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태화선학대사전 1책(ㄱ)

국역태화선학대사전(國譯泰華禪學大辭典) 1책(ㄱ) 287쪽

태화당 2019. 5. 1. 18:45

劍端祖淸代臨濟宗僧達祖 字劍端 詳見達祖

검단조(劍端祖) 청대 임제종승 달조의 자가 검단이니 상세한 것은 달조(達祖)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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黔黎黔首黎民的合稱 泛指群衆 百姓 史記云 始皇二十六年 更名萬民爲黔首也 祖庭事苑五 子豈不聞始皇坑儒焚書 欲我黔黎歸于淳素 民至于今 咸稱無道

검려(黔黎) 검수(黔首)와 여민(黎民)의 합칭. 널리 군중과 백성을 가리킴. 사기에 이르되 시황 26년에 만민의 명칭을 고쳐 검수(黔首)라 했다. 조정사원5. 자네가 어찌 듣지 못했는가, 시황이 갱유분서한 것은 우리의 검려(黔黎)를 순소(淳素; 순박 소박)로 돌아가게 하려 했으나 인민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다 일컫되 무도하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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劍嶺志公祖庭事苑六 劍嶺誌公 桉僧傳(高僧傳十) 寶誌 齊建元中(479- 482) 稍見異迹 武帝延入後堂居之 旣而 景陽山猶有一誌 與七僧俱 帝怒 遣推檢 失所在 問吏 云誌久在後堂 自後凡遇出 卽以墨塗其身而記云 此言景陽山 不言劍嶺也 廣燈錄十五風穴延昭 問 晦夜不隱 日中無影 未審是凡是聖 師云 劒嶺志公常立望

검령지공(劍嶺志公) 조정사원6. 검령지공(劍嶺志公) 승전(僧傳; 고승전10)을 안험하니 보지(寶誌)는 제() 건원 중(479-482)에 조금 이적(異迹)을 나타냈다. 무제가 연청(延請)해 후당(後堂)에 들게 하여 거기에서 거처하게 했다. 이미 그러고선 경양산(景陽山)에 오히려 한 보지가 있고 7()과 함께 한다 하므로 제가 노해 추검(推檢)을 보냈는데 소재를 잃었다. 관리에게 물으니 이르되 보지는 오래도록 후당에 있다 했다. 후로부터 무릇 외출함을 만나면 곧 먹으로써 그 몸에 발라 표기했다. 여기에서 말하되 경양산이라 했고 검령을 말하지 않았음. 광등록15 풍혈연소. 묻되 어두운 밤에 은폐하지 못하고 한낮에 그림자가 없다면 미심합니다, 이는 범부입니까, 이는 성인입니까. 스님이 이르되 검령의 지공(劒嶺志公)이 늘 서서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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