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태화선학대사전 1책(ㄱ)

국역태화선학대사전(國譯泰華禪學大辭典) 1책(ㄱ) 248-249쪽

태화당 2019. 5. 1. 11:30

去在助詞 置于句尾 表示行爲動作將要出現 五燈會元十一臨濟義玄 州(睦州) 先到黃檗處曰 問話上座 雖是後生 却甚奇特 若來辭 方便接伊 已後爲一株大樹 覆蔭天下人去在 碧巖錄第五則 時稜道者出衆云 恁麽則今日堂中大有人喪身失命去在

거재(去在) 조사니 구미에 둠. 행위의 동작이 장차 출현하려 함을 표시. 오등회원11 임제의현. (; 목주)가 먼저 황벽의 처소에 이르러 가로되 화()를 물은 상좌는 비록 이 후생이지만 도리어 매우 기특합니다. 만약 와서 고별하거든 방편으로 그를 접인하십시오. 이후에 한 그루의 큰 나무가 되어 천하인을 부음(覆蔭; 덮고 그늘지게)할 것입니다(覆蔭天下人去在). 벽암록 제5. 때에 능도자가 대중에서 나와 이르되 이러하시다면 곧 금일 당중(堂中)에 다시 어떤 사람이 상신실명할 것입니다(喪身失命去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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去粘解縛謂去除身上之粘縛 轉指解去煩惱執著 以達自在無礙之境 碧巖錄第七十三則 大凡宗師 須與人抽釘拔楔 去粘解縛 方謂之善知識

거점해박(去粘解縛) 이르자면 신상의 점박(粘縛; 끈끈하게 속박한 것)을 거재(去除; 제거). ()하여 번뇌의 집착을 풀고 제거하여 자재무애한 경지에 도달함을 가리킴. 벽암록 제73. 대범(大凡; 대개. 무릇) 종사는 모름지기 사람에게 추정발설(抽釘拔楔)하고 거점해박(去粘解縛)해 주어야 비로소 이를 일러 선지식이라 한다.


居靜宋代楊岐派僧 字愚丘 成都(今屬四川)楊氏 年十四 依白馬寺安慧出家 聞南堂元靜道望 往謁 言下大悟 受法 出世潼川護聖寺 [五燈會元二十 五燈嚴統二十]

거정(居靜) 송대 양기파승. 자는 우구(愚丘)며 성도(지금 사천에 속함) 양씨. 나이 14에 백마사 안혜에 의지해 출가했으며 남당원정(南堂元靜)의 도망(道望; 도의 명망)을 듣고 가서 알현하여 언하에 대오하고 법을 받았으며 동천 호성사에서 출세했음 [오등회원20. 오등엄통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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居頂(?-1404) 明初臨濟宗僧 臺州(浙江臨海)人 俗姓陳 號圓極 別號圓庵 十五歲 投鄕里之淨安寺爲沙彌 就迪元瑀學楞嚴經 圓覺經 恕中無慍(楊岐下十一世)主持瑞巖寺時 師入門參學而得度 乃任侍者得嗣其法 後從恕中移住慈溪永樂 洪武十六年(1383) 初於鄞縣翠山弘法 曾固辭蜀王之請 住金華雙林寺二十八年 其後 受敕任僧錄司左講經之職 未久移住應天府(河南商邱)靈谷寺 永樂二年示寂 著有靈谷圓極居頂禪師圓庵集十卷 續傳燈錄三十六卷 此外 明版大藏經於南京開版時 師曾贊助開版工作 [居頂圓庵集 增集續傳燈錄六]

거정(居頂) (?-1404) 명초 임제종승. 대주(절강 임해) 사람. 속성은 진이며 호는 원극(圓極)이며 별호는 원암(圓庵). 15세에 향리의 정안사에 투입하여 사미가 되었으며 적원우에게 나아가 릉엄경과 원각경을 배웠음. 서중무온(恕中無慍; 양기하 11)이 서암사를 주지(主持)할 때 스님이 입문하여 참학하고 득도(得度)했으며 곧 시자에 임명됐고 그의 법을 이음을 얻었음. 후에 서중을 좇아 정계의 영락에 거주했음. 홍무 16(1383) 초에 은현 취산에서 홍법했음. 일찍이 촉왕의 요청을 고사하고 금화 쌍림사에 주()하기 28년이었음. 그 후 칙령을 받아 승록사(僧錄司) 좌강경(左講經)의 직에 임명되었고 오래지 않아 응천부(하남 상구) 영곡사로 이주했고 영락 2년에 시적했음. 저서에 영곡원극거정선사원암집 10권과 속전등록 36권이 있음. 이 외에 명판대장경(明版大藏經)을 남경에서 개판(開版)할 때 스님이 일찍이 개판 공작을 찬조했음 [거정원암집. 증집속전등록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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擧鼎拔山擧鼎 史記七云 項籍者 下相人也 字羽 (中略)籍長八尺餘 力能扛鼎 才氣過人 雖吳中子弟皆已憚籍矣 拔山 史記七云 項王軍壁垓下 兵少食盡 漢軍及諸侯兵圍之數重 夜聞漢軍四面皆楚歌 項王乃大驚曰 漢皆已得楚乎 是何楚人之多也 項王則夜起 飮帳中 有美人名虞 常幸從 駿馬名騅 常騎之 於是項王乃悲歌慷慨 自爲詩曰 力拔山兮氣蓋世 時不利兮騅不逝 騅不逝兮可奈何 虞兮虞兮奈若何 歌數闋 美人和之 項王泣數行下 左右皆泣 莫能仰視 笑隱大訢語錄一 若無擧鼎拔山力 千里烏騅不易騎

거정발산(擧鼎拔山) 거정(擧鼎)이란 사기 7에 이르되 항적(項籍)이란 자는 하상 사람이며 자가 우()(중략)항적의 신장은 8, 9척여(尺餘)며 힘이 능히 솥을 들어 올렸으며 재기(才氣)가 타인을 초과했다. 비록 오중(吳中)의 자제일지라도 다 이미 항적을 꺼려했다. 발산(拔山)이란 사기 7에 이르되 항왕의 군대가 해하(垓下)에서 굳게 지켰으나() 장병은 적고 식량이 다했다. 한군(漢軍) 및 제후의 장병이 에워싸기가 몇 겹이었다. 밤에 들으니 한군의 사면이 다 초가(楚歌)였다. 항왕이 이에 크게 놀라 가로되 한()이 다 이미 초()를 얻었는가, 이 어찌하여 초인(楚人)(이렇게도) 많은가. 항왕이 곧 밤에 일어나 장막 속에서 (술을) 마셨다. 미인이 있었으니 이름이 우()며 늘 행종(幸從; 총애를 얻어 따라 다님)했다. 준마의 이름이 추()였는데 늘 이를 탔다. 이에 황왕이 곧 슬픈 노래로 강개(慷慨)했다. 스스로 시를 지어 가로되 힘은 산을 뽑고(拔山) 기운은 세상을 덮는데/ 시운이 불리하니 추()도 가지 않는구나/ 추가 가지 않으니 어찌해야 옳을까/ (), 우여, 어찌해야 할꼬. 노래를 몇 번 끝냈고 미인이 이에 화응했다. 항왕이 울며 (눈물을) 몇 줄 떨어뜨리자 좌우가 다 울면서 능히 우러러보지 못했다. 소은대흔어록1. 만약 솥을 들고 산을 뽑을(擧鼎拔山) 힘이 없다면 천 리의 오추(烏騅)를 타기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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