建州開善謙禪師 平居不倦誨人 而形於尺素 尤爲曲折 有曰 時光易過 且緊緊做工夫 別無工夫 但放下便是 只將心識上所有底一時放下 此是眞正徑截工夫 若別有工夫 盡是癡狂外邊走 山僧尋常道 行住坐臥決定不是 見聞覺知決定不是 思量分別決定不是 語言問答決定不是 試絶却此四箇路頭看 若不絶 決定不悟此四箇路頭 若絶 僧問趙州 狗子還有佛性也無 趙州云 無 如何是佛 雲門道 乾屎橛 管取呵呵大笑 謙之言如雲廓天布 以授學者 與夫浮詞濫說 何啻天冠地屨 然福不逮慧 出世未幾而卒 於謙雖無恨 惜乎法門不幸耳
●時光; 時節光陰 卽時間 時候
●山僧; 猶云山野僧 謙辭也
●佛性; 佛者覺悟也 一切衆生皆有覺悟之性 名爲佛性 性者不改之義也 通因果而不改自體是云性 ▲涅槃經二十七 一切衆生悉有佛性 如來常住無有變易 ▲涅槃經二十八 欲見佛性 應當觀察時節形色
●管取; 包管 肯定 取 後綴
●天冠地屨; 比喻雙方相差極大
건주(建州; 지금의 福建省 建甌) 개선겸(開善謙; 道謙) 선사는 평거(平居; 평소. 평일)에 회인(誨人)에 게으르지 않았고 척소(尺素; 書信)에 형상(形相; 形)하면 더욱(尤) 곡절(曲折; 彎曲하고 복잡한 것)했다. 말함이 있었다(有曰). 시광(時光; 時間)이 쉽게 지나가니 다만(且) 긴긴(緊緊)히 공부를 지어라(做工夫). 달리 공부가 없나니 단지 방하(放下)함이 바로 이것이다. 다만 심식상(心識上; 上은 방면을 표시)의 소유(所有)를 가져다 일시에 방하할지니 이것이 이 진정(眞正)한 경절(徑截)의 공부다. 만약 달리 공부가 있다면 모두 이는 치광(癡狂)하여 외변(外邊)으로 달림이다. 산승(山僧)이 심상(尋常)에 말하되 행주좌와(行住坐臥)는 결정코 이것(是)이 아니며 견문각지(見聞覺知)는 결정코 이것이 아니며 사량분별(思量分別)은 결정코 이것이 아니며 어언문답(語言問答)은 결정코 이것이 아니다. 시험 삼아 이 4개 노두(路頭; 頭는 조사)를 끊어버리고(絶却) 보아라. 만약 끊지 못한다면 결정코 이 4개 노두를 깨치지 못하거니와 만약 끊는다면, 중이 조주(趙州)에게 묻되 구자(狗子; 개. 子는 조사)는 도리어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또는 없습니까. 조주가 이르되 없다(無). 무엇이 이 부처입니까. 운문(雲門)이 말하되 건시궐(乾屎橛)이다. 하하대소(呵呵大笑)를 관취(管取)하리라. 겸(謙)의 말은 운곽천포(雲廓天布)와 같이 학자에게 수여(授與)했으니 여부(與夫; 더불어. 夫는 조사) 부사남설(浮詞濫說)과 어찌 천관지구(天冠地屨)일 뿐(啻)이겠는가. 그러나 복(福)이 혜(慧)에 미치지(逮) 못해 출세한 지 오래지 않아(未幾) 졸(卒)했으니 겸(謙)에겐 비록 한(恨)이 없다 하더라도 애석하게도(惜乎) 법문(法門)엔 불행(不幸)일 따름이다(耳).
●時光; 시절광음. 곧 시간. 시후(時候).
●山僧; 산야승(山野僧)이라고 이름과 같음. 겸사임.
●佛性; 불(佛)이란 것은 각오(覺悟)임. 일체중생이 모두 각오의 성이 있음을 이름해 불성임. 성(性)이란 것은 불개(不改)의 뜻이니 인과에 통하되 자체를 고치지 않나니 이를 이르되 성임. ▲열반경27.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으며 여래는 상주하여 변역(變易)이 있지 않다. ▲열반경28. 불성(佛性)을 보고자 한다면 응당 시절의 형색을 관찰하라.
●管取; 포관(包管; 보증하다. 보장하다). 긍정. 취는 후철.
●天冠地屨; 쌍방의 상차(相差)가 극대(極大)함에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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