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호야록상

나호야록상(羅湖野錄上) 보본원(報本元; 慧元) 선사

태화당 2025. 11. 13. 08:00

湖州報本元禪師侍南公於黃檗 一日 爲達上座咨聞入室 南曰 旣是達了 爲甚麽更來 元曰 事不厭細 南曰 你便打趕出去 不是做得老僧侍者 元曰 不得一向 南遂行入方丈 元曰 大小黃檗龍頭蛇尾 南笑而已 尋遊東吳 寓姑蘇南峰蘭若 高自標致 放懷泉石 已而 郡將禪崐山慧嚴律居 致元爲第一世 追釋南公 凡見僧必首問 人人盡有生緣 作麽生是上座生緣 次問 我手何似佛手 我脚何似驢脚 遂成二偈 曰 相逢不免問生緣 一句當鋒旨最玄 達磨少林遺隻履 却登葱嶺不虛傳 又曰 欲透宗門向上關 須明佛手與驢脚 眞金不使假金糚 莫認醍醐爲毒藥 元之語錄序次具在 至於眞淨問湛堂 語雖異而意同 亦可槩見矣 今叢林先佛手驢脚 而後生緣 殊乖創問之旨 可不辨明哉

報本元; 慧元(1037-1091) 宋代黃龍派僧 潮州倪氏子 十九爲大僧 徧歷叢席 於黃龍三關語下悟入 而嗣其法 熙寧元年(1068)入吳 開法於吳江壽聖寺(續燈錄十二作聖壽) 又延住崑山慧嚴院十年 元祐四年移住承天萬壽寺 後移報本 六年十一月十六日 陞坐說偈曰 五十五年夢幻身 東西南北孰爲親 白雲散盡靑山外 萬里秋空片月新 言訖而化 諡證悟禪師 [續傳燈錄十六]

咨聞; 參學僧請住持說法聞話

一向; 意向於一處 無餘念 無散亂之心也

大小; 大與小 古尊宿語錄三十四龍門佛眼 問 虗空還有變異也無 代云 靑黃赤白 長短大小 同大小大 則偌大 這麽大 那麽大 碧巖錄不二鈔二 楞伽(竺仙)云 北方人欲議人之長短 詞端先言大小二字 於下必有譏誇之語也 或言大小大底人 意謂汝是大大底人 卻作這般瑣細小小底無伎倆事也 碧巖錄第一則種電鈔 大小者 北方罵人起頭之語 抑示現成明了的而無勦絶機 置于句末 表疑問 相當于多 大 五燈會元七玄沙師備 問 如何是無縫塔 師曰 這一縫大小

蘭若; 佛寺 祖庭事苑七 蘭若 梵云阿蘭若 此言寂靜處

標致; 原指文采旨趣的彰顯 後多用於形容人容貌秀麗

郡將; 郡守 郡守兼領武事 故稱

達磨; 菩提達磨 <> Bodhidharma 此云道法 又稱菩提達摩 菩提達磨多羅 達磨多羅 菩提多羅 通稱達磨 東土禪宗初祖 西天第二十八祖 南天竺香至國國王之第三子 從般若多羅學道 與佛大先竝稱爲門下二甘露門 梁武帝普通元年(520 西來年度 異說紛紜) 師泛海至廣州番禺 武帝遣使迎至建業 然與武帝語不相契 遂渡江至魏 止嵩山少林寺 面壁坐禪 時人不解其意 稱壁觀婆羅門 經九載 欲歸西方 囑慧可一宗之祕奧 授袈裟及楞伽經四卷 未久卽入寂 葬於熊耳山定林寺 師之示寂年代 有梁大通二年(528) 梁大同元年(535)或二年等異說 又梁武帝尊稱師爲聖胄大師 唐代宗賜圓覺大師之諡號 塔名空觀 [續高僧傳十六 傳燈錄三 傳法正宗記五 祖庭事苑二 同五 同八 舊唐書列傳一四一神秀傳]

少林; 少林寺 位于河南省登封縣城之北十五公里少室山五乳峰下 北魏太和十九年(495) 孝文帝爲天竺僧佛陀禪師所建 正光元年(520) 一說孝昌三年(527) 菩提達摩來寺面壁九年 傳法慧可 開創中國禪宗 故稱達摩爲初祖 少林寺爲祖庭 唐初少林寺僧衆 佐唐太宗開國有功 從此僧衆常習拳術 禪宗和少林拳術 廣爲流傳 高宗武后均甚崇敬 整修寺宇 其後歷經唐末五代之亂 寺漸衰微 宋淳祐二年(1242) 雪庭福裕及其法嗣靈隱文泰 古巖普就 息庵義讓 淳拙文才諸師 相繼住持此寺 各振禪風 傳曹洞正脉 少林寺於晩唐五代之際 爲臨濟宗僧所住 金元以來 成爲曹洞宗道場 淸初因少林寺成爲反淸復明的基地而遭焚燒 淸雍正十三年(1735)重修 規模宏大 [續高僧傳四 同十六 傳燈錄三 同四 釋氏稽古略二 少林寺志 魏書一一四]

葱嶺; 卽新疆省西南帕米爾高原之一大峻嶺 乃亞細亞大陸諸山脈之主軸 自古稱世界之屋脊

醍醐; 製自牛乳 味中第一 藥中第一 涅槃經八云 因乳生酪 因酪得生酥 因生酥得熟酥 因熟酥得醍醐 又云 雪山有草 名曰肥膩 牛若食者 純得醍醐

 

호주(湖州) 보본원(報本元; 慧元) 선사가 남공(南公; 慧南)을 황벽(黃檗)에서 참시(參侍; )했다. 어느 날 달상좌(達上座)가 자문(咨聞)하려고 입실했는데 남왈(南曰) 이미 이 달료(達了)거늘 무엇 때문에(爲甚麽) 다시 왔는가. 원왈(元曰) ()는 자세(仔細; )함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남왈 너를 바로 때리고 쫓아내겠다(趕出去). 이는 노승(老僧)의 시자(侍者)를 지음()을 얻지 못한다. 원왈 일향(一向)을 얻지 못합니다. ()이 드디어 가서 방장에 들어갔다. 원왈 대소(大小) 황벽(黃檗; 慧南)이 용두사미(龍頭蛇尾)입니다. ()이 웃을 따름이었다. 이윽고 동오(東吳)에 유행(遊行)하다가 고소(姑蘇) 남봉란야(南峰蘭若)에 우거(寓居)하면서 높이 스스로 표치(標致)했고 천석(泉石)에 회포(懷抱)를 풀었다(放懷). 이이(已而; 不久. 後來) 군장(郡將)이 곤산(崐山) 혜엄(慧嚴; 慧嚴院)의 율거(律居; 율종 사원)를 선(; 禪院)으로 했고 원()을 제일세(第一世)로 삼음에 이르렀다(). 남공(南公)을 추석(追釋; 따라서 풀이함)해 무릇() 중을 보면 반드시 먼저() 묻되 사람마다 모두 생연(生緣)이 있나니 무엇이(作麽生) 이 상좌의 생연인가. 다음으로 묻되 내 손이 불수(佛手)와 어찌 같은가(何似). 내 다리가 여각(驢脚)과 어찌 같은가. 드디어 2게를 이루었으니 가로되 상봉하면 생연(生緣)을 물음을 면하지 못하나니/ 일구(一句)가 당봉(當鋒)하매 지취(旨趣; )가 가장 현묘(玄妙; )하다/ 달마(達磨)가 소림(少林)에 외짝 신(隻履)을 남겼고()/ 도리어 총령(葱嶺)에 올랐음이 허전(虛傳)이 아니다. 우왈(又曰) 종문(宗門)의 향상관(向上關)을 투과하고 싶다면/ 모름지기 불수(佛手)와 여각(驢脚)을 밝혀야 한다/ 진금은 가금(假金)을 사용(使用; 使)해 꾸미지() 않나니/ 제호(醍醐)를 인정해 독약으로 삼지 말아라. ()의 어록(語錄)과 서차(序次)가 모두 있다(具在). 진정(眞淨)이 담당(湛堂)에게 물음에 이르러 말은 비록 다르나 뜻은 같으며 또한 가히 대개(大槩; 大槪와 같음) 볼 것이다. 여금의 총림에선 먼저 불수(佛手)와 여각(驢脚)이며 이후(而後; 以後)에 생연(生緣)이다. 특수히 처음 물은 지취(創問之旨)에 어긋나니() 가히 변명(辨明)하지 않겠는가.

報本元; 혜원(慧元; 1037-1091)이니 송대 황룡파승. 조주 예씨의 아들. 19에 대승(大僧)이 되었고 총석(叢席)을 편력(徧歷)했으며 황룡(黃龍)3관어(三關語) 아래에서 오입(悟入)했고 그의 법을 이었음. 희녕 원년(1068) 입오(入吳)하여 오강 수성사(壽聖寺; 속전등록12聖壽로 지어졌음)에서 개법했음. 또 연청(延請)으로 곤산 혜엄원에 10년 동안 주()했음. 원우 4년 승천 만수사에 이주했고 후에 보본으로 옮겼음. 61116일 승좌하여 게를 설해 가로되 55년의 몽환신(夢幻身)이여/ 동서남북에 누가 친함이 되는가/ 백운이 청산 밖으로 흩어져 사라지니/ 만 리의 추공(秋空)에 편월(片月)이 새롭다. 말을 마치자 화()했음. 시호는 증오선사 [속전등록16].

咨聞; 참학승이 주지의 설법을 청하여 문화(聞話).

一向; 뜻이 한 곳을 향하고 여념이 없고 산란한 마음이 없음임.

大小; 대와 소. 고존숙어록34 용문불안. 묻되 허공이 도리어 변이함이 있는가 또는 없는가. 대운(代云)하되 청황적백이며 장단대소(長短大小). 대소대(大小大)와 같음. 곧 야대(偌大. 저렇게 큰). 저마대(這麽大; 이렇게 큰). 나마대(那麽大; 저렇게 큰). 벽암록 불이초2. 릉가(楞伽; 竺仙)가 이르되 북방인이 사람의 장단을 의논하려 하면 말의 처음에 먼저 대소(大小) 2자를 말한다. 아래에 반드시 기과(譏誇; 나무람과 자랑)의 말이 있다. 혹 말하기를 대소대(大小大)의 사람이라 하면 뜻에 이르기를 너는 이 대대(大大)한 사람이거늘 도리어 이러한 쇄세소소(瑣細小小; 자질구레하고 아주 작음), 기량이 없는 일을 짓는가 함이다. 벽암록 제1칙 종전초. 대소(大小)란 것은 북방에서 사람을 욕하는 기두(起頭)의 말이다. 현성(現成)하여 명료하면서 초절(勦絶)의 기가 없음을 억제하여 보임이다. 구말에 두어서 의문을 표시함. ()ㆍ대()에 상당함. 오등회원7 현사사비. 묻되 무엇이 이 무봉탑입니까. 스님이 가로되 이 1()은 대소(大小)(큰가).

蘭若; 조정사원7. 란야(蘭若) 범어로 이르되 아란야(阿蘭若; araṇya)는 여기 말로는 적정한 곳이다.

標致; 원래 문채(文采)와 지취(旨趣)의 창현(彰顯)을 가리켰으나 후에 다분히 사람의 용모가 수려(秀麗)함을 형용함에 쓰였음.

郡將; 군수(郡守)니 군수는 무사(武事)를 겸령(兼領)하는지라 고로 일컬음.

達磨; 보리달마(菩提達磨; Bodhidharma)니 여기에선 이르되 도법(道法). 또 호칭이 보리달마(菩提達摩)ㆍ보리달마다라(菩提達磨多羅)ㆍ달마다라(達磨多羅)ㆍ보리다라(菩提多羅)며 통칭이 달마임. 동토(東土)의 선종 초조며 서천(西天)의 제28조임. 남천축(南天竺) 향지국(香至國) 국왕의 셋째 아들이며 반야다라(般若多羅)를 좇아 도를 배웠으며 불대선(佛大先)과 아울러 문하(門下)의 두 감로문(甘露門)이라고 호칭하였음. () 무제(武帝) 보통원년(普通元年; 520. 西來年度異說紛紜) 스님이 바다에 떠서 광주(廣州)의 번옹(番禺)에 이르자 무제가 사자를 보내 영접해 건업(建業)에 이르렀음. 그러나 무제와 말이 서로 계합(契合)치 못해 드디어 도강(渡江)하여 위()에 이르러 숭산(嵩山)의 소림사(少林寺)에 머물면서 면벽(面壁)하며 좌선했음. 당시의 사람들이 그 뜻을 알지 못해 벽관바라문(壁觀婆羅門)이라 일컬었음. 아홉 해가 지나 서방으로 돌아가려 하면서 혜가(慧可)에게 1()의 비오(祕奧)를 부촉하고 가사(袈裟)와 릉가경(楞伽經) 4권을 주었음. 오래지 않아 입적했고 웅이산(熊耳山) 정림사(定林寺)에 장사 지냈음. 스님의 시적(示寂) 연대는 양() 대통이년(大通二年; 528)ㆍ양 대동원년(大同元年; 535) 2년 등의 이설(異說)이 있음. 또 양무제가 스님을 존칭해 성주대사(聖胄大師)라 했으며 당() 대종(代宗)은 원각대사(圓覺大師)란 시호를 주었음. 탑 이름은 공관(空觀) [속고승전16. 전등록3. 전법정종기5. 조정사원2, 5, 8. 구당서열전141신수전].

少林; 소림사(少林寺)니 하남성 등봉현성(登封縣城)의 북쪽 12의 소실산(少室山) 오유봉(五乳峰) 아래에 위치함. 북위(北魏) 태화 19(495) 효문제(孝文帝)가 천축승 불타선사(佛陀禪師)를 위해 건립한 것임. 정광 원년(520), 일설(一說)엔 효창 3(527) 보리달마가 사원에 와서 면벽구년(面壁九年)하였고 혜가(慧可)에게 전법(傳法)하여 중국선종을 개창(開創)했음. 고로 달마를 일컬어 초조(初祖)라 하고 소림사를 조정(祖庭)이라 함. 당초(唐初)에 소림사의 승중(僧衆)이 당태종을 도와 개국(開國)에 공이 있었는데 이로부터 승중이 늘 권술(拳術)을 익히게 되었고 선종과 소림의 권술이 널리 유전(流傳)되었음. 당 고종과 무후(武后)가 균일하게 매우 숭경(崇敬)했고 사우(寺宇)를 정수(整修)했음. 그 후에 당말오대의 난을 역경(歷經)하면서 사원이 점차 쇠미해졌음. 송 순우 2(1242) 설정복유(雪庭福裕) 및 그 법사(法嗣)인 영은문태ㆍ고암보취ㆍ식암의양ㆍ순졸문재 여러 스님이 상계(相繼)하며 이 사원에 주지했고 각기 선풍을 진작했으며 조동정맥(曹洞正脉)을 전했음. 소림사는 만당(晩唐)과 오대의 즈음에 임제종의 승인이 거주한 곳이 되었는데 금ㆍ원 이래로 조동종 도량이 되었음. 청초에 소림사는 반청복명(反淸復明)의 기지(基地)가 됨으로 인해 분소(焚燒)를 만났음. 청 옹정 13(1735) 중수했고 규모가 굉대(宏大)[속고승전4, 16. 전등록3, 4. 석씨계고략2. 소림사지. 위서114].

葱嶺; 곧 신강성 서남 파미이고원(帕米爾高原; Pamir Plateau)의 일대준령(一大峻嶺)이니 곧 아세아대륙의 여러 산맥의 주축(主軸)이며 자고(自古)로 명칭이 세계의 옥척(屋脊; 용마루).

醍醐; 우유로부터 제조하며 맛 중에 제일이며 약 중에 제일임. 열반경8에 이르되 우유로 인해 낙(; 진한 유즙 락)이 나오고 낙으로 인해 생소(生酥; 煉乳 )를 얻고 생소로 인해 숙소(熟酥)를 얻고 숙소로 인해 제호를 얻는다. 또 이르되 설산에 풀이 있는데 이름해 가로되 비니(肥膩). 소가 만약 먹는다면 순전히 제호를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