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태화선학대사전 5책(ㅅ)

국역태화선학대사전(國譯泰華禪學大辭典) 5책(ㅅ) 546쪽

태화당 2019. 11. 9. 10:21

西山亮禪師語錄一卷 宋代臨濟宗僧西山亮語 覺心志淸共編 又稱西山和尙語錄 內容輯錄亮住建康府淸眞禪院 慶元府靈隱禪院等二會之語錄 及偈頌 佛事 卷首載天目文禮之序 卷末附錄北磵居簡撰之塔銘 癡絶道冲及無準師範之跋 節錄自枯崖漫錄中卷 下卷之西山亮禪師記事 今收錄於卍續藏第一二一冊

서산량선사어록(西山亮禪師語錄) 1. 송대 임제종승 서산량의 어록이니 각심과 지청이 공편(共編)했음. 또 명칭이 서산화상어록임. 내용은 양()이 건강부 청진선원과 경원부 영은선원 등에 주()하면서의 2()의 어록 및 게송ㆍ불사를 집록했음. 권수에 천목문례의 서가 실렸음. 권말의 부록은 북간거간이 지은 탑명ㆍ치절도충 및 무준사범의 발()ㆍ고애만록중권과 하권의 서산량선사의 기사(記事)로부터의 절록(節錄). 지금 만속장 제121책에 수록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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瑞相吉瑞之形 顯見於人目者 了堂惟一語錄四 要敎瑞相時時現 空却塵勞種種心

서상(瑞相) 길서(吉瑞)의 형상이 사람의 눈에 환히 보이는 것. 요당유일어록4. 서상(瑞相)이 시시로 나타나게 함을 요한다면 진로(塵勞; 번뇌)의 갖가지 마음을 비워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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瑞像優塡王始以栴檀作釋迦佛之形像 瑞相圓滿 故名瑞像 [西域記五] 行事鈔下一 恐後生造像無所表彰 故目連躬將匠工上天圖取 如是三反方乃近眞 (中略)此像中國僧將來漢地 諸國不許 各愛護之不令出境 王令依本寫留之 今後傳者乃至四寫彼本 今在楊州長樂寺 亦云龍光瑞像 同資持記下之一曰 中國僧者卽鳩摩羅琰 從西天負像欲來此方 路經四國 皆被留本圖寫 至龜茲國 王抑令返道 以妹妻之 後生羅什 齎至姚秦 後南宋孝武破秦 躬迎此像 還于江左 止龍光寺 至隋朝於楊州置長樂寺 有僧奏請瑞像歸寺 今在帝京 此據龍光壁記(今者爲宋朝 在帝京者 汴都西華門外之聖禪院也) 了菴淸欲語錄五 栴檀佛 怛薩阿竭 栴檀瑞像 肇自優塡 造於智匠 佛從天降 像亦地升 震旦之記 廣利有情 歷歲二千 三百有七 屆于皇元

서상(瑞像) 우전왕이 처음에 전단(栴檀)으로 석가불의 형상을 만들었는데 서상(瑞相)이 원만한지라 고로 명칭이 서상(瑞像)[서역기5]. 행사초하1. 후생(後生)이 조상(造像)하매 표창(表彰)할 바가 없을까 염려한지라 고로 목련이 몸소 장공(匠工)을 데리고 상천(上天)하여 도취(圖取; 그림)했다. 이와 같이 세 번 반복하여 비로소 곧 근진(近眞)했다 (중략) 이 상()을 중국승이 한지(漢地)로 가지고 오려 하자 여러 나라에서 불허했고 각기 그것을 애호(愛護)하며 출경(出境)하지 못하게 했고 왕령(王令)으로 원본에 의거해 묘사하여 그것을 머물게 했다. 금후(今後)에 전하는 것은 내지 그 원본을 4()하였음이다. 여금에 양주 장락사에 있다. 또한 이르되 용광서상(龍光瑞像)이다. () 자지기하(資持記下)1에 가로되 중국승이란 것은 곧 구마라염(鳩摩羅琰)이다. 서천으로부터 상()을 지고 이 지방에 오려고 했는데 도로가 4()을 경력했다. 모두 원본을 억류함을 입어 도사(圖寫)했다. 구자국(龜茲國)에 이르자 왕이 억눌러 반도(返道; 返回니 곧 환속)하게 하고 누이를 그에게 시집보냈으며 후에 라집을 낳았다. 가져와서() 요진(姚秦)에 이르렀다. 후에 남송 효무(孝武)가 파진(破秦)하고는 몸소 이 서상을 영접하여 강좌(江左)로 돌아가 용광사(龍光寺)에 머물렀다. 수조(隋朝)에 이르러 양주에 장락사(長樂寺)를 설치했는데 어떤 승인이 주청하여 서상을 귀사(歸寺)했다. 여금()에 제경(帝京)에 있다. 이는 용광벽기(龍光壁記)에 의거했다(이란 것은 宋朝가 된다. 帝京에 있다는 것은 汴都 西華門 밖의 聖禪院이다). 요암청욕어록5. 전단불(栴檀佛) 달살아갈(怛薩阿竭)/ 전단서상(栴檀瑞像)/ 우전(優塡)으로부터 비롯했고/ 지장(智匠)에게서 조성되었다/ 불타가 천상으로부터 내려오자/ 서상도 또한 땅에서 올랐다/ 진단(震旦)의 기별(記別)/ 유정을 광리(廣利)한다/ 역세(歷歲)가 이천/ 3백 유칠(有七)/ 황원(皇元)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