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호야록상

나호야록상(羅湖野錄上) 하산변(何山辯; 明辯) 선사

태화당 2025. 11. 15. 09:37

 

湖州何山辯禪師 遊方至西京少林 聞僧擧龍門佛眼禪師以古詩發明罽賓王斬獅子尊者話曰 楊子江頭楊柳春 楊花愁殺渡江人 一聲殘笛離亭晩 君向瀟湘我向秦 默有所契 卽趨龍門坐夏 居無何 佛眼擧前話問之 辯擬對 佛眼以手托開 辯趨出 豁然大徹 復回吐露 佛眼拽杖逐之 已而 山門使匃麥太湖 以病不克行 遂還苕谿 菴于峽山 久之 出世天聖 繼遷數刹 甞頌黃龍三關話曰 我手何似佛手 黃龍鼻下無口 當時所見顢頇 至今百拙千醜 我脚何似驢脚 文殊親見無著 好箇玻瓈茶盞 不要當面諱却 人人有箇生緣 從來罪大彌天 不是牽犁拽耙 便是鼎鑊油煎 佛手驢脚生緣 謝郞不在漁船 底事奔南走北 不親祖父田園 一日 葛待制勝仲𢹂客造其室 坐論天地一指 萬物一馬 袞袞不已 辯不之聽 葛疑而問曰 師謂如何 辯笑而不答 良久 厲聲喚待制 葛倉皇應諾 辯曰 天地一指 萬物一馬 葛欣然曰 須是和尙始得 坐客瞠若 竦然加敬 非所謂具活人手段 能如是乎

●何山辯; 明辯 又作明辨 宋代楊岐派僧 字正堂 安吉(今屬浙江)兪氏 事報本蘊受具 參龍門佛眼淸遠得法 作頌古百首 繼住何山 衆數千指 又遷住道場寺 紹興(1131-1162)中寂 壽七十三 [五燈會元二十 續傳燈錄二十九 敎外別傳十] ◆何山; 位於浙江省湖州府烏程縣南西 一名金蓋山 此山有何山守珣中興的移忠寺

●罽賓王斬獅子尊者; 禪苑蒙求中 君王臂落 (傳燈二)罽賓國王問師子尊者曰 師得蘊空不 者曰已得 曰 離生死不 者曰 已離 曰 旣離生死 可施我頭 者曰 身非我有 何恡於頭 王揮劒斷者頭 白乳湧高數尺 王臂自墮

●愁殺; 殺 所八切 所拜切 表示程度深

●山門; (一)又作三門 指寺院正面之樓門 以寺院多居山林之處 故有此名 一般有三個門 象徵三解脫門(空門 無相門 無作門) 故又稱三門 或僅有一門 亦稱之爲三門 (二)又作山寺 乃寺院之一般稱呼 蓋古來寺院多築於山林之間 故以山門爲寺院之別名 唯後世造於平地市井中之寺院 亦得汎稱山門 又一寺住持以下之全體修行者 亦總稱山門 [象器箋殿堂類] 此指(二)

●顢頇; 顢頇瞞頇瞞盰 諸禪錄混用 頇 顢頇 大面貌也 糊塗也 顢頇卽糊塗之義

●文殊親見無著; 釋無著 姓董氏 永嘉人 年十二 依本州龍泉寺猗律師出家 誦大乘經數十萬偈 唐天寶八年(749) 以業優得度 二十一歲首習毘尼 因詣金陵牛頭山忠禪師 參受心要 大曆二年(767)正月 發跡浙右 夏五月初 至淸涼嶺下 時日暮 倏見化寺 因扣扉請入 有一童子 名胊胝者 延無著入 主僧問曰 師自何來 無著具對 又曰 彼方佛法何如 答 時逢像季 隨分戒律 復問 衆有幾何 曰 或三百 或五百 無著曰 此處佛法如何 答云 龍蛇混跡 凡聖同居 又問 衆有幾何 答云 前三三與後三三 無著乃良久無對 主僧命童子送客出門 無著問曰 此寺何名 答 淸涼寺 童子曰 早來所問前三三與後三三 師解否 曰 不能 童子曰 金剛背後 爾可覻之 師乃迴視 化寺卽隱 無著愴然久之 次月 無著獨詣金剛窟 倏見一老人 老人手指東北 無著隨觀 見一寺 僅五十餘步 老人牽牛前導 無著踵後 旣抵門闔 老人呼君提數聲 有童子 啓扉而出 延無著入 童子送茶二器 皆瑠璃盞 酥蜜各一器 卽玳瑁 老人謂無著云 南方有此物不 無著云 無 又云 南方旣無此物 甚裏喫茶 無著不對 無著請留一宿 老人不許曰 師有執處在也 無著云 出家之人 有何執處 老人曰 師常持三衣否 無著曰 自受戒已來持之 老人曰 此是執處也 老人說偈云 若人靜坐一須臾 勝造恒沙七寶塔 寶塔畢竟壞微塵 一念淨心成正覺 偈畢 顧童子送之出寺 至金剛窟邊 童子問曰 此何窟 無著云 名金剛窟 童子曰 金剛下更有何字 無著思惟久之 謂童子曰 下有般若字 童子曰 此卽化般若寺也 童子說偈曰 面上無瞋供養具 口裏無瞋吐妙香 心裏無瞋是眞寶 無染無著是眞如 說是偈已 無著再拜 擧首不見童子 化寺亦隱 須臾遍谷 見文殊菩薩乘大師子 萬聖翼從 凡食頃間 菩薩卽隱 上文出廣淸涼傳卷中無著和尙入化般若寺章 五燈會元九所云仰山法嗣無著文喜於五臺山見文殊者誤矣

●玻瓈茶盞; 五燈會元九 無著文喜禪師 翁拈起玻瓈盞 問曰 南方還有這箇否 師曰 無 翁曰 尋常將甚麼喫茶 師無對

●彌天; 滿天 彌 滿也 遍也

●牽犁拽耙; 同牽犂拽耙 又作牽犁拽把 一代指做畜生 二比喩修道求法 應像牛馬耕田 一心勤苦耕作

●謝郞; 卽謝三郞 一唐代玄沙師備之稱號 師俗姓謝 謝家三男之意而稱謝三郞 二泛指某漁夫 此指二

●待制; 事物紀原四曰 唐永徽五年(654) 十二月五日 詔許敬宗每日待制於武德殿 此始有待制之名 [大慧書栲栳珠]

●天地一指; 莊子齊物論 以指喩指之非指 不若以非指喩指之非指也 以馬喩馬之非馬 不若以非馬喩馬之非馬也 天地一指也 萬物一馬也

●袞袞; 正作衮衮 相繼不絶的樣子

●倉皇; 匆促而慌張(不沈著而急切忙亂) 亦作倉黃 蒼黃 倉惶 亦作倉遑 倉徨

●瞠若; 若爲語氣助詞

 

호주(湖州) 하산변(何山辯; 明辯) 선사가 유방(遊方)하다가 서경(西京) 소림(少林)에 이르렀다. 중이, 용문 불안(佛眼; 淸遠) 선사가 고시(古詩)로써 계빈왕이 사자존자를 벤 화(罽賓王斬獅子尊者話)를 발명(發明)한 것을 드는 것을 들었으니 가로되 양자강두(楊子江頭)의 양류(楊柳)의 봄이여/ 양화(楊花)가 도강인(渡江人)을 너무 근심케 한다(愁殺)/ 일성(一聲) 잔적(殘笛)이 정자(亭子; 亭)를 떠나는 저녁에/ 그대는 소상(瀟湘)을 향(向)하고 나는 진(秦)을 향한다. 묵묵히 계합하는 바가 있었다. 곧 용문으로 달려가(趨) 좌하(坐夏; 安居)했다. 거무하(居無何; 지난 지 오래지 않음)에 불안이 전화(前話)를 들어 그(之)에게 물었다. 변(辯)이 대답하려고 하는데(擬對) 불안이 손으로써 밀어젖혔다(托開). 변(辯)이 달려나가다가(趨出) 활연히 대철(大徹)했다. 복회(復回; 復歸)하여 토로(吐露)하자 불안이 주장자를 끌어다(拽杖) 그를 쫓아내었다(逐之). 이이(已而; 不久. 後來) 산문(山門)에서, 태호(太湖)에 개맥(匃麥)하게 했으나 병 때문에 능히(克) 행하지 못했다. 드디어 초계(苕谿)로 돌아와(還) 협산(峽山)에 암거(菴居; 菴)했다. 오래되자 천성(天聖)에서 출세했고 이어서(繼) 수찰(數刹)로 옮겼다. 일찍이(甞) 황룡삼관화(黃龍三關話)를 송해 가로되 아수(我手)가 불수(佛手)와 어찌 같으냐(何似) 하니/ 황룡의 코 아래 입이 없다/ 당시(當時)에 소견(所見)이 만한(顢頇)한지라/ 지금(至今) 백졸천추(百拙千醜)다. 아각(我脚)이 여각(驢脚)과 어찌 같으냐 하니/ 문수가 무착을 친견했다(文殊親見無著)/ 호개(好箇)의 파리다잔(玻瓈茶盞)은/ 당면에 휘각(諱却; 숨겨버리다)함을 요하지 않는다. 사람마다 저(箇) 생연(生緣)이 있다 하니/ 종래(從來)로 죄가 커서 하늘에 가득하다(彌天)/ 이, 쟁기를 당기고 써레를 끄는(牽犁拽耙) 게 아니라/ 바로 이 정확에 기름이 끓는다(鼎鑊油煎). 불수(佛手)ㆍ여각(驢脚)ㆍ생연(生緣)이여/ 사랑(謝郞)이 어선(漁船)에 있지 않다/ 저사(底事; 此事)로 분남주북(奔南走北)하느라/ 조부(祖父)의 전원(田園)을 가까이(親) 하지 않는다. 갈대제(葛待制) 승중(勝仲)이 객을 데리고(𢹂客) 그 실(室)로 나아가(造) 천지는 일지(天地一指)며 만물은 일마(萬物一馬)를 좌론(坐論)했는데 곤곤(袞袞)하여 그치지(已) 않았다. 변(辯)이 듣지(聽) 않았다. 갈(葛)이 의심하여 문왈(問曰) 스님은 어떻게 이르시겠습니까(謂如何). 변이 웃으며 답하지 않았다. 양구(良久)에 여성(厲聲; 嚴厲의 聲音)으로 대제를 불렀다. 갈(葛)이 창황(倉皇)하며 응낙했다. 변왈(辯曰) 천지는 일지며 만물은 일마입니다. 갈이 흔연(欣然)하며 가로되 모름지기 이는 화상이라야 비로소 옳습니다(始得). 좌객(坐客)이 당약(瞠若)했고 송연(竦然)하며 가경(加敬)했다. 이른 바 활인수단(活人手段)이 아니면 능히 이와 같겠는가.

●何山辯; 명변(明辯)이니 또 명변(明辨)으로 지음. 송대 양기파승. 자는 정당(正堂)이며 안길(지금 절강에 속함) 유씨. 보본온을 사사하고 수구(受具)했으며 용문 불안청원(佛眼淸遠)을 참해 득법했음. 송고 백수(百首)를 지었음. 하산을 승계해 거주했는데 대중의 수가 천지(千指)였음. 또 도량사로 옮겨 주(住)했음. 소흥(1131-1162) 중에 입적했으며 나이는 73 [오등회원20. 속전등록29. 교외별전10]. ◆何山; 절강성 호주부 오정현 남서(南西)에 위치하며 일명이 금계산임. 이 산에 하산수순(何山守珣)이 중흥한 이충사가 있음.

●罽賓王斬獅子尊者; 선원몽구중. 군왕비락(君王臂落) (전등2) 계빈국왕이 사자존자에게 물어 가로되 스님은 5온(蘊)이 공했음을 얻었습니까, 자가 가로되 이미 얻었습니다. 가로되 생사를 여의었습니까. 자가 가로되 이미 여의었습니다. 가로되 이미 생사를 여의었다면 가히 나에게 머리를 보시하십시오. 자가 가로되 몸도 나의 소유가 아니거늘 어찌 머리를 아끼겠습니까. 왕이 검을 휘둘러 존자의 머리를 잘랐다. 흰 젖이 솟아올라 높이가 몇 척이었으며 왕의 팔이 스스로 떨어졌다.

●愁殺; 살(殺)은 소팔절(所八切; 살)ㆍ소배절(所拜切; 쇄)이니 정도의 깊이를 표시함.

●山門; (1). 또 3문(門)으로 지음. 사원 정면의 누문(樓門)을 가리킴. 사원은 많이 산림의 곳에 거처하는지라 고로 이 이름이 있음. 일반적으로 3개의 문이 있어 3해탈문(空門ㆍ無相門ㆍ無作門)을 상징하므로 고로 또 명칭이 3문임. 혹 겨우 1문만 있어도 또한 이를 일컬어 삼문이라 함. (2). 또 산사(山寺)로 지음. 곧 사원의 일반의 칭호임. 대개 고래로 사원은 다분히 산림의 사이에 건축한지라 고로 산문을 사원의 별명으로 삼음. 오직 후세에 평지나 시정(市井) 중에 건조한 사원도 또한 널리 산문으로 일컬음을 얻음. 또 1사(寺)의 주지 이하의 전체 수행자를 또한 총칭하여 산문이라 함 [상기전전당류]. 여기에선 (2)를 가리킴.

●顢頇; 만한(顢頇)ㆍ만한(瞞頇)ㆍ만간(瞞盰)은 여러 선록에서 혼용함. 한(頇)은 만한(顢頇)이니 큰 얼굴의 모양이며 호도(糊塗)임. 만한(顢頇)은 곧 호도(糊塗)의 뜻.

●文殊親見無著; 무착은 석무착(釋無著)이니 성이 동씨(董氏)며 영가(永嘉) 사람. 나이 12에 본주(本州) 용천사의 의율사(猗律師)에게 의지해 출가했고 대승경 수십만 게를 외웠음. 당 천보 8년(749) 업(業)이 우수했으므로 득도(得度)했음. 21세에 처음으로 비니(毗尼)를 익혔고 인해 금릉 우두산의 충선사(忠禪師; 慧忠禪師니 우두법융하 5세)에게 나아가 심요(心要)를 참수(參受; 參問해 받음)했음. 대력 2년(767) 정월 절우(浙右)에서 발적(發跡)하여 하(夏) 5월 초 청량산의 고개 아래 이르렀다. 때에 해가 저무는데 갑자기 화사(化寺)가 보였고 인해 문을 두드리며 들어가기를 청했다. 한 동자가 있었으니 이름이 구지(胊胝)였고 무착을 맞이해 들였다. 주승(主僧)이 물어 가로되 어디로부터 왔는가. 무착이 갖취 대답했다. 또 가로되 그 지방의 불법은 어떠한가. 답하되 때가 상계(像季; 像法과 末法)를 만난지라 수분(隨分)의 계율입니다. 다시 묻되 대중은 얼마나 있는가. 가로되 혹은 3백이며 혹은 5백입니다. 무착이 가로되 이곳은 불법이 어떻습니까. 답해 이르되 용과 뱀이 혼적(混跡)하고 범부와 성인이 동거한다. 또 묻되 대중은 얼마나 있습니까. 답해 이르되 전삼삼(前三三)과 후삼삼(後三三)이다. 무착이 이에 양구(良久)하며 대답이 없없다. 주승이 동자에게 명하여 객을 보내 출문(出門)하게 했다. 무착이 물어 가로되 이 절은 무엇이라 이름하느냐. 답하되 청량사입니다. 동자가 가로되 아까 물은 바 전삼삼(前三三)과 후삼삼(後三三)을 스님이 아십니까. 가로되 불능(不能)이다. 동자가 가로되 금강의 등 뒤를 그대가 가히 그것을 보시라. 스님이 곧 돌아보자 화사(化寺)가 곧 은몰했다. 무착이 창연(愴然; 愴은 슬플 창)함이 오래였다. 다음 달 무착이 홀로 금강굴(金剛窟)로 나아갔다. 갑자기 한 노인이 보였는데 노인이 손으로 동북을 가리켰다. 무착이 그대로 보매 한 사원이 보였는데 겨우 50여 보(步)였다. 노인이 소를 끌고 전도(前導)했고 무착이 뒤를 따랐다. 이미 문짝에 다다르자 노인이 몇 소리로 군제(君提)를 불렀다. 어떤 동자가 문을 열고 나와 무착을 맞이해 들였다. 동자가 두 그릇의 차를 보냈는데 모두 유리잔(瑠璃盞)이었고 소밀(酥蜜)이 각기 한 그릇이었는데 곧 대모(玳瑁)였다. 노인이 무착에게 일러 가로되 남방에도 이 물건이 있습니까. 무착이 이르되 없습니다. 또 이르되 남방에 이미 이 물건이 없다면 어느 속에서 차를 마십니까. 무착이 대답하지 못했다. 무착이 1숙(宿)을 청하자 노인이 허락하지 않고 가로되 스님은 집착하는 곳이 있습니다. 무착이 이르되 출가한 사람이 무슨 집착할 곳이 있겠습니까. 노인이 가로되 스님은 늘 3의(衣)를 가집니까. 무착이 가로되 수계한 이래로 그것을 가졌습니다. 노인이 가로되 이것이 이 집착하는 곳입니다. 노인이 게를 설해 가로되 어떤 사람이 1수유(須臾)라도 정좌(靜坐)한다면/ 항사의 칠보탑을 조성함보다 수승하다/ 보탑은 필경 부서져 미진이지만/ 한 생각 청정한 마음은 정각을 이룬다. 게를 마치자 동자를 돌아보고는 보내어 사원에서 나가게 했다. 금강굴 가에 이르자 동자가 물어 가로되 이것은 어떤 굴입니까. 무착이 이르되 이름이 금강굴이다. 동자가 가로되 금강 아래는 다시 무슨 글자가 있습니까. 무착이 오래 사유하고는 동자에게 일러 가로되 아래에 반야란 글자가 있다. 동자가 가로되 이것이 곧 화(化)한 반야사(般若寺)입니다. 동자가 게를 설해 가로되 면상에 성냄 없음이 공양구며/ 입속에 성냄 없음이 묘한 향을 토함이며/ 마음 속에 성냄 없음이 이 진보며/ 물듦 없고 집착 없음이 이 진여다. 이 게를 설해 마치자 무착이 재배(再拜)했다. 머리를 드니 동자가 보이지 않았고 화사도 또한 은몰했다. 수유(須臾)에 온 계곡에 문수보살이 큰 사자를 탔음이 보였고 만성(萬聖)이 익종(翼從)했는데 무릇 식경(食頃) 간에 보살도 곧 은몰했다. 상문(上文)은 광청량전권중 무착화상입화반야사장(無著和尙入化般若寺章)에 나옴. 오등회원9에 이른 바 앙산의 법사인 무착문희(無著文喜)가 오대산에서 문수를 보았다는 것은 오류임.

●玻瓈茶盞; 오등회원9 무착문희선사(無著文喜禪師). 옹(翁)이 파리잔(玻瓈盞)을 집어 일으키고 문왈(問曰) 남방에도 도리어 저개(這箇; 이것)가 있는가. 사왈(師曰) 없습니다. 옹왈 심상(尋常)에 무엇을 가지고(將甚麼) 끽다하느냐. 스님이 대답이 없었다.

●彌天; 만천(滿天)이니 미(彌)는 만(滿)이며 편(遍)임.

●牽犁拽耙; 견리예파(牽犂拽耙)와 같음. 또 견리예파(牽犁拽把; 犁는 犂와 같음. 把는 자루 파)로 지음.

●謝郞; 곧 사삼랑(謝三郞). 1. 당대 현사사비의 칭호니 스님의 속성이 사(謝)며 사가(謝家)의 3남의 뜻으로 사삼랑이라고 일컬음. 2. 널리 어떤 어부를 가리킴. 여기에선 2를 가리킴.

●待制; 사물기원4에 가로되 당 영휘 5년(654) 12월 5일 조칙으로 경종(敬宗)에게 매일 무덕전에서 대제(待制)함을 허락했다. 이것이 대제의 명칭이 있게 된 시초다 [대혜서고로주].

●天地一指; 장자 제물론. 손가락으로써 손가락의 손가락 아님에 비유함이 손가락 아님으로써 손가락의 손가락 아님에 비유함만 같지 못하고 말(馬)로써 말의 말 아님에 비유함이 말 아님으로써 말의 말 아님에 비유함만 같지 못하나니 천지는 1지(指)요 만물은 1마(馬)다.

●袞袞; 바르게는 곤곤(衮衮)으로 지음. 서로 이어 끊어지지 않는 양자(樣子; 모양).

●倉皇; 총촉(匆促; 매우 바쁨)하면서 황장(慌張; 침착하지 못하고 急切히 忙亂함)함. 또한 창황(倉黃)ㆍ창황(蒼黃)ㆍ창항(倉惶)으로 지음. 또한 창황(倉遑)ㆍ창황(倉徨)으로 지음.

●瞠若; 약(若)은 어기조사(語氣助詞)가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