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자역주 조정사원

석자역주(釋字譯註) 조정사원(祖庭事苑) 卷第六 風穴衆吼集 35 현두자고(懸頭刺股)

태화당 2019. 9. 7. 10:43

懸頭刺股머리를 매달고 넓적다리를 찌르다.

孫敬 字文寶 常閉戶讀書 睡則以繩繫頭 懸之梁上 嘗入市 市人見之 皆曰閉戶先生 帝特徵 不就 見先賢傳 蘇秦 洛陽人 與魏張儀師鬼谷先生 讀書至睡 引錐自刺其股 血流至踝 後爲六國相 見戰國策 隋高僧智舜 專習道觀 不務有緣 妄心卒起 不可禁者 卽刺股流血 或抱石巡塔 須臾不逸其慮也 故髀上刺處 斑駮如鋪錦 見慧皎傳

 

孫敬(東漢 때 사람)文寶. 閉戶하고 독서했는데 잠이 오면 곧 끈으로써 머리를 묶어 대들보 위에 그것을 매달았다. 일찍이 시장에 들어가자 시장 사람들이 그를 보고 다 가로되 閉戶先生이라 했다. 가 특별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先賢傳(楚國先賢傳이니 張方 지음)을 보라. 蘇秦(-서기전 317. 戰國時代의 정치가. 河南 洛陽 사람. 鬼谷先生門人. 나라에 대항하는 六國 合從策主唱하고 六國大臣이 됨)은 낙양 사람이다. 나라의 張儀(連衡을 부르짖었으며 뒤에 大臣이 되었음)鬼谷先生(戰國時代의 학자. 이며 이름은 . 河南 鬼谷 사람이므로 鬼谷先生이라 함. 著書鬼谷子 一卷이 있으나 後人僞作이라고도 함)師事했다. 독서하다가 졸음에 이르면 송곳을 당겨 스스로 그 넓적다리를 찔렀는데 피가 흘러 발꿈치(는 발꿈치 과. 복사뼈 과)에 이르렀다. 뒤에 六國의 재상이 되었다. 戰國策(三十三篇. 前漢劉向이 지었다 함. 安王으로부터 始皇帝까지의 전국시대 여러 나라의 事情國別로 쓴 책. 策秦一)을 보라. 의 고승 智舜은 오로지 道觀을 익히고 有緣에 힘쓰지 않았다. 妄心이 갑자기 일어나 가히 하지 못하면 곧 넓적다리를 찔러 피를 내거나 혹은 돌을 안고 탑을 돌아 須臾라도 그 생각을 방일하지 않았다. 고로 넓적다리 위의 찌른 곳에 斑駮(은 얼룩 반. 은 얼룩질 박. 섞일 박. 곧 얼룩덜룩함)이 비단을 편 것과 같았다. 慧皎傳을 보라(慧皎傳이 아님. 續高僧傳卷第十七 智舜傳에 나오는 얘기임).

 

囓鏃은 물 설. . 원음이 열. 은 살촉 족.

正作齧 結切 噬也 隋末有督君謨者 善閉目而射 志其目則中目 志其口則中口 有王靈智者 學射於謨 以爲曲盡其妙 欲射殺謨 獨擅其美 謨執一短刀 箭來輒截之 唯有一失 謨張口承之 遂齧其鏑 笑曰 汝學射三年 吾未敎汝齧鏃之法 見太平廣記 鏑 音的 箭鏃也

 

바로 로 지어야 하나니 結切이며 (깨물 서. 씹을 서). 隋末督君謨란 자가 있었는데 잘 눈을 감고 쏘았다. 그 눈에 뜻을 두면 곧 눈을 맞쳤고 그 입에 뜻을 두면 곧 입을 맞쳤다. 王靈智란 자가 있어 에게 射術을 배웠는데 그 曲盡(委曲히 다함)하게 되었다. 射殺하고 그 아름다움을 獨擅(은 멋대로 할 천. 곧 홀로 擅斷)하려 했다. 가 한 短刀를 갖고 화살이 오면 곧 그것을 잘랐다. 오직 한 번 실수가 있었는데 가 입을 벌려 그것을 받고서 드디어 그 살촉을 깨물었다. 웃으며 가로되 네가 사술을 배우기가 三年이었지만 내가 너에게 살촉을 무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다. 太平廣記(나라의 李昉十二名勅命으로 지음. 으로부터 五代에 이르기까지의 傳說 奇聞을 종류에 따라 분류해 收錄. 太平興國二年977著手하여 八年983에 완성함. 五百卷. 附錄十卷. 卷第二百二十七)를 보라. 은 음이 적이니 화살촉임.

 

鷹俊은 매 응.

當作鷹隼 見傳燈

 

마땅히 鷹隼으로 지어야 하나니 전등록(卷第十三)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