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호야록상

나호야록상(羅湖野錄上) 무진거사(無盡居士)

태화당 2025. 11. 4. 07:32

 

無盡居士張公天覺 蚤負禪學 猶欲尋訪宗師與之決擇 因朱給事世英語及江西兜率悅禪師 禪學高妙 聰敏出於流類 元祐六年 公漕江西 按部分寧 五禪逆於旅亭 顧問至兜率 公曰 聞師聰敏之名久矣 悅遽對曰 從悅 臨濟兒孫 若以聰敏說文章 定似都運談禪 公雖壯其言 而意不平 遂作偈命五禪擧揚曰 五老機緣共一方 神鋒各向袖中藏 明朝老將登壇看 便請橫矛戰一場 悅當其末 提綱之語 盡貫前者 公陰喜之 乃遊兜率 相與夜談 及宗門事 公曰 比看傳燈錄一千七百尊宿機緣 唯疑德山托鉢話 悅曰 若疑托鉢話 其餘則是心思意解 何曾至大安樂境界 公憤然就榻 屢起 夜將五鼓 不覺趯翻溺器 忽大省發 喜甚 卽扣悅丈室門 謂悅曰 已捉得賊了也 悅曰 贓物在甚麽處 公擬議 悅曰 都運且寢 翌旦 公有頌云 鼓寂鐘沈托鉢回 巖頭一拶語如雷 果然只得三年活 莫是遭佗受記來 別去未幾 悅遂歸寂 公登右揆之明年 當宣和辛卯歲二月 奏請悅諡號 遣使持文祭於塔祠曰 昔者仰山謂臨濟曰 子之道 佗日盛行於吳越間 但遇風則止 後四世而有風穴延沼 沼以讖常不懌 晩得省念 而喜曰 正法眼藏今在汝躬 死無遺恨矣 念旣出世首山 荒村破寺 衲子纔三十餘輩 然其道大振天下 師於念公爲六世孫 於雲菴爲嫡嗣 住山規範足以追嫓首山 機鋒敏妙 初不減風穴 余頃歲奉使江西 按部西安 相識於龍安山中 抵掌夜語 盡得其末後大事 正宗顯決 方以見晩爲歎 而師遽亦化去 惜其福不逮慧 故緣不勝喜 其德不可掩 故終必有後 有若踈山了常 兜率慧照 慈雲明鑒 淸谿志言者 皆說法一方 有聞於時 有若羅漢慧宜 楊岐子圓 廣慧守眞 灨川智宣者 皆遯跡幽居 痛自韜晦 風穴得一省念 遂能續列祖壽命 今龍安諸子乃爾其盛 豈先師靈骨眞灰燼無餘耶 蓋其道行實爲叢林所宗向 有光佛祖 有助化風 思有以發揮之 爲特請于朝 蒙恩追諡眞寂大師 嗚呼 余惟與師神交道契 故不敢忘外護之志 雖其死生契闊之異 而蒙被天下之殊恩 則幸亦共之 仰惟覺靈祗此榮福 夫蔚爲儒宗而崇佛道 未有如公者 然非敏手 安能激發 苟非上根 未易承當 至於嶽立廊廟 展大法施 旣不忘悅之道義 而特與追榮 矢心以詞 勤勤若此 蓋所以昭示尊師重法歟

●世英; 朱世英 宋代 問道於眞淨克文 [居士分燈錄下]

●按部; 按照部類

●擧揚; 擧說 闡揚

●傳燈錄; 景德傳燈錄 三十卷 宋代道原撰 略稱傳燈錄 爲中國禪宗史書之一 原題名爲佛祖同參集 本書集錄自過去七佛 及歷代禪宗諸祖五家五十二世 共一七○一人之傳燈法系 內容包括行狀 機緣等 其中附有語錄者九五一人 以宋眞宗景德元年(1004) 具表上進 竝奉敕入藏 故以景德名之 又以燈能照暗 法系相承 猶如燈火輾轉相傳 喩師資正法永不斷絶 故稱傳燈 本書硏究禪宗史之根本資料 卷首有楊億所撰之序 卷一卷二 敘述過去七佛與第一祖摩訶迦葉至第二十七祖般若多羅之傳法情形 卷三 敘述達摩 慧可 僧璨 道信 弘忍等東土五祖之傳法 卷四 敘述四祖道信五祖弘忍之旁出法系 牛頭禪 北宗禪 淨衆宗等法系 及牛頭法融 北宗之神秀 普寂等傳記 卷五 敘述慧能及慧能之法系 卷六 收錄馬祖道一及百丈懷海 卷七 收錄鵝湖大義及麻谷寶徹 卷八 列敘南泉普願等五十四人之傳 卷九 列百丈懷海法嗣三十人 卷十 南泉普願法嗣趙州從諗等人之傳記 卷十一 敘述潙仰宗祖潙山靈祐之法嗣 卷十二 臨濟宗祖臨濟義玄之傳 卷十三 敘述荷澤宗之法系 竝收錄華嚴宗之澄觀與宗密之傳 卷十四 收錄石頭希遷及其法系 卷十五 收錄洞山良价 卷十六 德山宣鑒等人之法嗣 卷十七 曹洞宗之系統 卷十八十九 雪峰義存之法系 卷二十 敘述曹山本寂之系統 卷二十一 玄沙師備之法系 卷二十二二十三 雲門宗之法系 卷二十四二十五二十六 法眼宗淸涼文益之法系 卷二十七 敘述不屬任何禪門宗派而較優秀之禪者 卷二十八 收錄特殊優異之禪宗語錄 包括南陽慧忠 荷澤神會等十二人 卷二十九 題爲讚頌偈詩 共收錄白居易等十七人之偈頌 卷三十 題爲銘記箴歌 共收錄二十三種坐禪箴證道歌 本書有二種重刊本 一爲南宋紹興四年(1134) 思鑒重刊 一爲元延祐三年(1316) 希渭重刊 本書今收錄於大正藏第五十一冊 [佛祖統紀四十四 佛祖歷代通載二十六]

●德山托鉢話; 德山卽宣鑑 禪林類聚十五 雪峰存禪師在德山作飯頭 一日飯遲 師曬飯巾次 見德山托鉢至法堂前 師云 這老漢 鐘未鳴鼓未響 托鉢向甚麽處去 山便歸方丈 師擧似巖頭 頭云 大小德山不會末後句 山聞令侍者喚巖頭來 山問 汝不肯老僧那 頭密啓其意 山休去 明日陞堂 果與尋常不同 頭至僧堂前拊掌大笑云 且喜堂頭老漢會末後句 他後天下人不柰伊何 雖然如是 也只得三年 後三年果遷化

●五鼓; 同五更 自午前三時至午前五時

●丈室; 寺院住持僧的房間

●擬議; 思慮 遲疑 說文 擬 度也 說文 議 語也 ▲易繫辭上傳 言天下之至賾 而不可惡也 言天下之至動 而不可亂也 擬之而後言 議之而後動 擬議以成其變化

●巖頭; 全豁(828-887) 又作全奯 唐代僧 泉州(今屬福建)人 俗姓柯 出家於靈泉寺 受具足戒於長安西明寺 與雪峰義存 欽山文邃同修互勉 竝參訪仰山慧寂 又參學於德山宣鑑 承其法嗣 出居鄂州(今湖北武昌)巖頭院 大振宗風 故又稱巖頭全豁 唐光啓三年四月 賊亂 臨刃仍泰然自若 大喝一聲而終 壽六十 諡號淸儼大師 [宋高僧傳二十三 祖堂集七 景德傳燈錄十六]

●受記; <梵> vyākaraṇa 梵語弊迦蘭陀 和伽羅那 和羅那 又作授決 受決 授記 受莂 記別 記莂 十二部經之一 九部經之一 區別 分析 發展之意 本指分析敎說 或以問答方式解說敎理 轉指弟子所證或死後之生處 後專指未來世證果及成佛名號之預言(又作預記)

●仰山; 慧寂(807-883) 唐代僧 爲潙仰宗開山祖師之一 韶州(廣東韶關)葉氏 初生頗有異蹟 爲童穉 依番禺安和寺不語通出家 年十四 父母欲奪其志 遂斷二指以爲誓 因從剃落 通累加接引 而師無所啓發 年十八 通卒 因往謁乳源 洎筠州處微 吉州性空 鵶山躭源 皆不契 至大和三年(829) 參大潙靈祐 擧性空如人在井之緣 因而有省 山指令請戒於襄陽之大悲 師曰 慧寂平生不妄語 山云 你但依沙門法 師從之 時年三十三矣 復還潙山作直歲 尋領衆居郴州之王莽山 旣而移錫居袁州仰山 衆盈數百 一日 有梵僧負貝葉造師 師問 近離甚處 曰 早別西天 師曰 太遲生 曰 游山翫水 師曰 神通不無你 佛法未夢見 曰 來此禮文殊 却遇小釋迦 語訖隱去 大中十三年(859) 韋宙中丞 爲師創洪州觀音院居之 咸通(860-8 73)中 歸韶州之東平山 至中和三年二月十三日 集衆說偈 以兩手抱屈膝 儼然而終 歸葬於仰山 師行道於世 蒙寵賜者三 懿宗賜號知宗 僖宗賜澄虛 昭宗諡智通 [祖庭事苑七 宋高僧傳十二]

●延沼; (896-973) 又作延昭 北宋臨濟宗僧 浙江餘杭人 俗姓劉 少年卽魁偉有英氣 博覽諸書 依開元寺之智恭律師剃髮受具足戒 復遊學講肆 其後依止南院慧顒公 問法從學六年 竝嗣其法 長興二年(931) 入汝州之風穴古寺 留止七年 徒衆聞風來集 信徒竝重建此地 改爲叢林 宋太祖開寶六年八月示寂 壽七十八 有風穴禪師語錄一卷傳世 [傳燈錄十三 佛祖歷代通載十八 五燈會元十一]

●省念; (926-993) 五代臨濟宗僧 萊州(今山東掖縣)人 俗姓狄 號首山 幼入南禪寺受業 纔受具足戒 遍遊叢席 常修頭陀行 密誦法華經 人稱念法華 師事風穴延沼 得其心傳 名振四方 風靡一世 其後開法於汝州首山 爲第一世 又住汝州葉縣寶安山廣敎院 及城下寶應院等 淳化三年(992)十二月四日 上堂說偈曰 今年六十七 老病隨緣且遣日 今年記取來年事 來年記著今朝日 翌年十二月四日上堂辭衆 仍說偈曰 白銀世界金色身 情與非情共一眞 明暗盡時俱不照 日輪午後見全身 言訖 安坐入寂 壽六十八 [傳燈錄十三 五燈會元十一]

●正法眼藏; 又曰淸淨法眼 禪家以之爲敎外別傳之心印 釋氏稽古略一曰 佛在靈鷲山中 大梵天王以金色波羅華 持以獻佛 世尊拈華示衆 人天百萬悉皆罔措 獨有迦葉 破顔微笑 世尊曰 吾有正法眼藏涅槃妙心 分付迦葉 今以禪門之意解之 則是正爲佛心之德名 此心徹見正法 故曰正法眼 深廣而萬德含藏 故曰藏

●嫡嗣; 正宗正統的法嗣

●了常; 宋代黃龍派僧 住撫州疏山 得印記於隆興府兜率院眞寂從悅 [傳燈錄二十六 嘉泰普燈錄十]

●慧照; (1049-1119) 北宋黃龍派僧 亦作惠照 嗣法隆興兜率院從悅 南安軍郭氏子 從悅去世後 嗣居兜率二十七年 宣和元年休夏日 沐浴更衣 禮觀音大士三拜 退居丈室 端然而逝 壽七十一 臈四十七 [五燈會元十八 僧寶正續傳一]

●靈骨; 指舍利 新作設利羅 室利羅 此云骨身 身骨 通常指佛之遺骨 亦卽佛舍利 又尊稱死者之遺骨 亦稱靈骨

●外護; 乃僧侶以外之在家人 如族親檀越等 爲佛敎所從事之種種善行 如供給僧尼衣食以助其安穩修行 或盡力援護佛法之弘通等 亦卽從外部以權力財富知識或勞力等 護持佛敎 竝掃除種種障礙以利傳道 從事以上諸行者 亦稱爲外護

●契闊; 一辛苦 二久別重逢 三懷念 四相交 相約 五 離合 聚散 此指五

●儒宗; 儒者的宗師 漢以後亦泛指爲讀書人所宗仰的學者 [百度]

●承當; 承受機緣 領悟禪法

●嶽立; 高聳而立

●廊廟; 原指古代宮殿建築中的殿下屋與太廟 後引申爲朝廷的代稱 [百度百科]

●法施; 三施之一 說法使人聞之也 又云法供養 法施爲對下之語 法供養爲對上之語

●矢心; 一陳示衷心 二發誓

●勤勤; 形容誠懇或殷勤

 

무진거사(無盡居士) 장공(張公) 천각(天覺; 張商英의 字)은 일찍(蚤) 선학(禪學)을 지고(負) 오히려 종사(宗師)를 심방(尋訪)해 그(之)와 더불어 결택(決擇)하고자 했다. 주급사(朱給事) 세영(世英)이 말하다가 강서 도솔열(兜率悅; 從悅) 선사에게 미침으로(及) 인해 선학이 고묘(高妙)하고 총민(聰敏)이 유류(流類)를 초출(超出; 出)한다 하였다. 원우(元祐) 6년(1035) 공(公)이 강서에서 조운(漕運; 漕)했고 분녕(分寧)을 안부(按部)했는데 다섯 선사(五禪)가 여정(旅亭)에서 맞이했다(逆). 고문(顧問; 의견을 물음)하다가 도솔(兜率; 從悅)에 이르렀다. 공왈(公曰) 스님의 총민(聰敏)한 명성을 들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열이 급히(遽) 대왈(對曰) 종열(從悅)은 임제의 아손(兒孫)입니다. 만약 총민으로써 문장을 설함이라면 결정코(定) 도운(都運; 都轉運使)이 담선(談禪)함과 흡사합니다. 공이 비록 그 말을 장(壯)하게 여겼지만 뜻은 평안하지 못했다(不平). 드디어 작게(作偈)하여 5선(禪; 선사)에게 거양(擧揚)을 명(命)했으니 가로되 오로(五老)의 기연(機緣)이 일방(一方; 한 방면)을 함께(共) 하나니/ 신봉(神鋒; 신기한 機鋒)을 각자 소매 속을 향해 감췄다/ 명조(明朝; 明日)에 노장(老將)이 등단(登壇)해 보리니(看)/ 바로 청컨대 횡모(橫矛; 창을 가로 가짐)로 일장(一場) 전투하라. 종열이 그 말(末; 마지막)에 당했는데 제강지어(提綱之語)가 모두 전자(前者)를 꿰었다(貫). 공(公)이 몰래(陰) 기뻐했다(喜之). 이에 도솔에 유행(遊行; 遊)하여 서로 더불어 야담(夜談)했다. 종문사(宗門事)에 미치자(及) 공왈(公曰) 요사이(比) 전등록(傳燈錄)의 1천7백 존숙의 기연(機緣)을 보았는데 오직 덕산탁발화(德山托鉢話)를 의심합니다. 열왈(悅曰) 만약 탁발화를 의심한다면 그 나머지도 곧 이 심사의해(心思意解)이거늘 어찌 일찍이 대안락경계(大安樂境界)에 이르겠습니까. 공이 분연(憤然)하며 상탑(床榻; 榻)으로 나아갔다. 여러 번 일어났는데(屢起) 밤이 거의(將) 오고(五鼓; 五更)였다. 불각(不覺)에 요기(溺器; 溺는 오줌 뇨)를 차 엎으면서(趯翻; 趯은 찰 적) 홀연히 크게 성발(省發)했다. 기쁨이 심해 곧 종열의 장실문(丈室門)을 두드렸다. 종열에게 일러 가로되 이미 도적을 착득(捉得)해 마쳤습니다. 열왈(悅曰) 장물(贓物)이 어느 곳에 있습니까. 공이 의의(擬議)했다. 열왈(悅曰) 도운(都運)은 다만 주무십시오(寢). 다음 날 아침(翌旦) 공이 송(頌)이 있어 이르되 북도 고요하고 종도 잠기었는데 탁발(托鉢)하고 돌아오다/ 암두(巖頭)의 일찰(一拶; 한 번 압박)하는 말이 우레와 같다/ 과연 다만 3년 삶을 얻었으니/ 이는 그(佗)에게 수기(受記)를 만나(遭) 왔음이 아닐까. 헤어져 떠난 지 오래지 않아(未幾) 종열이 드디어 귀적(歸寂; 入寂)했다. 공이 우규(右揆; 右丞相)에 오른 명년은 선화(宣和; 1119- 1125) 신묘세(辛卯歲; 宣和에 辛卯가 없음) 2월에 해당(該當; 當)했는데 종열의 시호를 주청(奏請)했다. 사자(使者)를 보내 지문(持文)하여 탑사(塔祠)에 제사(祭祀; 祭)하며 가로되 옛적에(昔者) 앙산(仰山)이 임제에게 일러 가로되 자네의 도는 다른 날(佗日) 오월(吳越) 사이에 성행(盛行)할 것이다. 단지 풍(風)을 만나면 곧 그친다(止). 4세 후(後四世) 풍혈연소(風穴延沼)가 있었고 연소가 참(讖)으로써 늘 기쁘지(懌) 않았다. 만년에 성념(省念)을 얻고서 기뻐하며 가로되 정법안장(正法眼藏)이 이제 너의 몸(躬)에 있으니 죽어도 유한(遺恨)이 없다. 성념이 이미 수산(首山)에서 출세했고 황촌(荒村)의 파사(破寺)에 납자(衲子; 衲僧)가 겨우(纔) 30여 배(輩)였으나 그러나 그 도가 천하를 대진(大振)했다. 스님(師; 종열)은 념공(念公)에게 6세손(六世孫)이 되고 운암(雲菴; 克文)에게는 적사(嫡嗣)가 된다. 주산(住山)하는 규범(規範)은 족히 수산(首山; 省念)에 추비(追嫓; 쫓아 겨루다)할 만하고 기봉(機鋒)이 민묘(敏妙)하여 애초에 풍혈에 감(減)하지 않았다. 내(余; 장상영)가 경세(頃歲; 近年)에 강서에 봉사(奉使)하며 서안(西安)을 안부(按部)하다가 용안산(龍安山) 속에서 상식(相識)했고 저장(抵掌; 擊掌)하며 야화(夜語)했고 그 말후의 대사(大事)인 정종(正宗)의 현결(顯決)을 모두 얻었으며 바야흐로 상견이 늦었음(見晩)을 탄식(歎息; 歎)했거늘 스님이 급히(遽) 또한 화거(化去; 입적)했다. 애석하게도(惜) 그 복(福)이 혜(慧)에 미치지(逮) 못한지라 고로 연(緣)이 희(喜)를 이기지 못하고 그 덕(德)을 가히 가리지(掩) 못하는지라 고로 마쳐서도(終) 반드시 후(後; 後嗣)가 있다. 소산요상(踈山了常)ㆍ도솔혜조(兜率慧照)ㆍ자운명감(慈雲明鑒)ㆍ청계지언(淸谿志言) 같은(若) 자가 있어 다 일방(一方)에서 설법하며 당시(當時; 時)에 알려짐(聞)이 있으며 라한혜의(羅漢慧宜)ㆍ양기자원(楊岐子圓)ㆍ광혜수진(廣慧守眞)ㆍ공천지선(灨川智宣) 같은 자가 있어 다 둔적(遯跡)하여 유거(幽居)하면서 통렬(痛烈; 痛)히 스스로 도회(韜晦)했다. 풍혈이 하나의 성념을 얻어 드디어 능히 열조(列祖)의 수명(壽命)을 이었거니와 지금 용안(龍安; 용안산)의 제자(諸子)가 이에 그렇게 그것이 성대하니(乃爾其盛) 어찌 선사(先師)의 영골(靈骨)이 참으로 회신(灰燼)하여 나머지가 없다고 하겠는가. 대개 그 도행(道行)이 실로 총림에서 종향(宗向)하는 바가 되니 불조를 빛냄이 있고 화풍(化風)을 도움이 있다. 사유(思惟; 思)컨대 그것(之)을 발휘(發揮)할 까닭(以)이 있어 조정(朝廷; 朝)에 특청(特請)하매 몽은(蒙恩)하여 추시(追諡)하되 진적선사(眞寂大師)라 했다. 오호(嗚呼)라 내가 오직(惟) 스님과 더불어 신교(神交)하고 도계(道契; 도가 계합)한지라 고로 감히 외호지지(外護之志)를 잊지 않나니 비록 그 사생(死生)과 계활(契闊)이 다르지만(異) 천하의 수은(殊恩)을 몽피(蒙被; 입다)하니 곧 행운(幸運; 幸)이 또한 그것(之)과 함께 한다(共). 앙유(仰惟; 우러러 사유)컨대 각령(覺靈)이 다만(祗) 이에서 영복(榮福)하소서. 부(夫) 울연(蔚然; 蔚)히 유종(儒宗)이 되면서 불도(佛道)를 숭상(崇尙; 崇)했음에 공(公; 장상영)과 같은 자가 있지 않다 하겠다. 그러나 민수(敏手)가 아니라면 어찌(安) 능히 격발(激發)할 것이며 참으로(苟) 상근(上根)이 아니라면 쉽게 승당(承當)하지 못했으리라. 낭모에 악립하여(嶽立廊廟) 대법시(大法施)를 폄에 이르러(至) 이미 종열의 도의(道義)를 잊지 않았고 특별히 추영(追榮)해 주었고 사(詞)로써 시심(矢心)하되 근근(勤勤)함이 이와 같으니(若此) 대개 존사(尊師)하고 중법(重法)함을 소시(昭示)한 소이(所以)일까 하노라.

●世英; 주세영(朱世英)이니 송대 왕공(王公). 진정극문(眞淨克文)에게 도를 물었음 [거사분등록하].

●按部; 부류(部類)를 안조(按照)함.

●擧揚; 들어 설함. 천양(闡揚).

●傳燈錄;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이니 30권. 송대 도원(道原)이 지었음. 약칭이 전등록. 중국선종사서(中國禪宗史書)의 하나가 됨. 원제(原題)는 이름하여 불조동참집임. 본서는 과거 7불로부터 및 역대 선종의 제조(諸祖) 5가(家) 52세(世) 공히 1,701인(人)의 전등법계(傳燈法系)를 집록했음. 내용은 행장ㆍ기연 등을 포괄했으며 그 중에 부록으로 어록이 있는 자는 951인임. 송 진종 경덕(景德) 원년(1004)에 표문(表文)을 갖춰 상진(上進)하였고 아울러 칙명을 받들어 입장(入藏)한지라 고로 경덕으로써 그것을 이름했음. 또 등(燈)이 능히 어둠을 비추듯이 법계(法系)가 상승(相承)함이 마치 등화가 전전(輾轉)히 상전(相傳)함과 같으며 사자(師資; 師弟)의 정법(正法)이 영원히 단절되지 않음에 비유하는지라 고로 명칭이 전등(傳燈)임. 본서는 선종사를 연구하는데 근본 자료임. 권수에 양억(楊億)이 지은 바의 서(序)가 있음. 권1과 권2는 과거 7불과 제1조 마하가섭에서 제27조 반야다라의 전법 정형(情形)을 서술했음. 권3은 달마ㆍ혜가ㆍ승찬ㆍ도신ㆍ홍인 등 동토 5조의 전법을 서술했음. 권4는 4조 도신과 5조 홍인의 방출 법계인 우두선ㆍ북종선ㆍ정중종 등의 법계 및 우두법융ㆍ북종의 신수ㆍ보적 등의 전기를 서술했음. 권5는 혜능 및 혜능의 법계를 서술했음. 권6은 마조도일 및 백장회해를 수록했음. 권7은 아호대의 및 마곡보철을 수록했음. 권8은 남천보원 등 54인의 전기를 열서(列敘)했음. 권9는 백장회해의 법사 30인을 나열했음. 권10은 남천보원의 법사 조주종심 등의 사람의 전기임. 권11은 위앙종조인 위산영우의 법사를 서술했음. 권12는 임제종조인 임제의현의 전기임. 권13은 하택종의 법계를 서술하고 아울러 화엄종의 징관과 종밀의 전기를 수록했음. 권14는 석두희천 및 그의 법계를 수록했음. 권15는 동산양개를 수록했음. 권16은 덕산선감 등의 사람의 법사임. 권17은 조동종의 계통. 권18과 권19는 설봉의존의 법계. 권20은 조산본적의 계통을 서술했음. 권21은 현사사비의 법계. 권22와 23은 운문종의 법계. 권24ㆍ25ㆍ26은 법안종 청량문익의 법계. 권27은 어떠한 선문 종파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비교적으로 우수한 선자(禪者)를 서술했음. 권28은 특수하고 우이(優異)한 선종 어록을 수록했으니 남양혜충과 하택신회 등 12인을 포괄했음. 권29는 제목하여 찬송게시(讚頌偈詩)니 공히 백거이 등 17인의 게송을 수록했음. 권30은 제목하여 명기잠가(銘記箴歌)니 공히 23종의 좌선잠(坐禪箴)ㆍ증도가를 수록했음. 본서는 2종의 중간본이 있으니 하나는 남송 소흥 4년(1134)이 되며 사감(思鑒)이 중간했음. 하나는 원 연우 2년(1316)이 되며 희위(希渭)가 중간했음. 본서는 지금 대정장 제51책에 수록되었음 [불조통기44. 불조역대통재26].

●德山托鉢話; 덕산은 곧 선감. 선림류취15. 설봉존선사가 덕산에 있으면서 반두(飯頭)가 되었다. 어느 날 밥이 늦었고 스님이 반건(飯巾)을 말리던 차에 덕산이 탁발(托鉢; 발우를 받들다)하고 법당 앞에 이름을 보았다. 스님이 이르되 이 노한이 종도 울리지 않았고 북도 울리지 않았는데 탁발하고 어느 곳을 향해 가십니까. 덕산이 곧 방장으로 돌아갔다. 스님이 암두에게 들어 보이자 암두가 이르되 대소(大小) 덕산이 말후구를 알지 못하셨다. 덕산이 듣고서 시자를 시켜 암두를 불러오게 했다. 덕산이 묻되 네가 노승을 긍정하지 않느냐. 암두가 몰래 그 뜻을 알렸다. 덕산이 쉬었다. 명일 승당하였는데 과연 심상과 같지 않았다. 암두가 승당(僧堂) 앞에 이르러 손바닥을 치며 크게 웃고 이르되 다만 당두노한(堂頭老漢)이 말후구를 아셨음을 기뻐하노라. 타후(他後)에 천하 사람이 그를 어찌하지 못하리라. 비록 그러하여 이와 같으나 또한 단지 3년을 얻으리라. 3년 후에 과연 천화했다.

●五鼓; 오경(五更)과 같음. 오전 3시부터 오전 5시에 이르기까지임.

●丈室; 사원 주지승의 방간(房間).

●擬議; 사려. 지의(遲疑; 주저하며 의심함). 설문 의(擬) 탁(度; 헤아리다)이다. 설문 의(議) 어(語)다. ▲역 계사상(繫辭上) 전(傳). 천하의 지색(至賾; 가장 精微한 奥理)을 말해도 가히 악(惡; 過錯)하지 않고 천하의 지동(至動; 가장 細致한 변화)을 말해도 가히 난(亂; 혼란)하지 않는다. 이를 의(擬)한 후에 말하고 이를 의(議)한 후에 동(動)하나니 의의(擬議)하여 그 변화를 이룬다.

●巖頭; 전활(全豁; 828-887)이니 또 전활(全奯)로 지음. 당대승이며 천주(지금 복건에 속함) 사람이며 속성은 가(柯). 영천사에서 출가하였고 장안의 서명사에서 구족계를 받았음. 설봉의존(雪峰義存)ㆍ흠산문수(欽山文邃)와 함께 수행하고 서로 권면(勸勉)했음. 함께 앙산혜적(仰山慧寂)을 참방했고 또 덕산선감(德山宣鑑)에게 참학(參學)해 그 법사(法嗣)를 이었음. 출세하여 악주(鄂州; 지금의 湖北 武昌)의 암두원(巖頭院)에 거주하면서 종풍을 크게 떨친지라 고로 또 칭호가 암두전활(巖頭全豁)임. 당 광계 3년 4월에 도적이 난입하자 칼날에 임해 그대로 태연자약(泰然自若)했으며 대갈일성(大喝一聲)하고 마쳤으니 나이는 60이며 시호는 청엄대사(淸儼大師) [송고승전23. 조당집7. 경덕전등록16].

●受記; <범> vyākaraṇa. 범어 폐가란타(弊迦蘭陀)ㆍ화가라나(和伽羅那)ㆍ화라나(和羅那). 또 수결(授決)ㆍ수결(受決)ㆍ수기(授記)ㆍ수별(受莂)ㆍ기별(記別)ㆍ기별(記莂)로 지음. 12부경의 하나며 9부경의 하나니 구별ㆍ분석ㆍ발전의 뜻. 본래는 교설을 분석하거나 혹은 문답 방식으로 교리를 해설함을 가리켰음. 전(轉)하여 제자의 소증(所證) 혹 사후의 생처(生處)를 가리켰음. 후에 오로지 미래세의 증과(證果) 및 성불명호(成佛名號)의 예언(預言; 또 預記로 지음)을 가리켰음.

●仰山; 혜적(慧寂; 807-883)이니 당대승. 위앙종(潙仰宗)의 개산조사(開山祖師)의 하나가 됨. 소주(韶州; 광동 소관) 섭씨(葉氏)며 처음 출생하자 자못 이적(異蹟)이 있었음. 어린이(童穉)가 되자 번옹(番禺) 안화사(安和寺)의 불어통(不語通)에 의지(依止)해 출가하였음. 나이 14에 부모가 그 뜻을 뺏으려 하자 드디어 두 손가락을 잘라 맹서(盟誓)를 삼았으며 인하여 체락(剃落)을 좇았음. 통(通)이 누차(屢次) 접인(接引)을 가했으나 스님은 계발(啓發)한 바가 없었음. 나이 18에 통이 죽자 인해 유원(乳源)에게 가서 참알(參謁)했으며 균주(筠州)의 처미(處微)ㆍ길주(吉州)의 성공(性空)ㆍ아산(鵶山)의 탐원(躭源)에 이르렀으나 다 계합(契合)치 못했음. 대화(大和) 3년(829)에 이르러 대위영우(大潙靈祐)를 참알해 성공(性空)의, 마치 어떤 사람이 우물에 있음과 같다는 인연을 들어 인해 살핌이 있었음. 위산(潙山)이 양양(襄陽)의 대비원(大悲院)에 청계(請戒; 곧 수계)를 지령(指令)하자 스님이 가로되 혜적(慧寂)은 평생에 망어(妄語)를 하지 않았습니다. 위산이 이르되 너는 단지 사문법(沙門法)에 의지(依止)하라. 스님이 이를 좇았는데 때의 나이는 33이었음. 다시 위산으로 돌아와 직세(直歲)가 되었으며 이윽고 대중을 거느리고 침주(郴州)의 왕망산(王莽山)에 거주하였음. 기이(旣而; 不久) 이석(移錫)하여 원주(袁州)의 앙산(仰山)에 거주했는데 대중이 수백(數百)을 채웠음. 어느 날 어떤 범승(梵僧)이 패엽(貝葉; 佛經을 가리킴)을 지고 스님에게 나아가자 스님이 묻되 최근에 어느 곳을 떠났느냐. 가로되 아침에 서천(西天)을 떠났습니다. 스님이 가로되 너무 느리다. 가로되 유산완수(游山翫水)했습니다. 스님이 가로되 신통은 너에게 없지 않으나 불법은 꿈에도 보지 못했다. 가로되 여기에 와서 문수(文殊)에게 예배하려 했더니 도리어 소석가(小釋迦)를 만났습니다. 말을 마치자 은몰(隱沒)했음. 대중 13년(859) 위주중승(韋宙中丞)이 스님을 위해 홍주(洪州)에 관음원(觀音院)을 창건하고 거쳐하게 했음. 함통(咸通. 860-873) 중에 소주(韶州)의 동평산(東平山)으로 돌아갔다가 중화(中和) 3년 2월 13일에 이르자 대중을 모아 게(偈)를 설하고 두 손으로 무릎을 안아 구부러지게 하고는 엄연(儼然; 의젓이)히 마쳤음. 앙산으로 귀장(歸葬)했음. 스님이 세상에 도를 행해 총사(寵賜)를 입은 게 세 번이니 의종(懿宗)이 호(號)를 주어 지종(知宗)이라 했고 희종(僖宗)이 징허(澄虛)를 주었고 소종(昭宗)이 지통(智通)이라 시호(諡號)했음 [조정사원7. 송고승전12].

●延沼; (896-973) 또 연소(延昭)로 지음. 북송 임제종승. 절강 여항 사람이며 속성(俗姓)은 유(劉). 어린 나이에 곧 괴위(魁偉)하고 영기(英氣)가 있었으며 여러 책을 박람(博覽)하였음. 개원사의 지공율사에게 의지해 머리를 깎았고 구족계를 받았음. 다시 강사(講肆)에 유학(遊學)하다가 그 후 남원혜옹공(南院慧顒公)에 의지하여 법을 묻고 좇아 배우기 6년이었고 아울러 그의 법을 이었으며 장흥 2년(931) 여주(汝州)의 풍혈고사(風穴古寺)에 들어가 머물기 7년이었음. 도중(徒衆)이 풍모(風貌)를 듣고 와서 모였으며 신도가 아울러 이 땅을 중건(重建)하매 바뀌어 총림이 되었음. 송(宋) 태조(太祖) 개보 6년 8월에 시적(示寂)했으니 나이는 78. 풍혈선사어록(風穴禪師語錄) 1권이 있어 세상에 전함 [전등록13. 불조역대통재18. 오등회원11].

●省念; (926-993) 오대 임제종승. 내주(萊州; 지금의 산동 액현) 사람이며 속성은 적(狄)이며 호가 수산(首山). 어릴 적에 남선사에 들어가 수업(受業)했고 겨우 구족계를 받자 총석(叢席)을 두루 다녔음. 늘 두타행(頭陀行)을 닦았으며 몰래 법화경을 외운지라 사람들이 호칭하기를 염법화(念法華)라 했음. 풍혈연소(風穴延沼)를 사사(師事)하여 그 심전(心傳)을 얻었으며 명성을 사방에 떨쳐 일세(一世)를 풍미(風靡)했음. 그 후 여주(汝州) 수산(首山)에서 개법(開法)하여 제1세가 되었고 또 여주 섭현(葉縣) 보안산(寶安山)의 광교원(廣敎院) 및 성(城) 아래의 보응원(寶應院) 등에 주(住)했음. 순화 3년(992) 12월 4일에 상당해 게를 설해 가로되 금년에 67이니/ 늙고 병들어 인연 따라 또 날을 보낸다/ 금년에 내년의 일을 기취(記取)하고/ 내년에 금조(今朝)의 일을 기억하라. 다음해 12월 4일에 상당하여 대중에게 고별하며 이에 게를 설해 가로되 백은세계(白銀世界)의 금색신(金色身)이여/ 정(情)과 비정(非情)이 한가지로 일진(一眞)이다/ 명암이 다한 때 다 비추지 못하나니/ 일륜(日輪)의 오후에 전신을 보이리라. 말을 마치자 안좌(安坐)하여 입적했으니 나이는 68 [전등록13. 오등회원11].

●正法眼藏; 또 가로되 청정법안이니 선가가 이로써 교외별전의 심인으로 삼음. 석씨계고략1에 가로되 불타가 영취산 가운데 있었다. 대범천왕이 금색바라화(金色波羅華)를 가지고 헌불(獻佛)하자 세존이 염화시중(拈華示衆)했다. 인천의 백만이 모두 다 망조(罔措)했는데 오직 가섭이 있어 파안미소(破顔微笑)했다. 세존이 가로되 나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 열반묘심(涅槃妙心)이 있어 가섭에게 분부한다. 여금에 선문의 뜻으로써 이를 해석하면 곧 이는 바로 불심의 덕명(德名)이며 이 마음이 정법을 철저히 보므로 고로 가로되 정법안(正法眼)이며 심광(深廣)하면서 만덕을 함장(含藏)한지라 고로 가로되 장(藏)임.

●嫡嗣; 정종정통(正宗正統)의 법사(法嗣).

●了常; 송대 황룡파승. 무주 소산에 거주했고 융흥부 도솔원 진적종열에게서 인기(印記)를 얻었음 [전등록26. 가태보등록10].

●慧照; (1049-1119) 북송 황룡파승. 또한 혜조(惠照)로 지으며 융흥 도솔원(兜率院) 종열(從悅)의 법을 이었고 남안군 곽씨의 아들임. 종열이 세상을 떠난 후 도솔에 사거(嗣居)하기 27년이었음. 선화 원년 휴하일(休夏日) 목욕하고 옷을 갈아 입고 관음대사에게 3배(拜)로 예배하고 장실(丈室)에 퇴거하여 단연(端然)히 떠났으니 나이는 71, 납(臈; 臘과 같음)은 47 [오등회원18. 승보정속전1].

●靈骨; 사리(舍利; 梵 sarira)를 가리킴. 신역으론 설리라(設利羅)ㆍ실리라(室利羅)로 지으며 여기에선 이르되 골신(骨身)ㆍ신골(身骨)임. 통상으론 불타의 유골을 가리키며 또 곧 불사리임. 또 죽은 자의 유골을 존칭하여 또한 영골(靈骨)로 일컬음.

●外護; 곧 승려 이외의 재가인, 예컨대(如) 족친(族親)이나 단월 등이 불교를 위해 종사하는 바의 갖가지 선행임. 예컨대(如) 승니의 의식(衣食)을 공급하여 그 안온(安穩)한 수행을 도우거나 혹 힘을 다해 불법의 홍통(弘通)을 원호(援護)하는 등, 또한 곧 외부로부터 권력ㆍ재부(財富)ㆍ지식 혹 노력 등으로 불교를 호지(護持)하거나 아울러 갖가지 장애를 소제(掃除)하여 전도(傳道)에 이롭게 함. 이상의 제행(諸行)에 종사하는 것을 또한 일컬어 외호라 함.

●契闊; 1. 신고(辛苦). 2. 오래 헤어졌다 다시 만남. 3. 회념(懷念). 4. 상교(相交), 상약(相約). 5. 이합(離合), 취산(聚散). 여기에선 5를 가리킴.

●儒宗; 유자(儒者)의 종사(宗師). 한(漢) 이후 또한 널리 독서인이 종앙(宗仰)하는 바의 학자를 가리켰음 [백도].

●承當; 기연을 승수(承受)하여 선법을 영오(領悟)함.

●嶽立; 높이 솟아 섬.

●廊廟; 원래 고대 궁전건축 중의 전하옥(殿下屋)과 태묘(太廟)를 가리켰으나 후에 인신(引申)하여 조정(朝廷)의 대칭(代稱)이 되었음 [백도백과].

●法施; 3시(施)의 하나. 설법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듣게 함임. 또 이르되 법공양이니 법시는 대하(對下)의 말이 되고 법공양은 대상(對上)의 말이 됨.

●矢心; 1. 충심(衷心)을 진시(陳示)함. 2. 발서(發誓).

●勤勤; 성간(誠懇) 혹 은근(殷勤)함을 형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