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등회원

오등회원3 제안국사(齊安國師)-늑담상흥(泐潭常興)

태화당 2025. 10. 6. 10:05

杭州鹽官海昌院齊安國師

海門郡人也 姓李氏 生時神光照室 後有異僧謂之曰 建無勝幢 使佛日回照者 豈非汝乎 長依本郡雲琮禪師落髮受具 後聞大寂行化於龔公山 乃振錫而造焉 師有奇相 大寂一見深器之 乃令入室 密示正法 僧問 如何是本身盧舍那 師曰 與老僧過淨甁來 僧將淨甁至 師曰 却安舊處著 僧送至本處 復來詰問 師曰 古佛過去久矣 有講僧來參 師問 座主蘊何事業 對曰 講華嚴經 師曰 有幾種法界 曰 廣說則重重無盡 略說有四種 師竪起拂子曰 這箇是第幾種法界 主沉吟 師曰 思而知 慮而解 是鬼家活計 日下孤燈 果然失照保福聞云 若禮拜卽喫和尙棒 禾山代云 某甲不煩和尙莫怪 法眼代拊掌三下

杭州; 今浙江省省都

盧舍那; 毘盧舍那 又作毘盧遮那 嚧柘那 盧折羅 佛眞身之尊稱也

四種; 四種法界 三藏法數九 四法界[出華嚴法界觀] 一事法界 謂諸衆生色心等法 一一差別 各有分齊 故名事法界 分齊者 限量也 二理法界 謂諸衆生色心等法 雖有差別 而同一體性 故名理法界 三理事無礙法界 謂理由事顯 事攬理成 理事互融 故名理事無礙法界 四事事無礙法界 謂一切分齊事法 稱性融通 一多相卽 大小互容 重重無盡 故名事事無礙法界

活計; 生活之計策 禪錄中多比喩禪法或種種機用作略 二生活的工具家産 比喩俗情妄念 此指一

 

항주(杭州) 염관(鹽官) 해창원(海昌院) 제안국사(齊安國師)

해문군(海門郡) 사람이며 성이 이씨(李氏). 출생할 때 신광(神光)이 거실을 비추었고 다시 이승(異僧)이 있어 일러 가로되 무승당(無勝幢)을 건립해 불일(佛日)로 하여금(使) 돌이켜 비추게 할 자는 어찌 네가 아니겠는가. 장성(長成; )하자 본군(本郡) 운종선사(雲琮禪師)에게 의지해 낙발(落髮)하고 수구(受具)했다. 후에 대적(大寂)이 공공산(龔公山)에서 행화(行化)한다 함을 듣고 이에 석장(錫杖)을 떨치며 나아갔다. 스님에게 기상(奇相)이 있었고 대적이 한 번 보자 깊이 그를 법기(法器; )로 여겼고 이에 입실(入室)하게 하고 정법(正法)을 밀시(密示)했다. 승문(僧問) 무엇이 이 본신(本身) 노사나(盧舍那)입니까. 사왈 노승을 위해() 정병(淨甁)을 가져오너라. 중이 정병(淨甁)을 가지고 이르렀다. 사왈 도리어 구처(舊處)에 안치하라. 중이 보내어 본처(本處)에 이르고 다시 와서 힐문(詰問)하자 사왈 고불(古佛)이 지나가신(過去) 지 오래되었다. 어떤 강승(講僧)이 내참(來參)했다. 스님이 묻되 좌주(座主)는 무슨 사업을 쌓았는가(). 대왈(對曰) 화엄경을 강설합니다. 사왈 몇 종의 법계(法界)가 있는가. 가로되 광설(廣說)하면 곧 중중무진(重重無盡)하고 약설(略說)하면 4(四種)이 있습니다. 스님이 불자(拂子)를 세워 일으키고 가로되 이것(這箇)은 이 제기종(第幾種; 몇째 종)의 법계인가. 좌주가 침음(沉吟)하자 사왈 사유해서 알거나(思而知) 사려해서 이해함(慮而解)은 이 귀가(鬼家)의 활계(活計)며 일하(日下)의 고등(孤燈)이니 과연 실조(失照)한다保福(從展)이 듣고 이르되 만약 예배한다면 곧 화상의 방()을 먹을 것입니다. 禾山(無殷)代云 모갑이 화상을 번거롭게 하지 않으리니 괴이히 여기지 마십시오. 法眼하여 三下(세 번) 拊掌(拍掌)했다.

杭州; 지금의 절강성 성도(省都).

盧舍那; 비로사나(毘盧舍那; vairocana)니 또 비로자나(毘盧遮那)ㆍ로자나(嚧柘那)ㆍ로절라(盧折羅)로 지음. 불진신(佛眞身)의 존칭임.

四種; 사종법계(四種法界). 삼장법수9. 4법계(法界) [출화엄법계관] 1. 사법계(事法界) 이르자면 모든 중생과 색심(色心) 등의 법이 낱낱이 차별이라서 각기 분제(分齊)가 있나니 고로 이름이 사법계임. 분제란 것은 한량임. 2. 이법계(理法界) 이르자면 모든 중생과 색심 등의 법이 비록 차별이 있지만 동일한 체성(體性)이니 고로 이름이 이법계임. 3.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 이르자면 리()가 사()로 말미암아 나타나고 사()가 리()를 잡아 이루어지므로 이사가 호융(互融)하니 고로 이름이 이사무애법계임. 4.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 이르자면 일체의 분제의 사법(事法)이 자성에 칭합해 융통함. ()과 다()가 서로 즉(; 붙다)하고 대와 소가 서로 용납하며 중중으로 무진하나니 고로 이름이 사사무애법계임.

活計; 1. 생활(生活)의 계책(計策)이니 선록 중에 다분히 선법(禪法) 혹은 갖가지 기용(機用)의 작략(作略)에 비유함. 2. 생활의 공구(工具)와 가산(家産). 속정(俗情)의 망념(妄念)에 비유함. 여기에선 1을 가리킴.

 

僧問大梅 如何是西來意 大梅曰 西來無意 師聞乃曰 一箇棺材 兩箇死漢玄沙云 鹽官是作家 師一日喚侍者曰 將犀牛扇子來 者曰 破也 師曰 扇子旣破 還我犀牛兒來 者無對投子代云 不辭將出 恐頭角不全 資福代作圓相 心中書牛字 石霜代云 若還和尙卽無也 保福云 和尙年尊別請人好 師一日謂衆曰 虛空爲鼓 須彌爲椎 甚麽人打得 衆無對有人擧似南泉 泉云 王老師不打這破鼓 法眼別云 王老師不打 有法空禪師到 請問經中諸義 師一一答了 却曰 自禪師到來 貧道總未得作主人 法空曰 請和尙便作主人 師曰 今日夜也 且歸本位安置 明日却來 法空下去 至明旦 師令沙彌屈法空禪師 法空至 師顧沙彌曰 咄 這沙彌不了事 敎屈法空禪師 屈得箇守堂家人來 法空無語 法昕院主來參 師問 汝是誰 對曰 法昕 師曰 我不識汝 昕無語 師後不疾 宴坐示滅 諡悟空禪師

棺材; 裝殮屍體的器具 多以木材製成

犀牛扇子; 子 後綴 從容錄第二十五則曰 諸方謂 扇畫犀牛玩月 或云 犀角爲扇 或云 以犀爲柄 皆得名爲犀牛扇也

和尙年尊別請人好; 碧巖錄第九十一則曰 保福云 和尙年尊別請人好 此語道得穩當 前三則語却易見 此一句語有遠意 雪竇亦打破了也 山僧舊日在慶藏主處理會道 和尙年尊老耄 得頭忘尾 適來索扇子 如今索犀牛兒 難爲執侍 故云別請人好

空爲鼓; 祖庭事苑一 虛空爲鼓 須菩提言 世尊記我聲聞人中無諍三昧最爲第一 是三昧門 我今已得 我若入定 正使有人具大神力 以百億四天下爲一大鼓 取須彌山爲一大椎 於我定時 令一大人住在我前 執彼大椎撾擊大鼓 無蹔休廢 乃至經劫 如是鼓聲尙不入耳 何況亂心能令我出 見寶積經(102)

 

중이 대매(大梅; 法常)에게 묻되 무엇이 이 서래의(西來意)입니까. 대매가 가로되 서래엔 뜻이 없다. 스님이 듣고 이에 가로되 1()의 관재(棺材)에 두 개의 사한(死漢)이다玄沙가 이르되 鹽官이 이 作家. 스님이 어느 날 시자를 불러 가로되 서우선자(犀牛扇子)를 가지고 오너라. 시자가 가로되 깨어졌습니다. 사왈 선자(扇子; 부채. 는 조사)가 이미 깨어졌다면 나에게 서우아(犀牛兒; 코뿔소. 는 조사)를 송환해 오너라. 시자가 대답이 없었다投子(大同)代云 가져다 냄음 사양하지 않으나 頭角이 온전하지 않을까 염려합니다. 資福(如寶)圓相代作하고 心中(中心)牛字를 썼다. 石霜(慶諸)代云 만약 화상에게 송환하려 하면 곧 없습니다. 保福(從展)이 이르되 화상은 年尊(나이가 높음)하여 달리 사람을 청함이 좋겠습니다(和尙年尊別請人好). 스님이 어느 날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허공을 북으로 삼고(虛空爲鼓) 수미(須彌; 수미산)를 망치로 삼는다면 어떤 사람(甚麽人)이 타득(打得)하겠는가. 대중이 대답이 없었다어떤 사람이 南泉에게 들어 보이자 泉云 王老師는 이 깨어진 북을 때리지 않겠다. 法眼別云 王老師는 때리지 않겠다. 법공선사(法空禪師)가 있어 도래하여 경중의 여러 뜻을 청문(請問)했다. 스님이 하나하나 답해 마치고 도리어 가로되 선사가 도래함으로부터 빈도(貧道)는 내내() 주인(主人)을 지음을 얻지 못했습니다. 법공이 가로되 청컨대 화상이 바로 주인을 지으십시오. 사왈 금일은 밤이니 다만() 본위(本位)로 돌아가 안치하고 명일 도리어 오십시오. 법공이 내려갔다. 다음날 아침에 이르자 스님이 사미를 시켜 법공선사를 굴(; )하게 했다. 법공이 이르자 스님이 사미를 돌아보고 가로되 돌(; 꾸짖음) 이 사미가 일을 마치지 못했구나(不了事). 법공선사를 굴()하게 했더니 도리어 저() 수당(守堂)하는 가인(家人)을 굴득(屈得; 請得)하여 왔구나. 법공이 말이 없었다. 법흔(法昕) 원주(院主)가 내참(來參)했다. 스님이 묻되 너는 이 누구인가. 대왈(對曰) 법흔입니다. 사왈 나는 너를 알지 못한다. 법흔이 말이 없었다. 스님이 후에 질병 없이 연좌(宴坐)하여 시멸(示滅)했다. ()가 오공선사(悟空禪師).

棺材; 시체를 장렴(裝殮; 죽은 사람을 관재 속에 싸서 넣음)하는 기구. 다분히 목재로 제작해 이룸.

犀牛扇子; ()는 후철. 종용록 제25칙에 가로되 제방에서 이르기를 선화(扇畫)에 무소가 달구경함이다. 혹은 이르되 무소뿔로 부채를 만들었다. 혹은 이르되 무소로 자루를 만들었다. 모두 서우선(犀牛扇)으로 이름함을 얻는다.

和尙年尊別請人好; 벽암록 제91칙에 가로되 보복(保福)이 이르되 화상(염관)이 연존(年尊)하시니 달리 사람을 청함이 좋겠습니다 하니 이 말이 온당(穩當)함을 말해 얻었다. 앞의 3칙의 말(투자ㆍ석상ㆍ자복의 말)은 도리어 보기가 쉽지만 이 1구의 말은 원의(遠意)가 있는지라 설두가 또한 타파해 마쳤다(가석하게도 노고만 하고 공이 없다는 말을 가리킴). 산승이 구일(舊日)에 경장주(慶藏主)의 처소에 있었는데 이회하여 말하되(경장주가 말함) 화상(염관)은 연존노모(年尊老耄)하여 머리를 얻으면 꼬리를 잊는지라 적래(適來)엔 부채를 찾다가 여금엔 서우아(犀牛兒)를 찾으니 집시(執侍)하기가 어렵다 하여 고로 이르되 달리 사람을 청함이 좋겠습니다 했다 하였다.

虛空爲鼓; 조정사원1. 허공위고(虛空爲鼓) 수보리가 말했다. 세존이 나에게 수기(授記)하시되 성문인(聲聞人) 가운데 무쟁삼매(無諍三昧)가 가장 제일이 된다 하셨거니와 이 삼매문(三昧門)을 내가 이제 이미 얻었습니다. 내가 만약 입정(入定)하면 바로 대신력을 갖춘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백억사천하(百億四天下)로써 한 큰 북을 만들고 수미산을 취해 한 큰 망치를 만들게 해 내가 입정한 때 한 대인(大人)으로 하여금 내 앞에 주재(住在)해 그 큰 망치를 잡아 대고(大鼓)를 과격(撾擊; 치다)하되 잠시도 휴폐(休廢)함이 없이, 내지 겁()을 경과하더라도 이와 같은 북소리도 오히려 귀에 들어오지 못하거늘 어찌 하물며 마음을 어지럽혀 능히 나로 하여금 나오게 하겠습니까. 보적경(102)을 보라.

 

盧山歸宗寺智常禪師

上堂 從上古德 不是無知解 他高尙之士 不同常流 今時不能自成自立 虛度時光 諸子莫錯用心 無人替汝 亦無汝用心處 莫就他覔 從前祇是依他解 發言皆滯 光不透脫 祇爲目前有物 僧問 如何是玄旨 師曰 無人能會 曰 向者如何 師曰 有向卽乖 曰 不向者如何 師曰 誰求玄旨 又曰 去 無汝用心處 曰 豈無方便門 令學人得入 師曰 觀音妙智力 能救世間苦 曰 如何是觀音妙智力 師敲鼎蓋三下曰 子還聞否 曰 聞 師曰 我何不聞 僧無語 師以棒趂下 師嘗與南泉同行 後忽一日相別 煎茶次 南泉問曰 從來與師兄商量語句 彼此已知 此後或有人問畢竟事作麽生 師曰 這一片地大好卓庵 泉曰 卓庵且置 畢竟事作麽生 師乃打飜茶銚 便起 泉曰 師兄喫茶了 普願未喫茶 師曰 作這箇語話 滴水也難銷 僧問 此事久遠 又如何用心 師曰 牛皮鞔露柱 露柱啾啾呌 凡耳聽不聞 諸聖呵呵笑 師因官人來 乃拈起帽子兩帶曰 還會麽 曰 不會 師曰 莫怪老僧頭風不卸帽子 師入園取菜次 乃畫圓相 圍却一株 語衆曰 輙不得動著這箇 衆不敢動 少頃師復來見菜猶在 便以棒趂衆僧曰 這一隊漢 無一箇有智慧底 師問新到甚麽處來 曰 鳳翔來 師曰 還將得那箇來否 曰 將得來 師曰 在甚麽處 僧以手從頂擎捧呈之 師卽擧手作接勢 拋向背後 僧無語 師曰 這野狐兒

時光; 時節光陰 卽時間 時候

且置; 放在前分句末尾 表示排除前分句內容 引出的後分句是主題句

露柱; 顯露在外面的柱子 註華嚴經題法界觀門頌下 露柱者簷下柱也

頭風; 一頭痛 中醫學病症名 二指頭瘡 髮脫之類 此指二

新到;; 新到僧也 於叢林中 指新到某寺掛搭之僧 亦泛指一般新參之僧

 

여산(廬山) 귀종사(歸宗寺) 지상선사(智常禪師)

상당(上堂) 종상(從上; 從前. 以前)의 고덕(古德)은 이 지해(知解)가 없지 않았으며 그 고상지사(高尙之士)는 상류(常流; 범상한 무리)와 같지 않았다. 금시(今時)엔 능히 자성자립(自成自立)하지 못하고 헛되이 시광(時光)을 지낸다. 제자(諸子; 자는 남자를 가리킴), 잘못 용심(用心)하지 말지니 너를 대체(代替)할 사람이 없다. 또한 네가 용심할 곳이 없으니 남에게 나아가 찾지 말아라. 종전(從前)에 다만 이 타인에게 의지해 이해한지라 발언하면 모두 막혀() ()을 투탈(透脫)하지 못함은 다만 목전에 물건이 있기 때문이다. 승문(僧問) 무엇이 이 현지(玄旨)입니까. 사왈 능히 알() 사람이 없다. 가로되 향하는 자는 어떻습니까. 사왈 향함이 있으면 곧 어긋난다(). 가로되 향하지 않는 자는 어떻습니까. 사왈 누가 현지(玄旨)를 구하느냐. 또 가로되 가거라, 네가 용심할 곳이 없다. 가로되 어찌 방편문으로 학인으로 하여금 득입(得入)하게 함이 없겠습니까. 사왈 관음(觀音)의 묘지력(妙智力)이 능히 세간고(世間苦)를 구제한다. 가로되 무엇이 이 관음의 묘지력입니까. 스님이 솥뚜껑(鼎蓋)을 세 번(三下) 두드리고 가로되 자네는 도리어 듣느냐. 가로되 듣습니다. 사왈 나는 왜 듣지 못하는가. 중이 말이 없었다. 스님이 방(; 주장자)으로써 쫓아내었다(趁下; 는 조사). 스님이 일찍이 남천(南泉)과 더불어 동행했는데 후에 홀연히 어느 날 상별(相別)하면서 전다(煎茶)하던 차에 남천이 물어 가로되 종전(從前)에 사형과 더불어 상량(商量)했던 어구(語句)는 피차(彼此) 이미 압니다. 차후(此後)에 혹 어떤 사람이 필경사(畢竟事)를 물으면 어떻습니까(作麽生). 사왈 이() 일편(一片)의 땅은 탁암(卓庵; 암자를 세우다)하기에 매우 좋다(大好). 천왈(泉曰) 탁암(卓庵)은 차치(且置)하고 필경사는 어떻습니까. 스님이 이에 다요(茶銚; 차 냄비)를 엎어버리고(打飜) 바로 일어났다. 천왈(泉曰) 사형은 끽다(喫茶)해 마쳤지만 보원(普願; 남천)은 끽다하지 못했습니다. 사왈 저개(這箇) 어화(語話)를 짓는다면 한방울의 물도 소화(銷化; 消化와 같음)하기 어렵다. 승문(僧問) 차사(此事)는 구원(久遠)하니 또 어떻게 용심해야 합니까. 사왈 우피(牛皮)로 노주(露柱)를 덮어씌우매() 노주가 추추(啾啾)하며 부르짖나니 범부의 귀로는 들어도 듣지 못하고 제성(諸聖)이 하하(呵呵; 원음이 하) 웃는다. 스님이 관인(官人)이 옴으로 인해 이에 모자(帽子)의 양대(兩帶)를 집어 일으키고 가로되 도리어 압니까. 가로되 알지 못합니다. 사왈 노승이 두풍(頭風)으로 모자를 내리지() 않음을 괴이히 여기지 마시오. 스님이 입원(入園)하여 취채(取菜)하던 차에 곧 원상(圓相)을 그려 1()에 둘러쌌다(圍却). 대중에게 말해 가로되 오로지() 이것(遮箇)을 동착(動著)함을 얻지 말아라. 대중이 감히 동착하지 못했다. 소경(少頃; 片刻)에 스님이 다시 와서 보매 채()가 아직() 있었다. 바로 방()으로써 중승(衆僧)을 쫓아내며 가로되 이() 일대한(一隊漢)1()도 지혜가 있는 것()이 없구나. 스님이 신도(新到)에게 묻되 어느 곳(什麽處)에서 오느냐. 가로되 봉상(鳳翔)에서 옵니다. 사왈 도리어 나개(那箇)를 가지고(將得; 은 조사) 왔느냐. 가로되 가지고(將得) 왔습니다. 사왈 어느 곳에 있느냐. 중이 손으로써 정수리로 좇아 경봉(擎捧; 받들다)하여 이를 보였다(呈之). 스님이 곧 거수(擧手)하여 접수하는 자세를 짓고는 배후(背後)를 향해 던졌다. 중이 말이 없었다. 사왈 이 야호아(野狐兒; 는 조사).

時光; 시절광음(時節光陰). 곧 시간. 시후(時候).

且置; 전분구(前分句) 말미에 놓아두어 전분구의 내용을 배제하고 인출하는 후분구가 이 주제구(主題句)임을 표시함.

露柱; 외면에 환히 드러난 기둥. 주화엄경제법계관문송하. 노주(露柱)란 것은 처마 아래의 기둥이다.

頭風; 1. 두통(頭痛)이니 중의학(中醫學) 병증(病症)의 이름. 2. 두창(頭瘡)을 가리킴. 머리카락이 빠지는 종류. 여기에선 2를 가리킴.

新到;; 신도승(新到僧). 총림 중에서 어떤 사원에 새로 도착하여 괘탑하는 승인을 가리킴. 또한 널리 일반의 신참(新參)의 승인을 가리킴.

 

師剗草次 有講僧來參 忽有一蛇過 師以鉏斷之 僧曰 久嚮歸宗 元來是箇麤行沙門 師曰 你麤 我麤 曰 如何是麤 師竪起鉏頭 曰 如何是細 師作斬蛇勢 曰 與麽則依而行之 師曰 依而行之且置 你甚處見我斬蛇 僧無對 雲巖來參 師作挽弓勢 巖良久 作㧞劒勢 師曰 來太遲生 上堂 吾今欲說禪 諸子總近前 大衆近前 師曰 汝聽觀音行 善應諸方所 問 如何是觀音行 師乃彈指曰 諸人還聞否 曰 聞 師曰 一隊漢向這裏覔甚麽 以棒趂出 大笑歸方丈 僧辭 師問 甚麽處去 曰 諸方學五味禪去 師曰 諸方有五味禪 我這裏祇有一味禪 曰 如何是一味禪 師便打 僧曰 會也 會也 師曰 道道 僧擬開口 師又打 僧後到黃檗 擧前話 檗上堂曰 馬大師出八十四人善知識 問著箇箇屙漉漉地 祇有歸宗較些子

久響; 響 用同嚮 趣向 向著 長久敬慕 用於最初相見其人時的語 嚮 趨向 向著 集韻 嚮 面也 或從向

太遲生; 太 表示程度過分 相當于甚 生 語助辭 相當于然或樣字

五味禪; 五味交雜之禪 一味禪之對稱 圭峰宗密於禪源諸詮集都序上之一中 分別一切禪爲五種 一外道禪 二凡夫禪 三小乘禪 四大乘禪 五最上乘禪 又稱如來淸淨禪

一味禪; 乃純一無雜之最上乘禪 對五味禪而言

屙漉漉地; 謂因屙屎臭氣故令人掩鼻 形容禪人機辯不爽利 地 語助辭 廣雅 漉 渗也

較些子; 較 差也 些子 卽些少 謂有些少的差異也 兼帶否定與肯定兩意

 

스님이 풀을 깎던() 차에 어떤 강승(講僧)이 내참(來參)했다. 홀연히 1()가 있어 지나가자 스님이 호미로써 그것을 끊었다. 승왈(僧曰) 귀종(歸宗)을 구향(久響)했더니 원래 시개(是箇; 는 조사) 추행사문(麤行沙門)입니다. 사왈 너의 추(), 나의 추(). 가로되 무엇이 이 추()입니까. 스님이 서두(鉏頭; 호미. 는 조사)를 세워 일으켰다. 가로되 무엇이 이 세()입니까. 스님이 뱀을 베는 자세(姿勢; )를 지었다. 가로되 이러하다면(與麽) 곧 의()하여 행하겠습니다. 사왈 의하여 행함은 그래 두고 네가 어느 곳(甚處)에서 나의 참사(斬蛇; 뱀을 베다)를 보느냐. 중이 대답이 없었다. 운암(雲巖; 曇晟)이 내참(來參)하자 스님이 활을 당기는() 자세를 지었다. 운암이 양구(良久)에 검을 뽑는 자세를 지었다. 사왈 옴()이 너무 느리다(太遲生). 상당(上堂) 내가 지금(只今) ()을 설하려고 하니 제자(諸子; 는 남자)는 모두 근전(近前)하라. 대중이 근전(近前)했다. 사왈 너희는 관음행(觀音行)을 들을지니 여러 방소(方所)에 잘 응한다. 묻되 무엇이 이 관음행입니까. 스님이 이에 탄지(彈指)하고 가로되 제인(諸人)은 도리어 듣느냐. 가로되 듣습니다. 사왈 일대한(一隊漢)이 이 속(這裏)을 향해 무엇을 찾느냐. (; 주장자)으로써 쫓아내고 대소(大笑)하며 방장으로 돌아갔다. 중이 고별하자 스님이 묻되 어느 곳으로 가느냐. 가로되 제방으로 오미선(五味禪)을 배우러 갑니다. 사왈 제방엔 오미선이 있지만 나의 이 속은 다만 일미선(一味禪)이 있다. 가로되 무엇이 이 일미선입니까. 스님이 바로 때렸다. 중이 가로되 알았습니다, 알았습니다. 사왈 말하라, 말하라. 중이 입을 열려고 하자 스님이 또 때렸다. 중이 후에 황벽(黃檗; 希運)에 이르러 전화(前話)를 들자 황벽이 상당해 가로되 마대사(馬大師)84인의 선지식을 배출했는데 물어보면 개개가 아록록지(屙漉漉地). 다만 귀종이 있어 교사자(較些子; 조금은 상당함).

久響; ()은 향()과 씀이 같음. 취향(趣向), 향착(向著). 장구히 경모(敬慕)함이니 그 사람을 최초에 상견했을 때 쓰는 말임. ()은 추향(趨向), 향착(向著). 집운 향() ()이다. 혹 종향(從向)이다.

太遲生; ()는 정도가 과분함을 표시하며 심()에 상당함. ()은 어조사며 연() 혹 양자(樣字)에 상당함.

五味禪; 5()가 교잡(交雜)하는 선이니 1미선(一味禪)의 대칭. 규봉종밀(圭峰宗密)이 선원제전집도서상지1 중에 일체의 선()을 분별해 5종으로 삼았음. 1. 외도선(外道禪). 2. 범부선(凡夫禪). 3. 소승선(小乘禪). 4. 대승선(大乘禪). 5. 최상승선(最上乘禪) 또 호칭(呼稱)이 여래청정선(如來淸淨禪).

一味禪; 곧 순일무잡(純一無雜)한 최상승선이니 오미선(五味禪)을 상대로 말함임.

屙漉漉地; 이르자면 아시(屙屎; 똥을 누다)의 나쁜 냄새로 인해 고로 사람으로 하여금 코를 막게 함. 선인의 기변(機辯)이 상리(爽利; 상쾌하고 예리)하지 못함을 형용. 지는 어조사. 광아 록() (; 새다)이다.

較些子; ()는 차()며 사자(些子)는 곧 사소임. 이르자면 사소한 차이가 있음. 부정과 긍정의 두 뜻을 겸대함.

 

江州刺史李㴾問 敎中所言 須彌納芥子 㴾卽不疑 芥子納須彌 莫是妄譚否 師曰 人傳使君讀萬卷書籍 還是否 曰 然 師曰 摩頂至踵如椰子大 萬卷書向何處著 李俛首而已 李異日又問 一大藏敎 明得箇甚麽邊事 師擧拳示之曰 還會麽 曰 不會 師曰 這箇措大 拳頭也不識 曰 請師指示 師曰 遇人卽途中授與 不遇卽世諦流布 師以目有重瞳 遂將藥手按摩 以致兩目俱赤 世號赤眼歸宗焉 後示滅 諡至眞禪師

李渤; (773-831) 唐代歸宗智常之法嗣 字濬之 元和初年受韓愈勸請 出仕諫議大夫 竝歷任諸職 寶曆年中(8 25-827) 任江州(江西九江)刺史 智常住持棲賢寺時 李渤常前往問法 晩居白鹿洞書院 世稱白鹿先生 逝於太和五年 享年五十九 [傳燈錄七歸宗智常章 禪苑蒙求上 白鹿洞書院志四 廬山記二]

措大; 又作措大家 明代曺安撰讕言長語云 措大 能擧措大事 謂貴顯大人也

 

강주자사(江州刺史) 이발(李㴾; 李渤과 같음)이 묻되 교중(敎中; 維摩經中)에 말한 바 수미(須彌)가 개자(芥子)를 수납(受納)한다 함은 발()이 곧 의심하지 않습니다만 개자가 수미를 수납한다 함은 이 망담(妄譚; 妄談)이 아닙니까. 사왈 사람들이 전하기를 사군(使君)이 만 권 서적을 읽었다던데 도리어 그렇습니까(是否). 가로되 그렇습니다. 사왈 마정지종(摩頂至踵; 정수리에서 발꿈치까지 더듬다)하매 야자(椰子)의 크기와 같거늘 만 권의 서적을 어느 곳을 향해 붙입니까. ()가 머리를 숙일() 따름이었다. ()가 다른 날(異日) 또 묻되 일대장교(一大藏敎)는 저() 심마변(甚麽邊; 어느 가)의 일을 밝힙니까(明得). 스님이 주먹을 들어 보이고 가로되 도리어 압니까. 가로되 알지 못합니다. 사왈 이(這箇) 조대(措大)가 권두(拳頭; 는 조사)도 알지 못합니까. 가로되 스님의 지시를 청합니다. 사왈 사람을 만나면 곧 도중(途中)에 수여(授與)하거니와 만나지 못하면 곧 세제(世諦)로 유포(流布)됩니다. 스님이 눈에 중동(重瞳; 겹으로 된 눈동자)이 있은 까닭으로 드디어 약수(藥手)를 가지고 안마(按摩)했는데 두 눈이 모두 붉어짐에 이른지라() 세상에서 호()하여 적안귀종(赤眼歸宗)이라 했다. 후에 시멸(示滅)했고 시()가 지진선사(至眞禪師).

李㴾; (773-831) 당대 귀종지상(歸宗智常)의 법사(法嗣). 자는 준지. 원화 초년 한유(韓愈)의 권청을 받아들여 간의대부로 출사(出仕; 벼슬을 하여 관직에 나아감)했으며 아울러 여러 관직을 역임(歷任)했음. 보력년 중(825-827) 강주(江州; 강서 구강)자사에 임명되었음. 지상이 서현사에 주지할 때 이발이 늘 앞으로 가서 법을 물었음. 만년에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에 거주했으며 세칭이 백록선생. 태화 5년에 서거했으며 향년은 59 [전등록7귀종지상장. 선원몽구상. 백록동서원지4. 여산기2].

措大; 또 조대가(措大家)로 지음. 명대 조안(曺安)이 찬()한 난언장어(讕言長語)에 이르되 조대(措大) 능히 대사(大事)를 거조(擧措)함이니 이르자면 귀현(貴顯; 존귀하고 이름이 높음)의 대인(大人)이다.

 

明州大梅山法常禪師者

襄陽人也 姓鄭氏 幼歲從師於荊州玉泉寺 初參大寂問 如何是佛 寂曰 卽心是佛 師卽大悟 遂之四明梅子眞舊隱縛茆燕處 唐貞元中 鹽官會下有僧 因採拄杖 迷路至庵所 問 和尙在此多少時 師曰 祇見四山靑又黃 又問 出山路向甚麽處去 師曰 隨流去 僧歸擧似鹽官 官曰 我在江西時曾見一僧 自後不知消息 莫是此僧否 遂令僧去招之 師答以偈曰 摧殘枯木倚寒林 幾度逢春不變心 樵客遇之猶不顧 郢人那得苦追尋 一池荷葉衣無盡 數樹松花食有餘 剛被世人知住處 又移茅舍入深居 大寂聞師住山 乃令僧問 和尙見馬大師得箇甚麽 便住此山 師曰 大師向我道 卽心是佛 我便向這裏住 僧曰 大師近日佛法又別 師曰 作麽生 曰 又道 非心非佛 師曰 這老漢惑亂人 未有了日 任他非心非佛 我祇管卽心卽佛 其僧回擧似馬祖 祖曰 梅子熟也僧問禾山 大梅恁麽道 意作麽生 禾山云 眞師子兒 龐居士聞之 欲驗師實 特去相訪 纔相見 士便問 久嚮大梅 未審梅子熟也未 師曰 熟也 你向甚麽處下口 士曰 百雜碎 師伸手曰 還我核子來 士無語 自此學者漸臻 師道彌著

明州; 浙江省寧波之古名

摧殘; 遭受嚴重損失或破壞

下口; 開口 張口

百雜碎; 細碎其物也

 

명주(明州) 대매산(大梅山) 법상선사(法常禪師)란 자는

양양(襄陽) 사람이며 성이 정씨(鄭氏). 유세(幼歲)에 형주(荊州) 옥천사(玉泉寺)에서 스승을 좇았다. 대적(大寂; 마조의 시호)을 초참(初參)해 묻되 무엇이 이 부처입니까. 대적이 가로되 곧 마음이 이 부처다(卽心是佛). 스님이 곧 대오했다. 드디어 사명(四明) 매자진(梅子眞) 구은(舊隱)으로 가서 띠풀을 엮어(縛茆) 편안히 거저(燕處)했다. () 정원(貞元; 785-805. 저본에 眞元으로 지었음) 중 염관회하(鹽官會下)의 어떤 중이 주장자를 채집(採集; )함으로 인해 길을 미란(迷亂)해 암자의 처소에 이르렀다. 묻되 화상이 여기에 있은 지 얼마의 시절입니까. 사왈(師曰) 다만 사산(四山; 사방의 산)의 푸르고 또 누럼을 본다. 또 묻되 산을 벗어나는 길은 어느 곳을 향해 가야 합니까. 사왈 유수(流水) 따라 가거라. 중이 돌아가 염관(鹽官)에게 들어 보이자 염관이 가로되 내가 강서(江西)에 있을 때 일찍이 1()을 보았는데 자후(自後; 이로부터 이후)로 소식을 알지 못했는데 이는 이 중이 아닐까. 드디어 중을 시켜 가서 초청(招請; )하게 했다. 스님이 게()로써 답해 가로되 최잔(摧殘)한 고목(枯木)이 한림(寒林)에 기댔는데/ 몇 차례()나 봄을 만났으나 변심하지 않았네/ 초객(樵客; 나무꾼)이 이를 보고도 오히려 돌아보지 않거늘/ 영인(郢人; 知己에 비유)이 어찌 애써() 추심(追尋)함을 얻는가. 한 못의 연잎은 옷이 다함 없고/ 몇 나무 송화는 식량으로 남음이 있다/ 단지() 세인이 주처(住處)를 앎을 입어/ 또 모사(茅舍)를 옮겨 깊이 들어가 거주할까 하노라. 대적(大寂)이 스님이 주산(住山)한다 함을 듣고 이에 중을 시켜 묻게 하되 화상이 마대사(馬大師)를 뵙고 저() 무엇(甚麽)을 얻었기에 바로 이 산에 거주합니까. 사왈 대사(大師)가 나를 향해 말씀하되 곧 마음이 이 부처다(卽心是佛). 내가 바로 이 속(這裏)을 향해 거주한다. 승왈(僧曰) 대사의 근일(近日) 불법은 또 다릅니다. 사왈 어떠한가(作麽生). 가로되 또 말씀하기를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라(非心非佛) 하십니다. 사왈 이 노한(老漢)이 사람들을 혹란(惑亂)하여 마칠 날이 있지 않구나. 그의 비심비불(非心非佛)에 일임하나니 나는 다만 관대(管帶; )하여 즉심시불(卽心卽佛)이라 하겠다. 그 중이 돌아가 마조에게 들어 보이자 마조가 가로되 대중(大衆)이여 매자(梅子; 梅實)가 익었다중이 禾山(無殷)에게 묻되 大梅가 이렇게 말한 뜻이 무엇입니까. 禾山이 이르되 참다운 師子兒(는 조사). 방거사(龐居士)가 이를 듣고 스님의 진실을 시험하려고 특별히 가서 상방(相訪)했다. 겨우 상견하자 거사가 바로 묻되 대매(大梅)를 구향(久嚮)했습니다. 미심하오니 매자(梅子; 매실)가 익었습니까 또는 아닙니까. 사왈 익었지만 네가 어느 곳을 향해 하구(下口)하겠는가. 거사가 가로되 백잡쇄(百雜碎; 산산조각 나다)로다. 스님이 손을 펴고 가로되 나에게 핵자(核子; )를 송환하라. 거사가 말이 없었다. 이로부터 학자가 점차 이르렀고() 스님의 도가 더욱() 나타났다().

明州; 절강성 영파(寧波)의 옛 이름.

摧殘; 엄중한 손실 혹 파괴를 조수(遭受).

下口; 개구(開口). 장구(張口; 입을 벌림).

百雜碎; 그 물건을 잘게 부숨임.

 

上堂 汝等諸人 各自回心達本 莫逐其末 但得其本 其末自至 若欲識本 唯了自心 此心元是一切世間出世間法根本 故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心且不附一切善惡而生萬法 本自如如 問 如何是佛法大意 師曰 蒲花柳絮 竹針麻線 夾山與定山同行 言話次 定山曰 生死中無佛 卽無生死 夾山曰 生死中有佛 卽不迷生死 互相不肯 同上山見師 夾山便擧問 未審二人見處那箇較親 師曰 一親一疎 夾山復問 那箇親 師曰 且去 明日來 夾山明日再上問 師曰 親者不問 問者不親夾山住後自云 當時失一隻眼 新羅僧參 師問 發足甚處 曰 欲通來處 恐遭怪責 師曰 不可無來處也 曰 新羅 師曰 爭怪得汝 僧作禮 師曰 是與不是 知與不知 祇是新羅國裏人 忽一日謂其徒曰 來莫可抑 往莫可追 從容間聞鼯鼠聲 乃曰 卽此物非他物 汝等諸人 善自護持 吾今逝矣 言訖示滅 永明壽禪師讚曰 師初得道 卽心是佛 最後示徒 物非他物 窮萬法源 徹千聖骨 眞化不移 何妨出沒

鼯鼠聲; 祖庭事苑二 鼯鼠 音吾 鼠名 狀如小狐 以蝙蝠肉翅 亦謂之飛生 禪門拈頌集第二六九則 拈頌說話曰 鼯鼠者 古人云 鼯鼠鳴人必死

 

상당(上堂) 너희 등 제인(諸人)은 각자 회심(迴心)하여 달본(達本; 근본을 통달)하고 그 말()을 쫓지 말지니 단지 그 본()을 얻으면 그 말()이 스스로 이른다. 만약 근본을 알고자 한다면 오직 자심(自心)을 깨달아야() 하나니 이 마음은 원래 이 일체 세간과 출세간법(出世間法)의 근본인지라 고로 마음이 생하면 갖가지 법이 생하고 마음이 멸하면 갖가지 법이 멸한다. 마음은 또() 일체의 선악에 붙지() 않으면서 만법을 생기(生起)하되 본래 스스로 여여(如如)하다. 묻되 무엇이 이 불법의 대의(大意)입니까. 사왈 포화(蒲花; 부들꽃)ㆍ유서(柳絮; 버들개지)ㆍ죽침(竹針)ㆍ마선(麻線; 삼으로 꼰 실)이다. 협산(夾山; 善會)과 정산(定山)이 동행하며 언화(言話)하던 차에 정산이 가로되 생사(生死) 중에 부처가 없으면 곧 생사가 없다. 협산이 가로되 생사 중에 부처가 있으면 곧 생사에 미()하지 않는다. 호상(互相) 불긍(不肯)하면서 함께 산에 올라 스님을 뵈었다. 협산이 바로 들어 묻되 미심(未審)하오니 2인의 견처(見處)에 어느 것(那箇)이 조금() 친합니까. 사왈 하나는 친하고 하나는 소(; 疎遠)하다. 협산이 다시 묻되 어느 것(那箇)이 친합니까. 사왈 다만 가고 명일 오너라. 협산이 명일 다시 올라가 스님에게 묻자 사왈 친한 자는 묻지 않고 묻는 자는 친하지 않다夾山住後에 스스로 이르되 당시에 一隻眼을 잃었다. 신라승(新羅僧)이 참()했다. 스님이 묻되 어느 곳에서 발족(發足; 出發)했는가. 가로되 온 곳을 통지(通知; )하고 싶으나 괴책(怪責; 괴이히 여겨 責望)을 만날까 염려스럽습니다. 사왈 가히 온 곳이 없다고 하지 못하리라. 가로되 신라입니다. 사왈 어찌 너를 괴이히 여김을 얻겠는가. 중이 작례(作禮)했다. 사왈 시()와 불시(不是), ()와 부지(不知)는 다만 이 신라국 속의 사람이다. 홀연히 어느 날 그 도중(徒衆)에게 일러 가로되 오는 것을 가히 막지() 말고 가는 것을 가히 쫓지() 말아라. 종용간(從容間)에 오서성(鼯鼠聲)을 들었다. 이에 가로되 곧 이 물건이 다른 물건이 아니니(卽此物非他物) 너희 등 제인은 잘 스스로 호지(護持)하라. 나는 이제 떠난다. 말을 마치자 시멸(示滅)했다. 영명수(永明壽; 延壽) 선사가 찬왈(讚曰) 스님이 처음 득도(得道)함은/ 곧 마음이 이 부처더니/ 최후에 시도(示徒)함은/ 물건이 다른 물건이 아니다/ 만법의 근원을 궁진(窮盡)했고/ 천성(千聖)의 골()을 투철(透徹)했나니/ 진화(眞化; 진실한 교화)를 옮기지 않았거늘/ 어찌 출몰에 방애(妨礙)되겠는가.

鼯鼠聲; 조정사원2. 오서(鼯鼠) 음이 오니 쥐의 이름임. 형상(形狀)이 작은 여우와 같으며 박쥐의 육시(肉翅)를 씀. 또한 이를 일러 비생(飛生)이라 함. 선문염송집 제269. 염송설화에 가로되 오서(鼯鼠)란 것은 고인이 이르되 오서가 울면 사람이 반드시 죽는다.

 

洛京佛光如滿禪師曾住五臺山金閣寺

唐順宗問 佛從何方來 滅向何方去 旣言常住世 佛今在何處 師答曰 佛從無爲來 滅向無爲去 法身等虛空 常住無心處 有念歸無念 有住歸無住 來爲衆生來 去爲衆生去 淸淨眞如海 湛然體常住 智者善思惟 更勿生疑慮 帝又問 佛向王宮生 滅向雙林滅 住世四十九 又言無法說 山河與大海 天地及日月 時至皆歸盡 誰言不生滅 疑情猶若斯 智者善分別 師答曰 佛體本無 爲迷情妄分別 法身等虛空 未曾有生滅 有緣佛出世 無緣佛入滅 處處化衆生 猶如水中月 非常亦非斷 非生亦非滅 生亦未曾生 滅亦未曾滅 了見無心處 自然無法說 帝聞大悅 益重禪宗

雙林; 又云雙林樹 雙樹 祖庭事苑三 鶴樹 涅槃經 爾時世尊 娑羅林下 寢臥寶牀 於其中夜 入第四禪 寂然無聲 於是時頃 便般涅盤 入涅槃已 其娑羅林東西二雙 合爲一樹 南北二雙合爲一樹 垂覆寶牀 蓋覆如來 其樹卽時慘然變白 猶如白鶴 枝葉花果皮幹 悉皆爆烈墮落 漸漸枯悴摧朽無餘 遺敎經論住法記 娑羅此翻堅固 以冬夏不改故 上枝相接 下根相連 一榮二枯 故云雙樹

 

낙경(洛京; 洛陽) 불광여만(佛光如滿) 선사일찍이 五臺山 金閣寺했다.

당 순종(順宗)이 묻되 부처는 어느 방면으로 좇아왔으며/ ()하여 어느 방면을 향해 갔는가/ 이미 항상 주세(住世)한다고 말했으니/ 부처가 지금 어느 곳에 있습니까. 스님이 답왈(答曰) 부처는 무위(無爲)로 좇아왔으며/ 멸해 무위를 향해 갔나니/ 법신이 허공과 제등(齊等)하여/ 항상 무심(無心)한 곳에 거주합니다/ 유념(有念)은 무념(無念)으로 돌아가고/ 유주(有住)는 무주(無住)로 돌아가나니/ 옴은 중생을 위해 오고/ 감은 중생을 위해 갑니다/ 청정한 진여해(眞如海)/ 담연(湛然)한 체()가 상주(常住)하나니/ 지자(智者)는 잘 사유(思惟)하여/ 다시 의려(疑慮)를 내지 마십시오. 황제가 또 묻되 부처가 왕궁을 향해 탄생했다가/ 멸하여 쌍림(雙林)을 향해 멸했나니/ 주세(住世)한 지 사십구며/ 또 말하되 법을 설함이 없다 했습니다/ 산하 및 대해와/ 천지 및 일월도/ 때가 이르면 모두 없어짐으로 돌아가거늘/ 누가 생멸이 아니라고 말하는가/ 의정(疑情)이 오히려 이와 같으니/ 지자(智者)가 잘 분별하십시오. 스님이 답왈 불체(佛體)는 본래 무위(無爲)거늘/ 미정(迷情; 미혹한 마음)으로 허망하게 분별하나니/ 법신은 허공과 제등(齊等)하여/ 일찍이 생멸이 있지 않습니다/ 유연(有緣)이면 부처가 출세하고/ 무연(無緣)이면 부처가 입멸하나니/ 처처에서 중생을 교화함이/ 마치 수중(水中)의 달과 같습니다/ ()도 아니고 또한 단()도 아니며/ 생도 아니고 또한 멸도 아니니/ 생해도 또한 일찍이 생이 아니며/ 멸해도 또한 일찍이 멸이 아닙니다/ 무심한 곳을 또렷이 보면/ 자연히 법을 설함이 없습니다. 황제가 듣고 대열(大悅)했으며 더욱 선종을 중시했다.

雙林; 또 이르되 쌍림수(雙林樹), 쌍수(雙樹). 조정사원3. 학수(鶴樹) 열반경 이때 세존이 사라림(娑羅林; 堅固林으로 번역) 아래에서 보상(寶牀)에 잠들어 누우셨다. 그 중야(中夜)에 제4()에 들어 적연(寂然)해 소리가 없더니 이때 쯤에 곧 반열반(般涅盤)하셨다. 열반에 드신 다음 그 사라림의 동서 2쌍이 합쳐 한 나무가 되었고 남북 2쌍이 합쳐 한 나무가 되어 드리워져 보상을 덮더니 여래를 덮었다. 그 나무가 즉시 참연(慘然; 은 슬플 참. 참혹할 참)하더니 희게 변했는데 마치 백학 같았으며 지엽(枝葉)ㆍ화과(花果)ㆍ피간(皮幹; 껍질과 줄기)이 다 모두 폭렬(爆烈)해 타락하고 점점 고췌(枯悴; 는 파리할 췌)하더니 꺾이고 썩어 나머지가 없었다. 유교경론주법기. 사라(娑羅)는 여기에서 번역하면 견고니 겨울이나 여름에도 바뀌지 않는 연고다. 위의 가지가 서로 이어졌고 아래의 뿌리도 서로 연결되어 한 번 번영하고 두 번 마르므로 고로 이르되 쌍수(雙樹).

 

婺州五洩山靈默禪師

毗陵人也 姓宣氏 初謁馬祖 遂得披剃受具 後遠謁石頭 便問 一言相契卽住 不契卽去 石頭據坐 師便行 頭隨後召曰 闍黎 師回首 頭曰 從生至死 祇是這箇 回頭轉腦作麽 師言下大悟 乃拗折拄杖而棲止焉洞山云 當時若不是五洩先師 大難承當 然雖如此 猶涉在途 長慶云 險 玄覺云 那箇是涉在途處 有僧云 爲伊三寸途中薦得 所以在途 玄覺云 爲復薦得自己 爲復薦得三寸 若是自己 爲甚麽成三寸 若是三寸 爲甚麽悟去 且道洞山意作麽生 莫亂說 子細好 唐貞元初 住白沙道場 復居五洩 僧問 何物大於天地 師曰 無人識得伊 曰 還可雕琢也無 師曰 汝試下手看 問 此箇門中 始終事如何 師曰 汝道目前底成來得多少時也 曰 學人不會 師曰 我此間無汝問底 曰 和尙豈無接人處 師曰 待汝求接我卽接 曰 便請和尙接 師曰 汝少欠箇甚麽 問 如何得無心去 師曰 傾山覆海晏然靜 地動安眠豈釆伊 元和十三年三月二十三日 沐浴焚香端坐告衆曰 法身圓寂 示有去來 千聖同源 萬靈歸一 吾今漚散 胡假興哀 無自勞神 須存正念 若遵此命 眞報吾恩 儻固違言 非吾之子 時有僧問 和尙向甚麽處去 師曰 無處去 曰 某甲何不見 師曰 非眼所覩洞山云 作家 言畢 奄然順化

據坐; 一謂禪師坐于法座 坐 通座 二一種機鋒施設 禪師坐于法座 而對僧人提問不用言句作答 也無其他動作 此指二

三寸; 三寸之舌 史記七十六 以三寸之舌 彊(當也)於百萬之師

薦得; 又作薦取 薦 領會 領悟 又識 認識

萬靈; 衆神 衆生靈 人類

順化; 指僧之喪亡 又作順世 順寂

 

무주(婺州) 오설산(五洩山) 영묵선사(靈默禪師)

비릉(毗陵) 사람이며 성이 선씨(宣氏). 처음 마조를 예알(禮謁)하여 드디어 피체(披剃)하고 수구(受具)함을 얻었다. 후에 석두(石頭; 希遷)를 원알(遠謁; 멀리서 禮謁)하여 바로 묻되 일언(一言)에 상계(相契)하면 곧 머물고 계합하지 않으면 곧 가겠습니다. 석두가 거좌(據坐)했다. 스님이 바로 갔다. 석두가 뒤따라 불러 가로되 사리(闍黎; 闍梨와 같음). 스님이 머리를 돌리자 석두가 가로되 출생함으로 좇아 죽음에 이르기까지 다만 이는 이것(這箇)이거늘 회두전뇌(回頭轉腦; 頭腦回轉)하여 무엇하리오. 스님이 언하에 대오하고 이에 주장자를 꺾어 부러뜨리고 서지(棲止)했다洞山(良价)이 이르되 당시 만약 이 五洩先師가 아니었다면 승당(承當)하기 매우 어려웠으리라. 그러하여 비록 이와 같지만 아직 길에 건너 있다. 長慶(慧稜)이 이르되 위험하다. 玄覺(行言)이 이르되 어느 것(那箇)이 이 길에 건너 있는 곳인가. 어떤 중이 이르되 그가 三寸途中薦得했기 때문에 소이로 길에 있다. 玄覺이 이르되 다시 자기를 薦得함이 되는가, 다시 三寸을 천득함이 되는가. 만약 이 자기라면 무엇 때문에 三寸을 이루며 만약 이 三寸이라면 무엇 때문에 깨달았는가. 且道하라, 洞山意旨가 무엇인가. 亂說하지 말고 子細해야 좋다. 당 정원(貞元; 785-805) 초 백사도량(白沙道場)에 거주했다가 다시 오설(五洩)에 거주했다. 승문(僧問) 어떤 물건이 천지(天地) 보다 큽니까. 사왈 그()를 식득(識得)할 사람이 없다. 가로되 도리어 가히 조탁(雕琢)합니까 또는 아닙니까. 사왈 네가 시험 삼아 하수(下手; 손을 대다)해 보아라. 묻되 차개(此箇; 는 조사)의 문중(門中)에 시종(始終)의 일이 어떻습니까. 사왈 네가 말하라, 목전의 것()은 이루어 온 지 얼마의 시간을 지났느냐(). 가로되 학인이 알지 못하겠습니다. 사왈 나의 차간(此間)엔 너의 묻는 것(問底)이 없다. 가로되 화상이 어찌 접인처(接人處)가 없겠습니까. 사왈 너의 구접(求接; 接引을 구하다)을 기다렸다가 내가 곧 접인(接引)하겠다. 가로되 바로 화상의 접인을 청합니다. 사왈 네가 흠소(欠少)한 것()이 무엇이냐. 묻되 어찌해야 무심(無心)을 얻습니까. 사왈 경산복해(傾山覆海)해도 안연(晏然)히 고요하고 지동(地動)해도 안면(安眠)하거늘 어찌 그()를 변(; 분별)하겠는가. 원화(元和) 13(818) 323일 목욕하고 분향하고 단좌(端坐)하여 고중(告衆)해 가로되 법신은 원적(圓寂)하면서 거래(去來)가 있음을 보이나니 천성(千聖)이 동원(同源)이며 만령(萬靈)이 귀일(歸一)한다. 내가 이제 물거품이 흩어지거늘 어찌() 흥쇠(興哀)를 빌리겠는가. 스스로 정신을 노고롭게 하지 말고 꼭 정념(正念)을 두어라(). 만약 이 명()을 준수하면 참으로 나의 은혜에 보답하겠지만 만일() 확고히 위언(違言)하면 나의 제자가 아니다. 때에 어떤 중이 묻되 화상은 어느 곳을 향해 가십니까. 사왈 가는 곳이 없다(無處去). 가로되 모갑은 왜 보지 못합니까. 사왈 눈으로 볼() 바가 아니다洞山(良价)이 이르되 作家로다. 말을 마치자 엄연(奄然; 홀연)히 순화(順化)했다.

據坐; 1. 이르자면 선사가 법좌에 앉음. ()는 좌()와 통함. 2. 일종의 기봉의 시설이니 선사가 법좌에 앉아 승인의 제문(提問)에 대해 언구를 써서 답을 짓지 않으며 또한 기타의 동작이 없음. 여기에선 2를 가리킴.

三寸; 세 치의 혀. 사기76. 세 치의 혀로 백만의 군사(軍師)에 강(; )하다.

薦得; 또 천취(薦取)로 지음. ()은 영회(領會; 깨달아 이해함). 영오(領悟; 깨달아 앎). 또 식(), 인식.

萬靈; 중신(衆神). 중생령(衆生靈). 인류.

順化; 승인(僧人)의 상망(喪亡)을 가리킴. 또 순세(順世)ㆍ순적(順寂)으로 지음.

 

幽州盤山寶積禪師

因於市肆行 見一客人買猪肉 語屠家曰 精底割一斤來 屠家放下刀 叉手曰 長史 那箇不是精底 師於此有省 又一日出門 見人舁喪 謌郞振鈴云 紅輪決定沉西去 未委魂靈往那方 幕下孝子哭曰 哀哀 師忽身心踴躍 歸擧似馬祖 祖印可之 住後僧問 如何是道 師便咄 僧曰 學人未領旨 師曰 去 上堂 心若無事 萬法不生 意絕玄機 纖塵何立 道本無體 因體而立名 道本無名 因名而得號 若言卽心卽佛 今時未入玄微 若言非心非佛 猶是指蹤極則 向上一路 千聖不傳 學者勞形 如猿捉影 上堂 夫大道無中 復誰先後 長空絕際 何用稱量 空旣如斯 道復何說 上堂 夫心月孤圓 光呑萬象 光非照境 境亦非存 光境俱亡 復是何物 禪德譬如擲劒揮空 莫論及之不及 斯乃空輪無迹 劒刃無虧 若能如是 心心無知 全心卽佛 全佛卽人 人佛無異 始爲道矣 上堂 禪德 可中學道 似地擎山不知山之孤峻 如石含玉不知玉之無瑕 若如此者 是名出家 故導師云 法本不相礙 三際亦復然 無爲無事人 猶是金鎻難 所以靈源獨耀 道絕無生 大智非明 眞空無迹 眞如凡聖 皆是夢言 佛及涅槃 竝爲增語 禪德直須自看 無人替代 上堂 三界無法 何處求心 四大本空 佛依何住 璿璣不動 寂爾無言 覿面相呈 更無餘事 珍重 師將順世 告衆曰 有人邈得吾眞否 衆將所寫眞呈 皆不契師意 普化出曰 某甲邈得 師曰 何不呈似老僧 化乃打筋斗而出 師曰 這漢向後掣風狂去在 師乃奄化 諡凝寂大師

幽州; 今北京市 河北北部 遼寧南部 及朝鮮西北部

屠家; 從事屠宰牲畜賣肉的人或人家

長史; 官名 亦稱別駕 漢代相國或三公的佐吏 魏晉以後王公府的佐吏 後世州刺史的佐吏

謌郞; 歌郞 擧辦喪事時雇請的唱喪歌者

向上一路; 無上至眞之禪道 與向上一著 向上一竅同義 是千聖不傳之妙道

如猿捉影; 比喩以情識分別之妄心 所尋求到的只是虛幻假象 而非眞實道法 因此是徒勞無益的 摩訶僧祇律七 佛告諸比丘 過去世時 有城名波羅奈 國名伽尸 於空閑處有五百獼猴 遊行林中 到一尼俱律樹 樹下有井 井中有月影現 時獼猴主見是月影 語諸伴言 月今日死落在井中 當共出之 莫令世間長夜闇冥 共作議言 云何能出 時獼猴主言 我知出法 我捉樹枝 汝捉我尾 展轉相連 乃可出之 時諸獼猴卽如主語 展轉相捉 小未至水 連獼猴重 樹弱枝折 一切獼猴墮井水中

空輪; 四輪(地水風空)之一 位於風輪之下 包容器世間

可中; 一意指假若 恰好 或謂縱使 縱然等 二此中 可 當也 此指一

金鎻難; 智度論二十二云 知戒實相 亦不取是戒 若取是戒 譬如人在囹圄 桎梏所拘 雖得蒙赦 而復爲金鎖所繫 人爲恩愛煩惱所繫 如在牢獄 雖得出家 愛著禁戒 如著金鎖 行者若知戒是無漏因緣而不生著 是則解脫 無所繫縛 是名不著戒

璿璣; 又作琁璣 古代天文觀測儀器 以其隨星之運行而迴轉

覿面; 本義爲見面 當面 禪錄中謂面臨禪機 本分相見 卽超越一切言語知解 示機者直指禪法根本 應機者頓見本來面目

邈得; 描繪 邈 同描 貌

筋斗; 又作斤斗 巾斗 唐之俗語 爲倒翻身也 斤是其本字 餘皆爲假用 祖庭事苑七 斤斗 斤 斫木具也 頭重而柯輕 用之則斗轉 爲此技者似之

風狂; 瘋狂 發瘋 風 癲狂病 後作瘋

 

유주(幽州) 반산보적(盤山寶積) 선사

시사(市肆; 市中의 가게)에 다님으로 인해 한 객인(客人)이 저육(猪肉; 돼지고기)을 사는 것을 보았는데 도가(屠家)에게 말해 가로되 정지(精底; 精潔한 것)1() 베어 오시오. 도가(屠家)가 칼을 내려놓고(放下) 차수(叉手)하고 가로되 장사(長史), 어느 것(那箇)이 이 정지(精底)가 아닙니까. 스님이 이에서 성찰이 있었다. 어느 날 문을 나서매 상여(喪輿)를 마주든 사람들을 보았는데 가랑(謌郞)이 요령(搖鈴)을 떨치며 이르되 홍륜(紅輪; 태양)은 결정코 서쪽으로 잠겨 가거니와 혼령은 어느 방면으로 가는지 알지 못하겠네. 막하(幕下)의 효자가 곡하며 가로되 애애(哀哀). 스님이 홀연히 몸과 마음이 용약(踴躍)했다. 돌아와 마조에게 들어 보이자 마조가 그것을 인가(印可)했다. 주후(住後)에 승문(僧問) 무엇이 이 도입니까. 스님이 바로 돌()했다. 승왈(僧曰) 학인이 의지(意旨)를 영회(領會)하지 못했습니다. 사왈 갔다(). 상당(上堂) 마음에 만약 무사(無事)하면 만법이 생()하지 않나니 뜻()에 현기(玄機)가 끊기면 섬진(纖塵)이 어찌 서겠는가. 도는 본래 체()가 없지만 체로 인해 이름을 세우고 도는 본래 이름이 없지만 이름으로 인해 호()를 얻는다. 만약 곧 마음이 곧 부처(卽心卽佛)라고 말한다면 금시(今時)에 현미(玄微)에 들지 못하고 만약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라고(非心非佛) 말한다면 오히려 이는 자취()의 극칙(極則)을 가리킴이다. 향상의 일로(向上一路)는 천성(千聖)도 전하지 못하거늘 학자의 노고하는 형상이 원숭이가 그림자를 잡음과 같다(如猿捉影). 상당(上堂) 무릇 대도(大道)는 중()이 없거늘 다시 무엇이() 선후(先後)일 것이며 장공(長空)은 가()가 끊겼거늘 어찌 칭량(稱量; 양을 헤아림)을 쓰겠는가. 장공이 이미 이와 같거늘 도를 다시 어찌 설하리오. 상당(上堂) 무릇 심월(心月)이 고원(孤圓)하여 빛이 만상(萬象)을 삼켰나니 빛이 경계를 비추지 않으면 경계도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빛과 경계가 모두 망하면 다시 이 무슨 물건인가. 선덕(禪德)이여 비유컨대 검을 던져 허공에 휘두를 것 같으면 미치거나 미치지 않음을 논하지 않고 이는 곧 공륜(空輪)에 흔적이 없고 검인(劒刃)도 이지러짐()이 없다. 만약 능히 이와 같다면 심심(心心)이 지()가 없고 전심(全心)이 곧 부처며 전불(全佛)이 곧 사람이니 사람과 부처가 다름이 없어 비로소 도가 된다. 상당(上堂) 선덕이여 가중(可中) 도를 배움은 땅이 산을 받들되(擎山) 산의 고준(孤峻)을 알지 못함과 같고 돌이 옥을 머금었으되 옥의 티 없음을 알지 못함과 같나니 만약 이와 같은 자라면 이 이름이 출가다. 고로 도사(導師)가 이르되 법이 본래 상애(相礙)하지 않고 3()도 또한 다시 그러하나니 무위무사(無爲無事)한 사람이 오히려 이 금쇄난(金鎻難)이다. 소이로 영원(靈源)이 홀로 빛나고(獨耀) ()엔 무생(無生)이 끊겼고 대지(大智)는 밝지 않고 진공(眞空)엔 자취가 없다. 진여와 범성(凡聖)이 모두 이 몽언(夢言)이며 부처 및 열반이 모두() 증어(增語)가 된다. 선덕이여 바로() 스스로 봄을 쓸지니() 체대(替代)할 사람이 없다. 상당(上堂) 3()에 법이 없거늘 어느 곳에서 마음을 구하며 4()가 본공(本空)이거늘 부처가 어디에 의해 머물리오. 선기(璿璣)가 부동(不動)이라 적이(寂爾; 寂然)해 말이 없으니 적면(覿面; 當面)해 상정(相呈)함이요 다시 여사(餘事)가 없다. 진중(珍重). 스님이 장차 순세(順世)하려 하면서 고중(告衆)하여 가로되 어떤 사람(有人)이 나의 진(; 肖像)을 막득(邈得; 본뜸)하겠는가. 대중이 이에() 소사(所寫; 베낀 것)한 진()을 드렸으나() 모두 스님의 뜻에 맞지() 않았다. 보화(普化)가 나와 가로되 모갑이 막득(邈得)하겠습니다. 사왈 왜 노승에게 보여주지(呈似) 않느냐. 보화가 이에 근두(筋斗)를 짓고 나갔다. 사왈 저한(這漢)이 향후에 풍광(風狂)을 끌어() 갈 것이다. 스님이 이에 엄화(奄化; 逝世)했고 시()가 응적대사(凝寂大師).

幽州; 지금의 북경시ㆍ하북 북부ㆍ요녕 남부 및 조선 서북부임.

屠家; 생축(牲畜; 家畜)을 도재(屠宰; 잡다)하여 매육(賣肉)에 종사하는 사람 혹 인가(人家).

長史; 벼슬 이름. 또한 명칭이 별가(別駕)니 한대(漢代) 상국 혹 삼공의 좌리(佐吏)였고 위진(魏晉) 이후엔 왕공부(王公府)의 좌리였고 후세엔 주자사(州刺史)의 좌리였음.

謌郞; 가랑(歌郞)과 같음. 상사(喪事)를 거판(擧辦; 거행)할 때 고청(雇請)하여 상가(喪歌)를 부르는 자.

向上一路; 위없는 지진(至眞)의 선도(禪道)니 향상일착(向上一著)ㆍ향상일규(向上一竅)와 같은 뜻. 이는 천성(千聖)이라도 전하지 못하는 묘도(妙道).

如猿捉影; 정식(情識)과 분별의 망심(妄心)으로 심구(尋求)하여 이르는 바의 것은 단지 이 허환(虛幻)의 가상(假象)이며 진실한 도법이 아니니 이로 인해 이는 도로무익(徒勞無益)한 것에 비유함. 마하승기율7. 불타가 여러 비구에게 고하시되 과거 세상 때 성()이 있었으니 이름이 바라나(波羅奈)며 나라 이름은 가시(伽尸)였다. 공한처(空閑處)5백 마리의 원숭이(獼猴)가 있어 숲 속에 유행(遊行)했다. 한 니구률수(尼俱律樹)에 이르렀는데 나무 아래 우물이 있었고 우물 중에 달 그림자가 나타남이 있었다. 때에 미후주(獼猴主; 원숭이의 주군)가 이 달 그림자를 보고 모든 벗에게 말해 이르되 달이 금일 죽어서 우물 중에 떨어져 있다. 마땅히 함께 그것을 구출해 세간으로 하여금 장야에 암명(闇冥)케 해선 안된다. 함께 의논을 짓고 말하되 어떻게 능히 구출하겠는가. 때에 미후주(獼猴主)가 말하되 내가 구출하는 법을 안다. 내가 나뭇가지를 잡을 테니 너희가 나의 꼬리를 잡아라. 전전(展轉)히 서로 연결한다면 곧 가히 그것을 구출하리라. 때에 모든 원숭이가 곧 주군(主君)의 말과 같이 했다. 전전히 서로 잡았는데 조금 물에 이르지 못했다. 연결한 원숭이는 무겁고 나무는 약해 가지가 부러졌으며 일체의 원숭이가 우물의 수중에 떨어졌다.

空輪; 4(四輪; 지ㆍ수ㆍ풍ㆍ공)의 하나. 풍륜의 아래에 위치하며 기세간(器世間)을 포용함.

可中; 1. 뜻이 가약(假若)ㆍ흡호(恰好)를 가리킴. 혹 이르자면 종사(縱使; 가령. 설사)ㆍ종연(縱然; 비록 그렇게) 등임. 2. 이 가운데(此中)니 가()는 당(). 여기에선 1을 가리킴.

金鎻難; 지도론22에 이르되 계()의 실상을 안다면 또한 이 계를 취하지 않으리라. 만약 이 계를 취한다면 비유컨대 사람이 영어(囹圄; 감옥)에 있으면서 질곡(桎梏; 은 차꼬. 은 수갑)에 구속되는 바였으나 비록 사면됨을 입더라도 다시 금사슬(金鎖)에 묶이는 바가 됨과 같다. 사람이 은애와 번뇌에 묶이는 바가 됨은 뇌옥(牢獄; 견고한 감옥)에 있음과 같다. 비록 출가하여 금계(禁戒)에 애착할 것 같으면 금사슬을 만남과 같다. 수행자가 만약 계는 이 무루(無漏)의 인연임을 알아서 집착을 내지 않으면 이는 곧 해탈이며 묶이는 바가 없음이다. 이 이름이 계에 집착함이 없음이다.

璿璣; 또 선기(琁璣)로 지음. 고대의 천문관측의 의기(儀器)니 그것이 별의 운행을 따라 회전함.

覿面; 본래의 뜻은 견면(見面)ㆍ당면이 됨. 선록 중에선 선기(禪機)에 면림(面臨)하고 본분으로 상견함을 말함이니 곧 일체의 언어와 지해를 초월함임. 시기자(示機者)는 선법의 근본을 직지하고 응기자(應機者)는 본래면목을 돈견(頓見).

邈得; 묘회(描繪; 묘사하여 그림). ()은 묘()ㆍ막(; 묘사하다)과 같음.

筋斗; 또 근두(斤斗), 건두(巾斗)로 지음. 당의 속어니 몸을 거꾸로 뒤집음이 됨. ()이 이 그의 본래 글자며 나머지는 가차(假借)하여 씀이 됨. 조정사원7. 근두(斤斗) 도끼는 나무를 쪼개는 도구임. 머리가 무겁고 자루가 가벼워 이를 쓰면 곧 두(; . 자루가 있음)가 회전하므로 이 기예를 하는 자가 이와 흡사함.

風狂; 풍광(瘋狂; 미치광이). 발풍(發瘋; 狂症이 발작). ()은 전광병(癲狂病; 狂症. 지랄병)이니 후에 풍()으로 지었음.

 

蒲州麻谷山寶徹禪師

侍馬祖行次 問 如何是大涅槃 祖曰 急 師曰 急箇甚麽 祖曰 看水 師使扇次 僧問 風性常住 無處不周 和尙爲甚麽却搖扇 師曰 你祇知風性常住 且不知無處不周 曰 作麽生是無處不周底道理 師却搖扇 僧作禮 師曰 無用處師僧 著得一千箇 有甚麽益 問僧 甚處來 僧不審 師又問 甚處來 僧珍重 師下牀擒住曰 這箇師僧 問著便作佛法祇對 曰 大似無眼 師放手曰 放汝命 通汝氣 僧作禮 師欲扭住 僧拂袖便行 師曰 休將三歲竹 擬比萬年松 師同南泉二三人去謁徑山 路逢一婆 乃問 徑山路向甚處去 婆曰 驀直去 師曰 前頭水深過得否 婆曰 不濕脚 師又問 上岸稻得與麽好 下岸稻得與麽怯 婆曰 總被螃蠏喫却也 師曰 禾好香 婆曰 沒氣息 師又問 婆住在甚處 婆曰 祇在這裏 三人至店 婆煎茶一甁 携盞三隻至謂曰 和尙有神通者卽喫茶 三人相顧間 婆曰 看老朽自逞神通去也 於是拈盞傾茶便行 僧問 如何是佛法大意 師默然 僧又問石霜 此意如何 霜曰 主人擎拳帶累闍黎拖泥涉水

蒲州; 位於山西永濟西南

驀直; 一直 直捷 多隱含直截領悟 當下契入之義

氣息; 原意爲出息入息之氣 卽呼吸之氣 轉義爲某種氣質給人的感覺

逞神通; 逞 丑郢切 自負 增韻 逞 矜而自呈也

拖泥涉水; 拖泥帶水 亦作帶水拖泥 喩指陷入言辭義理的糾纏 又指修行悟道之後 爲濟度衆生 能投塵中 不顧自己之汚穢也

 

포주(蒲州) 마곡산(麻谷山) 보철선사(寶徹禪師)

마조(馬祖)를 모시고 가던 차에 묻되 무엇이 이 대열반입니까. 조왈(祖曰) ()하다. 사왈 급이란 것(急箇)이 무엇입니까(甚麽). 조왈(祖曰) 물을 보라(看水). 스님이 부채를 부리던(使) 차에 중이 묻되 풍성(風性)은 상주(常住)하여 두루하지 않는 곳이 없거늘 화상은 무엇 때문에 부채를 흔듭니까. 사왈 너는 다만 풍성이 상주하는 줄만 알았지 또 두루하지 않는 곳이 없는 줄 알지 못하는구나. 가로되 무엇이 이 두루하지 않는 곳이 없는 도리입니까. 스님이 도리어 부채를 흔들었다. 중이 작례(作禮)했다. 사왈 쓸 곳이 없는 사승(師僧; 스님)이라면 1천 개를 붙인들 무슨 이익이 있으리오. 중에게 묻되 어느 곳에서 오느냐. 중이 불심(不審)이라 했다. 스님이 또 묻되 어느 곳에서 오느냐. 중이 진중(珍重)이라 했다. 스님이 하상(下牀)하여 금주(擒住; 꼼짝 못하게 잡아 머물게 함)하고 가로되 저개(這箇) 사승(師僧)이 문착(問著)하면 바로 불법(佛法)을 지어 지대(祇對; 응대)하는구나. 가로되 무안(無眼)과 대사(大似; 매우 흡사)합니다. 스님이 손을 놓고 가로되 너의 명()을 놓아주고() 너의 기()를 통하게 한다. 중이 작례(作禮)했다. 스님이 뉴주(扭住; 붙잡아 머물게 하다)하려고 하자 중이 소매를 떨치고 갔다. 사왈 삼세죽(三歲竹)을 가지고 만년송(萬年松)에 비교하려고 하지 말아라(). 스님이 남천(南泉)과 함께 두세 사람이 가서 경산(徑山)을 참알하는데 길에서 한 노파를 만났다. 이에 묻되 경산로(徑山路)는 어느 곳을 향해 가야 합니까. 파왈(婆曰) 곧장 가십시오(驀直). 사왈 전두(前頭; 全面)의 물이 깊은데 지나감을 얻습니까. 파왈(婆曰) 다리를 젖지 않습니다. 스님이 또 묻되 위 언덕의 벼는 저렇게 좋음을 얻거늘 아래 언덕의 벼는 저렇게 겁(; 허약)함을 얻습니까. 파왈 모두 방해(螃蠏; . 방게)가 먹어버림을 입었습니다. 사왈 벼가 좋은 향기입니다. 파왈 기식(氣息)이 없습니다. 스님이 또 묻되 노파는 어느 곳(甚處)에 주재(住在)합니까. 파왈 다만 이 속(這裏)에 있습니다. 세 사람이 점포(店鋪)에 이르렀다. 노파가 차 한 병()을 끓였다. 3()을 가지고 이르러 일러 가로되 화상이 신통이 있는 자는 곧 끽다(喫茶)하시오. 세 사람이 서로 돌아보는 사이, 파왈 노후(老朽)가 스스로 신통을 자랑함(逞神通)을 보시오. 이에 잔()을 집어 차를 기울이고 바로 갔다. 승문(僧問) 무엇이 이 불법의 대의(大意)입니까. 스님이 묵연(默然)했다. 중이 또 석상(石霜; 慶諸)에게 묻되 이 뜻이 무엇입니까. 상왈(霜曰) 주인(主人)이 경권(擎拳; 주먹을 받들다)하매 사리(闍梨)에게 누()를 끼쳐 타니섭수(拖泥涉水)했다.

蒲州; 산서(山西) 영제(永濟) 서남에 위치함.

驀直; 일직(一直; 곧장. 곧바로). 직첩(直捷; 곧바로). 직절(直截)하여 영오하고 당하(當下)에 계입(契入)함의 뜻을 다분히 은함(隱含)했음.

氣息; 원래의 뜻은 날숨과 들숨의 기()가 됨. 곧 호흡의 기. 전의(轉義)하여 모종의 기질을 사람에게 준 감각이 됨.

逞神通; (; chěng)은 축영절(丑郢切)이니 자부(自負). 증운 정() 자랑하며 스스로 보임이다.

拖泥涉水; 타니대수(拖泥帶水)와 같음. 또 대수타니(帶水拖泥)로 지음. 언사의리(言辭義理)의 규전(糾纏. 꼬이고 얽힘)에 함입(陷入)함을 비유로 가리킴. 또 수행하여 오도(悟道)한 후에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능히 티끌 중에 들어가 자기의 오예(汚穢)를 돌아보지 않음을 가리킴.

 

湖南東寺如會禪師

始興曲江人也 初謁徑山 後參大寂 學徒旣衆 僧堂牀榻 爲之陷折 時稱折牀會也 自大寂去世 師常患門徒以卽心卽佛之譚誦憶不已 且謂 佛於何住 而曰卽心 心如畫師 而云卽佛 遂示衆曰 心不是佛 智不是道 劒去遠矣爾方刻舟 時號東寺爲禪窟焉 相國崔公羣出 爲湖南觀察使 見師問曰 師以何得 師曰 見性得 師方病眼 公譏曰 旣云見性 其柰眼何 師曰 見性非眼 眼病何害 公稽首謝之法眼別云 是相公眼 公見鳥雀於佛頭上放糞 乃問 鳥雀還有佛性也無 師曰 有 公曰 爲甚麽向佛頭上放糞 師曰 是伊 爲甚麽不向鷂子頭上放 仰山參 師問 汝是甚處人 仰曰 廣南人 師曰 我聞廣南有鎭海明珠 是否 仰曰 是 師曰 此珠如何 仰曰 黑月卽隱 白月卽現 師曰 還將得來也無 仰曰 將得來 師曰 何不呈似老僧 仰叉手近前曰 昨到潙山 亦被索此珠 直得無言可對 無理可伸 師曰 眞師子兒 善能哮吼 仰禮拜了 却入客位具威儀 再上人事 師纔見 乃曰 已相見了也 仰曰 恁麽相見 莫不當否 師歸方丈 閉却門 仰歸 擧似潙山 潙曰 寂子是甚麽心行 仰曰 若不恁麽 爭識得他 後復有人問師曰 某甲擬請和尙開堂得否 師曰 待將物裹石頭煖卽得 彼無語藥山代云 石頭煖也唐長慶癸卯歲歸寂 諡傳明大師

示衆; 於禪林中 禪師爲門弟大衆等開示宗要 稱爲示衆 又作垂語 垂示 六祖壇經定慧品 師示衆云 善知識 我此法門以定慧爲本 諸經錄中有關示衆一詞 以本經所載爲最早

劍去遠矣爾方刻舟; 呂氏春秋十五曰 楚人有涉江者 其劍自舟中墜於水 遽契(刻也)其舟曰 是吾劍之所從墜 舟止 從其所契者入水求之 舟已行矣 而劍不行 求劍若此 不亦惑乎

觀察使; 官職名 唐代按察諸州政事 補佐節度使而監督刺史 按新唐書 上元元年(874)置觀察使

鳥雀; 泛指小鳥

黑月; 又曰黑分 太陰曆之下半月也 西域記二曰 月虧至晦謂之黑分 黑分或十四日十五日 月有大小故也

白月; 又曰白分 印度之曆法 以月之盈缺 立白黑之名 自月盈至於滿之間爲白分 稱爲白月 一日乃至白月十五日 自十六日以下 爲黑分 又爲黑月 合前之黑月與後之白月而爲一月 [西域記二]

人事; 一人間事務 人間交往 二禮拜 參拜 三奉送 饋贈 四表籍貫 同人氏 此指二

開堂; 禪院新任住持 始初上堂說法稱作開堂 祖庭事苑八 開堂 開堂迺譯經院之儀式 每歲誕節 必譯新經上進 祝一人之壽 前兩月 二府皆集 以觀飜譯 謂之開堂 前一月 譯經使潤文官又集 以進新經 謂之開堂 今宗門命長老住持演法之初 亦以謂之開堂者 謂演佛祖正法眼藏 上祝天筭 又以爲四海生靈之福 是亦謂之開堂也

 

호남(湖南) 동사여회(東寺如會) 선사

시흥(始興) 곡강(曲江) 사람이다. 처음엔 경산(徑山)을 참알(參謁)했고 후에 대적(大寂)을 참()했다. 학도(學徒)가 이미 많아() 승당(僧堂)의 상탑(牀榻)이 함절(陷折)된지라 당시에 호칭이 절상회(折床會)였다. 대적(大寂)이 세상을 떠남으로부터 스님이, 문도(門徒)가 즉심즉불(卽心卽佛)의 말씀()을 송억(誦憶)하며 말지 않음을 늘 우환(憂患)으로 여겼다. 다만() 이르되 부처가 어디에 머무는가, 가로되 즉심(卽心)이며 마음이 화사(畫師)와 같은지라 이르되 즉불(卽佛)이다 하였다. 드디어 시중(示衆)하여 가로되 마음은 이 부처가 아니며 지혜는 이 도가 아니다. 검이 떠난 지 멀거늘 너희가 바야흐로 배야 새기는가(劍去遠矣爾方刻舟). 당시에 동사(東寺)를 호()해 선굴(禪窟)이라 했다. 상국(相國) 최공군(崔公羣)이 나가서(지방으로 나가서) 호남관찰사(湖南觀察使)가 되었다. 스님을 보고 물어 가로되 스님은 무엇을 얻었습니까. 사왈(師曰) 견성(見性)을 얻었습니다. 스님이 바야흐로 눈이 병났다(病眼). ()이 비웃으며() 가로되 이미 이르기를 견성이라 했지만 눈을 그 어찌하겠습니까(其奈眼何). 사왈 견성은 눈이 아니거늘 안병(眼病)이 어찌 방해하겠습니까. ()이 계수(稽首)하며 사과(謝過)했다法眼別云 이는 相公의 눈입니다. (), 조작(鳥雀)이 불두(佛頭) 위에 방분(放糞)함을 보고 이에 문되 조작(鳥雀)은 도리어 불성이 있습니까 또는 없습니까. 사왈 있습니다. 공왈(公曰) 무엇 때문에(爲甚麽) 불두 위를 향해 방분합니까. 사왈 이 그가() 무엇 때문에 요자(鷂子; 새매. 는 조사) 두상을 향해 방분하지 않습니까. 앙산(仰山)이 참()했다. 스님이 묻되 너는 이 어느 곳의 사람인가. 앙왈(仰曰) 광남(廣南) 사람입니다. 사왈 내가 듣기로 광남에 진해명주(鎭海明珠)가 있다던데 그런가, 앙왈(仰曰) 그렇습니다. 사왈 이 구슬은 어떠한가. 앙왈(仰曰) 흑월(黑月)엔 곧 숨고 백월(白月)엔 곧 나타납니다. 사왈 도리어 가지고 왔느냐(將得來) 또는 아니냐. 앙왈(仰曰) 가지고 왔습니다. 사왈 왜 노승에게 보여 주지 않는가. 앙산이 차수(叉手)하고 앞으로 접근해 가로되 어제 위산(潙山)에 이르렀다가 또한 이 구슬을 찾음을 입고는 바로 가히 대답할 말이 없고 가히 펼 이치가 없음을 얻었습니다. 사왈 참 사자아가 잘 능히 효후(哮吼)하는구나. 앙산이 예배하여 마치고 도리어 객위(客位)에 들어가 위의(威儀)를 갖추고 다시 올라가 인사(人事)했다. 스님이 겨우 보자 이에 가로되 이미 상견해 마쳤다. 앙왈(仰曰) 이렇게(恁麽) 상견함은 부당(不當)하지 않습니까. 스님이 방장으로 돌아가 문을 닫아버렸다. 앙산이 돌아가 위산(潙山)에게 들어 보이자 위산이 가로되 적자(寂子; 慧寂. 자는 남자의 통칭)가 이 무슨(是甚麽) 심행(心行)이냐. 앙왈(仰曰) 만약 이러하지 않으면(不恁麽) 어찌 그를 식득(識得)하겠습니까. 후에 다시 어떤 사람이 스님에게 물어 가로되 모갑이 화상의 개당(開堂)을 청하려는데(擬請) 얻겠습니까. 사왈 물건을 가져다 석두(石頭; 는 조사)를 싸서() 따뜻해짐()을 기다린다면 곧 얻는다. 그가 말이 없었다藥山代云 石頭가 따뜻해졌습니다. 당 장경(長慶) 계묘세(癸卯歲; 823) 귀적(歸寂)했다. ()가 전명대사(傳明大師).

示衆; 선림 중에서 선사가 문제(門弟)나 대중 등을 위해 종요를 개시함을 일컬어 시중이라 함. 또 수어(垂語)ㆍ수시(垂示)로 지음. 육조단경 정혜품. 스님이 시중(示衆)해 이르되 선지식이여 나의 이 법문은 정혜를 근본으로 삼는다. 모든 경록(經錄) 중 시중 1()에 유관한 것은 본경에 실린 것으로써 최조(最早)로 삼음.

劍去遠矣爾方刻舟; 여씨춘추15에 가로되 초인(楚人)에 강을 건너는 자가 있었다. 그의 검이 배 가운데로부터 물에 떨어지자 급히 그 배에 새기고(; 刻也) 가로되 이는 나의 검이 좇아 떨어진 곳이다. 배가 멎자 그 새긴 곳으로부터 물에 들어가 그것을 구하려 했다. 배는 이미 떠났지만 검은 가지 않았건만 검을 구함이 이와 같으니 또한 미혹함이 아니겠는가.

觀察使; 관직의 이름. 당대(唐代)에 여러 주의 정사를 안찰(按察)하면서 절도사를 보좌하고 자사를 감독했음. 신당서를 안험컨대 상원 원년(874) 관찰사를 설치했음.

鳥雀; 널리 작은 새를 가리킴.

黑月; 또 가로되 흑분(黑分)이니 태음력(太陰曆)의 아래 반 달임. 서역기2에 가로되 달이 이지러져 그믐에 이르기까지를 흑분이라 이르는데 흑분은 혹은 1415일이니 달이 대소가 있는 연고이다.

白月; 또 가로되 백분(白分). 인도의 역법은 달의 차고 이지러짐으로써 백흑의 이름을 세웠음. 달이 참으로부터 가득함에 이르기까지의 사이를 백분으로 삼으니 일컬어 백월이라 함. 1일에서 이에 백월의 15일에 이르기까지임. 16일 이하로부터 흑분이 되며 또 흑월이라 함. 앞의 흑월과 뒤의 백월을 합쳐서 한 달로 삼음 [서역기2].

人事; 1. 인간의 사무. 인간의 교왕(交往). 2. 예배. 참배. 3. 봉송(奉送). 궤증(饋贈; 예물을 贈送). 4. 적관(籍貫)을 표함. 인씨(人氏)와 같음. 여기에선 2를 가리킴.

開堂; 선원의 신임 주지가 처음으로 상당하여 설법함을 일컬어 개당이라 함. 조정사원8. 개당(開堂). 개당은 곧 역경원의 의식이다. 매세(每年) 탄절(誕節; 임금이나 . 또는 聖人의 생일을 높여 부르는 말. 탄생절)에 반드시 번역한 신경(新經)을 상진(上進; 진상)하여 1(천자)의 장수를 축원하였다. 2달 전에 2()가 다 모여 번역을 보는 것을 이를 일러 개당이며 1달 전에 역경사와 윤문관이 또 모여 신경(新經)을 진상하는 것을 이를 일러 개당이라 한다. 여금에 종문에서 장로나 주지를 임명하여 법을 연설하는 처음을 또한 따라서 이를 일러 개당이라 하는 것은 이르자면 불조의 정법안장을 연설하고 위로 천산(天筭; 은 나이 산. 곧 천자의 나이)을 축원하고 또 사해 생령(생명. 생민)의 복을 삼나니 이 또한 이를 일러 개당이다.

 

䖍州西堂智藏禪師

䖍化廖氏子 八歲從師 二十五具戒 有相者覩其殊表 謂之曰 骨氣非凡 當爲法王之輔佐也 師遂參禮大寂 與百丈海禪師同爲入室 皆承印記 一日大寂遣師詣長安 奉書于忠國師 國師問曰 汝師說甚麽法 師從東過西而立 國師曰 祇這箇更別有 師却從西過東邊立 國師曰 這箇是馬師底 仁者作麽生 師曰 早箇呈似和尙了也 尋又送書上徑山語在國一章 屬連帥路嗣恭延請大寂居府 應期盛化 師回郡得大寂付授衲袈裟令學者親近 僧問馬祖 離四句絕百非 請師直指西來意 祖曰 我今日勞倦 不能爲汝說得 問取智藏 其僧乃來問師 師曰 汝何不問和尙 僧曰 和尙令某甲來問上座 師曰 我今日頭痛 不能爲汝說得 問取海兄去 僧又去問海百丈和尙 海曰 我到這裏却不會 僧乃擧似馬祖 祖曰 藏頭白海頭黑

虔州; 今江西省贛縣

相者; 舊指以相術供職或爲業的人

呈似; 示與 呈 示也 見也 似 相當于與

離四句絕百非; 禪門拈頌集第一六四則 拈頌說話云 四句百非者 海照頌云 强計眞常起有無 飜成十六性情麁 已起未起幷三世 根本四句百不孤 筆削(起信論疏筆削記四)云 百非者 一異有無等四句明之 則一 非一 亦一 亦非一 異 非異 亦異 亦非異 有 非有 亦有 亦非有 無 非無 亦無 亦非無等 共成十六 過現未三世 各有十六 則共成四十八 已起未起亦各有四十八 則共成九十六 幷根本四句 則却成百非也

 

건주(虔州) 서당지장(西堂智藏) 선사

건화(虔化) 류씨(廖氏)의 아들이다. 8세에 스승을 좇았고 25에 구계(具戒)했다. 상자(相者)가 있어 그의 수승한 표정(表情)을 보더니 일러 가로되 골기(骨氣)가 비범(非凡)하니 마땅히 법왕(法王)의 보좌(輔佐)가 될 것입니다. 스님이 드디어 대적(大寂; 마조의 시호)을 참례(參禮)했다. 백장회해(百丈懷海) 선사와 더불어 한가지로 입실(入室; 입실하여 嗣法한 자)이 되며 모두 인기(印記; 印可하고 授記)를 받았다(). 어느 날 대적(大寂)이 스님을 보내어 장안으로 나아가 충국사(忠國師)에게 봉서(奉書)하게 했다. 국사가 문왈(問曰) 너의 스승은 무슨(什麽) 법을 설하느냐. 스님이 동쪽으로 좇아 서쪽에 이르러() 섰다. 국사가 가로되 다만 이것(這箇)이냐, 다시 다른 게 있는가. 스님이 도리어 서쪽으로 좇아 동변(東邊)에 이르러 섰다. 국사가 가로되 이것(這箇)은 이 마사의 것이다(馬師底). 인자(仁者)는 어떠한가(作麽生). 사왈 벌써(早箇) 화상에게 보여 드렸습니다(呈似). 이윽고 또 송서(送書)하여 경산(徑山; 道欽)에 올랐다國一章에 있다. 연수(連帥) 노사공(路嗣恭)이 대적(大寂)을 연청(延請)해 관부(官府)에 거주하며 응기(應期)하여 성화(盛化)함을 당해() 스님이 회군(回郡)하여 대적이 납가사(納袈裟)를 부수(付授)하고 학자들로 하여금 친근하게 함을 얻었다. 중이 마조에게 묻되 이사구절백비(離四句絕百非)하고 스님에게 청하오니 서래의(西來意)를 직지(直指)하십시오. 마조가 가로되 내가 금일 노권(勞倦)하여 능히 너를 위해 설함을 얻지 못하니 지장(智藏)에게 문취(問取)하라. 그 중이 이에 와서 스님에게 물었다. 사왈 네가 왜 화상에게 묻지 않느냐. 승왈(僧曰) 화상이 모갑으로 하여금 상좌에게 내문(來問)하게 하셨습니다. 사왈 내가 금일 머리가 아파 능히 너를 위해 설함을 얻지 못하니 해형(海兄; 懷海)에게 문취(問取)하러 가거라. 중이 또 가서 해백장(海百丈) 화상에게 물었다. 해왈(海曰) 내가 이 속(這裏)에 이르러 도리어 알지 못한다. 중이 이에 마조에게 들어 보이자 마조가 가로되 장두백해두흑(藏頭白海頭黑)이다.

虔州; 지금의 강서성 공현(贛縣).

相者; 옛적에 상술(相術)로써 공직(供職; 직무를 擔任)하거나 혹 업으로 삼는 사람을 가리켰음.

呈似; 보여줌. ()은 시(). (). ()는 여()에 상당함.

離四句絕百非; 선문염송집 제164칙 염송설화에 이르되 사구백비(四句百非)란 것은 해조(海照; 未詳)의 송()에 이르되 진상(眞常)을 억지로 계산해 유무(有無)를 일으켜/ 도리어 16을 이루니 성정(性情)이 거칠다/ 이기(已起)ㆍ미기(未起)와 아울러 3()/ 근본사구(根本四句)니 백()이라 외롭지 않다. 필삭(筆削; 기신론소필삭기4)에 이르되 백비(百非)란 것은 일()ㆍ이()ㆍ유()ㆍ무() 4구로 이를 밝히자면 곧 일()ㆍ비일(非一)ㆍ역일(亦一)ㆍ역비일(亦非一)과 이()ㆍ비이(非異)ㆍ역이(亦異)ㆍ역비이(亦非異)와 유()ㆍ비유(非有)ㆍ역유(亦有)ㆍ역비유(亦非有)와 무()ㆍ비무(非無)ㆍ역무(亦無)ㆍ역비무(亦非無) 등 모두 16을 이루고 과거ㆍ현재ㆍ미래의 3세에 각기 16이 있으니 곧 모두 48을 이루고 이기(已起)와 미기(未起)에 또한 각기 48이 있으니 곧 모두 96을 이루고 근본사구(根本四句; 一異有無)를 아우르니 곧 도리어 백비(百非)를 이룬다.

 

馬祖一日問師曰 子何不看經 師曰 經豈異邪 祖曰 然雖如此 汝向後爲人也須得 曰 智藏病 思自養 敢言爲人 祖曰 子末年必興於世 師便禮拜 馬祖滅後 師唐貞元七年 衆請開堂 李尙書嘗問僧 馬大師有甚麽言敎 僧曰 大師或說卽心卽佛 或說非心非佛 李曰 總過這邊 李却問師 馬大師有甚麽言敎 師呼李翱 李應諾 師曰 鼓角動也 師普請次曰 因果歷然 爭柰何 爭柰何 時有僧出 以手托地 師曰 作甚麽 曰 相救相救 師曰 大衆這箇師僧猶較些子 僧拂袖便走 師曰 師子身中蟲 自食師子肉 僧問 有問有答 賓主歷然 無問無答時如何 師曰 怕爛却那後有僧擧問長慶 慶云 相逢盡道休官去 林下何曾見一人 制空禪師謂師曰 日出太早生 師曰 正是時 師住西堂 後有一俗士問 有天堂地獄否 師曰 有 曰 有佛法僧寶否 師曰 有 更有多問 盡答言有 曰 和尙恁麽道莫錯否 師曰 汝曾見尊宿來邪 曰 某甲曾參徑山和尙來 師曰 徑山向汝作麽生道 曰 他道一切總無 師曰 汝有妻否 曰 有 師曰 徑山和尙有妻否 曰 無 師曰 徑山和尙道無卽得 俗士禮謝而去 師元和九年四月八日歸寂 憲宗諡大宣敎禪師 穆宗重諡大覺禪師

李翱; (772-841) 唐代居士 字習之 隴西成紀(今甘肅秦安西北)人 一說趙郡(今河北趙縣)人 自幼學儒 博雅好古 貞元十四年(798)進士 歷任校書郞 國子博士 史館修撰 諫議大夫 中書舍人 山南東道節度使 常於官務之暇 參訪禪林尊宿 結交方外 而廣爲禪界所知 有關之機緣語句 詳載於傳燈錄十四藥山惟儼章等諸錄中 曾以如何是道 請示惟儼 惟儼答以雲在靑天水在甁 於是豁然開悟 諡號文 其著作有復性書 論語筆解 五木經 李文公集等 [五燈會元五 舊唐書一六新唐書一七七]

鼓角; 戰鼓和號角的總稱 古代軍隊中爲發號施令而制作的吹擂之物

 

마조(馬祖)가 어느 날 스님에게 물어 가로되 자네는 왜 간경(看經)하지 않느냐. 사왈 경이 어찌 다르겠습니까. 조왈(祖曰) 그러하여 비록 이와 같지만 네가 향후(向後)에 위인(爲人; 사람을 위하다)하려면 또한 꼭 얻어야 한다. 가로되 지장(智藏)은 병들어 자양(自養; 스스로 療養)을 사유하거늘 감히 위인(爲人)을 말하겠습니까. 조왈(祖曰) 자네는 말년에 반드시 세상에서 흥성(興盛)하리라. 스님이 바로 예배했다. 마조가 멸후(滅後) 스님이 당 정원(貞元) 7(791) 대중의 청으로 개당(開堂)했다. 이상서(李尙書; 李翱)가 일찍이 중에게 묻되 마대사(馬大師)가 무슨 언교(言敎)가 있었습니까. 승왈(僧曰) 대사가 혹 곧 마음이 곧 부처(卽心卽佛)라고 설하고 혹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라고(非心非佛) 설하셨습니다. ()가 가로되 모두 저변(這邊)에 이르렀다(). ()가 도리어 스님에게 묻되 마대사가 무슨 언교가 있었습니까. 스님이 이고(李翱)를 불렀다. 이고가 응낙했다. 사왈 고각(鼓角)이 동했다. 스님이 보청(普請)하던 차에 가로되 인과(因果)가 역연(歷然)하니 어찌하겠는가(爭柰何), 어찌하겠는가. 때에 어떤 중이 나와 손으로써 땅을 받쳤다(). 사왈 무엇 하느냐. 가로되 상구(相救)하십시오, 상구(相救)하십시오. 사왈 대중이여, 저개(這箇) 사승(師僧)은 오히려 조금은 상당하다(較些子). 중이 소매를 떨치고 바로 달아났다. 사왈 사자의 몸 속의 벌레가 스스로 사자의 살을 먹는다. 승문(僧問) 유문유답(有問有答)하면 빈주(賓主)가 역연(歷然)하거니와 무문무답(無問無答)할 때 어떻습니까. 사왈 문드러져버릴까(爛却) 두려워하느냐후에 어떤 중이 들어 長慶(慧稜)에게 묻자 慶云 相逢하면 다 말하기를 벼슬을 쉬고 간다 하지만 林下에서 어찌 일찍이 한 사람이라도 보았는가. 제공선사(制空禪師)가 스님에게 일러 가로되 일출(日出)이 너무 이릅니다(太早生; 은 조사). 사왈 바로 이때다(正是時). 스님이 서당(西堂)에 주()했다. 후에 1속사(俗士)가 있어 묻되 천당과 지옥이 있습니까. 사왈 있다. 가로되 불법승보(佛法僧寶)가 있습니까. 사왈 있다. 다시 많은 질문이 있었지만 모두() 답해 말하되 있다. 가로되 화상의 이러한(恁麽) 말씀은 착오가 아닐까요. 사왈 너는 일찍이 존숙(尊宿)을 상견하고 왔느냐. 가로되 모갑은 일찍이 경산화상(徑山和尙)을 참알하고 왔습니다. 사왈 경산이 너를 향해 어떻게(作麽生) 말하더냐. 가로되 그는 말하기를 일체가 모두 없다 했습니다. 사왈 너는 처()가 있느냐. 가로되 있습니다. 사왈 경산화상이 처가 있느냐. 가로되 없습니다. 사왈 경산화상이 없다고 말한 것은 곧 옳다(). 속사(俗士)가 예사(禮謝)하고 떠났다. 스님이 원화(元和) 9(814) 48일 귀적(歸寂)했다. 헌종(憲宗)이 시()하여 대선교선사(大宣敎禪師)라 했고 목종(穆宗)이 중시(重諡)하여 대각선사(大覺禪師)라 했다.

李翱; (772-841) 당대 거사. 자는 습지(習之)며 농서 성기(지금의 감숙 진안 서북) 사람. 일설엔 조군(지금의 하북 조현) 사람. 어릴 적부터 유학을 배웠으며 박아(博雅; 학식이 넓고 성품이 端雅)하고 호고(好古; 고풍을 좋아함)했음. 정원 14(798) 진사(進士). 교서랑ㆍ국자박사ㆍ사관수찬ㆍ간의대부ㆍ중서사인ㆍ산남동도절도사를 역임했음. 늘 관무(官務)의 여가에 선림의 존숙을 참방하고 방외(方外)를 결교(結交)했으며 널리 선계(禪界)에서 아는 바가 되었음. 기연어구(機緣語句)와 유관한 것은 전등록14 약산유엄장(藥山惟儼章) 등 여러 선록 가운데 상세히 실렸음. 일찍이 무엇이 이 도입니까로써 유엄에게 지시를 청하자 유엄이 구름은 푸른 하늘에 있고 물은 병에 있다로써 답하자 이에서 활연히 개오했음. 시호는 문(). 그의 저작에 복성서ㆍ논어필해ㆍ오목경ㆍ이문공집 등이 있음 [오등회원5. 구당서160. 신당서177].

鼓角; 전고(戰鼓)와 호각(號角)의 총칭. 고대 군대 중에서 발호시령(發號施令; 호령을 발하고 시행)하기 위해 제작한 불고 두드리는 물건.

 

京兆府章敬寺懷暉禪師

泉州謝氏子 上堂 至理亡言 時人不悉 强習他事 以爲功能 不知自性元非塵境 是箇微妙大解脫門 所有鑒覺 不染不礙 如是光明 未曾休廢 曩劫至今 固無變易 猶如日輪 遠近斯照 雖及衆色 不與一切和合 靈燭妙明 非假鍛鍊 爲不了故 取於物象 但如揑目 妄起空華 徒自疲勞 枉經劫數 若能返照 無第二人 擧措施爲 不虧實相 僧問 心法雙亡 指歸何所 師曰 郢人無汙 徒勞運斤 曰 請師不返之言 師曰 卽無返句後僧擧問洞山 山云 道卽甚道 罕遇作家 百丈和尙令僧來候 師上堂次 展坐具 禮拜了 起來拈師一隻靸鞋 以衫袖拂却塵了 倒覆向下 師曰 老僧罪過

京兆府; 京兆 所轄範圍相當於陝西西安及其附近所屬地區 府是唐朝行政區劃 比縣高一級 在道以下 與州同級 京兆府 唐朝開元元年(713)設置 北宋時的長安城 人口減少 仍爲全國主要的商業都市之一 宋金兩代仍在城中置京兆府統之 轄長安 萬年(樊川) 咸寧等十四縣(金十二縣) [百度百科]

泉州; 今福建省泉州 景雲(710-711)初置泉州

功能; 功用能力也 以能生結果而名

鑒覺; 鑑覺 鑑別覺悟

擧措; 擧 處置動作也 措 安布施爲也 [禪林寶訓音義]

指歸; 主旨 意向

郢人; 在楚國京城郢都之人 出自莊子徐無鬼 後用郢人喩知己 肇論疏中 來問婉切 難爲郢人者 婉曲切要難酬答也 郢人者 莊子雜篇徐無鬼章云 莊子送葬 至惠子之墓 顧謂從者曰 郢人以堊慢其鼻端 若蠅翼 使匠石斵之 匠石運斧成風而斵之 盡堊而鼻不傷 郢人立不失容 宋元君聞之 召匠石曰 甞試爲寡人爲之 匠石云 臣嘗能斵之 然臣質已死久矣 自夫子之死也 吾無以爲質矣 吾無與言矣 郭象注云 非夫不動之質忘言之對 則雖有至言妙斵 而無所取之 今謂劉公之問 事同匠石 肇公之答 事同郢人 問能而答難也

坐具; 比丘六物之一 坐臥時敷於地上或臥具上之長方形布 禮拜時先敷坐具 就其上作之 是甚爲不法 南山義淨皆痛斥之 釋門歸敬儀下曰 坐具之目 本是坐時之具 所以禮拜之中 無文敷者也 釋氏要覽一 梵云尼師壇 此云隨坐衣 根本毘奈耶云 尼師但那 唐言坐具 淨法師註云 文言坐具 此乃敷具 坐臥皆得 佛制者 本爲儭替臥具 恐有所損 不擬餘用也 五分律云 爲護身護衣護僧床褥故著坐具

 

경조부(京兆府) 장경사(章敬寺) 회운선사(懷惲禪師)

천주(泉州) 사씨(謝氏)의 아들이다. 상당(上堂) 지리(至理)는 무언(亡言; 말이 없음)이지만 시인(時人)이 알지() 못해 억지로() 타사(他事)를 학습하며 공능(功能)으로 삼나니 자성(自性)은 원래 진경(塵境)이 아님을 알지 못한다. 이것(是箇)은 미묘한 대해탈문(大解脫門)이니 소유(所有)한 감각(鑒覺)이 불염(不染)하고 불애(不礙)한다. 이와 같은 광명이 일찍이 휴폐(休廢)하지 않아 낭겁(曩劫; 지난 겁)에서 지금(至今)토록 확고히 변역(變易)이 없으며 마치 일륜(日輪)이 원근을 이에 비춤과 같아서 비록 뭇 색에 미치지만 일체와 화합하지 않는다. 영촉(靈燭; 신령한 등불)이 묘명(妙明)하여 단련(鍛鍊)을 빌리지 않거늘 깨치지() 못한 연고로 물상(物象)을 취하나니 단지 눈을 짓눌러(揑目) 허망하게 공화(空華)를 일으킴과 같아서 도연(徒然)히 스스로 피로하고 헛되이() 겁수(劫數)를 경과한다. 만약 능히 반조(返照)하면 제이인(第二人)이 없어 거조(擧措)하는 시위(施爲)가 실상(實相)을 저버리지() 않는다. 승문(僧問) 심법(心法)을 쌍망(雙亡)하면 지귀(指歸)가 어느 곳(何所)입니까. 사왈 영인(郢人)은 더러워짐()이 없거늘 도로(徒勞) 운근(運斤)하는구나. 가로되 스님의 불반(不返; 돌이키지 아니하다)의 말씀을 청합니다. 사왈 곧 반구(返句)가 없다에 중이 들어 洞山(良价)에게 묻자 동산이 이르되 말은 곧 심히 말했지만 작가를 만남이 드물다. 백장화상(百丈和尙; 懷海)이 중으로 하여금 와서 엿보게() 했다. 스님이 상당(上堂)한 차에 좌구(坐具)를 전개(展開)하여 예배하고 나서 일어나 스님의 1() 삽혜(靸鞋; )를 집어 들어 옷소매(衫袖)로써 티끌을 털어버리고(拂却) 나서 거꾸로 엎어(倒覆) 아래로 향했다. 사왈 노승의 죄과(罪過).

京兆府;; 경조니 관할하는 바의 범위는 섬서의 서안 및 그 부근의 소속지구에 상당함. ()는 이 당조(唐朝)의 행정구획이니 현()에 비하면 1급이 높고 도() 이하에 있으며 주()와 동급임. 경조부는 당조 개원 원년(713)에 설치했음. 북송 때 장안성의 인구가 감소하였으나 그대로 전국에서 주요한 도시의 하나가 되었음. 송ㆍ금 양대엔 그대로 성중에 경조부를 설치해 두고 다스렸는데 장안ㆍ만년(번천)ㆍ함녕 등 14(금은 12)을 관할했음 [백도백과].

泉州; 지금의 복건성 천주니 경운(710-711) 초 천주를 설치했음.

功能; 공용(功用)과 능력임. 능히 결과를 냄으로써 이름함.

鑒覺; 감각(鑑覺)과 같음. 감별(鑑別)과 각오(覺悟).

擧措; ()는 처치(處置)하는 동작이며 조()는 안포(安布)하여 시위(施爲)함임 [선림보훈음의].

指歸; 주지(主旨). 의향(意向).

郢人; 초국(楚國) 경성(京城) 영도(郢都)에 있는 사람이니 장자 서무귀(徐無鬼)로부터 나오며 후에 영인을 써서 지기(知己)에 비유했음. 조론소중. 내문(來問)이 완절(婉切)하나 영인(郢人)이 되기 어렵다는 것은 완곡절요(婉曲切要)하나 수답(酬答; 응답)하기 어려움이다. 영인이란 것은 장자 잡편 서무귀장(徐無鬼章)에 이르되 장자가 송장(送葬)하여 혜자(惠子)의 묘에 이르자 돌아보며 종자(從者)에게 일러 가로되 영인(郢人)이 그의 코 끝에 백토를 파리의 날개만큼 얇게 바르고 장석(匠石)으로 하여금 이것을 깎아 내게 했다. 장석이 도끼를 움직여 바람을 이루면서 그것을 깎았고 백토는 없어졌지만 코는 상하지 않았으며 영인은 선 채로 모습을 잃지 않았다. 송원군(宋元君)이 이를 듣고 장석을 불러 가로되 시험삼아() 과인을 위해 그렇게 하라. 장석이 가로되 신이 곧 일찍이 능히 이를 깎았지만 비록 그러하나 신의 바탕(영인을 가리킴)이 죽은 지 오래입니다. 부자(夫子)의 죽음으로부터 내가 바탕으로 삼을 게 없었고 더불어 말할 이가 없었습니다. 곽상(郭象)의 주()에 이르되 무릇 부동지질(不動之質)이며 망언지대(忘言之對)가 아니면 곧 비록 지언묘착(至言妙斵)이 있더라도 취할 바가 없음이다. 여금에 이르자면 유공(劉公)의 물음은 사건이 장석(匠石)과 같고 조공(肇公)의 답은 사건이 영인(郢人)과 같아서 물음은 능하나 답하기는 어려움이다.

坐具; 비구 6물의 하나. 좌와(坐臥) 시 지상이나 혹 와구(臥具) 위에 펴는 장방형의 포(). 예배할 때 먼저 좌구를 펴고 그 위에 나아가 이를 지음은 이는 심히 불법(不法)이 됨. 남산과 의정이 모두 통렬히 그것을 배척했음. 석문귀경의하(釋門歸敬儀下)에 가로되 좌구의 명목은 본시 앉을 때의 도구다. 소이로 예배하는 중에 편다()는 글이 없다. 석씨요람1. 범어로 이르되 니사단(尼師壇)은 여기에선 이르되 수좌의(隨坐衣). 근본비나야(根本毘奈耶)에 이르되 니사단나(尼師但那)는 당나라 말로 좌구다. 의정법사의 주()에 이르되 문()에 좌구라고 말한 것은 이는 곧 부구(敷具; 는 펼 부)니 앉거나 눕는데 다 합당하다. 불타가 제정한 것은 본래 깔개(; 과 같음. )가 되었는데 와구(臥具)로 대체했음은 손상하는 바가 있을까 염려했음이니 여타의 용도로 향하지() 못하게 했음이다. 오분율에 이르되 몸을 보호하고 옷을 보호하고 승상(僧床)의 요를 보호하기 위한 연고로 좌구를 두었다.

 

或問 祖師傳心地法門 爲是眞如心 妄想心 非眞非妄心 爲是三乘敎外別立心 師曰 汝見目前虛空麽 曰 信知常在目前 人自不見 師曰 汝莫認影像 曰 和尙作麽生 師以手撥空三下 曰 作麽生卽是 師曰 汝向後會去在 有僧來遶師三匝 振錫而立 師曰 是 是長慶代云 和尙佛法身心何在 其僧又到南泉 亦遶南泉三匝 振錫而立 泉曰 不是不是 此是風力所轉 終成敗壞 僧曰 章敬道是 和尙爲甚麽道不是 泉曰 章敬卽是 是汝不是長慶代云 和尙是甚麽心行 雲居錫云 章敬未必道是 南泉未必道不是 又云 這僧當初但持錫出去恰好 小師行脚回 師問曰 汝離此間多少年邪 曰 離和尙左右將及八年 師曰 辦得箇甚麽 小師於地畫一圓相 師曰 祇這箇 更別有 小師乃畫破圓相 便禮拜 師曰 不是不是 僧問 四大五蘊身中 阿那箇是本來佛性 師乃呼僧名 僧應諾 師良久曰 汝無佛性 唐元和十三年示滅 諡大覺禪師

 

혹문(或問; 누가 묻다) 조사가 심지법문(心地法門)을 전했거니와 이 진여심(眞如心)이 됩니까, 망상심(妄想心)입니까, 비진비망심(非眞非妄心)입니까. 이 삼승교(三乘敎) 밖에 따로 세운 마음이 됩니까. 사왈(師曰) 네가 목전(目前)의 허공을 보느냐. 가로되 목전에 상재(常在)함을 믿고 압니다만 사람들이 스스로 보지 못합니다. 사왈 너는 영상(影像)을 인정하지 말아라. 가로되 화상은 어떻습니까. 스님이 손으로써 허공을 세 번(三下; 量詞) 제거했다(). 가로되 어찌해야 곧 옳습니까(). 사왈 네가 향후에 이회(理會)하여 가리라. 어떤 중이 와서 스님을 세 바퀴() 돌고 석장(錫杖)을 떨치고 섰다. 사왈 옳다(), 옳다長慶(慧稜)代云 화상의 佛法身心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 중이 또 남천(南泉)에 이르러 또한 남천을 세 바퀴 돌고 석장을 떨치고 서자 천왈(泉曰) 옳지 않다(不是), 옳지 않다. 이것은 이 풍력(風力)에 굴리는 바라 마침내 패괴(敗壞)를 이룬다. 승왈(僧曰) 장경(章敬)은 옳다고 말했거늘 화상은 무엇 때문에 옳지 않다고 말합니까. 천왈(泉曰) 장경은 곧 옳지만 이 너는 옳지 않다長慶代云 화상은 이 무슨 心行입니까. 雲居錫(淸錫)이 이르되 章敬은 반드시 옳다고 말하지 않았고 南泉은 반드시 옳지 않다고 말하지 않았다. 又云 이 중이 當初에 단지 석장을 가지고 나갔어야 恰好. 소사(小師)가 행각하고 돌아왔다. 스님이 물어 가로되 네가 차간(此間)을 떠난 지 얼마의 해던가. 가로되 화상의 좌우를 떠난 지 거의() 8년에 이릅니다. 사왈 저() 무엇을 판득(辦得)했느냐. 소사가 땅에다 1원상(圓相)을 그렸다. 사왈 다만 이것(遮箇)이냐, 다시 딴 게 있느냐. 소사가 이에 원상을 그어 깨뜨리고(畫破) 바로 예배했다. 사왈 옳지 않다, 옳지 않다. 승문(僧問) 45(四大五蘊)의 신중(身中)에 어느 것(阿那箇)이 이 본래의 불성입니까. 스님이 곧 중의 이름을 불렀다. 중이 응낙했다. 스님이 양구(良久)하고 가로되 너는 불성이 없다. 당 원화(元和) 13(818) 시멸(示滅)했다. ()가 대각선사(大覺禪師).

 

越州大珠慧海禪師

建州朱氏子 依越州大雲寺智和尙受業 初參馬祖 祖問 從何處來 曰 越州大雲寺來 祖曰 來此擬須何事 曰 來求佛法 祖曰 我這裏一物也無 求甚麽佛法 自家寶藏不顧 拋家散走作麽 曰 阿那箇是慧海寶藏 祖曰 卽今問我者 是汝寶藏 一切具足 更無欠少 使用自在 何假外求 師於言下自識本心不由知覺 踊躍禮謝 師事六載 後以受業師老 遽歸奉養 乃晦迹藏用 外示癡訥 自撰頓悟入道要門論一卷 法姪玄晏竊出江外 呈馬祖 祖覽訖 告衆曰 越州有大珠 圓明光透自在 無遮障處也 衆中有知師姓朱者 相推來越尋訪依附時號大珠和尙

建州; 今福建省建甌

受業師; 謂得度受敎之師 或云親敎師 釋氏要覽上 毘奈耶云 鄔波陀耶 此云親敎 由能敎離出世業故 稱受業和尙

頓悟入道要門論; 二卷 唐代大珠慧海撰 收於卍續藏第一一冊 原爲一卷 現存本則有上下二卷 下卷又稱諸方門人參問語錄 或稱諸宗所問語錄 卷尾有四明妙叶之跋 妙叶於明洪武二年(1369) 偶讀頓悟入道要門論 頗有深悟 不忍私藏 遂將之與景德傳燈錄卷六之大珠章 卷二十八之大珠廣語 及聯燈會要中之初祖菩提達磨大師安心法門等 合倂刊行 而以後三者作卷下之內容 本書所引經典有楞伽經 維摩經 遺敎經 楞嚴經 佛名經 梵網經 金剛經 涅槃經 金光明經 華嚴經 法華經等 甚至唐代出現之佛說法句經及禪門經 大通方廣等僞經 以及六祖壇經 神會語錄 楞伽師資記 寶林傳等禪錄 或孟子及僧肇之語 故由此書卽可窺知初期禪宗敎學之背景

江外; 江南 從中原人看來 地在長江之外 故稱

 

월주(越州) 대주혜해(大珠慧海) 선사

건주(建州) 주씨(朱氏)의 아들이며 월주 대운사(大雲寺) 지화상(智和尙)에게 의지해 수업(受業)했다. 마조(馬祖)를 초참(初參)하자 마조가 묻되 어느 곳으로 좇아왔느냐. 가로되 월주 대운사에서 왔습니다. 조왈(祖曰) 여기에 와서 무슨 일을 쓰려고() 하느냐. 가로되 와서 불법을 구합니다. 조왈(祖曰) 나의 이 속엔 한 물건도 없거늘 무슨 불법을 구하느냐. 자가(自家)의 보장(寶藏)을 돌아보지 않고 포가산주(拋家散走)하여 무엇 하겠느냐. 가로되 어느 것(阿那箇)이 이 혜해(慧海)의 보장(寶藏)입니까. 조왈(祖曰) 즉금 나에게 묻는 것이 이 너의 보장이니 일체를 구족하여 다시 흠소(欠少)가 없으며 사용(使用)이 자재(自在)하거늘 어찌 밖으로 구함을 빌리겠는가. 스님이 언하에 본심(本心)은 지각(知覺)을 말미암지 않는 줄 스스로 알았고 용약(踊躍)하며 예사(禮謝)했고 사사(師事)하기 6()였다. 후에 수업사(受業師)가 연로(年老)했기 때문에() 급히() 돌아가 봉양(奉養)했고 이에 회적(晦迹)하고 장용(藏用)하면서 밖으론 치눌(癡訥)을 보였다. 스스로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1권을 지었는데 법질(師姪)인 현안(玄晏)이 강외(江外)로 훔쳐 내어(竊出) 마조에게 드렸다(). 마조가 열람해 마치고 고중(告衆)하여 가로되 월주에 대주(大珠)가 있어 원명(圓明)한 빛이 통투(通透; )하고 자재하여 차장(遮障)하는 곳이 없다. 중중(衆中)에 스님의 성이 주()임을 아는 자가 있어 서로 추측(推測)해 월(; 越州)로 와서 심방(尋訪)하여 의부(依附)했다당시에 호가 大珠和尙이다.

建州; 지금의 복건성 건구(建甌).

受業師; 이르자면 득도(得度)ㆍ수교(受敎)의 스승임. 혹은 이르되 친교사(親敎師). 석씨요람상. 비나야에 이르되 오파타야(鄔波陀耶; upādhyāya)는 여기에서 이르되 친교(親敎). 능히 세업(世業)을 이출(離出)하게 함을 말미암는 연고니 일컬어 수업화상(受業和尙)이라 한다.

頓悟入道要門論; 2. 당대 대주혜해(大珠慧海)가 지었음. 만속장(卍續藏) 110책에 수록되었음. 원래 1권이 되었으나 현존본은 곧 상ㆍ하 2권이 있음. 하권은 또 명칭이 제방문인참문어록(諸方門人參問語錄)이며 혹은 명칭이 제종소문어록(諸宗所問語錄). 권미(卷尾)에 사명묘협(四明妙叶)의 발()이 있음. 묘협이 명 홍무 2(1369) 우연히 돈오입도요문론을 읽다가 자못 깊이 깨침이 있었고 사장(私藏)함을 참지 못해 드디어 이를 가지고 경덕전등록 권6의 대주장ㆍ권28의 대주광어와 및 연등회요 중의 초조 보리달마대사의 안심법문 등을 합병하여 간행했으니 이후의 3자는 권하의 내용이 됨. 본서에서 인용하는 바의 경전은 릉가경ㆍ유마경ㆍ유교경ㆍ릉엄경ㆍ불명경ㆍ범망경ㆍ금강경ㆍ열반경ㆍ금광명경ㆍ화엄경ㆍ법화경 등이며 심하기론 당대에 출현한 불설법구경 및 선문경ㆍ대통방광 등의 위경(僞經), 그리고 육조단경ㆍ신회어록ㆍ릉가사자기ㆍ보림전 등의 선록과 혹 맹자 및 승조(僧肇)의 말에 이르는지라 고로 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곧 가히 초기 선종의 교학의 배경을 엿보아 앎.

江外; 강남이니 중원인(中原人)으로 좇아 보매 땅이 장강의 밖에 있는지라 고로 일컬음.

 

師謂曰 禪客我不會禪 竝無一法可示於人 不勞久立 且自歇去 時學侶漸多 日夜叩激 事不得已 隨問隨答 其辭無礙 時有法師數人來謁曰 擬伸一問 師還對否 師曰 深潭月影 任意撮摩 問 如何是佛 師曰 淸譚對面 非佛而誰 衆皆茫然法眼云 是卽沒交涉 僧良久又問 師說何法度人 師曰 貧道未曾有一法度人 曰 禪師家渾如此 師却問 大德說何法度人 曰 講金剛經 師曰 講幾座來 曰 二十餘座 師曰 此經是阿誰說 僧抗聲曰 禪師相弄 豈不知是佛說邪 師曰 若言如來有所說法 則爲謗佛 是人不解我所說義 若言此經不是佛說 則是謗經 請大德說看 僧無對 師少頃 又問 經云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大德且道 阿那箇是如來 曰 某甲到此却迷去 師曰 從來未悟 說甚却迷 曰 請禪師爲說 師曰 大德講經二十餘座 却不識如來 僧禮拜曰 願垂開示 師曰 如來者是諸法如義 何得忘却 曰 是 諸法如義 師曰 大德是亦未是 曰 經文分明 那得未是 師曰 大德如否 曰 如 師曰 木石如否 曰 如 師曰 大德如同木石如否 曰 無二 師曰 大德與木石何別 僧無對 良久却問 如何得大涅槃 師曰 不造生死業 曰 如何是生死業 師曰 求大涅槃 是生死業 捨垢取淨 是生死業 有得有證 是生死業 不脫對治門 是生死業 曰 云何卽得解脫 師曰 本自無縛 不用求解 直用直行 是無等等 曰 禪師如和尙者 實謂希有 禮謝而去

對治; 原意爲否定 遮遣 於佛敎中 則指以道斷除煩惱等

無等等; 形容最尊最貴而無有與之相等者

 

스님이 일러 가로되 선객(禪客)이여, 나는 선()을 알지 못하며 아울러 1법도 사람에게 가히 보일 게 없나니 노고롭게 구립(久立)하지 말고 다만() 스스로 쉬거라(歇去). 때에 학려(學侶)가 점다(漸多)했고 일야(日夜)로 고격(叩激; 叩問. 詰問)하자 사부득이(事不得已)하여 수문수답(隨問隨答)했는데 그 언사(言辭)가 무애(無礙)했다. 때에 법사(法師) 몇 사람이 있어 내알(來謁)하여 가로되 1()을 펴려고 하는데(擬伸) 스님이 도리어 대답하겠습니까. 사왈(師曰) 심담(深潭)의 월영(月影)을 뜻대로 촬마(撮摩)하시게. 묻되 무엇이 이 부처입니까. 사왈 청담(淸潭)에 대면(對面)한 게 부처가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무리가 모두 망연(茫然)했다法眼이 이르되 이는 곧 交涉이 없다. 중이 양구(良久)하고 또 묻되 스님은 무슨 법을 설하여 사람을 제도하십니까. 사왈 빈도(貧道)는 일찍이 사람을 제도할 1법도 있지 않다. 가로되 선사가(禪師家)는 온통() 이와 같습니다. 스님이 도리어 묻되 대덕(大德)은 무슨 법을 설해 사람을 제도하는가. 가로되 금강경을 강설합니다. 사왈 강설을 몇 좌(; 量詞)해 왔는가. 가로되 20여 좌()입니다. 사왈 이 경은 이 누가(阿誰) 설했는가. 중이 항성(抗聲)으로 가로되 선사는 상롱(相弄)합니까. 어찌 이 불설(佛說)임을 알지 못합니까. 사왈 만약 말하되 여래가 설하는 바 법이 있다 하면 곧 방불(謗佛)함이며 이 사람은 내가 설하는 바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했고 만약 말하되 이 경이 이 불설이 아니라 하면 곧 이 방경(謗經)이니 청컨대 대덕은 설해보라. 중이 대답이 없었다. 스님이 소경(少頃; 片刻)에 또 묻되 경운(經云) 만약 색으로써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사도(邪道)를 행하는지라/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한다 했으니 대덕은 그래 말하라, 어느 것(阿那箇)이 이 여래인가. 가로되 모갑은 여기에 이르러 도리어 미()했습니다. 사왈 종래(從來)로 깨치지() 못했거늘 무슨() 도리어() ()함을 설하는가. 가로되 청컨대 선사가 설하십시오. 사왈 대덕은 20여 좌() 강경(講經)했지만 도리어 여래를 알지 못하는구나. 중이 예배하고 가로되 원컨대 개시(開示)를 내리십시오. 사왈 여래란 것은 이 제법(諸法)이 여()의 뜻이라 했거늘 어찌 망각함을 얻는가. 가로되 옳습니다() 제법이 여()의 뜻입니다. 사왈 대덕은 옳지만() 또한 옳지 못하다. 가로되 경문에 분명하거늘 어찌 옳지 않음을 얻습니까. 사왈 대덕은 여()인가. 가로되 여입니다. 사왈 목석(木石)은 여인가. 가로되 여입니다. 사왈 대덕의 여가 목석의 여와 같은가. 가로되 둘이 아닙니다. 사왈 대덕과 목석이 무엇이 다른가. 중이 대답이 없었다. 양구(良久)에 도리어 묻되 어찌해야 대열반을 얻습니까. 사왈 생사업(生死業)을 짓지 않음이다. 가로되 무엇이 이 생사업입니까. 사왈 대열반을 구함이 이 생사업이며 사구취정(捨垢取淨)함이 이 생사업이며 유득유증(有得有證)이 이 생사업이며 대치문(對治)을 벗어나지 못함이 이 생사업이다. 가로되 어찌해야 곧 해탈을 얻습니까. 사왈 본래 스스로 묶임이 없으니 해탈 구함을 쓰지 말아라. 직용(直用)하고 직행(直行)해야 이 무등등(無等等)이다. 가로되 선사(禪師)에 화상과 같은 분은 실로 이르나니 희유(希有)합니다. 예사(禮謝)하고 떠났다.

對治; 원래의 뜻은 부정(否定)ㆍ차견(遮遣). 불교 중에선 곧 도로써 번뇌 등을 단제(斷除).

無等等; 최존최귀(最尊最貴)하여 그와 더불어 상등(相等; 서로 齊等)하는 것이 있지 않음을 형용함.

 

有行者問 卽心卽佛 那箇是佛 師曰 汝疑那箇不是佛 指出看 者無對 師曰 達卽徧境是 不悟永乖疎 律師法明謂師曰 禪師家多落空 師曰 却是座主家落空 明大驚曰 何得落空 師曰 經論是紙墨文字 紙墨文字者 俱是空 設於聲上建立名句等法 無非是空 座主執滯敎體 豈不落空 明曰 禪師落空否 師曰 不落空 明曰 何得却不落空 師曰 文字等皆從智慧而生 大用現前 那得落空 明曰 故知一法不達 不名悉達 師曰 律師不唯落空 兼乃錯會名言 明作色曰 何處是錯處 師曰 未辨華竺之音 如何講說 明曰 請禪師指出錯處 師曰 豈不知悉達是梵語邪 明雖省過 而心猶憤然梵語具云 婆曷剌他悉陀 中國翻云一切義成 舊云悉達多 猶是訛略梵語也又曰 夫經律論是佛語 讀誦依敎奉行 何故不見性 師曰 如狂狗趂塊師子齩人 經律論是性用 讀誦者是性法 明曰 阿彌陀佛有父母及姓否 師曰 阿彌陀姓憍尸迦 父名月上 母名殊勝妙顔 明曰 出何敎文 師曰 出鼓音王經 法明禮謝 讚歎而退

作色; 臉上變色 指神情變嚴肅或發怒

狂狗趁塊師子齩人; 狂狗 譬人之狂愚 大般若經五百六十九 譬如有人塊擲師子 師子逐人而塊自息 菩薩亦爾 但斷其生而死自滅 犬唯逐塊不知逐人 塊終不息 外道亦爾 不知斷生終不離死

阿彌陀; <> Amita 慧琳音義二十七 阿彌陀 梵語也 阿弭多那庚沙 此云無量壽也

鼓音王經; 阿彌陀鼓音聲王陀羅尼經之略名 一卷 失譯人名 收於大正藏第十二冊

 

어떤 행자가 묻되 곧 마음이 곧 부처(卽心卽佛)라 하니 어느 것(那箇)이 이 부처입니까. 사왈 너는 어느 것이 이 부처가 아니라고 의심하는지 가리켜 내어보아라. 행자가 대답이 없었다. 사왈 통달하면 곧 온 경계(徧境)가 이것이지만 깨치지 못하면 길이 괴소(乖疎; 疏遠)하다. 율사(律師) 법명(法明)이 스님에게 일러 가로되 선사가(禪師家)는 다분히 낙공(落空)합니다. 사왈 도리어 이 좌주가(坐主家)가 낙공한다. 법명이 대경(大驚)하며 가로되 어찌하여 낙공함을 얻습니까. 사왈 경론(經論)은 이 지묵(紙墨)의 문자며 지묵의 문자란 것은 모두() ()했고 설사 성상(聲上)에 명구(名句) 등의 법을 건립하더라도 이 공()이 아님이 없다. 좌주(坐主)가 교체()에 집체(執滯)하거늘 어찌 낙공(落空)이 아니겠는가. 명왈(明曰) 선사(禪師)도 낙공합니까. 사왈 낙공하지 않는다. 명왈(明曰) 왜 도리어 낙공하지 않음을 얻습니까. 사왈 문자 등은 모두 지혜로 좇아 생겨나며 대용(大用)이 현전(現前)하거늘 어찌() 낙공함을 얻겠는가. 명왈(明曰) 고로 아나니 1법을 통달하지 못하면 이름이 실달(悉達; 모두 통달하다)이 아닙니다. 사왈 율사는 낙공할 뿐만 아니라 겸하여 이에 명언(名言; 名字言句)을 착용(錯用)했다. 법명이 작색(作色)하며 가로되 어느 곳이 이 착처()입니까. 사왈 화축(華竺; 중화와 천축)의 음을 분변하지 못하거늘 어떻게 강설하는가. 명왈(明曰) 청컨대 선사가 착처(錯處)를 가리켜 내십시오. 사왈 어찌 실달(悉達)이 이 범어인 줄 알지 못하는가. 법명이 비록 허물을 성찰했지만 마음은 오히려 분연(憤然)했다梵語를 갖추어 이르자면 살바알랄타실타(薩婆曷剌他悉陀)니 중국에선 번역해 이르되 一切義成이다. 舊譯에 이른 悉達多는 오히려 이는 범어를 訛略했다. 또 가로되 무릇 경률론은 이 불어(佛語)거늘 독송하고 가르침에 의해 봉행(奉行)해도 무슨 연고로 견성하지 못합니까. 사왈 예컨대(; 例擧를 표시) 미친 개는 흙덩이를 쫓아가고 사자는 사람을 무나니(狂狗趁塊師子齩人) 경률론은 이 성용(性用)이며 독송자(讀誦者)는 이 성법(性法)이다. 법명이 가로되 아미타불(阿彌陀)은 부모 및 성이 있습니까. 사왈 아미타는 성이 교시가(憍尸迦)며 부명(父名)은 월상(月上)이며 모명(母名)은 수승묘안(殊勝妙顔)이다. 명왈(明曰) 어떤 교문(敎文)에 나옵니까. 사왈 고음왕경(鼓音王經)에 나온다. 법명이 예사(禮謝)하고 찬탄하고 물러났다.

作色; 뺨 위가 변색함. 신정(神情; 표정. 기색)이 엄숙하게 변하거나 혹 성을 냄을 가리킴.

狂狗趁塊師子齩人; 광구(狂狗)사람의 광우(狂愚; 미치고 어리석음)에 비유. 대반야경569. 비여(譬如) 어떤 사람이 흙덩이를 사자에게 던지면 사자가 사람을 쫓으므로 흙덩이는 저절로 쉬어진다. 보살도 또한 그러하여 단지 그 생()을 끊으므로 사()가 저절로 멸()한다. 개는 오직 흙덩이를 쫓고 사람을 쫓을 줄 알지 못하므로 흙덩이는 마침내 쉬지 못한다. 외도도 또한 그러하여 생()을 끊을 줄 알지 못하므로 마침내 사()를 여의지 못한다.

阿彌陀; <> Amita. 혜림음의27. 아미타(阿彌陀) 범어임. 아미다나경사(阿弭多那庚沙)는 여기에선 이르되 무량수임.

鼓音王經; 아미타고음성왕다라니경의 약명. 1권이며 번역한 사람의 이름을 잃었음. 대정장 제12책에 수록되었음.

 

有三藏法師問 眞如有變易否 師曰 有變易 藏曰 禪師錯也 師却問三藏 有眞如否 曰 有 師曰 若無變易 決定是凡僧也 豈不聞善知識者 能回三毒三聚淨戒 回六識爲六神通 回煩惱作菩提 回無明爲大智 眞如若無變易 三藏眞是自然外道也 藏曰 若爾者 眞如卽有變易也 師曰 若執眞如有變易 亦是外道 曰 禪師適來說眞如有變易 如今又道不變易 如何卽是的當 師曰 若了了見性者 如摩尼珠現色 說變亦得 說不變亦得 若不見性人 聞說眞如變易 便作變易解會 說不變易 便作不變易解會 藏曰 故知南宗實不可測

三毒; 祖庭事苑七 三毒 謂貪嗔癡 四解脫經云 三毒感三塗 嗔忿火塗(地獄塗) 慳貪刀塗(餓鬼塗) 愚癡血塗(畜生塗)

三聚淨戒; 簡稱三聚戒 一攝律儀戒 受持五八十具等一切之戒律者 二攝善法戒 以修一切善法爲戒者 三攝衆生戒 又云饒益有情戒 以饒益一切衆生爲戒者 是華嚴梵網占察瓔珞等經 瑜伽唯識等論所說 此三者積聚 故云三聚 戒有大小 十戒二百五十戒等爲小乘戒 十重四十八輕戒三聚戒等爲大乘戒 又有在家出家之別 五戒八戒爲在家戒 十戒二百五十戒爲出家 三聚戒 爲道俗通行戒 卽大乘之菩薩無論出家在家 皆受之也 但在家之菩薩 凡受此三聚以爲心者 謂之通受 出家之菩薩 其初別受攝律儀戒 卽二百五十戒及十重等(攝律儀之中有一切大小之戒) 是名別受 次乃總受之三聚也 此通受之有二種 一者從他得 唯對於師而得 二者自誓得 唯於佛像前以善心自誓而得 皆不要白四羯磨之作法也

六神通; 又作六通 指六種超人間而自由無礙之力 三藏法數十九 六神通[出法界次第] 瓔珞經云 神名天心 通名慧性 天然之慧 徹照無礙 故名神通 一天眼通 謂能見六道衆生 死此生彼苦樂之相 及見一切世間種種形色 無有障礙 是名天眼通 二天耳通 謂能聞六道衆生苦樂憂喜語言 及世間種種音聲 是名天耳通 三知他心通 謂能知六道衆生心中所念之事 是名知他心通 四宿命通 謂能知自身一世二世三世 乃至百千萬世宿命及所作之事 亦能知六道衆生各各宿命及所作之事 是名宿命通 五身如意通 謂身能飛行 山海無礙 於此界沒 從彼界出 於彼界沒 從此界出 大能作小 小能作大 隨意變現 是名身如意通 六漏盡通 漏盡通者 漏卽三界見思惑也 謂羅漢斷見思惑盡 不受三界生死 而得神通 是名漏盡通

自然外道; 古代印度的外道之一 此外道主張萬物非依因緣而生 系由自然所生者 與無因外道相同 [成唯識論述記一]

的當; 正好 恰當 非常合適

摩尼珠; 祖庭事苑七 摩尼珠 此云無垢光 又云離垢 又云增長 論云 摩尼珠多在龍腦中 有福衆生自然得之 亦名如意珠 常出一切寶物 衣服飮食 隨意皆得 得此珠者 毒不能害 火不能燒 或是帝釋所執金剛 與修羅鬪時 碎落閻浮提 變成此珠 又云 過去久遠佛舍利 法旣滅盡 變成此珠 以爲利益

 

삼장법사(三藏法師)가 있어 묻되 진여(眞如)가 변역(變易; 변하여 바뀜)함이 있습니까. 사왈(師曰) 변역함이 있다. 삼장이 가로되(藏曰) 선사(禪師)가 틀렸습니다. 스님이 도리어 삼장에게 묻되 진여가 있는가. 가로되 있습니다. 사왈 만약 변역(變易)함이 없다고 한다면 결정코 이 범승(凡僧; 평범한 승인)이다. 어찌 듣지 못했는가, 선지식이란 자는 능히 삼독(三毒)을 돌이켜 삼취정계(三聚淨戒)로 삼으며 6()을 돌이켜 6신통(六神通)으로 삼으며 번뇌를 돌이켜 보리를 지으며 무명(無明)을 돌이켜 대지(大智)로 삼는다. 진여가 만약 변역함이 없다고 한다면 삼장은 진실로 이 자연외도(自然外道). 삼장이 가로되 만약 그렇다면 진여는 곧 변역함이 있습니다. 사왈 만약 진여가 변역함이 있다고 집착한다면 역시(亦是) 외도(外道). 가로되 선사가 적래(適來; 조금 전. 아까)엔 진여는 변역함이 있다고 설하더니 여금(如今)에 또 변역하지 않는다고 말하니 어찌해야 곧 이 적당(的當)합니까. 사왈 만약 똑똑히 견성(見性)한 자라면 마치 마니주(摩尼珠)가 색을 나타냄과 같아서 변한다고 설해도 또한 옳고(; 適合) 변하지 않는다고 설해도 또한 옳으려니와 만약 견성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진여가 변역(變易)한다는 말을 들으면 바로 변역한다는 해회(解會; 理解)를 지으며 변역하지 않는다고 설하면 바로 변하지 않는다는 해회(解會)를 짓는다. 삼장이 가로되 고로 아나니 남종(南宗)은 실로 가히 헤아리지 못한다.

三毒; 조정사원7. 3() 이르자면 탐ㆍ진ㆍ치임. 사해탈경에 이르되 3독이 3()를 감응하나니 진분(嗔忿; 성냄)은 화도(火塗; 지옥도)며 간탐은 도도(刀塗; 아귀도)며 우치는 혈도(血塗; 축생도)이다.

三聚淨戒; 간칭(簡稱)이 삼취계(三聚戒). 1. 섭율의계(攝律儀戒) 5계ㆍ8계ㆍ10계ㆍ구(; 구족계)등의 일체의 계율을 수지하는 것. 2. 섭선법계(攝善法戒) 일체의 선법(善法)을 닦음으로써 계를 삼는 것. 3. 섭중생계(攝衆生戒) 또 이르되 요익유정계(饒益有情戒)니 일체중생을 요익(饒益)함으로써 계를 삼는 것. 이는 화엄ㆍ범망ㆍ점찰ㆍ영락 등의 경과 유가ㆍ유식 등의 논에서 설한 바임. 3자가 적취(積聚)한지라 고로 이르되 3(). 계에 대소가 있으니 10계와 250계 등은 소승계가 되고 십중사십팔경계(十重四十八輕戒)와 삼취계(三聚戒) 등은 대승계가 됨. 또 재가와 출가의 구별이 있으니 5계와 8계는 재가계가 되고 10계와 250계는 출가가 되고 삼취계는 도속통행계(道俗通行戒)가 됨. 곧 대승의 보살은 출가와 재가를 논하지 않고 모두 이를 수지함. 단지 재가의 보살이 무릇 이 3()를 수지해 마음으로 삼는 것을 일컬어 통수(通受)라 하고 출가의 보살이 그 처음에 섭율의계(攝律儀戒), 250계 및 10() (섭율의의 가운데 일체의 대소의 계가 있음)을 별수함을 이 이름이 별수(別受). 다음은 곧 총수(總受)3()니 이 통수(通受)2종이 있음. 1자는 타인으로부터 얻음이니 오직 사()를 대해 얻음이며 2자는 자서득(自誓得)이니 오직 불상 앞에서 선심(善心)으로 자서(自誓)하여 얻음임. 모두 백사갈마(白四羯磨)의 작법을 요하지 않음.

六神通; 6()으로 지음. 6종의, 인간을 초월하여 자유무애한 힘을 가리킴. 삼장법수19. 6신통(神通) [출법계차제] 영락경에 이르되 신()은 이름이 천심(天心)이며 통()은 이름이 혜성(慧性)이다. 천연의 혜()로 철조(徹照)하여 무애한지라 고로 이름이 신통(神通)이다. 1. 천안통(天眼通) 이르자면 육도중생(六道衆生)이 여기에서 죽어 저기에서 출생하는 고락의 형상을 능히 보며 및 일체 세간의 갖가지 형색을 보되 장애가 있지 않나니 이 이름이 천안통임. 2. 천이통(天耳通) 이르자면 육도중생의 고락과 우희(憂喜)의 어언 및 세간의 갖가지 음성을 능히 듣나니 이 이름이 천이통임. 3. 지타심통(知他心通) 이르자면 육도중생이 심중에 생각하는 바의 일을 능히 아나니 이 이름이 지타심통임. 4. 숙명통(宿命通) 이르자면 자신의 1()2세ㆍ3세 내지 백천만세(百千萬世)의 숙명 및 짓는 바의 일을 능히 알며 또한 능히 육도중생의 각각의 숙명 및 짓는 바의 일을 아나니 이 이름이 숙명통임. 5. 신여의통(身如意通) 이르자면 몸이 능히 비행하되 산과 바다가 장애함이 없으며 이 세계에서 잠겨 저 세계로부터 나오고 저 세계에서 잠겨 이 세계로부터 나오며 큰 것을 능히 작게 만들고 작은 것을 능히 크게 만들면서 뜻대로 변현(變現)하나니 이 이름이 신여의통임. 6. 누진통(漏盡通) 누진통이란 것은 누()는 곧 삼계의 견사혹(見思惑)이니 이르자면 라한이 견사혹을 끊어 없애고 삼계의 생사를 받지 않으면서 신통을 얻음이니 이 이름이 누진통임.

自然外道; 고대 인도의 외도의 하나. 이 외도는 주장하기를 만물은 인연에 의하지 않고 생겨난다. 이는(; ) 자연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바의 것이다. 무인외도(無因外道)와 더불어 상동(相同)[성유식론술기1].

的當; 정호(正好). 흡당(恰當). 비상(非常)으로 합적(合適).

摩尼珠; 조정사원7. 마니주(摩尼珠) 여기에선 이르되 무구광(無垢光)이며 또 이르되 이구(離垢)며 또 이르되 증장(增長). 논에 이르되 마니주는 많이 용뇌(龍腦) 속에 있으며 복이 있는 중생이 자연히 그것을 얻는다. 또 이름이 여의주며 늘 일체의 보물ㆍ의복ㆍ음식을 내어 뜻에 따라 다 얻는다. 이 구슬을 얻은 자는 독이 능히 상해하지 못하고 불이 능히 태우지 못한다. 혹 이는 제석이 가진 바인 금강이니 아수라와 싸울 때 부서져 염부제(閻浮提)에 떨어져 변해 이 구슬로 이루어진다. 또 이르되 과거 구원(久遠)의 불타의 사리(舍利)니 법이 이미 멸진(滅盡)하매 변해서 이 구슬로 이루어져 이익이 된다.

 

道流世間還有法過於自然否 師曰 有 曰 何法過得 師曰 能知自然者 曰 元氣是道不 師曰 元氣自元氣 道自道 曰 若如是者 則應有二也 師曰 知無兩人 又問 云何爲邪 云何爲正 師曰 心逐物爲邪 物從心爲正 源律師問 和尙修道 還用功否 師曰 用功 曰 如何用功 師曰 饑來喫飯困來卽眠 曰 一切人總如是 同師用功否 師曰 不同 曰 何故不同 師曰 他喫飯時不肯喫飯 百種須索 睡時不肯睡 千般計較 所以不同也 律師杜口 韞光大德問 禪師自知生處否 師曰 未曾死 何用論生 知生卽是無生法 無離生法有無生 祖師曰 當生卽不生 曰 不見性人 亦得如此否 師曰 自不見性 不是無性 何以故 見卽是性 無性不能見 識卽是性故名識性 了卽是性 喚作了性 能生萬法 喚作法性 亦名法身 馬鳴祖師云 所言法者 謂衆生心 若心生故 一切法生 若心無生 法無從生 亦無名字 迷人不知法身無象 應物現形 遂喚靑靑翠竹 總是法身 鬱鬱黃華 無非般若 黃華若是般若 般若卽同無情 翠竹若是法身 法身卽同草木 如人喫筍 應總喫法身也 如此之言 寧堪齒錄 對面迷佛 長劫希求 全體法中 迷而外覔 是以解道者 行住坐臥 無非是道 悟法者 縱橫自在 無非是法 光又問 太虛能生靈智否 眞心緣於善惡否 貪欲人是道否 執是執非人向後心通否 觸境生心人有定否 住寂寞人有慧否 懷傲物人有我否 執空執有人有智否 尋文取證人 苦行求佛人 離心求佛人 執心是佛人 此智稱道否 請禪師一一 爲說 師曰 太虛不生靈智 眞心不緣善惡 嗜欲深者機淺 是非交爭者未通 觸境生心者少定 寂寞忘機者慧沉 傲物高心者我壯 執空執有者皆愚 尋文取證者益滯 苦行求佛者俱迷 離心求佛者外道 執心是佛者爲魔 曰 若如是 畢竟無所有也 師曰 畢竟是 大德不是 畢竟無所有 光踊躍禮謝而去 問 儒釋道三敎同異如何 師曰 大量者用之卽同 小機者執之卽異 總從一性上起用 機見差別成三 迷悟由人 不在敎之同異也

道流; 猶云抱道者流 禪林中指道人禪流 流 品類也 等輩也 二指道家 此指二

世間; 世爲遷流之義 破壞之義 覆眞之義 間爲中之義 墮於世中之事物 謂之世間 又間隔之義 世之事物 個個間隔而爲界畔 謂之世間 卽與所謂世界相同 大要有二種 一有情世間 謂有生者 二器世間 國土也 [楞嚴經四 唯識述記一本]

元氣; 人或國家組織的生命力

饑來喫飯困來卽眠; 禪家提倡平常心是道的一種說法 隱喩不須刻意修鍊做作多事

無情; 無情識者 謂山川草木等

齒錄; 表說和記錄

 

도류(道流)가 있어 묻되 세간(世間)에 도리어 자연(自然)을 초과할 법이 있습니까. 사왈(師曰) 있다. 가로되 어떤 법이 초과함을 얻습니까. 사왈 능히 자연을 아는 자다. 가로되 원기(元氣)가 이 도입니까. 사왈 원기는 스스로 원기며 도는 스스로 도다. 가로되 만약 이와 같다면 곧 응당 둘이 있습니다. 사왈 지()는 양인(兩人)이 없다. 우문(又問) 무엇이(云何) ()가 되고 무엇이 정()이 됩니까. 사왈 마음이 사물을 쫓으면() ()가 되고 사물이 마음을 좇으면() ()이 된다. 원율사(源律師)가 묻되 화상은 수도하면서 도리어 공()을 씁니까. 사왈 공을 쓴다. 가로되 어떻게 공을 씁니까. 사왈 주리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곧 잔다(饑來喫飯困來卽眠). 가로되 일체인도 모두 이와 같으니 스님의 용공(用功; 공을 씀)과 같습니까. 사왈 같지 않다. 가로되 무슨 연고로 같지 않습니까. 사왈 그들은 밥을 먹을 때 끽반(喫飯; 밥을 먹음)을 즐기지() 않고 백 가지를 수색(須索; 索取)하고 잠 잘 때 잠을 즐기지 않고 천 가지를 계교(計校)하는지라 소이로 같지 않다. 율사가 입을 닫았다(杜口). 온광(韞光) 대덕(大德)이 묻되 선사는 생처(生處)를 스스로 아십니까. 사왈 일찍이 사()하지 않거늘 어찌 생()을 논함을 쓰겠는가. 생이 즉시(卽是) 무생법(無生法)임을 알아야 하나니 생법(生法)을 여의고 무생(無生)이 있지 않다. 조사(祖師; 마조를 가리킴)가 가로되 생을 당해 곧 불생(不生)이다. 가로되 견성(見性)하지 못한 사람도 또한 이와 같음을 얻습니까. 사왈 스스로 견성하지 못했음이지 이 무성(無性; 자성이 없음)이 아니다. 무슨 연고냐, ()이 즉시(卽是) ()이니 무성(無性)이면 능히 보지() 못한다. ()이 즉시 성()인 연고로 이름이 식성(識性)이며 요()가 즉시 성()인지라 요성(了性)이라고 불러 짓는다. 만법을 능히 내므로 법성(法性)이라고 불러 지으며 또한 이름이 법신(法身)이다. 마명조사(馬鳴祖師)가 이르되 말한 바 법이란 것은 이르자면 중생심(衆生心)이라 했다. 이에() 마음이 생하는 연고로 일체법이 생하나니 만약 마음이 생함이 없으면 법도 좇아서() 생함이 없고 또한 명자(名字)가 없다. 미인(迷人)은 법신(法身)이 무상(無象)이며 응물(應物)하여 현형(現形)하는 줄 알지 못해 드디어 이르되() 청청(靑靑)한 취죽(翠竹)이 모두 이 법신이며 울울(欝欝)한 황화(黃華)가 반야가 아님이 없다 라고 하지만 황화가 만약 이 반야라면 반야가 곧 무정(無情)과 같을 것이며 취죽이 만약 이 법신이라면 법신이 곧 초목과 같으리니 사람이 죽순()을 먹을 것 같으면 응당 모두() 법신을 먹어야 하리라. 이와 같은 말을 어찌() 가히() 치록(齒錄)하겠는가. 대면(對面)하여 미불(迷佛)해 장겁(長劫)에 희구(希求)하고 전체의 법중(法中)에 미()하여 밖으로 찾는다. 이런 까닭으로 도를 이해하는 자는 행주좌와(行住坐臥)에 이 도가 아님이 없고 법을 깨친 자는 종횡으로 자재(自在)하면서 이 법이 아님이 없다. 온광(韞光; )이 또 묻되 태허(太虛; 太虛空)가 능히 영지(靈智)를 산생(産生)합니까. 진심(眞心)이 선악을 반연(攀緣; )합니까. 탐욕인(貪欲人)이 이 도입니까. 집시집비(執是執非)하는 사람이 향후에 마음이 통달합니까. 촉경(觸境)하여 마음을 내는 사람이 정()함이 있습니까. 적막(寂寞)에 머무는 사람이 혜()가 있습니까. 오물(傲物)을 품은() 사람이 아()가 있습니까. 집공집유(執空執有)하는 사람이 지()가 있습니까. 심문(尋文; 문자를 찾다)하여 취증(取證)하는 사람, 고행하며 구불(求佛)하는 사람, 이심(離心; 마음을 여의다)하여 구불(求佛)하는 사람. 마음이 이 부처라고 집착하는 사람, 이 지()가 도에 칭합(稱合)합니까. 청컨대 선사가 하나하나 설하십시오. 사왈 태허(太虛)는 영지(靈智)를 산생하지 않고 진심은 선악을 반연하지 않고 기욕(嗜欲)이 깊은 자는 기()가 얕고 시비를 교쟁(交爭)하는 자는 통달하지 못하고 촉경(觸境)하여 마음을 내는 자는 정()이 적고 적막(寂寞)하게 망기(忘機)하는 자는 혜()가 침몰하고 오물(傲物)로 고심(高心)하는 자는 아()가 장대(壯大)하고 집공집유(執空執有)하는 자는 모두 어리석고 심문(尋文)하여 취증(取證)하는 자는 더욱() 막히고() 고행하며 구불(求佛)하는 자는 모두() ()하고 이심(離心)하여 구불하는 자는 외도(外道)며 마음이 이 부처라고 집착하는 자는 마()가 된다. 가로되 만약 이와 같다면 필경 무소유(無所有)입니다. 사왈 필경은 옳지만() 대덕은 옳지 않나니 필경 무소유다. 온광이 용약(踊躍)하며 예사(禮謝)하고 떠났다. 묻되 유석도(儒釋道) 3()의 동이(同異)가 어떠합니까. 사왈 대량자(大量者)는 이를 쓰매 곧 같지만 소기자(小機者)는 이에 집착해 곧 다르다. 모두 일성상(一性上)으로 좇아 기용(起用)하나니 기견(機見)의 차별로 셋을 이룬다. 미오(迷悟)는 사람을 말미암고 교()의 동이(同異)에 있지 않다.

道流; 1. 포도(抱道)한 자의 무리라고 이름과 같음. 선림 중에선 도인선류(道人禪流)를 가리킴. ()는 품류임. 등배(等輩). 2. 도가()를 가리킴. 여기에선 2를 가리킴.

世間; ()는 천류(遷流)의 뜻이며 파괴의 뜻이며 부진(覆眞)의 뜻이며 간()은 중()의 뜻이 됨. 세중(世中)의 사물(事物)에 떨어짐을 이를 일러 세간이라 함. 또 간격(間隔)의 뜻이니 세()의 사물은 개개(個個)가 간격하여 계반(界畔)이 되며 이를 일러 세간이라 함. 곧 이른 바 세계(世界)와 서로 같나니 대요(大要)2종이 있음. 1은 유정세간(有情世間)이니 이르자면 생자(生者)가 있음이며 2는 기세간(器世間)이니 국토임 [릉엄경4. 유식술기1].

元氣; 사람이나 혹 국가의 조직적(組織的)인 생명력.

饑來喫飯困來卽眠; 선가에서 제창하는 평상심이 이 도라는 일종의 설법이니 뜻에 새기면서 수련하거나 많은 일을 지음이 쓰이지 않는다 함을 은유함.

無情; 정식(情識)이 없는 것이니 이르자면 산천초목 등.

齒錄; 표설(表說)과 기록.

 

洪州百丈山惟政禪師

有老宿見日影透窻 問師 爲復窻就日 日就窻 師曰 長老房中有客 歸去好 師問南泉 諸方善知識 還有不說似人底法也無 曰 有 師曰 作麽生 曰 不是心 不是佛 不是物 師曰 恁麽則說似人了也 曰 某甲卽恁麽 和尙作麽生 師曰 我又不是善知識 爭知有說不說底法 曰 某甲不會 請和尙說 師曰 我太煞與汝說了也 僧問 如何是佛佛道齊 師曰 定也 師因入京 路逢官人 喫飯 忽見驢鳴 官人召曰 頭陀 師擧頭 官人却指驢 師却指官人法眼別云 但作驢鳴

 

홍주(洪州) 백장산(百丈山) 유정선사(惟政禪師)

어떤 노숙(老宿)이 일영(日影)이 투창(透窓)함을 보고 스님에게 물어 가로되 다시 창()이 해에 나아감()이 됩니까, 해가 창에 나아감입니까. 사왈(師曰) 장로의 방중(房中)에 객이 있으니 돌아감이 좋겠습니다. 스님이 남천(南泉)에게 묻되 제방의 선지식이 도리어 사람에게 설해 주지(說似) 아니한 법이 있는가 또는 없는가. 남천이 가로되 있다. 사왈 무엇인가(作麽生). 가로되 이 마음이 아니며(不是心) 이 부처가 아니며(不是佛) 이 물건이 아니다. 사왈 이러하다면(恁麽) 곧 사람에게 설해 주었다. 가로되 모갑은 곧 이러하거니와(恁麽) 화상은 어떠한가. 사왈 나는 또 이 선지식이 아니거늘 설()과 불설(不說)의 법이 있는 줄 어찌 알겠는가. 가로되 모갑이 알지 못하니 화상의 설을 청한다. 가로되 내가 태쇄(大煞; 너무 심하게) 너를 위해 설했다. 승문(僧問) 무엇이 이 불불(佛佛)의 도()가 제등(齊等)함입니까. 사왈 정()했다. 스님이 입경(入京)하다 길에서 관인(官人)을 만남으로 인해 끽반(喫飯)하는데 홀연히 나귀가 우는 것을 보았다. 관인이 불러 가로되 두타(頭陀). 스님이 머리를 들자 관인이 도리어 나귀를 가리켰고 스님이 도리어 관인을 가리켰다法眼別云 단지 나귀 울음을 지었겠다.

 

洪州泐潭法會禪師

問馬祖 如何是祖師西來意 祖曰 低聲 近前來 向汝道 師便近前 祖打一摑曰 六耳不同謀 且去 來日來 師至來日 獨入法堂曰 請和尙道 祖曰 且去 待老漢上堂出來問 與汝證明 師忽有省 遂曰 謝大衆證明 乃繞法堂一匝 便去

六耳不同謀; 本謂三人在場 不便密謀 用作公案機語 則謂禪旨幽密 非言句所能傳示 學人切勿尋言逐句

老漢; 對禪師的稱呼 或禪師自稱

 

홍주(洪州) 늑담(泐潭) 법회선사(法會禪師)

마조(馬祖)에게 묻되 무엇이 이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입니까. 조왈(祖曰) 소리를 낮추고 앞으로 가까이 오너라. 너를 향해 말하겠다. 스님이 바로 앞으로 다가갔다. 마조가 때려 한 번 후려갈기고() 가로되 육이부동모(六耳不同謀). 다만 가고 내일 오너라. 스님이 내일에 이르자 홀로 법당에 들어가 가로되 화상의 말씀을 청합니다. 조왈(祖曰) 다만 가고(且去) 노한(老漢)이 상당(上堂)함을 기다렸다가 나와서(出來) 물으면 너에게 증명해 주겠다. 스님이 홀연히 살핌이 있었다. 드디어 가로되 대중의 증명에 감사합니다. 이에 법당을 한 바퀴 돌고 바로 떠났다.

六耳不同謀; 본래는 3인이 장소에 있으면 밀모(密謀)하기에 불편함을 말함이나 공안의 기어(機語)로 사용해 지음. 곧 이르기를 선지는 유밀(幽密)하여 언구로 능히 전시(傳示)할 바가 아니므로 학인은 절실하게 심언축구(尋言逐句)하지 말라 함임.

老漢; 선사에 대한 칭호(稱呼). 혹 선사의 자칭.

 

池州杉山智堅禪師

初與歸宗南泉行脚時 路逢一虎 各從虎邊過了 泉問歸宗 適來見虎 似箇甚麽 宗曰 似箇猫兒 宗却問師 師曰 似箇狗子 又問南泉 泉曰 我見是箇大虫 師喫飯次 南泉収生飯 乃曰 生聻 師曰 無生 泉曰 無生猶是末 泉行數步 師召曰 長老 泉回頭曰 作麽 師曰 莫道是末 普請擇蕨次 南泉拈起一莖曰 這箇大好供養 師曰 非但這箇 百味珍羞 他亦不顧 泉曰 雖然如是 箇箇須甞過始得玄覺云 是相見語 不是相見語 僧問 如何是本來身 師曰 擧世無相似

池州; 今安徽貴池 安徽省轄市

行脚; 又作游方 遊方 遊行 與禪宗參禪學道之雲水同義

大虫; 虎也 虫 同蟲 對一切動物的通稱 如大蟲長蟲

生飯; 又曰出飯 律有出衆生食之語 於食前爲衆生出少許食而施與之 持戒者之一法式也 略曰出飯 亦曰生飯 按涅槃經十六謂 佛嘗遊曠野 有一鬼名曠野 食血肉 日殺一人 不受佛之敎化 佛爲大力之鬼神 鬼怖伏 佛還本身 使受不殺生戒 命以後從佛弟子受飯食 按毘奈耶雜事三十一 佛化鬼子母曰 於贍部洲所有我聲聞弟子 每於食次出衆生食 竝於行末設食一盤 呼汝字竝諸兒子 皆令飽食永無饑苦 行事鈔下計請設則篇 出衆生食 或在食前 唱等得已出之 或在食後 經論無文 隨情安置

百味; 祖庭事苑六 百味 智論(智度論九十二)云 百味 有人言 能以百種供養 是名百味 有人言 餠種數五百 其味有百 是名百味 有人言 百種藥草作歡喜丸 是名百味 有人言 飯食羮餠總有百味 有人言 飮食種種備足 故稱爲百味

 

(池州) 삼산(杉山) 지견선사(智堅禪師)

처음 귀종(歸宗; 智常)ㆍ남천(南泉; 普願)과 더불어 행각(行脚)할 때 길에서 1()를 만났는데 각자 호변(虎邊)으로 좇아 지나갔다. 남천이 귀종(歸宗)에게 묻되 아까 범을 보았거니와 저() 무엇(什麽)과 흡사한가. 종왈(宗曰) 저 묘아(猫兒; 고양이. 는 조사)와 흡사하다. 귀종이 도리어 스님에게 물었다. 사왈 저 구자(狗子; . 는 조사)와 흡사하다. 또 남천(南泉)에게 물었다. 천왈(泉曰) 내가 보기론 이(是箇; 는 조사) 대충(大虫)이다. 스님이 밥을 먹던 차에 남천이 생반(生飯)을 거두고 이에 가로되 생인가(). 사왈 무생(無生)이다. 천왈(泉曰) 무생이라도 오히려 이는 말()이다. 남천이 몇 걸음 가자 스님이 불러 가로되 장로(長老), 남천이 머리를 돌리고 가로되 무엇인가(作麽). 사왈 이 말()이라고 말하지 말아라. 보청(普請)하여 고사리()를 가렸다(). 남천이 한 줄기를 집어 일으키고 가로되 이것(這箇)은 공양하기에 매우 좋다(大好). 사왈 단지 이것(這箇)만이 아니라 백미(百味)의 진수(珍羞)라도 그는 또한 돌아보지 않는다. 천왈(泉曰) 비록 그러하여 이와 같지만 개개(箇箇)가 모름지기 그것을 맛보아야(甞過; 는 조사) 비로소 옳다(始得)玄覺(行言)이 이르되 이 相見語인가 이 相見語가 아닌가. 승문(僧問) 무엇이 이 본래신(本來身)입니까. 사왈 거세(擧世; 온 세상)에 상사(相似)한 게 없다.

池州; 지금의 안휘 귀지(貴池)니 안휘성할시(安徽省轄市).

行脚; 또 유방(游方)ㆍ유방(遊方)ㆍ유행(遊行)으로 지음. 선종의 참선학도하는 운수(雲水)와 같은 뜻.

大虫; . ()은 충()과 같음. 일체의 동물에 대한 통칭이니 대충(大蟲)ㆍ장충(長蟲) 같은 것.

生飯; 또 가로되 출반(出飯)이니 율에 출중생식(出衆生食)이란 말이 있음. 식전에 중생을 위해 소허(少許; 소량)의 음식을 내어 그에게 시여(施與)하나니 지계(持戒)하는 자의 한 법식임. 간략히 가로되 출반이며 또한 가로되 생반임. 열반경16을 안험컨대 이르기를 불타가 일찍이 광야(曠野)에 노닐었다. 1()가 있었으니 이름이 광야며 혈육(血肉)을 먹었는데 날마다 한 사람을 죽였고 불타의 교화를 받지 않았다. 불타가 대력(大力)의 귀신을 짓자 귀()가 포복(怖伏)했다. 불타가 본신(本身)으로 돌아가 불살생계를 받게 했고 명해 이후로는 불제자로부터 반식(飯食)을 받게 했다. 비나야잡사31을 안험컨대 불타가 귀자모(鬼子母)를 교화하며 가로되 섬부주(贍部洲)에 있는 바 나의 성문제자(聲聞弟子)가 매번 식차(食次)에 중생식(衆生食)을 내고 아울러 행말(行末)에 한 소반의 음식을 베풀고 너의 자()와 아울러 모든 아자(兒子)를 불러 모두 포식(飽食)하게 해 영원히 기고(饑苦)가 없게 하리라. 행사초하 계청설칙편(計請設則篇). 중생식(衆生食)을 냄음 혹 식전에 있으면 창() 등을 얻은 다음 이를 내며 혹은 식후에 있다. 경론에 글이 없으며 수정(隨情)하여 안치한다.

百味; 조정사원6. 백미(百味) 지론(지도론92)에 이르되 백미(百味)를 어떤 사람은 말하되 능히 백종으로써 공양하므로 이 이름이 백미다. 어떤 사람은 말하되 떡 종류의 수가 5백이며 그 맛이 백이 있으므로 이 이름이 백미다. 어떤 사람은 말하되 백종의 약초로 환희환(歡喜丸)을 짓는지라 이 이름이 백미다. 어떤 사람은 말하되 반식(飯食)과 국과 떡에 모두 백미가 있다.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음식을 갖가지 비족(備足)했으므로 고로 일컬어 백미라 한다.

 

洪州泐潭惟建禪師

一日在法堂後坐禪 馬祖見 乃吹師耳 兩吹師起 見是祖 却復入定 祖歸方丈 令侍者持一椀茶與師 師不顧 便自歸堂

 

홍주(洪州) 늑담(泐潭) 유건선사(惟建禪師)

어느 날 마조의 법당 뒤에 있으면서 좌선했다. 마조가 보고 이에 스님의 귀에 불었다(). 두 번 불자 스님이 정()에서 일어났다. 이 마조임을 보고는 도리어 다시 입정(入定)했다. 마조가 방장(方丈)으로 돌아가 시자를 시켜 한 사발()의 차()를 가져다 스님에게 주게 했다. 스님이 돌아보지 않고 곧 스스로 귀당(歸堂)했다.

 

澧州茗谿道行禪師

甞曰 吾有大病 非世所醫後僧問曹山 古人曰 吾有大病 非世所醫 未審是甚麽病 山曰 攢簇不得底病 曰 一切衆生還有此病也無 山曰 人人盡有 曰 和尙還有此病也無 山曰 正覔起處不得 曰 一切衆生 爲甚麽不病 山曰 一切衆生若病 卽非衆生 曰 未審諸佛還有此病也無 山曰 有 曰 旣有爲甚麽不病 山曰 爲伊惺惺僧問 如何脩行 師曰 好箇阿師莫客作 曰 畢竟如何 師曰 安置卽不堪 問 如何是正修行路 師曰 涅槃後有 曰 如何是涅槃後有 師曰 不洗面 曰 學人不會 師曰 無面得洗

澧州; 今湖南澧縣 隸屬於湖南省常德市 因澧水貫穿全境而得名 梁敬帝紹泰元年(555) 始置澧州 [百度百科]

吾有大病; 道德經寵辱章第十三 吾所以有大患者 爲吾有身 及吾無身 吾有何患

攢簇; 卽聚集到一處

客作; 本意爲做傭夫 常用作斥責語 隱含不見自我向外追逐之義 法華經二信解品 卽時長者 更與作字 名之爲兒 爾時窮子 雖欣此遇 猶故自謂客作賤人 由是之故 於二十年中 常令除糞

 

예주(澧州) 명계도행(茗谿道行) 선사

일찍이 가로되 나에게 대병이 있나니(吾有大病) 세간에서 치료할 바가 아니다후에 중이 조산(曹山; 本寂)에게 묻되 고인이 가로되 나에게 대병이 있어 세간에서 치료할 바가 아니라 했습니다. 미심하오니 이 무슨 병입니까. 山曰 찬족(攢簇; 모으다)하여 얻지 못하는 병이다. 가로되 일체중생이 도리어 이 병이 있습니까 또는 없습니까. 山曰 사람마다 모두 있다. 가로되 화상은 도리어 이 병이 있습니까 또는 없습니까. 山曰 바로() 기처(起處)를 찾음을 얻지 못한다. 가로되 일체중생이 무엇 때문에 병으로 여기지 않습니까(不病). 山曰 일체중생이 만약 병으로 여기면 곧 중생이 아니다. 가로되 미심하오니 제불은 도리이 이 병이 있습니까 또는 없습니까. 山曰 있다. 가로되 이미 있다면 무엇 때문에 병으로 여기지 않습니까. 山曰 ()가 성성(惺惺)하기 때문이다. 승문(僧問) 어떻게 수행해야 합니까. 사왈 호개(好箇; 는 조사)의 아사(阿師)가 객작(客作)하지 말아라. 가로되 필경 어떠합니까. 사운 안치(安置)함을 곧 감내하지 못한다. 묻되 무엇이 이 바른 수행로(修行路)입니까. 사왈 열반의 뒤에 있다(涅槃後有). 가로되 무엇이 이 열반후유(涅槃後有)입니까. 사왈 세면(洗面)하지 못한다. 가로되 학인이 알지 못하겠습니다. 사왈 무면(無面)이라야 씻음을 얻는다.

澧州; 지금의 호남 예현(澧縣)이니 호남성 상덕시(常德市)에 예속됨. 예수(澧水)가 전경(全境)을 관천(貫穿)함으로 인해 이름을 얻었음. 양 경제 소태 원년(555) 처음으로 예주를 설치했음 [백도백과].

吾有大病; 도덕경 총욕장 제13. 나에게 대환(大患)이 있는 소이(所以)란 것은 나에게 몸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에게 몸이 없다면 내가 무슨 우환이 있으리오.

攢簇; 곧 취집(聚集)하여 한 곳에 이름.

客作; 본래 뜻은 용부(傭夫; 고용살이 하는 남자) 노릇을 함이 되지만 척책(斥責; 責罵)하는 말로 상용함. 자아를 보지 못하고 밖을 향해 쫓아감의 뜻을 은밀히 함유했음. 법화경2 신해품. 즉시 장자가 다시 자()를 지어 주면서 이름해 아()라 했다. 이때 궁자(窮子)가 비록 이런 우대를 기뻐했지만 오히려 예전처럼 스스로 이르기를 객작(客作)의 천한 사람이라 했다. 이를 말미암은 고로 20년 중에 늘 제분(除糞)하게 했다.

 

撫州石鞏慧藏禪師

本以弋獵爲務 惡見沙門 因逐鹿從馬祖庵前過 祖乃逆之 師遂問 還見鹿過否 祖曰 汝是何人 曰 獵者 祖曰 汝解射否 曰 解射 祖曰 汝一箭射幾箇 曰 一箭射一箇 祖曰 汝不解射 曰 和尙解射否 祖曰 解射 曰 一箭射幾箇 祖曰 一箭射一羣 曰 彼此生命 何用射他一羣 祖曰 汝旣知如是 何不自射 曰 若敎某甲自射 直是無下手處 祖曰 這漢曠劫無明煩惱 今日頓息 師擲下弓箭 投祖出家 一日 在厨作務次 祖問 作甚麽 曰 牧牛 祖曰 作麽生牧 曰 一回入草去 驀鼻拽將回 祖曰 子眞牧牛 師便休

撫州; 今江西省撫州 此地有曹山 唐代本寂禪師住此山 大揚洞山宗旨

弋獵; 射獵 狩獵

無明; 謂闇鈍之心 無照了諸法事理之明 卽癡之異名也

牧牛; 遺敎經曰 汝等比丘 已能住戒 當制五根 勿令放逸入於五欲 譬如牧牛之人 執杖視之 不令縱逸犯人苗稼

 

무주(撫州) 석공혜장(石鞏慧藏) 선사

본래 익렵(弋獵; 射獵)으로써 업무를 삼았고 사문(沙門)을 보기를 싫어했다. 사슴(鹿)을 쫓아 마조암(馬祖庵) 앞을 좇아 지나감으로 인해 마조가 이에 그를 맞이했다(). 스님이 드디어 묻되 도리어 사슴이 지나감을 보셨습니까. 조왈(祖曰) 너는 이 어떤 사람이냐. 가로되 엽자(獵者)입니다. 조왈(祖曰) 너는 쏠 줄 아느냐(解射). 가로되 쏠 줄 압니다. 조왈(祖曰) 너는 한 화살로 몇 개를 쏘느냐. 가로되 한 화살로 한 개를 쏩니다. 조왈(祖曰) 너는 쏠 줄을 알지 못한다. 가로되 화상은 쏠 줄 아십니까. 조왈(祖曰) 쏠 줄 안다. 가로되 한 화살로 몇 개를 쏩니까. 조왈(祖曰) 한 화살로 한 무리를 쏜다. 가로되 피차 생명이거늘 어찌 저 한 무리를 쏨을 쓰겠습니까. 조왈(祖曰) 네가 이미 이와 같음을 안다면 왜 스스로를 쏘지 않느냐. 가로되 만약 모갑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쏘라 하신다면 바로 이 하수(下手; 着手)할 곳이 없습니다. 조왈(祖曰) 이 자(這漢)가 광겁(曠劫)무명(無明)번뇌가 금일 문득 쉬어졌다. 스님이 활과 화살을 던져 떨어뜨리고 마조에게 투신해 출가했다. 어느 날 주방()에 있으면서 작무(作務)하던 차에 마조가 묻되 무엇 하느냐. 가로되 목우(牧牛)합니다. 조왈(祖曰) 어떻게 치느냐(). 가르되 1회 입초(入草)하여 가면 곧장() 코를 끌어 가지고 돌아옵니다. 조왈(祖曰) 자네는 참으로 목우(牧牛)하는구나. 스님이 바로 쉬었다.

撫州; 지금의 강서성 무주. 이 땅에 조산(曹山)이 있으며 당대 본적선사가 이 산에 거주하며 동산종지(洞山宗旨)를 크게 드날렸음.

弋獵; 사렵(射獵). 수렵(狩獵; 사냥).

無明; 이르자면 암둔(闇鈍)한 마음임. 제법의 사리를 비추는 밝음이 없음이니 곧 치()의 다른 이름.

牧牛; 유교경(遺敎經)에 가로되 너희 등 비구가 이미 능히 계에 머물렀으니 마땅히 5()을 억제해서, 방일하여 5()에 들게 하지 말아라. 비유컨대 소를 치는 사람이 지팡이를 가지고 이를 지켜보면서, 놓쳐 사람들의 묘가(苗稼; 곡식)을 범하지 않게 함과 같다.

 

師住後常以弓箭接機載三平章 師問西堂 汝還解捉得虛空麽 堂曰 捉得 師曰 作麽生捉 堂以手撮虛空 師曰 汝不解捉 堂却問 師兄作麽生捉 師把西堂鼻孔拽 堂作忍痛聲曰 太煞拽人鼻孔 直欲脫去 師曰 直須恁麽捉虛空始得 衆參次 師曰 適來底甚麽處去也 有僧曰 在 師曰 在甚麽處 僧彈指一聲 問 如何免得生死 師曰 用免作甚麽 曰 如何免得 師曰 這底不生死

接機; 接引來機

大煞; 猶太殺 副詞 表示程度過分 亦作忒殺 太 表示程度過分 相當于甚 殺 所八切 所拜切 表示程度深

始得; 得 適合 適當 正好 可

 

스님이 주후(住後)에 늘 궁전(弓箭)으로써 접기(接機)했다三平章에 실렸다. 스님이 서당(西堂; 智藏)에게 묻되 네가 도리어 허공을 착득(捉得; 은 조사)할 줄 아느냐. 서당이 가로되 착득(捉得)합니다. 사왈 어떻게 잡느냐(). 서당이 손으로써 허공을 거머쥐었다(). 사왈 너는 잡을 줄 알지 못한다. 서당이 도리어 묻되 사형(師兄)은 어떻게 잡습니까. 스님이 서당의 콧구멍을 잡아 끌었다. 서당이 아픔을 참는 소리를 짓고 가로되 너무 심하게(太煞) 사람의 콧구멍을 끌어 바로 빠져나가려고 합니다((直欲脫去). 사왈 바로 모름지기 이렇게 허공을 잡아야 비로소 옳다(始得). 대중이 참차(參次)에 사왈 적래지(適來底; 조금 전의 것)는 어느 곳(甚麽處)으로 갔느냐. 어떤 중이 가로되 있습니다(). 사왈 어느 곳에 있느냐. 중이 한 소리(一聲) 탄지(彈指)했다. 묻되 어찌해야 생사를 면함을 얻겠습니까. 사왈 면함을 써서 무엇하리오. 가로되 어찌해야 면함을 얻습니까. 사왈 저지(這底; 이것)는 생사가 아니다.

接機; 내기(來機)를 접인(接引).

太煞; 태쇄(太殺)와 같음. 부사니 정도가 과분함을 표시함. 또 특쇄(忒殺)로 지음. ()는 정도가 과분함을 표시하며 심()에 상당함. (; )은 소팔절(所八切; )ㆍ소배절(所拜切; )이니 정도의 깊이를 표시함.

始得; ()은 적합. 적당. 정호(正好). ().

 

江西北蘭讓禪師

湖塘亮長老問 承聞師兄畫得先師眞 暫請瞻禮 師以兩手擘胷開示之 亮便禮拜 師曰 莫禮 莫禮 亮曰 師兄錯也 某甲不禮師兄 師曰 汝禮先師眞那 亮曰 因甚麽敎莫禮 師曰 何曾錯

承聞; 聽聞 聽說

先師; 已故的老師

 

강서 북란양(北蘭讓) 선사

호당량(湖塘亮) 장로가 묻되 승문(承聞; 聽聞)컨대 사형이 선사(先師)의 진(; 肖像)을 그림을 얻었다 하니 잠시 첨례(瞻禮)를 청합니다. 스님이 양손으로써 가슴을 헤쳐() 열어 보였다. ()이 바로 예배했다. 사왈 예배하지 말아라, 예배하지 말아라. 량왈(亮曰) 사형이 틀렸습니다, 모갑은 사형에게 예배하지 않았습니다. 사왈 너는 선사(先師)의 진()에 예배했느냐. 량왈(亮曰) 무엇 때문에 예배하지 말게 하셨습니까. 사왈 어찌 일찍이 틀렸겠는가.

承聞; 청문(聽聞; 듣다). 청설(聽說; 말함을 듣다).

先師; 이미 고인이 된 노사(老師; 스승).

 

袁州南源道明禪師

上堂 快馬一鞭快人一言 有事何不出頭來 無事各自珍重 僧問 一言作麽生 師乃吐舌云 待我有廣長舌相 卽向汝道 洞山參 方上法堂 師曰 已相見了也 山便下去 明日卻上問曰 昨日已蒙和尙慈悲 不知甚麽處是與某甲已相見處 師曰 心心無間斷 流入於性海 山曰 幾合放過 山辭 師曰 多學佛法 廣作利益 山曰 多學佛法卽不問 如何是廣作利益 師曰 一物莫違 僧問 如何是佛 師曰 不可道你是也

快馬一鞭快人一言; 原指爲人豪快 禪錄用例多形容禪機迅疾 又作快人一言快馬一鞭

廣長舌相; 佛三十二相之一 略稱廣長舌 諸佛之舌廣而長 柔軟紅薄 能覆面至髮際 如赤銅色 此相具有兩種表徵 一語必眞實 二辯說無窮 非餘人所能超越者 大智度論八 若人舌能覆鼻 言無虛妄 何況乃至髮際 我心信佛必不妄語 又按中阿含四十一梵摩經 增一阿含經八 太子瑞應本起經上等 除諸佛之外 轉輪聖王亦具有此相

放過; 同放行 猶放棄 此指二

 

원주(袁州) 남원도명(南源道明) 선사

상당(上堂) 쾌마는 일편이며 쾌인은 일언이다(快馬一鞭快人一言). 일이 있다면 왜 출두(出頭)하여 오지 않으며 일이 없다면 각자 진중(珍重)하라. 중이 묻되 일언(一言)은 무엇입니까(作麽生). 스님이 이에 토설(吐舌)하고 이르되 나에게 광장설상(廣長舌相)이 있음을 기다렸다가 곧 너를 향해 말하겠다. 동산(洞山; 良价)이 참()하여 바야흐로 법당에 오르자 사왈 이미 상간(相看)해 마쳤다. 동산이 바로 아래로 내려갔다. 명일에 도리어 올라가 물어 가로되 작일(昨日) 이미 화상의 자비를 입었습니다만() 어느(甚麽) 곳이 이 모갑과 더불어 이미 상간(相看)한 곳인 줄 알지 못하겠습니다. 사왈 심심(心心)이 간단(間斷) 없이 성해(性海)로 유입(流入)한다. 동산이 가로되 거의 합당히 방과(放過)할 뻔했습니다. 동산이 고별하자 사왈 불법을 많이 배워 광대하게 이익을 지어라. 동산이 가로되 불법을 많이 배움은 곧 묻지 않습니다. 무엇이 이 광대하게 이익을 지음입니까. 사왈 한 물건도 거스르지 않음이다. 승문(僧問) 무엇이 이 부처입니까. 사왈 네가 이것이라고 말함은 옳지 못하다.

快馬一鞭快人一言; 원래는 위인(爲人)이 호쾌(豪快)함을 가리키나 선록의 용례는 다분히 선기(禪機)의 신질(迅疾)을 형용함. 또 쾌인일언쾌마일편으로 지음.

廣長舌相; 부처의 32상의 하나. 약칭이 광장설임. 제불의 혀는 넓고 길며 유연하고 붉고 얇으며 능히 얼굴을 덮되 머리카락 가에 이르며 붉은 구리 색과 같음. 이 상()은 두 가지 표징(表徵; 징표)을 갖추어 있음. 1은 언어가 반드시 진실하고 2는 변설이 무궁하여 여타의 사람이 능히 초월할 바가 아닌 것임. 대지도론8 어떤 사람이 혀가 능히 코를 덮으면 언어에 허망이 없거늘 어찌 하물며 이에 머리카락 가에 이름이겠는가. 나의 마음으로 부처는 반드시 망어를 하지 않음을 믿는다. 또 중아함41범마경ㆍ증일아함경8ㆍ태자서응본기경상 등을 안험하니 제불을 제한 외에 전륜성왕도 또한 이 상을 갖추고 있음.

放過; 1 방행(放行)과 같음. 2. 방기(放棄)와 같음. 여기에선 2를 가리킴.

 

忻州酈村自滿禪師

上堂 古今不異 法爾如然 更復何也 雖然如此 這箇事大有人罔措在 僧問 不落古今 請師直道 師曰 情知汝罔措 僧欲進語 師曰 將謂老僧落伊古今 曰 如何卽是 師曰 魚騰碧漢 階級難飛 曰 如何免得此過 師曰 若是龍形 誰論高下 僧禮拜 師曰 苦哉 屈哉 誰人似我 上堂 除却日明夜暗 更說甚麽卽得 珍重 問 如何是無諍之句 師曰 喧天動地

忻州; 今山西省忻州

法爾; 與自爾 法然 天然 自然同 不假他之造作 其法自然也 如火之熱 水之濕也

大有人; 形容某一種人爲數不少

情知; 料到 思料

碧漢; 碧天銀漢的合稱 卽天空

喧天動地; 形容聲勢非常浩大 或巨大而徹底的變化

 

흔주(忻州) 역촌자만(酈村自滿) 선사

상당(上堂) 고금(古今)이 다르지 않아 법이(法爾) 여연(如然)하거늘 도리어() 다시 무엇이겠는가. 비록 그러하여 이와 같지만 저개사(這箇事; 이 일)를 대유인(大有人)이 망조(罔措)하여 있다. 승문(僧問) 고금에 떨어지지 않고 청컨대 스님이 바로() 말하십시오. 사왈 정지(情知)컨대 네가 망조(罔措)했다. 중이 진어(進語; 말을 진행)하려 하자 사왈 다만() 이르노니 노승이 저() 고금에 떨어졌다. 가로되 어찌해야 곧 옳습니까. 사왈 물고기가 벽한(碧漢)으로 뛰어올라도() 계급(階級; 계단. 層階)을 날기 어렵다. 가로되 어찌해야 곧 이 허물()을 면함을 얻겠습니까. 사왈 만약 이 용형(龍形)이라면 누가 고하(高下)를 논하겠는가. 중이 예배했다. 사왈 고재(苦哉)로다, 굴재(屈哉; 屈辱스러움)로다, 어떤 사람(誰人)이 나와 흡사하겠는가. 상당(上堂) 일명야암(日明夜暗)을 제해버리고 다시 무엇을 설해야 곧 옳겠는가(). 진중(珍重)하라. 묻되 무엇이 이 무쟁지구(無諍之句)입니까. 사왈 훤천동지(喧天動地)한다.

忻州; 지금의 산서성 흔주.

法爾; 자이(自爾)ㆍ법연(法然)ㆍ천연ㆍ자연과 같음. 다른 조작을 빌리지 않음이니 그 법이 자연임. 불의 뜨거움과 물의 축축함과 같음.

大有人; () 일종(一種)의 사람이 수가 됨이 적지 않음을 형용함.

情知; 요도(料到; 예상하다. 짐작하다). 사료(思料).

碧漢; 벽천(碧天)과 은한(銀漢)의 합칭. 곧 천공(天空; 하늘. 공중).

喧天動地; 성세(聲勢)가 비상(非常)으로 호대(浩大)하거나 혹 거대하면서 철저한 변화를 형용함.

 

朗州中邑洪恩禪師

每見僧來 拍口作和和聲 仰山謝戒 師亦拍口作和和聲 仰從西過東 師又拍口作和和聲 仰從東過西 師又拍口作和和聲 仰當中而立 然後謝戒 師曰 甚麽處得此三昧 仰曰 於曹谿印子上脫來 師曰 汝道曹谿用此三昧接甚麽人 仰曰 接一宿覺 仰曰 和尙甚處得此三昧 師曰 我於馬大師處得此三昧 仰問 如何得見佛性義 師曰 我與汝說箇譬喻 如一室有六窻 內有一獼猴 外有獼猴從東邊喚猩猩 猩猩卽應 如是六窻俱喚俱應 仰山禮謝起曰 適蒙和尙譬喻 無不了知 更有一事 祇如內獼猴睡著 外獼猴欲與相見 又且如何 師下繩牀 執仰山手作舞曰 猩猩與汝相見了 譬如蟭螟蟲 在蚊子眼睫上作窠 向十字街頭呌云 土曠人稀 相逢者少雲居錫云 中邑當時若不得仰山這一句語 何處有中邑也 崇壽稠云 還有人定得此道理麽 若定不得 只是箇弄精魂脚手 佛性義在甚麽處 玄覺云 若不是仰山 爭得見中邑 且道甚麽處是仰山得見中邑處

朗州; 隋改嵩州置朗州 治武陵 卽今湖南省常德市 [百度百科]

和和; 象聲詞 和 喜悅 唐孟郊 擇友 雖笑未必和 雖哭未必戚 又聲音相應 說文 咊 相應也 玉篇 咊爲和

謝戒; 沙彌得度受戒後 至戒師處致拜謝禮 稱爲謝戒

一宿覺; 唐代僧人玄覺 赴曹溪參謁六祖慧能 初次見面 應對契合禪旨 六祖稱嘆善哉善哉 少留一宿而辭別 當時稱爲一宿覺 [五燈會元二 六祖壇經 傳燈錄五]

猩猩; 獸名 指猿類動物 玉篇 猩 猩猩 如狗 面似人也 廣韻 猩 猩猩 能言 似猿 聲如小兒也 呂氏春秋本味 肉之美者 猩猩之脣 高誘注 猩猩 獸名也 人面狗軀而長尾

又且; 猶而且 表示進一層意思的連詞

; 又作坐床 坐禪床 爲繩製之座具 比丘坐臥用之

 

낭주(朗州) 중읍홍은(中邑洪恩) 선사

매번 중이 옴을 보면 입을 치며(拍口) 화화성(和和)을 지었다. 앙산(仰山)이 사계(謝戒)하자 스님이 또한 입을 치며 화화성(和和聲)을 지었다. 앙산이 서쪽으로 좇아 동쪽에 이르렀다. 스님이 또 입을 치며 화화성(和和聲)을 지었다. 앙산이 동쪽으로 좇아 서쪽에 이르렀다. 스님이 또 입을 치며 화화성(和和聲)을 지었다. 앙산이 당중(當中; 中間)에 선 연후에 사계(謝戒)했다. 사왈 어느 곳(甚麽處)에서 이 삼매를 얻었는가. 앙왈(仰曰) 조계(曹谿) 인자상(印子上; 는 조사. 은 방면을 표시)에서 빠져나왔습니다(脫來). 사왈 네가 말하라, 조계(曹谿; 혜능)가 이 삼매를 써서 어떤 사람을 접인(接引)했는가. 앙왈(仰曰) 일숙각(一宿覺; 玄覺)을 접인했습니다. 앙왈(仰曰) 화상은 어느 곳에서 이 삼매를 얻었습니까. 사왈 나는 마대사(馬大師)의 처소에서 이 삼매를 얻었다. 앙산이 묻되 어찌해야 불성(佛性)의 뜻을 득견(得見)합니까. 사왈 내가 너에게 저() 비유(譬喻)를 설해 주겠다. 예컨대() 1()6()이 있는데 안에 1미후(獼猴; 원숭이)가 있다. 밖에 미후(獼猴)가 있어 동변(東邊)으로 좇아 성성(猩猩)아 하고 부르면 성성이 곧 응한다. 이와 같이 6창에서 모두 부르면 모두 응한다. 앙산이 예사(禮謝)하고 일어나 가로되 마침() 화상의 비유를 입어() 요지(了知)하지 않음이 없습니다만 다시 1()가 있으니 지여(祇如; 例擧를 표시) 안의 미후가 잠들었는데 밖의 미후가 더불어 상견하고자 하면 우차(又且) 어떻습니까. 스님이 승상(繩牀)에서 내려와 앙산의 손을 잡고 춤추며(作舞) 가로되 성성(猩猩), 너와 상견해 마쳤다. 비여(譬如) 초명충(蟭螟蟲)이 문자(蚊子; 모기. 는 조사)의 안첩상(眼睫上; 눈의 속눈썹 )에 있으면서 둥지를 짓고는 십자가두(十字街頭)를 향해 부르짖으며 이르되 토지는 넓고 사람은 드물어(土曠人稀) 상봉하는 자가 적다 하는구나雲居錫(淸錫)이 이르되 中邑이 당시에 만약 앙산의 이 一句語를 얻지 못했다면 어느 곳에 중읍이 있겠는가. 숭수조(崇壽稠; 契稠)가 이르되 도리어 어떤 사람이 이 도리를 定得하겠는가. 만약 함을 얻지 못한다면 다만 이것은 精魂을 희롱하는 脚手(手脚; 手段)이거늘 불성의 뜻이 어느 곳에 있느냐. 玄覺(行言)이 이르되 만약 이 앙산이 아니었다면 어찌 중읍을 得見하겠는가. 且道하라, 어느 곳이 이 앙산이 중읍을 得見한 곳인가.

朗州; ()가 숭주(嵩州)를 고쳐 낭주를 설치했으며 치소(治所)는 무릉이니 즉금의 호남성 상덕시 [백도백과].

和和; 상성사(象聲詞)니 화()는 희열(喜悅). () 맹교(孟郊)의 택우(擇友) 비록 웃지만 꼭 화()는 아니며 비록 곡하지만 꼭 척(; 슬픔)은 아니다. 또 성음(聲音)이 상응함이니 설문 화() 상응이다. 옥편 화()는 화()가 된다.

謝戒; 사미가 득도(得度)하여 수계한 후에 계사의 처소에 이르러 예배하고 감사하는 예의니 사계라고 일컬음.

一宿覺; 당대 승인(僧人) 현각(玄覺)이 조계에 다다라 6조 혜능을 참알하여 초차(初次; 1) 견면(見面; 대면하여 상견)하고 응대하면서 선지에 계합하매 6조가 칭탄하여 선재선재라 했음. 소류(少留)하여 1(宿)하고 사별(辭別)했는데 당시에 호칭하기를 일숙각이라 했음 [오등회원2. 육조단경. 전등록5].

猩猩; 짐승의 이름임. 원숭이 종류의 동물을 가리킴. 옥편 성(; 오랑우탄) 성성(猩猩)이니 개와 같고 얼굴이 사람과 같다. 광운 성() 성성(猩猩)이니 능히 말하며 원숭이와 같고 소리는 어린아이와 같다. 여씨춘추 본미(本味). 고기의 맛있는 것은 성성(猩猩)의 입술이다. 고유(高誘; 後漢 때 사람) () 성성은 짐승의 이름이다. 사람의 얼굴에 개의 몸이며 꼬리가 길다.

又且; 이차(而且)와 같음. 진일층(進一層)한 의사(意思)를 표시하는 연사(連詞).

; 또 좌상(坐床)ㆍ좌선상(坐禪床)으로 지으며 노끈으로 제작한 좌구임. 비구가 좌와(坐臥)에 이를 사용함.

 

洪州泐潭常興禪師

僧問 如何是曹谿門下客 師曰 南來燕 曰 學人不會 師曰 養羽候秋風 問 如何是宗乘極則事 師曰 秋雨草離披 南泉至 見師面壁 乃拊師背 師問 汝是阿誰 曰 普願 師曰 如何 曰 也尋常 師曰 汝何多事

宗乘; 各宗所弘之宗義及敎典云宗乘 多爲禪門及淨土門標稱自家之語

離披; 分開 裂開 二衰敗 此指二

 

홍주(洪州) 늑담상흥(泐潭常興) 선사

승문(僧問) 무엇이 이 조계문하객(曹谿門下客)입니까. 사왈 남쪽에서 온 제비(). 가로되 학인이 알지 못하겠습니다. 사왈 깃을 길러() 추풍을 살핀다(). 묻되 무엇이 이 종승(宗乘)의 극칙사(極則事)입니까. 사왈 추우(秋雨)에 풀이 이피(離披)하다. 또 남천(南泉)이 이르러 면벽하는 스님을 보고 이에 스님의 등을 두드렸다(). 스님이 묻되 너는 이 누구인가(阿誰). 가로되 보원(普願)입니다. 사왈(師曰) 무엇하는가. 가로되 또한 심상(尋常)입니다. 사왈 너는 왜 일이 많은가(多事).

宗乘; 각종(各宗)에서 홍포(弘布)하는 바의 종의(宗義)와 및 교전(敎典)을 종승이라고 말함. 다분히 선문(禪門)과 및 정토문(淨土門)에서 자가(自家)의 말을 표칭(標稱)함임.

離披; 1. 분개(分開). 열개(裂開). 2. 쇠패(衰敗). 여기에선 2를 가리킴.

 

오등회원 주역(五燈會元 註譯) 주문 제본

 

오등회원 주역(五燈會元 註譯) 주문 제본

2024. 12월 말 번역 필. 5책 1질. 합4,615쪽. 本註와 補註 총 6,500 目. 미출간. 원문과 출처가 분명한 한문 주석을 넣고 다시 전체를 한글 번역. 주문 요청이 있을 시 인쇄소 에 부탁해 5일 내에 복사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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