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호야록상/나호야록하

나호야록하(羅湖野錄下) 청소(淸素) 시자(侍者)

태화당 2025. 12. 3. 08:04

石霜淸素侍者 閩之古田毛巖乃生緣也 晩遁湘西鹿苑 以閑淡自牧 兜率悅公時未出世 與之隣室 有客惠生茘支 悅命素曰 此乃老人鄕果 可同餉也 素慨然曰 自先師去世 不見此矣 悅從而問之 師爲誰耶 對以慈明 悅乃乘閑致密 款其緒餘 素因問 子曾見何人 悅以眞淨文和尙告之 素曰 文又見誰耶 悅曰 南禪師 素曰 南匾頭在石霜不久 其道盛如此 悅益駭異 尋袖香咨扣 素曰 吾福鮮解緣寡 豈可爲人師 但子之見解試吐露看 悅卽具陳 素云 只可入佛 不可入魔 須知古德謂 末後一句 始到牢關 悅擬對 又遽問 以無爲如何說 悅又擬對 而素忽高笑 悅恍然有得 故甞以語無盡居士張公 逮崇寧三禩 寂音尊者謁無盡於峽州善谿 無盡曰 昔見眞淨老師于皈宗 因語及兜率所謂末後句 語尙未終 而眞淨忽怒罵曰 此吐血禿丁 脫空妄語 不用信 旣見其盛怒 不敢更陳曲折 然惜眞淨不知此也 寂音曰 相公惟知兜率口授末後句 至於眞淨老師眞藥現前而不能辨 何也 無盡駭曰眞淨果有此意耶 寂音徐曰 疑則別參 無盡於言下頓見眞淨用處 卽取家藏眞淨肖像展拜 題讚其上 以授寂音 曰 雲菴綱宗 能用能照 冷面嚴眸 神光獨耀 孰傳其旨 覿露唯肖 前悅後洪 如融如肇 厥後有以讚鑱石于仰山 寂音亦有二偈示悅之侍者智宣 云 素公死後閑名在 末後句如黃石書 殺盡英雄人不見 子房兩眼似愁胡 又曰 無爲兩字如何說 開口知君病轉深 試問舊時宣侍者 不言不語笑吟吟 噫 悅能扣素而不能忘其轍跡 致無盡隨墮其中 非寂音發眞淨瞑眩之藥 何能愈無盡膏肓之疾耶 信宗師爲人各有惠利 豈易測其涯涘哉

茘支; 荔支 又作荔枝 原産於中國南部 是亞熱帶果樹 常綠喬木 高約十米 果皮有鱗斑狀突起 鮮紅 紫紅 果肉産鮮時半透明凝脂狀 味香美 但不耐儲藏 [百度百科]

匾頭; 器之薄者曰匾

末後句; 謂到達徹底大悟之極處所言之至極語 更無其他語句能超越者

禿丁; 對僧人的詈稱

脫空妄語; 虛脫空虛的妄語 常用作眞參實悟之反義語

如融如肇; 融 指道融(357-430) 汲郡林慮(今河南林州)人 後秦時期高僧 鳩摩羅什門下 什門四聖之一 肇 指僧肇(384-414) 略稱肇法師 東晉僧 長安人 俗姓張 家貧 以傭書爲業 遂得博覽經史 初好老莊 及讀維摩經而感悟 遂出家 善方等大乘經典 兼通三藏 冠年名聲已震關中 才思幽玄 精於談論 聞鳩摩羅什羈留涼土 前往從之 羅什歎爲奇才 及至姚秦破涼 乃隨侍羅什入長安 稟姚興之命 與僧叡等於逍遙園詳定經論 解悟彌深 被稱爲解空第一 弘始六年(404) 羅什譯出大品般若經 師乃撰般若無知論呈之 後又撰述不眞空論 物不遷論 涅槃無名論 注維摩詰經十卷等 義熙十年示寂 年僅三十一 後人收集僧肇所著之宗本義 物不遷 不眞空 般若無知 涅槃無名諸論 題名爲肇論行世 [佛祖歷代通載八 梁高僧傳六 出三藏記集八 同九 肇論疏上 魏書釋老志二十]

黃石; 黃石公(約前292-195) 秦漢時隱士 別稱圯上老人 下邳神人 後被道敎納入神譜 [百度百科]

子房; 張良(約前250-186) 字子房 潁川城父人 秦末漢初傑出的謀士 大臣 與韓信蕭何 並稱爲漢初三傑 其先韓人 良嘗學禮淮陽 東見倉海君 得力士 爲鐵椎重百二十斤 秦皇帝東游 良與客狙擊秦皇帝博浪沙(河南省博浪縣)中 誤中副車 秦皇帝大怒 大索天下 良乃更名姓 亡匿下邳(江蘇省下邳縣) 從黃石公傳受太公兵法書 良數以太公兵法 說沛公 沛公善之 常用其策 漢六年 封功臣 良未嘗有戰鬥功 高帝曰 運籌策帷帳中 決勝千里外 子房功也 乃封張良爲留侯 留侯性多病 乃學辟穀 道引輕身 會高帝崩 呂后德留侯 乃彊食之曰 人生一世間 如白駒過隙 何至自苦如此乎 留侯不得已而食 後八年卒 諡爲文成侯 [史記五十五留侯世家 百度百科]

吟吟; 一形容聲音嘈雜 二形容笑貌

 

석상(石霜; 석상산) 청소(淸素) 시자(侍者)는 민()의 고전(古田) 모암(毛巖)이 곧() 생연(生緣; 籍貫. 家鄕)이다. 만년에 상서(湘西) 녹원(鹿苑; 寺名)에 은둔(隱遁; )하면서 한담(閑淡)으로써 자목(自牧; 스스로 修養하다)했다. 도솔열공(兜率悅公; 從悅)이 당시에 출세하지 않았는데 그()와 더불어 인실(隣室)이었다. 어떤 객()이 싱싱한() 여지(茘支)를 베풀었는데() ()이 소()에게 명()해 가로되 이것은 곧() 노인의 향과(鄕果)니 동향(同餉; 함께 먹음. )함이 옳겠습니다(). ()가 개연(慨然; 慨嘆하다)히 가로되 선사(先師)가 거세(去世; 세상을 떠남)함으로부터 이것을 보지 못했다. 열이 따라서 그()에게 묻되 스승이 뉘가 됩니까. 자명(慈明; 楚圓)으로써 대답했다. 열이 이에 승한(乘閑)하여 치밀(致密)했고 그 서여(緒餘; 頭緒)를 관(; , 니 묻다)했다. 소가 인하여 묻되 자네는 일찍이 어떤 사람을 친견(親見; )했는가. 열이 진정문(眞淨文; 克文) 화상으로써 그()에게 고()했다. 소왈(素曰) ()은 또 누구를 친견했는가. 열왈(悅曰) 남선사(南禪師; 慧南)입니다. 소왈 남편두(匾頭)가 석상(石霜)에 있은 지 오래지 않거늘 그 도의 성()함이 이와 같은가. 열이 더욱() 해이(駭異)했다. 이윽고 수향(袖香; 소매에 향을 넣음)하고 자구(咨扣; 묻다)하자 소왈 나는 복이 적고(; 저본에 로 지었음) ()이 적거늘() 어찌 가히 사람의 스승이 되겠는가. 단지 자네의 견해를 시험 삼아 토로(吐露)해 보아라. 열이 곧 갖추어 진술했다(). 소운(素云) 다만 가히 입불(入佛)했고 가히 입마(入魔)하지 못했군. 수지(須知)할지니 고덕(古德)이 이르되 말후일구(末後一句)라야 비로소 뇌관(牢關)에 이른다. 열이 대답하려고 하자(擬對) 또 급히() 묻되 무위(無爲)를 어떻게 설하겠는가. 열이 또 대답하려고 하자 소가 홀연히 높게 웃었다. 열이 황연(恍然)하면서 얻음이 있었다. 고로 일찍이 무진거사(無盡居士) 장공(張公; 張商英)에게 말했다. 숭녕(崇寧) 3(; 1104. 와 같음. . 저본에 으로 지었음)에 이르러() 적음존자(寂音尊者; 慧洪, 德洪)가 협주(峽州) 선계(善谿)에서 무진(無盡)을 예알했다. 무진이 가로되 옛적에 진정(眞淨) 노사(老師)를 귀종(皈宗)에서 뵈었는데 인하여 말이 도솔(兜率)이 이른 바 말후구(末後句)에 미치자() 말이 아직() 마치지도 아니하여서 진정이 홀연 노매(怒罵)하며 가로되 이것은 토혈(吐血)할 독정(禿丁; 從悅을 가리킴)이니 탈공망어(脫空妄語)라서 믿음을 쓰지() 못하겠다. 이미 그()의 성노(盛怒)를 본지라 감히 다시는 곡절(曲折)을 진술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진정(眞淨)은 이것을 알지 못하셨습니다. 적음이 가로되 상공(相公)은 오직() 도솔이 구수(口授)한 말후구만 알고 진정(眞淨) 노사(老師)가 진약(眞藥)을 앞에 나타냄에 이르러선 능히 분변하지 못하니 왜입니까. 무진이 놀라며() 가로되 진정이 과연 이 뜻이 있으셨습니까. 적음이 천천히() 가로되 의심되면 곧 별참(別參)하십시오. 무진이 언하에 진정의 용처(用處)를 돈견(頓見)했다. 곧 가장(家藏)의 진정의 초상(肖像)을 취해 펴고() 예배했다. 그 위에 찬()을 제()해 적음에게 주었으니 가로되 운암(雲菴; 克文)의 강종(綱宗)/ 능용능조(能用能照)하나니/ 냉면(冷面)에 엄모(嚴眸; 엄한 눈)/ 신광(神光)이 독요(獨耀)한다/ 누가() 그 의지(意旨)를 전했는가/ 적로(覿露)하니 오직 초상(肖像; )이다/ 앞은 열(; 從悅)이며 뒤는 홍(; 德洪)이니/ 도융과 같고 승조와 같다(如融如肇). 그 후(厥後) 어떤 이()가 찬()을 앙산(仰山)에 새기자(; 새길 참) 적음이 또한 2게가 있어 종열의 시자 지선(智宣)에게 보였으니 이르되 소공(素公)이 사후에 한명(閑名)이 있나니/ 말후구는 황석(黃石)의 서()와 같다/ 살진(殺盡)한 영웅을 사람이 보지 못하나니/ 자방(子房)의 두 눈이 호()를 근심하는 듯하다(). 우왈(又曰) 무위(無爲)란 두 자를 어떻게 설하겠는가/ 입을 열면 그대의 병이 더욱() 깊은 줄 안다/ 시험 삼아 구시(舊時)의 선시자(宣侍者)에게 물었더니/ 불언불어(不言不語)하고 웃으며 음음(吟吟)한다. (), ()이 능히 소()에게 물었으나() 능히 그 철적(轍跡)을 잊지 못했고 무진이 그 가운데 수타(隨墮)함에 이르렀다(). 적음이 진정의 명현지약(瞑眩之藥)을 발현(發現; )하지 않았다면 어찌 능히 무진의 고황지질(膏肓之疾)을 고쳤겠는가(). 종사가 위인(爲人)함에는 각기 혜리(惠利)가 있음을 믿을지니 어찌 쉽게 그 애사(涯涘; 邊際)를 헤아리겠는가.

茘支; 여지(荔支)와 같음. 또 여지(荔枝)로 지음. 중국 남부가 원산지며 이는 아열대 과일나무며 상록교목(常綠喬木). 높이는 약 10m. 과실의 껍질에 인반상(鱗斑狀)의 돌기가 있으며 선명하고 자홍(紫紅)이며 과육(果肉; 과실의 살)은 생산하여 신선할 때는 반투명의 응지상(凝脂狀)이며 맛이 향미(香美)지만 단지 저장을 감내하지 못함 [백도백과].

匾頭; 기물(器物)의 얇은 것을 가로되 편().

末後句; 이르자면 철저히 대오한 극처(極處)에 이르러 말하는 바의 지극한 말이니 다시 기타의 어구가 능히 초월함이 없는 것.

禿丁; 승인에 대해 욕하는 칭호.

脫空妄語; 허탈하고 공허한 망어. 늘 진참실오(眞參實悟)의 반의어(反義語)에 사용함.

如融如肇; ()은 도융(道融; 357-430)을 가리킴. 급군(汲郡) 임려(林慮; 지금의 하남 林州) 사람. 후진(後秦) 시기의 고승. 구마라집의 문하(門下)니 집문사성(什門四聖)의 하나. ()승조(僧肇; 384-414)를 가리킴. 약칭이 조법사(肇法師). 동진(東晉)의 승려며 장안 사람이며 속성(俗姓)이 장(). 집안이 가난해 용서(傭書; 남에게 고용되어 글씨를 쓰는 일)로써 업()을 삼았으며 드디어 경사(經史)를 박람(博覽)함을 얻었음. 처음엔 노장(老莊)을 좋아했는데 및 유마경을 읽고서 감오(感悟)하여 드디어 출가했음. 방등(方等)의 대승경전을 잘했으며 겸하여 3()을 통달했음. 관년(冠年)에 명성이 이미 관중(關中)을 진동(震動)했고 재사(才思)가 유현(幽玄)하고 담론에 정밀했음. 구마라집이 양토(涼土)에 기류(羈留)한다 함을 듣고 앞으로 가서 그를 좇았는데 라집이 기재(奇才)라고 탄복했으며 그리고 요진(姚秦)이 파량(破涼)함에 이르자 이에 라집을 수시(隨侍)하며 장안에 들어갔음. 요흥(姚興)의 명령을 받아 승예(僧叡) 등과 함께 소요원(逍遙園)에서 경론을 상정(詳定)하면서 해오(解悟)가 더욱 깊어졌으며 해공제일(解空第一)로 일컬어짐을 입었음. 홍시 6(404) 라집이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을 역출(譯出)하자 스님이 이에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을 지어 그에게 드렸으며 후에 또 부진공론(不眞空論)ㆍ물불천론(物不遷論)ㆍ열반무명론(涅槃無名論)ㆍ주유마힐경(注維摩詰經) 10권 등을 찬술(撰述)했음. 의희 10년에 시적(示寂)했으니 나이는 겨우 31. 후인이 승조가 지은 바인 종본의(宗本義)ㆍ물불천(物不遷)ㆍ부진공(不眞空)ㆍ반야무지(般若無知)ㆍ열반무명(涅槃無名)의 여러 논을 수집(收集)하여 조론(肇論)으로 제명(題名)했으며 세상에 유행함 [불조역대통재8. 양고승전6. 출삼장기집8, 9. 조론소상. 위서석로지20].

黃石; 황석공(黃石公; 292-195)이니 진한(秦漢) 시 은사(隱士). 별칭이 이상노인(圯上老人)ㆍ하비신인(下邳神人). 후에 도교에서 신보(神譜)에 납입함을 입었음 [백도백과].

子房; 장량(張良; 250-186)이니 자는 자방(子房)이며 영천 성보 사람. 진말한초(秦末漢初)의 걸출한 모사(謀士)며 대신. 한신(韓信)ㆍ소하(蕭何)와 더불어 병칭하여 한초 3()이라 함. 그의 선조는 한인(韓人)이었음. 장량이 일찍이 회양(淮陽)에서 학례(學禮)했는데 동이(東夷)에서 창해군(倉海君)을 상견했고 역사(力士)를 얻었음. 철추(鐵椎)를 만들었는데 무게가 120근이었음. 진황제(秦皇帝)가 동유(東游)할 적에 장량과 객()이 박랑사(博浪沙; 하남성 박랑현) 가운데서 진황제를 저격(狙擊; 는 엿보다)했으나 착오로 부거(副車)를 맞혔음. 진황제가 대로하여 천하를 크게 수색하자 장량이 이에 명성(名姓)을 바꾸고 도망가서 하비(강소성 하비현)에 숨었고 황석공(黃石公)을 좇아 태공(太公)의 병법서를 전수(傳受)했음. 장량이 자주 태공병법을 패공(沛公)에게 설했고 패공이 그것을 좋게 여겨 늘 그 책략을 사용했음. () 6년 공신(功臣)을 봉()하는데 장량은 일찍이 전투의 공이 있지 않았음. 고제(高帝)가 가로되 유장(帷帳) 중에서 주책(籌策)을 운행하여 천 리 밖의 전승을 결정함은 자방의 공이다. 이에 장량을 봉하여 유후(留侯)로 삼았음. 유후는 천성이 병이 많았고 이에 벽곡(辟穀)을 배우고 도인(道引; 養生方法)으로 몸을 가볍게 했음. 마침 고제가 붕어하자 여후(呂后)가 유후에게 은덕을 주며 이에 억지로 먹게 하며 가로되 인생 일세간(一世間)은 백구(白駒)가 벽 틈을 지남과 같거늘 왜 자약(自苦)함이 이와 같음에 이르렀습니까. 유후가 부득이하여 먹었는데 8년 후에 죽었음. 시호는 문성후 [사기오십오유후세가. 백도백과].

吟吟; 1. 성음(聲音)이 조잡(嘈雜; 雜亂. 喧鬧)함을 형용. 2. 소모(笑貌)를 형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