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사분등록

거사분등록권하(居士分燈錄卷下) 송렴(宋濂)

태화당 2026. 7. 16. 07:54

宋濂(千巖元長禪師法嗣)

宋濂 金華人 母夢一異僧 手寫華嚴經來謂母曰 吾乃永明延壽 願假一室 以終此卷 覺已 濂卽生 因名曰壽 後更名濂 字景濂 別號無相居士 六歲日記二千餘言 九歲能詩 入靑蘿山 三閱大藏 甞往謁千巖元長 長吐言如奔雷 濂欲屈之 相與詰難數千言不契而退 越二年 又謁長 長曰 聞君閱盡一大藏經 有諸 曰 然 曰 君耳閱乎 抑目觀也 曰 亦目觀耳 曰 使目之能觀者 君謂誰耶 濂揚眉向之 於是相視一笑 長初答濂書曰 前日承一宿山中 今日有書來報云云 無明讀一過 不覺失笑 笑箇什麽 笑景濂坐井觀天 又如貧兒拾得錫 說與人要作銀子賣 只是自不識貨 敎別人不識貨 則不可 何以故 景濂嘗在塵勞聲色境界中 輥得爛骨地熟了 思量計較文字語言 弄聰明 業識多了 乍聞吾輩說一箇放下 可以做寂靜工夫 透脫生死 暫時起一念厭離心 回頭乃見無思量無語言處 便錯認作法身 喻如玲瓏八面窓 喻如須彌山 言說不得 這箇只是暫時岐路 如何便罵得佛 贊得祖 贊得無明耶 贊罵 憎愛心不除 但增長我見 我見未忘 目前只見別人過失 不知自家過失 要成辦透脫生死大事 難矣 景濂果欲辦這件事 只向無思量無言語處 便好仔細推窮 不用說向人 驀忽命根斷 偷心絕 絕後更甦 欺君不得 却來求印可亦不遲 他日又答書曰 承敘 自幼讀佛書 領其要旨 出入有無空假中 中至於中且不有 有無何在 三復斯言 此今之士夫 執有執無 離邊離中 分彼此 儒釋之異如左右 儒釋一貫者 能有幾人 人言爲不虗矣 張無盡云 余因學佛 然後知儒 古德云 居無爲界中 不斷滅有爲之法 居有爲界中 不分別無爲之相 暗合道妙 不易 不易 審如是 則有爲底便是無爲底 左右已百了千當 何處更有身心之慮未祛 事物之來未息 又何處更有眞實工夫可做 而後出離有爲 了生死大事耶 只如左右未動念 未操觚拂紙 未陳一言及寫在紙上了 是有爲 是無爲 是生 是死 是生死法 是出生死法 這些子直是誵訛 故孔子謂子路曰 未知生 焉知死 孔子底說話 莫道子路不知落處 盡大地人 都不知落處 豈不見黃山谷訪死心 死心云 我有一問問公 公試答看 彼此燒作一堆灰 在甚處相見 山谷茫然 後參晦堂 示吾無隱乎爾一言 聞桂花香 打破漆桶 鼻孔撩天 大丈夫欲成辦箇事 自有箇般時節 山谷雖是一塊精金 須是死心晦堂作家爐鞴 惡辣鉗鎚始得 這一隊漢 若到無明門下 更須一一勘過 何也 不是弄潮人 休入洪波裡 濂又嘗慕楚石琦 參見護龍河 相與談玄 因出賸語一編求正 琦覧已 嘆曰 不意儒者所造直至於此 善自護持 濂初見太祖 卽勸不嗜殺人 及佐太祖定太平 興禮樂 靡不原本一大事因緣 而佛法遂賴以重光 夔江坐脫 後百餘年 有見之終南山者 文集八十二卷 撰塔銘三十餘篇 堪續傳燈 嘗作永明贊曰 我與導師有宿因 般若光中無去來 今觀遺像重作禮 忽悟三世了如幻 靈山一會猶儼然 願證如如大圓智

元長; (1284-1357) 元代楊岐派僧 越州(浙江紹興)蕭山人 俗姓董 號千巖 字無明 七歲出家 十九歲受具足戒 嘗於武林山靈芝寺學戒律 後謁中峰明本禪師(楊岐下十一世) 得嗣其法 初於無明寺弘法 後遷住烏傷伏龍山聖壽寺 蒙賜普應妙智弘辯禪師 佛慧圓鑑 大元普濟禪師等號 至正十七年六月入寂 壽七十四 臘五十六 遺有千巖和尙語錄一卷行世 [五燈全書五十八 新續高僧傳五十]

延壽; (904-975) 宋代僧 淨土宗六祖 法眼宗三祖 錢塘(今浙江杭州)人 俗姓王 字仲玄 號抱一子 初爲吏 三十歲依龍冊寺翠巖令參禪師出家 後往天台山參德韶國師 初習禪定 得其玄旨 後於國淸寺行法華懺 頗有感悟 於是朝放諸生類 夕施食鬼神 讀誦法華經 又精修淨業 後住明州雪竇山傳法 法席甚盛 竝復興杭州靈隱寺 建隆二年(961) 應吳越王錢俶之請 遷永明大道場 接化大衆 故世稱永明大師 師倡禪淨雙修之道 指心爲宗 四衆欽服 住永明十五年 時人號慈氏下生 師曾召集慈恩 賢首 天台三宗僧人 輯錄印度中國聖賢二百人之著書 廣蒐博覽 互相質疑 而成宗鏡錄一百卷 對當時各宗派間之宗旨分歧 持調和之態度 高麗王見此書 乃遣使敘弟子之禮 竝派國僧三十六人前來學法 法眼之禪風遂盛行於海東 開寶八年示寂 壽七十二 賜號智覺禪師 著有宗鏡錄百卷 萬善同歸集六卷 神棲安養賦一卷 唯心訣一卷等六十餘部 [宋高僧傳二十八 傳燈錄二十六 傳法正宗記八 宗門統要續集二十 佛祖統紀二十六]

成辦; 成功 完成 辨 辯 辦 竝通

空假中; 天台所立之三諦三觀也 就所觀之理 謂爲三諦 就能觀之智 謂爲三觀 觀一念之心無相爲空 觀此心具一切法爲假 觀此二者不二爲中 空以破一切法 假以立一切法 中以妙一切法 此三者爲一法之異名 故謂爲卽空卽假卽中 祖庭事苑七 空假中 天台智者 以龍樹偈云 因緣所生法 我說卽是空 亦名爲假名 亦名中道義 乃依一心三諦之理 示三止三觀 嘗云 破一切惑 莫盛乎空 建一切法 莫盛乎假 究竟一切性 莫大乎中 故一空一切空 無假無中無不空 一假一切假 無空無中無不假 一中一切中 無假無空無不中 如摩醯首羅天之三目 非縱橫竝別故也

左右; 左右執事也 古者不敢斥言尊長 故但云其左右也 [大慧書栲栳珠]

操觚; 本義指手持木簡書寫 後引申爲寫作

子路; 仲由(542-480) 字子路 又字季路 孔門十哲之一 仲由以政事見稱 爲人伉直 好勇力 跟隨孔子周遊列國 周敬王四十年(魯哀公十五年 前480) 衛亂 父子爭位 爲救其主衛出公姬輒(姬姓名輒) 蒯聵殺死 砍成肉泥 三月初三 結纓遇難 葬於澶淵(今河南濮陽) [百度百科]

漆桶; 黑漆桶也 譬無明之堅厚也 對愚暗不悟者的詈稱 碧巖錄第一則 與他打破漆桶 同種電鈔 棱伽云 人曠劫無明 結習膠固 恰如貯漆之桶 黑洞洞地不明也

楚石琦; 梵琦(1296-1370) 元代臨濟宗僧 明州(浙江)象山人 俗姓朱 字楚石 小字曇曜 九歲出家 十六歲受具足戒 後參究徑山之元叟行端 一日聞西城樓上鼓鳴 始徹悟 遂嗣元叟之法 時年二十九 其後歷住海鹽福臻寺 天寧永祚寺 杭州鳳山報閣寺 嘉興本覺寺 至正七年(1347) 帝賜號佛日普照慧辯禪師 十七年 住持報恩光孝寺 十九年 退隱永祚寺 於寺西側築居 自號西齋老人 二十三年再住永祚寺 未久再隱 專修淨業 洪武初年 受敕說法於蔣山(江蘇江寧縣東北 卽鍾山) 三年示寂 壽七十五 著有楚石梵琦語錄二十卷 西齋淨土詩三卷 上生偈 北游鳳山西齋三集 和天台三聖詩等 [楚石梵琦禪師語錄序 梵琦禪師語錄二十佛日普照慧辯禪師塔銘 釋氏稽古略續集二 南宋元明禪林僧寶傳十 續燈正統十五]

導師; 導人入佛道者 佛菩薩之通稱 又法會之式 表白者謂之導師 僧史略中云 導師之名而含二義 若法華經中商人白導師言 此卽引路指迷也 若唱導之師 此卽表白也

 

송렴(宋濂)(千巖 元長禪師法嗣)

송렴(宋濂; 1309-1380)은 금화(金華) 사람이다. 어머니의 꿈에 한 이승(異僧)이 화엄경을 수사(手寫; 손수 書寫)하여 와서 어머니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곧 영명연수(永明延壽)입니다. 원컨대 일실(一室)을 빌려() 차권(此卷)을 마치게 하십시오. 깨고 나서(覺已) ()이 곧 태어났다. 인하여 이름해 가로되 수()라 했는데 후에 경명(更名)하여 렴()이라 했다. 자가 경렴(景濂)이며 별호(別號)가 무상거사(無相居士). 6세에 하루 2천여 언()을 기억했고 9세에 시()에 능했다. 청라산(靑蘿山)에 들어가 대장(大藏)을 삼열(三閱)했다. 일찍이 천암원장(千巖元長)을 왕알(往謁)했는데 원장은 토언(吐言)함이 분뢰(奔雷)와 같았다. ()이 이()에 굴복(屈服; )하려 했다. 서로 더불어 수천언(數千言)을 힐난(詰難)했는데 계합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2년을 넘겨 또 원장을 참알했다. 장왈(長曰) 듣기로 군(; 그대. 자네)이 일대장경(一大藏經)을 열진(閱盡)했다 하니 있는가(有諸). 가로되 그렇습니다. 가로되 군()이 귀로 읽었는가(閱乎), 또는() 눈으로 보았는가. 가로되 또한 눈으로 보았을 뿐입니다. 가로되 눈으로 하여금 능관(能觀)하게 하는 것은 군()이 누구라고 이르는가. ()이 양미(揚眉; 눈썹을 치킴)하여 그()에 향했다. 이에 상시(相視)하며 일소(一笑)했다. 원장이 렴()에게 처음 답한 글에 가로되 전일(前日) 산중에 일숙(一宿)함에 이어서() 금일 글이 있어 내보(來報)했다 운운(云云). 무명(無明; 元長)이 읽어 일과(一過)하고는 불각에 실소(失笑)했으니 저() 무엇(什麽)을 웃었는가, 경렴(景濂)이 우물에 앉아 하늘을 봄(坐井觀天)을 웃었다. 또 빈아(貧兒; 貧者)가 주석(朱錫; )을 습득해 사람에게 설해 주되 은자(銀子)로 만들어() 팔기를 요함과 같다. 다만 이는 스스로 화(; 재물. 財貨)를 알지 못하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화()를 알지 못하게 함이니 곧 불가(不可)하다. 무슨 연고냐, 경렴(景濂)이 일찍이 진로(塵勞)의 성색(聲色) 경계 중에 있으면서 난골지(爛骨地; 는 조사)를 곤득(輥得; 굴림을 얻다)하여 익히고서(熟了), 문자어언(文字語言)을 사량(思量)하고 계교(計較)하여 총명(聰明)을 희롱하는 업식(業識)이 많았다(多了). 오배(吾輩)가 설한 일개(一箇)를 방하(放下)하라 함을 잠시 듣고는(乍聞) 가이(可以) 적정공부(寂靜工夫)를 지어() 생사를 투탈(透脫)하려고 잠시 일념(一念) 염리심(厭離心)을 일으키고 회두(回頭)하매 곧() 사량(思量)이 없고 어언(語言)이 없는 곳을 보고는 바로 착인(錯認)하여 법신(法身)을 지으니 비유컨대 영롱(玲瓏)한 팔면창(八面窓)과 같고 비유컨대 수미산과 같아서 언설(言說)을 얻지 못한다. 저개(這箇)는 다만 이 잠시의 기로(岐路)이거늘 어떻게 바로 부처를 매득(罵得)하고 조사를 찬득(贊得)하고 무명(無明; 元長)을 찬득하겠는가. 찬매(贊罵)는 증애심(憎愛心)을 제()하지 못하고 단지 아견(我見)을 증장(增長)한다. 아견을 잊지 못하면 목전(目前)에 다만 다른() 사람의 과실(過失)만 보고 자가(自家)의 과실을 알지 못하나니 생사대사(生死大事)를 투탈(透脫)함을 성판(成辦; 성공. 완성)하려고 한다면 어렵다(難矣). 경렴(景濂)이 과연 저건사(這件事)를 성판(成辦; )하고 싶다면 다만 사량이 없고 어언이 없는 곳을 향해 바로 좋이 자세하게 추궁(推窮)할 것이며 사람을 향해 설함을 쓰지 말아야 한다. 맥홀(驀忽; 忽然) 명근(命根)이 끊어지고() 투심(偷心)이 끊어지고() 절후(絕後; 氣絶한 후)에 다시 깨어나야 그대를 속임을 얻지 못하나니 돌아와서(却來) 인가(印可)를 구하여도 또한 늦지() 않다. 타일(他日)에 또 답서(答書)해 가로되 승서(承敘; 敍述承受)하건대 어릴 적부터 불서(佛書)를 읽었고 그 요지(要旨)를 영해(領解; )했으며 유무(有無)의 공가중(空假中)에 출입했나니 중()이 중()에 이르면 또한() 있지() 않거늘 유무(有無)가 어디에 있겠는가. 사언(斯言)을 삼복(三復; 세 번 반복)했습니다. 차금(此今; 此時의 현재)의 사부(士夫)가 집유집무(執有執無)하고 이변이중(離邊離中)하고 피차(彼此)를 나누나니 유석(儒釋)의 다름이 좌우(左右)와 같거늘 유석(儒釋)이 일관(一貫)인 자가 능히 몇 사람이나 있겠습니까. 사람의 말이 헛되지 않나니 장무진(張無盡; 張商英)이 이르되 내()가 학불(學佛; 불교를 배움)함으로 인해, 연후(然後)에 지유(知儒; 유교를 알다)했다. 고덕(古德)이 이르되 무위계(無爲界) 가운데 거주하면서 유위(有爲)의 법을 단멸(斷滅)하지 않고 유위계(有爲界) 가운데 거주하면서 무위(無爲)의 상()을 분별하지 않는다. 도묘(道妙; 도의 묘)에 암합(暗合; 몰래 합함)하나니 쉽지 않고 쉽지 않습니다. 이와 같음을 살핀다면() 곧 유위의 것(有爲底)이 바로 이 무위의 것(無爲底)입니다. 좌우(左右)가 이미 백료천당(百了千當)했거늘 어느 곳에 다시 신심(身心)의 사려(思慮; )를 제거()하지 못함과 사물(事物)의 도래(到來; )를 쉬지() 못함이 있겠습니까. 또 어느 곳에 다시 진실한 공부를 가히 지은() 이후(而後)에 유위(有爲)를 출리(出離)하고 생사대사(生死大事)를 마침()이 있겠습니까. 지여(只如) 좌우(左右)가 동념(動念)하지 않고 조고(操觚)하여 불지(拂紙; 종이를 털다)하지 않고 일언을 진술(陳述; )하거나 및 지상(紙上)에 서사(書寫; )하여 두지() 아니했다면 이 유위(有爲)입니까, 이 무위(無爲)입니까. 이 생()입니까, 이 사()입니까. 이 생사법(生死法)입니까, 이 출생사법(出生死法)입니까. () 사자(些子)는 바로() 이 효와(誵訛)입니. 고로 공자(孔子)가 자로(子路)에게 일러 가로되 생()을 알지 못하거늘 어찌 사()를 알겠는가. 공자의 설화(說話)를 자로가 낙처(落處)를 알지 못했다고 말하지 말지니 온 대지인(大地人)이 모두() 낙처를 알지 못합니다. 어찌 보지 못합니까, 황산곡(黃山谷; 黃庭堅)이 사심(死心; 悟新)을 방문하자 사심이 이르되 나에게 일문(一問)이 있어 공()에게 묻나니 공이 시험 삼아 답해 보시오. 피차(彼此) 태워서() 한 더미의 재가 된다면 어느 곳에서 상견하겠습니까. 산곡이 망연(茫然)했다. 후에 회당(晦堂; 祖心)을 참()하자 오무은호이(吾無隱乎爾; 내가 너희에게 숨긴 게 없다) 일언(一言)을 보였고 계화향(桂花香)을 맡고서 칠통(漆桶)을 타파했으며 비공(鼻孔)이 요천(撩天)했습니다. 대장부가 개사(箇事; 此事)를 성판(成辦)하고 싶다면 저절로 개반(箇般; 這般)의 시절이 있습니다. 산곡이 비록 이 한 덩이의 정금(精金)이었지만 모름지기 이 사심(死心)과 회당(晦堂)의 작가의 노비(爐鞴)와 악랄(惡辣)한 겸추(鉗鎚)라야 비로소 옳습니다. () 일대한(一隊漢)이 만약 무명의 문하(無明門下; 저본에 無門明下로 지었음)에 이른다면 다시 하나하나 감과(勘過)함을 써야()하나니 왜냐(何也), 이 농조인(弄潮人; 潮水를 희롱하는 사람)이 아니면 홍파(洪波) 속으로 들어감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이 또 일찍이 초석기(楚石琦; 梵琦)를 흠모했고 호룡하(護龍河)에서 참견(參見)해 서로 더불어 담현(談玄)했다. 인하여 잉어(賸語; 많이 남는 말) 일편(一編)을 내고는 구정(求正; 訂正을 구함)했다. ()가 열람하고 나서 탄왈(嘆曰) 유자(儒者)의 소조(所造; 나아간 바)가 바로() 여기에 이를 줄 뜻하지 못했습니다. 잘 스스로 호지(護持)하십시오. ()이 태조(太祖; 明太祖)를 초견(初見)해 살인을 즐기지() 않기를 권했다. 및 태조를 보좌(補佐; )해 태평(太平)을 정()하고 예악(禮樂)을 일으켰는데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원본(原本)으로 하지 않음이 없었다(). 불법이 드디어 힙입어() 중광(重光; 거듭 빛남)했다. 기강(夔江)에서 좌탈(坐脫)했다. 백여 년 후 종남산(終南山)에서 본 자가 있었다. 문집(文集)82권이며 탑명(塔銘) 30여 편()과 감속전등(堪續傳燈)을 지었다. 일찍이 영명찬(永明贊)을 지어 가로되 나와 도사(導師)는 숙인(宿因)이 있나니/ 반야광(般若光) 가운데 거래가 없다/ 여금에 유상(遺像)을 보며 거듭() 작례(作禮)하나니/ 삼세(三世)가 마침내() ()과 같음을 홀오(忽悟)했다/ 영산일회(靈山一會)가 오히려 엄연(儼然)하나니/ 여여(如如)한 대원지(大圓智)를 증()하기를 원합니다.

元長; (1284-1357) 원대 양기파승. 월주(절강 소흥) 소산 사람이며 속성은 동()이며 호는 천암(千巖)이며 자는 무명(無明). 7세에 출가하고 19세에 구족계를 받았음. 일찍이 무림산 영지사에서 계율을 배웠고 뒤에 중봉명봉선사(中峰明本禪師; 양기하 11)를 참알(參謁)해 그 법을 이음을 얻었음. 처음엔 무명사(無明寺)에서 홍법(弘法)했고 뒤에 오상(烏傷) 복룡산(伏龍山) 성수사(聖壽寺)로 천주(遷住)했음. 보응묘지홍변선사ㆍ불혜원감ㆍ대원보제선사 등의 호를 몽사(蒙賜)했으며 지정 176월에 입적했으니 나이는 74며 승랍은 56. 유작에 천암화상어록 1권이 있어 행세(行世)[오등전서58. 신속고승전50].

延壽; (904-975) 송대승. 정토종의 6()며 법안종의 3. 전당(錢塘; 지금의 절강 항주) 사람이니 속성(俗姓)이 왕()이며 자가 중현(仲玄)이며 호가 포일자(抱一子). 처음엔 관리가 되었다가 30세에 용책사(龍冊寺) 취암영참선사(翠巖令參禪師)에게 의지해 출가했음. 뒤에 천태산으로 가서 덕소국사(德韶國師)를 참알(參謁)하고 처음으로 선정(禪定)을 익혀 그 현지(玄旨)를 얻었음. 후에 국청사에서 법화참(法華懺)을 행했으며 자못 감오(感悟)가 있었음. 이에 아침엔 여러 생류(生類)를 놓아주고 저녁엔 귀신에게 시식(施食)하면서 법화경을 독송했으며 또 정업(淨業)을 정수(精修)했음. 후에 명주(明州) 설두산(雪竇山)에 머물며 법을 전했으며 법석이 매우 성했음. 아울러 항주(杭州) 영은사(靈隱寺)를 부흥했음. 건륭 2(961) 오월왕(吳越王) 전숙(錢俶)의 청에 응해 영명대도량(永明大道場)으로 옮겨 대중을 접화(接化)한지라 고로 세칭 영명대사(永明大師). 스님은 선정쌍수(禪淨雙修)의 도를 노래 불러 마음을 가리켜 종()을 삼았으며 4()이 흠복(欽服)했음. 영명(永明)에 머문 지 15년이었으며 당시의 사람이 호하되 자씨(慈氏; 미륵)가 하생했다 했음. 스님이 일찍이 자은(慈恩)ㆍ현수(賢首)ㆍ천태(天台) 3()의 승인(僧人)을 소집해 인도와 중국의 성현(聖賢) 200인의 저서를 집록(輯錄)해 널리 모으고 널리 열람하며 호상(互相) 질의하여 종경록(宗鏡錄) 100권을 만들었음. 당시의 각 종파 간의 종지(宗旨)와 분기(分歧)에 대해서 조화의 태도를 유지했음. 고려왕(高麗王)이 이 책을 보고 이에 사자(使者)를 파견해 제자의 예()를 펴고 아울러 국승(國僧) 36인을 파견해 앞에 와서 법을 배우게 했음. 법안(法眼)의 선풍(禪風)이 드디어 해동에서 성행했음. 개보 8년 시적(示寂)했으니 나이는 72며 사호(賜號)가 지각선사(智覺禪師). 저서에 종경록 100권ㆍ만선동귀집(萬善同歸集) 3권ㆍ신서안양부(神棲安養賦) 1권ㆍ유심결(唯心訣) 1권 등 60여 부()가 있음. [송고승전28. 전등록26. 전법정종기8. 종문통요속집20. 불조통기26].

成辦; 성공. 완성. ()ㆍ변()ㆍ판()은 모두 통함.

空假中; 천태가 세운 바의 33(三諦三觀). 소관(所觀)의 이치로 나아가서는 일컬어 3제라 하고 능관(能觀)의 지혜로 나아가서는 일컬어 3관이라 함. 일념의 마음이 무상(無相)임을 관함은 공()이 되고 이 마음이 일체법을 갖추었음을 관함이 가()가 되고 이 2자가 둘이 아님을 관함이 중()이 됨. ()은 일체법을 깨뜨림이 되고 가()는 일체법을 세움이 되고 중()은 묘한 일체법이 됨. 3자는 1법의 다른 이름이 되는지라 고로 이르되 즉공ㆍ즉가ㆍ즉중이라 함. 조정사원7. 공가중(空假中) 천태지자가 용수의 게에 이르되 인연으로 난 바의 법은/ 내가 즉시 공()이라고 설하나니/ 또한 이름하여 가명(假名)이며/ 또한 이름이 중도(中道)의 뜻이다 했으므로 이에 13(一心三諦; 1. 有諦. 2. 無諦. 3. 中道第一義諦)의 이치에 의해 3(三止; 1. 體眞止. 2. 方便隨緣止. 3. 離二邊分別止)3(三觀; 1. 空觀. 2. 假觀. 3. 中觀)을 개시(開示)했음. 일찍이 이르되 일체혹(一切惑)을 깨뜨림엔 공()보다 성한 게 없고 일체법을 세움엔 가()보다 성한 게 없고 일체법을 구경(究竟; 事理를 끝까지 추구하는 일)함엔 중()보다 성한 게 없다. 고로 하나가 공()하면 일체가 공이므로 가()도 없고 중()도 없고 공이 아님이 없다. 하나가 가()면 일체가 가이므로 공()도 없고 중()도 없고 가가 아님이 없다. 하나가 중()이면 일체가 중이므로 가()도 없고 공()도 없고 중이 아님이 없다. 마치 마혜수라천의 삼목(三目)과 같아서 종()ㆍ횡()ㆍ병()ㆍ별()이 아닌 연고이다.

左右; 좌우의 집사(執事; 侍從). 고자(古者)는 감히 존장을 가리켜() 말하지 못한지라 고로 다만 그를 일러 좌우라 했음 [대혜서고로주].

操觚; 본의(本義)는 손으로 목간(木簡)을 잡아 서사(書寫)함을 가리켰음. 후에 인신(引申; 轉義)하여 사작(寫作)이 되었음.

子路; 중유(仲由; 542-480)의 자가 자로니 또 자가 계로(季路)며 공문십철(孔門十哲)의 하나. 중유는 정사(政事)로써 명칭이 드러났고 사람됨이 항직(伉直; 곧고도 굳셈)했고 용력(勇力)을 좋아했음. 공자를 근수(跟隨; 뒤를 따라감)하며 열국을 주유했음. 주 경왕 40(魯哀公 15. 480) 위란(衛亂)에 부자가 왕위를 다투자 그의 주군인 위출공(衛出公) 희첩(姬輒; 희는 성, 이름이 첩)을 구하려고 했으나 괴외(蒯聵; 출공의 아버지)가 죽였고 잘라서 육니(肉泥)를 만들었음. 3월 초3에 갓끈을 매면서 난을 만났고 단연(지금의 하남 복양)에 장사 지냈음 [백도백과].

漆桶; 흑칠통이니 무명의 견후(堅厚)에 비유함. 우매하여 깨닫지 못하는 자에 대한 이칭(詈稱). 벽암록 제1. 그에게 칠통을 타파해 주었다. 동 종전초 릉가(棱伽)가 이르되 사람이 광겁(曠劫)의 무명으로 결습(結習)이 아교처럼 견고함이 칠을 저장하는 통과 흡여(恰如)하여 흑통통지(黑洞洞地; 黑暗)라 밝지 못하다.

楚石琦; 범기(梵琦; 1296-1370)니 원대 임제종승. 명주(절강) 상산(象山) 사람이며 속성은 주()며 자는 초석(楚石)이며 소자(小字)는 담요(曇曜). 9세에 출가하고 16세에 구족계를 받았음. 후에 경산(徑山)의 원수행단(元叟行端)을 참했는데 어느 날 서성(西城) 누상(樓上)의 북이 울림을 듣다가 비로소 철오(徹悟)했으며 드디어 원수(元叟)의 법을 이었으니 때의 나이는 29이었음. 그 후 해염 복진사ㆍ천녕 영조사ㆍ항주 봉산 보각사ㆍ가흥 본각사를 역주(歷住)했음. 지정 7(1347) ()가 불일보조혜변선사(佛日普照慧辯禪師)란 호를 주었음. 17년 보은광효사에 주지(住持)했고 19년 영조사(永祚寺)로 퇴은(退隱)해 절 서쪽에 축사(築舍)하여 거처하면서 스스로 호()하되 서재노인(西齋老人)이라 했음. 23년 다시 영조사에 주지했고 오래지 않아 다시 은거하면서 오로지 정업(淨業)을 닦았음. 홍무 초년(初年) 칙명을 받아 장산(蔣山. 강소 江寧縣의 동북이니 곧 鍾山)에서 설법했고 3년에 시적(示寂)했으니 나이는 75. 저서에 초석범기어록 20권ㆍ서재정토시 3권ㆍ상생게ㆍ북유봉산서재 3() 그리고 천태삼성시 등이 있음 [초석범기선사어록서. 범기선사어록20불일보조혜변선사탑명. 석씨계고략속집2. 남송원명선림승보전10. 속등정통15].

導師; 사람을 인도하여 불도에 들게 하는 자니 불보살의 통칭. 또 법회의 식()에서 표백(表白)하는 자를 일러 도사라 함. 승사략중에 이르되 도사의 명칭은 두 뜻을 포함했다. 만약 법화경 중에 상인(商人)이 도사에게 사뢰어 말한다 함이라면 이것은 곧 길로 인도하여 미혹을 가리킴이다. 만약 창도(唱導)하는 스님이라 하면 이것은 곧 표백이다.

 

贊曰 蓮池本師頌云 至人無己 妙應斯圓 一鏡虗明 萬象畢現 以此知宋文憲眞不可測地位中人也 公方墮地時 母夢異僧 手寫華嚴而曰 我乃永明延壽 願假一室以終此卷 噫 豈眞䑛筆和墨 然後謂之寫經 蓋永明傳佛心印以後 一生行華嚴行 而殘燈欲燼之時 菩薩度生尤急 則昔現比丘 今現宰官 昔現拄杖鉢囊 今現婬坊酒肆 正華嚴事事無礙法界耳 或者以善公血書之事 當之誤矣 雖然塵刹無盡 衆生無盡 寫經無盡 而此假室以終卷者亦無盡

至人; 至極之人 指無心道人 法華經玄贊要集七 言至人者 卽至極之人 名爲至人 四果及十地菩薩 但名聖人 唯我世尊 名至人也 禪林寶訓音義 至人 行到之人 又聖人也

鉢囊; 又作鉢袋 鉢絡 絡囊 盛裝鉢盂(應量器) 以便於攜行之囊袋 四分律五十二 手捉鉢 難護持 佛言 聽作鉢囊盛 不繫囊口 鉢出 佛言 應繩繫 手捉鉢囊 難護持 佛言 應作帶絡肩

婬坊; 遊廓也 集韻 婬 通作淫

 

찬왈 연지본사(蓮池本師)가 송운(頌云) 지인(至人)은 자기가 없고/ 묘응(妙應)은 이에() 원만(圓滿; )하다/ 일경(一鏡)이 허명(虗明)하니/ 만상(萬象)이 마침내() 나타난다. 이로써 아나니 송문헌(宋文憲; 宋濂이니 송렴의 시호가 文憲)은 참으로 불가측(不可測)한 지위(地位) 중의 사람이다. ()이 바야흐로 타지(墮地; 출생)할 때 어머니의 꿈에 이승(異僧)이 화엄을 수사(手寫)하여 가로되 나는 곧 영명연수(永明延壽)입니다. 원컨대 일실(一室)을 빌려() 차권(此卷)을 마치게 하십시오. (; 한숨쉬다), 어찌 참으로 지필화묵(䑛筆和墨; 붓을 핥고 먹을 탐)한 연후에 이를 일러 사경(寫經)이라 하겠는가. 대개 영명(永明)이 불타의 심인(心印)을 전수(傳受; )한 이후에 일생토록 화엄행(華嚴行)을 행했으며 잔등(殘燈)이 타다가 남으려고(欲燼) 할 때 보살이 도생(度生; 衆生濟度)이 더욱() 급해 곧 옛적에 비구(比丘)를 나타내었고 여금엔 재관(宰官)을 나타내었으며 옛적엔 주장(拄杖)과 발낭(鉢囊)을 나타내었고 여금엔 음방(婬坊)과 주사(酒肆)를 나타내었으니 바로() 화엄의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일 뿐이다. 혹자(或者)는 선공(善公; 未詳)의 혈서지사(血書之事)라 하거니와 마땅히 오류이다. 비록 그러하여 진찰(塵刹)이 무진(無盡)하고 중생이 무진하고 사경(寫經)이 무진하고 이 가실(假室)하여 종권(終卷)하는 것도 또한 무진하다.

至人; 지극한 사람. 무심도인을 가리킴. 법화경현찬요집7. 말한 지인(至人)이란 것은 곧 지극한 사람을 이름해 지인이다. 4() 및 십지보살은 다만 이름이 성인이며 오직 우리의 세존이라야 이름이 지인이다. 선림보훈음의. 지인(至人) 행하여 이른 사람이다. 또 성인이다.

鉢囊; 또 발대(鉢袋)ㆍ발락(鉢絡)ㆍ낙낭(絡囊)으로 지음. 발우(應量器)를 성장(盛裝; 담다)하여 가지고 다니기에 편리한 낭대(囊袋; 주머니). 사분율52. 손으로 발우를 가지매 호지(護持)하기 어려웠다. 붙타가 말씀했다. 발낭(鉢囊)을 만들어 담는 것을 청허한다. 발낭의 입구를 묶지 않자 발우가 튀어나왔다. 불타가 말씀했다. 응당 끈으로 묶고 손으로 발낭을 잡아라. 호지하기 어려웠다. 불타가 말씀하셨다. 응당 대()를 만들어 어깨에 두르라.

婬坊; 유곽(遊廓). 집운 음() ()으로 지음과 통한다.

 

靑蓮居士對

 

청련거사가 대(; 對照)하다.

 

居士分燈錄下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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