寺 六祖慧能法嗣荷澤神會之演法道場 府治西南白崖山黨子谷香嚴寺 南陽慧忠四十年間所住之道場 潙山靈祐法嗣香嚴智閑之擊竹大悟之所 府治北方南召縣丹霞山棲霞寺 丹霞天然之道場 汝州風穴山白雲寺 風穴延沼所創 首山寺首山省念所創 [大明一統志三○ 大淸一統志一六五 讀史方輿紀要五一]
●越州; 今浙江省紹興縣 有浙江名山會稽山 南三十里 有湛然圓澄道場雲門山顯聖寺
●帝里; 猶言帝都 京都
●臨御; 登皇帝之位也 御之一字但帝王一人可稱之也 帝王所止謂之御前 位曰御位 座曰御座
●精藍; 指佛寺 精 潔也 善也 好也 藍 伽藍
●不敢; 不敢爲 不敢當 謙辭 其實言然也
●競渡; 競相渡過 指劃船比賽
●天津橋; 在於洛陽 始建於隋 廢於元代 初爲浮橋 後爲石橋 [百度百科] ▲明一統志二十九河南河南府曰 天津橋在府城外西南 架洛水 隋煬帝建
●野狐精; 原指野狐之精魅 能作變幻 以欺誑他人 禪錄中多用作對不合禪法者的責罵語 或機語問答時 嘲謔對方的呵斥語
●自受用三昧; 又作自證三昧 三昧王三昧 爲諸佛自悟而自受用法樂之境界
남양(南陽) 혜충국사(慧忠國師)란 자는
월주(越州) 제기(諸暨) 사람이며 성이 염씨(冉氏)다. 심인(心印)을 받음으로부터 남양(南陽) 백애산(白崖山) 당자곡(黨子谷)에 거주하면서 40여 사(祀; 해) 동안 하산하지 않았다. 도행(道行)이 제리(帝里)에 알려졌고(聞) 당 숙종(肅宗) 상원(上元) 2년(761) 중사(中使) 손조진(孫朝進)에게 칙령해 재조(齎詔; 詔書를 휴대하다)하여 불러(徵) 경사(京師)에 다다르게 하고 스승의 예절로 접대(接待)했다. 처음엔 천복사(千福寺) 서선원(西禪院)에 거주했고 대종(代宗)이 임어(臨御)함에 이르러(及) 다시 영접해 광택정람(光宅精藍)에 머물렀고(止) 16재(載) 동안 수기(隨機)하여 설법했다. 때에 서천(西天)의 대이삼장(大耳三藏)이 있었는데 경사(京師)에 이르러 이르기를 타심통(他心通)을 얻었다 하므로 숙종(肅宗)이 국사에게 명(命)하여 시험하게 했다. 삼장이 겨우 스님을 보자 곧 예배하고 오른쪽에 섰다. 스님이 물어 가로되 네가 타심통(他心通)을 얻었느냐. 대답해 가로되 불감(不敢)입니다. 사왈(師曰) 네가 말하라, 노승(老僧)이 즉금(卽今) 어느 곳에 있느냐. 가로되 화상은 이 일국지사(一國之師)시거늘 왜 도리어 서천(西川)으로 가서 경도(競渡)를 봄을 얻습니까. 양구(良久)했다가 다시 묻되 네가 말하라, 노승이 즉금 어느 곳에 있느냐. 가로되 화상은 이 일국지사시거늘 왜 도리어 천진교(天津橋) 위에 있으면서 호손(猢猻) 희롱함을 봄을 얻습니까. 스님이 양구()했다가 다시 묻되 네가 말하라, 노승이 지금(只今) 어느 곳에 있느냐. 삼장이 헤아리지 못했다(罔測). 스님이 꾸짖으며 가로되 이(這) 야호정(野狐精)아, 타심통이 어느 곳에 있느냐. 삼장이 대답이 없었다〈중이 仰山에게 물어 가로되 大耳三藏이 第三度(세 번째)엔 무엇 때문에 국사를 보지 못했습니까. 앙산이 가로되 앞의 兩度(두 차례)는 이 境心에 건넜고(涉) 뒤는 自受用三昧에 든지라 所以로 보지 못했다. 또 어떤 중이 前語를 들어 玄沙에게 묻자 현사가 가로되 네가 말하라, 前의 兩度는 도리어 보았느냐. 玄覺(五代 法眼宗僧 行言)이 이르되 앞의 양도(兩度)에 만약 보았다면 後來엔 무엇 때문에 보지 못했느냐. 且道하라, 利害가 어느 곳에 있느냐. 중이 趙州에게 묻되 大耳三藏이 第三度엔 국사를 보지 못했는데 未審하오니 국사가 어느 곳에 있습니까. 조주가 이르되 삼장의 鼻孔上(上은 방면을 표시)에 있었다. 중이 후에 현사에게 묻되 이미 鼻孔上에 있었거늘 무엇 때문에 보지 못했습니까. 현사가 이르되 다만 너무 가깝기 때문이다〉.
●南陽; 하남성 서남부 도시. 한수(漢水)의 지류 연접지에 위치함. 서쪽으로 관중과 통하고 동쪽으로 강회(江淮)와 통하고 남쪽으로 파촉과 통하고 북쪽으로 개봉ㆍ낙양과 통하는 교통의 요지임. 성내의 용흥사(龍興寺)는 6조 혜능의 법사인 하택신회의 연법(演法) 도량임. 부치(府治)의 서남 백애산 당자곡의 향엄사(香嚴寺)는 남양혜충이 40년 간 거주한 바의 도량이며 위산영우의 법사인 향엄지한이, 격죽(擊竹)에 대오한 곳임. 부치(府治) 북방 남소현 단하산 서하사는 단하천연의 도량이며 여주 풍혈산 백운사는 풍혈연소가 창건한 곳이며 수산사는 수산성념이 창건한 곳임 [대명일통지30. 대청일통지165. 독사방여기요51].
●越州; 지금의 절강성 소흥현(紹興縣)이니 절강 명산 회계산이 있으며 남쪽 30리에 담연원징(湛然圓澄)의 도량 운문산 현성사가 있음.
●帝里; 제도(帝都), 경도(京都)라고 말함과 같음.
●臨御; 황제의 자리에 오름임. 어(御)란 1자는 제왕 1인만이 가히 그것을 일컬음. 제왕이 머무는 곳을 일컬어 어전(御前), 지위를 가로되 어위, 좌석을 가로되 어좌라 함.
●精藍; 불사(佛寺)를 가리킴. 정(精)은 결(潔)임. 선(善)임. 호(好)임. 람(藍)은 가람.
●不敢; 감히 하지 못하다. 감당하지 못하다. 겸사(謙辭)니 그 실은 그렇다고 말함임.
●競渡; 경쟁하며 서로 도과(渡過)함이니 배를 저으며 비새(比賽: 賽는 競技)함임.
●天津橋; 낙양에 있으며 수(隋)에서 처음 건립했고 원대(元代)에 폐했음. 처음은 부교(浮橋)가 되었으나 후에 석교(石橋)로 만들었음 [백도백과]. ▲명일통지29 하남 하남부에 가로되 천진교는 부성(府城) 밖 서남에 있다. 낙수(洛水)에 가설(架設)했고 수양제가 건립했다.
●野狐精; 원래 야호의 정매(精魅)가 능히 변환(變幻)을 지어 타인을 기광(欺誑; 속임)함을 가리킴. 선록 중에 다분히 써서 선법에 맞지 않는 자에 대한 책매어(責罵語)로 지음. 혹 기어(機語)를 문답할 때 상대방을 조학(嘲謔; 조롱하고 놀림)하는 가척어(呵斥語)임.
●自受用三昧; 또 자증삼매(自證三昧)ㆍ삼매왕삼매로 지음. 제불이 자오(自悟)하여 스스로 수용하는 법락의 경계가 됨.
一日喚侍者 者應諾 如是三召三應 師曰 將謂吾孤負汝 却是汝孤負吾〈僧問玄沙 國師喚侍者意作麽生 沙云 却是侍者會 雲居錫云 且道侍者會不會 若道會 國師又道汝孤負吾 若道不會 玄沙又道却是侍者會 且作麽生商量 玄覺徵問僧 甚麽處是侍者會處 僧云 若不會 爭解恁麽應 玄覺云 汝少會在 又云 若於這裏商量得去 便識玄沙 僧問法眼 國師喚侍者意作麽生 眼云 且去 別時來 雲居錫云 法眼恁麽道 爲復明國師意 不明國師意 僧問趙州 國師喚侍者 意作麽生 趙州云 如人暗裏書字 字雖不成 文彩已彰〉
●孤負; 辜負也 集韻 孤 負也
●商量; 原指商賈買賣物品時之互相議價 於禪林中 轉指學人參禪辨道時之問答審議 ▲祖庭事苑一 商量 如商賈之量度 使不失於中平 以各得其意也
어느 날 시자를 부르자 시자가 응낙(應諾)했다. 이와 같이 세 번 불렀고 세 번 응낙했다. 사왈(師曰) 장차 이르기를 내가 너를 저버린다(孤負) 하렸더니 도리어 이 네가 나를 저버리는구나〈중이 玄沙에게 묻되 국사가 시자를 부른 뜻이 무엇입니까. 현사가 이르되 도리어 이 시자가 알았다. 雲居錫(淸錫)이 이르되 그래 말하라, 시자가 알았느냐, 알지 못했느냐. 만약 알았다고 말한다면 국사가 또 말하되 네가 나를 저버린다 했고 만약 알지 못했다고 말한다면 현사가 또 말하되 도리어 이 시자가 알았다 했다. 그래 어떻게 商量하겠는가. 玄覺(五代 法眼宗僧 行言)이 중에게 징문(徵問; 責問)하되 어느 곳(甚麽處)이 이 시자가 안 곳인가. 僧云 만약 알지 못했다면 어찌 이렇게 응낙할 줄 알겠습니까. 현각이 이르되 네가 조금 알았다. 또 이르되 만약 이 속에서 商量하여 얻어 간다면 바로 현사를 보리라. 중이 法眼에게 묻되 국사가 시자를 부른 뜻이 무엇입니까. 법안이 이르되 다만 가고(且去) 다른 때 오너라. 雲居錫이 이르되 법안이 이렇게 말한 것은 다시 국사의 뜻을 밝힘이 되는가, 국사의 뜻을 밝히지 못했는가. 중이 趙州에게 묻되 국사가 시자를 부른 뜻이 무엇입니까. 조주가 이르되 사람이 어둠 속에서 글자를 쓸 것 같으면 글자는 비록 이루지 못하더라도 文彩는 이미 나타난다(彰)〉.
●孤負; 고부(辜負; 저버림)임. 집운 고(孤) 부(負)다.
●商量; 원래 상인이 물품을 매매할 때 호상 값을 의논함을 가리킴임. 선림 중에선 전(轉)하여 학인이 참선하거나 변도(辨道)할 때의 문답이나 심의(審議)를 가리킴. ▲조정사원1. 상량(商量) 상고(商賈; 賈는 장사 고. 장수 고)의 양탁(量度; 度은 헤아릴 탁. 잴 도)과 같이 중평(中平)을 잃지 않고 각기 그 뜻을 얻게 함.
南泉到參 師問 甚麽處來 曰 江西來 師曰 還將得馬師眞來否 曰 只這是 師曰 背後底聻 南泉便休〈長慶稜云 大似不知 保福展云 幾不到和尙此間 雲居錫云 此二尊宿 盡扶背後 只如南泉休去 爲當扶面前 扶背後〉 麻谷到參 繞禪床三匝 振錫而立 師曰 汝旣如是 吾亦如是 谷又振錫 師叱曰 這野狐精出去
●參; (一)動詞 卽學人拜見師家以問道 又修行坐禪亦稱參 如參禪辨道 (二)名詞 如詰旦升堂爲早參(朝參) 晡時(今午後四時)念誦爲晩參 晩參前坐禪爲坐參 每五日一參爲五參上堂 定期上堂爲大參 住持不定時集衆問答應酬爲小參等 此指一
●聻; 語氣詞 用于句尾 表示疑問 或陳述結束 正字通 聻 梵書聻爲語助 音你
남천(南泉)이 이르러 참(參)했다. 스님이 묻되 어느 곳에서 오느냐. 가로되 강서에서 옵니다. 사왈(師曰) 도리어 마사(馬師; 馬祖)의 진(眞; 肖像)을 가지고(將得) 왔느냐. 가로되 다만 이것(這)이 이것입니다. 사왈 배후의 것은(背後底聻). 남천이 바로 쉬었다〈長慶稜(慧稜)이 이르되 알지 못함과 대사(大似; 매우 흡사)하다. 保福展(從展)이 이르되 거의(幾) 화상의 此間에 이르지 못할 뻔했다. 雲居錫이 이르되 이 두 尊者는 모두 背後를 부축했다(扶). 只如 남천이 休去한 것은 마땅히 면전을 부축함이 되는가 배후를 부축했는가〉. 마곡(麻谷; 寶徹)이 도참(到參)하여 선상(禪床)을 세 바퀴 돌고 스님 앞에서 석장(錫杖)을 떨치고 섰다. 사왈 네가 이미 이와 같고 나도 또한 이와 같다. 마곡이 또 석장을 떨쳤다. 스님이 꾸짖으며 가로되 이(這) 야호정(野狐精)아 나가거라.
●參; (1). 동사(動詞)임. 곧 학인(學人)이 사가(師家)를 배견(拜見)하고 도를 물음이며 또 수행하며 좌선함도 또한 호칭이 참(參)이니 예컨대(如) 참선(參禪)하며 변도(辨道)하다. (2). 명사(名詞)임. 예컨대(如) 힐단(詰旦; 이른 아침)의 승당(升堂)을 조참(早參; 朝參)이라 하고 포시(晡時; 지금의 오후 4시)의 염송(念誦)을 만참(晩參)이라 하고 만참 전의 좌선을 좌참(坐參)이라 하고 매(每) 5일마다 1참(參)함을 오참상당(五參上堂)이라 하고 정기상당(定期上堂)을 대참(大參)이라 하고 주지가 부정시(不定時)에 집중(集衆)하여 문답하며 응수(應酬)함을 소참(小參)이라 하는 등임. 여기에선 1을 가리킴.
●聻; 어기사(語氣詞)임. 구미(句尾)에 쓰며 의문을 표시하거나 혹은 결속을 진술함. 정자통 니(聻) 범서(梵書)에서 니(聻)를 어조사로 삼는다. 음이 니(你)다.
上堂 禪宗學者 應遵佛語一乘了義 契自心源 不了義者 互不相許 如師子身中蟲 夫爲人師 若涉名利 別開異端 則自他何益 如世大匠 斤斧不傷其手 香象所負 非驢能堪 僧問 若爲得成佛去 師曰 佛與衆生 一時放却 當處解脫 曰 作麽生得相應去 師曰 善惡不思 自見佛性 曰 若爲得證法身 師曰 越毗盧之境界 曰 淸淨法身作麽生得 師曰 不著佛求耳 曰 阿那箇是佛 師曰 卽心是佛 曰 心有煩惱否 師曰 煩惱性自離 曰 豈不斷邪 師曰 斷煩惱者 卽名二乘 煩惱不生 名大涅槃 曰 坐禪看靜 此復若爲 師曰 不垢不淨 寧用起心而看淨相 問 禪師見十方虛空是法身否 師曰 以想心取之 是顚倒見 問 卽心是佛 可更修萬行否 師曰 諸聖皆具二嚴 豈撥無因果邪 又曰 我今答汝 窮劫不盡 言多去道遠矣 所以道 說法有所得 斯則野干鳴 說法無所得 是名師子吼
●了義; 眞實之義 最圓滿的義諦 對不了義而言
●師子身中蟲; 謂住於獅子身內 反噉食其肉之蟲 比喩入於佛門卻破壞佛法之惡比丘 蓮華面經上敘說甚詳 譬如獅子命絶身亡 百獸尙畏其威 不能噉食其肉 唯獅子之身自生諸蟲 還自噉食獅子之肉 佛法亦非外道惡魔所能壞 唯佛法中諸惡比丘 猶如毒刺 破壞佛法 [仁王般若波羅蜜經下囑累品 成唯識論述記四本]
●香象; 於鬢角分泌有香氣液體之大象也 卽指交配期之大象 按大毘婆沙論三十等 此時期之象 其力特强 性甚狂暴 難以制伏 合十凡象之力僅可抵一香象之力 ▲注維摩詰經一 香象菩薩 什曰 靑香象也 身出香風 菩薩身香風亦如此也
●解脫; 梵語毘木叉 毘目叉 毘木底 又作木叉 木底 意謂解放 指由煩惱束縛中解放 而超脫迷苦之境地 以能超度迷之世界 故又稱度脫 以得解脫 故稱得脫 [大般涅槃經五 顯揚聖敎論十三 十住毘婆沙論十一]
●毗盧; 毘盧遮那 爲佛之報身或法身 又作毘盧舍那 毘樓遮那 毘盧折那 吠嚧遮那 略稱盧舍那 盧遮那 遮那 此云遍一切處 遍照 光明遍照 大日遍照 淨滿 廣博嚴淨 ▲慧琳音義二十一 毘盧遮那 案梵本毘字 應音云無廢反 此云種種也 毘盧遮那 云光明遍照也 言佛於身智 以種種光明 照衆生也 或曰 毘 遍也 盧遮那 光照也 謂佛以身智無礙光明 遍照理事無礙法界也 ▲大毘盧遮那成佛經疏一 梵音毘盧遮那者 是日之別名 卽除暗遍明之義也 然世間日則有方分 若照其外 不能及內 明在一邊 不至一邊 又唯在晝 光不燭夜 如來智慧日光 則不如是 遍一切處 作大照明矣
●萬行; 一切之行法 ▲宗鏡錄三十七 夫一心者 萬法之總也 分而爲戒定慧 開而爲六度 散而爲萬行 萬行未嘗非一心 一心未嘗違萬行
●二嚴; 一智慧莊嚴 姸智慧而爲身之莊嚴者 二福德莊嚴 積福德而爲身之莊嚴者 [涅槃經二十七]
●野干; 祖庭事苑七 梵云悉迦羅 此言野干 亦名夜干 或射干 色靑黃 如狗群行 夜鳴其聲如狼 又野干形小尾大 能上樹 疑枯枝不登 狐卽形大 疑冰不渡 不能上樹
상당(上堂) 선종 학자는 응당 불어(佛語)의 일승(一乘)의 요의(了義)를 준수하여 자기의 심원(心源)에 계합해야 한다. 불료의(不了義)란 것은 서로(互) 상허(相許)하지 않나니 사자 몸 가운데의 벌레(師子身中蟲)와 같다. 무릇 사람의 스승이 된 자가 만약 명리(名利)에 건너 달리 이단(異端)을 연다면 곧 자타에 무슨 이익이겠는가. 세간의 대장(大匠)의 근부(斤斧; 도끼)가 그 손을 상해하지 않음과 같아야 한다. 향상(香象)이 짊어지는 바는 나귀가 능히 감내하지 못한다. 승문(僧問) 어떻게 해야(若爲) 성불함을 얻겠습니까. 사왈(師曰) 부처와 중생을 일시에 놓아버려야 당처(當處)에서 해탈(解脫)한다. 가로되 어떻게 해야(作麽生) 상응함을 얻어 가겠습니까. 사왈(師曰) 선악을 생각하지 않아야 스스로 불성을 본다. 묻되 어떻게 해야(若爲) 법신(法身)을 득증(得證)합니까. 사왈 비로(毗盧)의 경계를 초월하라. 가로되 청정한 법신을 어떻게(作麽生) 얻습니까. 사왈 부처에 집착하여 구하지 말아야 할 뿐이다. 가로되 어느 것(阿那箇)이 이 부처입니까. 사왈 곧 마음(卽心)이 이 부처다. 가로되 마음에 번뇌가 있습니까. 사왈 번뇌의 성(性)이 스스로 여의었다(번뇌를 여의었다). 가로되 어찌 끊지 않습니까. 사왈 번뇌를 끊는 자는 곧 이름이 이승(二乘)이며 번뇌가 나지 않아야 이름이 대열반이다. 가로되 좌선하여 간정(看靜)함은 이것은 다시 어떻습니까(若爲). 사왈 불구부정(不垢不淨)이거늘 어찌(寧) 기심(起心)하여 정상(淨相)을 봄을 쓰겠는가. 묻되 선사(禪師)는 시방허공이 이 법신임을 보십니까. 사왈 상심(想心)으로써 이를 취하면 이는 전도견(顚倒見)이다. 묻되 곧 마음(卽心)이 이 부처거늘 가히 다시 만행(萬行)을 닦습니까. 사왈 제성(諸聖)이 모두 2엄(二嚴)을 갖추었거늘 어찌 발무인과(撥無因果; 인과를 제거해 없앰)하겠는가. 또 가로되 내가 여금에 너에게 답함은 궁겁(窮劫; 무궁한 겁)에도 다하지 않는다. 말이 많으면 도와의 거리(去)가 멀다. 소이로 말하되 설법하여 소득이 있으면 이는 곧 야간명(野干鳴)이며 설법해 소득이 없어야 이 이름이 사자후(師子吼)다.
●了義; 진실의 뜻임. 가장 원만한 의제(義諦; 眞諦)니 불료의(不了義)에 상대한 말임.
●師子身中蟲; 이르자면 사자의 몸 안에 머물면서 도리어 그 살을 담식(噉食; 먹다)하는 벌레임. 불문에 들어와서 도리어 불법을 파괴하는 악비구에 비유함. 연화면경상(蓮華面經上)에 매우 상세하게 서설(敘說)했음. 비여(譬如) 사자가 목숨이 끊어지고 몸이 망해도 백수가 오히려 그의 위엄을 두려워해 능히 그 살을 담식하지 못하고 오직 사자의 몸에 자생하는 여러 벌레가 도리어 스스로 사자의 살을 담식한다. 불법도 또한 외도나 악마가 능히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불법 중의 여러 악비구가 마치 독가시(毒刺)와 같아서 불법을 파괴한다 [인왕반야바라밀경하촉루품. 성유식론술기4본].
●香象; 살쩍의 뿔에서 향기 있는 액체를 분비하는 큰 코끼리임. 곧 교배기의 큰 코끼리를 가리킴. 대비바사론30 등을 안험컨대 이 시기의 코끼리는 그 힘이 특히 강하고 성질이 매우 광포(狂暴)하여 제복(制伏)하기 어려우므로 열 마리의 범상한 코끼리의 힘을 합쳐야 겨우 가히 한 향상의 힘에 저항한다 함. ▲주유마힐경1. 향상보살(香象菩薩) 라집이 가로되 푸른 향상(靑香象)이다. 몸에서 향풍을 낸다. 보살신(菩薩身)의 향풍도 또한 이와 같다.
●解脫; 범어 비목차(毘木叉; 梵 vimokṣa)ㆍ비목차(毘目叉)ㆍ비목지(毘木底; 梵 vimukti), 또 목차(木叉)ㆍ목지(木底)로 지음. 뜻으로 이르면 해방이니 번뇌의 속박 가운데로부터 해방하여 미고(迷苦)의 경지(境地)를 초탈함을 가리킴. 능히 미(迷)의 세계를 초도(超度)하므로 고로 또 명칭이 도탈(度脫)이며 해탈을 얻으므로 고로 명칭이 득탈(得脫)임 [대반열반경5. 현양성교론13. 십주비바사론11].
●毗盧; 비로자나(毘盧遮那; 梵 Vairocana)니 불타의 보신 혹 법신이 됨. 또 비로사나(毘盧舍那)ㆍ비루자나(毘樓遮那)ㆍ비로절나(毘盧折那)ㆍ폐로자나(吠嚧遮那)로 지음. 약칭이 로사나(盧舍那)ㆍ로자나(盧遮那)ㆍ자나니 여기에선 이르되 편일체처ㆍ편조ㆍ광명편조ㆍ대일편조(大日遍照)ㆍ정만(淨滿)ㆍ광박엄정(廣博嚴淨)임. ▲혜림음의21. 비로자나(毘盧遮那) 범본의 비자(毘字)를 안험컨대 응당 음을 이르되 무폐반(無廢反)이라야 한다. 여기에선 이르되 종종(種種)이다. 비로자나는 이르자면 광명편조(光明遍照)니 불타의 신지(身智)를 말함이다. 갖가지 광명으로 중생을 비춤이다. 혹 가로되 비(毘)는 편(遍)이며 로자나(盧遮那)는 광조(光照)니 이르자면 불타가 신지(身智)의 무애광명으로 이사무애법계를 편조(遍照)함이다. ▲대비로차나성불경소1. 범음으로 비로자나(毘盧遮那)란 것은 이 해의 별명이다. 곧 어둠을 제거하고 두루 밝힘의 뜻이다. 그러나 세간의 해는 곧 방면의 분한이 있다. 만약 그 밖을 비추면 능히 안에 미치지 못하고 광명이 1변에 있으면 1변에는 이르지 못하고 또 오직 낮에만 있고 광명이 밤을 비추지 못한다. 여래의 지혜의 일광은 곧 그렇지 않아서 일체처에 두루하여 대조명을 짓는다.
●萬行; 일체의 행법(行法). ▲종경록37. 무릇 일심이란 것은 만법의 총(總)이니 나누면 계정혜가 되고 열면 육도(六度)가 되고 흩으면 만행(萬行)이 된다. 만행이 일찍이 일심이 아님이 없고 일심이 일찍이 만행을 위배하지 않는다.
●二嚴; 1은 지혜장엄이니 지혜를 연마하여 몸의 장엄을 삼는 것. 2는 복덕장엄이니 복덕을 쌓아 몸의 장엄을 삼는 것 [열반경27].
●野干; 조정사원7. 범어로 이르되 실가라(悉迦羅)는 여기 말로는 야간(野干)이며 또 이름이 야간(夜干)이며 혹은 야간(射干)이다. 색은 청황이며 개와 같이 떼 지어 다니며 밤에 울면 그 소리가 이리와 같다. 또 야간은 형체가 작고 꼬리가 크며 능히 나무에 오르되 마른 가지로 의심되면 오르지 않는다. 여우는 곧 형체가 크고 얼음으로 의심되면 건너지 않으며 능히 나무에 오르지 못한다.
上堂 靑蘿夤緣 直上寒松之頂 白雲淡泞 出沒太虛之中 萬法本閑而人自閙 師問僧 近離甚處 曰 南方 師曰 南方知識以何法示人 曰 南方知識 秖道一朝風火散後 如蛇退皮 如龍換骨 本爾眞性 宛然無壞 師曰 苦哉苦哉 南方知識說法 半生半滅 曰 南方知識卽如是 未審和尙此間說何法 師曰 我此間身心一如 身外無餘 曰 和尙何得將泡幻之身同於法體 師曰 你爲甚麽入於邪道 曰 甚麽處是某甲入於邪道處 師曰 不見敎中道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夤緣; 一又作寅緣 夤 深也 二攀附上升 三本指攀附上升 後喩攀附權貴交結 此指二
상당(上堂) 청라(靑蘿)는 인연(夤緣)하여 바로 한송(寒松)의 꼭대기에 오르고 백운은 담저(淡泞; 泞는 맑을 저)히 태허(太虛; 큰 허공) 중에 출몰한다. 만법이 본래 한적(閑寂; 閑)하건만 사람이 스스로 시끄럽게 한다. 스님이 중에게 묻되 최근에 어느 곳을 떠났느냐. 가로되 남방(南方)입니다. 사왈(師曰) 남방 지식(知識)은 무슨 법으로써 사람에게 보이느냐. 가로되 남방 지식은 다만 말하되 일조(一朝)에 풍화(風火)가 흩어진 후 뱀이 퇴피(退皮; 껍질을 물림)함과 같고 용이 환골(換骨)함과 같나니 본래 그러한(本爾) 진성(眞性)은 완연(宛然)히 무너짐이 없다. 사왈(師曰) 고재(苦哉)로다, 고재로다. 남방 지식의 설법은 반생반멸(半生半滅)이다. 가로되 남방 지식은 곧 이와 같거니와 미심하오니 화상의 차간(此間)에선 어떤 법을 설합니까. 사왈 나의 차간에선 신심(身心)이 일여(一如)며 신외(身外)에 나머지가 없다. 가로되 화상은 왜 포환지신(泡幻之身)을 가지고 법체(法體)와 한가지라고 함을 얻습니까. 사왈 너는 무엇 때문에 사도(邪道)에 들어가느냐. 가로되 어느 곳(甚麽處)이 이 모갑이 사도(邪道)에 들어간 곳입니까. 사왈 보지 못하느냐 교(敎; 금강경) 중에 말하되 만약 색으로써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한다면/ 이 사람은 사도(邪道)를 행하는지라/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한다.
●夤緣; 1. 또 인연(寅緣)으로 지음. 인(夤)은 심(深)임. 2. 반부(攀附; 붙들다)하여 위로 올라감. 3. 본래 반부(攀附)하여 상승함을 가리키나 후에 권귀(攀附)에 반부하여 교결(交結)함에 비유했음. 여기에선 2를 가리킴.
南陽張濆行者問 承和尙說無情說法 某甲未體其事 乞和尙垂示 師曰 汝若問無情說法 解他無情 方得聞我說法 汝但聞取無情說法去 濆曰 只約如今有情方便之中 如何是無情因緣 師曰 如今一切動用之中 但凡聖兩流都無少分起滅便是出識 不屬有無 熾然見覺 只聞無其情識繫執 所以六祖云 六根對境分別非識 有僧到參禮 師問 蘊何事業 曰 講金剛經 師曰 最初兩字是甚麽 曰 如是 師曰 是甚麽 僧無對 有人問 如何是解脫 師曰 諸法不相到 當處解脫 曰 恁麽卽斷去也 師曰 向汝道諸法不相到 斷甚麽 師見僧來 以手作圓相 相中書日字 僧無對 師問本淨禪師 汝已後見奇特言語如何 淨曰 無一念心愛 師曰 是汝屋裏事
●無情說法; 洞山良价語錄 次參潙山 問云 頃聞南陽忠國師有無情說法話 某甲未究其微 潙山云 闍黎莫記得麽 師云 記得 潙山云 汝試擧一遍看 師遂擧 僧問 如何是古佛心 國師云 牆壁瓦礫是 僧云 牆壁瓦礫 豈不是無情 國師云 是 僧云 還解說法否 國師云 常說熾然說無間歇 僧云 某甲爲甚麽不聞 國師云 汝自不聞 不可妨他聞者也 僧云 未審甚麽人得聞 國師云 諸聖得聞 僧云 和尙還聞否 國師云 我不聞 僧云 和尙旣不聞 爭知無情解說法 國師云 賴我不聞 我若聞 卽齊於諸聖 汝卽不聞我說法也 僧云 恁麽則衆生無分去也 國師云 我爲衆生說 不爲諸聖說 僧云 衆生聞後如何 國師云 卽非衆生 僧云 無情說法 據何典敎 國師云 灼然言不該典 非君于之所談 汝豈不見 華嚴經云 刹說衆生說三世一切說
●垂示; 垂說示衆 又作垂語 垂說 示衆 於禪林 師家對弟子大衆開示宗要 稱爲垂示 又於說示法要時 先以簡明語句標示所說之要諦 亦稱垂示 如碧巖錄從容錄等 均先垂示 次揭本則 後再評唱 又於垂示之後 師家接受學人之請問 爲彼等解疑釋難 稱爲索語 索話 或稱鉤語 鉤話 [六祖壇經定慧品 臨濟語錄 禪林寶訓三 象器箋垂說類]
●情識; 俗情妄識
남양(南陽) 장분(張濆) 행자(行者)가 묻되 듣건대(承) 화상이 무정설법(無情說法)을 설하셨거니와 모갑이 그 일을 체득하지 못하오니 화상의 수시(垂示)를 구걸합니다. 사왈(師曰) 네가 무정설법을 묻는다면 저 무정을 알아야(解) 바야흐로 나의 설법을 득문(得聞)하나니 너는 단지 무정설법을 문취(聞取)하러 가거라. 장분이 가로되 다만 여금의 유정의 방편 가운데를 대약(大約)한다면 무엇이 이 무정의 인연입니까. 사왈 여금의 일체의 동용(動用)하는 가운데 단지 범성(凡聖) 양류(兩流)에 모두 소분(少分)의 기멸(起滅)이 없어야 바로 이 식(識)을 벗어나 유무에 속하지 않나니 치연(熾然)히 견각(見覺)하면서 다만 그 정식(情識)의 계집(繫執)이 없음을 듣는다. 소이로 6조가 이르되 6근(根)이 경계를 상대해 분별해도 식(識)이 아니라 했다. 어떤 중이 이르러 참례(參禮)했다. 사문(師問) 무슨 사업(事業)을 쌓았는가(蘊). 가로되 금강경을 강의합니다. 사왈 최초의 두 자는 이 무엇인가. 가로되 여시(如是)입니다. 사왈 이 뭣고(是甚麽). 중이 대답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묻되 무엇이 이 해탈입니까. 사왈 제법(諸法)이 서로 이르지 않는 당처(當處)에서 해탈한다.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 단절하여 갑니다. 사왈 너를 향해 말하되 제법이 서로 이르지 않는다 했거늘 무엇을 단절하느냐. 스님이 중이 옴을 보고 손으로써 원상(圓相)을 짓고 상중(相中)에 일자(日字)를 썼다. 중이 대답이 없었다. 스님이 본정선사(本淨禪師)에게 묻되 네가 이후에 기특한 언어를 본다면 어찌하겠는가. 본정이 가로되 일념의 마음도 사랑함이 없습니다. 사왈 이는 너의 옥리사(屋裏事)다.
●無情說法; 동산양개어록. 다음에 위산을 참알해 물어 이르되 요사이 남양충국사(南陽忠國師)가 무정설법(無情說法)의 얘기가 있다 함을 들었습니다만 모갑이 그 미묘함을 연구하지 못했습니다. 위산이 이르되 사리(闍黎)가 기억하지 못하는가. 스님이 이르되 기억합니다. 위산이 이르되 네가 시험삼아 한 차례 들어 보아라. 스님이 드디어 들었다. 중이 묻되 무엇이 이 고불의 마음입니까. 국사가 이르되 장벽과 와력(瓦礫)이 이것이다. 중이 이르되 장벽과 와력은 어찌 이 무정이 아니겠습니까. 국사가 이르되 그렇다. 중이 이르되 도리어 설법할 줄 압니까. 국사가 이르되 늘 설하고 치연히 설해 중간에 쉼이 없다. 중이 이르되 모갑은 무엇 때문에 듣지 못합니까. 국사가 이르되 네가 스스로 듣지 못한다 하여 타인의 들음을 방애(妨礙)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중이 이르되 미심하오니 어떤 사람이 득문(得聞)합니까. 국사가 이르되 제성(諸聖)이 득문(得聞)한다. 중이 이르되 화상도 도리어 듣습니까. 국사가 이르되 나는 듣지 못한다. 중이 이르되 화상이 이미 듣지 못하신다면 어찌 무정이 설법할 줄 앎을 아십니까. 국사가 이르되 내가 듣지 못함이 다행이다. 내가 만약 듣는다면 곧 제성과 제등하므로 너는 곧 나의 설법을 듣지 못할 것이다. 중이 이르되 이러하시다면 곧 중생은 분한이 없을 것입니다. 국사가 이르되 나는 중생을 위해 설하고 제성을 위해 설하지 않는다. 중이 이르되 중생이 들은 후엔 어떻습니까. 국사가 이르되 곧 중생이 아니다. 중이 이르되 무정설법은 어떤 전교(典敎)에 의거함입니까. 국사가 이르되 작연(灼然)하나니 말이 전거(典據)를 갖추지 못하면 군자가 얘기할 바가 아니다. 네가 어찌 보지 못했는가, 화엄경에 이르되 찰토가 설하고 중생이 설하고 삼세와 일체가 설한다.
●垂示; 수설시중(垂說示衆)이니 또 수어(垂語)ㆍ수설(垂說)ㆍ시중(示衆)으로 지음. 선림에서 사가가 제자나 대중을 상대로 종요를 개시함을 일컬어 수시라 함. 또 법요를 설시(說示)할 때 먼저 간명한 어구로 설할 바의 요체(要諦)를 표시함도 또한 일컬어 수시임. 예컨대(如) 벽암록ㆍ종용록 등에서 균일하게 먼저 수시(垂示)하고 다음에 본칙을 게시하고 후에 다시 평창(評唱)했음. 또 수시한 후에 사가가 학인의 청문(請問)을 접수하고 그들 등을 위해 의혹을 해석하고 난제를 풀이함을 일컬어 색어(索語)ㆍ색화(索話), 혹은 일컬어 구어(鉤語)ㆍ구화(鉤話)라 함 [육조단경정혜품. 임제어록. 선림보훈3. 상기전수설류].
●情識; 속정(俗情)과 망식(妄識).
肅宗問 師在曹谿得何法 師曰 陛下還見空中一片雲麽 帝曰 見 師曰 釘釘著 懸挂著 帝又問 如何是十身調御 師乃起立曰 會麽 帝曰 不會 師曰 與老僧過淨甁來 帝又曰 如何是無諍三昧 師曰 檀越蹋毗盧頂上行 帝曰 此意如何 師曰 莫認自己淸淨法身 帝又問 師都不視之 曰 朕是大唐天子 師何以殊不顧視 師曰 還見虛空麽 帝曰 見 師曰 他還眨目視陛下否 魚軍容問 師住白崖山 十二時中如何修道 師喚童子來 摩頂曰 惺惺直言惺惺 歷歷直言歷歷 已後莫受人謾 師與紫璘供奉論議 師陞座 奉曰 請師立義 某甲破 師曰 立義竟 奉曰 是甚麽義 師曰 果然不見 非公境界 便下座 一日 師問紫璘供奉 佛是甚麽義 曰 是覺義 師曰 佛曾迷否 曰 不曾迷 師曰 用覺作麽 奉無對 奉問如何是實相 師曰 把將虛底來 曰 虛底不可得 師曰 虛底尙不可得 問實相作麽 僧問 如何是佛法大意 師曰 文殊堂裏萬菩薩 曰 學人不會 師曰 大悲千手眼
●釘釘; 一反復地以釘釘物 釘 以釘釘物 二釘 專注地看 注視 此指二
●十身; 三藏法數一 佛二種十身[出華嚴經疏] 一融三世間爲十身 融卽融會之義 隔別名世 間差名間 卽衆生國土智正覺之三世間也 言融三世間爲十身者 衆生身 業報身 卽衆生世間 國土身 卽國土世間 聲聞身 緣覺身 菩薩身 如來身 智身 法身 虛空身 卽智正覺世間也 二佛自具十身 佛自具十身者 一菩提身 二願身 三化身 四力持身 五相好莊嚴身 六威勢身 七意生身 八福德身 九法身 十智身也
●調御; 調御丈夫 佛十號之一 調他心名調御丈夫
●過; 給予 通雅 予亦謂之過
●淨甁; <梵> kuṇḍkā 梵語軍遲 又作捃稚迦 此云甁 有淨觸二甁 淨甁之水 以洗淨手 觸甁之水 以洗觸手 亦稱澡甁 ▲釋氏要覽上 淨甁 梵語軍遲 此云甁 常貯水 隨身用 ▲南海寄歸內法傳一 凡水分淨觸 甁有二枚 淨者咸用瓦瓷 觸者任兼銅鐵 淨擬非時飮用 觸乃便利所須 淨則淨手方持 必須安著淨處 觸乃觸手隨執 可於觸處置之 唯斯淨甁 及新淨器所盛之水 非時合飮
●無諍三昧; 謂住於空理而與他無諍之三昧
●立義; 辯論道法 較量機鋒時 首先出語 設立論題 稱爲立義
●大悲千手眼; 大慈大悲觀世音菩薩之千手千眼 又名千眼千臂觀世音 六觀音之一 兩眼兩手外左右各具二十手 手中各有一眼 四十手四十眼配於二十五有 而成千手千眼 表度一切衆生有無礙之大用也 爲伽梵達磨譯之千手經所說 通途之千手觀音是也 若依智通及菩提流支譯之千手經 則面具三眼 體具千臂 掌中各有一眼 按楞嚴經 觀世音菩薩 以修證圓通無上道故 能現衆多妙容 由一首三首乃至一百八首 千首萬首 八萬四千爍迦羅首 由二臂四臂乃至一百八臂 千臂萬臂 八萬四千母陀羅臂 由二目三目乃至一百八目 千目萬目 八萬四千淸淨寶目云
숙종(肅宗)이 묻되 스님은 조계(曹谿)에 있으면서 무슨 법을 얻었습니까. 사왈(師曰) 폐하는 도리어 공중의 일편(一片) 구름을 보십니까. 제왈(帝曰) 봅니다. 사왈 정정착(釘釘著)하시고 현쾌착(懸掛著; 매달아 걸다)하십시오. 황제가 또 묻되 무엇이 이 십신조어(十身調御)입니까. 스님이 이에 기립하여 가로되 아십니까. 제왈(帝曰) 알지 못합니다. 사왈 노승을 위해(與) 정병(淨甁)을 가져다 주십시오(過). 황제가 우왈(又曰) 무엇이 이 무쟁삼매(無諍三昧)입니까. 사왈 단월(檀越)은 비로정상(毘盧頂上)을 밟고 다니십시오. 제왈(帝曰) 이 뜻이 무엇입니까. 사왈 자기의 청정한 법신을 인정하지 마십시오. 황제가 또 묻자 스님이 도무지 그를 보지 않았다. 가로되 짐(朕)이 이 대당천자(大唐天子)이거늘 스님이 무엇 때문에 특수히 돌아보지 않습니까. 사왈 도리어 허공을 보십니까. 제왈 봅니다. 사왈 그것이 도리어 눈을 깜작이며 폐하를 봅니까. 어군용(魚軍容)이 묻되 스님이 백애산(白崖山)에 거주하면서 십이시(十二時) 중 어떻게 수도(修道)하셨습니까. 스님이 동자(童子)를 불러 와서 정수리를 어루만지며 가로되 성성(惺惺)함은 바로 성성(惺惺)하다고 말하고 역력(歷歷)함은 바로 역력(歷歷)하다고 말하고 이후(已後)에 타인의 속임(謾)을 받지 말아라. 스님이 자린(紫璘) 공봉(供奉)과 더불어 논의(論義)했다. 스님이 승좌(陞坐)하자 공봉이 가로되 청컨대 스님이 입의(立義)하십시오. 모갑이 파(破)하겠습니다. 사왈 입의하여 마쳤다. 공봉이 가로되 이 무슨 뜻(義)입니까. 사왈 과연 보지 못했구나, 공(公)의 경계가 아니다. 바로 하좌(下坐)했다. 어느 날 스님이 자린 공봉에게 묻되 부처는 이 무슨 뜻인가. 가로되 이 각(覺)의 뜻입니다. 사왈 부처가 일찍이 미(迷)했던가. 가로되 일찍이 미(迷)하지 않았습니다. 사왈 각(覺)을 써서 무엇하리오. 공봉이 대답이 없었다. 공봉이 묻되 무엇이 이 실상(實相)입니까. 사왈 허지(虛底; 虛한 것)를 잡아(把) 오너라. 가로되 허지(虛底)는 불가득입니다. 사왈 허지도 오히려 불가득이거늘 실상을 물어 무엇하리오. 승문(僧問) 무엇이 이 불법의 대의(大意)입니까. 사왈 문수당(文殊堂) 속의 만보살(萬菩薩)이다. 가로되 학인이 알지 못하겠습니다. 사왈 대비천수안(大悲千手眼)이다.
●釘釘; 1. 반복하며 못으로 물건을 박음. 정(釘)은 못으로 물건을 박음임. 2. 정(釘)은 전념(專念)하여 주의해 봄(專注地看). 주시(注視). 여기에선 2를 가리킴.
●十身; 삼장법수1. 불이종십신(佛二種十身) [출화엄경소] 1. 융삼세간위십신(融三世間爲十身; 3세간을 融會하여 10신을 삼음). 융(融)은 곧 융회(融會)의 뜻이며 격별(隔別)을 이름해 세(世)며 간차(間差)를 이름해 간(間)임. 곧 중생ㆍ국토ㆍ지정각(智正覺)의 3세간임. 말한 융삼세간위십신이란 것은 중생신ㆍ업보신 즉 중생세간ㆍ국토신 곧 국토세간ㆍ성문신ㆍ연각신ㆍ보살신ㆍ여래신ㆍ지신(智身)ㆍ법신ㆍ허공신 곧 지정각세간임. 2. 불자구십신(佛自具十身; 불타가 스스로 갖춘 10신) 불자구십신이란 것은 1은 보리신이며 2는 원신이며 3은 화신이며 4는 역지신(力持身)이며 5는 상호장엄신이며 6은 위세신이며 7은 의생신(意生身)이며 8은 복덕신이며 9는 법신이며 10은 지신(智身)임.
●調御; 조어장부(調御丈夫)니 불(佛) 10호의 하나. 타인의 마음을 조복(調伏)함을 이름해 조어장부임.
●過; 급여(給予). 통아 여(予)를 또 일컬어 과(過)라 한다.
●淨甁; <범> kuṇḍkā. 범어 군지(軍遲)는 또 군치가(捃稚迦)로 지으며 여기에선 이르되 병(甁)이니 정촉(淨觸) 2병이 있음. 정병의 물은 깨끗한 손(淨手)을 씻고 촉병의 물은 더러운 손(觸手)을 씻음. 또 명칭이 조병(澡甁)임. ▲석씨요람상. 정병(淨甁) 범어 군지(軍遲)는 여기에선 이르되 병(甁)이다. 늘 물을 저장하고 수신용(隨身用)이다. ▲남해기귀내법전1. 무릇 물은 정촉(淨觸)으로 나누고 병도 2매(枚)가 있다. 정자(淨者)는 모두 혹 와자(瓦瓷)를 쓰고 촉자(觸者)는 동철(銅鐵)을 겸함에 맡긴다. 정(淨)은 비시(非時)의 음용(飮用)을 타산(打算; 擬)하고 촉(觸)은 곧 변리(便利; 대소변)에 쓰는 것이다. 정(淨)은 곧 정수(淨手)라야 비로소 가지고 반드시 정처(淨處)에 안착(安著)함을 쓴다. 촉(觸)은 곧 촉수(觸手)로 그대로 가지고 가히 촉처(觸處)에 안치한다. 오직 이 정병(淨甁) 및 신정기(新淨器)에 담긴 바의 물은 비시(非時)에 합당히 마신다.
●無諍三昧; 이르자면 공리(空理)에 안주(安住)하여 타인과 타툼이 없는 삼매.
●立義; 도법을 변론(辯論)하거나 기봉을 교량(較量)할 때 가장 먼저 말을 내어 논제를 설립함을 일컬어 입의(立義)라 함.
●大悲千手眼; 대자대비 관세음보살의 천수천안. 또 명칭이 천안천비관세음이니 6관음의 하나. 두 눈과 두 손 외에 좌우로 각 20수(手)를 갖췄으며 수중에 각기 1안(眼)이 있음. 40수와 40안을 25유에 짝하여 천수천안을 이룸. 일체중생을 제도하면서 무애의 대용이 있음을 표시함. 가범달마(伽梵達磨)가 번역한 천수경에서 설한 바며 통도(通途; 일반적으로 통하는 교리)의 천수관음이 이것임. 만약 지통(智通) 및 보리류지(菩提流支)가 번역한 천수경에 의거하자면 곧 얼굴에 3안을 갖췄고 몸에 천비(千臂)를 갖췄고 손바닥 속에 각기 1안이 있음. 릉엄경을 안험컨대 관세음보살이 원통의 위없는 도를 수증(修證)한 연고로 능히 중다한 묘용(妙容)을 나타냄. 1수(首)와 3수로부터 내지 108수ㆍ천수만수(千首萬首)ㆍ팔만사천의 삭가라수(爍迦羅首)며 2비(臂)와 4비로부터 내지 108비ㆍ천비만비(千臂萬臂)ㆍ팔만사천의 모다라비(母陀羅臂)며 2목(目)과 3목으로부터 내지 108목ㆍ천목만목(千目萬目)ㆍ팔만사천의 청정한 보목(寶目)임.
師以化緣將畢 涅槃時至 乃辭代宗 代宗曰 師滅度後 弟子將何所記 師曰 告檀越造取一所無縫塔 帝曰 就師請取塔樣 師良久 曰 會麽 帝曰 不會 師曰 貧道去後 有侍者應眞却知此事 乞詔問之 大曆十年十二月十九日 右脇長往 塔于黨子谷 諡大證禪師 代宗後詔應眞問前語 眞良久曰 聖上會麽 帝曰 不會 眞述偈曰 湘之南潭之北 中有黃金充一國 無影樹下合同船 瑠璃殿上無知識
●無縫塔; 卵塔也 昔南陽忠國師 對代宗謂爲老僧作箇無縫塔 後之禪者托斯語 窆亡僧削堅石 團圝而無縫稜 無層級 呼爲無縫塔 無縫塔之形如鳥卵 因名卵塔
●右脅; 又作右脅臥 右脅師子臥 師子臥 獅子臥 卽右脅向下 兩足相疊 以右手爲枕 左手伸直 輕放身上之臥法 爲比丘之正規臥法 印度以來 佛敎徒一般皆採用此一臥法 而禁止左脅臥(淫欲相) 仰身臥(屬阿修羅之業) 伏臥(屬餓鬼之業)等臥法 [中阿含二十長老上尊睡眠經 長阿含三遊行經]
●長往; 一去不返
●湘之南潭之北; 唐書地理志三十一江南道曰 潭州長沙郡 …… 縣六 長沙 湘潭 湘鄕 益陽 醴陵 瀏陽 又一統志六十三湖廣長沙府曰 晉永嘉初於此置湘州 …… 劉宋復爲長沙國 …… 隋廢長沙郡置潭州 …… 領縣十二 …… 湘潭縣(云云) 按此 湘州潭州是一州異名 又湘潭縣一縣名 今言湘之南潭之北 但一湘潭縣分字言之也 [虛堂錄犂耕]
●合同船; 卽無身分差別而同乘一船之意
스님이 화연(化緣)을 거의 마치고 열반할 때가 이르자 이에 대종(代宗)에게 고별했다. 대종이 가로되 스님이 멸도(滅度)하신 후 제자는 다만(將) 무엇을 기억할 바입니까. 사왈(師曰) 단월(檀越)에게 알리나니 1소(所)의 무봉탑(無縫塔)을 조취(造取; 取는 조사)하십시오. 제왈(帝曰) 바로(就) 스님에게 탑양(塔樣)을 청취(請取)하겠습니다. 스님이 양구(良久)하고 가로되 아시겠습니까. 제왈 알지 못합니다. 사왈 빈도(貧道)가 떠난 후 시자 응진(應眞)이 있어 도리어 이 일을 압니다. 불러(詔) 그에게 묻기를 구걸합니다. 대력(大曆) 10년(775) 12월 9일 우협(右脅)으로 장왕(長往)했다. 당자곡(黨子谷)에 탑을 세웠다(塔). 시(諡)가 대증선사(大證禪師)다. 대종이 후에 응진(應眞)을 불러(詔) 전어(前語)를 물었다. 응진이 양구(良久)하고 가로되 성상(聖上)은 아시겠습니까. 제왈 알지 못합니다. 응진이 술게(述偈)하여 가로되 상의 남이며 담의 북이니(湘之南潭之北)/ 가운데 황금이 있어 일국(一國)을 채운다/ 무영수(無影樹) 아래 합동선(合同船)하고/ 유리전상(瑠璃殿上)에 지식(知識)이 없다. 응진은 후에 탐원산(耽源山)에 거주했다.
●無縫塔; 난탑(卵塔)임. 옛적에 남양충국사가 대종을 상대해 이르기를 노승을 위해 무봉탑을 만드십시오. 후에 선자(禪者)가 이 말에 의탁해 망승을 매장(窆은 埋葬임)하고 견고한 돌을 깎았는데 둥글어서 꿰맴과 모가 없으며 층급도 없었으니 무봉탑이라고 부름. 무봉탑의 형상이 새알과 같아서 인하여 이름이 난탑임.
●右脅; 또 우협와(右脅臥)ㆍ우협사자와(右脅師子臥)ㆍ사자와(師子臥)ㆍ사자와(獅子臥)로 지음. 곧 우협(右脅)을 아래로 향하고 두 발을 서로 포개고 오른손을 베개로 삼고 왼손은 곧게 뻗어 몸 위에 가볍게 놓는 와법(臥法)이니 비구의 정규(正規) 와법이 됨. 인도(印度) 이래로 불교도가 일반으로 모두 이 1와법을 채용하여 좌협와(左脅臥; 淫欲相)ㆍ앙신와(仰身臥; 아수라의 업에 속함)ㆍ복와(伏臥; 아귀의 업에 속함) 등의 와법을 금지했음 [중아함20장로상존수면경. 장아함3유행경].
●長往; 한 번 떠나자 돌아오지 않음.
●湘之南潭之北; 당서지리지31 강남도(江南道)에 가로되 담주(潭州) 장사군(長沙郡) …… 현(縣)이 여섯이니 장사ㆍ상담(湘潭)ㆍ상향ㆍ익양ㆍ예릉ㆍ유양이다. 또 일통지63 호광(湖廣) 장사부(長沙府)에 가로되 진(晉) 영가(永嘉) 초 여기에 상주(湘州)를 설치했다 …… 유송(劉宋)에서 다시 장사국(長沙國)으로 삼았다 …… 수(隋)에서 장사군(長沙郡)을 폐하고 담주(潭州)를 설치했다 …… 영현(領縣)이 12이다 …… 상담현(湘潭縣) (운운). 이것을 안험컨대 상주(湘州)와 담주(潭州)는 이 1주(州)의 다른 이름임. 또 상담현(湘潭縣)은 1현의 이름임. 여금에 말한 상지남담지북(湘之南潭之北)은 단지 1상담현(湘潭縣)을 분자(分字)하여 이를 말한 것임 [허당록이경].
●合同船; 곧 신분의 차별이 없이 한 배에 동승함의 뜻.
西京荷澤神會禪師者
襄陽人也 姓高氏 年十四爲沙彌 謁六祖 祖曰 知識遠來大艱辛 將本來否 若有本則合識主 試說看 師曰 以無住爲本 見卽是主 祖曰 這沙彌爭合取次語 便打 師於杖下思惟曰 大善知識 歷劫難逢 今旣得遇 豈惜身命 自此給侍 他日祖告衆曰 吾有一物 無頭無尾 無名無字 無背無面 諸人還識否 師乃出曰 是諸法之本源 乃神會之佛性 祖曰 向汝道無名無字 汝便喚作本源佛性 師禮拜而退 祖曰 此子向後 設有把茆葢頭 也只成得箇知解宗徒〈法眼云 古人授記人終不錯 如今立知解爲宗 卽荷澤也〉 師尋往西京受戒 唐景龍年中 却歸曹谿
●取次語; 草率之語也 又漫浪貌 容易語
●歷劫; 謂經過劫數 乃形容長遠之時間 又作經劫 久遠劫
●把茆葢頭; 同把茅蓋頭; 指禪僧住持寺院 禪林寶訓音義 把茅 出世爲人而結菴 乃草菴也
서경(西京) 하택신회(荷澤神會) 선사란 자는
양양(襄陽) 사람이며 성이 고씨(高氏)다. 나이 14에 사미가 되어 6조를 참알했다. 조왈(祖曰) 지식(知識)이 먼 데서 오느라 매우(大) 간신(艱辛)했겠구나. 본(本)을 가지고 왔느냐. 만약 본(本)이 있다면 곧 합당히 주(主)를 알 것이니 시험 삼아 설해보아라. 사왈(師曰) 무주(無住)를 본(本)으로 삼으며 보면 즉시(卽是) 주(主)입니다. 조왈(祖曰) 이(這) 사미가 어찌 취차어(取次語)에 합하느냐. 바로 때렸다. 스님이 장하(杖下)에서 사유하여 가로되 대선지식은 역겁(歷劫)에 만나기 어렵다. 지금 이미 만남을 얻었으니 어찌 신명(身命)을 아끼겠는가. 이로부터 급시(給侍)했다. 다른 날 6조가 고중(告衆)하여 가로되 나에게 한 물건이 있는데 무두무미(無頭無尾)하고 무명무자(無名無字)하고 무배무면(無背無面)하다. 제인(諸人)은 도리어 아느냐. 스님이 이에 나가서 가로되 이는 제불의 본원(本源)이며 곧(乃) 신회(神會)의 불성입니다. 조왈(祖曰) 너를 향해 말하되 무명무자(無名無字)라 했거늘 네가 바로(便) 본원불성(本原佛性)이라 불러 짓느냐. 스님이 예배하고 물러났다. 조왈(祖曰) 차자(此子; 이 남자)가 향후(向後)에 설사(設使) 파모개두(把茆葢頭)함이 있더라도 또한 다만 저(箇) 지해종도(知解宗徒)를 이룸을 얻을 것이다〈法眼이 이르되 古人이 사람에게 授記함은 마침내 어긋나지 않는다(不錯). 여금에 知解를 세워 宗으로 삼음은 곧 荷澤이다〉. 스님이 이윽고 서경(西京)으로 가서 수계(受戒)했고 당 경룡년(景龍年; 707-710) 중 조계로 돌아왔다(却歸).
●取次語; 초솔(草率; 절실하거나 정밀하지 못한 모양)한 말임. 또 만랑의 모양. 용이한 말.
●歷劫; 이르자면 겁수를 경과함이니 곧 장원(長遠)한 시간을 형용. 또 경겁(經劫)ㆍ구원겁(久遠劫)으로 지음.
●把茆葢頭; 파모개두(把茅蓋頭)와 같음. 선승이 사원에 주지함을 가리킴. 선림보훈음의. 파모(把茅) 출세하여 사람을 위하면서 결암(結菴)함이니 곧 초암(草菴)이다.
閱大藏經於內六處有疑 問於六祖 第一問戒定慧 曰所用戒何物 定從何處修 慧因何處起 所見不通流 祖曰 定卽定其心 將戒戒其行 性中常慧照 自見自知深 第二問 本無今有有何物 本有今無無何物 誦經不見有無義 眞似騎驢更覔驢 祖曰 前念惡業本無 後念善生今有 念念常行善行 後代人天不久 汝今正聽吾言 吾卽本無今有 第三問 將生滅却滅 將滅滅却生 不了生滅義 所見似聾盲 祖曰 將生滅却滅 令人不執性 將滅滅却生 令人心離境 未卽離二邊 自除生滅病 第四問 先頓而後漸 先漸而後頓 不悟頓漸人 心裏常迷悶 祖曰 聽法頓中漸 悟法漸中頓 修行頓中漸 證果漸中頓 頓漸是常因 悟中不迷悶 第五問 先定後慧 先慧後定 定慧後初 何生爲正 祖曰 常生淸淨心 定中而有慧 於境上無心 慧中而有定 定慧等無先 雙修自心正 第六問 先佛而後法 先法而後佛 佛法本根源 起從何處出 祖曰 說卽先佛而後法 聽卽先法而後佛 若論佛法本根源 一切衆生心裏出
대장경을 열람하다가 안(內)의 6처(處)에 의심이 있었고 6조(祖)에게 물었다. 제1문(第一問) 계정혜(戒定慧). 가로되 쓰는 바(所用) 계(戒)는 무슨 물건이며 정(定)은 어느 곳으로 좇아 닦으며 혜(慧)는 어느 곳으로 인해 일어나기에 소견(所見)이 통류(通流)하지 않습니까. 조왈(祖曰) 정(定)은 곧 그 마음을 정(定)하며 계(戒)를 가져 그 행을 계(戒; 警戒)하며 성중(性中)에 늘 혜(慧)로 비추어 스스로 보고 스스로 깊음을 안다. 제2문 본무금유(本無今有)는 무슨 물건이 있으며 본유금무(本有今無)는 무슨 물건이 없습니까. 송경(誦經)하면서 유무의 뜻을 보지 못하니 참으로 나귀를 타고 다시 나귀를 찾음과 흡사합니다. 조왈 전념(前念)의 악업은 본무(本無)며 후념(後念)의 선생(善生; 선이 생함)은 금유(今有)다. 염념(念念)에 선행을 늘 행하면 후대에 인천(人天)이 오래지 않으리라. 너는 이제 나의 말을 바로 들을지니(正聽) 나는 곧 본무금유(本無今有)다. 제3문 생(生)을 가지고 멸(滅)을 멸각(滅却)하고 멸을 가지고 생을 멸각하거니와 생멸의 뜻을 요달(了達; 了)하지 못하니 소견(所見)이 농맹(聾盲)과 흡사합니다. 조왈 생을 가지고 멸을 멸각함은 사람으로 하여금 성(性)에 집착하지 않게 하고 멸을 가지고 생을 멸각함은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이 경계를 여의게 하거니와 곧 2변(邊)을 여의어 스스로 생멸의 병(病)을 제(除)하지 못한다. 제4문 먼저 돈(頓) 이후(而後)에 점(漸)입니까, 먼저 점 이후에 돈입니까. 돈점을 깨치지 못하는 사람은 마음 속이 늘 미민(迷悶)합니다. 조왈 청법(聽法)은 돈중(頓中)의 점(漸)이며 오법(悟法)은 점중(漸中)의 돈이며 수행은 돈중의 점이며 증과(證果)는 점중의 돈이다. 돈점은 이 상인(常因)이니 오중(悟中)에 미민(迷悶)하지 않는다. 제5문 선정후혜(先定後慧)입니까, 선혜후정(先慧後定)입니까. 정혜(定慧)의 후초(後初)를 어떻게 생기(生起; 生)해야 정(正)이 됩니까. 조왈 늘 청정심을 생기(生起; 生)해야 정중(定中)에 혜(慧)가 있고 경상(境上)에 마음이 없어야(無心) 혜중(慧中)에 정(定)이 있다. 정혜가 제등(齊滕; 等)하여 선(先)이 없나니 쌍수(雙修)해야 자심(自心)이 바르다(正). 제6문 먼저 불(佛) 이후(而後)에 법입니까 먼저 법 이후에 불입니까. 불법의 본래 근원(根源)은 일어남이 어느 곳으로 좇아 나옵니까. 조왈 설(說)은 곧 먼저 불 이후(而後)에 법이며 청(聽)은 곧 먼저 법 이후에 불이다. 만약 불법의 본래 근원을 논하자면 일체중생의 마음 속에서 나온다.
祖滅後二十年間 曹谿頓旨沈廢於荊吳 嵩嶽漸門盛行於秦洛 師入京 天寶四年方定兩宗〈南能頓宗 北秀漸敎〉 乃著顯宗記 盛行於世 一日鄕信至 報二親亡 師入堂白槌曰 父母俱喪 請大衆念摩訶般若 衆纔集 師便打槌曰 勞煩大衆 師於上元元年奄然而化 塔于龍門
●荊吳; 春秋時的楚國與吳國 後泛指長江中下遊地區
●南能; 南宗慧能 慧能住於韶陽曹溪寶林寺 弘揚頓悟法門 與神秀於北方所倡之漸悟法門相對 史稱南頓北漸 南能北秀
●北秀; 北宗神秀 ▲六祖壇經 時 祖師居曹溪寶林 神秀大師在荊南玉泉寺 于時兩宗盛化 人皆稱南能北秀 故有南北二宗頓漸之分
●顯宗記; 一篇 唐代荷澤神會作 全稱荷澤大師顯宗記 收於大正藏第五十一冊景德傳燈錄三十 內容敘述禪宗之宗要 全篇僅有六百六十字
●白槌; 同白椎 祖庭事苑八 白椎 世尊律儀 欲辨佛事 必先秉白 爲穆衆之法也 今宗門白椎 必命知法尊宿以當其任 長老才據座已 而秉白云 法筵龍象衆 當觀第一義 長老觀機法會 酬唱旣終 復秉白曰 諦觀法王法 法王法如是 此蓋先德之眞規 皆不失佛意 且見叢林多擧世尊升座文殊白椎 或謂徧閱藏乘 不見其緣 然秉白儀範旣出聖製 復何區區求文殊之說 以恣無益之論耶
6조가 멸후 20년 간 조계의 돈지(頓旨)가 형오(荊吳)에서 침폐(沈廢)했고 숭악(嵩嶽)의 점문(漸門)이 진락(秦洛)에서 성행했다. 스님이 이에 입경(入京)하여 천보(天寶) 4년(745) 비로소 양종(兩宗)〈南能頓宗 北秀漸敎〉을 정했고 이에 현종기(顯宗記)를 지었는데 세상에 성행한다. 어느 날 향신(鄕信; 고향의 소식)이 이르러 이친(二親)이 사망하였다고 알렸다. 스님이 입당(入堂)하여 백추(白槌)하고 가로되 부모가 모두 죽었으니(喪) 청컨대 대중은 마하반야를 외우시오(念). 대중이 겨우 모이자 스님이 바로 타추(打槌)하고 가로되 대중을 노번(勞煩)케 했습니다. 스님이 상원(上元) 원년(760) 엄연(奄然; 홀연)히 화(化; 遷化)했다. 용문에 건탑(建塔; 塔)했다.
●荊吳; 춘추시(春秋時)의 초국(楚國)과 오국(吳國)이니 후에 널리 장강 중하유(中下遊; 中下流) 지구(地區)를 가리켰음. 後泛指長江
●南能; 남종의 혜능. 혜능은 소양(韶陽)의 조계 보림사에 거주하면서 돈오법문을 홍양(弘揚)했음. 신수가 북방에서 창도(倡道)한 바의 점오법문과 상대되므로 사가(史家)가 칭하기를 남돈북점(南頓北漸)ㆍ남능북수(南能北秀)라 함.
●北秀; 북종 신수. ▲육조단경. 때에 조사는 조계의 보림사에 거주했고 신수대사는 형남의 옥천사에 있었는데 때에 양종(兩宗)이 성화(盛化)한지라 사람들이 다 칭하기를 남능북수(南能北秀)라 했다. 고로 남북 2종이 돈점의 구분이 있게 되었다.
●顯宗記; 1편. 당대(唐代)의 하택신회(荷澤神會)가 지었으며 전칭이 하택대사현종기(荷澤大師顯宗記)임. 대정장 제51책의 경덕전등록30에 수록되었음. 내용은 선종의 종요(宗要)를 서술했으며 전편(全篇)이 겨우 660자가 있음.
●白槌; 백추(白椎)와 같음. 조정사원8. 백추(白椎) 세존의 율의(律儀)는 불사를 분변코자 하면 반드시 먼저 병백(秉白; 羯摩의 1종)함이 대중을 화목하게 하는 법이다. 여금에 종문의 백추(白椎)는 반드시 법을 아는 존숙에게 임명해 그 소임을 충당한다. 장로가 겨우 거좌(據座)한 다음 병백(秉白)하여 이르되 법연(法筵)의 용상중(龍象衆)이여 마땅히 제1의(義)를 보아라. 장로가 법회의 기(機)를 본다. 수창(酬唱)을 이미 마치면 다시 병백하여 가로되 법왕의 법을 체관(諦觀)하라 법왕의 법이 이와 같다. 이것은 대개 선덕(先德)의 진규(眞規)며 다 불의(佛意)를 잃지 않았다. 또 보니 총림에서 많이들 세존이 승좌하자 문수가 백추(白椎)한 것을 들거니와 혹은 이르기를 장승(藏乘)을 두루 열람했지만 그 인연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병백(秉白)의 의범(儀範)이 이미 성제(聖製)에서 나왔거늘 다시 어찌하여 구구(區區)히 문수의 설을 구하여 무익한 논에 맡기리오.
六祖下二世〈旁出〉
南陽忠國師法嗣
吉州耽源山應眞禪師
爲國師侍者時 一日國師在法堂中 師入來 國師乃放下一足 師見便出 良久却回 國師曰 適來意作麽生 師曰 向阿誰說卽得 國師曰 我問你 師曰 甚麽處見某甲 師又問 百年後有人問極則事如何 國師曰 幸自可憐生 須要覔箇護身符子作麽 異日 師擕籃子歸方丈 國師問 籃裏甚麽物 師曰 靑梅 國師曰 將來何用 師曰 供養 國師曰 靑在爭堪供養 師曰 以此表獻 國師曰 佛不受供養 師曰 某甲只恁麽 和尙如何 國師曰 我不供養 師曰 爲甚麽不供養 國師曰 我無果子 百丈海和尙在泐潭山牽車次 師曰 車在這裏 牛在甚麽處 丈斫額 師乃拭目 麻谷問 十二面觀音豈不是聖 師曰 是 麻谷與師一摑 師曰 想汝未到此境 國師諱日設齋 有僧問曰 國師還來否 師曰 未具他心 曰 又用設齋作麽 師曰 不斷世諦
●百年後; 謂死滅後
●幸自可憐生; 本來挺好的 本來挺可愛的 可憐 可愛 生 後綴
●護身符子; 子 助詞 護身之靈符 又作護符 神符 靈符 祕符 卽書寫佛 菩薩 諸天 鬼神等之形像眞言等之符札 將之置於貼身處 或呑食 可蒙各尊之加持護念 故有此名 符之種類極多 依祈願之意趣 而有各種差別 而其作用亦多 可除厄難 水難 火難及難産等
●靑在; 靑 生也 象物之生時色也 在 助詞
●斫額; 把手橫加于額頭 以便看得更高更遠
●十二面觀音; 十一面神呪心經義疏云 頂上佛面 或對習行大乘機者 而說諸法究竟佛道 故現佛面 各爾三方三面 爲化三有 故現三面 若合本面 應十二面 而十一面 是方便面 本體常面 是眞實面
●諱日; 人死亡之日 忌日
길주(吉州) 탐원산(耽源山) 응진선사(應眞禪師)
국사(國師)의 시자가 되었을 때 어느 날 국사가 법당 가운데 있었다. 스님이 들어오자 국사가 이에 한 발을 내려놓았다(放下). 스님이 보고 바로 나갔다가 양구(良久)에 돌아오자(却回) 국사가 가로되 적래(適來)의 뜻이 무엇인가(作麽生). 사왈(師曰) 누구(阿誰)를 향해 설해야 곧 옳습니까. 국사가 가로되 내가 너에게 물었다. 사왈 어느 곳에서 모갑을 보셨습니까. 스님이 또 묻되 백년후(百年後) 어떤 사람이 극칙사(極則事)를 물으면 어떻습니까. 국사가 가로되 행자가련생(幸自可憐生)이거늘 저(箇) 호신부자(護身符子)를 수요(須要; 需要)해 찾아서 무엇하겠는가. 다른 날 스님이 광주리(籃子)를 가지고 방장으로 돌아가자 국사가 묻되 광주리 속에 무슨 물건인가. 사왈 청매(靑梅)입니다. 국사가 가로되 가져 와서 어디에 쓰려는가. 사왈 공양(供養)합니다. 국사가 가로되 생것(靑在)이거늘 어찌 가히(堪) 공양하겠는가. 사왈 이로써 헌공(獻供)을 표(表)합니다. 국사가 가로되 부처는 공양을 받지 않는다. 사왈 모갑은 다만 이러합니다만 화상은 어떻습니까. 국사가 가로되 나는 공양하지 않는다. 사왈 무엇 때문에 공양하지 않습니까. 국사가 가로되 나는 과자(果子)가 없다. 백장해(百丈海; 懷海) 화상이 늑담산(泐潭山)에 있으면서 수레를 끌던(牽) 차에 사왈 수레는 이 속에 있거니와 소는 어느 곳에 있는가. 백장(百丈)이 작액(斫額)했다. 스님이 이에 눈을 닦았다(拭). 마곡(麻谷)이 묻되 십이면관음(十二面觀音)이 어찌 이 성인(聖人; 聖)이 아니겠는가. 사왈 그렇다. 마곡이 스님에게 한 번 후려갈겨 주었다. 사왈 생각건대 너는 이 경계에 이르지 못했다. 국사의 휘일(諱日)에 설재(設齋)하자 어떤 중이 물어 가로되 국사가 도리어 오십니까. 사왈 타심(他心; 他心通)을 갖추지 못했다. 가로되 또 설재(設齋)를 써서 무엇하겠습니까. 사왈 세제(世諦)를 단절하지 않는다.
●百年後; 이르자면 사멸(死滅)한 후.
●幸自可憐生; 본래 정호(挺好; 빼어나서 좋음)한 것. 본래 빼어나 가애(可愛)한 것. 가련(可憐)은 가애(可愛)며 생은 후철.
●護身符子; 자(子)는 조사. 호신의 영부(靈符)니 또 호부(護符)ㆍ신부(神符)ㆍ영부(靈符)ㆍ비부(祕符)로 지음. 곧 불ㆍ보살ㆍ제천ㆍ귀신 등의 형상이나 진언 등을 서사한 부찰(符札)임. 이것을 가지고 몸 근처에 붙여 놓거나 혹 삼켜서 먹으면 가히 각존(各尊)의 가지호념(加持護念)을 입으므로 고로 이 이름이 있음. 부(符)의 종류는 극히 많으며 기원(祈願)의 의취(意趣)에 의해 각종 차별이 있으며 그 작용도 또한 많음. 가히 액난ㆍ수난ㆍ화난 및 난산(難産) 등을 제거함.
●靑在; 청(靑)은 생(生)이니 물건의 생시(生時)의 색을 형상(形象)함. 재(在)는 조사.
●斫額; 손을 갖고 이마에 가로로 더하여 더 높고 더 먼 데를 보기에 편하게 함.
●十二面觀音; 십일면신주심경의소에 이르되 정상(頂上)은 부처의 얼굴이니 혹 대승의 기(機)를 익혀 행하는 자를 상대하여 제법의 구경(究竟)의 불도를 설하는지라 고로 부처의 얼굴을 나타냄이다. 각각의 세 방위의 세 얼굴은 3유(三有; 三界)를 교화하기 위함이니 고로 세 얼굴을 나타낸다. 만약 본면(本面)을 합하면 응당 12면이니 11면은 이 방편의 얼굴이며 본체의 상면(常面)은 이 진실의 얼굴이다.
●諱日; 사람이 사망한 날이니 기일(忌日).
오등회원 주역(五燈會元 註譯) 주문 제본
2024. 12월 말 번역 필. 5책 1질. 합4,615쪽. 本註와 補註 총 6,500 目. 미출간. 원문과 출처가 분명한 한문 주석을 넣고 다시 전체를 한글 번역. 주문 요청이 있을 시 인쇄소 에 부탁해 5일 내에 복사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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