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주원각경

어주원각경(御註圓覺經) 청정혜보살(淸淨慧菩薩)

태화당 2025. 10. 24. 07:42

於是淸淨慧菩薩 在大衆中 卽從座起 頂禮佛足 右繞三匝 長跪叉手 而白佛言 大悲世尊 爲我等輩 廣說如是不思議事

菩薩謂佛前章所言 皆是不可思惟 不可擬議之事

●擬議; 思慮 遲疑 說文 擬 度也 說文 議 語也

 

이에 청정혜보살(淸淨慧菩薩)이 대중 가운데 있다가 자리로 좇아 일어나 불족(佛足)에 정례(頂禮)하고 세 바퀴 우요(右繞)하고 장궤(長跪)하여 차수(叉手)하고 불타에게 사뢰어 말하되 대비하신 세존이 아등(我等)의 무리를 위해 이와 같은 부사의사(不思議事)를 광설(廣說)하셨거니와

보살이 이르되 불타가 전장(前章)에서 말씀하신 바는 모두 이 가히 사유(思惟)하지 못하며 가히 의의(擬議)하지 못할 일입니다.

擬議; 사려(思慮). 지의(遲疑; 주저하며 의심함). 설문 의() (; 헤아리다)이다. 설문 의() ().

 

本所不見 本所不聞

佛所說不思議事 菩薩等本來不曾得見 本來不曾得聞

 

본래 보지 못한 바이며 본래 듣지 못한 바입니다.

불타가 설한 바 부사의사(不思議事)는 보살 등이 본래 일찍이 득견(得見)하지 못했고 본래 일찍이 득문(得聞)하지 못했다.

 

我等今者蒙佛善誘 身心泰然 得大饒益

承佛誘誨 無諸疑惑 善誘者 卽論語循循然善誘人之說

循循然; 祖庭事苑二 循循 論語 夫子循循然善誘人 循循 次序貌 言夫子正以此道勸進人 有次序

 

아등(我等)이 금자(今者; 只今)에 불타의 선유(善誘; 잘 가르치다)를 입어() 신심(身心)이 태연(泰然)하고 큰 요익(饒益)을 얻었습니다.

불타의 유회(誘誨; 달래고 가르침)를 승수(承受; 承)하여 여러 의혹이 없습니다. 선유(善誘)란 것은 곧 논어(論語)의 순순연(循循然)히 잘 사람을 가르치다(誘)의 설(說)이다.

循循然; 조정사원2. 순순(循循) 논어 부자(夫子)가 순순연(循循然)히 잘 사람을 가르치다. 순순은 차서(次序; 차례의 순서)의 모양이니 말하자면 부자가 바로 이 도로써 사람에게 권해 나아가게(勸進) 하매 차서가 있음임.

 

願爲諸來一切法衆 重宣法王圓滿覺性

菩薩請佛重說圓覺法門也 佛爲萬法之主 故曰法王 圓覺妙性 廣大圓滿 故曰圓滿覺性

 

원컨대 모든 도래(到來; )한 일체 법중(法衆)을 위해 법왕(法王)의 원만한 각성(覺性)을 중선(重宣)하십시오.

보살이 불타가 원각의 법문을 중설(重說)하기를 청했다. 불타가 만법의 주(主)가 되는지라 고왈(故曰) 법왕(法王)이며 원각의 묘성(妙性)이 광대하고 원만한지라 고왈 원만한 각성(覺性)이다.

 

一切衆生及諸菩薩 如來世尊所證所得 云何差別

菩薩又請佛說衆生菩薩佛所證悟處 差別不同之理

 

일체중생 및 모든 보살ㆍ여래세존(如來世尊)이 소증소득(所證所得)한 게 어떻게 차별(差別)됩니까.

보살이 또 불타가 중생ㆍ보살ㆍ불이 증오(證悟)한 바의 곳이 차별되어 부동(不同)한 이치를 설하기를 청했다.

 

令末世衆生聞此聖敎 隨順開悟漸次能入

欲令衆生聞佛說此聖妙之敎 順而不違開悟本性 漸次修行 入於圓覺

 

말세 중생으로 하여금 이 성교(聖敎)를 듣고 수순(隨順)하여 개오(開悟)하고 점차 능입(能入)하게 하십시오.

중생으로 하여금 불타가 설하는 이 성묘(聖妙)한 가르침을 듣고 순(順)하여 불위(不違)하고 본성을 개오(開悟)하여 점차 수행하여 원각에 들게 하려고 했다.

 

作是語已 五體投地 如是三請 終而復始

 

이 말을 지어 마치자 오체를 투지했다. 이와 같이 삼청(三請)하고는 마치자 다시 시작했다.

 

爾時世尊告淸淨慧菩薩言 善哉善哉 善男子 汝等乃能爲末世衆生 請問如來漸次差別 汝今諦聽 當爲汝說 時淸淨慧菩薩奉敎歡喜 及諸大衆默然而聽

 

이때 세존이 청정혜보살에게 고()해 말씀하시되 선재선재(善哉善哉)로다 선남자여, 여등(汝等)이 이에 능히 말세 중생을 위해 여래의 점차(漸次)의 차별을 청문(請問)하니 너는 이제 체청(諦聽)하라, 마땅히 너를 위해 설하리라. 때에 청정혜보살이 봉교(奉敎)하여 환희했고 및 모든 대중이 묵연히 들었다.

 

善男子 圓覺自性

佛謂圓滿覺性 乃本來自性 非從緣而有也

 

선남자여 원각의 자성은

불타가 이르되 원만한 각성은 곧 본래의 자성이며 연(緣)을 좇아 있음이 아니다.

 

非性性有

前說五性皆非圓覺自性 故曰非性 諸非性中 圓覺自性 一一具足 故曰非性性有

 

성이 아니면서(非性) 성이 있나니(性有)

앞에서 설한 5성(性)은 모두 원각의 자성이 아닌지라 고왈(故曰) 성이 아니다(非性). 모든 비성(非性) 중에 원각의 자성을 하나하나 구족한지라 고왈 성이 아니면서 성이 있다(非性性有).

 

循諸性起

圓覺自性隨順諸緣 故五性起時 覺性亦起 圓覺疏亦曰 圓覺隨緣 徧諸差別之性 諸性起時覺性亦起

 

제성(諸性)을 좇아() 일어나거니와

원각의 자성이 제연(諸緣)을 수순(隨順)하는지라 고로 5성(性)이 일어날 때 각성(覺性)도 또한 일어난다. 원각소(圓覺疏)에 또한 가로되 원각이 수연(隨緣)하여 모든 차별의 성(性)에 두루하나니 제성(諸性)이 일어날 때 각성(覺性)도 또한 일어난다.

 

無取無證

圓覺妙性 廓然淸淨 無可取者 無可證者

 

취함도 없고 증()함도 없느니라.

원각의 묘성(妙性)이 확연(廓然)히 청정하여 가히 취하는 것도 없고 가히 증하는 것도 없다.

 

於實相中 實無菩薩及諸衆生

圓覺空性 無一切相 故曰實相 此實相中 一切無有 豈有菩薩衆生之相

 

실상(實相) 중엔 실로 보살 및 모든 중생이 없나니

원각(圓覺)은 공성(空性)이라서 일체상(一切相)이 없는지라 고왈(故曰) 실상(實相)이며 이 실상 중엔 일체가 있지 않거늘 어찌 보살과 중생의 상(相)이 있겠는가.

 

何以故 菩薩衆生皆是幻化 幻化滅故 無取證者

菩薩衆生所有身心 非有眞實不滅之相 故曰皆是幻化 幻化身心旣已寂滅 則一切取證之相 悉皆無有

 

무슨 연고냐, 보살과 중생이 모두 이 환화(幻化)며 환화가 멸(; 寂滅)한 고로 취증(取證)할 것이 없느니라.

보살과 중생이 소유한 신심(身心)은 진실로 불멸(不滅)하는 상(相)이 있지 않는지라 고왈(故曰) 모두 이 환화(幻化)다. 환화의 신심(身心)이 기이(旣已) 적멸(寂滅)이니 곧 일체의 취증(取證)할 상(相)이 모두 다 있지 않다.

 

譬如眼根不自見眼

衆生不見自性 如人之眼根不自見其眼也

 

비유컨대 안근(眼根)이 스스로 눈을 보지 못함과 같나니

중생이 자성을 보지 못함이, 사람의 안근(眼根)이 스스로 그 눈을 보지 못함과 같다.

 

性自平等 無平等者

一切法性本自平等 初無凡聖之異 亦無能平等之者

 

(; 自性)이 스스로 평등하여 평등하게 할 자가 없느니라.

일체의 법성이 본래 스스로 평등하여 애초에 범성(凡聖)의 다름이 없으며 또한 능히 평등하게 할 자가 없다.

 

衆生迷倒 未能除滅一切幻化

衆生迷惑顚倒 未能除滅諸幻

 

중생이 미도(迷倒)하여 능히 일체의 환화(幻化)를 제멸(除滅)하지 못해

중생이 미혹하고 전도(顚倒)되어 능히 제환(諸幻)을 멸제(除滅)하지 못한다.

 

於滅未滅妄功用中 便顯差別

一切幻化 欲滅未滅之間 凡所修爲 皆是虛妄 於此等功用中 有頓有漸 卽顯出五種差別性也

 

()하려다가 멸하지 못하는 허망한 공용(功用) 가운데 바로 차별을 나타내거니와

일체의 환화(幻化)가 멸하려다가(欲滅) 멸하지 아니하는 사이에 무릇 수위(修爲; 修習하다)하는 바는 모두 이 허망이다. 차등(此等)의 공용(功用) 가운데에 돈(頓)이 있고 점(漸)이 있어 곧 5종(種)의 차별성(別性也)을 나타낸다(顯出).

 

若得如來寂滅隨順 實無寂滅及寂滅者

妄功用中 若悟寂滅隨順之理 寂然無念 滅而無相 隨順一切 不執我見則實無寂滅之法 亦無寂滅之人 可謂人法兩忘也

 

만약 여래의 적멸(寂滅)의 수순(隨順)을 얻는다면 실로 적멸 및 적멸하게 하는 자가 없느니라.

허망한 공용(功用) 중에 만약 적멸의 수순(隨順)하는 이치를 깨친다면 적연(寂然)하여 무념(無念)이며 멸(滅; 적멸)하여 무상(無相)이라서 일체에 수순(隨順)한다. 아견(我見)에 집착하지 않으면 곧 실로 적멸의 법이 없고 또한 적멸의 사람도 없나니 가히 인법(人法)을 양망(兩忘)한다고 이를 만하다.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由妄想我

我體元無 妄想爲有

 

선남자여 일체중생이 무시래(無始來)로 좇아 망상(妄想)의 아()

아체(我體)가 원래 없고 망상으로 있음이 된다.

 

及愛我者

愛我者 執著我相之心也

 

및 애아(愛我)하는 자로 말미암아

애아(愛我)란 것은 아상(我相)에 집착하는 마음이다.

 

曾不自知 念念生滅

衆生妄心 執著我相 不知此心念念之間旋生旋滅 本無堅固不壞之相 維摩詰經曰 是身如電 念念不住者是也

 

일찍이 스스로 알지 못하고 염념(念念)이 생멸(生滅)하는지라

중생이 망심(妄心)으로 아상(我相)에 집착하여 차심(此心)이 염념지간(念念之間)에 선생선멸(旋生旋滅; 지금 바로 생했다가 지금 바로 멸하다)하는 줄 알지 못하나니 견고(堅固)한 불괴(不壞)의 상(相)이 본래 없다. 유마힐경에 가로되 이 몸이 번개와 같아서 염념(念念)에 머물지 않는다 한 것이 이것이다.

 

故起憎愛 耽著五欲

圓覺疏曰 由執我故 順我則愛 違我則憎 故著五欲也 五欲者 一財 二色 三食 四名 五睡也

 

고로 증애(憎愛)를 일으켜 5()에 탐착(耽著)하느니라.

원각소(圓覺疏)에 가로되 집아(執我)를 말미암는 연고로 나에게 순(順)하면 곧 좋아하고 나에게 거스르면 곧 미워하는지라 고로 5욕(欲)에 탐착(貪著; 著)한다. 5욕(欲)이란 것은 1. 재(財). 2. 색(色). 3. 식(食). 4. 명(名). 5. 수(睡)다.

 

若遇善友敎令 開悟淨圓覺性 發明起滅 卽知此生 性自勞慮

衆生因敎悟性 發明妄念起滅之理 方知此生本有之性 空自勞役思慮也

 

만약 선우(善友)의 교령(敎令)을 만나 정원각성(淨圓覺性)을 개오(開悟)하여 기멸(起滅)를 발명(發明; 明悟)하면 곧 차생(此生)에 성()이 스스로 노려(勞慮)한 줄 아느니라.

중생이 가르침으로 인해 성(性; 自性)을 깨달아 망념(妄念)의 기멸(起滅)하는 이치를 발명(發明)하면 바야흐로 차생(此生)에 본유(本有)의 성(性)이 공연히 스스로 노역(勞役)하고 사려(思慮)한 줄 안다.

 

若復有人勞慮永斷 得法界淨

永息思慮 則一切處皆得淸淨 故曰得法界淨

 

만약 다시 어떤 사람이 노려(勞慮)가 영단(永斷)하여 법계의 청정(淸淨; )을 얻으면

사려(思慮)가 영식(永息)하면 곧 일체처에서 모두 청정(淸淨)을 얻는지라 고왈(故曰) 법계정(法界淨)이다.

 

卽彼淨解 爲自障礙

以淨爲淨 是爲淨解 爲彼解心障礙自性

 

곧 저 정해(淨解)가 스스로 장애가 되는지라

정(淨)을 정(淨)으로 삼는 이것이 정해(淨解)가 된다. 그(彼) 해심(解心) 때문에(爲) 자성을 장애한다.

 

故於圓覺而不自在

作意於覺 故不自如

 

고로 원각에 자재하지 못하나니

각(覺)에 뜻을 짓는지라 고로 자여(自如)하지 못하다.

 

此名凡夫隨順覺性

衆生謂覺性本來淸淨 故起淨心 隨順修習 不知此心亦爲障礙 此乃凡夫之見 非菩薩見心

 

이 이름이 범부가 각성(覺性)을 수순(隨順)함이니라.

중생이 이르되 각성(覺性)이 본래 청정하다 하여 고로 정심(淨心)을 일으켜 수순(隨順)하여 수습(修習)하거니와 차심(此心)이 또한 장애가 되는 줄 알지 못하나니 이것은 곧 범부의 견(見)이며 보살의 견심(見心)이 아니다.

 

善男子 一切菩薩見解爲礙

見前淨解爲障礙故

 

선남자여 일체 보살이 견해(見解)가 장애가 되어

현전(見前)의 정해(淨解)가 장애가 되는 연고이다.

 

雖斷解礙 猶住見覺

淨解雖除不作障礙 正在覺位 復爲覺礙

 

비록 해애(解礙)를 끊더라도 오히려 견각(見覺)에 머물러()

정해(淨解)를 비록 제(除)해 장애를 짓지 않아도 바로(正) 각위(覺位)에 있어 다시 각애(覺礙)가 된다.

 

覺礙爲礙 而不自在

圓覺大疏曰 所覺是礙故 能覺亦礙 由存此跡 還礙覺心 故不自在

 

각애(覺礙)가 장애가 되어 자재하지 못하나니

원각대소(圓覺大疏)에 가로되 소각(所覺)이 이 애(礙; 장애)인 연고로 능각(能覺)도 또한 애(礙)니 이 자취를 둠으로 말미암아 도리어 각심(覺心)을 장애하는지라 고로 자재하지 못하다.

 

此名菩薩未入地者隨順覺性

如此隨順本性 乃菩薩未入佛地者之見也

 

이 이름이 보살이 입지(入地)하지 못한 자가 각성(覺性)을 수순(隨順)함이니라.

이와 같이 본성을 수순(隨順)함은 곧 보살이 불지(佛地)에 들지 못한 자의 견(見; 見解)이다.

 

善男子 有照有覺 俱名障礙

有照者 卽前之淨解心也 有覺者 卽前之覺礙心也 圓覺性中 皆名障礙

 

선남자여 유조유각(有照有覺)하면 모두() 이름이 장애인지라

유조(有照)란 것은 곧 앞의 정해심(淨解心; 청정하다고 이해하는 마음)이며 유각(有覺)이란 것은 곧 앞의 각애심(覺礙心; 각에 장애되는 마음)이니 원각성(圓覺性) 가운데 모두 이름이 장애다.

 

是故菩薩常覺不住

湛然常覺 不住於相 金剛經所謂菩薩應生無所住心者 是也

 

이런 고로 보살의 상각(常覺)은 머물지 않나니(不住)

담연(湛然)한 상각(常覺)은 상(相)에 머물지 않나니 금강경에 이른 바 보살은 응당 무소주심(無所住心; 머문 바 없는 마음)을 낸다 한 것이 이것이다.

 

照與照者同時寂滅

謂所照之境與能照之智 悉皆寂滅 此乃已入佛地者也

 

()와 조자(照者)가 동시에 적멸이니라.

이르자면 소조지경(所照之境)과 능조지지(能照之智)가 모두 다 적멸이니 이것은 곧 이미 불지(佛地)에 든 자다.

 

譬如有人自斷其首 首已斷故 無能斷者 則以礙心 自滅諸礙 礙已斷滅 無滅礙者

以淨覺心 滅除諸礙 諸礙已除 覺心亦泯 如彼世人自斷其首 首已斷絕 別無能斷之人也

 

비여(譬如) 어떤 사람이 스스로 그 머리()를 끊는다면 머리가 이미 끊어진 연고로 능단자(能斷者)가 없나니 곧 애심(礙心)으로써 스스로 제애(諸礙)를 멸()하매 애()가 이미 단멸(斷滅)되어 멸애(滅礙)한 자가 없느니라.

정각심(淨覺心)으로써 제애(諸礙)를 멸제(滅除)하여 제애가 이미 제(除)해지면 각심(覺心)도 또한 민멸(泯滅; 泯)하나니 예컨대(如) 저 세인(世人)이 스스로 그 머리를 끊으매 머리가 이미 단절(斷絕)된지라 달리 능단지인(能斷之人)이 없다.

 

修多羅敎如標月指 若復見月 了知所標畢竟非月

因指見月 見月忘指 因敎詮心 悟心忘敎

因指見月; 五宗錄文益禪師 僧問 指卽不問 如何是月 師云 阿那箇是汝不問底指 又僧問 月卽不問 如何是指 師云 月 云 學人問指 和尙爲甚麽對月 師云 爲汝問指

 

수다라교(修多羅敎)는 표월(標月; 달을 標示)하는 손가락과 같나니 만약 다시 달을 본다면 소표(所標; 손가락)는 필경 달이 아닌 줄 요지(了知; 똑똑히 알다)하리니

손가락으로 인해 달을 보나니(因指見月) 달을 보았다면 손가락은 잊는다. 교(敎)로 인해 마음을 설명(詮)하나니 마음을 깨쳤다면 교(敎)를 잊는다.

因指見月; 오종록 문익선사(文益禪師). 중이 묻되 손가락은 곧 묻지 않습니다, 무엇이 이 달입니까. 스님이 이르되 어느 것이 이 네가 묻지 않는 손가락인가. 또 중이 묻되 달은 곧 묻지 않습니다, 무엇이 이 손가락입니까. 스님이 이르되 달이다. 이르되 학인이 손가락을 물었거늘 화상은 무엇 때문에 달로 대응하십니까. 스님이 이르되 네가 손가락을 물었기 때문이다.

 

一切如來 種種言說 開示菩薩 亦復如是

諸佛開說法性 正如以指標月

 

일체 여래가 갖가지 언설로 보살에게 개시(開示)함도 또한 다시 이와 같느니라.

제불이 법성(法性)을 개설(開說)함도 바로 손가락으로써 달을 표시(標示)함과 같다.

 

此名菩薩已入地者隨順覺性

如此隨順本性 乃菩薩已入佛地者之見也 入地者 入佛之地位者也

 

이 이름이 보살이 이미 입지(入地)한 자가 각성(覺性)을 수순(隨順)함이니라.

이와 같이 본성을 수순(隨順)하면 곧 보살이 이미 불지(佛地)에 든 자의 견(見)이다. 입지(入地)란 것은 불타의 지위에 든 자다.

 

善男子 一切障礙 卽究竟覺

菩薩初發心時名本始覺 圓覺成就名究竟覺 今見諸障礙卽究竟覺者 蓋已入佛地 無一切差別心也

 

선남자여 일체의 장애가 곧 구경각(究竟覺)이며

보살이 초발심했을 때는 이름이 본시각(本始覺)이며 원각을 성취하면 이름이 구경각(究竟覺)이다. 지금 모든 장애를 보매 곧 구경각이란 것은 대개 이미 불지에 들어 일체의 차별심이 없음이다.

 

得念失念無非解脫

得念是無念 失念是有念 佛知諸念本空了無得失 故皆得解脫

 

득념(得念)과 실념(失念)이 해탈이 아님이 없으며

득념(得念)은 이 무념(無念)이며 실념(失念)은 이 유념(有念)이다. 불타가 제념(諸念)이 본공(本空)이라서 마침내 득실이 없는 줄 안지라 고로 모두 해탈을 얻는다.

 

成法破法 皆名涅槃

進修曰成 毀謗爲破 佛知諸法本空了無成壞 故皆名涅槃

 

성법(成法)과 파법(破法)이 모두 이름이 열반이며

진수(進修)를 가로되 성(成)이며 훼방(毀謗)이 파(破)가 된다. 불타가 제법(諸法)이 본공(本空)이라서 마침내 성괴(成壞)가 없는 줄 안지라 고로 모두 이름이 열반이다.

 

智慧愚癡 通爲般若

智慧者 已悟之性 愚癡者 未悟之性 究其本源 同一佛性 故曰通爲般若

 

지혜와 우치가 통틀어() 반야가 되며

지혜자는 이미 깨친 성(性)이며 우치자는 깨치지 못한 성(性)이다. 그 본원(本源)을 추구(推究)하매 동일한 불성인지라 고왈(故曰) 통틀어 반야가 된다.

 

菩薩外道所成就法 同是菩提

菩薩外道所立之法 雖有邪正之殊 皆是菩提覺性

 

보살과 외도가 성취한 바 법이 한가지로 이 보리(菩提)

보살과 외도가 세우는 바 법이 비록 사정(邪正)의 다름(殊)이 있지만 모두 이 보리(菩提)의 각성(覺性)이다.

 

無明眞如無異境界

眞妄一體 性本解脫

 

무명과 진여가 다른 경계가 없으며

진망(眞妄)이 일체(一體)며 성(性)이 본래 해탈했다.

 

諸戒定慧及淫怒癡 俱是梵行

戒定慧是淨 淫怒癡是染 佛於染淨 無分別心 故曰俱是梵行

梵行; 梵者淸淨之義 斷婬欲之法爲梵行 卽梵天之行法也 故稱梵行

 

모든 계정혜(戒定慧) 및 음노치(淫怒癡)가 모두 이 범행(梵行)이며

계정혜는 이 정(淨)이며 음노치는 이 염(染)이다. 불타가 염정(染淨)에 분별심이 없는지라 고왈(故曰) 모두 이 범행이다.

梵行; ()이란 것은 청정의 뜻이니 음욕의 법을 끊음이 범행임. 곧 범천의 행법인지라 고로 일컬어 범행임.

 

衆生國土 同一法性

涅槃經云 我以佛眼 徧觀三界 有情無情 一切人法 悉皆究竟 究竟者 卽法性也

 

중생과 국토가 동일한 법성이며

열반경에 이르되 내가 불안(佛眼)으로써 3계(界)를 두루 보매 유정(有情)과 무정(無情)ㆍ일체의 인법(人法)이 모두 다 구경(究竟)이다. 구경이란 것은 곧 법성(法性)이다.

 

地獄天宮 皆爲淨土

佛知善惡二報皆如空華 故謂苦樂二境皆爲淨土

 

지옥과 천궁이 모두 정토가 되며

불타가 선악 2보(報)가 모두 공화(空華)한 같은 줄 안지라 고로 이르되 고락(苦樂) 2경(境)이 모두 정토가 된다.

 

有性無性 齊成佛道

有性三乘也 無性闡提也 佛眼觀之悉皆是佛

闡提; 一闡提 又作一闡底迦 一顚迦 闡提 譯爲斷善根 信不具足 極欲 大貪 無種性 卽指斷絶一切善根 無法成佛者 入楞伽經二分闡提爲二 一斷善闡提 卽本來卽缺解脫因者(斷善根) 二大悲闡提 又作菩薩闡提 卽菩薩本著救度一切衆生之悲願 而故意不入涅槃者 又大莊嚴論經一 亦有二說 一有性闡提 借助佛力 終可成佛者 二無性闡提 無論至何時 皆不得成佛者 涅槃經二十六 一闡名信 提名不具 不具信故名一闡提

 

유성(有性)과 무성(無性)이 가지런히 불도(佛道)를 이루며

유성(有性)은 삼승(三乘)이며 무성(無性)은 천제(闡提)다. 불안으로 이(之)를 관하매 모두 다 이 불(佛)이다.

闡提; 일천제(一闡提; icchantika)니 또 일천지가(一闡底迦)ㆍ일전가(一顚迦)ㆍ천제(闡提)로 지음. 번역하면 단선근(斷善根)ㆍ신불구족(信不具足)ㆍ극욕(極欲)ㆍ대탐(大貪)ㆍ무종성(無種性)이니 곧 일체 선근을 단절하여 성불할 법이 없는 자를 가리킴. 입릉가경2에 천제를 분류해 둘로 삼았음. 1. 단선천제(斷善闡提) 본래 곧 해탈인(解脫因)이 결()한 자(斷善根). 2. 대비천제(大悲闡提) 또 보살천제로 지음. 곧 보살이 본래 일체중생을 구도(救度)하겠다는 비원(悲願)에 집착하여 고의로 열반에 들지 않는 자임. 또 대장론경1 또한 2설이 있으니 1. 유성천제(有性闡提) 불력의 도움을 빌려 마침내 가히 성불할 자. 2. 무성천제(無性闡提) 어느 때에 이름을 논함이 없이 모두 성불을 얻지 못하는 자. 열반경26. 일천(一闡)은 이름이 신()이며 제()는 이름이 불구(不具)니 믿음을 갖추지 못한 고로 이름이 일천제(一闡提).

 

一切煩惱 畢竟解脫

佛謂煩惱本空 故云畢竟解脫

 

일체의 번뇌가 필경 해탈이니라.

불타가 이르되 번뇌가 본공(本空)한지라 고로 이르되 필경 해탈이다.

 

法界海慧照了諸相 猶如虛空 此名如來隨順覺性

法界海慧者佛之智慧 如法界之廣 如大海之深故也 其慧光照了諸相 如太虛空廓然無礙 方爲佛之隨順覺性 此之隨順 如孔子之無可無不可 是也

 

법계해혜(法界海慧)가 제상(諸相)을 조료(照了; 비추다)함이 마치 허공과 같나니 이 이름이 여래가 각성(覺性)을 수순(隨順)함이니라.

법계해혜(法界海慧)란 것은 불타의 지혜니 법계의 넓음과 같고 대해의 깊음과 같은 연고이다. 그 혜광(慧光)이 제상(諸相)을 조료(照了)함이 태허공(太虛空)이 확연(廓然)하여 무애(無礙)임과 같나니 바야흐로 불타가 각성을 수순함이 된다. 여기의 수순(隨順)은 예컨대(如) 공자(孔子)의 가(可)도 없고 불가(不可)도 없다(論語微子)가 이것이다.

 

善男子 但諸菩薩及末世衆生 居一切時 不起妄念

不起妄念者 不起一切念也

 

선남자여 단지 모든 보살 및 말세 중생은 일체에 거처할 때 망념(妄念)을 일으키지 말고

망념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은 일체념(一切念)을 일으키지 않음이다.

 

於諸妄心 亦不息滅

妄心卽是眞心 不必求其息滅

 

모든 망심(妄心)을 또한 식멸(息滅)하지 말고

망심(妄心)이 곧 이 진심(眞心)이니 꼭(必) 그 식멸(息滅)을 구하지 않는다.

 

住妄想境 不加了知

於此妄想境界 不起了知之心

 

망상경(妄想境)에 머물면서 요지(了知)를 가하지 말고

이 망상 경계에서 요지지심(了知之心)을 일으키지 않는다.

 

於無了知 不辨眞實

知心旣寂 卽是眞實 何必更起辨別之念

 

요지(了知)가 없음에서 진실을 변별(辨別)하지 말아라.

심(心)이 이미 적(寂)했음을 앎이 곧 이 진실이거늘 하필 다시 변별지념(辨別之念)을 일으키겠는가.

 

彼諸衆生 聞是法門 信解受持 不生驚畏 是則名爲隨順覺性

衆生修此無念法門 不驚不畏者 乃修其本來無念之性 無所迷執故也

 

() 모든 중생이 이 법문을 듣고 신해(信解)하고 수지(受持)하면서 경외(驚畏)를 내지 않으면 이것을 곧 이름하여 각성(覺性)을 수순(隨順)함이니라.

중생이 이 무념법문(無念法門)을 닦으면서 불경불외(不驚不畏)하는 자는 곧 그 본래의 무념지성(無念之性)을 닦음이니 미집(迷執)하는 바가 없는 연고이다.

 

善男子 汝等當知 如是衆生 已曾供養百千萬億恒河沙諸佛及大菩薩 植衆德本

衆生於過去劫中 曾供養無數諸佛菩薩 種種善根 方得聞此法門

 

선남자여 여등(汝等)은 당지(當知)하라, 이와 같은 중생은 이미 일찍이 백천만억 항하사 제불 및 대보살에게 공양하며 뭇 덕본(德本)을 심었나니

중생이 과거겁(過去劫) 중에 일찍이 무수한 제불보살에게 공양한 갖가지 선근(善根)으로 비로소 이 법문을 득문(得聞)하였다.

 

佛說是人 名爲成就一切種智

名爲成就者 性本圓成 假名成就爾 種者種性 智者智慧

 

불타가 설하되 이 사람은 이름하여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성취했다고 하느니라.

이름하여 성취라고 한 것은 성(性)이 본래 원성(圓成)했으며 가명(假名)이 성취일 따름이다. 종(種)이란 것은 종성(種性)이며 지(智)란 것은 지혜다.

 

爾時世尊欲重宣此義而說偈言

 

이때 세존이 이 뜻을 중선(重宣)하려고 게를 설해 말씀하시되

 

淸淨慧當知 圓滿菩提性

無取亦無證 無菩薩衆生

 

청정혜여 당지(當知)하라/ 원만한 보리성(菩提性)/ 취함도 없고 증()도 없고/ 보살과 중생도 없다.

 

覺與未覺時 漸次有差別

衆生爲解礙 菩薩未離覺

入地永寂滅 不住一切相

大覺悉圓滿 名爲徧隨順

 

()과 미각(未覺)했을 때/ 점차로 차별이 있어/ 중생은 해애(解礙; 에 장애)가 되고/ 보살은 각()을 여의지 못하느니라/ 입지(入地; 佛地)해야 영원히 적멸이라서/ 일체상(一切相)에 머물지 않나니/ 대각(大覺)은 모두 원만하여/ 이름해 편수순(徧隨順)이니라.

 

末世諸衆生 心不生虛妄

佛說如是人 現世卽菩薩

供養恒沙佛 功德已圓滿

雖有多方便 皆名隨順智

 

말세의 모든 중생이/ 마음에 허망을 내지 않으면/ 불설(佛說)하되 이와 같은 사람은/ 현세(現世)에 곧 보살이니라/ 항사불(恒沙佛)에게 공양하여/ 공덕이 이미 원만하고/ 비록 방편이 많지만/ 모두 이름이 수순지(隨順智)니라.

 

御註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