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劍端祖】 淸代臨濟宗僧達祖 字劍端 詳見達祖
검단조(劍端祖) 청대 임제종승 달조의 자가 검단이니 상세한 것은 달조(達祖)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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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黔黎】 黔首黎民的合稱 泛指群衆 百姓 史記云 始皇二十六年 更名萬民爲黔首也 ▲祖庭事苑五 子豈不聞始皇坑儒焚書 欲我黔黎歸于淳素 民至于今 咸稱無道
검려(黔黎) 검수(黔首)와 여민(黎民)의 합칭. 널리 군중과 백성을 가리킴. 사기에 이르되 시황 26년에 만민의 명칭을 고쳐 검수(黔首)라 했다. ▲조정사원5. 자네가 어찌 듣지 못했는가, 시황이 갱유분서한 것은 우리의 검려(黔黎)를 순소(淳素; 순박 소박)로 돌아가게 하려 했으나 인민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다 일컫되 무도하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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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劍嶺志公】 祖庭事苑六 劍嶺誌公 桉僧傳(高僧傳十) 寶誌 齊建元中(479- 482) 稍見異迹 武帝延入後堂居之 旣而 景陽山猶有一誌 與七僧俱 帝怒 遣推檢 失所在 問吏 云誌久在後堂 自後凡遇出 卽以墨塗其身而記云 此言景陽山 不言劍嶺也 ▲廣燈錄十五風穴延昭 問 晦夜不隱 日中無影 未審是凡是聖 師云 劒嶺志公常立望
검령지공(劍嶺志公) 조정사원6. 검령지공(劍嶺志公) 승전(僧傳; 고승전10)을 안험하니 보지(寶誌)는 제(齊) 건원 중(479-482)에 조금 이적(異迹)을 나타냈다. 무제가 연청(延請)해 후당(後堂)에 들게 하여 거기에서 거처하게 했다. 이미 그러고선 경양산(景陽山)에 오히려 한 보지가 있고 7승(僧)과 함께 한다 하므로 제가 노해 추검(推檢)을 보냈는데 소재를 잃었다. 관리에게 물으니 이르되 보지는 오래도록 후당에 있다 했다. 후로부터 무릇 외출함을 만나면 곧 먹으로써 그 몸에 발라 표기했다. 여기에서 말하되 경양산이라 했고 검령을 말하지 않았음. ▲광등록15 풍혈연소. 묻되 어두운 밤에 은폐하지 못하고 한낮에 그림자가 없다면 미심합니다, 이는 범부입니까, 이는 성인입니까. 스님이 이르되 검령의 지공(劒嶺志公)이 늘 서서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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