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호야록상/나호야록하

나호야록하(羅湖野錄下) 개선겸(開善謙; 道謙)

태화당 2025. 11. 21. 07:39

建州開善謙禪師 平居不倦誨人 而形於尺素 尤爲曲折 有曰 時光易過 且緊緊做工夫 別無工夫 但放下便是 只將心識上所有底一時放下 此是眞正徑截工夫 若別有工夫 盡是癡狂外邊走 山僧尋常道 行住坐臥決定不是 見聞覺知決定不是 思量分別決定不是 語言問答決定不是 試絶却此四箇路頭看 若不絶 決定不悟此四箇路頭 若絶 僧問趙州 狗子還有佛性也無 趙州云 無 如何是佛 雲門道 乾屎橛 管取呵呵大笑 謙之言如雲廓天布 以授學者 與夫浮詞濫說 何啻天冠地屨 然福不逮慧 出世未幾而卒 於謙雖無恨 惜乎法門不幸耳

時光; 時節光陰 卽時間 時候

山僧; 猶云山野僧 謙辭也

佛性; 佛者覺悟也 一切衆生皆有覺悟之性 名爲佛性 性者不改之義也 通因果而不改自體是云性 涅槃經二十七 一切衆生悉有佛性 如來常住無有變易 涅槃經二十八 欲見佛性 應當觀察時節形色

管取; 包管 肯定 取 後綴

天冠地屨; 比喻雙方相差極大

 

건주(建州; 지금의 福建省 建甌) 개선겸(開善謙; 道謙) 선사는 평거(平居; 평소. 평일)에 회인(誨人)에 게으르지 않았고 척소(尺素; 書信)에 형상(形相; )하면 더욱() 곡절(曲折; 彎曲하고 복잡한 것)했다. 말함이 있었다(有曰). 시광(時光; 時間)이 쉽게 지나가니 다만() 긴긴(緊緊)히 공부를 지어라(做工夫). 달리 공부가 없나니 단지 방하(放下)함이 바로 이것이다. 다만 심식상(心識上; 은 방면을 표시)의 소유(所有)를 가져다 일시에 방하할지니 이것이 이 진정(眞正)한 경절(徑截)의 공부다. 만약 달리 공부가 있다면 모두 이는 치광(癡狂)하여 외변(外邊)으로 달림이다. 산승(山僧)이 심상(尋常)에 말하되 행주좌와(行住坐臥)는 결정코 이것()이 아니며 견문각지(見聞覺知)는 결정코 이것이 아니며 사량분별(思量分別)은 결정코 이것이 아니며 어언문답(語言問答)은 결정코 이것이 아니다. 시험 삼아 이 4개 노두(路頭; 는 조사)를 끊어버리고(絶却) 보아라. 만약 끊지 못한다면 결정코 이 4개 노두를 깨치지 못하거니와 만약 끊는다면, 중이 조주(趙州)에게 묻되 구자(狗子; . 는 조사)는 도리어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또는 없습니까. 조주가 이르되 없다(). 무엇이 이 부처입니까. 운문(雲門)이 말하되 건시궐(乾屎橛)이다. 하하대소(呵呵大笑)를 관취(管取)하리라. ()의 말은 운곽천포(雲廓天布)와 같이 학자에게 수여(授與)했으니 여부(與夫; 더불어. 는 조사) 부사남설(浮詞濫說)과 어찌 천관지구(天冠地屨)일 뿐()이겠는가. 그러나 복()이 혜()에 미치지() 못해 출세한 지 오래지 않아(未幾) ()했으니 겸()에겐 비록 한()이 없다 하더라도 애석하게도(惜乎) 법문(法門)엔 불행(不幸)일 따름이다().

時光; 시절광음. 곧 시간. 시후(時候).

山僧; 산야승(山野僧)이라고 이름과 같음. 겸사임.

佛性; ()이란 것은 각오(覺悟). 일체중생이 모두 각오의 성이 있음을 이름해 불성임. ()이란 것은 불개(不改)의 뜻이니 인과에 통하되 자체를 고치지 않나니 이를 이르되 성임. 열반경27.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으며 여래는 상주하여 변역(變易)이 있지 않다. 열반경28. 불성(佛性)을 보고자 한다면 응당 시절의 형색을 관찰하라.

管取; 포관(包管; 보증하다. 보장하다). 긍정. 취는 후철.

天冠地屨; 쌍방의 상차(相差)가 극대(極大)함에 비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