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호야록상/나호야록하

나호야록하(羅湖野錄下) 불혜천(佛慧泉; 法泉)

태화당 2025. 11. 19. 08:39

羅湖野錄下

宋 江西沙門 曉瑩 

 

蔣山佛慧泉禪師 叢林謂之泉萬卷 紹聖元年 東坡居士有嶺外之行 舟次金陵 阻風江滸 旣迎其至 從容語道 東坡遂問曰 如何是智海之燈 泉遽對以偈曰 指出明明是甚麽 擧頭鷂子穿雲過 從來這盌最希奇 解問燈人能幾箇 東坡於是欣然 以詩紀其事曰 今日江頭天色惡 砲車雲起風欲作 獨望鍾山喚寶公 林間白塔如孤鶴 寶公骨冷喚不譍 却有老泉來喚人 電眸虎齒霹靂舌 爲余吹散千峰雲 南來萬里亦何事 一酌曹谿知水味 佗年若𦘕蔣山圖 仍作泉公喚居士 泉復說偈送行曰 脚下曹谿去路通 登堂無復問幡風 好將鍾阜臨岐句 說似當年踏碓翁 噫 東坡平生夷險一致 非與憂患爭者 不然 正當放浪嶺海之時 豈能問智海燈耶 泉奮霹靂舌 爲吹散千峰之雲 在東坡不爲無得也

佛慧泉; 法泉 宋代雲門宗僧 隨州(湖北隨縣南)人 俗姓時 自幼才敏 依龍居山智門院之信玘出家 受具足戒後 參雲居曉舜(雲門下四世) 竝嗣其法 初住大明寺 次住千頃 雲居 南明 蔣山 又奉詔住於大相國寺智海禪院 諡號佛慧禪師 又以師一生遍覽群籍 所讀之書無以計量 故世人多美稱爲泉萬卷 [證道歌事實一 續燈錄十一 釋氏稽古略四 續傳燈錄十一]

嶺外; 指五嶺山脈以南地區 範圍涵蓋今廣東廣西

舟次; 一指船只停泊的場所 卽碼頭 二指行船途中或船上 此指二

砲車; 同炮車 炮車一般指炮車街道 炮車街道 江蘇省邳州市下轄街道 [百度百科]

寶公; 寶誌(418-514) 南朝僧 又作寶志 保誌 世稱寶公 志公 誌公和尙 金城(陝西南鄭 或江蘇句容)人 俗姓朱 年少出家 師事道林寺僧儉 修習禪業 劉宋泰始年間(466-471) 往來於都邑 居無定所 時或賦詩 其言每似讖記 四民遂爭就問福禍 齊武帝以其惑衆 投之於獄 然日日見師遊行於市里 乃往獄中檢視 卻見師猶在獄中 帝聞之 乃迎入華林園供養 禁其出入 而師不爲所拘 仍常遊訪龍光 罽賓 興皇 淨名等諸寺 至梁武帝建國 始解其禁 師每與帝長談 所言皆經論義 師於天監十三年十二月示寂 壽九十六 敕葬鍾山獨龍阜 於墓側立開善寺 諡號廣濟大師 後代續有追贈 如妙覺大師 道林眞覺菩薩 道林眞覺大師 慈應惠感大師 普濟聖師菩薩 一際眞密禪師等號 師嘗爲學者述文字釋訓三十卷 十四科頌十四首 十二時頌十二首 大乘讚十首等 [梁高僧傳十 佛祖統紀三十六 同三十七 佛祖歷代通載十 寶華山志七誌公法師墓誌銘 神僧傳四]

曹谿; 曹溪 位於韶州(今廣東曲江縣東南)之河 發源於狗耳嶺 西流與溱水合 以經曹侯塚故 又稱曹侯溪 梁天監元年(502) 天竺婆羅門三藏智藥 到曹溪口 飮其水而知此源爲勝地 乃勸村人建寺 復因其地似西國之寶林山 故稱寶林寺 智藥預言 一七年後 有肉身菩薩 於此開演無上法門 得道者如林 至唐儀鳳二年(677)春 六祖慧能從弘忍得法後 從印宗剃髮 受具足戒而歸寶林寺 大弘法化 人稱曹溪法門 指六祖慧能 慧能以曹溪寶林寺爲中心 開展敎化活動 世人尊稱爲曹溪古佛 曹溪高祖

幡風; 祖庭事苑四 風幡競辨 老盧自傳衣之後 至儀鳳(676- 678)初 屆南海 遇印宗法師於法性寺講涅槃 盧寓止廊廡間 暮夜 風颺刹幡 聞二僧對論 一云風動 一云幡動 往復醻對 曾未契理 盧曰 可容俗士預高論否 曰 願聞子說 曰 不是風動 不是幡動 仁者心動 印宗竊聆此語 悚然異之

鍾阜; 誌公示寂後 敕葬鍾山獨龍阜

踏碓翁; 六祖慧能在湖北黃梅山五祖弘忍法會中 踏碓舂穀 故稱

夷險; 夷 坦而平也 險 峻而不平也

嶺海; 指兩廣地區 其地北倚五嶺 南臨南海 故名

 

장산(蔣山) 불혜천(佛慧泉; 法泉) 선사는 총림에서 그()를 일러 천만권(泉萬卷)이라 한다. 소성(紹聖) 원년(元年; 1094) 동파거사(東坡居士; 蘇軾)가 영외지행(嶺外之行)이 있었다. 금릉(金陵)의 주차(舟次)에 강호(江滸; 강변)의 바람에 막혔고() 이미 그()의 이름()을 영접(迎接; )하자 종용(從容)히 도를 말했다(語道). 동파가 드디어 문왈(問曰) 무엇이 이 지해(智海)의 등()입니까. ()이 급히() 게로써 대답해 가로되 명명(明明)을 지출(指出)하니 이 무엇인가(是甚麽)/ 거두(擧頭)하니 요자(鷂子)가 구름을 뚫고 지나간다/ 종래로 저완(這盌; 이 사발)이 가장 희기(希奇)하나니/ ()을 물을 줄 아는() 사람이 능히 몇 개이던가. 동파가 이에 흔연(欣然)하였고 시()로써 그 일을 적어() 가로되 금일 강두(江頭; 강변)에 천색(天色)이 사나운데()/ 포차(砲車)에 구름이 일어나고 바람이 행하려고(欲作) 한다/ 홀로 종산(鍾山; 蔣山)을 바라보며 보공(寶公)을 부르니/ 임간(林間)의 백탑(白塔)이 고학(孤鶴)과 같다. 보공은 뼈가 차가워 불러도 응(; 하다. 대답하다)하지 않고/ 도리어 노천(老泉)이 있어, 와서 사람을 부른다/ 전모(電眸; 번개의 눈), 호치(虎齒), 벽력설(霹靂舌)/ ()를 위해 천봉(千峰)의 구름을 취산(吹散)했다. 만 리 남쪽에서 왔음은 또한 무슨 일인가/ 조계(曹谿)를 일작(一酌)하니 물맛을 알겠다/ 타년(佗年; 他年)에 만약 장산도(蔣山圖)를 그린다면/ 그대로() 천공(泉公)이 거사(居士)를 부름을 지으리라(). ()이 다시 설게(說偈)하여 송행(送行; 배웅하다)해 가로되 각하(脚下)가 조계(曹谿)라 거로(去路)가 통하나니/ 등당(登堂)하여 다시 번풍(幡風; 깃발과 바람)을 물음이 없다/ 좋이() 종부(鍾阜)의 임기구(臨岐句)를 가지고/ 당년(當年)의 답대옹(踏碓翁)에게 설해 준다(說似). (), 동파는 평생에 이험(夷險)이 일치(一致)해 우환(憂患)과 더불어 다투는 자가 아니었다. 그렇지 않다면 바로() 영해(嶺海)를 방랑(放浪)할 때에 당해 어찌 능히 지해등(智海燈)을 물었겠는가. ()이 벽력설(霹靂舌)을 떨쳐() 천봉지운(千峰之雲)을 취산(吹散)했으니 동파에게 있어선 무득(無得)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佛慧泉; 법천(法泉)이니 송대 운문종승. 수주(호북 수현 남쪽) 사람이며 속성은 시(). 어릴 적부터 재주가 민첩했음. 용거산 지문원의 신기(信玘)에게 의지해 출가했으며 구족계를 받은 후 운거효순(雲居曉舜; 운문하 4)을 참알(參謁)하고 아울러 그의 법을 이었음. 처음엔 대명사(大明寺)에 주()했고 다음에 천경(千頃)ㆍ운거(雲居)ㆍ남명(南明)ㆍ장산(蔣山)에 주()했으며 또 조서(詔書)를 받들어 대상국사(大相國寺) 지해선원(智海禪院)에 주()했음. 시호는 불혜선사(佛慧禪師). 또 스님이 일생 동안 군적(群籍)을 편람(遍覽)하면서 읽은 바의 서적을 계량(計量)하지 못하는지라 고로 세인이 많이 미칭(美稱)하여 천만권(泉萬卷)이라 했음 [증도가사실1. 속등록11. 석씨계고략4. 속전등록11].

嶺外; 오령산맥(五嶺山脈) 이남 지구를 가리킴. 범위는 지금의 광동ㆍ광서를 함개(涵蓋; 包含).

舟次; 1. 배가 다만 정박(停泊)하는 장소를 가리킴. 곧 마두(碼頭; 부두. 선창). 2. 행선도중(行船途中) 혹 선상(船上)을 가리킴. 여기에선 2를 가리킴.

砲車; 포차(炮車)와 같음. 포차는 일반으로 포차가도(炮車街道)를 가리킴. 포차가도는 강소성 비주시(邳州市) 하할가도(下轄街道) [백도백과].

寶公; 보지(寶誌; 418-514)니 남조승(南朝僧). 또 보지(寶志)ㆍ보지(保誌)로 지음. 세칭이 보공(寶公)ㆍ지공(志公)ㆍ지공화상(誌公和尙). 금성(섬서 남정 혹 강소 구용) 사람이며 속성은 주(). 연소할 적에 출가하여 도림사 승검(僧儉)을 사사(師事)했고 선업(禪業)을 수습(修習)했음. 유송(劉宋) 태시년 간(466-471) 도읍에 왕래하며 거처에 정한 곳이 없었음. 때로 혹 시를 읊었는데 그 말이 매번 참기(讖記)와 같았으며 사민(四民; )이 드디어 다투며 문으로 나아가 복화(福禍)를 물었음. 제무제(齊武帝)가 그것을 혹중(惑衆; 무리를 惑亂)이라 하여 뇌옥(牢獄) 에 투옥(投獄)시켰음. 그러나 날마다 시리(市里)에 유행하는 스님을 본지라 이에 뇌옥 속에 가서 검시(檢視)하였는데 도리어 스님이 아직 옥 속에 있음을 보았음. ()가 이를 듣고 드디어 화림원으로 영입해 공양하고 그의 출입을 금지시켰으나 스님은 구애되는 바가 되지 않고 그대로 늘 용광ㆍ계빈ㆍ흥황ㆍ정명 등 여러 사원을 유방(遊訪)했음. 양무제가 건국함에 이르러 비로소 그 금지가 풀렸음. 스님이 매번 무제와 길게 얘기했는데 말하는 바가 모두 경론의 뜻이었음. 스님이 천감 1312월에 시적했는데 나이는 96이며 칙령으로 종산(鍾山) 독룡부(獨龍阜)에 장사 지내고 묘 곁에 개선사를 세웠음. 시호는 광제대사. 후대에 이어서 추증(追贈)이 있었으니 묘각대사ㆍ도림진각보살ㆍ도림진각대사ㆍ자응혜감대사ㆍ보제성사보살ㆍ일제진밀선사 등과 같은 호임. 스님이 일찍이 학자를 위해 문자석훈(文字釋訓) 30권ㆍ14과송 14수ㆍ십이시송 12수ㆍ대승찬 10수 등을 서술했음 [양고승전10. 불조통기36, 37. 불조역대통재10. 보화산지7지공법사묘지명. 신승전4].

曹谿; 조계(曹溪)와 같음. 소주(韶州; 지금의 광동 曲江縣 동남)의 강하(江河)에 위치함. 구이령(狗耳嶺)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 진수(溱水)와 합함. 조후총(曹侯塚)을 경유하는 연고로써 또 호칭이 조후계(曹侯溪). () 천감원년(天監元年; 502) 천축 바라문삼장(婆羅門三藏)인 지약(智藥)이 조계의 입구에 이르러 그 물을 마시고는 이 근원이 승지(勝地)가 됨을 알았음. 이에 촌인(村人)에게 권해 사원을 세우게 하고 다시 그 땅이 서국(西國)의 보림산(寶林山)과 흡사하다 하여 고로 보림사(寶林寺)로 호칭했음. 지약이 예언해 말하되 170년 후 육신보살(肉身菩薩)이 있어 여기에서 무상법문(無上法門)을 개연(開演)할 것이며 득도(得道)하는 자가 숲과 같으리라. () 의봉2(儀鳳二年; 677) 봄에 이르자 6조 혜능(慧能)이 홍인(弘忍)을 좇아 법을 얻은 후 인종(印宗)을 좇아 머리를 깎고 구족계를 받고는 보림사(寶林寺)로 돌아가 법화(法化)를 크게 홍포(弘布)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조계법문(曹溪法門)이라 일컬음. 6조 혜능(慧能)을 가리킴. 혜능이 조계 보림사(寶林寺)를 중심으로 삼아 교화활동을 개전(開展)하였으므로 세인이 존칭하여 조계고불(曹溪古佛)ㆍ조계고조(曹溪高祖)라 함.

幡風; 조정사원4. 풍번경변(風幡競辨) 노로(老盧; 慧能盧氏)가 옷을 전수한 후로부터 의봉(儀鳳; 676-678) 초에 이르러 남해(南海)에 이르렀는데 인종법사(印宗法師)가 법성사(法性寺)에서 열반경을 강설함을 만났다. ()가 낭무(廊廡; 은 곁채 랑. 행랑 랑. 는 문간방 무. 正殿에 부속된 건물) 사이에 우지(寓止; . 곧 거처)했는데 늦은 밤에 바람이 찰간(刹竿)의 깃발을 날렸다. 2()의 대론(對論)을 들었는데 하나는 이르되 바람의 움직임이라 했고 하나는 이르되 깃발의 움직임이라 했다. 왕복하며 수대(醻對; 와 같음. 應對할 수. 곧 응대)하면서 일찍이 이치에 계합(契合)치 못했다. ()가 가로되 가히 속사(俗士)가 고론(高論)에 끼어듦을 용서하겠습니까. 가로되 자네()의 설함을 듣기를 원하네. 가로되 이 바람의 움직임이 아니며 이 깃발의 움직임이 아니라 인자(仁者; 상대방의 경칭)의 마음이 움직임입니다. 인종(印宗)이 가만히 이 말을 듣고 송연(悚然; 은 두려워할 송. 悚懼할 송)하며 그를 이상히 여겼다.

鍾阜; 지공(誌公)이 시적한 후 종산(鍾山) 독룡부(獨龍阜)에 칙장(敕葬)했음.

踏碓翁; 6조 혜능이 호북 황매산 5조 홍인의 법회 가운데 있으면서 디딜방아를 밟아 곡식을 찧었던지라 고로 일컬음.

夷險; ()는 평탄하고 평평함이며 험()은 험준하면서 평평하지 않음임 [선림보훈음의].

嶺海; 양광(兩廣; 廣東廣西) 지구(地區)를 가리킴. 그 땅은 북으로 오령(五嶺)에 기대었고 남으로 남해에 임한지라 고로 이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