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호야록상

나호야록상(羅湖野錄上) 황룡진(黃龍震; 道震) 선사

태화당 2025. 11. 11. 08:40

黃龍震禪師 初從丹霞淳公遊 閱再夏 而得曹洞宗旨 作頌曰 白雲深覆古寒巖 異草靈花彩鳳銜 夜半天明日當午 騎牛背面著靴衫 淳見異之 及抵潙山 作插鍬井頌曰 盡道潙山父子和 插鍬猶自帶干戈 至今一井明如鏡 時有無風帀帀波 已而 參草堂淸公 獲印可 尋出世 三遷而至百丈 道大顯著 紹興己巳 有律師妄踞黃龍 禪衲散去 主事者走錢塘 求王承宣繼先之書 達洪帥張公如瑩 堅命震以從衆望 旣而主事請致書謝王公 震讓曰 若王公爲佛法故 何謝之有 況吾與之素昧平生 主事恧縮而退 彼交結權貴倚爲藩垣者 聞其言亦足顔汗 紹興以來 宗師言行相應 與秋霜爭嚴 捨震其誰哉

黃龍震; 道震(1079-1161) 宋代黃龍派僧 號山堂 金陵(江蘇南京)趙氏 從覺印英禪師出家 先依丹霞子淳 次參泐潭善淸得法 出世三遷而至百丈 道風顯著 紹興十九年(1149) 應請主廣壽黃龍 [普燈錄十 五燈會元十八 續傳燈錄二十三]

丹霞淳; 子淳(1065-1119) 北宋曹洞宗僧 俗姓賈 劍州(四川)梓潼人 幼向正道 長勤參訪 遍參眞如慕喆 眞淨克文 大洪法恩等諸師 後入芙蓉道楷之門而嗣其法 洞山良价下八世 初住鄧州(河南鄧縣)丹霞 後遷唐州大乘山 隋州大洪山 擧揚禪風 學衆千人 盛冠諸方 宣和元年示寂 遺有虛堂集三卷 丹霞淳禪師語錄二卷傳世 [續傳燈錄十二 五燈會元十四 普燈錄五]

善淸; (1057-1142) 宋代黃龍派僧 字草堂 南雄保昌(廣東)人 俗姓何 自幼參香雲寺法思禪師 神宗元豐四年(1081) 試經得度 禮謁大潙慕喆 後入晦堂祖心(嗣黃龍)門下 竝嗣其法 政和五年(1115) 於江西黃龍山闡揚大法 歷住曹山 疏山 隆興(江西)泐潭寺 紹興十二年 示寂於泐潭寺 壽八十六 臘六十二 遺有草堂淸和尙語要一卷 或謂師卽越南佛敎草堂禪派之初祖 [聯燈會要十五 普燈錄六 釋氏稽古略四]

曹洞宗; 禪宗五家七宗之一 日本十三宗之一 以洞山良价(807-869)爲宗祖 洞指洞山 曹指曹山 乃合其師徒所住之山爲名 本應稱洞曹宗 蓋由語便故稱曹洞宗 日本希玄道元 嘗往天童山就良价下十二世如淨受法 向日本傳入曹洞宗 是卽其國曹洞宗之初傳 以永平寺爲曹洞宗本山 門下學徒常逾千人 以孤雲懷奘 永興詮慧 了然法明等最著 [祖庭事苑七 人天眼目三 五家宗旨纂要中]

插鍬井; 傳燈錄十一仰山慧寂 祐忽問師 什麽處去來 師曰 田中來 祐曰 田中多少人 師插鍬而立 祐曰 今日南山大有人刈茅在 師擧鍬而去

主事; 指主行事務者 禪院職事之別稱 禪苑淸規初以監寺 維那 典座 直歲等四職爲主事 以後之淸規加都寺 副寺 稱爲六知事 [禪苑淸規十 釋氏要覽下]

素昧平生; 素不相識 平生 平素

藩垣; 指藩籬和垣牆 引申爲衛國的重臣或藩國

 

황룡진(黃龍震; 道震) 선사는 처음 단하순공(丹霞淳; 子淳)을 좇아 노닐며 재하(再夏)를 겪었고() 조동종지(曹洞宗)를 얻었으니 작송(作頌)해 가로되 백운이 깊이 옛 한암(寒巖)을 덮었나니/ 이초영화(異草靈花)를 채봉(彩鳳)이 물었다()/ 야반에 하늘이 밝고 해가 오(; 正午)에 당했는데/ 소의 배면(背面)을 타고 화삼(靴衫)을 입었다(). ()이 보고 이상하게 여겼다(異之). 및 위산(潙山)에 다다라() 삽초정송(插鍬井)을 지어 가로되 다() 말하기를 위산 부자(父子)가 화목(和睦; )하다 하지만/ 삽초(插鍬; 삽을 꽂다)하니 오히려 스스로 간과(干戈; 방패와 창)를 가졌다()/ 지금(至今) 일정(一井)의 밝기가 거울 같나니/ 때에 바람 없이 잡잡(帀帀)한 파도가 있다. 이이(已而; 不久. 後來) 초당청공(草堂淸公; 善淸)을 참()했고 인가(印可)를 얻었다. 이윽고 출세하여 세 번 옮겨 백장(百丈)에 이르렀고 도가 크게 현저(顯著)했다. 소흥(紹興) 기사(己巳; 1149) 어떤() 율사(律師)가 황룡(黃龍)에 망거(妄踞; 허망하게 걸터앉다)하자 선납(禪衲; 선승)이 흩어져 떠났다. 주사자(主事)가 전당(錢塘)으로 달려가 왕승선(王承宣)의 계선지서(繼先之書)를 구해 홍수(洪帥) 장공(張公) 여영(如瑩)에게 전달()하자 진()에게 견명(堅命)하여 중망(衆望)을 따르게 했다. 기이(旣而; 不久) 주사(主事)가 치서(致書; 寄書)하여 왕공(王公)에게 감사(感謝; )하기를 청했다. 진이 사양(辭讓; )하며 가로되 만약 왕공이 불법을 위한 연고라면 무슨 감사가 있으리오. 하물며 나는 그와(與之) 소매평생(素昧平生)이다. 주사(主事)가 부끄러워하며(; 음이 뉵) 오그리고 물러났다. () 권귀(權貴)와 교결(交結)하여 기대어() 번원(藩垣)이 되려는 자가 그 말을 들었다면 또한 족히 얼굴에 땀 흘렸을 것이다. 소흥(紹興; 1131- 1162) 이래(以來)로 종사(宗師)가 언행이 상응하고 추상(秋霜)과 더불어 쟁엄(爭嚴)함이라면 진()을 버리고 그 누구이겠는가.

黃龍震; 도진(道震; 1079-1161)이니 송대 황룡파승. 호는 산당이며 금릉(강소 남경) 조씨. 각인영선사를 좇아 출가했음. 먼저 단하자순에게 위지했고 다음으론 늑담선청(泐潭善淸)을 참해 득법했음. 출세해 세 번 옮겨 백장에 이르렀으며 도풍이 현저했음. 소흥 19(1149) 청에 응해 광수 황룡을 주지했음 [보등록10. 오등회원18. 속전등록23].

丹霞淳; 자순(子淳; 1065-1119)이니 북송 조동종승. 속성은 가며 검주(사천) 재동 사람. 어릴 적에 정도를 향했고 장성하자 부지런히 참방했음. 진여모철ㆍ진정극문ㆍ대홍법은 등 여러 스님을 편참(遍參)했고 후에 부용도해(芙蓉道楷)의 문에 들어가 그의 법을 이었으니 동산양개하 8세임. 처음은 등주(하남 등현) 단하에 거주했고 후에 당주 대승산ㆍ수주 대홍산으로 옮겨 선풍을 거양했음. 배우는 무리가 천 인이었고 성함이 제방에 으뜸이었음. 선화 원년 시적했고 유작에 허당집(虛堂集) 3권 단하순선사어록 2권이 있어 세상에 전함 [속전등록12. 오등회원14. 보등록5].

善淸; (1057-1142) 송대 황룡파승. 자는 초당(草堂)이며 남웅 보창(광동) 사람이며 속성은 하. 어릴 적부터 향운사 법사선사를 참했고 신종 원풍 4(1081) 시경득도(試經得度)했음. 대위모철을 예알했고 후에 회당조심(晦堂祖心; 황룡을 이었음)의 문하에 들어갔으며 아울러 그의 법을 이었음. 정화 5(1115) 강서 황룡산에서 대법을 천양(闡揚)했음. 조산ㆍ소산ㆍ융흥(강서) 늑담사를 역주(歷住)했고 소흥 12년 늑담사에서 시적했음. 나이는 86, ()62. 유저(遺著)에 초당청화상어요 1권이 있음. 혹 이르기를 스님은 월남불교 초당선파(草堂禪派)의 초조라 함 [연등회요15. 보등록6. 석씨계고략4].

曹洞宗; 선종 57(五家七宗)의 하나. 일본 13()의 하나. 동산양개(洞山良价; 807-869)를 종조(宗祖)로 삼음. ()은 동산(洞山)을 가리키며 조()는 조산(曹山)을 가리킴. 그 사도(師徒)가 거주한 바의 산을 합해 이름을 삼았음. 본디는 응당 동조종(洞曹宗)으로 일컬어야 하지만 대개(大蓋) 말의 편함 때문에 고로 조동종으로 일컬음. 일본의 희현도원(希玄道元)이 일찍이 천동산(天童山)에 가서 양개하 12세인 여정(如淨)에게 나아가 법을 받아 일본을 향해 가서 조동종을 전입(傳入)했음. 이것이 곧 그 나라 조동종의 초전(初傳). 영평사(永平寺)를 조동종본산(曹洞宗本山)으로 삼고 문하(門下)의 학도(學徒)가 늘 천인(千人)을 넘으며 고운회장(孤雲懷奘)ㆍ영흥전혜(永興詮慧)ㆍ요연법명(了然法明) 등이 가장 저명함 [조정사원7. 인천안목3. 오가종지찬요중].

插鍬井; 전등록11 앙산혜적. (; 靈祐)가 홀연히 스님에게 물었다. 어느 곳에 갔다 왔는가. 스님이 가로되 밭 가운데에서 왔습니다. 영우가 가로되 밭 가운데 사람이 얼마이던가. 스님이 삽을 꽂고 섰다. 영우가 가로되 금일 남산에 대유인(大有人)이 띠를 벤다. 스님이 삽을 들고 갔다.

主事; 사무를 주행(主行; 주관하여 행함)하는 자를 가리킴. 선원 직사(職事)의 별칭이니 선원청규에 처음은 감사ㆍ유나ㆍ전좌ㆍ직세 등 4()을 주사로 삼았고 이후의 청규엔 도사(都寺)와 부사(副寺)를 더해 일컬어 6지사라 했음 [선원청규10. 석씨요람하].

素昧平生; 본디 서로 알지 못함. 평생은 평소.

藩垣; 번리(藩籬; 울타리)와 원장(垣牆). 인신(引申)하여 위국(衛國)하는 중신(重臣) 혹 번국(藩國)이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