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호야록상/나호야록하

나호야록하(羅湖野錄下) 지붕(智朋) 선사

태화당 2025. 11. 30. 09:40

明州智朋禪師 初爲寶峰持鉢 至焦山 時方丈成枯木照闡提俱嗣芙蓉楷公 先後得法 未甞相識 成問朋曰 寶峰有何言句 朋卽呈自題肖像曰 雨洗淡紅桃萼嫰 風搖淺碧柳絲輕 白雲影裏怪石露 流水光中枯木春 你是何人 成偁賞之曰 今日方知寶峰親見先師來 又指以問朋曰 汝會麽 朋曰 不會 成曰 汝記得法燈擬寒山否 朋遂誦 至誰人知此意 令我憶南泉 於憶字處 成遽以手掩朋口曰 住 住 朋豁然有省 朋後出世衡州花藥 爲照之嗣 尋遷婺州天寧 先是 崇寧二年 詔州郡建禪苑 以萬壽配紀元爲額 于時有致法門興衰之慶於妙湛禪師 妙湛謝之曰 乃今而後 安得明眼尊宿三百六十員布於天下耶 第恐法門衰由是矣 至政和元年 改崇寧爲天寧 朋之住天寧 在紹興七年 陳僑寓混殽於有司 遂奉聖旨 改報恩廣孝 得專一追崇指揮 逮十五年 易廣爲光 蓋事權輿於朋矣 故錄朋能推廣聖孝於無垠 而併記妙湛之言 妙湛住雪峰而終

明州; 浙江省寧波之古名

智朋; 宋代曹洞宗僧 四明(浙江寧波)黃氏 初依寶峰惟照 經年未省 乃至焦山謁枯木法成 言下契悟 後嗣寶峰惟照 紹興(1131-1162)初 出住衡州華藥 遷婺之天寧 後住建康淸凉 晩退居明州瑞巖 未幾而寂 [五燈會元十四 普燈錄九]

焦山; 爲江蘇鎭江之東 孤峙在長江中之小島嶼 與南岸象山對峙 又稱譙山 樵山 浮玉山 銀島 傳焦山之名 始自後漢處士焦先 三詔不應 隱居於此 後人建焦公祠以祀之 山麓有定慧寺 爲江南著名古刹之一 與福州鼓山寺 同爲近世中國曹洞禪之主要道場 [古今圖書集成山川典一四 中國佛敎史下]

成枯木; 法成(1071-1128) 宋代曹洞宗僧 秀州(浙江嘉興)人 俗姓潘 年三十三時 至隨州(位於湖北)大洪山參芙蓉道楷 得嗣其法 以好枯木禪 世人遂以枯木稱之 於汝州(河南臨汝)香山開堂 次住淨因禪院 後住潭州大潙寶林等名刹 建炎二年二月示寂 壽五十八 臘四十一 諡號普證大師 [統要續集二十二 聯燈會要二十九 五燈會元十四 五燈全書三十]

芙蓉楷; 道楷(1043-1118) 宋代曹洞宗僧 沂州沂水(山東沂水)人 俗姓崔 幼隱伊陽山中 學辟穀之術 後悟其非 棄而習佛 於京師術臺寺出家 後參投子義靑得法 元豐五年(1082)弘法於沂州仙洞山 竝先後住持洛陽之招提 郢州之大陽山 隨州之大洪山崇寧保壽禪院 東京天寧寺等刹 大揚洞上之風 從者如雲 崇寧三年(1104) 徽宗聞其名 召住京師十方淨因禪院 賜紫衣及定照禪師之號 師以衣非佛制 卻而不受 帝怒 黥而流放淄州 師終不屈 後帝悟 聽其自便 師遂於芙蓉湖上建寺 大揚禪風 學者風從 政和七年(1117) 徽宗賜以華嚴禪寺一額 後又賜名興化寺 於翌年五月入寂 壽七十六 世稱芙蓉道楷 法嗣有丹霞子淳 淨因法成等 有芙蓉道楷禪師語要一卷(又作定照禪師語要) [禪林僧寶傳十七 聯燈會要二十八 湖北金石志十]

照闡提; 惟照(1084-1128) 宋代曹洞宗僧 字闡提 簡州(四川簡陽西)李氏 年十九 趨成都 師鹿苑淸泰 登具後 謁芙蓉道楷於大洪得法 大觀(1107-1110)中 芙蓉遠謫沂水 照馳至 侍左右 智證成就 出領招提 遷甘露 更遷三祖 宣和四年(1122) 詔補廬山圓通 復居泐潭寶峰 [五燈會元十四 傳燈錄十二]

; 發笑語 或當師家敎化學人之際 於某些難以表達之事物 皆說此字 略具嘲笑之意味

衡州; 今湖南省衡陽縣 北有五嶽之一衡山 隣接湘水瀟水 有大慧宗杲所住鐵岡寺 開福寺 龐蘊居士所住龐山寺等

妙湛; 宋代雲門宗僧 號思慧 錢塘(浙江杭州)兪氏 法雲善本法嗣 住福州雪峰 [普燈錄八 五燈會元十六]

混殽; 亦作混淆 混雜 錯亂 界限模糊

聖旨; 皇帝的下命 或發表的言論 聖 對帝王的尊稱

追崇; 一對死者追加封號 二指追求推崇 表示對某人或某事物的極度崇拜和尊敬

權輿; 始也 造衡自權始 造車自輿始也

 

명주(明州) 지붕(智朋) 선사가 처음 보봉(寶峰; 寶峰惟照)을 위해 지발(持鉢; 托鉢)했다가 초산(焦山)에 이르렀다. 때에 방장(方丈) 성고목(成枯木; 法成)은 천제조(照闡提; 惟照)와 더불어 함께 부용해공(芙蓉楷; 道楷)을 이었고 선후로 득법했지만 일찍이 서로 알지 못했다. ()이 붕()에게 물어 가로되 보봉(寶峰)이 어떤 언구가 있던가. 붕이 곧 조(; 惟照)가 초상(肖像)에 자제(自題)한 것을 보여() 가로되 비가 담홍(淡紅)을 씻어 도악(桃萼; 도화의 꽃받침)이 고운데()/ 바람이 잔벽(淺碧)을 흔들어() 유사(柳絲; 버들가지)가 가볍다/ 백운의 영리(影裏)에 괴석(怪石)이 드러나고()/ 유수(流水)의 광중(光中)에 고목(枯木)의 봄이다. (). 너는 이 어떤 사람인가. ()이 그것을 칭상(偁賞; 稱賞과 같음. 贊美, 稱贊)해 가로되 금일 비로소 보봉(寶峰)이 선사(先師)를 친견하고 왔는 줄 알겠다. 또 가리키며 붕()에게 물어 가로되 너는 알겠는가(會麽). 붕왈(朋曰) 알지 못합니다. 성왈(成曰) 네가, 법등(法燈; 淸涼泰欽)이 한산(寒山; 寒山詩)을 본떤() 것을 기득(記得)하느냐. 붕이 드디어 외워(), 어떤 사람(誰人)이 이 뜻을 아는가, 나로 하여금 남천(南泉)을 추억(追憶; )하게 하네에 이르자 억자(憶字) ()에 성()이 급히 손으로써 붕의 입을 가리고() 가로되 멈춰라, 멈춰라. 붕이 활연(豁然)하여 살핌이 있었다. 붕이 후에 형주(衡州) 화약(花藥)에서 출세했는데 조(; 惟照)의 사()가 되었다. 이윽고 무주(婺州; 지금의 절강성 金華)로 옮겼다. 이에 앞서 숭녕(崇寧) 2(1103) 조칙(詔勅; )으로 주군(州郡)에 선원(禪苑; 禪寺. 禪院)을 건립했고 만수(萬壽)로써 기원(紀元; 紀年開始)에 짝하여() 편액(扁額; )을 삼았다. 우시(于時; 그때. 당시) 묘담선사(妙湛禪師)에게 법문(法門)을 흥쇠(興衰; 쇠한 것을 흥하게 함)함에 이르게() 하는 경사(慶事; )가 있었다. 묘담이 이()를 사양(辭讓; )하며 가로되 내금(乃今; 如今) 이후(而後)에 명안(明眼) 존숙 360()이 천하에 분포(分布; )됨을 어찌() 얻겠는가. 다만() 법문의 쇠유(衰由)가 이것일까 염려스럽다(). 정화(政和) 원년(1111)에 이르러 숭녕(崇寧)을 고쳐 천녕(天寧)이라 했고 붕이 가서() 천녕에 주()했다. 소흥 7(1137)(在紹興七年) 진교우(陳僑寓)가 유사(有司)에 혼효(混殽; 混雜. 錯亂)하여 드디어 성지(聖旨)를 받들어 보은광효(報恩廣孝)로 고쳐 전일(專一)하게 추숭(追崇)하며 지휘(指揮)함을 얻었다. 15(1145)에 이르러() ()을 고쳐 광()이라 했는데 대개 일이 붕()에서 권여(權輿; 시작)했다. 고로 붕이 능히 무은(無垠; 無限)에 성효(聖孝)를 추광(推廣; 밀어 넓힘)했음을 기록하고 묘담의 말을 병기(併記)한다. 묘담은 설봉(雪峰)에 주()하다가 마쳤다.

明州; 절강성 영파의 옛 이름.

智朋; 송대 조동종승. 사명(四明; 절강 영파) 황씨. 처음에 보봉유조(寶峰惟照)에게 의지하며 해를 지냈지만 성찰하지 못했음. 이에 초산(焦山)에 이르러 고목법성(枯木法成)을 알현하여 언하에 계오(契悟)했음. 후에 보봉유조를 이었음. 소흥(1131- 1162) 초 출세해 형주 화약에 주()하다가 무()의 천녕으로 옮겼고 후에 건강 청량에 주()했음. 만년에 명주 서암으로 퇴거했고 얼마 안되어 적()했음 [오등회원14. 보등록9].

焦山; 강소 진강(鎭江)의 동쪽에, 고치(孤峙)하여 장강 중의 작은 도서(島嶼)에 있으며 남안(南岸)의 상산(象山)과 대치(對峙). 또 명칭이 초산(譙山)ㆍ초산(樵山)ㆍ부옥산ㆍ은도(銀島). 전하기를 초산의 명칭은 후한 처사 초선(焦先)3()에 응하지 않고 여기에 은거함으로부터 비롯했음. 후인이 초공사(焦公祠)를 세워 그를 제사 지냈음. 산기슭에 정혜사가 있으니 강남의 저명한 고찰의 하나가 되며 복주 고산사(鼓山寺)와 함께 근세 중국 조동선(曹洞禪)의 주요한 도량이 됨 [고금도서집성산천전104. 중국불교사하].

成枯木; 법성(法成; 1071-1128)이니 송대 조동종승. 수주(절강 가흥) 사람이며 속성은 반. 나이 33 때 수주(호북에 위치함) 대홍산에 이르러 부용도해(芙蓉道楷)를 참하고 그의 법을 이음을 얻었음. 고목선(枯木禪)을 좋아한지라 세인이 드디어 고목으로 그를 호칭했음. 여주(하남 임여) 향산에서 개당했고 다음에 정인선원(淨因禪院)에 주()했으며 후에 담주 대위 보림 등의 명찰에 주()했음. 건염 22월에 시적했고 나이는 58, 납은 41이며 시호는 보증대사 [통요속집22. 연등회요29. 오등회원14. 오등전서30].

芙蓉楷; 도해(道楷; 1043-1118)니 송대 조동종승. 기주 기수(산동 기수) 사람이며 속성은 최. 어릴 적에 이양산 가운데 은거하며 벽곡(辟穀)의 술법을 배웠는데 후에 그 그름을 깨닫고 버리고서 불법을 학습했으며 경사(京師) 술대사에서 출가했음. 후에 투자의청(投子義靑)을 참알해 득법했음. 원풍 5(1082) 기주 선동산에서 홍법했고 아울러 선후(先後)로 낙양의 초제ㆍ영주의 대양산ㆍ수주의 대홍산숭녕보수선원ㆍ동경의 천녕사 등의 사찰에 주지(住持)하면서 동상(洞上)의 종풍을 크게 드날렸으며 따르는 자가 구름과 같았음. 숭녕 3(1104) 휘종이 그의 이름을 듣고 불러서 경사의 시방정인선원에 주()하게 하고 자의(紫衣)와 및 정조선사란 호를 주었으나 스님이 옷이 불제(佛制)가 아니란 까닭으로 돌려주고 받지 않자 제()가 노하여 경(. 刺字할 경이니 얼굴이나 팔뚝의 살을 따고 홈을 내어 먹물로 죄명을 찍어 넣던 벌)하고 치주로 유방(流放; 유배)했으나 스님은 마침내 굽히지 않았으며 뒤에 제()가 깨닫고 그 스스로 편한 대로 함을 청허(聽許. )했음. 스님이 드디어 부용호상(芙蓉湖上)에 절을 세우고 선풍을 크게 드날렸으며 학자가 풍종(風從. 바람처럼 따름)했음. 정화 7(1117) 휘종이 화엄선사(華嚴禪寺)1()을 주었으며 후에 또 흥화사란 이름을 주었음. 다음해 5월에 입적했음. 나이는 76이며 세칭이 부용도해(芙蓉道楷). 법사에 단하자순ㆍ정인법성 등이 있으며 부용도해선사어요(또 정조선사어요로 지음) 1권이 있음 [선림승보전17. 연등회요28. 호북금석지10].

照闡提; 유조(惟照; 1084-1128)니 송대 조동종승. 자는 천제(闡提)며 간주(사천 간양 서) 이씨(李氏). 나이 19에 성도로 달려가 녹원청태를 스승으로 삼았고 등구(登具)한 후 부용도해(芙蓉道楷)를 대홍에서 참알하여 득법했음. 대관(1107-1110) 중 부용이 멀리 기수(沂水)에 폄적(貶謫)되자 유조가 달려가서 이르렀고 좌우에서 시봉하며 지증(智證)을 성취했음. 출세해 초제(招提)를 거느리다가 감로로 옮겼고 다시 삼조로 옮겼음. 선화 4(1122) 조칙으로 여산 원통에 보직되었고 다시 늑담 보봉에 거주했음 [오등회원14. 전등록12].

; 웃음을 발하는 말. 혹 사가가 학인을 교화하는 즈음에 당해서 모사(某些; 몇몇), 표달(表達)하기 어려운 사물에 모두 이 글자를 설함. 조금 조소(嘲笑)의 의미를 갖춤.

衡州; 지금의 호남성 형양현. 북에는 5악의 하나인 형산이 있고 상수(湘水)와 소수(瀟水)에 인접했음. 대혜종고가 거주한 바의 철강사(鐵岡寺)ㆍ개복사(開福寺), 방온거사가 거주한 바의 방산사(龐山寺) 등이 있음.

妙湛; 송대 운문종승. 호는 사혜며 전당(절강 항주) 유씨. 법운선본의 법사며 복주 설봉에 거주했음 [보등록8. 오등회원16].

混殽; 또 혼효(混淆)로 지음. 혼잡. 착란(錯亂). 계한(界限)이 모호(模糊).

聖旨; 황제의 하명이나 혹 발표의 언론. 성은 제왕에 대한 존칭.

追崇; 1. 사자(死者)에 대해 봉호(封號)를 추가(追加). 2. 추구(追求)하며 추숭(推崇)함을 가리킴. 모인(某人) 혹 모() 사물에 대한 극도(極度)의 숭배와 존경을 표시함.

權輿; (). 저울을 만들면 저울대로부터 시작하고 수레를 만들면 수레 바탕으로부터 시작함.